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 명강의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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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국 교수의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쉽게 소개하려 노력한 책이다. 하이데거는 궁핍한 시대의 사상가로 불린다. 이는 하이데거의 수제자 칼 뢰비트가 처음 사용한 말이다. 횔덜린을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라 부른 하이데거로부터 배워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하이데거 철학은 대단히 난해하지만 그럼에도 귀 기울일 부분이 있다는 것이 저자의 기본 입장이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의미의 철학과 시()는 이웃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철학자가 존재라 부르는 것을 시인은 성스러운 것이라 부른다. 존재자들이 갖는 성스러움을 존재라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는 예술의 한 분야인 시 뿐 아니라 예술 전반을 포함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모든 참된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 태도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시를 직접 쓰는 것보다 오히려 매순간 시적인 태도로 세계와 사물을 대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인으로 사는 것이라 말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사는 시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불렀다. 하이데거는 오늘의 세계를 황폐한 세계로 불렀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 사물을 지배하려 한다. 하이데거는 현대기술문명을 근저에서 지배하는 익명의 힘을 지배에의 의지라 불렀다.

 

지배에의 의지는 의지에의 의지(의지를 위한 의지)라 불린다. 하이데거는 과학기술시대인 지금을 광기가 지배하는 시대로 보았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단순히 도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이 과학기술을 도구로 보는 것을 넘어 그것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며 과학과 기술이 이미 종교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과학과 기술을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자연은 물론 인간의 삶 전체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방식으로 보았다. 신만이 진리를 드러내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서양 중세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야말로 진리를 드러내고 과학을 응용한 기술만이 인간의 삶을 안전한 토대 위에 올려놓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이데거는 현대기술문명이 전제하는 기술적 세계이해를 넘어 새로운 세계이해를 갖는 종교적 회심은 다른 것이 아닌 시를 통해 주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60, 61 페이지) 하이데거는 존재자에게서 존재가 빠져 달아나버렸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자는 인간, 자연, 사물의 총칭이고 존재는 그것들이 갖는 고유하고 성스러운 성격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가 갖는 성스러운 성격을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라 불렀다. 이는 존재자들의 특성이 각각 다르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는 인간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존중해야 할 독자적인 존재를 갖는다는 의미이다.(66 페이지) 하이데거는 존재자들이 갖는 고유한 존재를 경험하는 것을 존재 경험이라 불렀다.(75 페이지)

 

하이데거가 말한 궁핍한 시대란 존재자들이 발하는 성스러운 빛이 모두 사라지고 빛바랜 모습을 드러내는 시대를 말한다.(76 페이지) 하이데거는 우리가 평소 자명하고 진부한 것들에 대해 놀라워 했다. 이를 경이(驚異)라 한다. 하이데거는 기분을 중시했다. 하이데거의 경이는 특정 상황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근본 기분들 중 하나이다.

 

불안, 경악 등도 근본 기분의 하나이다. 저자는 성철 스님이 인용한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말을 하이데거가 한 말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모든 산봉우리에 정적(靜寂)이 있다는 괴테의 시를 인용했다. 저자는 '산은 산, 물은 물'이란 말을 산과 물의 신비로움을 도저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 산은 산, 물은 물이라 표현한 것이라 말한다.(88 페이지)

 

시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지 않지만 존재를 드러낸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본래 시인이며 시인으로서 지상에 거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과학적이고 계산적인 이성이 아닌 시적인 이성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사물들의 고유한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장이라는 의미에서 현존재라 불렀다.(107 페이지)

 

하이데거는 경이라는 기분 속에서 살 때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111 페이지)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 언제라도 죽음의 엄습에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우리가 경이라는 기분을 갖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116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특성을 실존이라 칭했다.(122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도록 내던져져 있다고 보았다.(122 페이지)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못하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 실존이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 간에 성립하는 목적 수단의 지시연관 전체를 세계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삶 전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로부터 불안을 느낀다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불안은 죽음이 우리에게 근원적으로 자신을 고지하는 방식이라 정의했다.

 

하이데거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드러나는 나와 모든 존재자의 섬뜩하고 낯선 존재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하는 것을 죽음에로의 선구(先驅; 죽음을 향해 앞서 달려감)라 불렀다. 불안이 우리를 본래적인 실존의 문턱으로 이끄는 기분이라면 불안을 적극적으로 인수하며 죽음에로 선구하는 것을 본래적인 실존으로 비약하는 것이다.(137 페이지)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무()의 심연에서 도피하여 기만적이고 세간적인 가치들에서 삶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경향을 퇴락이라 불렀다. 그리고 우리가 빠져드는 그 가치들은 우상이라 불렀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통해 우리가 존재자들의 신비스러운 충만한 존재를 경험할 것을 촉구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만이 현대의 기술문명이 초래한 위기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 보았다.(139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간만이 삶을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로 보았다. 인간은 자신이 만들지도 않았고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러한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형성해야 한다.(158 페이지)

 

하이데거의 사상은 우리를 항상 엄습하는 고독감, 무력감, 허무감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164 페이지) 물론 시적 감성을 통해 세계와 하나가 될 때 우리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경이라는 감정을 통해 허무감을 극복할 수 있다.(165 페이지)

 

하이데거는 과거의 신들은 떠났지만 새로운 신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대라는 말로 현대를 설명했다.(175 페이지) 하이데거는 예술작품 특히 시에서 세계와 사물이 근원적으로 드러난다고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시는 각 나라 향토어로 쓴 것을 말한다.(182, 183 페이지)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말을 했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 이때의 언어는 모든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 안에 깃들게 하는 시어를 가리킨다.(193 페이지)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의 언어는 세계와 사물을 근원적으로 현현(顯現)하게 하는 환기력을 상실한 언어이다.(193 페이지)

 

시인의 말을 통해 우리가 비로소 그 존재를 깨닫는 사물들은 그것들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엄습하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187 페이지) 하이데거는 세계와 사물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존재라 표현했다.(190 페이지) 하이데거는 세계와 사물을 임의로 조작하고 지배하려는 마음속의 시끄러운 계산과 호기심과 잡담에서 벗어난 상태인 침묵의 정적(靜寂) 속에서 진정한 시가 발원한다는 말을 했다.(191 페이지)

 

진정한 시는 침묵의 정적에서 비롯되지만 이런 침묵의 정적은 존재가 말하는 정적의 소리에 호응하는 것이다. 이 경우의 정적이란 단순히 소리나 움직임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운동과 정지가 근거하는 것으로 운동보다 오히려 더 동적이며 생명으로 충만한 것이다.(192 페이지)

 

하이데거가 말한 시어란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본래적인 언어이다.(194 페이지) 하이데거가 말한 시에 반대되는 것은 산문이 아니다. 시적인 정신으로 충만한 순수한 산문은 좁은 의미의 시 못지않게 시적일 수 있으며 시 만큼이나 드물기 때문이다. 시의 반대는 사물과 세계를 불러낼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일상어나 정보언어이다.(194 페이지)

 

하이데거는 우리에게 존재자들의 지배자가 아닌 존재의 파수꾼이 될 것을 촉구한다. 존재의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와 근원적 세계에 경이를 느끼며 그것들의 수호자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의 파수꾼이 될 때 비로소 현대기술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204 페이지)

 

우리가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자신이 죽을 자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212 페이지) 이럴 경우 그간 존재자들을 기술적으로 조작하고 지배하면서 자신의 생존과 안락을 꾀했던 행위가 허망한 것이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단순히 안락을 추구하는 존재 이상의 것으로 봄과 동시에 건축 역시 인간에게 안락을 보장하는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215 페이지) 하이데거는 인간이 지상에 본래적으로 거주할 경우 건축은 그런 수단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상에 거주하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고 보았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지상은 우리가 본래 거주해야 할 고향으로서의 근원적 세계를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농부들의 일에 상응한다고 느꼈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뿌리 내리고 있는 대지에 대한 순박하면서도 확고한 신뢰 속에서 사물들을 온몸으로 접하며 그것들과 교감하고 또 그것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발현하게 한다고 여겼다.(230 페이지)

 

하이데거의 사상과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사상은 매우 유사하며 메시지 역시 거의 동일하다.(234 페이지) 소로에게 농사는 단순한 생계수단이기보다 사물들을 온몸으로 직접 경험하기 위한 길이었다. 소로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대지에 영혼이 있다고 여겼으며 이 대지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생명이 솟아나는 근원이라 생각했다.(236 페이지)

 

소로는 자연을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자연 속의 모든 것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서로 결합되어 있다고 생각했다.(237 페이지) 소로가 본 자연은 하이데거가 경이(驚異)라는 기분 속에서 경험하는 자연과 같다.(243 페이지) 소로는 근대과학이 자연 전체와의 교감을 상실하고 지나치게 전문화되는 것을 우려했다.(250 페이지)

 

하이데거와 소로는 세계와 사물이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감응력의 회복을 주창했다.(255 페이지) 하이데거의 사상은 노장사상이나 불교와 같은 동양사상에 근접해 있다. 하이데거는 기술문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주()가 되고 무엇이 종()이 되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하려 했을 뿐이다.(26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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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감응(感應)이라는 말을 들었다. 스피노자의 개념이기도 하고 일반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스피노자의 affect를 우리나라에서는 정서, 감응 등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반면 affection은 변용으로 사용하는 듯 하다.

전문 용어이기에 특별히 언급할 것은 없는데 다만 문학평론가 최현식 교수가 ‘감응의 시학’이란 책에서 인상적인 용례를 선보여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는 “나는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타자로 존재하는 동시에 나의 내면과 쓰기를, 기록되는 문자들에 의해 관찰되는 타자로 서 있었던 셈”이기에 “이 양가의 타자성을 생각하면 우울한 감응(affection)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한다.(‘내면과 쓰기를‘이란 문구 다음의 콤마는 내가 한 것.) 문장이 복잡하고 장황하다.

a. ‘나는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타자로 존재하는 동시에 나의 내면과 쓰기를 기록되는 문자들에 의해 관찰되는 타자로 서 있었던 셈이기에 이 양가의 타자성을 생각하면 우울한 감응이 아닐 수 없다.’는 최현식 교수의 이 문장을
b.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생각이 관찰되는 나는 우울한 감응을 느낀다.‘ 또는 ’나는 시(인)들의 표현을 관찰하는 한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생각이 관찰되기에 우울한 감응을 느낀다.‘로 고치면 어떨까?

문장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보다 사유 자체가 복잡하기에 저런 문장을 쓰는 듯 하다. .양가의 타자성이란 문구를 고집하다 보니 저런 문장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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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이론은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네“..이런 혜자(惠子)의 시비를 접한 장자(莊子)가 내세운 논리는 소용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만이 소용이 있는 것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장자(莊子)의 말인즉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끝없이 넓지만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발을 디딜 수 있는 넓이 뿐이라는 이유로 발바닥 밑면만을 남겨두고 주위 땅을 밑바닥까지 파버린다면 어떤 결과가 벌어지겠는가란 것이다. 장자는 그래도 발바닥 밑만이 소용있겠는가?란 말로 혜자(惠子)에게 회심의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나는 장자주의자(莊子主義者)이다. 헤프고 산만하고 비경제적으로 많은 책을 읽었다. 하지만 아니가 나이인지라 관심 영역을 좁히고 있다. 하지만 잘 지키기 어려워 난감함을 느낀다. 그래도 장자의 논리에 의거해 내가 딛고 선 영역 주위의 엄청난 땅들이 언제든 내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내가 딛고 선 땅과 그 주위의 땅들은 가변적이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되듯.

 

장자의 혜자의 일화룰 접하며 철학 소설을 생각했다. 나는 철학 소설을 추천하라면 카트린 클레망의 테오의 여행을 추천한다.(뮈리엘 바르베리의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추천하는 사람이 있지만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책이어서 패스.)

 

불문학자 동성식 교수는 앙드레 지드의 소설을 그 안에 성경을 숨긴 작품들이라 칭했다.(‘앙드레 지드, 소설 속에 성경을 숨기다참고) 그의 어법을 따르면 테오의 여행고슴도치의 우아함은 그 안에 철학을 숨긴 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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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지(之)가 쓰기가 되고 있다. 참척(慘慽)을 당했던 세 작가(한무숙, 박경리, 박완서)에 대해 쓰다가 문학평론가 문혜원이 한 ‘시론(詩論)의 실험장(實驗場)‘이란 말을 듣고 김인환 평론가가 오래 전에 한 ‘언어의 연병장(練兵場)‘이란 말을 찾아보았다.

문혜원 교수는 김춘수 시인에 대해 그는 시가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을 깨뜨리고 시가 사유의 산물이거나 시론의 실험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였다고 말했다.(2017년 7월 출간 ’존재와 현상‘ 7 페이지)

반면 김인환 교수는 “그들(중국인들)에게 불교는 단순히 새로운 사상 체계가 아니라 중국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단련하는 언어의 연병장이었다.”는 말을 했다.(1993년 9월 출간 ’상상력과 원근법‘ 188 페이지)

지난 해 나온 평론집을 읽고 출간 25년이 된 책을 찾아보게 되다니...

내가 실험이니 훈련이니 하는 말에 아직 흥미를 느끼는 것은 아직 내 공부가 얕기 때문이리라.

모색(摸索)이란 말, 더구나 암중모색(暗中摸索)이란 말을 좋아하는 아니 아직도 그런 말로 나를 수식하곤 하는 나는 누구일까?

문혜원 교수는 시와 철학이라는 연구의 장(場)이 되어준 김춘수라는 텍스트에 특별한 감사와 우의를 표한다는 말을 했다. 이런 글은 영감을 준다. 아직 나는 감사해야 할 특별한 텍스트를 갖지 못했다.

“변변치 못한 부모에게 마지막까지 ’존경과 사랑‘을 보내준 너에게 마음속으로부터 감사하면서 다시 없이 아름다우면서 또 한없이 두려운 인간의 사랑을 아파한다. 그리고 나에게 아물지 못하는 상처를 준 것은 너를 잃은 일뿐이 아니고 배반이 없었기 때문에 티없이 순수했던 슬픈 사랑이기도 했다는 것이 사무치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더욱 아프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어리석은 어머니다.”

한무숙 작가가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던 아들을 교통 사고로 잃고 쓴 단편 ‘우리 사이 모든 것이’의 구절들이다.

오늘은 이 구절로 마무리 하자. 갈 지(之)가 쓰기의 대미(大尾)를 위해. 내 사유를 단련할 연병장이거나 실험장이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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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

 

1.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지금의 나와 되어야 할 나를 비교한다.
2. 작은 일에 기뻐한다.
3. 지적 대화가 가능한 분을 존경하는 만큼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배우려는 자세를 갖는다.
4. 멀리 볼 줄 안다.(눈 앞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5. 책(가격 대비 산출 결과가 최상이고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어 좋은)을 항상 가까이 한다.
6. 1번 항목과 연관이 있는 사안이지만 나 잘난 맛에 산다.(나의 못난 면을 보고 마음 상해하지 않는다.)
7. 약한 것 같지만 잘 견딘다.
8. 늘 감사한다.
9. 예의를 지키려고 최선을 다한다.
10. 균형 잡히고 논리적인 사유를 하려고 애쓴다.( = 대세에 휩쓸리지 않으려 한다.)

 

단점

 

1. 나는 재능이 없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2. 나는 내 사소한 신상의 글은 문제삼지 않고 다른 사람의 그런 글은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율배반적인 면이 있다.

3. 나는 약속이 미뤄질 때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4. 나는 주어진 시간의 많은 부분을 허비한 뒤 마감 며칠 전부터 허겁지겁 과제를 해결하는 버릇이 있다.

5. 나는 무리하게 글을 짜내는 버릇이 있다.

6. 나의 책 읽기는 대책 없는 또는 길을 잃은 사람의 꼼지락거림인지도 모른다.

7. 나는 진지하면 문제가 잘 해결될 것이라는 신통 찮은 낙관 같은 것이 있다.

8. 나는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비슷한 메리트를 가진 두 개의 선택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경향이 있다.

9. 나는 작은 일에 조바심 내다가도 큰 일에 태평해 중요한 것을 잃을 때가 있다.

10. 나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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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1-1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이렇게 구체적으로 잘 적으실 수 있는지. 아마도 자신을 구체적으로 잘 알고 계시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렇게 잘 못적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읽다보니 저에게서도 발견되는 점을 보게되어 빙그레 웃게 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1-11 12: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공감해주시니 기분 좋습니다.. 좋은 오후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