살다 보면 업(業)을 짓는 경우가 있는 듯 하다. 업을 짓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 행동을 변명하는 것이 되겠기에 그렇게 말하지는 않겠다.
지난 2009년 한 약사로부터 짐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약을 지으러 가 알게 된 분이다.

약사인데 약국에는 한약 밖에 없고 가족 관계도 베일에 가려진 분이었다. 역마살이 있다는 말, 무병을 해소하기 위해 떠도는 무녀(약사)라는 말 등이 내가 그 분에 대해 들은 전부이다.

그 분과 친해진 것은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종교, 사상, 문학, 동양 의학 분야의 책들이 나와 그 분을 연결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 분에게서 책 200권(현재 이 책들은 대부분 처분되었다. 방은 한정되었고 새 책을 계속 사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정도를 받았다. 맡아 달라는 물건은 음반(CD, 테이프 등)이었다.

200장 정도의 CD(팝, 가요)였는데 좁은 내 방을 감안하면 공간 잠식 정도가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분은 물건을 곧 찾아가겠다는 말과 달리 몇 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2014년) 선배로부터 LP(클래식) 200 여장과 엠프 시설을 받게 되었다.

이 분은 이사 가게 될 집이 좁아 수용할 수 없는 것들 가운데 불요불급한 것들을 내게 처분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좁은 방이었는데.. 그 약사 분에게 물건을 찾아가라고 연락을 시도했지만 두절 상태였다.

어쩔 수 없어 나는 그 분이 맡아달라고 한 음반들을 폐기처분했다. 그런데 몇 개월이 지나 그 분이 나를 찾아 집으로 왔다.

아니, 이럴 수가.. 분명 연락이 닿지 않아 처분한 것이지만 잘못은 내게 있는 것이었다.

몹시 놀라는 표정으로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등의 말을 되풀이하는 그 분에게 나는 죄송합니다, 클래식 엘피를 드릴까요? 란 말을 했지만 그 분은 아무 말 없이, 조건 없이 내 집을 떠나갔다.

그 일이 있은 지 만 3년이 지났다. 어제 방 정리를 하다가 그 분에게서 받은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고미숙 등 번역 박지원 ‘열하일기‘, 제인 구달의 ‘희망의 이유‘, 김철의 ‘몸의 혁명‘ 등의 책들을 다시 보며 아련한 감회에 젖었다.

당시 음반 꾸러미를 밖에 내놓자 누군가 십 분도 되지 않아 보물이라도 되는 듯 낚아채간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비 내리는 날 내보낸 음반이 생물인 듯 여겨져 미안한 마음이 많이 든다.

그 약사 분은 누군가의 행동이나 성격을 들으면 그 사람의 증상을 참 기막히게 맞혔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분을 무녀 약사라 하는 것인가 보다.

김인호가 쓴 ‘조선의 9급 관원들‘에 ‘기생인지 의사인지 모를 의녀(醫女)‘라는 글이 있다. 조선 시대의 능 관리직인 종 9품의 능참봉(陵參奉) 이야기를 듣고 산 책이다.

태풍이라도 불어 나무가 부러지거나 상하면 처벌을 받았던 능참봉도 그렇고 기생 취급을 받은 의녀도 그렇고 참 고단한 인생들이었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즐거움도 있었을 것이다. ˝하찮으나 존엄한˝ 그 분들의 후예들(비정규직, 계약직 등)로 인해 세상이 굴러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방대 시간 강사(뿐이겠냐만)의 열악함도 돌아보게 된다.

여기저기 어려운 사람들 천지다. 시오마치 코나의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 그래˝가 안 되는 이유‘란 책을 읽어보고 싶다.

저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살을 시도했다는 과로 자살에 관한 여덟 페이지 만화를 트위터에 올려 큰 공감을 받은 사람이다.

이해하고 배워야 할 세상! 다만 그렇게 궁지에 몰리면 회사를 그만 두는 것이 안 된다고 말하면 자살을 용인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전문가의 걱정도 든다. 그러니 그들을 그런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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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한 불교 수행자로부터 ˝경박한 의견에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별로 없다˝는 혹평을 받은 ‘불교가 좋다‘란 책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감명 깊었다거나 감동적이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는데 문제는 논자가 수행자인지 여부이다.

언급한 수행자는 공부가 일정 경지에 오른 성실한 분이고 ‘불교가 좋다‘의 두 저자는 임상심리학자(가와이 하야오), 철학자이자 종교학자(나카자와 신이치)라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 수행자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점이 그런가, 묻고 싶었으나 그냥 흘려버렸다.

지금은 수행자와 수행자 아닌 사람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고 수행자가 수행자가 아닌 사람을 차별적으로 보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제 ‘과학의 불교‘(2017년 5월 출간)란 책을 샀다. 문학박사/ 불교학자인 저자 사사키 시즈카 역시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붓다와 아인슈타인‘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책을 읽으려니 앞서 언급한 수행자의 말이 떠오른다. 그래도 ‘아비달마불교의 과학적 세계관‘이란 부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대승 경전들과는 다른 정확함과 논리성을 선물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수행자의 체험의 결과 편찬된 경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비수행자의 몫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비달마란 부처의 성문(聲聞) 제자들(부처로부터 직접 법문을 배운 제자들)이 부처 사후 스승의 가르침을 어떻게 정확하게 이해, 설명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저술한 책이다.(권오민 지음 ‘아비달마 불교‘ 21 페이지)

아비달마 불교가 수준 높은 진리의 세계를 추구한다면 대승불교는 보다 대중적인 세계를 추구한다.(이정우 글 ‘문명이 바꾼 철학 철학이 바꾼 역사‘ 107 페이지)

아비달마는 북방(한국, 중국 등)에서 심화된 산스크리트 교학체계이고 아비담마는 남방(미얀마, 태국 등)에서 전승된 빨리어 교학체계이다.(각묵 스님 지음 ‘아비담마 길라잡이‘ 1권 36 페이지)

아비 담마/ 달마는 법(法)에 대한 가르침 곧 주석서(註釋書)를 의미한다.

[좌절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보다 진지하게 살아가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사사키 시즈카의 이 서언(序言)이 눈길을 끈다. 나 같은 사람을 두고 한 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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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鄭敾: 1676 - 1759)의 호 겸재(謙齋)는 주역(周易)에서 유래한 겸(謙)괘와 정진(精進), 재계(齋戒) 등을 의미하는 재(齋)를 합한 말이다. 겸과 재를 합해 호로 쓴 사람이니 겸손한 선비라 부르는 것이다.

곤(昆)괘: ☷‘’가 위에 ‘간(艮)괘:☶’ 아래에 있는 괘가 겸괘이다. 정선은 진경 산수화의 개척자이자 완성자라 할 수 있다.

그의 출생 연도는 1676년으로 바흐의 1685년과 비슷하고 사망 연도는 1759년으로 바흐의 1750년과 비슷하다.

물론 바흐보다 9년 먼저 태어났고 9년 늦게 사망했으니 18년을 더 살았다.

내게 ‘왜관(倭館)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이란 책이 있다. 돌아온 문화재 총서의 첫 출간작인 이 책에 겸재정선화첩이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된 사연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겸재정선화첩의 귀환은 1964년 독일에 광부(鑛夫)로 파견되어 갔다가 계약 종료 후 공부를 시작하게 된 유준영이란 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분은 광부 계약(3년) 종료 후 쾰른 대학교 부설 본과 진학 과정인 슈투디인콜레그에 입학한 데 이어 우리나라의 학부 과정에 해당하는 쯔비쉔프뤼풍에도 합격했다.

후에 이화여대 등에서 교수(동양학과)가 된 이 분이 정선의 ‘청풍계도(淸風溪圖)‘와 마주친 것은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쾰른 시립 동아시아 미술박물관 도서실에서 일제 강점기에 출간된 책들을 뒤지던 중이었다.

그 후 이 분은 오스트리아 알프스 북쪽 도나우 강 지류인 암머 호수가에 위치한 분도회(베네딕트회) 오틸리엔 수도원 박물관에서 겸재정선화첩을 발견하고는 숨이 멈추는 듯 했다고 한다.

이 분은 ‘청풍계도(淸風溪圖)’를 보았을 때는 중국이나 일본 수목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거친 붓질에 죽비(竹篦)로 한 대 얻어맞은 듯 했다고 했다.

겸재정선화첩이 어떤 경위로 오틸리엔 수도원에 가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107 페이지)

겸재가 우리 산천, 우리 사람, 우리 의식을, 자화상이라 할 것을 그린 배경에 관심이 간다.

겸재가 활동한 18세기 전반기는 산천 유람을 다녀와 그것을 기록(그림)으로 남기는 문화가 유행한 시대였다.

나는 겸재가 보인(또는 취한) 기법보다 정신(가령 중국 진서晋書에서 유래한 ‘날개가 돋아 시선이 되었음‘을 뜻하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우화정에서 배를 탄다는 뜻의 우화등선羽化登船으로 비튼(?) 패러디 정신!)에 관심이 있다.

[화가의 천분을 타고나지 않은] [대기만성형의 화가](유홍준 지음 ‘명작 순례‘ 62 페이지) 겸재, 그가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 아주 궁금하다.

그리고 그가 알았던 풍류(風流)보다 그가 대기(大器)가 되기까지 치른 노고와 쌓은 내공과 결행한 분투(奮鬪)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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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거리를 걷는데 알라딘 중고 서점 건너편 쪽에서 스마트폰을 구입하면 노트북을 준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42만원 상당의 노트북으로 새 기종의 스마트폰은 석달간 8만여원의 요금제를 의무적으로 유지해야 하고 그 이후에는 5만원대로 월 납입액을 낮출 수 있는 조건으로 제시된 LG V 30이다.

 

설명을 듣고 망설이다가 다음에 오겠다는 말을 하고 매장을 나왔다. 직원은 행사용 노트북의 잔여 수량이 석대 뿐이라는 말을 했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다시 말하면 선택을 하지 못하겠는 것이다.

 

홈쇼핑을 통해 장기 할부 조건으로 출시된 노트북을 사야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거실에나 내 방에 티브이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올해 예년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책을 리뷰하는 데 그쳤다. 그렇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스마트폰 때문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 해 9월 말 스마트폰을 처음 구입했는데 내가 1월부터 그때까지 읽은(리뷰한) 책이 142권이었고 그 이후 3개월간 30권의 책을 더 읽는(리뷰하는) 데 그쳤다. 월 평균 16권을 리뷰하다가 스마트폰 구입 이후 평균 10권을 리뷰하는데 그쳤으니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변화이다.

 

머리가 아픈 것도 지나친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나는 스스로는 스마트폰으로 글을 주로 쓰니 유희도 중독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전철을 타면 알겠지만 승객의 대부분은 스마트폰을 하고 스마트폰 사용자들의 대부분은 인터넷을 한다. 글은 쓰는 경우는 드물다. 물론 리뷰의 수는 많이 준 대신 에세이류의 글은 충분히 썼고 지금도 그러고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라 할 수 있다.

 

리뷰만이 글(의 본령)이고 다른 글은 잡기(雜記)는 아니다. 만일 그렇다고 말한다면 논문만을 인정하는 학계의 글쓰기 풍토 또는 사고 구조를 불합리한 것으로 여기는 내가 이중적 가치를 장착하고 있는 모순의 주체가 되었다 할 수 있다.(내가 학계와 관계를 맺고 있다고 오독하지 않으리라 믿으며 쓰는 글이다.)

 

오늘도 윤동주 시인 탄생 100, 순절(殉絶) 72년을 맞아 나온 '사진으로 읽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읽다가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부분에서 구효서 작가가 윤동주 시인에 대해 말한 부분을 떠올리고 관련 내용(윤동주 시인을 민족 시인으로 한정해서는 안된다는..)을 가지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한 채 책을 덮고 구글로 가 관련어 검색을 시도하는 일탈을 범하고 말았다.

 

리뷰에 반영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부분만 글로 만들어내려는 성급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 보는 것이 맞을 터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리뷰 수가 줄어든 것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으리라 생각한다. 리뷰 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 만큼 읽고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마트폰 구입 초기에 내 모토는 글감을 제때 찾아 글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서 즉 책이 많은 곳 또는 상황에서도 스마트폰으로 글감을 찾았으니 다짐이 의미 없게 된 것이다.

 

스마트폰을 구입한 지난 해 9월 말 이후의 리뷰 외의 글 수를 그 이전과 비교하면 크게 줄지는 않았다. 당연하다. 책을 읽다가 다른 곳으로 가지치기하듯 리뷰가 아닌 글 또는 리뷰에 반영될 것이 아닌 글을 쓰기 때문이다.

 

머리가 아픈 데에는 스마트폰 말고 다른 이유들도 작용했다. 스마트폰 사용은 취침 두 시간 전까지만 하라는 지침도 지키지 않은 지 오래이다. 초심으로 나를 조율할 필요가 있다. 내 친구이고 스승인 책에 대한 열의와 애정을 예전처럼 회복하려면 스마트폰에서 많이 벗어나야 한다. 스마트폰이 아주 섭섭해 하지 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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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나듯 모든 사람들은 냄새나는 진흙을 보면서 오직 연꽃을 보아야 한다. "(미즈노 고겐 지음 '경전의 성립과 전개' 102 페이지)

 

현장(?; 7세기 중엽), 진제(眞諦; 6세기 중엽), 불공(不空; 8세기 중엽) 등과 함께 인도 경전을 한역(漢譯)4대 번역가인 승려 구마라집(Kumarajiva, 鳩摩羅什; 5세기 초)이 한 말이다.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난다는 말을 할 뿐인 우리들에게 냄새나는 진흙에서 오직 연꽃을 보아야 한다는 구마라집의 말(생각)은 미궁(迷宮)에 빠진 테세우스를 인도해준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느껴진다.

 

더러운 진흙에서 연꽃이 피어난다는 말을 하는 데 그치는 것은 대상을 전체 그대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 조각 찢어 이해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고대 중앙 아시아의 오아시스 국가 쿠챠(Kucha)에서 태어난 구마라집(일지 스님 지음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136 페이지)은 어린 시절 한 아라한으로부터 35세에 파계를 하게 될 것이란 괘()를 받은 파란의 인물이다.

 

"이 아들의 용모는 보통이 아니다. 명승성자(名僧聖者)의 상()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만약 35세에 파계하지 않는다면 성자가 되지만 계를 범한다면 다만 법사가 되는 데 그치게 될 것이다."

 

구마라집은 결국 예언된 대로 35세에 파계를 하고 만다. 궁금한 것은 파계가 과연 구마라집의 발목을 잡은 것이었을까?란 것이다.

 

그의 파계로부터 철저한 지계(持戒)의 상좌불교와 번뇌 속에서 깨달음을 열어가는 인간적인 대승불교라는 해석('월정사의 전나무 숲길' 140 페이지)을 이끌어내는 분도 있지만 불교의 문외한인 나에게는 아직은 이해불가의 말이다.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은 참 많다. 구마라집처럼 성공 가도의 변수, 복병은 아주 쉽게는 아니고 흔히 볼 수 있는 사례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의 인생엔 미지수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냐고/ 나는 커다랗게 열려진 황혼의 괄호를/ 바라보면서/ 어쩔 수 없이 꿈꾸는 기분에 잠겨 있었다.]

 

김승희 시인의 '낯선 고향 속으로'의 마지막 연이다. 시인이 한 대학병원에서 창백한 환자복을 입고 죽음이 가까운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를 보고 쓴 시이다.

 

호사(好事)에는 복병(伏兵)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고 저 아이 같은 사례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미지수가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인생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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