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숙 문학세계
이호규 외 지음 / 새미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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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정(香庭) 한무숙(韓戊淑: 1918 1993) 작가는 서울의 양반 가문 출신, 잦은 병력(病歷), 여성 작가 등의 이유로 관심을 모은 작가이다. 지금은 여성 작가는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여성 작가는 드물었다. 작가는 상봉하솔(上奉下率)의 고역과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일과 후에 누워 벽에 종이를 대고 글을 썼다.

 

1942년 장편 등불 드는 여인신세대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한무숙은 창작활동을 하는 일과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 양자 사이에서 가능한 한 최선의 조화를 꾀하는 길을 선택했다.”(15 페이지)

 

한무숙 작가는 생활양식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집안의 허례허식이나 악습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집안 어른들이 주는 삶의 지혜나 미덕에는 공감하는 자세를 취했다.(15 페이지)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의 계보를 살펴보게 된다. 김명순(金明淳; 1896 1951), 나혜석(羅蕙錫: 1896 1948), 김일엽(金一葉: 1896 1971), 김말봉(金末鳳; 1901 1961), 박화성(朴花城: 1903 1988), 최정희(崔貞熙: 1906 1990), 강경애(姜敬愛: 1907 1943), 한무숙(韓戊淑: 1918 1993), 강신재(康信栽: 1924 2001), 박경리(朴景利: 1926 2008), 박완서(朴婉緖: 1931 2011),

 

한말숙(韓末淑: 1931 - ), 정연희(鄭然喜: 1936 - ), 김지원(金知原: 1942 2013), 남지심(南智尋: 1944 - ), 최명희(崔明姬: 1947 1998), 강석경(姜石景: 1951 - ), 양귀자(梁貴子: 1955 - ), 최윤(崔允: 1955 - ), 은미희(殷美姬: 1960 - ), 강규(1964 - ), 오수연(吳受姸: 1964 - ), 송은일(1964 - ), 정지아(鄭智鵝: 1965 - )...

 

한무숙은 어릴 적 병마로 얼룩진 시간을 보냈다. 여덟 살 아름다운 5월의 백주(白晝) 주일학교에서의 귀도(歸途)에 화교(華僑)의 장의(葬儀)를 통해 죽음의 장면을 보았다. 강렬한 충격이었으리라.

 

필자(이호규)는 그의 감수성이 죽음과 만났던 것은 그의 운명이었고 천형(天刑)이었고 천혜(天惠)였다고 말한다. 병고(病苦)와 사색(思索)과 탐독(耽讀), 이 셋이 한무숙이 문학에 닻을 내리는 데 모든 역할을 했다.(28 페이지)

 

한무숙은 부친과 부친의 친구의 술자리에서의 약속에 따라 싫은 결혼을 했다. 얼굴도 모르는 결혼이었고 시어머니 간병에 아기자기한 신혼 살림조차 허락되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만삭으로 시어머니 병간호에 첫 아이 출산 등을 치른 병약한 한무숙에게는 아프거나 힘들 때조차 쉴 공간, 아니 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없었다. 한무숙은 그래도 나는 열심히 살았다. 무슨 목표를 향해서가 아니다. 행복에의 의지라든가 희망 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오히려 나는 철저하게 내 불행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자학에 열정을 쏟음으로써 냉소적인 역설의 독이 가득 찬 처절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썼다.

 

한무숙이 작가가 된 과정은 하나의 소설 같다. 시댁은 가부장 질서가 엄격한 집안이었기에 여자는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그녀는 화장실에서 우연히 본 신문 쪼가리에서 1500매 분량의 장편 소설 공모 소식을 접한다.

 

남은 두 달, 그녀는 그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한()을 소설(‘등불 드는 여인’)을 쓰는 것으로 풀었고 결국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19424월의 일이었다. 당시 이 소식은 남편만이 알고 있었던 비밀이었다. 한무숙은 1948년에는 국제신문사 장편 소설 공모에 역사는 흐른다로 당선의 기쁨을 누렸다.

 

1970년 작가는 미국에 의학도로서 유학을 가 있던 둘째 아들 용기가 교통 사고로 사망하는 인생 최대의 슬픔을 겪는다.(용기는 의학도면서 국립극장에서 첼로 독주를 할 만큼 예술적 재능도 지닌 수재였다.)

 

1984년 한무숙은 말년의 대작 만남을 한국문학에 분재(分載)했다. 이명희는 작가가 민속의 풍속과 문화를 애지중지하며 그것을 인물과 구성에 옷을 입히듯 풀어놓은 이유는 무엇인지 풀이한다. 그것은 풍속과 문화의 지킴이란 이 민족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며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국토를 잃었지만 우리의 정신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작가 정신에 기반한다.(59 페이지) 이런 점이 역사는 흐른다에 명징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무숙 작가는 인간을 비참과 위대의 풀 수 없는 혼합, 모순, 끊임없는 갈등과 분열 속에 허우적거리는 존재라고 갈파한 파스칼의 말을 위대한 명구(名句)로 기억하면서 그 명언에서 인간의 한계와 위대함을 함께 보았다.(61 페이지)

 

1963년 발표작인 유수암(流水庵)‘은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한 여인의 인생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들였기 때문이다. 작가가 우연히 마주친 한 노기(老妓)의 모습에서 충격을 받아 쓴 소설이다.

 

유수(流水)는 낙화유수(落花流水)의 준 말로 쇠잔영락(衰殘零落)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꽃에 정이 있으면 흐르는 물에도 정이 있어 물이 꽃을 띄워서 흐를 것이라는 뜻으로 남녀 사이에 서로 그리워 하는 정이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또한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줄임말로 일정한 형태가 없이 늘 변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하다.

 

한무숙은 수필에도 재능을 보였다. 김현주는 글쓰기는 저자가 자아를 표현하는 계기이자 자아를 구성하고 형성하는 계기임을 주장한다. 김현주는 자전적이라는 말과 자화상적이라는 말을 대비시킨다. 자전적인 것도 자화상적인 것도 모두 자신의 삶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자전적인 것은 언어 형태로 기억되는 것이고 자화상적인 것은 그림의 형태로 기억되는 것이다.

 

물론 그림 형태로 기억된다는 말은 체계적인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어릴 적의 경험이 흐릿하게 기억된다는 의미이다. 한무숙은 수필을 소설만큼 진지한 문학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녀의 수필 쓰기는 소설쓰기라는 본연의 작업의 잉여분에 해당한다.

 

작가의 의도라는 측면을 차치하고 결과로써 평가하더라도 한무숙이 수필의 영역에서 새로운 문학적 실험이나 미적 경지를 개척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133 페이지) 한무숙은 역사적 사건을 즐겨 다루지만 실제 그 절박한 국면들이 겉으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늘 소설의 원경(遠景)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령 6.25 같은 사건이 배경일 때도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심리 쪽으로 비중을 두고 묘사한다.

 

한무숙은 예술 작품에서의 표현은 사고가 시작되는 곳이 아니라 사고가 끝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182 페이지) 한무숙에게 소설 쓰기는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인간의 의지나 욕망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미덕이란 무엇이며 신념과 도덕을 규정하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에 도달하는 형식적 실험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 과정 속에서 작가는 생의 이면에 대한 탐구와 생의 총체성에 대한 해답을 작품 쓰기의 전체를 통해 정교하게 축조해가는 것이다.(228 페이지) 정재원, 이호규, 이명희, 이상진 등 여러 필자가 참여한 한무숙 문학세계가 작가의 작품들을 실제 읽고 더 많이 이해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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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숙(韓戊淑: 1918 1993) 작가 관련 자료를 찾다가 여성 작가들의 계보를 나름대로 수집해 보았다.

 

한무숙 작가 이전에 김일엽(金一葉; 1896 - 1971), 김명순(金明淳; 1896 - 1951), 나혜석(羅蕙錫; 1986 1948), 김말봉(金末鳳; 1901 1961), 박화성(朴花城: 1903 1988), 최정희(崔貞熙: 1906 1990), 강경애(姜敬愛: 1907 1943) 등의 작가가 있고 그 이후에 젊은 느티나무의 강신재(康信栽: 1924 2001), 박경리(朴景利: 1926 2008), 박완서(朴婉緖: 1931 2011), 한말숙(韓末淑: 1931 - ), 정연희(鄭然喜: 1936 - ), 김지원(金知原: 1942 2013), 최명희(崔明姬; 1947 - 1998) 강석경(姜石景: 1951 - ) 등의 작가가 있다.

 

김일엽, 김명순, 나혜석 등의 세 작가는 모두 1896년생 작가들이다. 김명순 작가는 1917, 나혜석 작가는 1918, 김일엽 작가는 1920년 각각 소설을 발표했다.

 

한국문학사는 1917년 이광수의 무정(無情)‘을 한국 최초의 근대 소설로 기록했다. 하지만 이는 시정되어야 할 일이다.

 

말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파블로 카잘스(첼리스트), 파블로 네루다(시인), 파블로 피카소(화가) 등 파블로라는 이름을 가진 세 거장이 같은 해(1973)에 타계한 사실을 무슨 신기한 일이라도 되는 양 말하곤 하는데 1896년에 태어난 우리나라 세 여성 작가를 보며 나도 그들처럼 세 작가의 기이한(?) 인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특히 나혜석의 삶에 관심이 많이 간다. 한무숙 작가를 박경리(1926 - 2008. '토지'의 작가), 박완서(1931 - 2011), 최명희(1947 - 1998..'혼불'의 작가) 등은 물론 나혜석(1896 - 1948) 작가와 비교할 여지가 있을지 찾아보도록 하자.

 

김이듬 시인이 고정희(高靜煕; 1948 - 1991), 최승자(崔勝子; 1952 - ), 김혜순(金惠順; 1955 - ) 등의 시인을 중심으로 논한 '한국 페미니즘 시 연구'도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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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훈(芝薰) 조동탁(趙東卓) 시인의 등단작은 고풍의상(古風衣裳)’이다. 강의시간에 낙서삼아 쓴 시를 장난으로 우체통에 넣은 것이 당선된 것이라고 한다. 반면 심혈을 기울여 쓴 세기말적 탐미의식, 자의식 계열의 시편들은 제외되었다.”(윤석성 지음 조지훈 전인적 삶의 시화’ 35 페이지)

 

이런 어긋남은 어디에나 있다. 기대했던 것들은 제외되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순서(順序)에 드는 경우가 있다. 인터넷에 게시될 법한 시들은 없고 임팩트 없는 시들은 게시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어긋남이라 할 수 있다.

 

고옥주 시인의 청령포를 찾을 수 없어 곧 국립중앙도서관에 갈 생각이다. “청령포는 언제나 새벽 잠못 들고 뒤척이는 새벽..“ 단종의 한()을 노래한 시이다. 수준작이 선택(게시)되지 못한 것인지 여부는 확언할 수 없지만 실릴 만한 시가 실리지 않은 것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남양주 사릉(思陵: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을 남김의 미학으로 설명한 글을 최근 읽었다. 알다시피 남양주 사능은 크기도 작고 초라하다. 하지만 이를 남김의 미학이라 하는 것은 무리한 발상이다.

 

단종의 폐위와 연관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지난 20171214일 연산군묘를 찾은 것은 자료 수집 차원이라면 언제인지 장담할 수 없지만 갈 사릉(思陵)은 예의 차원의 방문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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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8
김수영 지음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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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시 ''을 김수영의 수필 '해동(解凍)'에 근거해 푼 김혜순 시인의 책('김수영 - 세계의 개진과 자유의 여행')을 보고 읽게 된 책이 '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08번 김수영'이다. 철학자 김상환의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 '공자의 생활난' 등 두 권의 김수영론을 읽지 못한 아쉬움 속에 읽게 된 책이다.

 

일방적 매혹(魅惑)도 근거 없는 염오(厭惡)도 아닌 균형감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읽는다. 수필이야말로 김수영을, 그리고 김수영의 시를 이해할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김수영은 자신을 동물적인 본능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만 동물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소개한다.

 

김수영은 사람이 돈을 따라서는 아니 된다는 처세의 지혜도 인용하고 여러 날을 두고 저녁때만 되면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필시 정신 이상의 전조가 아닌가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 무허가 이발소의 딱딱한 평상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는 이야기들을 더한다.

 

김수영은 시()를 논하는 것은 신()을 논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라는 일본의 시인 니시카와 준사부로의 말을, 자유를 논하는 것은 신()을 논하는 것처럼 두려운 일이라 바꾸고 사랑이 아닌 자유는 방종이며 사랑은 호흡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김수영은 또한 자신에게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문학 하는 이에게 술을 권한다. 그런, 그리고 술을 좋아하는 김수영은 글을 쓰는 집을 성스러운 직장으로 여겨 집 안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김수영은 흥미로운 말을 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릴케는 소녀 릴케는 많았지만 깡패적인 릴케의 일면을 살려서 받아들인 사람은 거의 한 사람도 없었던 것 같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영화 배우 장동휘가 갱 영화에 쓰고 나오는 모자를 이야기 하고 아동문학가 마해송(1905 - 1966)을 사진을 가장 멋있게 찍을 줄 아는 윤백남(극작가, 1888 - 1954) 부류로 분류하면서도 작위(作爲)를 보이지 않는데는 실패했다고 평을 하는가 하면 자신이 찍은 소록도 사진을 보고 "이 사진 소독했소?"라 물은 한 문인을 이야기하며 현대 소설을 쓰는 사람이면 나균(癩菌)이 태양빛 아래서는 부지(扶持)하지 못한다는 것쯤 알고 있어야 할 것이라 말한다.

 

김수영은 동물은 어떤 것이든 직업적으로 기르게 되면 애정은 거의 전멸한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8년간 닭 100 마리 정도를 길렀다. 마포(麻浦 서강(西江) 가에서. 김수영은 구공탄 냄새는 완연히 코에 맡아질 때는 이미 늦는다는 말을 한다. 서울 서민의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나는 글들이 김수영 글들에는 많다.

 

김수영은 타고르의 시를 칭찬한다. 쉬운 말로 고운 시를 쓸 수 있는 타고르의 면모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나는 나의 가냘픈 쪽배로 욕망의 대해를 건너려고 애를 쓴다. / 리고 자기도 역시 유희(遊戲)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 어버리고 만다."

 

김수영은 사회 비평이나 문명 비평도 좀 더 이렇게 따뜻하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시의 경험이 낮은 시기에는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는 수가 많으나 시의 어느 정도의 훈련과 지혜를 갖게 되면 시를 기다리는 자세로 성숙해진다는 말을 한다. 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이 말은 김수영이 너무 많은 실재성은 현기증이, 체증이 될 수 있다는 미국 시인 데오도어 뢰스케의 시를 보고 한 말이기도 하다.

 

김수영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면 도리어 역효과가 나는 수가 많으니 제반사에 너무 밀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한다.(이남호 교수의 '남김의 미학'을 읽는 듯 하다. '남김의 미학'은 우리 시대는 철저함과 완전함과 효율성의 신화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책이다. 이남호 교수는 최선을 다하고 완벽을 기하는 것은 좀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가능성을 소진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슬퍼하되 상처를 입지 말고, 즐거워하되 음탕에 흐르지 말라는 말을 인용한다. 김수영은 이를 공자인가 맹자인가의 글의 한 구절이 생각나 인용한다고 말하는데 공자의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공자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한 사람(신정근 지음 '공자의 인생 강의' 참고)이었다는 점이고 김수영은 시 쓰기는 온몸으로 하는 것, 밀고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점이다.

 

김수영은 일을 하자고 일기에 썼다. 번역이라도 부지런히 해서 과학 서적과 기타 진지한 서적을 사서 읽자고 썼다. 그리고 읽은 책은 그전처럼 서푼에 팔아서 술을 마셔버리는 일하지 말자고 썼다. 이제는 책을 사야 한다고, 피로써 읽어야 한다고, 무기로서 쌓아 두어야 한다고 썼다. 책을 쌓아 두어도 조금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떳떳이 앉아 있을 수 있다고 썼다.

 

김수영은 시고 소설이고 모든 창작 활동은 감정과 꿈을 다루는 것이고 이 감정과 꿈은 현실상의 척도나 규범을 넘어선 것이라 말한다. 김수영은 이어령의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라는 조선일보 게재 칼럼에 대해 우리나라 문화인의 무지각과 타성을 매우 따끔하게 꼬집어 준 재미있는 글이었지만 창조의 자유가 억압되는 원인을 지나치게 문화인 자신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것 같은 감을 주어 불쾌하다고 썼다.

 

김수영은 제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란 말을 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는가로 바꾸어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는 말을 한다. 김수영은 신동엽(1930 - 1969)'4월은 갈아 엎는 달'을 예시하며 사회참여적 정신과 최소한의 예술성을 갖춘 작품이라 칭찬한다.

 

사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

강산(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 엎었으며

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 엎었으면

갈아 엎은 한강 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 칠, 아 푸른 보리밭.

 

김수영은 김재원의 입춘에 묶여온 개나리를 제정신을 가지고 쓴 시라 평한다. 김수영은 알맹이는 다 이북 가고 여기 남은 것은 다 찌꺼끼뿐이라는 말을 소개하며 이북 작가들의 작품이 한국에서 출판되고 연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김수영은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의 은폐(隱閉)의 반대어라 말한다.

 

김수영은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肉眼)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말한다, 김수영은 애써 책을 읽지 않으려 한다며 책이 선두가 아니라 작품이 선두라고 덧붙인다. 어떤 고생을 하든지 시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이 그 뒤의 정리를 하고 나의 시의 위치를 선사해준다고 말한다.

 

김수영은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시에 적용해 사람은 자기 스타일을 가지고 죽어야 한다는 말로 바꾼다. 그런 김수영이 칭찬한 작품이 김현승(金顯昇: 1913 - 1975)파도(波濤)’이다. “이 정도의 작품이면 죽음을 디디고 일어선 자기의 스타일을 가진 강인한 정신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 여기 누가

술 위에 술을 부었나.

잇발로 깨무는

흰 거품 부글부글 넘치는

춤추는 땅바다의 글라스여.

 

,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언어는 선박처럼 출렁이면서

생각에 꿈틀거리는 배암의 잔등으로부터

영원히 잠들 수 없는,

, 여기 누가 가슴을 뿌렸나.

 

, 여기 누가

()보다 깨끗한 짐승들을 몰고 오나.

저무는 도시와,

병든 땅엔

머언 수평선을 그어 두고

오오오오 기쁨에 사나운 짐승들을

누가 이리로 몰고 오나.

 

, 여기 누가

죽음 위에 우리의 꽃들을 피게 하나.

얼음과 불꽃사이

영원과 깜짝할 사이

죽음의 깊은 이랑과 이랑을 따라

물에 젖은 라이락의 향기

저 파도의 꽃떨기를 7월의 한 때

누가 피게 하나.

 

종횡무진, 고투(苦鬪),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것, 치열함 등의 말이 떠오른다. 조금 더 김수영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이 추천(?)한 시들을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시론(詩論)들도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스타일을 가져야 한다는 점, 치열해야 한다는 점 등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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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 쯔데 히로시(つで ひろし: 1942 - )는 ‘왕릉의 고고학’에서 기념물적 성격이 강한 거대 왕릉은 국가 형성기 초기에 왕의 신격화가 필요한 시점에 축조되며 고대국가의 기틀이 완성되고 관료제가 확립되면 거대 왕묘(王墓)의 중요성은 상실된다는 말을 했다.

우리나라의 능에 대해서도 언급한 것도 흥미롭고 피라미드에 대해 이야기해 관심을 끈다.

이집트의 경우 대 피라미드 시대에 들어서며 비로소 문법을 갖춘 문장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언급하며 저자는 대 피라미드를 축조한 시기가 이집트 문화가 고도의 성숙기에 접어든 시기였다고 보는 편이 맞다고 덧붙인다.(양정무 지음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1’ 249 페이지)

나로서는 ‘고대 국가의 기틀이 완성되고 관료제가 확립되면 거대 왕묘의 중요성은 상실되었다‘는 말이 ‘이집트의 경우 대 피라미드 시대에 들어서며 비로소 문법을 갖춘 문장이 쓰이기 시작했다(이집트 문화가 고도의 성숙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의 반증 사례가 아닌지 궁금하다.

아울러 우리 나라가 이집트나 다른 왕조처럼 거대 능을 조성했다면 천능(遷陵)은 어려웠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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