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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東柱)', '사도(思悼)', '박열(朴烈)' 등을 연출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가 다음 달에 개봉된다네요. '동주'는 강의 때문에 보았지요. 반면 '사도'는 존재 자체를 몰랐지만 알았어도 너무 가슴 아파 안 보았을 것이 분명하고 '박열'은 알았다면 가네코 후미코와의 사랑 때문에라도 보았을 영화지요.

 

정약용(丁若鏞)이 자신보다 능력면에서 낫다고 평한 정약전(丁若銓)은 열정이나 집중력면에서 정약용에는 미치지 못한 듯 해요. 정약용은 형 정약전을 쉬엄 쉬엄 공부하는 유형이었다고 표현했네요.

 

그래도 정약전은 절해고도의 유배지 흑산도에서 좌절하지 않고 문헌을 참고하고 실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자산어보'라는 역작을 썼으니 대단합니다. 정약전이 성품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 궁금해요. 같은 유배지였으나 강진과 흑산도는 큰 차이가 났을 거예요.

 

한양에서 함께 출발해 나주에서 하룻 밤을 같이 보내고 각자의 유배지로 간 두 형제는 다시는 살아서 만나지 못했지요. 보겠다고 다짐해 놓고 본 영화가 하나도 없지만 '자산어보'는 꼭 보아야겠어요. 이 역시 다짐이지만 적어도 이번만은 다를 것 같은 기분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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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현(丁若鉉; 1751-1821), 정약전(丁若銓; 1758- 1816),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형제..이 가운데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쓴 손암(巽庵) 정약전. 정약전은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이라고 쓰고 있다. 자(玆)는 흑(黑)자와 같다...“ 는 말을 했다.

 

최근 자(玆)를 검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현으로 읽으니 현산어보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玆는 이(this) 자, 검을 현 외에 검을 자로도 쓰인다. 그러니 굳이 현산어보로 쓸 필요가 있을까? 싶다.

 

궁금한 것은 정약전이 왜 흑을 대신할 말로 검을 현(玄)이란 글자를 쓰지 않았을까?이다.

 

1) 현(玄)은 검다란 의미 외에 검붉다는 의미도 있기 때문일까? 2) 흑(黑)자가 좌우 대칭이니 좌우 대칭인 자(玆)자를 쓴 것일까? 3) 현(玄)은 첩어(疊語)가 아니어서 초라해 보여서였을까? 4) 주역의 손괘에서 유래했을 손암(巽庵)이란 호를 통해 알 수 있듯 중천건(重天乾), 중지곤(重地坤), 중풍손(重風巽) 등이 있는 바 무언가를 거듭(중; 重) 쓰는 것처럼 현(玄) 대신 거듭 쓰는 글자인 자(玆)로 쓴 것일까? 5) 다른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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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某) 도시설계 전문가의 책을 읽다가 1) 서울역이 도쿄역이 아닌 스위스의 루체른 역을 모방해 만든 역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루체른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설명에 등장하는 호수로 유명한 그 곳이다.

 

같은 책에서 2) 세(笹)라는 글자도 만나게 되었다. 이 글자는 조릿대 또는 가는 대나무를 이르는 말이다. 세(世)는 자주 만날 수 있는 글자이지만 세(笹)는 좀체 보기 어려운 글자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부청이었다가 그 이후 서울시청으로 사용된 뒤 서울도서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을 설계한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사사 게이이치(笹慶一)다.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는 옛 경성재판소, 서울대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던 경성제국대학 건물도 사사 게이이치가 설계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를 찾다가 최예선이란 분을 알게 되었고 그 분이 쓴 ‘오후 세 시, 그곳으로부터;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을 찾아 떠나는 예술 산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박경리의 정릉집’, ‘박수근의 창신동집’, ‘나혜석의 수송동 시절’, ‘일요일의 돈암동집; 박완서 소설 속 서울’ 등은 읽을 만하다 싶다.

 

같은 책에서 3) 광희문만이 아닌 소의문도 시구문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만하면 큰 성과다. 서울의 풍경과 오래된 집이란 단어를 보니 설레기까지 하다. 단 하나 책이 나온 지 7년이나 지난 지금 소개된 옛집들이 많이 변했거나 사라졌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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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소형(陸紹珩)이란 인물은 '취고당검소(醉古堂劍掃)'란 책을 쓴 '명(明)나라 말(만명; 晩明)의 지식인이다. 이름의 첫 글자인 소(紹)는 소개하다 외에 끈의 의미도 있고 두 번째 글자인 형(珩)은 노리개, 패옥, 갓끈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문 기사는 제목에서는 珩을 연이라 표기했고 본문에서는 형이라 했다. 생소한 글자이기 때문이었으리라. 珩을 연이라 한 것은 아마도 衍과 혼동한 탓이었으리라. 취고당이란 당호도 인상적이다.

 

검소(劍掃)는 칼로 없앤다는 뜻이겠는데 삿된 욕망이나 망상을 없애겠다는 의도의 산물인 듯 하다. 형(珩) 즉 패옥(佩玉)에서 패는 옆에 찬다는 의미다. 패검(佩劍)은 칼을 차는 것을 의미한다. 육소형이 실제로 칼을 찼는지 모르겠지만 조선의 칼을 찬 유학자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이 생각난다. 조식은 이런 시를 썼다. "40년 동안 더럽혀져온 몸/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버린다/ 만약 티끌이 오장에서 생긴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쳐 보내리라" 어떻든 검소(劍掃)라는 말은 흥미롭다. 덕분에 남명 조식까지 떠올리게 되었다.

 

"남명의 무인적(武人的) 기질과 법가적(法家的) 요소는 그 단처를 교정하고 보완하여 건전한 균형을 잡아줄 수 있었던 귀한 자산이었다."(한형조 지음 '조선유학의 거장들' 150 페이지) 문숭(文崇)의 나라에서 무인적이었던 조식은 곽재우를 비롯한 그의 제자들이 의병을 이끌고 왜적(倭敵)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더욱 빛났다. 20세의 나이로 조광조의 급진 개혁이 좌절된 답답한 시대를 살게 되었던 남명 조식에 대해 더 공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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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척사(彛阮尺辭)는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이 친구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에게 보낸 짧은 편지 13편을 필사한 책이다. 척사(尺辭)와 척독(尺牘)은 짧은 편지를 이르는 말이다. 조용미 시인의 ‘봄의 묵서’란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꽃과 나무와 마음을 변화시키는 봄볕에 하릴없이 연편누독(連篇累牘)만 더합니다...” 연편누독은 쓸데 없이 길게 늘여쓴 문장을 이른다. 늘 궁금한 것은 이재의 세한도와 완당의 세한도 가운데 어떤 작품이 먼저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추사의 세한도가 먼저 그려졌는지, 권돈인이 먼저 그렸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인저리 타임 수록 시인 조해운의 글)고 하는 기사도 있다. 안동 권씨 화천군파 사이트에 가니 이재 권돈인 할아버지의 세한도가 완당의 세한도에 영향을 주었다는 글이 있다. 물론 갈필(渴筆) 대 윤필(潤筆)의 차이, 소나무, 측백나무 대 소나무, 대나무의 차이, 유배 대 유배의 차이가 더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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