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부를 계획하고 6개월 코스의 몇몇 프로그램을 생각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흐지부지 모두 놓쳐버렸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 상황은 아직 영어에까지 관심을 둘 처지가 아닌 듯 하다.

의식은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 마음 먹지만 무의식은 아직 그것을 허용할 생각이 없는 듯 하다.
나는 여전히 인문, 특히 읽기와 관련된 강의에 관심이 많다.

읽기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주역 독해’와 ‘옛 그림 읽기’ 수강 신청을 했다.

시도 그렇고 인문서도 그렇고 어려운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주역을 읽으면 기미(幾微: 느낌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일이나 상황의 되어 가는 형편)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또는 기미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주역 독해 강의를 신청했다.

물론 아직 나는 주역의 이분법 즉 철학(哲學)인가 점(占)인가의 논의에 진입할 마음이 없다.

내가 주역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야기거리를 얻기 위해서이다.

허수경 시인의 시집 ‘혼자 가는 먼집’을 소축(小畜: ☴☰: 손(巽)괘가 위에, 건(乾)괘가 아래에 위치)과 이(颐: ☶☳: 간(艮)괘가 위에, 진(震)괘가 아래에 위치) 괘로 풀어듯.(소축은 무엇인가 흘러 나가는 것을 경계할 것을 가르치는 괘, 이는 뜻하는 바를 하루 아침에 이룰 수 없으니 묵묵히 은인자중 할 것을 가르치는 괘이다.)

올 초 소리 소문 없이 나온 한정희, 최경현의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도 읽는다는 말이 들어간다.

작년 이즈음 타계한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벤투의 스케치북’란 책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했다.(15, 17, 20 페이지)

존 버거가 수행했던 일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소설가였고 평론가였고 미술(비평)가였다.

그는 불분명한 것을 구체화하기 위해 그리거나 읽고 썼다. 하지만 그림에 전혀 재능이 없는 나는 오직 읽고 쓰는 일에 매달릴 수 밖에 없다.

주역도 독해하고 그림도 독해해야 한다. 보는 법을 배운다는 릴케의 말(‘말테의 수기‘에서)은 내게 와서 읽는 법을 배운다는 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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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 나희덕이 읽은 우리 시
나희덕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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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관련해 최근 의미 있는 두 가지 발언을 접했다. 한 발언은 논문 지침서에서 발()해진 것으로 그 책은 순전히 저자 자신의 경험으로 쓴 책이라는 말이다. 다른 발언은 역사 소설 창작 지침서에서 발()해진 것으로 어떤 일에 성공한 사람에게 그 과정을 설명하라고 하면 잘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어떻게 하다보니까 되었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반면 실패한 사람들은 말이 많다는 말이다.

 

두 발언은 좋은 지침서의 가치를 강조하는 말인 듯 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쓴 많은 서평도 논문 지침서의 저자처럼 실패하고 좌절하는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역사 소설 지침서의 저자는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말하는 것 같다. 성공한 사람은 잘 말하지 못하고 많은 실패를 거쳐 성공한 사람들은 발언 기회를 얻기 어려울 것 같기 때문이다.

 

나희덕 시인의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읽으며 수필 형식의 시비평집이 내게는 생소하다는 생각을 했다. 시인일 뿐 문학비평가라는 자의식을 가지지 않았었는데 한국 문학비평가들이 시를 너무나 읽을 줄 몰라 시 비평을 썼다는 논자(김정란 교수 지음 비어 있는 중심’ 6 페이지)가 있지만 나희덕 시인은 거의 동시에 자신의 속에서 싹트기 시작한 두(시인으로서의 정체성, 비평가로서의 정체성) 갈망이 그 후로 오래도록 서로를 먹여살렸다고 말한다.

 

표제작이기도 한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보랏빛의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담긴 글이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빨강과 파랑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갖겠다는 의미이지만 시와 시 비평, 읽기와 쓰기, 사유와 실천 사이에서의 그것도 포함되는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첫 단원인 낡은 구두와 <낡은 구두>’에서 시인은 1994년 문익환 목사님의 부음을 실마리로 구두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며 하이데거 및 미당(未堂) 등에 대한 구두론을 펼친다. 백석과 서정주 시인의 고향론을 펼친 고향, 잃어버린 종소리에서 저자는 모든 인간은 방랑자인 동시에 거주자라는 볼노(L. F Bollnow)의 말을 인용한다.(38 페이지) 이 역시 보랏빛 이야기로 수렴하는 듯 하다.

 

탄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시론에서 저자는 시가 태어나는 순간을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라 말한다. 앞서 말한 역사 소설 지침서의 저자의 말을 연상하게 하지만 소설과 시는 다를 것이다.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에서 보랏빛을 역동적인 색으로 정의(59 페이지)한 저자는 그에 맞게(?) “정교한 방법론이나 비평적 테마를 제시해주는 시론보다 또하나의 시적 창조를 추동할 수 있는 맹아적 힘을 가진 시론들에 더 손이 간다.”는 말을 한다.(42 페이지)

 

역동(力動)의 동()과 추동(推動)의 동()이 같은 글자임을 유의하자. “가장 심각한 나의 우둔 속에서/ 새로운 목표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는 김수영 시인의 영롱한 목표의 일부를 인용하며 첨단의 노래와 정지의 미의 관계를 이야기(55 페이지)했던 저자는 장석남 시인과의 대담에서 침묵이란 그 속에 활발한 운동성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비어 있는 것 같지만 꽉 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71 페이지)

 

활발한 운동성을 역동성이란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의외로 자신은 의미를 많이 남겨야 시의 꼴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한다.(78 페이지.. 이 말에 이어 저자는 장석남 시인은 의미를 자꾸 배제하면서도 시가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초기 시는 체험 자체의 진정성만 있다면 시가 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 때문에 언어적으로 상당히 이완되어 있었다고 말한다.(79 페이지)

 

자연은 어떻게 풍경이 되는가에서 바다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시에서 바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김기림, 임화, 이용악, 정지용 등의 바다 시편들에 와서이다. 이들은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경험한 현해탄이라는 구체적 바다를 근거로 바다에 대한 시를 썼다.

 

자연은 어떻게 풍경이 되는가에서 저자는 회화나 문학에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중립적인 공간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묻고(95 페이지) 같은 풍경을 보고도 그것을 느끼고 표현하는 바가 각각 다른 것은 대상에 대한 심미적 인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며(96 페이지) “풍경이란 외부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보는 주체에 의해 선택된 심미적 인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96 페이지)

 

자연은 어떻게 풍경이 되는가는 시와 그림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일례로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에 나오는 저만치라는 시어를 예로 들어 저자는 그것을 새로운 시선과 원근법적 구도로 본다.(101 페이지) ‘자연은 어떻게 풍경이 되는가는 상당히 깊이 있고 정밀한 시선에 의해 쓰여진 시론이다.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그리고 시'란 챕터는 시와 생태, 여성적인 것의 친밀성을 탐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자연에서 생명의 광휘가 사라진 것과 예술작품에서 아우라가 사라진 것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125 페이지) 저자는 시를 사물과 함께 호흡함으로써 1회적인 아우라를 포착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많이 남겨져 있는 영역으로 본다.(126 페이지)

 

저자는 시에 있어서 생태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만남은 순전히 이념적 결합만으로는 안 되고 시인의 몸 자체가 생태적 공간이 될 때라야 비로소 가능해진다고 본다.(130 페이지) 저자는 다양성을 생태적인 것으로 본다.(136 페이지) '창조, 거대한 뿌리의 발견'에서 우리는 김수영 시인이 어떻게 선배 시인들 또는 전통에 대해 의도적 오독을 했고 또 그런 과정을 거쳐 자기 시 세계를 구축했는지 접할 수 있다.

 

저자는 김수영 시인의 독자적 시 세계 구축의 동력을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김지하 시인론인 '불귀(不歸)와 미귀(未歸)의 거리'에서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은 원래부터 구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현실과 문화적 맥락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추상적이 되기도 하고 구체적이 되기도 한다(176, 177 페이지)고 말한 저자는 김지하 시인의 '황토'를 고도로 추상적인 시가 강렬한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었던 사례로 꼽는다. 저자는 불귀와 미귀의 문학적 차이를 논한다.

 

고정희론(‘시대의 염의(殮衣)를 마름질하는 손’)에서 저자는 고정희 시인을 기독교, 민중, 여성이라는 커다란 화두들을 자신의 내면 속에서 하나로 녹여내려고 했던 용광로 같은 시원(始原)이었다고 풀이한다.(222 페이지)

 

김혜순론(‘다성적 공간으로서의 몸’)에서 저자는 김혜순의 시에 나타난 다성적 특징을 다성성이라는 개념의 비평적 발원이기도 한 바흐친의 미학 이론과의 접점들을 통해 해명해 보였다. 저자는 문학이론의 현재적 의미는 언어적인 경계는 물론이고 시대나 장르의 차이를 넘어서 그 대화적 가능성을 발휘할 때 생겨나기 마련이라는 말을 한다.(220 페이지) 이는 바흐친의 미학이론은 도스토예프스키나 라블레 등의 작품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소실미학에 가깝고 그 이론으로 해명하려는 김혜순의 작품은 시임을 염두에 둔 말이다.

 

저자의 글은 김혜순 시론에 이어 장정일의 초기 시론, 김기택의 시론, 최두석 시집 꽃에게 길을 묻는다평론, 이홍섭 시집 숨결평론 등으로 이어진다.

 

보랏빛을 어디에서 오는가를 읽으며 느낀 것은 저자의 시 읽기 내공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점이다. 치밀하고 어떤 때는 어려워 난감함을 갖게도 한다.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생각이 깊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순서인 장철문 시집 바람의 서쪽평론까지 저자의 글은 고르게 안정적이다.

 

김정란 시인이 말한 재단이 아닌 소통(疏通)의 글쓰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선()은 삶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식이고 시()는 삶의 무게를 끝까지 끌어안고 짊어지는 방식이라 말한다.(314 페이지) 저자가 바라보는 장철문 시인은 전기한 두 방식을 함께 지니고 가는 존재이다. 밝힐 수 없지만 김수영 시인에 대한 저자의 두 가지의 해석이 꽤 설득력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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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끝내고 논문 쓰기만 남았음을 일컫는 ‘all but dissertation’이란 단어를 안 것은 ‘퀀트’라는 책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장을 한참 들여다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 것을 보니 몇 해 전 한 수레 분량의 책을 고물상에 내다 버릴 때 처분된 것 같다.

정확한 제목이 ‘퀀트, 물리와 금융에 관한 회고’인 ‘퀀트’는 quantitative analyst(정량 분석가) 즉 물리학을 전공하고 증권 또는 금융 회사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을 말한다.

저자인 이매뉴얼 더만은 컬럼비아 대학 이론 물리학 박사 출신의 금융 공학자이다.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 보니 나온 지 10년이 넘은 책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물리학과 금융에 두루 관심을 가졌었다.

각설(却說)하고 에세이를 쓰려 했지만 논문 같다는 평을 들은 한 페친의 사례를 보며 그 분의 타임라인에 ‘all but dissertation이 아니라 all but essay네요.’란 댓글을 달았다.

그 페친이 쓰려 한 것은 경수필(輕隨筆)인 miscellany가 아닌 중수필(重隨筆)인 essay일 것이다. 신상 이야기가 아닌 한자 이야기이니.

나는 요즘 논문, 비평, 문학 작품(시, 소설)은 물론 서평마저 어렵게만 느껴진다. 어렵지 않은 것이 없는 듯 하다.

페친 김정란 교수님의 ‘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이란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글 쓰는 자의 영혼의 결이 환히 드러나,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축제와 같은 글쓰기”란 말이다.

이는 교수님이 쓰기를 원하는 유형의 글이다. 그것들은 조르주 풀레의 형이상학적 비평, 리샤르의 우아하고 섬세한 꼼꼼히 읽기, 얀켈레비치의 가볍고 명랑한, 그러나 너무나 명석한 스토이시즘 등의 글로 교수님은 이런 글들을 흠모한다는 말을 했다.

리샤르는 장 피에르 리샤르인 듯 하다. 얀켈레비치는 장켈레비치라고도 불리는데 2016년 11월 ‘죽음에 대하여’란 책이 번역 출판되었다.

얀(장)켈레비치의 글이 많이 인용된 책으로 김형효 교수의 ‘베르그송의 철학’을 들 수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얀(장)켈레비치의 여러 말 가운데 ‘새는 날고자 했기 때문에 날개를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날 수 있었다는 말’(‘베르그송의 철학’ 142 페이지)이 가장 인상적이다.

다시 각설(却說)하고 말하자면 에세이가 많이 대접받고 읽혔으면 좋겠다.

인용된 얀(장)켈레비치의 글이 “가볍고 명랑한, 그러나 너무나 명석한 스토이시즘”적 글쓰기인지 모르지만 인상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올해는 프랑스 비평가들의 글에 조금이라도 친숙해지는 시간들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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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반항을 노래하다 박홍규의 호모 크리티쿠스 4
박홍규 지음 / 푸른들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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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교수의 헤세, 반항을 노래하다를 읽었습니다. 헤세가 주관적인 영역에 사로잡혀 세상일에 무심한 채 사춘기적 고뇌를 작품화한 작가라는 세평이 잘못되었음을 40세가 다 되어서야 깨달았고 50이 넘어서야 그를 더욱 뜨겁게 좋아하게 되었다는 박홍규 교수의 책입니다.

 

우리의 철학이 얼마 전까지 2차대전시 일본의 동맹국이었던 독일의 철학이었던 것처럼 헤세의 데미안도 그런 내력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엽 일본이 극단적인 군국주의하에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할 때 일본에서 많이 읽혀 우리나라에서도 읽힌 책이 헤세의 데미안입니다.

 

물론 저자가 헤세를 완전히 긍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헤세에 공감하는 만큼 회의합니다. 헤세를 비판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헤세가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가졌었다는 점입니다. 헤세가 바라본 인도나 중국의 종교는 카스트제도나 봉건제도를 정당화하는 종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40 페이지)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헤세가 대단히 반사회적인 음양사(陰陽師)나 점쟁이 도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화가 나서입니다.(음양사는 천문天文, 역수曆數, 풍수지리 등을 연구하여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헤세는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아니지만 그가 평생 맞서 싸운 시민적 삶은 자본주의적 삶이고 추구한 예술가의 삶은 반자본주의적 삶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요 논지입니다. 저자는 헤세를 반국가주의적 아나키스트로 정의합니다. 그래서 헤세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흥미로운 내용들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헤세가 스승이나 친구들을 나름으로 이해하면서도 언제나 그들을 뛰어넘으려 했다는 점입니다.(34, 35 페이지)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는 부처마저 떠났고 세상에 맞서기 위한 반항 체험의 이야기를 펼쳤습니다.(41 페이지)

 

헤세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고뇌를 극복하기보다 고뇌 때문에 죽습니다. 대부분 교양적 시민이 아니라 비교양적인 본능에 충실한 반시민적 인간상을 지향했습니다.(46 페이지) 저자는 전혜린의 헤세 해석을 비판합니다. 헤세 작품에 통틀어 나타나는 주제는 자아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참된 자아로 가는 길이었으며 이 모토에 그는 끝없이 충실했다는 전혜린의 말에 대해 자아로부터의 해방은 무엇이고 참된 자아는 무엇인가 묻는 것입니다.(47 페이지)

 

그러고 보니 자아로부터의 해방과 참된 자아라는 말은 너무 막연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는 그런 난해한 자아론보다 독일의 현실에 저항하는 개인의 자아, 즉 개성이라는 것이 강조될 수 밖에 없는 억압적인 현실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자는 헤세가 말한 자아란 사회나 역사, 정치 등에 의해 파괴된 자아이지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자아가 아니라고 봅니다. 헤세는 줄곧 규격에 맞추어지지 않은 자연아 개인이었고 그것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50 페이지) 헤세의 제도권 교육은 중 2 중퇴로 끝났고 그 이후 그는 철저히 독학을 했습니다.

 

까닭 모를 외로움이나 알프스를 향한 향수가 아닌 역사나 민족, 대중으로부터 고독을 느낀 헤세는 현 사회를 부정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반사회적이었지만 유토피아적 공동체나 아름다운 자연 속의 삶을 강력하게 추구했기에 누구보다 사회적입니다.(53 페이지) 저자는 헤세를 독일문학의 가장 우직한 반항아라 부른 라니츠키를 예로 들며 헤세는 니체의 유일한 제자라 말합니다.(56 페이지)

 

헤세는 니체에 심취했습니다.(87 페이지) 저자는 괴테 이래 독일 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고독한 자아성장이라는 주제는 독일사회 특히 교육제도에 대한 고뇌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88 페이지) 헤세는 예수와 톨스토이의 가르침을 따라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와 같은 삶을 꿈꾸었습니다.(99 페이지)

 

저자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단순한 청춘의 애가(哀歌)가 아니라 체제 비판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이 작품은 가정과 학교와 직장이라는 체제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은 어느 10대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기서 정치와 경제는 구체적인 체제로 등장하지 않지만 10대의 생활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적인 가정, 학교, 직장은 이미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전제하는 것입니다.(121 페이지)

 

수레바퀴 아래서는 자전적인 소설이자 사회비판적인 작품이었지만 다른 작가들과 같이 1900년 전후에 유행한 학교 소설의 유형을 따른 것입니다.(123 페이지) 저자는 헤세가 역사소설이든 시대소설이든 환상소설이든 그 어떤 픽션도 쓰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예 소설가로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말합니다.(57 페이지)

 

이 말에 맞게 저자는 헤세의 작품들 속 인물들의 심리나 상황을 예시하며 헤세의 심리나 상황을 설명합니다. 가령 1910년 작품인 게르트루트에 나오는 나의 내적인 운명은 내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며 달든 쓰든 간에 그것은 당연히 내 것이며 그것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책임지려고 생각하는 것이다.”란 구절을 보고 저자는 이처럼 운명을 수용하며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태도는 그 전의 헤세가 자신의 삶에 대해 가졌던 방황이 어느 정도 극복되었음을 보여주지만 작중 두 음악가의 대립은 여전히 헤세 마음의 대립을 상징한다고 말합니다.(153 페이지)

 

1916년 헤세는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습니다. 전쟁의 충격과 포로들을 위한 격무, 막내 아들 마르틴의 중병, 부부관계의 위기 등의 탓이었습니다. 헤세를 심리치료해준 사람은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입니다. 헤세는 랑을 통해 융을 알게 되었습니다. 심리학자들과의 만남 덕분에 헤세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습니다.

 

자신 속에 있던 무의식의 세계는 막연하고 단편적인 것이었으나 정신분석에 의해 그 전모를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181 페이지) 저자는 전쟁이 한창인 1916년부터 쓰여진 데미안을 통해 헤세가 강조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중요하고 영원하고 신성한 것이란 말을 예시하며 데미안은 무더기 총알받이로 죽는 비인간적인 전쟁에 대한 거부이자 이를 초래한 국가주의에 대한 비판이지 추상적인 한 인간의 성장사라는 교육학적인 도식에 의해 쓰인 성장소설이 아니라 말합니다.(18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데미안에서 말해진 깨어나야 할 알은 낡은 유럽입니다.(191 페이지) 헤세는 태어날 때부터 종교적이었고 평생 종교적이었지만 그의 종교성은 특정 종단이나 종파와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헤세 안에 종교적 감성이 자리했다는 의미입니다.(219 페이지) 헤세에게 모든 종교는 같았습니다. 그의 그런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싯다르타입니다.(221 페이지)

 

황야의 이리1960년대에 히피 열풍 속에서 인기를 모은 작품으로 유명한데 헤세 소설 중 가장 자서전적인 작품입니다.(234 페이지) 저자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니체류의 아폴론적 인간상과 디오니소스적 인간상의 대비가 아닌 정신과 자연의 불일치가 초래한 체제와 시대의 문제를 풍자한 작품으로 봅니다.(256 페이지)

 

1931년 무렵 헤세는 히틀러에 반대하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라는 편지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는 과거부터 공산주의를 지지했으나 정당 소속이란 그에게 혐오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파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이 무렵 헤세는 유리알 유희를 쓰기 시작합니다.(274 페이지)

 

1945년 이후 유리알 유희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함께 주목을 받았습니다. 파시즘과 니체를 비판한 파우스트 박사는 문명비판과 근대비판인 동시에 사회현실로부터의 추상화라는 점에서 유리알 유희와 공통점을 보입니다.(275 페이지) ‘유리알 유희2400년경 어느 전기 작가가 자기보다 200년 앞선 시대인 2200년경의 전설적 유리알 유희 명인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를 쓰는 것으로 되어 있는 미래 소설입니다.(280 페이지)

 

헤세는 정신적으로 억압받는 시대에 정신적으로 해방된 가상의 미래를 빌려 그런 정신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여 현실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저자는 씁니다.(281 페이지) ‘유리알 유희의 집필 시기는 1931년에서 1943년으로 나치의 집권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유리알 유희에서 주목할 부분은 헤세가 평생 추구한 개인화나 개성화가 그가 속한 집단과 조화를 이루는 이상사회의 묘사 부분입니다. 헤세는 이단을 중시했습니다.(283 페이지) 피타고라스파, 그노시스파, 중세 스콜라 철학...

 

헤세는 자신을 숭배하는 것을 혐오하고 자기 책을 통해 고집쟁이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304 페이지) 헤세는 사랑이 없는 독서, 경외감 없는 지식, 따스한 마음이 없는 교육 등을 정신세계에 있어서 최악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304 페이지) 저자는 헤세에게서 체 게바라를 봅니다. 헤세의 삶과 문학은 개인의 독립선언이라는 것이 저자의 결론입니다.(309 페이지) 헤세는 잘못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반항할 것을 주문했습니다.(311 페이지) 저자는 말합니다. 반항하기에 인간이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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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성악곡들(칸타타,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b 단조 미사,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승천 오라토리오, 마니피카트, 루터교 미사 등)을 다시 들으며 고향 집에 돌아온 안온한 마음을 느꼈다.

그의 성악곡들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통곡하는 장면을 담은 마태 수난곡 중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의미의 ‘Erbarne dich, mein Gott’ 같은 슬픈 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중 ‘준비하라 시온이여, 경건한 마음으로’란 뜻의 ‘Bereite dich, Zion, mit zärtlichen Trieben’ 같은 역동적인 곡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오늘 월간 ‘현대시‘ 측에 요청해 고옥주 시인의 ’청령포(淸泠浦) 일기‘를 이메일로 받았다. 슬프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통렬(痛烈)하다고 해야 맞을 ‘Erbarne dich, mein Gott’를 듣고 있는 중에 요청한 시가 왔다.

요청한 건이 그렇게 빨리 해결될 줄 몰랐다. “..슬픔이 너무 무거워/ 작은 새는 산을 넘지 못한다/ 남은 시간이 얼마일까..”란 부분과 베드로의 고통의 고백 부분이 겹치니 배가(倍加)되는 어떤 아우라가 느껴졌다.

지금껏 5천번은 들었을 ‘하느님 우편에 앉으신 주(主)’란 의미의 ‘qui sedes ad dextram patris’(b 단조 미사 중 알토 아리아)를 비롯 바흐의 성악곡들은 최고이다.

올해는 바흐 성악곡들을 많이 들을 생각이다. 슬픔과 역동이라 했지만 그 두 정조(情調)에 포괄되지 않는 다양한 느낌을 찾아 공부하듯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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