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쏜살 문고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이민경 추천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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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흐름 소설 기법을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하나인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 1941)는 비극적 자살로 생을 마친 영국 작가이다. 192810월 뉴넘 대학의 예술 협회와 거턴 대학의 오타에서 발표한 두 강연문에 기초한 책인 '자기만의 방'은 빼놓을 수 없는 수필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가 여성 차별의 역사에 대해 내놓은 페미니즘적인 처방을 만나게 된다.

 

'울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라 말한다.(18 페이지) 울프는 사실보다 허구가 더 많은 진실을 내포할 것이라 말한다. 허구는 청중으로 하여금 강연자의 한계와 편견, 특유의 성격 등을 진실보다 더 잘 파악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이다.

 

울프(1882 - 1941)의 시대는 여성이 도서관에 들어가려면 대학 연구원을 동반하거나 소개장을 소지해야 했던 시대이다. 울프는 픽션은 사실에 충실해야 하고 사실이 진실에 가까울수록 픽션은 더욱 나아진다고 들었다고 말한다.(34 페이지) 울프는 우리의 어머니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우리에게 물려줄 재산이 없었을까요?라 말한다.(41 페이지)

 

울프는 한 성()의 안정과 번영, 다른 성의 가난과 불안정을 언급한다.(45 페이지) 울프가 말했듯 여성은 상반되는 시각의 대상자였고 지금도 그렇다. 여성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견해 vs 여성에게는 신성한 힘이 있다는 견해, 여성을 찬미한 괴테 vs 여성을 경멸한 무솔리니...

 

울프는 통치해야 하고 정복해야 할 가장에게 다수의 사람들 즉 인류의 절반이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느끼는 것은 막대한 중요성을 가질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울프에 의하면 여성은 지금껏 수세기 동안 남성의 모습을 실제 크기의 두 배로 확대 반사하는 유쾌한 마력을 지닌 거울 노릇을 해왔다.(61 페이지)

 

울프는 만일 여성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 거울 속 형체는 오그라들 것이고 삶에 대한 적응력도 감소할 것이라 말한다. 울프는 남성에게서 거울의 환영을 빼앗는다면 남성은 코카인을 빼앗긴 마약 중독자처럼 죽을 것이라 말한다.(62 페이지) 울프는 남성의 심리라는 위험하고도 매력적인 주제를 탐구하려면 연 500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62 페이지)

 

울프가 여성에게 연 500파운드의 수입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녀가 그만큼의 돈을 매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울프는 연 500파운드의 상속으로 아무도 미워할 필요도 아부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울프는 픽션은 거미집과 같아서 아주 미세하게라도 구석구석 현실의 삶에 부착되어 있다고 말한다.(68, 69 페이지)

 

울프에 의하면 거미집은 형체 없는 생물이 공중에 자아낸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인간 존재의 작업이며 건강과 돈, 우리가 사는 집처럼 조잡한 물질에 부착되어 있다. 울프는 자신은 역사가가 아니기에 유사 이래 모든 시인들의 작품에서 여성들이 횃불처럼 타올랐다고 말할 것이라 말한다.(70 페이지)

 

울프에 의하면 여성은 상상에서는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라는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 존재였다고 말한다.(71 페이지) 울프에 의하면 역사는 여성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72 페이지) 울프는 익명으로 많은 시를 쓴 사람들의 상당수가 여성일 거라 추측한다.(79 페이지)

 

울프는 16세기에 태어나 위대한 재능을 가진 여성은 틀림없이 미치거나 총으로 자살하거나 마을 변두리의 외딴 오두막에서 절반은 마녀, 절반은 요술쟁이로 공포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 일생을 끝마쳤을 것이라 말한다.

 

시적 재능을 발휘해 보려고 시도한 천부적 재능의 여성들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방해받고 저지되었으며 자기 내면에서 상충하는 충동들로 고통받고 갈가리 찢겨져 틀림없이 건강과 온전한 정신을 잃었을 거라는 점은 심리학 지식이 거의 없어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80 페이지)

 

울프에 의하면 예술가가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조금이라도 언급하게 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루소가 처음 시작했을 것이라는 것이다.(82 페이지) 울프는 조용한 방이나 방음 장치가 된 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83 페이지)

 

울프는 현대의 여성 작곡가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여배우가 처했던 입장에 놓여 있다는 말을 한다. 이는 역사가 정확하게 반복되는 것을 뜻한다. 울프는 중산층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을 십자군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더 충실하게 묘사하고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라 말한다.(100 페이지)

 

걸작이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는 울프에 의하면 걸작은 오랜 세월에 걸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이고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한다.(101 페이지)

 

울프는 19세기 초 중산층 가족은 오직 하나의 거실을 공유했다고 말하며 여성이 글을 썼다면 그녀는 공동의 방에서 써야만 했을 것이라 덧붙인다. 여성에게는 자기만의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이 채 삼십 분도 되지 않았다.

 

울프는 여성은 수백 년 동안 방 안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벽 자체에도 여성의 창조력이 스며들어 있는바 그 창조력은 실제로 수용 용량을 넘도록 벽돌과 회반죽을 채워 왔으므로 이제는 펜과 화필, 사업, 정치에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130, 131 페이지)

 

울프는 이런 말을 한다. 몇 세기에 걸쳐 더없이 고통스러운 훈련에 의해 얻어진 여성의 창조력은 남성의 창조력과 전적으로 다르다는.(131 페이지) 울프는 우리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최고의 만족과 가장 완벽한 행복을 이룬다는 이론을 선호하는, 비합리적일지라도 심오한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143 페이지)

 

울프는 남성이라고 해도 자기 두뇌의 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하고 여성도 자기 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144 페이지) 울프는 셰익스피어가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마음이야말로 여성적 남성의 마음을 보여주는 전형이라 말한다.(145 페이지)

 

울프가 말했듯 현대의 남성이 남성적인 면만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을 통탄할 일이다.(149 페이지)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이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한다.(152 페이지) 울프가 그토록 돈과 자기만의 방을 강조한 것은 여성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언제나 가난했고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 지적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157 페이지)

 

울프는 여성이 책을 쓰는 작업에 왜 그렇게 중요성을 부여하느냐는 의문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동기는 이기적인 것이라 말한다.(158 페이지) 울프는 아무리 사소하고 광범위한 주제라도 망설이지 말고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쓰기를 권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충분한 돈을 소유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인다.

 

울프는 자신의 사고의 궤적을 돌이켜 볼 때 자신의 동기가 전적으로 이기적이지만은 않았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159 페이지) 이는 작가에게 요구되는 덕목과 연관된 말이다. 리얼리티를 찾아내어 수집하고 그것을 여타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160 페이지)

 

울프는 남성과 대등한 사람이 되거나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세상에 영향을 끼치려는 고귀한 감정이 없고 다만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161 페이지) 울프의 '자기만의 방은 독특한 책이다.

 

여성에게 연 500파운드의 돈과 자기만의 방,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의 필요성을 역설한 책인데 중간중간 의식의 흐름 수법의 소설 같은 부분이 있고 지루하고 모호한 부분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열정과 의지, 우회적 진술 등으로 여성 해방을 위해 고민하고 모색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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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지원센터 代理 근무(7713 17)를 앞두고 어제 간단한 미팅을 가졌다. 한옥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도 좋을 만큼 아름답다. 한옥 119 (출동) 제도를 비롯 서울시가 한옥 건축과 보존 등을 위해 시행하는 제도들도 주목할 만하다.

 

한옥 119 출동 제도는 한옥지원센터와 함께 한옥 장인이 요청이 발생한 현장으로 출동해 한옥 개, 보수를 돕는 등 긴급 사안에 대해 조치를 취해 주는 제도이다. 늘 그렇듯 해설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최준식 교수의 () 북촌 이야기를 구입했다.

 

이 책에는 한옥만이 아니라 초가(草家)도 복원해야 한다는 글 등 듣기에 따라 불편할 수 있는 내용들도 있다. 과거 대부분의 선조들이 살던 집은 기와집이 아니라 초가였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은 김시덕 교수의 서울 선언이란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은평 한옥마을 조성 과정에서 파괴된 수많은 평민들의 무덤을 예로 든다. 저자는 우리는 왜 시민 대다수가 사는 공간에는 관심이 없고 그것들을 함부로 없애 버려도 된다고 생각할까, 묻는다.

 

그러고 보니 지난 달 16일 강릉 답사 때 만난 한 자원봉사자 생각이 난다. 60대 후반쯤의 이 분은 내가 그날 함께 해설자로부터 들은 이씨(李氏) 왕가의 터부를 회상하며 해설 때 활용하면 좋으리란 이야기를 하자 이해 못할 반응을 보였다.

 

터부란 나무 목자가 들어 있는 이()라는 성() 때문에 도끼를 의미하는 쇠 금() 즉 김씨를 경계해 김씨 여자를 며느리로 삼지 않으려 했다는, 공식 확인이 어려운 이야기이다. 이해 못할 반응이란 종교적 반발을 일으킬 수 있으니 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분은 왜 해설자에게는 그 말을 하지 않았는가? 해설자가 교수여서 그랬는가? 이 날 이 분은 초면인 내게 이 말 말고도 시험 앞두고 답사를 왜 왔느냐, 이어폰으로 계속 음악을 들으면 귀에 이상이 생기지 않느냐 등의 말을 했다.

 

나는 조선 왕릉, 궁궐, 종묘, 고택 등이 주례 고공기, 풍수, 주역 등의 원리에 따라 지어졌듯 조선 시대 사람들은 음양오행과 주역, 사주 등의 가치관에 따라 움직였으니 해설에 그런 내용을 반영하지 않으면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 분은 상대와 뜻이 다르면 답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원칙이라며 함구(緘口)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그 자원봉사자가 대답할 말이 있었을까?

 

김시덕 교수는 조선왕조 중심주의를 문제 삼는다. 조선왕조 중심주의란 조선 왕조와 사대부 문화의 계승을 서울의 정체성 확립과 동일시하는 관점이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박제된 느낌을 서울의 고택(古宅)들에서 얻는다면 지나칠까?

 

물론 나는 얼치기이다. 조선 왕조와 사대부 문화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비판하는 만큼 서민 문화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은 아니다. 고택, 사찰 등을 탐방하는 대학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 왠지 그런 고급 문화가 싫어 모임과 거리를 두고 고택 대신 민가, 사찰 대신 사하촌을 순례했다는 인병선 님(초대 짚풀 생활사 박물관장)이 생각난다.

 

나는 고급 문화의 상징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짚풀이 서민문화를 잘 드러내주는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르는 것이 참 많은 입장으로는 어둔 밤길을 걷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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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2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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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과 흙비가 오는 것을 하늘의 재앙이라 하고 가뭄과 홍수로 마르거나 무너지는 것을 땅의 재앙이라고 한다면 ( )는 사람의 재앙 중에서 가장 큰 것이라 하겠습니다.”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 저 말이 누구의 것인지 먼저 말해야겠다. 답은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내처 만일 자제가 ( )를 일삼으면 경전과 역사 공부를 울타리 밑의 쓰레기로 여길 것이고 나라의 재상이 이를 일삼으면 조정의 일을 소홀히 할 것이며 부녀자가 이를 일삼으면 길쌈하는 일을 마침내 그만두게 될 것이니 하늘과 땅 아래 그 어떤 재앙도 이보다 더 심하겠습니까?“란 말을 하기까지 했다.

 

나는 요즘 정약용이 우려한 저것을 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 ) 읽기이다. ( )에 들어갈 답은 패관잡서(稗官雜書) 요즘 말로 하면 통속 소설이다. 아니 정조(正租)나 다산(茶山)의 기준으로는 소설 자체가 문제였던 것이니 요즘 기준으로는 소설이라 해야겠다.

 

내가 읽고 있는 책(장편 경애의 마음’)의 저자가 이런 말을 했다. “연애보다 기승전결 뚜렷한 사건이 있을까요”..이 분은 자신이 연애 이야기를 자꾸 쓰는 건 사람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란 말을 했다. 오랜만에 사랑 소설을 읽는 나는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일까?

 

경애의 마음과 함께 읽는 김용심의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를 보면 정조 시대에 패관잡서체 또는 소품체 문장을 썼다 해서 누군가 목이 잘리거나 피를 흘렸다는 기록이 없고 오히려 영조 시대에 조선 왕실을 모독한 중국 역사책 명기집략(明紀緝略)’을 읽거나 갖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문인과 책 거간꾼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했으며 백여명의 주동자들이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벌거벗긴 채 두 손을 뒤로 묶여 죽임(아사餓死)을 당했다.

 

물론 정조는 중국 잡서의 수입을 금지하고 관리들을 혹독하게 훈계하였지만 책을 불사르거나 관리들을 중벌에 처하지 않았다.(‘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77 페이지) 저자가 정조의 문체반정에 대해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기대된다. 잘 모르지만 정조를 조선의 근대화를 막은 임금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논문에 대한 글 두 편이 생각난다. 하나는 20년도 더 전에 나온 김영민 교수의 논문중심주의와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현 스님의 스님의 논문법이다.

 

김영민 교수는 문화적 예속 상태에서 자율적 비판 및 선택의 권리를 망실해 버린 채 맹목적으로 따라야만 했던 논문이라는 글쓰기란 말을 했다.(‘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 18 페이지) 반면 자현 스님은 논문은 진실에 대한 탐구이자 추리소설같은 것으로 그 자체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가치를 내포하는 지성의 산물일 수 있다.“는 말을 했다.(‘스님의 논문법’ 124, 125 페이지)

 

정조는 문원보불’, ‘육영성휘’, ‘사기영선’, ‘당송팔자백선같은 책들을 펴냈는데 이런 책들이 오늘날 논문에 해당할지 아니면 교양 인문서에 해당할지는 모르겠다. 김기란은 학술논문은 본질적으로 성찰적이고 윤리적인바 기본적으로 읽기를 통한 쓰기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성격상 주장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글, 학술의 장에서 지식을 구성하고 소통하는 것이라 정의했다.(‘논문의 힘’ 20 페이지)

 

김기란 저자는 논문에서 다른 사람들이 해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나는 신경쓰지 않는다.“라는 연구자에게는 최악임이 분명한 반응을 얻게 될 뿐이라 말한다.(‘논문의 힘’ 44 페이지)

 

나는 해결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문제라는 말이 키워드라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정조가 장려한 바른 문풍(文風)의 글을 오늘날의 인문서와 논문으로 폭 넓게 보고 싶다. 물론 폭 넓게라는 말은 느슨하게라는 말일 수 있다.

 

정조는 문체반정을 단지 문체의 문제만이 아닌 잘못된 제도 즉 과거제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의 하나로까지 넓게 생각했다.(’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 80 페이지) 정조는 한문을 아는 양반들에게 대해서만 문체를 두고 닦달했다. 김용심(’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의 저자)은 정조의 정책은 문체반정이 아니라 문체순정(醇正) 또는 문체귀정(歸正)으로 불러야 맞고 중립적으로라면 문체정책이라 해야 옳다고 말한다.

 

정조 시대에는 오히려 문체순정, 문체귀정 등이라 불렸고 정조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문체반정이란 말을 썼다.(81, 82 페이지) 사실 반정(反正)이란 말은 지극히 정치적인 말이다.

 

저자는 정조가 단행한 문체반정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조의 두 개의 정체성에 근거해 분석한다. 하나는 학자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측면이다. 정조는 문체가 세도(世道)와 통한다고 보았다. 정조에게 문체는 세상 풍속을 바로잡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조의 의도는 감정을 휘몰아치게 해 문제를 일으키는 소설의 문체를 바로잡아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데 있었다. 정조는 문체가 나빠진 원인을 세 가지로 보았다. 학문의 기본인 경학(經學)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심성에 문제가 있어서이고 명말청초 소품과 패관소설이 읽히기 때문이라 본 것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원인은 세 번째 것이다. 정조는 패관잡서가 사람의 이성이 아닌 비뚤어진 감성에 호소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정조의 문체반정은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을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정조를 성리학이 말하는 도의 세상, 질서의 세상을 지켜야 하는 군왕으로 본다.(100 페이지) 정조는 플라톤의 철인 군주를 연상하게 한다. 저자는 문체반정을 노론의 천주교 공격에 맞설 논리 차원의 카드로 본다.(108 페이지) 정조는 사학(邪學) 즉 천주교를 없애려면 소품부터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110 페이지)

 

문체반정으로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은 모두 노론이었다. 문체반정으로 훌륭한 자송문(自訟文: 반성문)을 쓰고 오히려 정조의 신임을 얻고 정조와 사돈이 된 김조순이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정조 사후 세도 정치로 온 나라를 좌지우지했다.

 

정조는 남인의 약점인 천주교를 노론의 문제점인 패관소품과 대비시킨 것이다. 사학이 흥한 것은 정학이 망했기 때문으로 이는 곧 패관소품체로 정학을 망친 노론의 탓이라는 논리이다. 저자는 문체반정이 학문적 이유와 정치적 이유 모두와 관계했다고 본다.(113 페이지) 사실 정치와 학문을 분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식 - 권력'이란 푸코의 개념을 굳이 예시하지 않더라도.

 

저자는 정조가 아니었으면 문체반정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말한다.(115 페이지) 고전과 소설 사이의 미세한 틈과 그 사이에 잠재된 무시무시한 위험성을 한순간에 간파하는 능력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것이 문체반정이었다. 물론 시대를 거스르는 정책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왜 잡스럽고 한심한 소설을 읽는지 모르겠다는 정조와 지나치게 가볍고 임금 앞에서 머리만 조아리는 노론 대신들의 대비 구도는 선명했다. 박지원은 흔들리지 않았다. 문체를 바르게 하려는 임금의 의도에 납죽 엎드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거스르지도 않았다.

 

박지원은 자신의 문체가 연암체라 불리든 소품체라 불리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문체가 아니라 그 문체에 담겨 있는 실용의 의미, 백성들의 삶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이로움을 찾는 일이었다.(152, 153 페이지)

 

정조가 기울어가는 조선 왕조에서 고대 유교의 아름다운 이상 정치를 꿈꾸었듯 박지원은 말뿐인 도덕보다는 백성들이 모두 넉넉하게 잘 사는 실학자의 꿈을 꾸었다.(154 페이지) 박지원과 더불어 문체반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옥이다.

 

그는 "나는 요즘 세상 사람이다. 내 스스로 나의 시, 나의 문장을 짓는데 선진양한이 무슨 상관이 있으며 위진삼당에 무에 얽매인단 말인가"란 말을 했다.(159 페이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서민 가사나 판소리, 잡가, 사설시조, 위항문학 등이 나타나 활짝 꽃을 피운 것은 사람들이 틀에 박힌 고전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소통에 목말라 했기 때문일 것이다.(171 페이지)

 

이옥은 성리학의 도 우선주의를 불편해 했다. 그가, 하찮아 보이는 돌들을 갖가지 돌이 있다고 간단하게 묘사하지 않고 각양각색의 돌들의 차이에 집중해 세밀히 묘사한 것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도만이 최고라는 성리학의 획일주의에 대한 반발로 보기에 충분하다. 이 대립 구도는 이데아 대 시뮬라크르의 대립 구도를 연상하게 한다.

 

박지원과 이옥은 문체반정과 연관된 인물이지만 사상이 달랐다. 박지원이 뛰어난 해학과 재치로 우둔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글을 썼지만 이옥은 그 우둔한 백성들의 하나가 되어서 말없이 묵묵하게 그들의 모습을 기록했을 뿐이다.(187 페이지)

 

박지원이 여성들에 대한 악습을 비판했다면 이옥은 그 악습에 맞부딪히는 여성을 주제로 글을 썼다.(194 페이지) 이옥은 수천, 수만 가지 천지만물 중 가장 크고 묘하고 거짓 없고 참된 것으로 남녀의 정을 꼽았다.(196 페이지) 이옥은 여자를 솔직하고 따뜻하고 넉넉한 존재로 보았다. 그는 사람 중에 시정이 넘쳐 흐르는 아름다운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여자 말고는 없다고 보았다.(197 페이지)

 

이옥은 오직 도가 최고라는 갑갑한 유교의 세계관도, 남성만이 최고라고 떵떵거리는 가부장적 가치관도 인정하지 않았다. 저자는 정조만큼 문체 곧 글쓰기의 의미를 과대평가한 임금은 없다고 말한다.(206 페이지) 문체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고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라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보면 정조의 생각은 관념적이다. 물론 정조는 문체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문체를 과소평가했다.(206 페이지) 정조는 백성을 사랑했지만 그 백성들이 사랑하는 소설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조에게 아버지는 그립다는 말도 할 수 없는 애틋한 존재였지만 그래서 더욱 아버지를 닮지 않도록 노력했을 것이다.(209 페이지)

 

저자는 정조가 고전이 아닌 살아 있는 당대의 문체를 찾아 주어야 했다고 말한다.(213 페이지) 공자가, 망해가는 주()나라를 이상 국가로 여겼듯 정조는 이미 기울어가는 성리학을 표준으로 삼았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인 즉 가장 빛나는 하나의 달인 정조는 문체반정으로 나라를 이상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혼자만 들린다 주장하는 귀울림도, 스스로 절대 잘못 되지 않았다는 코골이도 모두 덜 떨어진 글로 본 연암이 글쓰기에서 강조한 것은 진실이다. 연암은 글을 잘 짓는 사람은 병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연암이 강조한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이다. 연암은 옛것과 지금 것의 조화, 우아한 고전과 참신한 산문체의 어울림을 가장 훌륭한 문체라 보았다.(223, 224 페이지)

 

이옥은 정조나 박지원과 달리 거창한 문장론이나 문체론을 거의 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쓴 글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을 뿐이다.(229 페이지) 이옥은 시가 말할 수 없는 것도 능히 말할 수 있고 시가 말하지 않으려는 것도 또한 능히 말하려 한다는 말을 했다. 이는 성리학 뒤에 감춰진 세상의 진면모, 동시대의 현실과 상황을 쓰겠다는 것이다.(232 페이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을 되새기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는 말을 했다. 철학적이란 말은 형상을 잘 드러낸다는 말이다.(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92 페이지) 시인에게는 혼란스럽게 뒤섞인 역사적 사실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더 리얼하고 생생하게 표현해낼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옥이 말한 시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시는 다르다. 이옥이 말한 시는 유교 경전을 말한다.

 

저자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려 한 정조, 그 흐름의 정점에 있던 박지원, 기꺼이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이옥 중 누가 옳았는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며 다만 그들이 저마다 자기들의 시대를 가장 치열하게 살아갔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242 페이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는 저자가 정조의 역행이 조선 멸망의 빌미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정조만 문체반정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차별과 불평등을 불러오는 문체가 아닌 공평과 평등을 일으키는 쪽으로의 문체반정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252 페이지) 저자가 말하는 바른 문체란 말하듯, 솔직하고 쉽게 쓰는 것을 말한다.

 

모두가 평등한 대동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듯 우리 시대의 문체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258 페이지)이다. 저자가 말했듯 이제 시작이다. 이제 느릿한 박자, 문체반정, 신윤복과 김홍도, 격쟁, 정약용의 거짓말, 정조의 비밀편지 등으로 구성된 정조의 문화투쟁이란 장이 있는 백승종의 역설(逆說)‘을 읽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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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1) 실수(失手)는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 개선하려 하지 않고 후회만 하는 것은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실수는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 의도가 개입된 행위 즉 실수가 아닌 고의적 행위는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3) 몸이 아파 힘든 것은 첫 번째 화살을 맞은 것, 그로 인해 심난해 하고 마음 아파 하는 것은 두 번째 화살을 맞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미나가 나카모토(17151746)가 주장한 출정후어(出定後語)란 개념이 있다. 붓다는 선정(禪定)에서 나와 법문을 설했다는 의미이다. 이를 붓다는 법문을 설하기 전에 언제나 명상 상태였다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법을 설하기 전 언제나 명상 상태였다는 말이 와 닿는다. 아무 대책 없이 마음을 놔두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성인(聖人)도 저랬거늘..‘이라 생각할 수 있고 저랬기에 성인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자현 스님은 문제점을 인식해 정리하고 떨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반추만 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 직면하면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한다는 말을 한다.(‘스님의 공부법’ 91 페이지)

 

명상은 두 번째 화살을 다시 맞지 않을 수 있게 우리를 돕는 좋은 방편이다. 타라 브랙의 호흡하세요 그리고 미소지으세요 -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방법란 책도 보이고 문진희의 명상하라는 책도 보인다. 그간 너무 마음을 돌보지 않고 살아왔다. 명상해야겠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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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공부법 - 미치도록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자현 스님 지음, 소복이 그림 / 불광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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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공부법우리나라 인문학자 중 1년에 가장 많은 학술진흥재단 등재논문을 쓰는“(245 페이지) 자현 스님의 책이다. 또한 수십 년의 대학생활을 한 저자의 노하우가 집대성된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이 책보다 후에 나온 스님의 논문법을 읽고 깨달은 바가 꽤 있어서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대학과 대학원 생활에서 학점을 잘 받는 법, 논문 쓰는 법 등을 묶어 하나의 단행본으로 만들려 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책으로 나올 수 있을지 자신도 의문이란 말을 했다. 물론 그럼에도 책은 잘 나왔다.

 

개인적 부분이지만 불화의 비밀‘, ’사찰의 비밀‘, ’불교미술사상사론‘, ’사찰의 상징 세계등의 책보다 논문법, 공부법 책을 먼저 읽게 된 것은 나 스스로도 의외로 여겨진다. 저자는 4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분으로 공부는 평생의 과제이고 공부는 행복을 위해 하는 것이란 지론을 편다.

 

동서(東西)와 고금(古今)의 교양서, 철학서들을 종횡무진 넘나드는 저자의 글쓰기 내공은 오랜 세월 실력을 갈고 닦은 데서 나온다. 시중의 여러 공부법 책들과 달리 저자는 독특한 지침을 많이 제시한다.

 

자존감이 없으면 공부도 없다, 책에 있는 말을 다 믿을라치면 책이 없는 게 낫다, 성인(聖人)을 무시하라, 세상의 평가에 휩쓸리지 마라, 실패는 없고 단지 유희만 있을 뿐이다, 어떤 책이든 끝까지 읽어라, 책의 내용은 70%를 알 때 가장 재미있다, 공부는 편식이 더 긍정적이다,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마라 등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 시대는 평균학력이 대학원인 시대이다. 그리고 암기력이 아닌 창의력이 관건인 시대이다. 그렇기에 화두는 어떻게 창의력을 끌어낼 것인가로 수렴되고 이는 곧 내면의 조절과 직결되는 문제다.(41 페이지)

 

내면의 조절은 명상을 통해 가능하다. 명상은 정신집중을 통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모으는 방법이다.(29 페이지) 물론 명상으로 모은 강한 에너지도 사용하지 못하면 무용하다. 그렇기에 공부와 관련해 두 가지 목적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는 전체를 보는 장기 안목이고 다른 하나는 이 달 안에 어느 정도까지 성과를 내겠다는 단기적인 안목이다.(32 페이지)

 

명상을 통해 좋아지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통찰력이나 직관지이다.(19 페이지) 이는 정보의 총량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머릿속에서 어떻게 효율적으로 정리해 쓰려고 할 때 떠올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49 페이지)과 함께 새길 말이다.

 

공부에도 적용되는 바이지만 저자는 논문 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련 자료들을 잘 집취(集聚)하고 분류하는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의력을 통해 자료들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강조한다.(245 페이지)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유효한 지식을 짜깁기하는 것은 가장 타당하고 효율적인 학습법이지만 다만 그것은 더 높은 방식으로의 비약을 위한 학습 방식이어야 하지 그 안에 갇혀서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잃어버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195 페이지)

 

이런 점을 이해하고서라야 때로는 성인(聖人)이라도 무시할 수 있는 배포와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151 페이지)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논문은 기존 견해와 다른 관점의 도출로 기존 이론과 논리구조를 참을 수 없었던 누군가에 의한 부정(否定)의 결과물이기에 공부의 속성은 긍정보다 부정에 가깝다는 말(116 페이지)이 이해된다.

 

덧붙이면 중요한 점은 부정을 통해 반드시 긍정을 완성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내용들은 발전하고 싶다면 주변의 익숙한 것에 칼날을 겨누고 의심해야 하고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36 페이지)과도 상통한다.

 

저자는 그럼 논문을 어떻게 보는가. 저자에 의하면 논문은 합리성을 가진 거짓이다. 최대한의 자료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것일 뿐 진실성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215 페이지) 저자는 팔만대장경을 다 읽고서야 경전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며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용한 지식인지 판단해 학문의 최단거리를 찾는 것이라 덧붙인다.(187 페이지)

 

그런 저자에 의하면 이런 부분에서 윤리에 걸리면 안 된다. 전체를 통달하지 못한 채 가르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지만 최단거리를 찾아야 할 때도 있다는 말이 가능한 듯 하다. 저자의 글은 매끄럽기보다 내용이 좋다. 그런 저자는 문장과 글의 구성 능력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가.

 

답은 많이 써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이다.(219 페이지) 이는 논문 쓰는 것이 피를 말리는 작업이지만 계속 그렇게 하면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으로 새로운 피가 솟아나오고 순환하는 기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45 페이지)과도 통한다.

 

글쓰기에서 구상(構想)을 확립하고 하나의 주제와 관련해서 일관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216 페이지) ”많이 써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과 통하는 바이지만 하나의 주제를 탄탄한 논리구조로 밀고 나가는 것은 여간한 내공이 아니면 쉽지 않기에 반복 훈련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는 점이 중요하다.(216 페이지)

 

흥미로운 점은 글쓰기를 통해 생각이 정리되기도 한다는 점이다.(216 페이지) 글이 생각을 표현해주지만 글을 씀으로써 생각이 정리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는 점이다. 공부는 현재의식보다 무의식이 하는 부분이 훨씬 더 크다. 그렇기에 창의력을 증진시키려면 충분한 잠이 필요하다.(46 페이지)

 

인상적인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과 충돌해서는 안 되고 내면에 자리한 또 다른 반대의 나를 상정해 차근차근 타당성을 설명하라는 말이다.(61 페이지) 이는 내가 할 수 있다는 무의식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무의식을 움직여 문제를 해결하게 만든다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49 페이지)

 

연인끼리만 밀당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와도 때로는 밀당을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마음에 들더라도 너무 일방적으로 매달리면 매력이 떨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공부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때로 과감히 무시할 수 있는 멋스러움도 부려봄이 마땅하다. 이런 것이 공부의 재미이며 낭만이다.(163 페이지)

 

나와 관련되어 가장 인상적인 지침은 같은 분야의 책을 10종 읽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복되어 나오는 개념들을 일부러 외우지 않아도 되고 관점들의 충돌 부분에서는 A의 타당성을 B의 문제점으로 확립하고, B의 타당성을 A의 문제점으로 변증한 뒤 양자의 견해를 종합 지양하는 새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225 페이지)

 

개론서를 손에서 놓지 않는 것이야말로 초학자인 동시에 대가의 기풍이다.(239 페이지) 개론서를 지속적으로 읽는 것은 잊혀지는 부분을 환기시키고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공부가 어려운 것은 전체적인 판단이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부분에 대한 이해에 과도하게 집중하기 때문이다.(235 페이지) 이제 조금 더 효율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겠다. 저자의 지침에 나름의 비판적 안목을 세우기도 하며 수시로 손에 들어야 할 책이 스님의 공부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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