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월 달까지 월간 사보 신청합니다
(매년 마다 보내주셔도 상관없습니다.)
성명: 전**
주소: 전라북도 군산시 S동 S상떼빌아파트 ***동 ****호
우편번호: 54017입니다.......
이곳으로 보내주세요

지난 해11월에 이어 올 1월 전**이란 분이 제 블로그에 남긴 댓글입니다. 누군데 이런 글을 남겼을까요? 더구나 사보라니요..

그러다가 이 분이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조은 시인의 시 ‘동질(同質)’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는 시인이 이른 아침 받은 이런 문자로부터 비롯된 시입니다.

“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시인은 아무리 봐도 모르는 사람의 글이어서 삭제하려다가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한 젊은이를 보고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 잡을 검불조차 없었던 시절이 자신에게도 있었음을 떠올리고는 이런 답을 보냈다고 합니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저와 그 전**이란 분은 이상한 관계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그 댓글을 삭제하지도 않고 있고 그 분은 독촉(督促)도 하지 않고 두 차례나 같은 내용의 댓글을 소신껏 남겼으니 말입니다.

문득 저도 그 사람처럼 모르는 누군가의 블로그에 빨래를 널듯 슬쩍 제 답답한 사연을 걸어두고 싶은 마음이 스쳐갑니다.

희망이나 주문(呪文)을 걸 듯. 그리고 인간사 모든 유형이 걸린 점괘를 잡듯 희망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런 생각들이 지나가는 아침입니다. 모두 안녕들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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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강남순 지음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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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교수의 '배움에 관하여'는 배움, 비판적 성찰, 일상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한 책이다. 그 세 개념은 저자의 사유의 장에서 각기 해명되고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친근한 대상이 된다.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처럼 서로 얽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가르침과 배움의 변증법을 가르침/ 배움이라 표현하는 저자는 비판적 성찰을 위해 필요한 묘사적 단계, 분석적 단계, 비판적 단계의 세 과정을 설명하며 사유 - 판단 - 행동의 순환을 통한 진정한 배움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과 세계를 변화시킬 원동력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사실은 비판적 성찰이 없는 앎은 타자는 물론 자신까지 억압과 차별적 구조 속에 방치한다는 점이다. 세 가지 키워드에 관한 책이지만 전체 구성은 다섯 장으로 되어 있다. 1장 살아감, 그 배움의 여정, 2장 살아 있는 텍스트, 타자의 얼굴들, 3장 사랑, 치열한 생명 긍정의 희망, 4장 인식의 사각지대를 넘어, 5장 감히 스스로 생각하라 등이다.

 

자신의 책을 비판적 성찰을 일상화하여 삶의 주변을 들여다본 배움의 이야기들을 담은 책으로 소개하는 저자는 첫 순서에 134cm의 키에 두 팔이 없는 음악가 토마스 크리스토프의 사연을 언급하며 그가 늘 자신에게 진실하고 자신의 고유한 발자국을 만들어가야 하는 당위를 스스로에게 부과했다는 사실을 더한다.

 

홀로 있을 때 삼간다는 의미의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지만 저자가 말하는 비판적 성찰, 그리고 토마스 크리스토프가 말한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야말로 신독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각자의 삶을 이루는 이야기들은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져버린다. 최근 윤동주 시인을 코스모폴리터니즘이라는 개념으로 소개했는데 저자의 책에서 그것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세계 시민으로 보는 입장이고 그런 낮꿈 꾸기의 주체에 의해 인류 사회의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24 페이지)

 

저자는 생명의 태어남은 그 반복성에도 불구하고 매번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시간임을 강조하며 생명은 반복성과 고유성을 지닌 새로운 태어남을 매번 선택해야 한다고 덧붙인다.(33 페이지)

 

저자는 이론화하기 위해 우리는 고향을 떠나야 한다는 제임스 클리포드의 말을 인용한다.(80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진정한 고향이란 고착되거나 익숙하기만 한 곳이 아니라 익숙함과 낯섦이 무수히 교차하는 공간이며 새로운 고향성이 부단히 창출되어야 하는 곳이다.

 

이 부분에서 장소는 고정되어 있지만 공간은 언제나 새롭게 창출되고 의미 부여가 이루어지며 형성된다는 말(67 페이지)을 인용해야 하리라. 나의 실존이란 언제나 함께 실존이라는 장 뤽 낭시의 말을 인용(65 페이지)한 저자는 자기 사랑과 타자 사랑이 깊숙하게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90 페이지)

 

이 말은 우리는 혼자이면서 혼자가 아니라는 말(133 페이지)과 공명한다. 책 전편을 통해 드러나는 것 가운데 저자의 가장 인상적인 덕목은 생명 사랑, 열린 감수성을 가졌다는 점이다. 가령 자살을 이야기하며 저자가 철학이나 종교가 그 자체의 권력 유지가 아니라 인간의 의미 물음에 대한 갈망에 진지하게 개입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런 점을 느낀다.(111 페이지)

 

저자는 슬픔과 기쁨, 비극과 희극, 어두움과 밝음, 우울함과 즐거움은 각기 반대가 아니며 서로 나선형처럼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면서 얽혀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삶이라 말한다.(123 페이지)

 

레비나스의 얼굴의 철학을 거론(113 페이지)하는 저자는 진지한 눈빛에 대한 깊은 목마름 때문에 이런 저런 글을 쓰고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118 페이지) 저자는 편지의 의미를 중시한다. 저자에 의하면 학술서들이 아닌 개인이 주고 받은 편지는 그 한 사람이 지닌 참으로 다양한 존재의 결을 느끼게 한다.(23 페이지)

 

또한 편지는 사람 사이의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이 만나는 곳이며 자신과 타자가 함께 아름다운 춤을 추는 공간이다.(133 페이지) 저자는 자신과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는 와 또 다른 가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성립된다.(137 페이지)

 

저자는 데리다의 사상에 큰 감명을 얻고 그의 사후 그와 일방적인 데이트를 시작한 분이다. 저자가 개인적으로 데리다에게 끌리기 시작한 것은 그의 유명한 학문적 책이 아닌 그가 암으로 죽기 바로 전 신문과 한 인터뷰 기사를 보고서였다.(154 페이지)

 

데리다는 진정한 우정이나 사랑은 상대를 안다는 인식이 아니라 알지 못함의 차원을 끊임없이 남겨 놓고 받아들이는 것이라 강조했다. 저자는 환대, 정의, 사랑이라는 세 가치를 구체적 삶의 정황에서 실현해내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는 신의 현존을 순간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신() 이해를 언급한다.(164 페이지)

 

저자는 학생으로부터, 또는 가르치는 과정을 통해 배운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한다. 참으로 열린 자세이고 겸허한 자세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깨우침을 준 학생에 대해 선생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167 페이지)

 

저자는 변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사실상 자신의 내면적인 권력 확장의 욕망을 은닉하곤 하는 이들은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대체불가능한 개별적인 얼굴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178 페이지) 저자는 물음표를 붙이는 행위의 의미를 강조한다.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온 것들을 비판적 성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 물음표를 붙이는 행위에는 있다.

 

저자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라고 해서 그 집단이 선과 악이 상충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을 초월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201 페이지) 저자는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은 의도성과는 무관하게 일어나며(206, 207 페이지), 여성 혐오는 여성들에 의해서도 발생한다고 주장(213 페이지)하고 차별 방지를 위한 지속적 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한다.(208 페이지)

 

저자는 지식의 증가 자체가 인류의 진보를 가져오는 데 기여하지 못하며 오히려 그 지식이 적절한 목적을 이루는 데 쓰일 때에만 인류에게 중요한 구속(救贖)적 의미와 힘을 부여하는 의미가 될 것이라 말한 칸트를 언급(218 페이지)하고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의 자발적 동의에 의하여 자신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지를 밝힌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언급한다.(223 페이지)

 

저자는 성녀(마리아)와 악녀(이브)의 이분법은 남성중심적 인간관 및 세계관에서 연원한다고 본다.(222 페이지) 저자는 우리 사회가 폭력과 차별적 관행에 대한 예민성(문제시하는 정신)을 갖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저자에 의하면 성서는 억압적 전통과 해방적 전통을 동시에 담고 있다. 따라서 해방적 가치를 지닌 절대적 진리와 시대 문화적 제약 속에서 전개된 억압적 가치는 지닌 상대적 진리를 구분해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과제이다.(231 페이지)

 

저자는 성서 곳곳에 여성이 집단 성폭행의 대상으로 주어지는 구절(창세기 19, 사사기 19)이 있음을 예시하며 성서를 따른다며 성소수자들을 혐오하는 이들이 과연 이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딸, 아내, 며느리 등을 집단 성폭행의 대상으로 다른 남성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가, 묻는다.(232 페이지)

 

저자는 예수는 인간 섹슈얼리티의 다양한 양태에 관하여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무조건적 환대, 연민, 사랑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나와 다른 타자를 향한 혐오를 단호히 넘어서야 할 것이다.(233 페이지)

 

진정한 변혁은 하나의 조건이 아닌 다양하고 다층적인 필요조건들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하며 그때 진정한 변화와 변혁을 위한 충분조건의 터가 마련된다.(237 페이지) 저자의 글을 통해 우리는 작은 변화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섹슈얼리티를 인간의 성적 행위 방식을 넘어 존재 방식으로 볼 때 성적 지향이 선택이냐 타고난 것이냐의 논쟁도 사실상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241 페이지) 한 사람이 누구인가란 문제는 그 사람의 글과 말, 그리고 타자에 대한 시선과 다층적 행위로 드러난다.

 

존재의 외부성은 내부성과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얽히고설켜 있다.(244 페이지) 저자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를 규정하는 것의 지독한 한계와 위험성을 지시하는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데리다의 말을 예로 들며 열린 정체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저자는 장애를 나타내는 영어가 handicapped, disabled, differently abled로 변한 사실을 언급한다. differently abled는 장애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지니지 못한 다른 다양한 능력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247 페이지)

 

저자의 글은 인식(認識)의 중요성에 관한 단어를 담고 있어 인상적이다. 인식의 위치성(170 페이지)과 인식의 사각지대(251 페이지), 인식의 폭력(257 페이지)이란 단어 등 때문이다. 다양한 폭력의 현실이 일상이 된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냉소주의적 무관심이다.(264 페이지)

 

저자는 스스로에게 멘토가 될 것을 주문한다. 이를 위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치열한 읽기, 비판적 사유, 복합적 판단하기 등이다.(269 페이지)

 

저자는 배우는 데만 집중하면 거기에 빠져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거세되어 버리며 평생 남의 생각을 읽고 남의 똥 치우다 가는 것이라는 최진석 교수의 주장에 대해 배움이란 정보 축적이 아니라 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인식을 통해 그 나를 타자와 세계로 확장하는 과정이란 말을 던진다.(275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각각의 인식론적 한계는 물론 자신의 정황에 한계 지워진 존재라는 점에서 그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한 부단한 배움이 없을 때 독선과 아집에 빠지게 된다.

 

저자는 배움을 가 부재한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과 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으로 나눈다. 또한 거시적 배움과 미시적 배움으로 나눈다.(276 페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시적 배움과 미시적 배움 사이를 복합적으로 그리고 끊임없이 오가는 배움이다.

 

저자는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을 언급한다. 이는 책이 출판되자마자 저자는 사라짐을 의미하는 말이다. 저자의 본래적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는 제2, 3의 저자로 기능하면서 자기만큼 책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고 만들어간다는 의미이다.(278 페이지)

 

좋은 책은 나 타자 세계의 다양한 존재 방식을 담은 다층적 세계들과의 만남을 담고 있기에 저자가 한 권의 책에서 제시하는 세계는 그 저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나와도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

 

인문학적 지식은 성찰의 세 가지 영역인 나 타자 세계를 복합적으로 이해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형성하고 자신의 관점으로 다층적인 방식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도록 하는 것이다.(282 페이지) 저자는 자신만의 질문이 없을 때 사상도 유행으로 받아들이게 됨을 역설한다.(290 페이지)

 

하나의 이론, 담론에 대한 전적인 칭송도 전적인 부정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문제는 연장(도구)로서의 이론을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이다.(293 페이지) 저자는 고향 떠남의 경험을 하는 사람들은 물리적이든 정신적, 인식론적이든 끊임없이 새로운 고향을 재구성하고 건설한다고 말한다.(304 페이지)

 

에드워드 사이드는 나는 나의 글쓰기에서 고향을 발견한다는 말을 했다.(308 페이지) 한 종교가 거룩성의 의미를 창출하는 것은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묻지 않았던 근원적임 물음들, 만나지 않았던 심층 속의 자기 자신과 만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질 때이다.(332 페이지)

 

저자는 거룩성과 일상성의 나선형 춤이 가능한 공간 역할이 종교의 존재 의미라고 생각한다.(333 페이지) 저자는 동성애는 지지와 반대의 문제가 아닌 존재 방식이라 말한다.(336 페이지)

 

저자는 자신의 인식적 확실성을 경계하고 오히려 비판의 불확실성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말한다.(338 페이지) 대안을 꿈꾸는 이들은 확고한 성공의 보장 때문이 아니라 그 성공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 대안이 꿈꾸는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모험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다.(368 페이지) 이 구절이 대단원의 구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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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나 돌, 살갗 등에서 조직의 굳고 무른 부분이 모여 일정하게 켜를 지으면서 짜인 상태 또는 무늬를 의미하는 결이란 말은 어렵지 않지만 설명하라면 쉽지 않다. 나는 어제 이 결이란 단어를 세 번이나 들었다. 내가 처음 이 단어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들은 것은 이정우 교수님의 책에서였다.

 

이 교수님에 의하면 다산(茶山)이 말의 본래 쓰임새를 상세하게 추적한 리(: 진리)는 본래 옥석(玉石)의 결을 의미했다.(1999년 출간 인간의 얼굴’ 154 페이지)

 

결에 대해 들은 첫 번째 공간은 강남순 교수님의 책이다. 교수님은 학술서와 달리 개별인들이 주고 받은 편지는 그 한 사람이 지닌 다양한 존재의 결(layers of being)을 느끼게 한다는 말을 했다.(‘배움에 관하여’ 23 페이지)

 

() 또는 켜를 뜻하는 layer란 말로 결이 설명된 것은 어원을 보았을 때 매우 적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결에 대해 들은 두 번째 공간은 페북이다. 어제 내게 답지한 생일 축하 메시지들 가운데 박태웅님이 세상에 와서 누리 결이 한결 **졌습니다.”란 글이 있었다.

 

결에 대해 들은 세 번째 공간은 강병국 저자의 주역 독해출간 기념 강연회장(마포 평생학습관)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이런 말을 했다. "옥을 다루는 사람은 옥의 결을 찾아 옥그릇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천지만물에는 모두 결이 있다. 그러므로 동양에서는 이치를 밝힌다는 말이, 결이 어느 방향으로 나 있는지를 밝히는 것과 동의어라고 생각했다. 그에 따라 사물의 결을 알고자 노력했던 것이다."(‘주역 독해 상경’ 34, 35 페이지)

 

나도 강의 후 진행된 사인회에 동참했다. 책을 구입해 서명을 받은 것인데 강의 중 나온 태괘(泰卦)와 비괘(否卦)를 보고 나는 경복궁 왕비 침전인 교태전(交泰殿)이 태괘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한 뒤 내 이름은 한자어로 朴泰雄이라 쓴다고 말했다.

 

태괘(泰卦), 교태전(交泰殿), 웅의 공통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주역(周易)의 괘들은 모두 두 갈래로 이루어졌다. 소통이 잘 되어 태평한 경우인 태() vs 소통이 막히는 경우인 비(), 혁신, 개혁, 혁명의 길인 혁() vs 전통을 회복하는 길인 정(), 대세를 따라 자기 뜻을 굽히는 것인 손() vs 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인 태()...

 

전형적인 이원적 대립 체계(binary opposition)이다. 물론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역은 변화를 말한다. 변화에 대비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란 한용운 선사/ 시인의 님의 침묵의 한 구절은 (당신은 의식했는지 모르지만) 주역의 논리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제 유종지미(有終之美)라 할 수 있는 것은 나선(螺旋)의 비유가 두 저자에게서 나왔다는 점이다. 강병국 저자는 변화는 나선형으로 이루어지기에 드라마틱하게 눈에 띄지 않지만 그 과정이 결국 상승의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강남순 교수님은 가르침과 배움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처럼 서로 얽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는 말을 했다. 교수님은 그 의미에 맞는 가르침/ 배움이란 말을 했다.

 

교수님은 슬픔과 기쁨, 비극과 희극, 어두움과 밝음, 우울함과 즐거움 등 상반된 덕목들도 결국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선형처럼 겹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면서 얽혀 있다는 말을 하셨다.('배움에 관하여' 123 페이지)

 

나의 어제는 두 분의 귀인(貴人)을 만난(한 분은 강연과 책으로, 한 분은 책으로) 하루였다. 물론 화룡점정의 붓질은 내가 치러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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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汝諧)와 빈빈(彬彬)..

최근 상촌(上村; 흔히 서촌이라 부르는..)과 혜화동 순례에서 여해와 빈빈이라는 간판을 보았다.

상촌에서 여해, 혜화동에서 빈빈을 보았다고 해야 정확하다.

여해는 고전연구소란 이름을 달았고 빈빈은 책방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두 곳은 모두 출판사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 이름이 모두 중국 고전을 출처로 한다는 점이다. 여해는 서경, 빈빈은 논어.

사실 이런 예는 너무 흔하다. 우리 나라의 궁궐, 경전, 서책 등의 이름은 중국 고전에서 거의 대부분 유래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해(汝諧)는 너로 인해 세상을 화평케 한다는 의미이다.

빈빈(彬彬)은 문질빈빈의 줄임말로 내용과 외양이 고루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이다.

두 이름 모두 조화를 담은 말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이 부분이 요점은 아니다.

요점은 달리 있다. 여해가 ‘너로 인해 세상을 화평케 한다‘는 의미인가 묻자 출판사 직원은 이순신의 자(字)라는 말을 했다.

맞는 말이지만 순서가 잘못 되었다. 너로 인해 세상을 화평케 한다는 서경의 구절을 이순신 장군이 자로 삼았다고 해야 옳다.

은유를 배울 때 원 의미와 그로부터 확장된 의미를 함께 거론해야 하는 것처럼.

중국 이야기를 했기에 하는 말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사철(文史哲) 즉 동양의 인문학에서 문은 시경(詩經), 사는 서경(書經), 철은 역경(易經) 곧 주역(周易)이다.

이래서 주역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주역 공부의 요점은 점을 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 3천년 간 집적된 추상적 데이터들을 보며 자신의 상황을 객관화시켜 보는 것이다.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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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세계는 무림(武林)의 세계이다.˝ 지난 해 말 내가 한 시인께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무림이란 무사 또는 무협의 세계를 말한다. 시인의 세계는 생존하기가 그 만큼 어려운 고난의 터라는 의미일 것이다.

최근 장석주 시인의 책(‘은유의 힘‘)에서 비슷한 글을 접했다. 시쓰는 것을 투쟁이라 말한 글이다.

우물에서 정갈한 물을 길어올리듯 새로운 은유를 생각해 내야 하니 그럴 것이다.

국문학 연구자 시나다 히로코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한국인은 자기 감정의 구석구석까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얻었다는 말을 했다.

히로코에 의하면 민족이라는 것도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정지용 시인은 근대인의 심리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창출했다.(‘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 참고)

히로코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지용은 아방가르드 즉 정예 선발 전투원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들은 또 하나의 싸움 이야기이다. 윤동주 시인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내면과 치열하게 싸운 시인이 윤동주 시인이라는 것이다. 수긍할 만하다.

물론 전쟁터 같은 삶임을 인정하며 할 말은 자신의 싸움이 가장 치열하고 자신의 싸움만이 의미 있다고 보면 안 되리라는 점이다. 양보의 미덕은 싸움을 보는 데에서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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