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 -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읽고 쓰고 배우는 법
고미숙 지음 / 작은길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고미숙의 고전과 인생 그리고 봄여름가을겨울은 오행(五行)의 리듬이 천지만물에 두루 작용하지만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4()라는 전제하에 고전(古典)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것으로 짝지어 설명한 책이다. 가령 봄은 목(), 배움과 우정, 여름은 화(), 열정과 자유, 가을은 금(), 수렴과 성장, 겨울은 수(), 지혜와 유머 등이다. ()는 환절기이다.

 

세분하면 봄에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 ‘임꺽정등이, 여름에는 장자(莊子)’, ‘그리스인 조르바’, ‘주자어류선집등이, 가을에는 오딧세이아’, ‘구운몽등이, 겨울에는 크리슈나무르의 마지막 일기’, ‘동의보감등이 속한다.

 

오행(五行)의 관건은 상생(相生) 상극(相克)의 균형이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 과정을 오롯하게 통과한다.”(44 페이지)는 구절을 보라. 여름에 포함된 산해경편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사물은 그 자체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나의 생각을 거쳐서야 이상해지는 것이기에 이상함은 결국 나에게 있는 것이지 사물이 이상한 것은 아니”(70 페이지)라는 말이다.

 

이 말에 관심이 가는 것은 유식무경(唯識無境)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유식 불교는 우리가 주관적으로 경험하거나 내면적으로 상상하고 착각한 것 그대로의 세상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한다. 저자에 의하면 시공을 뛰어넘어 고전을 읽는 이유는 딱 두 가지, 유용성과 비전이다.(74 페이지)

 

주자(朱子)’편에서 우리는 주자도 처음부터 주자주의자였던 것은 아니고 쉬지 않고 배우고 익혀 새로운 길을 열어간 학인(95 페이지)이라는 사실과 주자 사후 주자학은 본인의 염원과 다르게 (원나라 이후) 국가학이 되어 도그마가 되었다는 사실(95, 97 페이지), 주자학과 달리 양명학은 도그마의 운명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102 페이지) 등을 알게 된다.

 

()인 가을에 해당하는 수렴과 성찰을 이야기하며 저자는 구운몽의 성진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덧없는 것이 삶이 아니라 부귀영화, 아니 부귀영화를 향한 욕망이라 말한다.(105 페이지) 가을의 대표작인 오딧세이아편에서 저자는 인생은 유토피아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로부터 탈주하는 것이고 해피엔딩이 아니라 네버엔딩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이라 말한다.(110 페이지)

 

가을의 고전을 읽으며 금기(金氣)를 충전하라(105 페이지)고 말한 저자는 이반 일리치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를 가을의 고전으로 소개하는 자리에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운명과 맞장을 뜨려면 제도와 서비스, 욕망과 중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의 자율성과 창조성을 길어올려야 한다고 결론짓는다.(142 페이지)

 

반드시 욕망을 다스리는 수련을 해야 한다(101 페이지)는 주장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또한 제도와 시스템의 결함을 찾아낸다 한들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대학당국과 교육부, 정치인이 있지 않으니 믿을 건 청년 자신들 뿐이라는 말(48 페이지)과도 상통한다.

 

저자가 예로 드는 키케로는 겨울의 고전인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의 저자이다. 키케로는 혁명은 제도와 시스템의 혁신이 아닌 마음의 온전한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145 페이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지성과 지혜가 아닐까? 지성은 다르게 사유하고자 하는 열정이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함이다.(48 페이지) 지혜는 물처럼 흐르고 파동처럼 퍼져 나가는 유연한 것이다.(144 페이지)

 

루쉰은 일상과 습속이 바뀌지 않는 한 모든 이념과 혁명은 사이비로 간주했다.(148, 149 페이지) 여름이 불의 계절이라면 겨울은 물의 계절이다. 참고로 말하면 저자가 관계하는 공동체 중 하나가 감이당(坎離堂)이다. 주역에서 감은 물, 이는 불을 상징한다.

 

저자는 윤리적 자율성과 영적 해방이 없는 혁명은 형용 모순이라 말한다.(168 페이지) ’동의보감(東醫寶鑑)‘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시작되어 유배지에서 완성된 고전이다.(174 페이지) 14년에 걸쳐 쓰인 책이다. 성리학(性理學)에서 말하는 성즉리(性卽理)는 우주의 이치는 존재의 내재적 법칙과 조응함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천()과 인(), 자연과 도덕의 간극 없는 일치를 의미한다.(93 페이지)

 

이런 사상을 우리는 동의보감을 통해 확인한다. 우주의 물리적 배치와 몸의 원리는 나란히, 함께 간다는 것이다.(176 페이지) 저자는 자연과 우주라는 말로부터 상생()을 떠올리는 것은 낭만적 이미지에 가깝다고 말한다.(176 페이지) 그러니 이런 말이 가능하다. 생명이 네트워크가 아니라 네트워킹을 하는 것이 생명(177 페이지)이라는.

 

저자는 아픔과 괴로움의 원천은 가난이 아니라 무지라고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을 모르는 것이다.(178 페이지) 주자(朱子)가 제자들에게 책도 스스로 읽고 도리도 자네 자신이 궁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다만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이며 입회인에 불과하다. 의문점이 있으면 함께 생각해볼 따름”(94 페이지)이라는 말을 한 것은 인상적이다.

 

이런 인식은 동의보감에서 의사란 단지 안내자에 불과하고 병은 환자 스스로 고치는 것(179 페이지)이라는 인식을 보인 허준의 지론과도 통한다. “하늘 아래 책을 읽고 이치를 탐구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또 있겠는가?“(182 페이지) 정조(正祖)의 말이다. 저자는 암기해서 뇌에 저장된 것이 기억(혹은 의식)이라면 읽기로 인한 파동을 통해 뼈에 새겨진 정보는 무의식(혹은 몸)과 연동되어 있다고 말하며 낭송을 복원해야 한다고 덧붙인다.(190, 191 페이지)

 

저자는 학습 과정에서 소리를 적극 활용하는 가장 쉬운 경우가 운문, 그중에서도 시()라 말한다.(191 페이지) 글쓰기의 두 축은 독창성과 논리이다.(202 페이지) 기승전결을 갖춘 글이 좋은 글이다.(211 페이지) 기는 문제제기, 승은 제기된 문제를 펼치는 것, 전은 그 문제에 대한 독창적 해석, 결은 전체를 수렴, 압축하여 앞으로 탐구할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글쓰기를 수행하는 과정도, 글쓰기의 내적 구성도 결국 사계절과 함께 리듬을 타는 법을 터득하는 것이다.(213 페이지) 이지(李贄)의 삶과 사랑을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견문과 도리를 알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너의 동심을 가리는 병폐라고 했다. 보고 들은 것이 많을수록 자신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옛 문장가들의 글만 베끼고 흉내 내게 된다.(231 페이지)

 

이지가 싸우려고 한 것은 이런 획일적이고 교조적인 학문이자 도그마가 된 지식이다. 저자는 진리를 구하려면 기개가 있어야 하고 자립해야 한다고 말한다.(247 페이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덕목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키워드는 자립, 스스로 성찰하는 것 등이다.

 

이 주장은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일관성 있게 유지된 덕목이다. 많은 깨우침을 준 책임을 고백한다. 내면을 성찰해 욕망을 다스려야 하며 문제는 결국 홀로 푸는 것이라는 평소 내 지론과 일치하는 바가 있어 흥미 있게, 감사하게 읽었다. 특히 글쓰기에 대한 지침이 생생하고 리얼했다고 생각한다. 봄여름가을겨울에 맞춰 글과 삶을 설명한 내공이 인상적이었음도 고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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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롱나무 꽃필 적엔 병산에 가라‘란 책. 순전히 제목에 이끌려 샀다. 경북 안동에 자리한 서애 유성룡의 사액서원인 병산서원(屛山書院).

서원을 둘러싼 산세가 병풍 같다 해서 불리게 된 이름. 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는 절이나 선비들의 공간에 많이 심는 나무이다.

‘배롱나무 꽃필 적엔 병산에 가라‘의 저자(배국환) 처럼 건축가 승효상도 여름엔 (배롱나무 붉은 꽃이 지천인) 광주로 가라고 말한다.(‘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155 페이지)

제목이 너무 시적이어서 예정에 없는 구매를 했다며 ‘배롱나무 꽃필 적엔 병산에 가라‘의 표지 사진을 찍어 동기들 톡방에 올렸더니 이** 선생님이 내 나이의 남자 가운데 저런 감성을 가진 사람은 나 말고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도종환 시인은 ‘목백일홍‘이란 시에서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새 꽃봉오릴 피워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란 말을 했다.

아직 7월이 되려면 멀었으니 내 말은 이른 꽃타령인 셈.

˝..배롱나무 꽃그늘에 기대 앉으면/ 꽃 피고 꽃 지는 소리가 더 잘 들렸˝다는 시(김명리 시인의 ‘배롱나무‘ 중에서)를 읽어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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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혜진 시인의 ‘전복’을 어떤 한자로 써야 할까?

“광장 공포증을 앓는 당신과/ 고독 공포증을 앓는 내가// 늦가을 감포 해송정식당/ 늙은 해녀의 안방에서/ 전복탕을 먹는다// 식어 버린 내 앞에서/ 끓어 넘치는 전복탕// 시퍼런 내장의 쓰라림/ 적막한 껍질이 쏟아 놓은/ 울음들// 여린 암초 사이에서 전복된/ 푸른 두갈래사슬풀 무늬// 마지막 그 밥상/ 잔물결 치는 자개장을 등지고/ 전복탕을 먹는다// 광장공포증을 앓는 당신과/ 고독 공포증을 앓는 내가”...

광장 공포증을 앓는 당신과 고독 공포증을 앓는 나는 전복(顚覆)적이다.

‘식어 버린‘과 ‘끓어 넘치는‘도 전복(顚覆)적이다. 그런 당신과 나는 전복(全鰒)을 즐긴다.

시인은 전복탕(全鰒湯)으로도 전복(顚覆) 놀이로도 쓰일 수 있게 제목을 전복(全鰒)이라고도 전복(顚覆)이라고도 하지 않고 ’전복‘이라 했다.

놀이를 즐기는 사람은 전복(顚覆) 놀이로 읽고 미식(美食)을 즐기는 사람은 전복(全鰒)으로 읽을 수 있게...

어쩔 수 없이(?) 주역(周易)을 말하게 된다. 주(周)의 문왕(文王: 추존)이 은(殷)에 잡힌 상황에서 그는 땅인 곤(昆)이 위에, 하늘인 건(乾)이 아래에 있는 괘를 일러 소통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복희(伏羲)가 만든 괘상(卦象)에 사(辭)를 붙인 것은 문왕이다. 효사(爻辭)를 만든 것은 아들 주공(周公)이니 그는 아들에게 대를 잇게 한 것이다.

역(易)과 복(覆)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것이 내 소박한 의문이다. 문왕이 불우하지 않았다면 괘상에 사를 붙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이런 생각은 전복(顚覆) 놀이인가? 역(易) 놀이인가? 단지 상상일 뿐인 놀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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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스님을 위한 마음의 다비식을 모두 끝마치고 있었다",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나 마음의 무덤에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아무려나 당신 마음의 나그네가 내 마음의 나그네를 어디 먼빛으로나마 바래줄 수 있으려구요"

 

"결국, 시인이란 천만번 마음속에 다비를 태우는 자가 아닌가",

 

"몸이 너의 경전이다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생을 다해 읽어내야 한다",

 

"이젠 몸을 떠나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있겠나 묻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모두 어수선하다. 내 마음의 그늘에 잔설처럼 남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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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준(金瑢俊: 1904 1967)의 범우사판 근원수필(近園隨筆)’이 보이지 않는다. 젊은 시절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사긴 했으나 진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두다가 다른 책들의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고물상에 넘긴 것 같다.

 

내가 이 책을 가지고 있던 때는 한 20년 전인 듯 한데 근원수필은 최근 산 노신의 아큐정전과 함께 범우문고의 목록에 포함된 책이다.(‘근원수필은 범우문고 70, ‘아큐정전194. ‘아큐정전201641051쇄로 발행된 책.)

 

미술평론가, 화가, 수필가였던 근원은 근원(近園),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벽루산인(碧樓山人), 반야초당주인(半野草堂主人), 매정(梅丁) 등 다양한 호()를 썼던 분이다. ‘근원수필은 우리나라 수필 문학의 진수(眞髓)라는 평을 듣는 책이다. 지난 해 가을 매화와 불꽃이란 제목으로 존 버거와 근원의 그림들을 전시한 열화당(悅話堂)에서 출판한 6권짜리 김용준 전집이 탐난다.

 

근원은 다방면의 책을 읽고 인생으로서 쓴맛 단맛을 다 맛본 뒤에 저도 모르게 우러나는 글이고서야 수필다운 수필이며 자신이 수필을 쓴다는 것은 어릿광대가 춤을 추는 격이라는 말을 했다.(‘청소년이 읽는 우리 수필‘ 10번 김용준편 13 페이지)

 

노시산방기(老柿山房記)‘에서 김용준은 자신이 거하는 집을 노시산방이란 이름한 것은 상허 이태준이라 말한다.(이태준과 근원은 같은 해에 태어난 사이이다.) 노시산방은 마당 앞에 칠팔십년은 묵은 성싶은 늙은 감나무 이삼 주()가 서 있는 집이다.

 

근원은 처음에는 오류(五柳) 선생(도연명陶淵明)의 본을 받아 양류(楊柳: 버드나무)를 많이 심어볼까도 했다. 근원의 이 글을 읽으니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 듯 싶다. 지난 해 매화와 불꽃이란 제목의 그림 전시회를 연 출판사인 열화당(悅話堂)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나오는 친척들과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워한다는 뜻의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희망의 언어인 석과불식(碩果不食: 씨로 쓸 과일은 먹지 않는다는 의미)을 이야기하며 신영복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이 초겨울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최후의 감<>이다.(‘담론’ 420 페이지) 신영복 선생님은 씨 과일을 먹지 않는 것은 지혜이자 교훈이라는 말을 했다.

 

이렇듯 초겨울 가지 끝에 남아 있는 최후의 감을 희망과 연결 짓는 것도 좋고 장석남 시인처럼 마당 앞에 감나무가 한 주() 커다랗게 서서 여름이면 그늘을 뿌렸다.”(‘물의 정거장’ 57 페이지)는 말로 낭만과 서정을 이야기하는 것도 좋다. 나는 이렇게 꽃시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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