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
최재정 지음 / 홍시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도시(都市)의 도()는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의미이고 시()는 교환이 일어나는 장소를 의미한다. 우리에게 도시는 무엇인가? 릴케는 사람들은 죽기 위해 도시로 몰려온다는 말을 했고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엘륄은 카인이 도시를 세웠다는 말을 했다. 하나님의 에덴을 자신의 도시로 대체했다는 의미이다.

 

도시 역사 문화 전문가이자 지리학자인 조엘 코트킨은 도시는 인류의 예술, 종교, 문화, 통상(通商), 기술의 대부분이 태어난 것이라 말한다.(‘도시, 역시를 바꾸다’ 16 페이지)

 

최재정은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에서 도시가 지속가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지 여전히 많은 의문이 남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는 도시가 인류에게 준 혜택이 훨씬 크고 강렬하게 보인다고 말한다.(21 페이지) 도시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갖는 것은 미국의 건축 비평가, 문명 비평가, 역사가 루이스 멈퍼드(1895 1990)의 도시론을 접하고서부터이다.

 

멈퍼드는 고대 도시에는 종교로 사람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인 신전을 중심으로 군영(軍營), 창고(倉庫), 시장(市場), 사제들의 재생산 기관인 학교와 문서고, 병원과 목욕탕, 신과 인간의 교류를 매개하는 극장과 경기장 등이 있었다고 말했다.(‘역사 속의 도시’ 12, 13 페이지)

 

물론 이 이전인 지난 해 9월 소 논문격의 글을 쓰기 위해 서울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자율진화도시전을 감상한 것부터 거론해야 옳겠다. 최재정은 러시아 태생의 프랑스 철학자 알렉산더 코제브가 반지를 반지이게 하는 것은 반지의 빈 공간이라는 말을 한 것을 상기시키며 도시를, 아직 구현되지 않은 영원한 여백을 품은 공간으로 정의한다.(24 페이지)

 

도시를 읽는 새로운 시선3부로 이루어진 책이다. 1부 현대 도시 여행, 2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넘어서, 3부 내일의 도시, 도시의 내일 등이다.

 

저자는 첫 삽을 뜬 지 100년도 더 지난 지금도 공사가 진행중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안토니오 가우디 설계)을 예로 들며 아름다운 건축물에 의해, 그리고 정책적 비전 또는 자연환경이나 역사, 음식, 미술, 때로는 도시민의 생활문화에 의해서도 도시의 운명은 새롭게 재창조된다고 말한다.

 

이 부분에서 카우퍼(J. M 카우퍼)가 한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도시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지표면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가 세계 자원의 75% 이상을 소비하며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43 페이지)

 

저자는 현 시대를 창의성이 부의 원천이 되는 시대로 진단한다.(67 페이지) 비록 부패, 무능한 정권에 의해 그 의미가 왜곡, 변질되었지만 창의성은 중요한 덕목이다. 지금은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사고를 통해 창의성을 발휘하는 인재가 주목받는 시대이다.

 

창의 도시는 보헤미안 지수가 높다. 보헤미안 지수는 화가, 무용가, 작가, 배우 등 예술가들이 얼마나 사는지를 나타내는 지수이다.(71 페이지) 보헤미안 지수가 낮은 곳은 인재 지수도 낮게 나타난다.

 

창의성은 도시의 생존이 걸린 제1 명제가 되었다. 현대의 많은 건축가가 자연과 문화, 예술, 더 나아가 산업이 자연스럽게 융합된 창의도시 건설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세계의 도시들은 창의도시 개발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74 페이지)

 

오늘날 도시를 디스토피아로 만든 것은 산업화에 따른 인구 집중이다. 주택, 교통, 인프라, , 오염, 쓰레기, 녹지 공간 감소, 슬럼 등이 주요 문제들로 대두되고 있는 현실이다.

 

필연적으로 도시인들은 고향 없는 세대이다.(102 페이지)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처음으로 도시를 설계한 사람들은 유토피안이라는 말을 했다. 그에 의하면 유토피아는 모든 진보의 원리이고 더욱 좋은 미래를 위한 시도이다.(112 페이지)

 

물론 유토피아 추구의 바탕에는 현실 문명 비판이 있다. 로버트 오웬은 산업 도시에 대한 대안적 구상을 실험한 최초의 유토피아 사회주의자이다.(120 페이지) 유토피아 사회주의는 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122 페이지)

 

21세기 도시 경쟁력에서 가증 중요한 요소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어메니티(amenity) 개념이다.(129 페이지) 쾌적한, 기쁜 등의 감정을 표현하는 라틴어 아모에니타스에서 유래한 이 말은 단순한 미적 개념이 아니라 환경적 개념으로서 종합적인 삶의 쾌적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저자는 지속가능한 도시 만들기는 지역 특성에 바탕을 둔 창조적인 아이디어와 주민 참여, 행정과의 협력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성이 중시되는 21세기에는 환경, 정보, 복지, 문화, 교육, 여성의 시대이자 생명 존중의 시대이다.(129 페이지)

 

루크 리트너는 도시의 르네상스란 책에서 예술은 도시 재생과 재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는 말을 했다.(131 페이지) 미래 사회에서는 국민총생산(GNP) 대신 국민총매력지수(GNC: gross national cool)가 부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한다.

 

저자는 도시의 매력을 측정하는 지수로 네 가지를 든다. 재미, 정체성(identity), 이야기(narrative), 품위(elegant) 등이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인 한편 호모 루덴스이다. 브랜드화를 통한 도시 가치 향상이 필요하다. 특히 지방 도시에서. 우리는 우주 공간이나 다른 행성에 도시를 건설하는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저자는 도시는 현대인의 요람이자 무덤, 인간의 손으로 창조한 우주라고 말한다.(210 페이지) 스페이스(space), 유니버스(universe), 코스모스(cosmos) 모두 우주로 번역된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우주란 코스모스라 해야 옳다. 스페이스는 인간이 갈 수 있는공간을 말하고 유니버스는 별과 은하로 채워진 거대한 우주를 말한다. 코스모스는 유니버스+알파이다.(‘알파는 인간의 주관적 요구사항이다.: 2014121일 세계일보 기사. 박석재 교수 글 ‘space, universe, cosmos’ 참고)

 

도시는 이미 지난 시간들(과거)과 현재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완의 여백(미래)을 모두 품고 있다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가 공간을 창조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그 공간의 지배를 받는다고 덧붙인다.(214 페이지) 장소는 고정된 것이지만 공간은 창조하는 것이라는 강남순 교수의 글(‘배움에 관하여참고)이 생각난다.

 

만들되 대안적인 지속가능한 공간을 창조해야 덜 고생한다는 비근한 말로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다. 오독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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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새로운 문화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암스테르담의 베스터가스파브릭은 가스 공장을 폐하고 만든 공원이다. 윤동주 문학관이 수도 가압장과 그에 부속된 기계실을 개조해 만들어진 것처럼.

 

윤동주 문학관은 기계실이었던 곳을 영상실로 활용하고 있지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경우 가스공장의 보일러실이었던 곳을 영화관과 에스프레소란 이름의 커피숍으로 활용하고 있다.

 

내가 접한 여러 도시론 가운데 루이스 멈퍼드의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대 도시에는 종교로 사람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인 신전을 중심으로 군영(軍營), 창고(倉庫), 시장(市場), 사제들의 재생산 기관인 학교와 문서고, 병원과 목욕탕, 신과 인간의 교류를 매개하는 극장과 경기장 등이 있었다는 말을 했다.

 

도시, 하면 카페를 빼놓을 수 없다. 궁금한 것은 지금의 우리가 누리는 카페문화는 언제 시작되었는지이다. 요즘 나는 서울에 가 식사를 한 뒤에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만큼 커피숍을 들르고 있다.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연출되는 장면이 있다. 노트북으로 문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며 매번은 아니지만 노동의 의미를 음미하곤 한다. 작년에 타계한 박이문 시인/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이 까페가 생긴 것도, 저 비어홀이 생긴 것도 노동의 결실이고 저 분수, 저 쇼윈도, 이 십자로 전체가 아름답게 보이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들이 모두 노동의 열매이기 때문이다..(1997년 출간 '다시 찾은 빠리 수첩' 237 페이지)

 

그런가 하면 박홍규 교수는 사르트르가 주로 부르주아 가정이 아닌 거리의 카페에서 먹고 일하며 행복을 추구했고 누구에게나 공개된 카페에서 아무런 비밀이나 벽도 없이 함께 나누는 삶을 예찬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 전쟁을 거부했으며 거리의 사상과 문학을 추구했다는 사실 등에 근거해 그를 아나키즘 사상가로 정의했다.(2008년 출간 '카페의 아나키스트, 사르트르' 참고)

 

이런 환경을 꿈꾸기에 현대는 그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가? 나는 그 허와 실을 헤아리기 위해 정수복 교수의 '파리일기'(201826일 출간)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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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부에 남은 세종(世宗)의 발자취를 조사, 정리하는 숙제를 해야 한다.

마음이 언제 움직일지 장담할 수 없다. 안산, 광명, 수원, 화성, 평택, 용인, 성남, 광주(廣州), 이천, 여주, 안양 등 경기 남부의 여러 지역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이 있는 여주는 너무 많이 알려져 하기 싫고 내가 살고 싶었으나 이주에 실패한, 퇴촌(退村)이 있는 광주는 우울해 하기 싫고...

동기들의 숙제를 열람하지 않아 장담할 수 없지만 나는 아픔이나 기쁨 등 인간 이도(李祹)의 인간적 면모에 초점을 두고 숙제를 할 생각이다.

세종은 재위시 다섯 차례 왕릉을 조성했다. 그가 아버지 태종(太宗)의 승하(昇遐)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어 그의 정감을 아는 데 한계가 있지만 그는 총애해마지 않았던 맏딸 정소공주가 열세 살에 죽자 염(殮)을 못할 정도로 시신을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세종은 며느리를 얻는 과정에서도 큰 아픔을 겪었다.

세자와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던 문종의 첫 번째 빈인 휘빈 김씨는 세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세자가 사랑하는 여인의 신을 태워 가루를 내 술에 타 마시게 했고 두 번째 빈인 순빈 봉씨는 동성애로 물의를 빚고 쫓겨났다.

세 번째 빈이 바로 단종을 낳은 현덕왕후 권씨이다. 권씨는 출산 후 이틀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의 인간적 면모라 했지만 문종이 빈(嬪)과 악연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하는 부질 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권씨는 안산군 치지고읍산(治之古邑山)에 매장되었다가 후에 남편 문종의 현릉(顯陵: 경기도 구리 동구릉 중 하나)으로 이장되었다.(신병주 교수 지음 ‘조선왕실의 왕릉조성’ 66, 67 페이지)

이재영은 현덕왕후 권씨가 묻혔던 곳이 현재의 경기도 시흥 군자봉 자락이라 말한다.(‘조선 왕릉, 그 뒤안길을 걷는다’ 78 페이지)

조선은 왕들이 거의 예외 없이 가족 중의 누군가를 죽인 패륜의 나라(인류학자 김현경의 표현)이거나 세종이나 정조처럼 성격은 다르지만 슬픔으로 얼룩진 나라였다.

자꾸 이렇게 슬픔만 보이는 것은 내가 나이가 들었다는 뜻이겠다. 순응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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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6개월간 알라딘에서 산 책들이다. 새 책 두 권, 중고 24권.

기록을 보니 종로에서만이 아니라 신촌, 잠실신천, 잠실롯데월드타워점, 수유 등에서도 샀다.

갈증 때문에도 샀고 습관적으로도 샀고 그냥 나오기가 미안해서도 샀고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언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도 샀다.

다른 곳(종로서적, 영풍문고, 교보문고, 혜화동 동양서림 등)에서 산 책들은 계수하지 않았다.

약소한 책 구입 기록일 뿐이다. 이제 다시 책을 사러 서울에 갈 때가 되었다.

집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종로까지의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익숙해져서이기도 하고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기대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책을 살 기회가 있어서이다.
나는 같은 책을 두 번 산 적이 몇 번 있을 뿐이니 책 중독자는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책이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니 그런가 싶기도 하다.

살 책은 많고 읽을 시간과 능력이 부족해 힘들 뿐 나는 나다.

1.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2017년 8월 20일. 조용미 시집)
2. 드므(9월 27일. 김해경 소설. 새책)
3. 조선의 9급 관원들
4. 심리학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5. 서울역사문화탐방(이상 11월 3일)
6. 고려왕릉(11월 8일. 새책)
7. 아빠가 알려주는 문화유적 안내판
8.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1(이상 11월 9일)
9. 아큐정전
10. 과학을 읽다(정인경 인문과학서)
11. 왕비로 보는 조선왕조(이상 11월 18일)
12. 동양철학 스케치 2
13. 너는 너를 지나 무엇이든 될 수 있고(이상 11월 22일. 김경수 문학평론집)
14. 사진으로 읽는 하늘과 바람과 별 - 책으로 만나는 윤동주
15. 과학의 불교(이상 12월 8일)
16. 그럼에도 페미니즘
17. 구성주의와 자율성(이상 2018년 1월 12일)
18.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채효정 인문서),
19. 한양도성(이상 2018년 1월 20일. 전우용)
20. 간송 전형필
21. 한용운
22. 밖으로부터의 고백(정은경 문학평론집)
23. 은유의 힘(이상 1월 31일. 장석주 시론집)
24. 답사의 맛
25. 배움에 관하여(강남순 인문서)
26. 심리학의 도(이상 2월 2일. 진 시노다 볼렌 인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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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부터의 고백 -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 아케이드 Arcade 1
정은경 지음 / 파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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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디아스포라는 이산인(離散人)을 뜻한다.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를 떠돌던 유대인들을 이르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이유 등으로 고향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쓰이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미옥은 윤동주 시인을 고향을 상실한 사람이 아닌 고향이라는 좌표를 설정하지 않은 디아스포라로 보았다.(‘디아스포라 시인 윤동주참고) 이런 입장은 강남순 교수의 책에서도 접할 수 있는 바이다. “예민성을 지닌 사람은 이 세계의 한 곳에만 애정을 고정시켰고 강한 사람은 모든 장소로 애정을 확장했고 완전한 인간은 자신의 고향을 소멸시켰다.”(304 페이지)는 말이다.

 

1부 제국과 식민, 2부 노스탤지어와 기억 등으로 이루어진 정은경 문학평론가의 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어제의 세계’, 강상중의 마음‘, 할레이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 찰스 부카우스키의 죽음을 주머니에 놓고등의 문학 작품을 분석한 책이다.

 

저자는 디아스포라 문학을 민족국가적 기원에서 벗어난 이들이 겪은 이산의 경험을 형상화하고 이를 사유하는 문학으로 정의한다.(13 페이지) 지금의 디아스포라 현상은 다분히 정치, 경제적인 동력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 물론 저자의 말대로 디아스포라는 바깥의 일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는 현상이다.

 

디아스포라는 그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에도 불구하고 노스탤지어라는 하나의 공통된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동경(憧憬)이지만 이때 말해지는 조국은 현실적인 조국이 아니라 차별과 고통이 없는 상상의 조국이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적이다.(22 페이지)

 

스테판 츠바이크(1881 1942)는 독일어로 문필 활동을 한 유대인 오스트리아 작가였다. 츠바이크는 코스모폴리턴을 지향한 자유로운 문인이었다. 코스모폴리턴은 인류 전체를 하나의 세계 시민으로 보는 사람을 말한다.(강남순 지음 배움에 관하여‘ 24 페이지)

 

츠바이크는 세계적 작가였으나 고향에서 책이 화형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유럽 최대의 장서가이자 필적 수집가였으나 모두 두고 떠나야 했고 세계시민이고자 했으나 어느 곳에서도 평온할 수 없었다.(34 페이지) 츠바이크는 같은 유대인이자 역시 나치 치하에서 자살로 삶을 마친 발터 벤야민(1892 1940)과 비교된다.

 

저자는 타예브 살리흐의 소설 북으로 가는 이주의 계절이 막장 드라마라는 외양 속에 흑백의 멜로 드라마를 둘러싸고 있는 제국과 식민지, 인종 차별, 오리엔탈리즘적 요소를 내장하고 있음을 주목한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 등을 언급한다.

 

저자는 이 소설을 읽으며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흰 가면을 강렬하게 떠올렸다고 말한다.(두 작품은 한 챕터에 편성되었다.) ’검은 피부 흰 가면은 프랑스 식민지하의 앙틸레스(서인도 제도의 섬) 사람들의 정신분석적 임상 연구서이다. 이 책을 한스 요하임 마즈의 사이코의 섬과 비교해도 좋을 것이다. ’사이코의 섬은 분단 체제하의 구동독 주민들에 대한 정신분석적 보고서이다.

 

저자는 흑백 갈등은 단순히 인종 차별 의식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침략과 식민지의 결과물이고 빈부 격차와 직결되는 문제라 말한다.(67 페이지) 저자는 메도루마 슌(1960 - )의 소설은 마술적 요소에 주된 근거를 두지만 그것은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과도, 20세기 서구 모더니즘 또는 최근 소설의 유머와 치유의 코드와도 다르다고 설명한다.(69, 70 페이지)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작가이다. 오키나와는 미군 기지로 점철된 전쟁의 땅이다.

 

유대인이 흠모한 알리(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라는 제목으로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1923 2007)파이트를 다룬 챕터에서 우리는 반투철학이란 말을 듣게 된다. 이는 인간을 존재가 아닌 힘으로 보는 아프리카 부족민들의 철학을 말한다.

 

이는 사람을 단지 몸이나 욕망, 기억, 성격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살았거나 죽은 모든 것들로부터 어느 순간 자신에게 옮겨와 머무는 여러 힘의 집합체로 보는 철학이다.

 

결국 사람은 그저 자기 자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몸 속에 남은 선조 세대의 기운이기도 하며 혼을 가진 한 사람이 아닌 주변을 둘러싼 모든 근원과 사물에 동조하는 일부이다.(89 페이지)

 

노먼 메일러는 반투철학을 통해 알리의 복싱을 사유한다. 반투를 우분투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우분투는 아프리카 응구니족의 말로 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 인해 비로소 한 사람임을 뜻하는 말이다.

 

메일러는 알리의 핵심 기술을 엊어 맞기, 끊임없는 공언과 독설을 통한 자신감의 연금술("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 "포먼의 주먹은 너무 느려 내 몸에 닿으려면 일 년은 걸릴 거야" ) 등으로 보았다. 저자는 노먼 메일러가 알리가 링 밖에서 펼쳐 보인 더 무시무시한 싸움에 덜 주목했다고 말한다.(94 페이지)

 

알리는 1942년 태어나 2016년 타계했다. 흑인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던 알리는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징병을 거부해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35개월간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절망은 어떻게 신이 되었나란 제목으로 로힌턴 미스트리 삼부작을 다룬 저자는 자신이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인도를 보아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적절한 균형’, ‘그토록 먼 여행’, ‘가족 문제등의 로힌턴 미스트리의 삼부작을 읽고 말해진 바이다. 로힌턴 미스트리는 1952년 인도 뭄바이 태생의 작가이다. 저자는 신은 희망이 아니라 완전한 절망과 슬픔이 만든 탄식이고 광기로 빚어진 절규가 아닐까, 란 말을 한다.(99 페이지)

 

로힌턴은 파르시 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썼다. 파르시(Parsi)는 인도에서 이란의 예언자 차라투스투라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인들'을 의미하는 파르시들은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종교박해를 피해 인도로 건너간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들이다.

 

저자는 우리의 삶이 아무리 처참하게 파괴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상실했다 해도 고통을 나눌 수 있는 우리가 있는 한 구원과 희망은 가능하다고 말한다.(108 페이지) 이 말은 저자의 디아스포라 문학 관련 책 기획 의도를 더욱 확실히 알게 하는 말이다.

 

저자의 인상적인 문장을 음미하는 것도 작지 않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저자는 가령 로힌턴 미스트리가 소설을 통해 저자 자신의 인도 이해가 얼마나 큰 오해이며 폭력이었는지를 뺨을 후려치듯 일깨워 주었다고 말하는가 하면(97 페이지) 니체의 영원회귀처럼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될 것 같고 그 파도의 출렁임 속에 피로와 허무로 찌들어 있던 어느 날 할레이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들이 자신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는 말을 한다.(109 페이지)

 

호세이니의 이 작품은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을 보편적 인간의 삶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는 작품이다. 저자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으면 라캉의 실재계, 상상계 등의 개념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의 작가 찰스 부카우스키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멋있게 들리는 것은 도박하듯 글을 쓰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166 페이지) 저자는 이에 정곡(正鵠)을 찔린 느낌이라는 말을 한다. 저자는 부카우스키가 찬사 받은 이유를 댄다. 이 글은 형식면에서 츠바이크에 대한 글처럼 읽힌다.

 

슈테판 츠바이크, 그는 세계적 작가였으나 고향에서 자신의 책은 화형당해야 했고... 가장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했으나 유대인이라는 육체에 갇혀 정체성을 상실해야 했고 세계시민이고자 했으나 세계 어느 곳에서도 평온할 수 없없었다.”(34 페이지)란 글과 그는 하급 노동자로 반평생을 넘게 살았고.. 늘 냉소적이지만 유머를 잊지 않았고, 늘 취해서 썼다지만 글은 말짱하게 깨어 있으며.. 별 장식 없이 간결하고 거칠지만 그의 글은 그지없이 시적이고 기괴하게 슬프고 철학적이기까지 하다..”(169 페이지)란 글을 비교해 보라.

 

두 작가의 사례를 아이러니라 해야 하는가. 그러나 둘은 차이를 가졌다. 전자는 자신의 바람과 상황이 일치하지 않았고 후자가 지녔던 덕목들은 노력 여하에 따라 이룰 수 있는 것들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부카우스키는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란 책에서 시인들에 대한 진실을 폭로한다. “시인들, 난 그때 한 가지 희한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 중 누구도 이렇다 할 생계수단이 없었다. 시인들은 오로지 시만 썼다. 그들의 시는 얄팍하고 가식덩어리였지만 그런 시를 계속 써 댔을 뿐더러 옷차림도 제법 근사했고 영양상태도 좋아 보았으며 대개는 그들 뒤에 어머니가 꼭꼭 숨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심지어는 시까지도 일부 대신 써줬다. 이제 시인들 얘길 쓰는 게 지겹다. 하지만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들은 달리 살지 않고 굳이 시인으로 사느라 제 자신을 망치고 있다. 난 쉰 살까지 일반 노동자로 일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살았다.

 

시인이랍시고 내세워 본 적도 없다. 먹고살려고 일을 하는 게 대단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건 대체로 끔찍하다. 게다가 끔찍한 일자리 하나를 지키려고 싸우는 것은 다반사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쓸 때 허튼 수작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은 그 난장을 겪은 덕이라고 생각한다.”(171, 172 페이지)

 

이를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에 나오는 시인론과 비교해보자. 블랑쇼는 시인은 추방당한 존재이다. 그는 도시에서, 규칙적인 일에서, 그리고 제한된 의무에서 추방당한 존재이다...예술가는 종종 자신의 작품의 폐쇄된 공간 안에 소심하게 웅크리고서 그 세계 안에서 군주처럼 이야기하며 자신이 사회에서 맛본 패배에 복수를 꾀하는 나약한 존재 같은 인상을 준다.”는 말을 했다.

 

비슷한 듯 차이나는 언설이 쾌감을 준다. 부카우스키편에 이르러 우리는 확실히 디아스포라가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실존과 얽힌 문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부카우스키는 미칠 것 같거나 자살하고 싶거나 살인을 꿈꾸지 않는다면 작가가 되지 말라는 말을 했다.(176 페이지) 이는 시인이나 작가란 대단한 존재이거나 영감에 휩싸인 천재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쓰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것이 진짜 글을 쓰게 하지 쥐어짜고 만들어야 한다면 진짜 글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는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면 쓰라고 젊은 시인에게 충고한 릴케의 말과도 비슷한 듯 다른 말이다. 부카우스키는 1920년에 태어나 1994년에 타계했다. 그는 독일계 미국 시인, 작가였다.

 

밖으로부터의 고백 디아스포라로 읽는 세계문학은 이미륵(李彌勒: 1899 1950)편에 이르러 대단원을 맺는다. 황해도 해주 출생의 망명 작가인 그는 이의경(李儀景)이란 본명을 가졌고 독일식으로는 Mirok Li(미로크 리)로 불렸다.

 

자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의 대표작이다. 저자는 이미륵이 작가, 나아가 진정한 세계시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낯선 땅에서 느낀 자신의 타자성, 타인의 이질성, 그리고 그 간극(間隙) 사이에서 느꼈을 고통과 소통에의 열망 때문이었다고 말한다.(204 페이지)

 

이미륵의 뮌헨대학 스승이 잉게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에 나오는, 반나치 운동으로 처형된 쿠르트 후버 교수이다. 이미륵은 게슈타포에게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후버 가족을 앞장서서 돌봐 독일인들을 놀라게 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처음에 독일어로 쓰였다. ‘Der Yalu fließt’가 원제인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사람이 전혜린(1934 1965)이다. 살아서 만난 적이 없는 두 사람은 그러나 뮌헨 대학에서 공부한 인연을 공유한다.

 

이는 윤동주 시인과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 모임를 추모하는 모임의 대표인 야나기하라 야스코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야스코는 윤동주 사후 태어난 일본인이다.

 

릿쿄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윤동주 시인이 릿쿄대학에서 공부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며 윤동주 선배가 자신과 같은 의자에 앉아 공부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한 바 있다. 디아스포라 정신은 시공을 건너뛰어 이어지는 듯 하다. 정은경의 책은 디아스포라, 코즈모폴리턴 등의 이름으로 기억할 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짧고 강렬한 정은경 평론가의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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