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융학파의 심리학자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책이다. 신화적 요소와 페미니즘이 만난 영성 넘치는 이야기 책이다.(이 책의 원제는 ‘Women who run with the wolves‘이다.)

이 책에서 에스테스는 창의력은 어떤 대상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깊어서 창조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경우에도 나타난다고 말한다.(283 페이지)

독문학자 정은경 교수도 글과 말은 반드시 해박한 지식과 전문적인 식견이 아니라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싶다는 어떤 욕망과 정념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맥락이 같은 말을 했다.(‘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 6 페이지)

중요한 사실은 욕망과 정념이 글과 말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작하도록 한다는 점이지만 욕망과 정념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여성 본연의 본능적 힘을 여걸(女傑)이라 말한다. 에스테스에 의하면 건강한 여성은 늑대와 아주 비슷해서 활력이 있고 힘과 생기가 넘치며 자기 영역을 잘 지킬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북돋우며 창의적이고 충직하다.(20 페이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라는 표현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나는 창의력(에스테스의 용어), 욕망과 정념(정은경 교수의 용어), 그리고 따스한 늑대의 창조적 에너지(추천사를 쓴 김승희 교수의 표현)에 관심을 갖는다.

나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이라는 빛나는 은유를 사랑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어제, 오늘 연이어 두 분의 타계 소식을 접했다. 어제는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선생님, 오늘은 혈기도 사범 우혈(宇穴) 허장수 선생님. 모두 1936년생으로 내 어머니와 같은 연세시다. 황병기 선생님은 지난 해 12월 한무숙 문학관에 들렀을 때 많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었고 허장수 선생님은 지난 해 여름 갑자기 타계하신 것을 오늘 확인한 것이다.

 

잘 아시듯 황병기 선생님의 아내 한말숙 선생님이 한무숙 선생님의 동생이다. 지난 해 3월경 창덕궁 앞의 혈기도장을 방문해 선생님을 뵙고 일이 끝나는 5월 이후 등록할 것이라는 말씀을 드렸었다.

 

그리고 4월경에는 그 분의 신간 몸이 나의 주인이다를 샀다. 82세의 연세에도 다리를 찢고 찍으신 사진이 인상적인 책이다. 물론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슬그머니 생각을 접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제 문학을 좋아하는 분들 앞에서 나희덕 시인의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란 시를 외우고 그 의미를 설명한 것이 기억난다.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는 목련 그늘이 좋으니 꽃 지기 전에 놀러오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친구에게 끝내 놀러가지 못하고 그가 타계한 뒤인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놀러간다는 시이다.

 

우혈 선생님은 20대 후반 설악산에서 만난 천우(天宇) 선생님이란 분으로부터 17년간의 산중 수련을 받고 하산해 오늘에 이른 분이시다. 어제는 타계 사실도 모르고 지인에게 그 분 이야기를 했었다. 책에서 무엇보다 흥미를 끄는 부분은 스승인 천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생님과 함께 설악산에서 산 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 선생님의 영()이 암굴을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우혈 선생님은 이를 천우 선생님이 뼈와 가죽만 암굴에 남겨두고 정좌한 채 세수(歲數) 107세로 시해등선(尸解登仙)하신 것이라고 풀었다.

 

우혈 선생님은 세수 82세로 타계하셨다. 건강하신 분이 왜 갑자기 타계하셨을까? 타계 소식을 알린 한 네이버 블로거에 의하면 혈기도는 행공 하나하나가 고되고 통증이 큰 수련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달은 고사하고 한 두 번만에 중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자세조차 잡기 힘들고 무엇보다 호흡이 아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초심자는 익숙한 분들의 동작을 흉내내는 것도 어렵고 보통의 경우 창피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해 수련하는 두 시간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꽤 힘들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몇 달을 버티다 보면 큰 고비는 넘기게 되지만 그럼에도 은은한 통증은 계속 되는 이 수련을 왜 하냐고 묻는다면 몸의 변화를 느끼기 때문이라고 그 블로거는 말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고 고통 속에서도 몸이 시원해지고 가뿐하다는 것이다. 압권(壓卷)이라 할 것은 권하지는 못하지만 인연이 있는 분이라면 꾸준히 하셔서 도움이 되길 바란다는 그 블로거의 말이다.

 

나는 선생님의 타계가 믿어지지 않아 도장에 전화를 하고 말았다. 사고사(事故死)가 아니라면 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과 몸이라는 소우주의 질서는 별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허수경 시인의 혼자 가는 먼 집의 한 구절을 생각하게 된다.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陳設)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 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치병(治病)과 환후(患候)가 따로인 경우가 있는 것처럼 세상사는 제 길이 있는 것 같다. 선생님의 타계는 요즘 암()이란 몸의 정상적인 질서를 벗어난 세포가 무한 분열이라는 자기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하는 나에게 하나의 숙제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 선생님의 유품인 '몸이 나의 주인이다'를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The future is already here it's just not evenly distributed.)”란 말을 했다. ‘뉴로맨서는 뉴 로맨서(new romancer: 새로운 전기傳奇 작가)가 아니라 뉴로 맨서(neuro mancer)이다.

 

신경(神經) 주술사(呪術師), 신경(神經) 예언가(豫言家) 정도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사이버펑크 장르의 대표 소설가로 꼽히는 깁슨은 광역 인터넷을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들었다.

 

물론 조크로 던진 말이지만 꽤 일리 있게 여겨진다. 기술 발달 여부에 따라 참 많은 것이 달라지는 세계가 아닌가. 양자(量子) 물리학 박사 마이클 브룩스는 정보는 물리학적이라는 물리학자 롤프 란다우어(Rolf Landauer: 1927 1999)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가 찾은 모든 정보는 모종의 물리계와 연결된다고 덧붙인다.

 

가령 생명체의 정보는 DNA 가닥의 분자 배열을 따라 운반되며 컴퓨터에서는 정보가 전기 회로에 연결되어 있는 축전기의 전하를 통해 암호화되며 정보는 광자(光子)의 양자 상태에 저장되어 전화 통화나 광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물리학을 낳은 위대한 질문들‘ 333 페이지)

 

() 선생님의 도움으로 생전 처음 usb를 사(20171221) 자료를 만들어 담고 어제 처음으로 파워포인트를 활용한 강의를 하고 돌아오며 내가 떠올린 것은 바로 깁슨의 말이었다. 이렇게 유쾌했던 어제를 돌이키지만 나는 요즘 교양 과학 책을 거의 읽지 못해 점점 인문학 영역에서만 노는 것 같다는 생각에 조금 우울하다.

 

생물학자 데이비드 조지 헤스컬의 '나무의 노래', 마쓰바라 다카히코의 '물리학은 처음인데요', 작곡(석사) 및 물리학(박사)을 전공한 존 파웰의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 등의 책이 내 치우침을 바로 잡아 줄 책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강의에서 석연경 시인, 그리고 수유리(水逾里)를 무너미라 말씀하시던 문익환 목사 님에 대해 이야기했다.(逾; 넘을 유)

저녁 무렵 종로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석연경 시인의 시집을 보았고 이충렬 선생의 ‘간송 전형필‘을 검색해 수유리 중고 서점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이한 느낌이 든다. 노원행 열차를 두 대나 그냥 보내야 할 정도로 퇴근 무렵의 인파는 대단하다.

종로 알라딘에서는 김광식 선생의 ‘한용운‘을 두고 한참 망설이다가 포기했다.

김종주 정신과 의사의 ‘이청준과 라깡‘에 나오는 만해 관련 자료를 읽고 사도 사야 할 것이란 생각에 그런 것이다.

책을 고르는 것은 늘 어렵다. 종로 알라딘에서 ˝사러 가는 동안 원하는 책이 팔리면 어떻게 하지요?˝라고 물었더니 직원은 ˝운명이지요˝란 말을 했다.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은 사람이 평범한 책 한 권에 대해 쓸 말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혹시 책 한 권도 누군가에겐 우주와 같은 무게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책, 책, 책.. 오수연 작가가 ‘부엌‘이란 장편 소설에서 한 말이 생각난다.

˝먹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먹기 위해서는 음식을 만들어야 하고 요리사가 아니어도 부엌에서 인생이 간다.˝

이 구절을 ˝읽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읽기 위해서는 책방을 돌아다녀야 하고 작가가 아니어도 서점에서 인생이 간다.˝라는 말로 바꾸어 본다.

물론 읽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언제고..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옛 그림 읽는 법 - 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감상의 기술
이종수 지음 / 유유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종수 미술사학자의 '옛 그림 읽는 법''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감상의 기술'을 부제로 한다. 저자는 화가의 의도를 헤아리는 그림 독법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다. 앞 부분에서 저자는 겸재 정선을 이야기한다.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분이다. 진경산수화는 산수화의 한 갈래이다.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풍속화 등이 있다. ()는 장르 전체를 의미하고 도()는 개별 작품을 의미한다. 중국 당나라의 미술사가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에 의하면 종병(宗炳)이란 사람은 자신의 늙음과 병고를 슬퍼하며 산수를 즐기고 싶으나 그곳으로 갈 수 없을 때 산수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느낌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누워서 산수를 감상한다는 의미의 와유란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진경산수화의 상대 개념은 정통 산수화, 관념 산수화 등이다. 상상 속의 경치를 가짜라고 할 수는 없다. 관념 산수화는 특정 지명에 얽매이면 안 되었다. 누구나 좋아하게 하기 위한 포석이다.

 

진경산수화는 정선으로 인해 하나의 장르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정선 이전에도 진경을 그린 화가가 있었지만 정선에 이르러 하나의 장르로 완성된 것이다. 진짜 경치를, 그것도 한양에서 먼 금강산을 그려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렸냐는 의문은 누구를 위해 그렸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60 페이지)

 

산수화를 즐기고 주문하는 이의 대부분은 사대부 남성이었다. 17세기 조선의 시인, 묵객 사이에는 산수 유람이 유행처럼 번졌다. 첫 손 꼽히는 유람지는 금강산이었다. 산수 유람이 먼저였는지 우리 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먼저였는지 단정짓기 어렵다.

 

정선 이전의 진짜 그림은 실경(實景)이라 했다. 정선의 진경이란 말에는 실경이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진경산수화에는 기록 이상의 의미 즉 감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정선은 자신이 본 산수를 어떻게 더 멋지게 재현할지에 관심을 쏟았다. 단적으로 말해 정선은 실경산수화를 의뢰받았는데 진경산수화로 답한 것이다.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려는 의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관념산수화가 그려지다가 실경산수화가 나타나고 실경산수화에 회화적인 멋을 더해 진경산수화가 되었다. 진경산수화가 등장한 이후에도 대세는 관념산수화였다. 정선도 만폭동을 그리기 전은 물론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한 이후에도 수많은 관념산수화를 그렸다. 감상하는 사람이 화가에게 기대한 것은 와유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산수화이지 실제의 장소를 그대로 옮겨낸 지형도는 아닐 것이다.(79 페이지)

 

'만폭동'은 소재가 꽤 촘촘하게 배치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실제 금강산에서 그린 그림이지만 화면 구도처럼 모두를 볼 수 있는 장소는 없다.(88 페이지) 정선(1676 - 1759)은 자신이 직접 본 각각의 실경을 하나의 화면에 불러들인 것이다.(89 페이지) 다시점 그림은 옛 사람들에게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방식이었다.

 

정선은 진경다움을 살리면서 이상적인 산수의 아름다움을 함께 얻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실경으로서의 진경(眞景)에 머물지 않고 선경(仙境)으로서의 진경(眞境)이라는 평을 듣는다.(94 페이지)

 

일반적으로 풍경화는 다시점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화가를 중심에 두고 그의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그림이 풍경화라면 자연을 중심에 두고 그 모습을 여러 시점으로 담아낸 그림이 산수화이다.(97 페이지) 동양의 산수화를 보고 원근법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장성을 중시하는 정도로 볼 때 진경산수화는 이전의 산수화에 비해 풍경화에 매우 가까운 그림이다.(98 페이지) '만폭동'은 여러 시점을 한 화면에 모았다고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전체 구도가 아주 자연스럽다.(99 페이지) 실경과 얼마나 닮았느냐가 진경산수화의 수준을 가늠하는 물음이 아닌 것처럼 이상적인 산수화에 가깝다고 해서 더 나은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화가가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가, 그것이 작품에 어떻게 구현되었는가가 관건이다.

 

정선은 과장과 생략에 능했다. 더 나은 화면을 위해 강조할 것은 강조하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렸다.(100 페이지) 준법(皴法)의 준은 주름 준으로 준법은 산의 주름(굴곡이나 음영)을 그리는 법을 의미한다.(103 페이지) 준법은 실제 산수의 느낌을 잘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준법은 일종의 정형화된 양식이다.

 

정선에게는 변형하든 창조하든 조선 땅에 어울리는 새로운 화법이 필요했다. 산세에 어울리는 준법을 스스로 만들기, 이것이 선배 산수화가들이 정선에게 가르쳐 준 정신이었다. 정선은 실제와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의무감에 갇히지 않고 화가로서 더 나은 그림을 보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아 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준법을 만든 것이다.

 

정선은 자신의 겸재준이라는 자신의 독특한 준법에 충실할 때 좋은 작품을 남겼다. 준법 사용은 화파 형성의 기준이 된다. 옛 그림 가운데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식이 축화(軸畵)이다.(161 페이지) 두루마리는 옆으로 긴 형식의 그림이고 축화는 위 아래로 긴 형태의 그림이다. 축은 궤() 또는 족()이라고도 불린다.(: 조릿대 족, : 길 궤)

 

화가의 이름과 그림 제목 등을 기록한 것을 관() 또는 관지(款識)라고 한다.(180 페이지) 여기에 인장까지 찍으면 낙관(落款)이라 한다. 삼재(三齋)와 삼원(三園)이 있다. 삼재는 세 명의 문인 화가로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이고 삼원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이다.

 

동양화에서 인장 만큼이나 독특한 요소가 화제(畫題)이다. 제시(題詩)나 찬() 등이 있다.(190 페이지) 동양화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림과 글이 하나의 화면에 등장한 것은 아니다.(192 페이지) 그림을 그리면서 어울리는 시를 더하기도 했지만 시나 이야기를 화제로 삼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저자는 모른다면 볼 수 없겠지만 안다고 해서 모두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마지막 조각은 자신만의 감상으로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198 페이지) 감상의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선의 동시대 화가 조영석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조선 산수화의 개벽이라 했다. 반면 추사 김정희는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조선 그림을 망쳐놓았다고 거침없이 혹평했다.(199 페이지) 그림 평가는 기준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200 페이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1-31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18-01-31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