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연천에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 선생의 글씨가 있다. 해주 오씨 한양 종중 세장지(世葬之地; 대대로 묘를 쓰는 땅) 표석비(연천군 향토 문화재 27호)다.(왕징면 북삼리 소재)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던 선생은 전형필(全鎣弼) 선생에게 문화재에 대해 눈뜨게 한 분이고 간송(澗松)이란 호를 내려준 분이다.

 

위창 선생이 전형필 선생에게 간송이란 호를 지어준 데에 작용한 구절은 논어 자한(子罕) 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란 구절이다.(간송에게 영향을 미친 분들은 위창 선생 말고도 간송의 외종 형 월탄 박종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 불리는, 간송의 휘문고보 시절 스승인 ’춘곡 고희동‘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위창 선생은 심우장과도 인연이 있다. 만해 스님의 제자 김관호가 쓴 ’심우장 견문기‘에 따르면 원래 심우장에는 위창 선생이 쓴 심우장 편액이 있었는데 언젠가 없어졌고 그 후 일창(一滄) 유치웅(兪致雄) 선생이 글씨를 써 편액으로 걸게 되었다. 일부 책에 심우장 편액 글씨가 위창 선생이 쓴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 심우장 글씨 왼쪽 위에 일창(一滄)이란 호가 있다. 문제는 위창의 창과 일창의 창이 같은 글자(큰 바다 창, 차가울 창; 滄)여서 그런지 창이란 글자만 보고 위창의 작품으로 소개한다는 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총(聰)은 시비(是非)를 가리는 것이고, 명(明)은 사정(邪正)을 살피는 것이고, 강(剛)은 미혹(迷惑)되지 않는 것이고, 단(斷)은 확실(確實)해서 거침 없는 것이라는 말은 조광조가 소격서 혁파를 건의하며 중종에게 한 말이다. 무엇보다 조광조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총명강단(聰明剛斷)이란 말이다. 옳은 것을 추구해 삿된 것을 미워했으며 강직했고 결단력 있었다는 뜻이다.

 

조광조의 개혁과 정도전의 개혁에 공명하는 부분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옳은 이야기다. 정도전의 성격 역시 총명강단했다. 필요한 것은 총명함을 지향해 강직하고 결단력 있게 나아가는 것이리라. 죽임 당했지만 큰 울림을 주는 두 사람을 보며 하는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언제 시인이 된 거지? 구글링을 하다가 내가 시인으로 소개된 블로그를 보았다. 정확하게는 박태웅 시인으로 소개된 것이다. 박태웅이라고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더 찾아보았다. "내가 사는 연천군의..”라는 글이 보이고 2007년 울주군 서생면 신암리에서 일한 사실, 스위스의 포겔 박사에게 부탁해 자연 약재를 구입한 사실, 개포동의 이필영 박사를 찾아간 사실, 위장 때문에 쑥뜸을 떴다는 사실 등 내 이야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어떻든 ‘초대 시인’이라는 카테고리에 내 블로그 글을 스크랩해 놓은 블로거는 내 글만 보고 나를 시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형식으로 보아 수필이 분명한데 어찌 시인의 글이라 생각한 것일까? 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화담(花潭)이기도 하고 복재(復齋)이기도 했던 서경덕(徐敬德; 1489-1546), 그의 제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1517-1578), 그의 제자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 이 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책이 최시한, 강미 공저의 ‘조강의 노래’다.

 

"16세기 후반 조선 선조 때였다.“ 한양 삼개(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통진 현감으로 있는 조헌(趙憲; 임진전쟁의 의병장)을 보러 가는 길에 <조강에서 폭풍을 만나 겪은 일을 쓴 이규보의 ‘조강부(祖江賦)’>를 떠올리는가 하면 스승 서경덕을 뵙고 오던 때를 회상하기도 한 토정은 물의 흐름과 달의 위치를 보아 바닷물이 밀려오고 나가는 시간을 대강 짐작하면서 임진강 쪽 물살이 내리쏟는 힘을 이용하여 포구가 많은 남쪽으로 배를 몰도록 도와 사람들을 풍랑에서 구한다.(서경덕은 인종 재위시 죽었으니 이지함이 스승을 만나고 온 것을 회상한 때에 서경덕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조헌은 스승 이지함이 이규보가 썼다는 물때를 일러주는 시를 백성들에게 자세히 설명하자 스승이 천문(天文)을 읽으며 지리(地理)를 궁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지함이 삼개에서 스승을 기억하던 때 스승은 이미 고인이 되었듯 조헌이 의병장으로 참전해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사망한 임진전쟁 당시 스승 이지함 역시 고인이 된 상태였다.) 지난 해 통일인문학 시간에 인상적으로 접한 조강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조강의 노래’에서 재미 있게 읽었다.

 

”서울 서쪽에 북한 지역을 전망하는 곳이 세 군데 있다. 김포시 하성면 조강리와 가금리 경계의 애기봉 전망대, 파주시의 오두산 통일전망대,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의 평화전망대가 그들인데 모두 조강 연안에 있다.“

 

지난 해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전망은 참 인상적이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장면은 연천 호로고루에서 바라보는 얕은 임진강의 풍경 이상으로 매력적이고 가슴 뭉클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단지 강의 깊이가 더 깊어서만은 아니다. 사람이 만나고 물자가 만나고 이야기가 만난다는 상징성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조광조(趙光祖)평전’(이종수 지음)을 통해 ‘소학(小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소학‘은 주희가 편집한 책이고 김굉필의 스승인 김종직이 중요성을 강조한 책이다.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이 ’소학‘을 좋아해 소학 동자를 자처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주희의 ‘근사록(近思錄)’으로 학문의 중심을 잡고 ‘소학(小學)’을 널리 장려하라고 아뢰었다. 역대 임금들 중 성종이 ’소학‘을 즐겨 읽었다. 성종은 승정원에서 경연(經筵)에서 읽을 책으로 ’대학연의‘를 추천했지만 이를 듣지 않고 굳이 소학을 고집했다. 그것은 ’대학연의‘에 따르자면 부부 불화는 수신 및 제가에 실패한 성종 자신 탓이 되고 ’소학‘에 따르면 중궁 탓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윤희진 지음 ’제왕의 책‘ 참고)

 

윤희진은 이 내용을 전하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흥미로운 해석이지만 성종에게 소학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즉 성종이 ’소학‘을 택한 것은 김종직으로 대표되는 사림파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