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고 슬픈 날이었다. 여섯 차례로 준비, 계획했던 하나의 일정이 취소되었고 한 차례 가질 동기 모임은 참석 인원이 적어 일정을 조정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각자 맡은 역할과 처지 때문에 동기들이 다 모일 날을 도출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상황이다.

하지만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다. 그 만큼 바쁘고 역동적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행무상을 슬퍼할 수도 있지만 모두에게 공평한 진리이니 순응의 지혜를 도출해낼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든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 가운데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란 구절을 음미하고 있던 중에 일정 취소 소식을 들었다.

문제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기는 쉬워도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잘 믿게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나는 위로 받아야 할 사람의 심경도 헤아릴 여유가 나에게 있음을 감사한다.

오늘 허수경 시인의 암투병 소식도 들었다. 나는 줄곧 비슷한 연배의 시인인 그의 시를 애송해왔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이란 구절 때문인지 그의 투병은 더욱 마음이 쓰인다.

요즘 나는 상대를 많이 위로하고 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행동의 일환일 수 있다.

취소된 일정은 다른 것을 준비하는 것으로 대신할 생각이다. 좀더 충실하고 철저한 공부를 하자.

오늘은 시인들의 시집을 해설할 때 예외 없이 두 번 이상 정독한다는 조재룡 교수를 보며 많은 것을 느낀 하루이기도 하다.

해피 엔딩이란 말을 조심스럽게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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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교수의 ‘한용운 - 혁명적 의지와 시적 사랑‘을 읽다가 문득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필자가 고교 2년 시절인 1964년의 어느 날 국어 시간에 누가 만해의 그 시를 암송할 수 있겠느냐는 선생님의 제안을 받고 한 학생이 시를 외움으로써 일순 교실에 신선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는 부분을 접하고서이다.

나도 시를 수십 편 암송할 수 있지만 이상하게 국민적 사랑을 받는 애송시를 외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시를 외우면 정서를 순조롭게 하고 명문(名文)을 어둠 속에서라도 감상할 수 있는 미덕이 있다.

물론 이것 말고도 미덕은 더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진선(眞善)한 시의 가치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필자는 그 교우의 암송을 계기로 시는 역사나 철학보다 더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인간의 숨결을 전해주는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한다.

필자의 이 말은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오늘 내가 최동호 교수의 책을 뒤늦게 읽고 시를 외워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정서 순화나 시의 가치 전달 차원이 아니다. 이틀 후에 있을 강의 시간에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문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암송한 내용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러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도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 기억 나지 않거나 매끄럽지 않으면 그렇게 된 배경을 말하면 될 것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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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접한 주장들 가운데 가장 쇼킹한 것은 마르크스가 관념론자라는 말이다. 개러스 스테드먼 존스의 카를 마르크스 - 위대함과 환상 사이(Karl Marx: Greatness and Illusion; 201855일 출간)’ 주요 주장 중 하나이다.

 

번역자인 홍기빈 글로벌 정치경제 연구소장에 의하면 유물론 대 관념론이라는 대립구도는 마르크스 시절엔 없었던 것으로 엥겔스가 다윈 이후 생겨난 대립구도에 마르크스를 맞춰 넣은 것이다.

 

홍기빈 소장은 마르크스의 노동에 대한 개념과 노동자에 대한 애정과 신뢰는 노동자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서 나온 게 아닌바 오히려 칸트, 헤겔처럼 인간의 가능성과 능동성을 긍정하고 강조하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 위에서 내린 철학적 결론으로 이해해야 하며 그래야 마르크스가 노동과 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이런 사실을 접한 결과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하나가 칸트 이야기이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이 태어난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었지만 낯선 나라들에 대한 묘사와 해설을 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이 여행을 할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은 여행할 시간에 더 많은 나라를 책으로 알기 위해서라는 말이다경험적 관찰에서 나온 게 아니라 칸트와 헤겔처럼 인간의 가능성과 능동성을 긍정하고 강조하는 독일 관념론의 전통 위에서 나온 마르크스의 사상이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이렇듯 다름 아닌 칸트의 말이다.

 

관념적 고찰과 경험적 고찰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낫다고 일의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인류해방을 위해 노력한 마르크스의 위대함은 끊임없는 노선 변경에서 나왔다는 홍 소장의 견해를 보며 균형점을 보았다는 생각을 한다. 유연함, 지속적 성찰과 숙고.. 등등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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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壽硯山房)에서 본 박태원 선생의 인상적인 얼굴 모습을 기억한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습을 한 상당히 특이한 머리 스타일의 그 사진은 작가가 잡지를 만들 때 찍은 사진이다.

박태원 선생은 작가였고 민중 친화적이고 여성친화적이었으며 꽤 반듯한 도덕적 가치를 가졌던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다.

산책을 키워드로 조명하자면 박태원 작가는 고현학(考現學; modernology)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고현학의 완결편이 그의 ‘천변풍경(川邊風景)‘이다.

고고학이 과거의 흔적으로 과거인들을 조명하는 학문이라면 고현학은 지금 이곳의 풍물들을 통해 당대의 삶을 이해하려는 학문이다.

오늘 청계천 박물관에서 노지승 교수의 천변풍경 특별 강연을 들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박태원 작가가 시인 이상을 소재로 ‘이상의 비련‘이란 작품을 썼다는 점이고 이상이 여혐(女嫌)적이었다면 박태원은 여성 친화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상도 서울 거리를 걸었고 박태원도 서울 거리를 걸었지만 유형은 다르다.

이상은 스스로의 멋에 취하고 커피 맛에 탐미하는 산책을 했고 박태원은 다른 사람을 관찰해 소설의 소재로 삼는 산책을 했다.

도시적 삶에 관심을 기울이고 언어적 실험을 했다는 점에서 박태원은 세련된 모더니스트인 한편 ‘천변풍경‘을 통해 알 수 있듯 리얼리스틱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내 이름과 두 글자나 같고 마지막 글자도 비슷해 나는 박태원 작가가 큰 형 같게 여겨진다.

노지승 교수의 책(‘유혹자와 희생양‘, ‘영화관의 타자들‘)을 읽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오늘은 여러 모로 수확을 올린 하루였다. 노지승 교수, 청계천 박물관 측에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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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랑은 다시 돌아온다‘란 책을 읽던 때가 기억난다.

낭만적 사랑을 전하는 책도, 실용의 지혜를 전수하는 책도 아닌 ‘첫 사랑은 다시 돌아온다‘는 정신분석에 대한 책이다.

재작년 봄 문화해설 수업 시간에 내가 강응섭의 그 책을 교재 옆에 나란히 두고 있자 강사 선생님이 내게 지어보인 온화한 웃음이 생각난다.

나를, 사랑을 책으로 배우는 사람 또는 첫 사랑은 다시 돌아온다는 주장을 접함으로써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 이후 나는 같은 저자의 ‘자크 라캉과 성서 해석‘을 읽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라캉에 대한 내 생각에 별다른 의심의 여지는 없었다.

내가 라캉에 대한 비판과 이의제기를 접하게 된 것은 올해 홍준기 교수의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을 통해서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라캉은 가부장적이고 독선적이며, 내담자보다 분석가에게 유리한 정신분석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하다.

물론 나는 라캉으로부터 배울 바, 취할 바를 찾아내려 한다.

그래서 백상현 교수의 ‘고독의 매뉴얼‘,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라깡의 루브르‘ 등을 다시 읽으려 하고 특히 ‘라깡의 루브르‘는 내 사유에 길잡이가 되어줄 교과서라 생각한다.

‘정신병동으로서의 박물관‘이란 부제를 가진 ‘라깡의 루브르‘는 루브르 박물관의 전시품들을 강박증, 히스테리, 멜랑꼴리, 성도착증 등을 드러낸 작품으로 분류한 책이다.

이 책 이후 백상현 교수는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라깡의 인간학‘,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등의 책을 썼다.

이 책들을 읽지 못한 것은 ‘라깡의 루브르‘를 완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든 바람직한 공부와 거리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라깡의 정신분석을 통해서는 사회의 병리적 실상을 파악하고 멜라니 클라인의 정신분석을 통해서는 치유의 단서를 얻어내고자 한다.

최근 나온 강응섭의 ‘라깡과 기독교의 대화‘란 책도 정독해야할 것이다.

주목할 책은 프랑소와즈 돌토의 ‘정신분석과 기독교 신앙‘이다.

이 책에 유목민적 신앙, 치유하는 신앙 등의 챕터가 있다.

유목(遊牧)과 정주(定住)가 아닌 유목과 치유라니.. 흥미를 자극하는 책이 아닐 수 없다.

이분법적 시각들은 흥미를 자극하는 한편 부작용을 낳는 첨병일 수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고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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