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 - 동양과 서양을 만들어온
김월회.안재원 지음 / 현암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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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은 익히 알고 있지만 제대로 읽은 바는 별로 없는 책이다. 읽어야 한다는 또는 알아야 한다는 당위적 차원에서 접근하지만 읽어내기도 쉽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찾기도 어려워 지지부진하게 되기 쉽다.

 

김월회, 안재원 교수의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는 고전 해설서가 아닌 동서양 고전들이 걸어온 길과 역사적 배경을 밝힌 책이다. 한 권의 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고전이 되었고 어떻게 생성, 변화했는지, 그 책들로 인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등을 조명한 책이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 원래 그런 것은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전도 생성, 변화를 겪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 가능하다. 즉 고전에도 역사가 있는 것이다. 책은 두 파트로 나뉜다. 1부 동양편, 2부 서양편이다.

 

당연히 개별 고전을 해설한 책이 아니기에 세부 제목들이 구체적이다. 가령 삶터의 벗으로서의 고전, 모난 책의 굴곡진 운명 박해 받은 책들의 운명, 인문적 시민사회와 고전(이상 동양편), 고전의 탄생, 나는 누구인가, 책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고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왜 고전인가?(이상 서양편) 등이다.

 

경전(經典)의 경()이란 단어는 원래 날줄을 의미했다. 베를 짤 때 기준이 되는 세로로 설치된 줄을 의미했던 것이다. 경은 이 밖에 경로를 의미하기도 한다. 지침이 되는 길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1부 필자인 김월회 교수는 경이란 글자가 처음 생길 때부터 섬김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한다.(15 페이지) 이 사실만 보더라도 모든 것에는 역사(기원)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국 시대 사람들은 훗날 유교 경전이 되는 서적들만 경이라고 본 것이 아니라 다른 학파의 책들도 경이라고 불렀다. 김월회 교수는 경이란 글자가 새겨진 죽간이나 목간을 끈으로 엮은 물건 즉 서적 일반을 가리켰을 수 있다는 말을 한다.(16 페이지)

 

경전이 섬김의 대상이 되었을 때 내 삶이 육경(六經)의 주석(註釋)이라는 극단의 생각까지 등장했다. 이를 종경(宗經)이라 한다. 흥미롭게도 공자는 경전을 종주(宗主)로 받들어 섬겨야 할 대상으로 설정한 적이 없었고 유어예(遊於禮)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경전을 노닒의 대상으로 삼았다.(23 페이지)는 사실도 흥미롭다. 이 유희 정신은 이문회우(以文會友) 즉 고전에서 한가로이 노닐면서 삶의 벗이 되는 고전의 의미로 수렴되는 말이다.(25 페이지)

 

양명학자들은 경전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39 페이지) 그들에게 마음은 그저 갖은 감정과 욕망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천리(天理)가 깃들어 있는 것 즉 문자로 된 경전보다 더 순전한 경전이었다.(38 페이지)

 

고전 해석은 곧 권력이었다. ()을 건국한 고조 유방(劉邦)은 유맹(流氓) 즉 깡패 출신이었다. 그런 그는 입만 열면 시경’, ‘서경등을 운운하던 육가(陸賈)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자신에게 어찌 시경’, ‘서경을 받들라고 하냐며 힐난했다. 이에 육가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란 말을 했다.(54 페이지)

 

주자학(朱子學) 역시 사학(邪學) 또는 위학(僞學)으로 규정되기도 했다. 주희가 새로운 경전 체계를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성리학은 원나라 시기에 이르러 제국 최고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65 페이지)

 

조선과 중국의 차이도 눈여겨 볼 만하다. 조선의 지배 계층은 양명학이란 유가의 새로운 해석을 사농공상의 신분체계에 균열을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삿된 학문으로 몰고 갔지만 중국은 이념 차원에서는 열려 있는 태도를 취했다. 이는 그 넓은 지역을 오랜 세월 아우르며 제국의 역사를 만드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76 페이지)

 

고전은 이런 중국의 역사를 창출해낸 배후였다. 상극을 융합하고 모순을 품으며 이단을 껴안는 일은 매번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수행되었다.(77 페이지)

 

김월회 교수는 묵자맹자의 굴곡진 운명을 예로 들며 한 번 고전은 영원한 고전이란 등식은 없고 탄생시부터 고전인 텍스트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작정하고 훌륭한 책을 써도 그것이 반드시 고전이 된다는 보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한다.(89 페이지)

 

고전은 철저하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제반 권력 관계와 이해관계 등에 의해 선택, 결정된다. ‘맹자처럼 군주로부터 미운털이 박혀 배척되다가도 중화(中華) 수호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떠받들여지는 것은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종종 마주 할 수 있는 익숙한 풍경이었다.(89 페이지)

 

사서(四書)가 오경(五經)을 제치고 유가 경전의 지존이 된 것은 원대에 들어 성리학이 최고 통치 이념으로 채택된 이후의 일이었다.(90 페이지) 김월회 교수는 역사를 오래된 미래라 부르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역사서와 만나는 방식에 미래가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라고.(100 페이지) 역사를 접하는 이유는 과거를 미래에 고스란히 재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기획하기 위함이다.

왕양명은 그의 문인들이 대체 극 언제 시간을 내어 공부하는지 궁금해 하자 일을 하면서 공부했다<사상마련: 事上磨練>고 답했다.

 

물론 왕양명이 경전 등의 독서를 마냥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그에게 경전 공부는 마음공부의 일환이었다. 그는 경전은 내 마음의 주석(註釋)”이란 말을 했다. 주희(朱熹)는 경전과 치열하게 만나 경전의 주석을 썼고 왕양명은 그를 통해 자신의 삶을 썼다.(125 페이지)

 

김월회 교수는 결론으로 인문은 옵션이 아닌 삶의 기본값이라는 말을 한다. 안재원 교수는 2부 서양편에서 고전 즉 classic이란 말이 처음엔 군사 용어였다는 말을 한다. 해군의 선단(船團)을 조직할 때 배의 규모와 역할에 따라 배들을 배치하는 데 사용하던 개념이었다.(141 페이지) 책의 등급을 매길 때 클래식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키케로의 아카데미카란 책에서이다.

 

물론 이 말은 책의 등급이 아닌 학자들의 등급을 매기던 개념이었다. 책의 등급을 매기던 개념은 Ordo즉 위계란 말이다. 물론 이 말도 원래는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던 말이었다.(143 페이지)

 

안재원 교수는 인문학은 원래 슬픈 학문이라는 말을 한다. 태생적으로 그런 것이다.(150 페이지) 안재원 교수에 의하면 인문학은 신학의 시종(侍從) 노릇을 하며 연명했다.

 

르네상스 시기에 잠깐 빛을 발했지만 곧바로 과학 지상주의, 실용 전제주의가 엄습했고 근세 이후 대학 주도권과 지배권을 행사한 학문 영역은 돈이 많이 흘러들어 오는 실용 학문들이었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위상은 드러난다.(150 페이지)

 

책에도 운명이 있다.”는 말은 로마의 문법학자 테렌티아누스의 말이다. 독자의 이해 능력에 따라 책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의미의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언제부터인지 독자의 이해 능력에 따라라는 말이 생략된 채 책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말이 되었다.(186 페이지)

 

서양 역사에서 기구함만을 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만큼 파란만장한 책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 가운데 논리학과 변증술이 큰 사랑을 받았다.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았던 니케아공의회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였다. 칼이나 방패가 아닌 말(logos)이라는 병장기(兵仗器)가 필요해서였다.(189 페이지)

 

이단 전쟁 종료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은 인기를 잃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의 기초 방법으로 말의 도구적 특성을 정리, 편찬한 오르가논은 정신의 새로운 대륙을 여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물론 분석론이 아닌 도구론이 그랬다. 추상 세계를 실제 세계로 세우고 입증하는 작업도 결국 말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190 페이지)

 

안재원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조선에도 들어왔다고 말한다.(195 페이지) 원자(atom)란 말은 무에서 유가 나오는 아포리아를 피하기 위해 도출된 개념이다. 원자란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말인데 만일 계속 쪼갤 수 있다면 무()가 도출될 것이고 그러면 무에서 유가 나오는 문제를 해명할 수 없게 된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다는 말은 한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것 즉 개인이란 개념을 낳는 데 한 몫 했다. 이는 가장 비정치적인 것(과학)이 가장 정치적인 것(사회학적 상상력)이 된 대표적 예이다.(209, 210 페이지)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한 해는 1439년이다. 덕분에 책들이 대량생산되었고 지식의 대중화가 가능해졌다.(211 페이지) 이는 서양의 새로운 정신과 삶의 방식 즉 민주주의, 산업화와 시장경제, 개인의 발견, 시민 사회 등장의 배경이 되었다.

 

구텐베르크가 인쇄 사업에서 실패한 것은 출판본에 있는 오류들 때문이었다. 필사본의 경우 한 번 실수에서 하나의 오류만 생기지만 책의 경우 한 번 실수는 찍는 부수 만큼의 실수가 생기기 때문이다.(219 페이지)

 

원래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등은 아이들 교육용이 아니었다. 성인용이었다. 플라톤은 듣지 말아야 할 이야기의 대표 사례로 일리아스의 제우스 묘사를 들었다. “헤라를 보자마자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침실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그 자리에서 헤라와 땅바닥에서 뒹굴며 성교를 나누고 싶은 욕정에 사로 잡혔다는 표현은.. 적합한 묘사는 아닐 것이네.”(‘국가3권 중에서)

 

플루타르코스는 책 읽기에도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저자는 이제 플루타르코스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책보다 더 매력적인 것들이 판을 치기 때문이다.(232 페이지)

 

안재원 교수는 짧은 인생을 실속 있게 살도록 돕는 것이 고전이라는 말을 한다.(243 페이지) 안재원 교수는 고전은 삶에 중요한 질문들을 제공한다고 덧붙인다. 안재원 교수는 한국 사회가 성숙 사회로 가려면 교육 제도가 새롭게 모색되어야 한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그것이 당장 이뤄지기 어렵다면 실현 가능한 방편으로 고전 읽기를 제안한다.(249 페이지)

 

여기서 말하는 고전이란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등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생각할 거리가 많고 기억해야 할 점들도 많은 책이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이다. 철학보다 철학사, 과학보다 과학사(科學史)이듯 고전(古典)보다 고전사(古典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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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이름을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박은영 교수의 '풍경으로 본 동아시아 정원의 미'를 펼쳐 들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선비가 관직에서 물러나 칩거하면 은둔이고 세속을 멀리해 별서(別墅)를 짓고 살면 복거(卜居)라 한다."(203 페이지)

 

이 글은 "그들(유가; 儒家)은 항상 출처(出處)를 반복한다. ()이란 상황이 좋아서 공적 생활로 나아가 활동하는 경우이고 처()란 상황이 나빠 자연으로 돌아와 은둔하는 생활이다."('의 아포리아를 넘어서' 262 페이지)란 글을 연상하게 하지만 내 관심은 복()의 의미에 더 쏠린다.

 

복거는 살만한 곳을 가려서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점 복자일까? 점을 쳐서 살 곳을 정한다는 것일까? 점거(占據), 점령(占領) 등의 점은 점(fortunetelling)과 관계가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프랑스와즈 돌토는 '정신분석학의 위협 앞에 선 기독교 신앙'이란 책에서 언제나 똑같은 반죽을 가지고 이것도 만들고 저것도 만드는 것에 비유되는 것 즉 똑같은 것만 생각하고 잘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믿지 못하는 태도를 신앙의 부족으로 정의했다.(다산글방 출간 책 39 페이지)

 

돌토가 강조하는 것은 불확실한 것을 믿는 것이다. 점 역시 불확실한 것을 수용하는 믿음과 관계 있다. 이것이 내가 신앙을 폄하(貶下; 깎아내림)하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드러내려는 점의 진면모(眞面貌; 본디부터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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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말 - 불통의 시대, 나의 말과 몸짓이 너에게 건너가기 위해 이종건의 생활+세계 짓기 시리즈 4
이종건 지음 / 궁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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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건은 특이한 위상을 점하는 저술가이다. 이는 건축평단이란 건축 비평지를 창간, 주간 및 편집인 역할을 하고 있고 건축 비평서와 건축 관련 소설을 쓴 이력에 기인하는 진술이다.

 

생활 + 세계 짓기 시리즈로 시적 공간살아 있는 시간등을 상재(上梓)한 바 있는 저자가 이번에 내놓은 책은 영혼의 말이다.(2018712일 출간) 저자는 비판적 이성에 정초(定礎)해야 마땅한 학인(學人)들마저 합리적 대화를 하지 못하는 현실을 우려한다.

 

부제(部題)불통의 시대, 나의 말과 몸짓이 너에게 건너가기 위해인 이 책은 저자의 다방면의 읽기가 추동한 결과물이다. 특히 영화, 소설 등이 눈에 띈다. ‘사울의 아들’, ‘언노운 걸’, 데이비드 린치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등의 영화와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 학교’,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등의 소설이 그것이다.

 

이 책은 예술을 통해 세상의 조화, 바람직한 변천(變遷)을 모색, 궁구(窮究)하는 책이다. 저자에게 예술은 마음을 일렁거리게 해 의미를 붙잡게 하는 것이다.(15 페이지) 저자는 예술을 포함한 소위 문화라 불리는 것(개인의) 어두운 내면을 밝은 사회적 공간에 끄집어 내어 표현하는 것이라 설명한다.(50, 51 페이지)

 

저자는 이 행위(어두운 내면을 밝은 사회적 공간에 끄집어 내어 표현하는 것)를 승화라 표현한다.(51 페이지) 거기에는 친구와 말이나 글로써 주고 받는 행위도 포함된다. 이 부분에서 생각할 사람이 카프카이다.

 

카프카는 펠리스 바우어란 여성과 오랜 세월 편지를 주고 받았다. 카프카는 편지를 통해 문학은 자신에게 삶의 전부라는 점을 거듭 부각시켰다. 하지만 바우어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카프카는 바우어에게 오전에 편지를 쓰고 오후에 또 편지를 쓰기까지 했다.

 

두 사람은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가 결국 파혼을 하고 만다. 물론 글쓰기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카프카도 파혼으로 끝난 관계에 충격을 받았다. 카프카는 가정보다 문학 및 글쓰기를 우선시한 데다가 신체적 나약과 우울 및 불안 등으로 결혼 생활을 원만히 이끌어갈 자신을 갖지 못했다.

 

저자는 오직 진리만 추구해야 할 과학과 인문학마저 경제적 유용성을 추구하는 데 혈안이 된 현실을 우려한다.(20 페이지) 인상적인 문제의식은 상처를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이란 글을 통해 드러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주인공 크라우스는 아주 미미한 존재, 하찮은 존재, 아무 것도 아닌 영()의 존재,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고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 세상과 사람에 대해 어떤 욕심도 품지 않는 존재다.

 

귀족 태생의 소년이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찾아간다는 반() 영웅적 이야기인 벤야멘타 하인학교는 성장과 발전으로 대변되는 서양 근대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반면 사울의 아들이란 영화의 사울은 크라우스와 대극(對極)을 이루는 존재이다. “그는 모든 위험을 기꺼이 끌어안은 채 자신이 살고자 하는 삶을 위해 사력을 다한다. 아우슈비츠에 감금된 유대인 사울은 지옥의 상황에서도 오직 죽은 아들의 존엄한 장례를 치르는 데 혼신을 바친다.”(29 페이지)

 

사울의 원형은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이다. ‘언노운 걸의 의사 제나도 어떤 불확실성과 위험도 무릅쓰고 자신이 마땅하다 여기는 윤리적 책임을 끝까지 떠맡는다.(31 페이지)

 

사울도 제나도 책임(responsibility)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책임의 영어 responsibility는 응답할 수 있음(ability to respond)을 의미한다. 저자는 죽은 자는 말할 것도 없고 살아 있는 자마저 응답하고 약속할 대상이 아닌 생산과 이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불편한 진실을 우려한다.(32 페이지)

 

크라우스와 사울/ 제나가 대비되듯 영어 단어가 이런 대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나는 이성적 믿음을 의미하는 belief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적 믿음 또는 가() 믿음인 alief이다. 소크라테스의 향연(饗宴)’에 의하면 욕망과 사랑이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인간이 현재 소유하고 있지 않으면서 결핍하고 있는 사물들이나 특질들이다.(46 페이지)

 

향연의 진술은 우리는 무의식 속에 간직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환상을 사랑하며 행복과 불행 모두를 주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애도한다는 정신분석가 장 다비드 나지오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사랑은 왜 아플까참고)

 

인간은 비현실적인 것에 이끌린다. 상상이든 환상이든 거기서 얻는 느낌이 즐거울 뿐 아니라 느낌 자체가 생생하고 현실적이기 때문이다.(48 페이지) 저자는 쾌락원칙이 현실원칙에 의해 철저히 거부되기에 사람들이 비현실적인 것에 끌린다고 본다.

 

저자는 남자는 헤밍웨이의 질문인 소유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마주치고 여자는 셰익스피어의 질문인 존재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마주친다고 말한다.(69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남자는 파트너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는 것을 불안해 하고 여자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을 불안해 한다.

 

사랑과 섹스는 서로 얽혀 있어 구분하기 어렵다. 저자는 진정한 친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관계가 진정한 친구 관계인가, 란 물음에 대한 답이다. 저자에 의하면 친구야말로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있어서 가장 필용한 존재이다. 홀로 사는 일은 외로운데 우정은 사랑처럼 불안정(volatile)하지 않고 연인 관계보다 훨씬 자유롭다.(83 페이지)

 

관건은 친구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치명적이다.(87 페이지)

 

저자는 영혼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저자에 의하면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음은 사상이 아니라 사상들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긴장 속에서 그것들을 균형적으로 유지하고 있음을 의미하고 교양 곧 문명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94 페이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런 감동적인 말을 했다. “우리가 알아온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은 패배를 알고 고통을 알고 애씀을 알고 그럼으로써 그 깊이들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연민, 온화함, 깊은 사랑의 염려로 채우는, 삶에 대한 감사, 감수성, 이해를 품고 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102 페이지)

 

로베르트 무질은 영혼이란 구멍은 균형 잡힌 사상과 교양으로 잘 메울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자는 그렇기에 우리의 영혼을 잘 지으려면 자유와 평등, 사랑과 정의, 아름다움과 추함, 쾌락과 고통, 다원주의와 일원론, 진보와 보수 등 대립을 이루는 양극을 함께 품어야 한다고 설명한다.(105 페이지)

 

죽은 시인의 사회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가 아름다워 읽고 쓰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일원이기에 읽고 쓰는 것이다.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이다.‘

 

이 말을 전하며 저자는 홀로 있음의 고통(외로움)을 없애기 위해 다른 이와 함께 있는 것은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상태를 위한 치료약이지만 그것은 결코 건강하지 않은바 홀로 있든 함께 있든 자신의 영혼과 일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전한다.(107 페이지)

 

저자는 현실을 지배하는 힘에 감히 맞서는 말이, 깊은 성찰로부터 우러나오는 말이 우리의 영혼을 건드린다고 말한다. 저자는 어떤 삶도 언어를 넘치고 언어는 대개 적시(適時)를 놓친다고 말한다.(120 페이지)

 

친구와 말이나 글로써 주고 받는 행위도 승화로 본(51 페이지) 저자는 자신과 소리 없이 말을 주고받는 글쓰기의 놀라운 치유 능력을 언급한다.(120 페이지) 승화와 치유이지만 승화 자체가 바람직한 방어기제이다.

 

저자는 인생은 이야기인 바 이야기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닌 동물적 생존이라 말하는 저자는 이야기할 입이 없고 들을 귀가 없고 남길 이야기가 없고 이야기를 남길 세상이 없는 것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덧붙인다.(121 페이지)

 

여기서 허수경의 바다가란 시를 보자. “깊은 바다가 걸어왔네/ 나는 바다를 맞아 가득 잡으려 하네/ 손이 없네 손을 어디엔가 두고 왔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손이 없어 잡지 못하고 울려고 하네/ 눈이 없네/ 눈을 어디인가 두고 왔네//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에 두고 왔네/ 바다가 안기지 못하고 서성인다 돌아선다// 가지마라 가지 마라, 하고 싶다/ 혀가 없다 그 어디인가/ 아는 사람 집 그 집에 두고 왔다// 글썽이고 싶네 검게 반짝이고 싶었네/ 그러나 아는 사람 집에 다, ,/ 두고 왔네

 

손과 눈이 없는 것 다음에 마지막으로 혀가 없다는 구절이 나온다. 이 시가 실린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에는 몽골리안 텐트라는 시도 있다.

 

앞 부분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숨죽여 기다린다// 숨죽여, 이제 너에게마저/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척을 내지 않을 것이다..” 기척조차 내지 않을 것이란 구절이 아프게 읽힌다. 시집이 나온 시기에 시인이 처했던 상황이 짐작된다.

 

저자는 너의 가슴을 건드리고 너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나의 말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나의 모든 몸짓은 나의 가슴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나와 너 사이의 측량 불가능한 간극을 건너가지 못한다고 말한다.(131 페이지)

 

저자는 교양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133 페이지) 이것이 잘 이루어져야 영혼에 핵심적이 될 수 있다. 철학, 도덕, 예술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김춘수 시인의 을 음미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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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미모를 자랑하지 않으며 향기를 뽐내지도 않는다./ 다른 누가 어떤 평가를 하든 말든 아무 말이 없다./ 누가 자신의 생을 꺾더라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이다./ 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시는 이인주(Bernard Lee)님의 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이다. 순수한 마음이 잘 표현된 쉽고 간결한 시이다. 그러나 나는 이 시를 우주의 실상이 반영된 시가 아닌 지은이의 의도가 투사된 작품으로 읽는다.

 

시인은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 가라 하네란 시를 쓴 나옹 선사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았으리라. 그러나 꽃의 말 없음은 생각 없음이 아니고 아픔 없음이 아니리라.

 

꽃들은 벌,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갖은 술수 부리기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꽃들은 아름답다. 아니 그렇기에 아름답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옹이 선승(禪僧)이었듯 이인주 님이 성직자(카톨릭 신부)인 것이 눈에 띈다.

 

다음의 시를 보자.

 

명사십리 모래알이 많고 많아도/ 제 몸 태우면서 존재하는/ 저 별의 수보다 많으랴// 백 년 전 혹은 천 년 전에도/ 저절로 피어난 꽃이 있었겠나// 뜻 없이 죽어간 나비가 있었겠나// 너도 나도 그래,/ 살고 싶어서 태어난 것/ 살아 보려고 지금 앓고 있는 중이지.”

 

이승하 시인의 생명은 때로 아플 때가 있다이다. 저절로 피어난 꽃이 없듯 뜻 없이 죽어간 나비 역시 없었다는 데에 시인의 의도가 있다. 그래서 생명은 아프다.

 

이인주 신부의 꽃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의 마음으로 살다가 이승하 시인의 생명은 때로 아플 때가 있다를 읽으며 누구나 아플 때가 있음을 되새기자. 그래서 위로를 얻자. 그러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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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덫‘이란 소설을 쓴 이종건은 조지아 공대 건축 대학에서 역사/ 이론/ 비평 전공으로 박사가 된 사람이다.

몆 귄의 건축비평서를 쓴 그의 최신작인 ‘영혼의 말‘은 존재함에 따라 타인에게 줄 수 밖에 없는 상처에 대한 두 가지 시각을 다룬 책이다.

하나는 최소로 존재함으로써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기꺼이 상처를 껴안음으로써 최대로 존재하는 길이다.

전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지도 않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다.

로버트 발저의 ‘벤야멘타 하인 학교‘의 주인공 크라우스는 이런 인물의 전형이다.

이종건에 의하면 크라우스는 진정한 신의 작품이며 무(無)이며 하인이다.

그런데 신의 작품이나 무는 그렇다 해도 그는 왜 하필 하인인가?

크라우스는 사람과 세상에 대해 어떤 욕심도 품지 않는 존재다.

이 부분에서 나는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란 말을 생각한다.

그리고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Das Glasperlenspiel)‘의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를 생각한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란 질량이 미미한 소립자인 중성미자(neutrino)를 이르는 말이다.

요제프 크네히트에서 크네히트란 하인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크라우스는 어떤 욕심도 품지 않기에 무엇도 그를 공략할 수 없는 바위 같은 존재다.

그러니 무, 하인이란 말은 역설적이기만 한 표현이다.

어제 나는 조용미 시인의 ‘물의 점령‘이란 시를 인용하며 이 시를 욕망의 넘침과 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시인의 의지가 반영된 시로 읽었다.

˝이 생을 조금만 더 사랑하기 위해˝란 표현 때문이다.

이제 내 읽기는 어디로 가게 될까? 이종건의 ‘영혼의 말‘을 다 읽고 그의 다른 작품인 ‘건축 없는 국가(건축비평서)‘와 ‘건축의 덫(소설)‘을 읽게 될 것이다.

행복한 시간들이 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해(읽어)야 할 것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한 고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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