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라도 펑펑 내릴 것 같은 세모(歲暮)이다. 저무는 해를 그렇게 보내고 새 해를 맞이할 수 있을까?

무장무장(갈수록 더 많이)이란 말로 수식해야 할 현상이 자주 있었던가?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나러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년(一年)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이렇게 노래한 윤동주 시인의 ‘눈 오는 지도(地圖)‘가 생각난다. 끝간데 없이 눈을 볼 수 밖에 없었던 간도..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는 자연 현상인 눈과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눈이 함께 노래되었다. 눈과 무장무장이란 말을 연결지은 두 시를 무작위로 골라보았다.

첫눈은 무장무장 쌓여서
빈 들녘은 그대 이름으로 숨 죽인다
무장무장 또 흩날리는 저 춤들 뜨거운데
열리지 않는 길들은 가로눕는다
(김은숙 시인의 ‘폭설‘ 전문)

오늘밤에도
마가리 아득한 골짜구니엔
전설처럼 펑펑 쏟아질 것이다..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서
마가리 마을은 축복처럼
샤갈의 마을이 되어서

무장무장 무지한
자작나무 골짜기가 되어서
한정없는 전설을
깊은 일만이천봉 골짜기만큼
무진장 쏟아낼 것이다..
(나병춘 시인의 ‘마가리에 눈이 내리면‘ 부분)

이에 비해 김명리 시인의 ‘적념(寂念)‘은 바람을 무장무장이란 말로 수식한 시여서 눈에 띈다.

바람은 산문(山門)의 헐은 문지방을 또 더듬어가며
얼어붙은 노래,
천형의 구부러진 솔잎사귀 마른 억장 위로
무장무장 불어 쌓이는데(‘적념‘ 부분)

눈이 마음을 포현하기에 좋은 소재이듯 바람도 좋은 소재이다. 눈도 바람도 부정적인 면은 덮고 긍정적인 면을 보자. 서설(瑞雪)이라 하고 서풍(瑞風)이라 하자.

그렇게 2018년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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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만큼 여러 차원에서 논의된 박물관도 드물다.

남의 나라들에서 약탈해온 미술품들로 채워진 박물관이라는 논의(이보아의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

군주의 갤러리에서 공공미술관으로 바뀐 첫 사례라는 논의(‘캐롤 던컨의 ‘미술관이라는 환상‘),
강박증, 히스테리, 멜랑꼴리, 도착증 등이 읽히는 그림들로 채워진 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이라는 논의(백상현의 ‘라깡의 루브르‘),

반드시 보아야 할 관람품들이라는 논의(나카노 교코의 ‘처음 가는 루브르‘),

대표 소장품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훔친 빈첸조 페루지아를 이야기하며 논의를 전개한 경우(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 등등..

당시(1911년) 페루지아는 ‘모나리자‘가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이 말은 지어낸 말은 아닌 듯 하다.)

음악을 간단한 재생 기구로 들을 때와 고급 앰프로 들을 때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나듯 복제 또는 픽셀 형태의 그림을 보다가 실제 박물관에서 그림을 볼 때 생기는 느낌의 차이는 놀라울 것이다.
감동, 뭉클, 환희 등등의 말을 사용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미술사가인 캐롤 던컨은 루브르 박물관의 큐레이터를 지낸 제르망 바쟁과 스웨덴의 작가 고란 쉴트의 미술관론(論)을 소개한다.

제르망 바쟁은 미술관은 시간이 정지된 사원(寺院)이라는 말을 했고 고란 쉴트는 미술관은 삶의 투쟁과 자아에 대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방을 제공하는 초연하고 초시간적이며 고양(高揚)된 명상의 상태를 추구하는 무대라는 말을 했다.(‘미술관이라는 환상‘ 38 페이지)

스탕달 신드롬이란 것이 있다. 거대한 미술관 안에서 너무 큰 놀라움에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서글픈 경험을 하거나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 감탄하다 못해 절망스러워지는 체험을 말한다.(레진 드탕벨 지음 ‘우리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들‘70 페이지)

사원이기도 하지만 스탕달 신드롬을 느끼게 되는 곳이기도 하고 빈첸조 페루지아처럼 기이한 체험을 하는 곳이기도 한 미술관 또는 박물관..

나는 사실 스탕달 신드롬은 과장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스탕달 이후 그와 같은 기이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다.

내게 미술관 또는 박물관은? 나는 미술관 또는 박물관에서 감동, 불편함, 시간 정지의 기이한 느낌, 고양된 명상감 등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탕달 신드롬은 절대 느끼지 않을 것 같고 다만 생각할 수 있는 곳, 느끼는 곳 즉 도서관에 가깝다. 새해에는 다양한 미술관, 박물관 등을 갈 생각이다.

올해 내가 관람한 미술전시 가운데 서울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자율진화 도시전(展)과 교보 아트 스페이스의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시화전(윤동주 시인의 시들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한 프로그램)이 기억에 남는다.

박물관 프로그램 가운데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쇠 - 철 - 강‘과 ‘왕이 사랑한 보물‘이 좋았다.

문학관은 김수영 문학관이, 영화는 ‘매기스 플랜‘(2017년 2월 2일. 시네큐브)이 기억에 남는다.

나에게 2017년은 어느 해보다 희망적이었고 열심히 애썼고 그런 만큼 힘도 많이 든 해였다.

아듀 2017.. 내년을 기약한다. 아쉬움과 기대 속에 2017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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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윤동주의 삶과 문학 이삭문고 3
고운기 지음 / 산하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윤동주 가족들이 평양으로 이주해간 것은 용정의 공산화 때문이다. 여동생 혜원씨는 남북 단독 정부 수립(1948) 후인 1949년 겨울 종교의 자유를 찾아 서울로 향했다. 하지만 검문이 심해 오빠의 유품(사진첩)을 친지에게 맡겼다. 함경북도 남양의 부모를 만나러 가던 친지는 발각을 우려해 차창 밖으로 유품을 버리고 말았다.

 

윤동주가 릿쿄대학에 입학한 것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때였다. 윤동주 시 가운데 '쉽게 씌어진 시'가 있다. 이 시 가운데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시인은 신의 저주를 받은 인간'이라는 릴케의 말을 바꾸어 쓴 것이다.(16 페이지)

 

릴케는 신만이 알 수 있는 인생의 비밀스러운 뜻을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는 시인의 행위를 신에게 저주받을 일이란 역설적 표현으로 설명한 것이다. 나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란 표현을 시인이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편하게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 표현한 것이기보다 즉 시를 쓰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으로 본 것이기보다 철저하지 못한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윤동주의 독립운동과 옥사(獄死)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윤동주가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길을 갔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백두산 북쪽의 옛 만주 지역인 간도(間島)는 청나라의 발상지였다. 청이 후에 베이징으로 옮겨감으로써 간도는 빈 곳이 되었다. 간도는 조선과 옛 청나라 사이에 섬처럼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특히 두만강 북쪽을 북간도라 함)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도에 살게 된 것은 1869년 무렵으로 함경북도 지방에 큰 흉년이 들게되면서부터이다. 간도는 풍수지리의 이점을 갖춘 곳이자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윤동주가 태어난 당시 주소는 중화민국 동북부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이다. 외사촌 김정우(윤동주보다 한 살 어림. 동창생)나 동생 윤일주의 기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교회와 나무이다.

 

학교를 세우고 선생을 물색하는 명동촌에 정재면이란 22세의 청년이 나타난다. 그의 요구 조건은 학생들이 공부할 과목에 기독교 교육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09년의 일이다. 윤동주는 후에 평양 숭실중학, 서울 연희전문, 교토의 도시샤 대학을 다녔다. 모두 기독교 계통의 학교이다.

 

고종사촌 송몽규는 정치적 성향이 강했던 행동 지향적 인물이었다. 문익환은 1932년 윤동주와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중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중퇴한 뒤 1943년 만주 봉천신학교 재학중에는 학병을 거부했고 이 해부터 전도사로 활동했다. 문익환은 윤동주에게 열등감을 가졌고 윤동주는 송몽규에게 열등감을 가졌다.

 

윤동주, 문익환, 송몽규 세 사람은 특출난 친구들이었다. 문익환은 두 친구를 같은 해(1945)에 한꺼번에 잃고 50년을 더 살다 갔다. 그의 희생정신은 두 친구에 대한 빚을 갚겠다는 생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문익환은 중요한 자리에서 윤동주의 시를 암송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윤동주와 그의 시를 알렸다.

 

윤동주는 자신의 작품 아래에 늘 쓴 날짜를 적었다. 저자는 부끄러움을 윤동주의 온 생애를 뒤덮었던 말로 정의한다. 명동소학교는 서숙(書塾)이란 이름으로 소학교와 중학교가 같이 있었다. 윤동주가 속한 학년 전체가 문학적 소양을 갖춘 아이들로 짜여 있었다. 이것이 서로를 부추기는 힘이 되었다.

 

윤동주는 명동소학교로부터 졸업생 13명과 함께 김동환의 시집 '국경의 밤'을 선물로 받았다. 이 시집이 어린 윤동주와 친구들의 정서에 영향을 끼쳤음은 분명하다. '국경의 밤'은 소외된 국경 지대의 궁핍한 생활상과 식민지 치하의 비정한 현실을 눈물겹게 그린 시집이다.(57 페이지)

 

은진중학교는 용정에, 숭실중학교는 평앙의 학교였다. 윤동주는 살아서 시인으로 데뷔하지 못했다. 윤동주가 남긴 것은 시와 그 시를 쓴 날짜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문인들이 데뷔를 하고 통상적인 문단 생활을 대신하는 무게를 지니고 있다.(65 페이지)

 

193519세의 송몽규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콩트 부문에 당선된다. 이 역시 윤동주에게는 분발(奮發)의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김구 선생을 찾아가 교육을 받았다. 윤동주는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동맹 자퇴한다. 신사참배에 항의하는 차원이었다. 이때 송몽규는 독립 운동을 위해 중국 땅을 떠돌고 있었다.

 

윤동주의 평양 시절(숭실중학교)은 짧게 끝났다. 소득이 있었으니 바로 정지용 시인을 만난 것이다. 물론 실제 만남이 아니라 정지용 시집과의 만남이었다. 정지용은 김억, 김소월, 한용운으로 이어지던 한국 현대 시단에 현대시다운 현대시를 처음 쓴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85 페이지)

 

윤동주는 정지용 시를 읽음으로써 시가 무엇인지 직감적으로 느꼈을 수 있다. 윤동주는 동요 시인 강소천(1915 -1963)을 만나기도 했다. 윤동주는 이상의 시에도 관심을 보였고 백석(1912 - 1996)의 시집 '사슴', 김영랑의 '영랑 시집'을 필사하기도 했다. 1938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다닌 연희전문은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였기에 거의 유일하게 조선어 교육이 살아 있었다. 저자는 오늘날의 윤동주를 있게 한 두 사람을 고르라면 송몽규, 정병욱이라 말한다.(112 페이지)

 

윤동주보다 먼저 문학에 재능을 보인 송몽규는 정작 다른 길을 갔지만 윤동주로 하여금 자신의 길 전부를 문학에 걸게 했고 정병욱은 윤동주 시의 충실한 조언자였고 윤동주가 증정한 자필 시집을 해방이 될 때까지 자기 집 장독대에 묻어 끝까지 지켜내 윤동주와 윤동주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저자는 송몽규를 지혜의 보살이자 계기를 마련해주는 문수보살에, 정병욱을 위로의 보살이자 완성의 보살인 관음보살에 비유한다.(112 페이지) 윤동주는 정병욱과 함께 서대문구 누상동 에서 자취를 하기도 했다.(누상동, 부암동 등은 후에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되었다.)

 

마광수 교수는 윤동주의 '서시'에 나오는 우물을 시인의 감성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즉 한 포기 꽃을 통해서도 우주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것이 시인의 감성이라고 한다면 윤동주는 시인다운 감수성으로 우물이라는 작은 공간을 통해 대자연과 우주를 지켜보고 있다고.(129 페이지)

 

윤동주가 연희전문을 졸업할 무렵 자비를 들여 시집을 내려 했을 때 완성된 원고의 첫 작품이 '자화상'이었다. 이 시는 습작기를 마친 윤동주가 이룬 첫 성과라 할 수 있다. 윤동주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하기도 했다. 윤동주는 '바람이 불어'에서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고 썼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이란 구절이 있는 '서시'는 윤동주가 붙인 제목이 아니다. 이 시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격의 짧은 시이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위해 오늘날의 비자에 해당하는 도항증명(渡航證明)을 발급받아야 했다. 이를 위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동주는 서류 제출 5일 전에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는 이 시가 쓰인 종이 여백에 글씨를 썼는데 그것은 도항증명, 비애금물(悲哀禁物)이었다. 저자는 정병욱의 호 백영(白影)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에서 따온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쉽게 씌어진 시'를 윤동주가 남긴 최대의 명편이라 칭한다.(158 페이지) 송몽규의 조카인 소설가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란 구절이 있는 ''을 윤동주가 생애 처음 다가온 사랑에게 바쳤으리라 짐작한다.(161 페이지)

 

윤동주는 일본에서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에게 시를 써 보냈다. 후에 경향신문 기자가 된 강처중은 그 가운데 한 편인 '쉽게 씌어진 시'를 경향신문에 싣는다. 저자는 윤동주를 오로지 민족주의적 순교의 시인으로만 말한다면 본디 제 모습을 일그러뜨릴 수 있지만 살아가는 일 자체가 가시밭길이요 올무로 뒤덮인 벌판에서 제 나라 말로 끝내 시를 쓰는 일에 생을 바치기로 하였다면 그것만으로도 죽음을 담보로 한 민족운동이었다고 말한다.(173 페이지)

 

윤동주의 부친과 당숙은 송몽규로부터 정체 불명의 주사(注射) 이야기를 들었다.(182 페이지) 윤동주 가족은 윤동주 묘에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글을 새겼다. 처음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은 순간이다. 송몽규의 혐의는 스스로 문학자가 되어 지도적 지위에 서서 민족적 계몽 운동에 몸 바칠 것을 윤동주와 협의했다는 것이다. 문학 평론가의 유려한 해석이 돋보이는 책,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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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0 1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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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30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뽑히면 원고료를 주는 글을 쓰는 것이 순전히 돈 때문은 아니다. 아니 돈은 부차이고 생각의 치밀함과 적합성을 인정받으려는 것이 주목적이다.

만일 돈이 목적이라면 수많은 날 돈과 무관한 페북이나 블로그 글들을 쓰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다.

돈은 윤활유가 되고 에너지가 된다. 오늘 오랜만에 원고료가 있는 글을 써 제출했다.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글임에도 정교하게 앞뒤를 맞춘 글을 썼다.

수학 문제를 풀 듯 썼다. 오늘 받은 주간지의 공지를 보고 쓰기로 마음 먹고 한 시간만에 썼고 시작한 지 한 시간만에 마무리지었다.

자유로운 글도 최소의 틀이나 규격의 규제를 받는다. 1600자 내외로 써야 한다는 말에 수를 어림해 쓴 뒤 1603자로 할까 1597자로 할까 고민하다가 여백의 미를 생각하고 1597자로 썼다.
이제 글자 수 맞추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연히 글자 수에 따라 내용에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글을 한편 쓴 뒤 글자수를 달리해 몇 편의 글을 쓰는 것이 좋은 글쓰기 훈련이 된다.

오늘 글은 1700자 정도를 썼다가 줄였는데 이를 2500자로 늘려 쓰는 것도 좋다.

할 일은 많은데 잡글이나 쓴다고 자탄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 형식 없는 글을 잡글이라 폄하하지 않기로 했다.

현안을 위해 읽는 책들을 투고에 활용해 공부도 되고 응모에도 도움이 되는 읽기와 쓰기를 하면 될 것이다.

빛나는 성찰과 예리한 판단, 대안 등이 지금껏 잡글이라 불려온 글들을 통해 제시되었다. 논문, 소설, 시, 희곡 외의 모든 글들이 그런 글들이다.

고료가 얼마인지 모르지만(아마 5만원? 아니면 10만원?) 뽑히면 유용하게 쓸 것이다.(샴페인을 미리 터뜨리는..) 도서 구입비가 아니라 차비에 보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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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 신념의 길과 수난의 인간상 문학의 이해와 감상 13
이건청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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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을 이야기할 때 열사(烈士)와 의사(義士)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열사는 무기 없이 비폭력으로 저항한 분들, 의사는 무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다.) 윤동주처럼 신념의 인간이 행동의 방식이 아닌 시의 방식을 택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보드랍기 짝이 없는 서정적 자아로 완강하고 투박한 굴욕의 시대에 응전해 갔기에 수많은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었고 크나큰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윤동주는 지사(志士)도 투사(鬪士)도 아니었다. 다만 시로써 끊임없이 "아픔의 먹이"가 되어갔다.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은 1890년 회령에서 이주해 와 청국인에게서 땅을 구입해 조선인 마을을 형성하고 명동서숙(明東書塾)을 거쳐 명동 소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 발전시켰다.

 

간도는 민족교육의 요람이자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 윤동주 집안과 김약연 집안은 혼인으로 하나가 되었다. 윤동주는 아명이 해환(海煥)이었다. 그 아래에 달환(達煥; 일주)이 있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이 별환이었다.(해와 달과 별이다.)

 

천문학자 박석재 교수는 "우주에는 무엇이 있나요?"란 아이들의 물음에 ", , 별이 있단다"고 답한다고 말한다. '해와 달과 별이 뜨고 지는 원리' 67 페이지 참고) , , 별은 아름답고 순수한 우리말이다. 윤동주 부모는 해와 달과 별처럼 아름답고 순수한 아들들을 생각하고 이름을 그렇게 지어주었을 것이다.

 

, , 별은 윤동주의 시집 제목에 나오는 하늘, 바람, 별과 잘 어울리고 시와도 잘 어울린다. ()이지만 시()라 해도 좋을 듯 하다. 윤동주가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명동의 생가 마을은 과일나무에 둘러싸인 기와집, 오디나무 밑 우물, 이 모두를 굽어보고 선 교회당과 학교 건물 등이 있는 평화롭고 한적한 풍경을 지닌 곳이었다.

 

윤동주는 9세 때인 1925년 명동 소학교에 입학한 이래 194529세로 타계할 때까지 학생 신분이었다. 명동 소학교 시절 윤동주는 학교에서 발간되는 벽보신문에 동시를 빠짐없이 발표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세계문학전집을 통독할 정도로 독서 범위가 넓었다. 명동 소학교 5학년 과정을 수료한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10리 동남쪽의 대랍자라 하는 곳의 중국인 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을 더 다녀 졸업했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패(), (), () 등의 이름은 이 시절 만난 여학생들이다. 이 중국인 소학교를 마치고 윤동주는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 집안은 이를 계기로 용정으로 이사했다. 통학의 어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명동에 유입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때문이었다.

 

은진중학교는 캐나다 선교부의 미션 스쿨이어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이 시절 윤동주는 다방면에 능력을 보였다. 축구, 교지 편집, 재봉질, 웅변, 수학.. 윤동주는 2학년 때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을 했다. 흥미로운 것은 침착한 어조와 내용으로 1등을 했다는 점이다.

 

동급생이자 고종 사촌인 송몽규가 길림을 거쳐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자 윤동주는 부모를 설득해 19359월 숭실중학교로 옮겨갔다. 윤동주는 백석(1912 - 1996) 시집 '사슴'이 출간되자 책을 구할 수 없어 1백부 한정판으로 출판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온종일 걸려 정자로 베껴냈다.

 

중학 시절 윤동주의 서가에는 '정지용 시집', 한용운(1879 - 1944)'님의 침묵', 수주 변영로(1898 - 1961)'조선의 마음', 파인 김동환(1901 - ?)'국경의 밤', 무애 양주동(1903 1977)'조선의 맥박', 백석의 '사슴' 등이 꽃혀 있었다.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자 용정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했다. 이 무렵 윤동주는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가톨릭 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는 외솔 최현배(1894 - ?) 선생에게서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손진태 교수로부터 역사를, 이양하(1904 - 1963) 교수로부터 영문학 강의를 들었다.

 

윤동주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계속 영문학을 한 것도 이양하 선생의 영향이었다. 산책길에서 윤동주는 삼베 또는 옥양목 한복 차림이었고 손에는 항상 책을 들고 있었다. 윤동주 시에는 가필, 정정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윤동주는 형편상 기숙사 생활을 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 때문에 기숙사도 영향을 받았고 4학년 생인 윤동주는 이에 2학년생인 정병욱과 함께 하숙을 하게 되었다. 누상동 마루터기였다.

 

이 하숙집 이후 소설가 김송(金松; 1909 - 1988)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윤동주는 많은 시를 썼다. 김송은 요시찰인이었다. 이 때문에 윤동주는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다. 이 시기는 참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에 윤동주는 '새벽이 올 때까지', '십자가', '별 헤는 밤', '서시' 등의 대표시들을 썼다.

 

윤동주는 독서 범위가 넓어지면서 더욱 말수가 적어졌다. 시적인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윤동주는 책에 메모를 할 때도 있었지만 좀체 책에 줄을 치지 않았다. 윤동주는 별안간 떠오르는 시상을 충동적으로 표현해내지 않고 몇 달, 몇 주를 두고 머릿 속에 간직해 두고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되었을 때 문자화했다.

 

윤동주는 천성적으로 걷기를 좋아한 시인이었다. 정병욱은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라 말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된 것은 해방 후인 1948130일이다. 애초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 졸업기념의 시집으로 기획한 것이었는데 7년이나 지나 빛을 본 것이다. 1942년 연희전문 문과를 마친 윤동주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여름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했다. 독립운동 죄목으로 체포된 윤동주는 상당 분량의 시작(詩作) 원고와 일기 등을 압수당했고 압수된 자신의 원고를 일어로 번역해야 했고 심한 취조를 겪었다.

 

194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윤동주는 읽힐 기약도 없는 시들을 위해 가장 치열한 정신을 태워올렸다. 윤동주 시 작품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117편이다. 이 가운데 35편 정도가 동시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다. 윤동주 시가 일관되게 노래한 것은 그가 설정한 절대적 양심에 도달하지 못한 채 현실에 자리하고 있는 자아의 번민상이다.

 

윤동주 시의 정서적 근원은 고향이다. 그런데 그의 고향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시에는 그리움의 정서가 지배적이다. 이상(理想)으로 설정한 절대 자아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적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 '또 다른 고향'에 나오는 백골이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시인이 고향에 돌아온 날 백골을 언급했다는 사실은 윤동주의 고독은 고향에 돌아옴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윤동주는 보다 포괄적이고 온전한 자기 자신을 표명하기 위해 우물, 거울, 하늘, (), 십자가 같은 상징들을 동원했다. 우물이나 거울은 시인의 내면 의식을 비추는 것들이다.

 

윤동주는 연못에 비친 제 모습에 도취된 나르시스와 달리 연민과 갈등의 모습의 자신을 발견했다. 윤동주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멸망한 왕조의 후예인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구체적 상징물로 거울을 설정했다. 하지만 그 거울은 파란 녹이 끼어 있었다.

 

윤동주의 자아 성찰은 비극적 자아를 확인한 아픈 것이었다. 식민지적 상황에서 그의 존재는 모멸과 오욕의 것이었다. 윤동주는 단절이나 좌절에 대한 감정적 위로나 화해를 말하지 않았다.

 

윤동주는 그것을 강하게 응시하고 뛰어넘으려 했다. 윤동주는 한국 서정시에 긴장을 불어넣어 깊은 공감의 시세계를 완성한 시인으로 기록되었다.(건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이건청의 '윤동주'100 여 페이지의 얇은 책이지만 꽤 체계적이고 세밀한 책이다. 충실한 반영과 분석이 돋보이는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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