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삶의 재발명 마이크로 인문학 9
임지연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평론가 임지연의 사랑 삶의 재발명격렬한 이십대를 보내고 마음의 평화를 고대하면서 어서 빨리 늙어가기를 바랐던 저자가 몇 가지 사랑에 대한 질문들을 살려 기획한 책이다. 저자가 가졌던 첫 번째 질문은 폭풍의 언덕에서 보듯 서로를 파괴하는 삶의 방향으로 나아간 역설적인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다.

 

두 번째 질문은 사랑은 청춘의 전유물인가, 이다. 세 번째 질문은 사랑은 왜 어려운가, 이다. 네 번째 질문은 사랑 이야기는 왜 여전히 매력적인가, 이다. 저자는 몇 가지 당위 차원의 말을 제시한다.

 

사랑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오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는 것(12 페이지), 사랑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행복한 삶의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13 페이지), 사랑의 주체들은 사랑의 역설적 구조를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사랑이 작동하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44 페이지), 나의 모순적 정체성과 상대의 타자적 성격을 이해할 때 사랑은 가능하기에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가, 사랑하는 상대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것(70 페이지) 등이다.

 

저자는 재난과 위험이 일상화된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헤어질지 모른다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물은 뒤 사람들은 사랑으로부터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고 답한다.(17 페이지)

 

저자는 사랑을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으로 정의한다.(57 페이지) 또한 사랑이 타인과의 친밀감, 연대, 열정적 관계맺음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이라 말한다.(64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차이가 있기에 사랑이 가능하다. 저자는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의 주인공인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을 예로 들어 사랑의 의미를 전한다.

 

저자는 히스클리프에 대해 그는 나보다 더 나 자신이라 생각한 캐서린, 캐서린을 향한 사랑을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로 인식한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파멸에 이른 것은 융합적 사랑과 영원한 사랑의 가치에 집착했기 때문이라 정의한다.(59 페이지)

 

사랑은 이중적인 것이 공존하는 역설 구조로 작동하기에 어렵다.(44 페이지) 그것은 안정감과 불안정성, 구속과 자유, 희생과 자기 보존, 만남과 이별, 쾌락의 순간성과 지속적 연대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부드러움과 폭력,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의 비대칭성, 사랑의 맹세와 미래의 불확실성, 사랑의 의지와 감정의 변화 등이다.

 

저자는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지닌 문제점을 정밀 분석한다. 남성 우월주의, 그리고 여성을 비사회적 존재로 보는 것 등이다. 모든 인간은 복잡하고 변화하며 성찰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상대 역시 복잡하고 다면적이며, 변화하면서 새롭게 형성되어 가는 정체성을 갖는다.

 

남자/ 여자 구분법은 시대마다 달라지며 최근에는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기에 해체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정적 성차만으로 상대를 규정할 때 사랑의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다.(52 페이지) 내가 사랑하는 상대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내가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사람이며 나를 자기동일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새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65 페이지)

 

사랑은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65 페이지) 사랑은 나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유통되고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정의(21 페이지)를 소개한 저자는 사랑과 자본주의의 모순적 관계를 탁월하게 분석한 에바 일루즈의 견해를 전한다. 에바 일루즈는 감정 수행성 체제에서 감정 진정성 체제로의 변화를 이야기했다.

 

즉 사랑은 에티켓 매뉴얼대로 수행하는 것이었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감정 진정성 체제로 변했다. 사랑의 규범 대신 감정의 진정성으로 중심이 이동했으며 성적 매력이 두드러지면서 섹스는 자본화하고 결혼은 노동시장처럼 경쟁의 장으로 진입했다.(85 페이지) 현대의 사랑을 진정한 사랑의 감정과 결혼 시장이라는 이중적 코드가 맞물린 복잡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 보는 저자는 현대 이후의 사랑은 사회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우리 선택에 달렸다고 결론짓는다.(88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사랑은 역사적으로 변화하지만 역사의 포로가 아닌 인간(개인)은 그 역사 안에서 사랑을 만들어갈 수 있다.(88 페이지) 사랑 자체가 아니라 어떤 사랑인가를 중요한 문제로 정의(14 페이지)한 저자는 사랑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성찰하면서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가 관건이라 말한다.(88 페이지)

 

사랑의 개념은 변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현재의 사랑은 어떻게 발견하고 미래의 사랑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까?(107 페이지) 저자는 낭만적 사랑을 비판적으로 본다. 낭만적 사랑이 원리가 될 때 사랑은 연인들의 삶에서 유리(遊離)되고 관계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109 페이지)

 

돈과 계급을 초월하는 사랑, 무결점의 순수한 사랑, 자기를 과감히 던지고 헌신하는 사랑, 언어와 국가를 뛰어넘는 사랑,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 등이 그것이다.

 

저자는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한다. 그가 위대한 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사랑을 현실에서 다시 이루려 했기 때문이다.(111 페이지) 개츠비는 순수한 사랑이라는 환상을 추구하다가 총에 맞는다. 이상적 사랑에 대비되는 현실적 사랑이나 현실에 굴복한 지배적 사랑이 아니라 이상적인 것이 현실 속에서 발견되고 발명되는 사랑이 필요하다.(115 페이지)

 

낭만적 사랑은 융합적이다.(116 페이지) 저자는 일심동체를 강하게 비판한다. 기부장적 폭력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일심동체는 하나가 되는 사랑, 융합적 사랑, 하나의 기준으로서의 사랑을 추구하기에 사랑을 왜곡한다. 융합적 사랑은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나르시시즘으로 변질된다.

 

나와 같은 존재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사랑인가? 그것은 자기에 대한 사랑이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왜곡이다.(120 페이지) 낭만적 사랑은 영원을 추구한다.(121 페이지) 변화하지 않는 절대를 추구하는 것이다. 낭만적 사랑이 지향하는 영원성은 감정의 불변성과 같은 말이다.(122 페이지) 사랑에 막 빠진 사람들은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하고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124 페이지)

 

그러나 만일 사랑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면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즉 변하기 때문에 변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주문을 걸 듯. 사랑은 변한다. 퇴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상이 달라지고 질적으로 변화무쌍하다는 의미이다.(125 페이지) 저자는 18세기 후반 산업자본주의와 함께 발흥한 낭만적 사랑(128 페이지)에는 발생적으로 탁월한 가치들이 내장되어 있다고 본다.(129 페이지)

 

낭만적 사랑이 열정적 사랑을 밀어내고 코드화된 것은 사랑이 계급, 계층, 나이, 권력을 초월할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둘이 등장하는 하나의 무대라 정의했다.(138 페이지) 바디우는 레비나스적 타자는 신적 매개를 통해 전체 타자가 된다고 비판한다. 그것은 타자를 위해 나 자신을 망각하는 경험이기에 융합적 사랑의 변형이다.(138 페이지)

 

저자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죽음, 젊은 베르테르의 자살,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죽음, 강명화의 음독 자살, 윤심덕과 김우진의 정사(情死), 개츠비의 죽음은 사랑의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죽음이라 말한다.(140 페이지) 불완전한 사랑을 완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선택된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바디우는 사랑을 구축(構築)의 관점으로 접근한다.(147 페이지) 바디우는 사랑을 끈덕지게 이어지는 일종의 모험으로 정의한다. 진화 생물학은 인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고정된 질서를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148 페이지)

 

저자가 제안하는 대안은 초기 사랑의 선언과 고백을 지속적인 삶 속에서 반복하고 재선언하는 것이 사랑의 독창성이며 사랑의 재발명이라는 것이다.(158 페이지) 물론 일부일처제는 그것을 깨트리는 불륜과 혼외정사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며 다양한 연애 형태와 가족 형태, 결혼 제도를 상상하고 고안할 필요가 있다는 말도 과제처럼 제시된 것이다.(150 페이지)

 

문제는 초기 사랑의 선언과 고백을 지속적인 삶 속에서 반복하고 재선언하는 것과 다양한 연애 형태와 가족 형태, 결혼 제도를 상상하고 고안하는 것이 조화롭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을 지적하고 싶다.

 

작고 얇은 책임에도 수많은 것들을 배우고 공감했다. ’사랑 삶의 재발명‘(a)은 최화 교수의 박홍규의 철학‘(b)을 읽다가 지치고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읽은 책이다. ba의 철학적 문제들 가령 타자, 동일성, 외부 등의 단어를 이해하는 데 단서가 되었다. 바디우의 레비나스 비판이 흥미로웠다. 섣불리 건드릴 사상가가 아니지만 시원하다. 바디우의 사랑 예찬을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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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무덤 앞에 서서 다시 존재와 무를 생각한다. 너는 가고 없지만 너의 추억은 가득히 충만해 있다. 너는 무(無)가 된 것이 아니고 부재(不在)중인 것이다.

네가 사랑하던 발레리의 ‘풍부한 부재를 이즈음처럼 절감한 때는 없다. 이 비탄과 유폐의 계절 속에서도 풍부한 부재는 얼마큼의 위안을 주는 것이다.

너는 비면 위에 황홀하게 비치고 간 햇빛의 일순이었고 그 아름다움은 사라져도 아름다움의 추억은 남았다.

너 까닭에 이 괴로움, 이 아픔을 갖지만 너는 태어나야 했고 많은 추억을 남겨주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슬픔과 아픔도 남겨야 했다.

그것은 섭리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도 신의 섭리에 간섭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한무숙 작가가 스물 일곱 살의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쓴 ‘우리 사이 모든 것이‘란 소설의 한 구절이다.

한무숙, 박경리, 박완서 세 작가의 참척을 하나의 키워드로 해 자료를 찾다가 접한 내용이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이기까지 한 높은 수준의 인식이 수렴된 명문장이다.

오늘 이산하 시인의 페북에서 박경리, 박완서 두 분께서 타계 직전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묵계라도 한 듯 하셨다는 글을 읽었다.

한무숙 작가는 어땠을까? 궁금하다. 자료를 찾아내는 재미를 누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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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18-03-11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선생님 <그 많던 싱아..>에서 고교 때
한무숙이랑 동창이었다는 얘기를 한 기억이 나 찾아보니
박선생님 동창은 한무숙이 아니라 한무숙 동생 한말숙이군요.

박선생님 참척은 알았는데 한무숙선생님,박경리선생님도 참척 겪었단 얘긴 첨 들어보네요.

벤투님 서재에서 많이 배웁니다.

이곳 동두천에도 드디어 봄이 왔어요. 연천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해요.

환절기 건강 조심하세요.

벤투의스케치북 2018-03-11 21:0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박완서, 박경리, 한무숙 작가.. 다 좋아하는 작가들이지요. 이곳도 많이 봄 답습니다.. 잘 지내시길요..
 

어제 저녁 여섯 시를 살짝 넘어선 쌍문동의 함석헌 기념관 인근 C 커피숍. Y 선생님과 일 관계로 만나 이야기.

Y 선생님은 집에 가 저녁 먹어야 한다며 과자를 먹지 않는 나를 생각해서 카운터에 새 과자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

집에 돌아와 보니 과자 옆에 보이는 팸플랫 한 장. 성북구 정릉동(貞陵洞) 694번지에 위치한 모 장로 교회 전도지.

건조한 전도지 한 장에 나는 살짝 미소. 부작용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교회가 아닌 정릉(貞陵)을 생각.
언제일지 모르지만 앞으로 나는 별 감흥 없이 정릉이란 단어를 대하게 될 수도 있다. 변화(變化)는 항상적인 것이니 말이다.

오혜정 수학 교사의 ‘수학 언어로 문화재를 읽다’를 사둔 지 보름 정도가 지났지만 아직 정독(精讀)하지 못했다.

이 책을 산 것은 ‘경복궁의 품격에서 도형과 수를 만나다‘란 챕터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복궁을 새롭게 보고 싶은 마음의 작용. 최근 나온 장지연 교수의 ’경복궁, 시대를 세우다‘란 책이 또 관심을 끈다.

정도전이 경복궁 근정전이란 이름을 지은 것은 ‘쓸데없이 바쁘게 굴며 자잘한 일에 시시콜콜 간섭하지 말고, 어진 사람을 찾아 임명하는 일처럼 반드시 군주가 해야 할 일에만 부지런해져라‘는 심오한 뜻을 담아서였다는 것이다.

이 책 역시 새롭게 사태를 보려는 내 마음을 잡는다. 그런데 나는 어떤 새로움으로 경복궁을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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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님의 신간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출간 기념 북토크 소식이 들려왔다.(3월 19일 19시 30분. 통의동 목련원)

‘나의 서양 음악 순례’를 읽고 윤이상 선생님과 서경식 선생님을 디아스포라로 정의한 리뷰를 쓴 지난 2011년의 기억이 스친다.

목련원은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앞에 자리한 황두진 건축가의 집이다.

이탈리아, 하면 괴테와 스탕달을 생각할 수 있다. 괴테가 이탈리아를 여행한 것은 1786년에서 1788년 사이이다.

1817년 스탕달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이런 글을 썼다. “나는 예술 작품이 주는 천상의 느낌과 격정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최고의 감동을 느꼈다.”
스탕달은 ˝산타크로체 성당을 나오며 생명력이 모두 고갈된 것처럼 기진맥진해져서 마치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며 길을 걸었다.“고 썼다.

이로부터 스탕달 신드롬이란 말이 생겨났다. 거대한 예술관이나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너무 감탄한 나머지 절망과 두려움 등의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서경식 선생님은 ”아아, 이탈리아. 나를 항상 지치게 만드는 이탈리아.“란 말을 했다.

스탕달 신드롬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어떤 의미일까? 목련, 3월의 밤, 북토크, 이탈리아, 서경식, 영추문 앞..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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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 골짜기를 배경으로 한 한무숙 작가의 유수암(流水庵)‘에는 청수암(淸水庵)과 유수암이라는 두 암()이 나온다. 암이라는 같은 이름을 쓰지만 청수암은 암자이고 유수암은 고급 요정이다.

 

청수암은 구름머리 아낌없이 버려 깎고 번뇌를 끊어 오직 불제자로서 도를 닦는 이승(尼僧)이 사는 암자이며 유수암은 청수암에서 끊어버린 그 번뇌에 얽히며 오히려 그것을 극채색으로 펼쳐보이는 화류가(花柳家) 고급 요정이다.

 

저자는 대비되는 두 암을 이야기하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로 성()과 속()은 결국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임을 환기시킨다. 색은 결국 공허하고 공은 빈 것이기에 색도 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성모마리아 상을 반쯤 우려낸 게 아닐까 싶게 보살의/ 맵시라지만 눈매 고운 기생의 뒤태를 에두르고 어딘/ 지 성모마리아의 맘씨마저 서렸다고 표현한 유종인 시인의 입상(立像) - 길상사에서란 시가 생각난다.

 

의아한 것은 유수암에서 독경 소리가 흘러나오는 의외의 상황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작가는 진경(陳慶)이라는 주인공을 노류장화의 헛꽃으로 대하지 않고 한 음영(陰影) 짙은 인격으로 쓰고자 했다고 말한다.(’수필집 열 길 물속은 알아도참고)

 

한무숙 작가를 한국의 버지니아 울프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작가는 수렴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듯 하다. 울프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주로 쓴 모더니즘 작가이고 우울증과 신경쇠약 등으로 자살한 작가이다.

 

굳이 말하자면 한무숙 작가가 보인 못나고 어리석고 가여운 존재들, 특히 여성들에 대한 연민이 울프의 페미니즘에 수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낙화유수의 줄임말인 유수는 쇠잔영락을 상징하고 행운유수의 그 유수 즉 일정한 형태 없이 늘 변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교묘하게 다의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올해가 작가 탄생 100주년이다. 이번 주 수요일 작가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 주 수요일 문학관을 간다. 워밍업을 위해 읽기에는 무거운 작품, 그래도 읽어야 할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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