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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불편한 책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다. 내용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 이야기다. 최근 읽은 두 권의 역사책이 모두 중요한 부분을 흰 바탕에 검은 글씨가 아닌 푸른색이나 짙은 녹색 바탕에 흰 글씨로 처리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읽기에 불편하기 때문이다.

 

정작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읽기 불편하니 아쉽다. 그런가 하면 어떤 책은 판형은 작은데 무리하게 볼륨감을 키우려고 뻣뻣한 종이를 써 손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미끄러워서 잡기 불편한 책도 있다.

 

책읽기도 노동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눈, 손, 머리 등등에 무리가 가는 노동. 논란의 여지도 있는 이야기도 하고 싶다. 요즘 벽돌책이 많이 나온다. 필요해서 두꺼운 책이 있는가 하면 핵심을 선별하지 못하는 요령부득의 장황함 때문에 책이 두꺼워지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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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보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시사적인 내용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아침이다.

 

정조 7년(1783년)의 기록을 통해 정조가 승지에게 무모릉(無模稜)이라는 말을 꺼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경영의 책임 당사자들이 자신의 안녕만 염두에 두고 모나지 않게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을 지칭해 한 표현이다. 정조는 서로 공손히 하며 정사(政事)를 위해 바람직하게 협력 한다는 의미의 동인협공(同寅協恭)이란 말도 했다.

 

이어 잘 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졸렬한 결과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욕교반졸(欲巧反拙)이란 말도 했다. 종합하면 무모릉을 지양하고 동인협공을 지향하되 욕교반졸의 잘못을 하지 않도록 과감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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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 용어 호니토(hornito)란 용암이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떨어져 굳은 바위덩어리를 지칭하는 단어로 수형암맥(樹形巖脈)이라고도 하고 용암기종(溶巖氣腫)이라고도 하고 애기 업은 돌(부아석; 負兒石)이라고도 한다. 제주 비양도에서 볼 수 있다. 피자를 굽는 스페인의 작은 화덕을 닮아 호니토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를 업은 엄마의 뒷모습을 떠올리게 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문경수의 '제주 과학 탐험' 72 페이지)

 

이 분은 물에 반쯤 잠긴 호니토를 보니 해녀 엄마가 물 밖으로 나와 우는 아기를 업은 것 같았다고 하며 "비양도 역시 해녀의 섬이라 그 모습을 닮은 것일까"라는 말로 자신의 감성을 설명했다. 이 설명을 접하기 전에 나는 생강을 떠올렸다. 요즘 내가 생강의 효과를 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뿌리 채소 가운데 울퉁불퉁하기로 치면 생강을 뛰어넘는 것이 있을까? 뿌리 채소라고 다 그렇지는 않은 것은 당근은 울퉁불퉁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니토를 가장 잘 설명한 것은 용암 내의 가스 분출에 의해 화산쇄설물이 화도 주변에 급경사로 쌓인 소규모 화산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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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주변 고구려성을 찾아서
진종구 지음 / 어문학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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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북한 함경남도 덕원군 풍상면 두류산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삼국시대에 고구려가 이 강을 장악하는 것은 한강 진출의 교두보(橋頭堡) 및 북진세력을 저지할 수 있는 요새를 확보하는 것을 의미했다. 반면에 백제나 신라는 한강 유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임진강 유역을 차지해야 했다. 고려가 통일을 이룩한 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둘러싼 충돌이 없었기에 임진강은 군사안보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았으나 교통로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저자는 송도의 해상 세력들이 철원의 궁예의 태봉국에 합류할 때 배를 이용하여 예성강을 출발해 서해로 나왔다가 다시 한강 하구를 통해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갔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12, 13 페이지)

 

저자는 피난 길에 오른 조선 선조가 임진강을 건너 의주까지 갔다가 환도(還都)하기 위해 다시 임진강에 도달했기에 신지강(神智江)으로 불렸던 강이 다시 나루터에 돌아왔다는 의미에서 임진강(臨津江)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말한다.(15, 16 페이지) 임진강 북안(北岸)의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은 고구려의 배후 거점성으로 중요도가 높았다.

 

고구려의 남쪽 최전방인 한강 북안 아차산 주변에는 전초기지 보루들이 축성되어 한강 남안의 백제를 감시하거나 공격하는데 사용되었다. 물론 아차산성도 백제의 성이었으나 고구려가 빼앗아 사용하였다. 고구려는 단기간 넓은 영토를 점령했지만 주민들을 남쪽 변방까지 이주시키지 못해 노동력을 대거 확보할 수 없어 천혜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둘레가 기껏 300 ? 400미터 남짓한 성을 쌓을 수밖에 없었다.(34 페이지)

 

한탄강은 임진강의 지류(支流)이고 임진강은 한강의 지류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중앙의 돌출지점에 위치한 오두산성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이곳만 장악한다면 서해에서 배를 이용하여 한강이나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세력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두산성을 고구려가 백제에게서 빼앗은 관미성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41 페이지)

 

오두산성은 원천적으로 백제가 축성한 주력 거점성이었으나 후에 고구려와 신라가 번갈아가면서 차지하였다. 그러한 특성 때문에 삼국시대의 성을 어느 특정 국가의 성으로 단정하기 어렵다. 그래도 오두산성은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침범할 당시 유용하게 사용되었기에 고구려성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43 페이지)

 

덕진산성 앞에는 초평도라는 섬이 있다. 동쪽 임진강 상류 쪽에는 임진나루가 있으며 서쪽 하류 쪽에는 수내나루를 두고 있어 서울 방면에서 임진강을 건너 개성 방면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는 형국을 이루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주요 거점성이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임진강 주변을 둘러싼 영토분쟁이 없었던 까닭에 방치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왜군이 쉽게 임진강을 건너 북진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광해군이 보수, 개축하도록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국군 주력부대의 남하 루트였다. 호로고루에서 임진강 동남쪽의 돌출된 곳에 위치한 백제의 육계토성(六溪土城)까지의 직선 거리는 4km 정도였다. 호로고루는 대략 4세기 말경 토루(土壘)나 목책(木柵) 같은 초보적 형태의 방어시설로 구축되었다가 국경이 남쪽으로 확장되어 임진강 일대에 대한 본격적인 지배가 이뤄지게 된 5세기경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되었을 것이다.

 

고구려가 호로고루를 지배한 것은 4세기 말부터 나라가 망한 7세기 후반까지 250년 정도다.(60 페이지) 호로고루는 임진강 하류 가운데 배를 타지 않고 도하할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다. 임진강 북안에 설치된 고구려의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은 현무암 수직단애에 구축한 천혜의 요새다.(64, 65 페이지)

 

남안(南岸)의 호로고루라 불린 이잔미성은 호로고루와 대적하기 위해 구축한, 육계토성과 더불어 백제의 성으로 추정된다. 칠중성은 호로고루와 육계토성을 잇는 평야지대와 임진강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는 감악산 서북쪽 줄기인 해발 149미터의 중성산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군은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등 임진강 북안의 성들을 거점으로 임진강을 건너 이잔미성과 육계토성을 거쳐 칠중성을 공격했을 것으로 보인다.(79 페이지) 당포성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위치한 강안평지성이다. 당포성 뒤편 마전리 지역은 개성으로 가는 요로(要路)였다.(83 페이지) 당포성은 당개나루를 통제하는 교통 요지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중요성이 높았으나 삼국통일 이후 국경선이 북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잊혀졌던 성이다.

 

저자는 왕이 머무는 곳을 상(上)/ 북(北) 평양(平壤)이라 했고 왕이 순회하여 머물 수 있는 두 번째 도읍 정도를 하(下)/ 남(南) 평양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89 페이지) 지금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주장은 고구려의 통치영역을 한반도로 축소하는 잘못된 논리라는 것이다.(91, 92 페이지)

 

한탄강은 논과 밭이 펼쳐진 평원지대에 갑자기 밑으로 푹 꺼져 생긴 수직절벽의 아래를 흐르는 강이다.(107 페이지) 직탕폭포는 원래 직탄(直灘)폭포였으나 발음 편의상 직탕폭포로 불리고 있다.(117 페이지) 연천군의 재인폭포는 주상절리 폭포로 원래는 한탄강에 바짝 붙어 있었으나 두부침식(頭部浸蝕)으로 수십만년 동안 약 400여 미터 떨어졌다.

 

일반적으로 용암 분출시 온도는 1,000-1,200도씨이며 온도가 600-700도씨에서는 용암이 굳어 더 이상 흘러가지 못한다. 산성 용암일수록 온도가 낮고 점성이 높아 멀리 가지 못한다. 알칼리성일수록 온도가 높고 점성이 적어 멀리 흘러간다.(121 페이지) 좌상바위는 응회암이다.(응회암은 연한 녹색이라 한다.)

 

한탄강과 장진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생긴 주상절리 절벽에 은대리성이 자리한다.(144 페이지) 대전리산성은 당나라 군사와 신라군이 대격전을 치른 매초성으로 알려진 곳이다. 한탄강과 신천이 합류하는 지점의 강안절벽에 구축된 성이다.

 

반월산성은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산 5-1 청성산 일대 7-9부 능선에 반달 모양의 타원으로 축조된 테뫼식(’산정식; 山頂式‘) 산성이다.(157 페이지) 일반적으로 고구려성들은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에 이르는 지역에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구려군은 임진강 및 한탄강 북안에 위치한 거점성을 출발하여 주요 하천을 타고 천보산맥 일대의 중간기지 보루에 도착, 다시 중랑천을 타고 한강 북쪽 전초기지 보루에 이르렀다.(18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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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사서 쌓아두고만 있는 책이 많은데 읽을 것이 없다는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가 명리학과 주역을 공부해 관련 논문을 쓴 정신과 의사 양창순 님의 '명리심리학'을 골랐다. 지리멸렬한 내 독서 상황을 반영하는 선택일 수도 있다.

 

물론 작년 가을 책을 샀을 때는 분명 생각이 있었다. 단지 무료해서 책을 산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저자는 명리학과 주역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고 썼다. 맞다. 흐지부지 상태인 내 주역 공부에 활로를 만들어내려는 뜻에서 책을 산 것이었다.

 

책 내용 중 이런 구절이 있어 옮긴다. 우울해서 병원을 찾아와 놓고 우울증 진단이 내려지면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힘들어 하는 내담자들이 있다는 내용이다. 단순하지 않은 마음과 세상사를 반영하는 것이리라. 오늘 2021년의 첫 서평 책으로 선택해 게시한 '글쓰기의 모험'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다.

 

"모든 글에는 그 글의 외부가 있으며 쓰기 역시 행위 그 이상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글 바깥의 요소 즉 글 쓰는 이를 둘러싼 삶과 사회적 맥락을 포괄한다. 글쓰기가 단지 글 내부만을 향할 때 더 이상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 어렵고 글은 블랙홀처럼 죽음을 향한다."(148, 149 페이지)

 

요즘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이진경 교수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을 마저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새해의 두번 째 날로 벌써 빠른 시간에 압도되는 느낌이 든다. 곧 본격 스타트를 할 생각이다. 요즘 내가 잘 하는 것은 오래 오래 밥을 씹어 먹는 것이니 이런 호조(好調)도 분명 본격 스타트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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