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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土宜)란 땅에서 나는 작물을 의미한다. 의(宜)가 마땅하다는 뜻이니 토의란 작물을 키워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땅의 순리란 뜻에서 도출된 단어이겠다. 사실 땅이라기보다 흙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흙에 대해 얼마나 알까? 화강암이 풍화되면 모래흙이 되고 현무암이 풍화되면 점토질 흙이 된다.(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흙' 31 페이지) 이 정도는 단순한가? 자연을 이야기할 때 하나만을 볼 수는 없다.

 

모쿠다니 구니야스는 지구에는 산과 구릉, 평야와 해저 등 다양한 지형이 있지만 달에는 그런 지형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며 지구와 달리 달에는 물질을 운반하는 바람과 공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 36 페이지)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강수량이 많을수록 땅위를 흐르는 빗물이 많아지고 따라서 침식이 더 많이 일어나지만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여 흙이 침식되는 걸 막아 준다고 말하며 이런 기본적인 균형은 강수량만으로 흙의 침식 속도가 결정되지 않음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흙' 34 페이지)

 

전자의 두 가지(물과 공기)와 후자의 두 요인(비가 하는 두 가지 일)은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협동 관계고 후자는 길항(拮抗) 관계다. 아니면 상반(相反) 관계든지. '세종실록지리지'는 흥미롭게도 토지의 비옥도를 평하며 비척상반(肥瘠相半)이란 표현을 썼다.

 

비옥함과 척박함이 반반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당시는 토양 구조나 점성(粘性), 토양 색 등보다 비옥도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으니 흥미롭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생긴 현실적인 기준이었다. 물론 상반이란 표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토양의 점성이나 색에 대해 상반(相半)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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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권의 정신의학과 박사 야오나이린(姚乃琳)이 쓴 ‘뇌는 당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를 읽고 있다. 姚는 예쁠 요란 글자다. 琳은 옥(玉)을 뜻하는 림이란 글자다. 요(姚)가 예쁠 요란 글자이기 때문에 요조숙녀란 글자의 요자로 알 수 있지만 요조숙녀는 窈窕淑女라 쓴다.(姚는 예쁠 요자이기도 하고 경솔할 조자이기도 하다. 요와 조니 요조라 해도 될까?) 요조숙녀라는 말은 군자호구(君子好逑)란 말과 같이 쓰인다. 요조숙녀는 군자에게 딱 맞는 짝이라는 의미다. 逑는 짝을 의미하는 글자다.

 

요조숙녀 군자호구란 ‘시경(詩經)’에 수록된 글로 주(周)나라 문왕과 그의 아내 사씨(氏)의 결혼을 찬양한 것이라고 한다. 시경의 명성은 높다. 시경이 출처인 문구 가운데 유명한 것이 징비록(懲毖錄), 쇄미록(瑣尾錄) 등이다. 瑣는 자질구레할 쇄자다. 부스러지다, 가루 등의 뜻도 있다. 이 글자와 유사한 의미들을 가진 글자가 설(屑)이란 글자다. 화산쇄설암의 설자다. 정신의학과 박사의 이름으로부터 화산쇄설암이란 말까지 온 이 글쓰기는 너무 요동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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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주상절리(柱狀節理)와 당포성(堂浦城)을 다녀왔다. 주상절리까지는 전곡에서 81번 버스를 타고 10여분 가서 입구에서 내려 10여분 걸어들어갔고 당포성까지는 40분간 걸어서 갔다. 당포성에서 숭의전까지 걸어가고 싶었으나 당포성 앞에서 14시 10분쯤 81번 버스를 다시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14시 50분쯤 숭의전에 도착해 백학에 갔다가 전곡으로 돌아오는 58번 버스를 탈 수 있었으나 피곤하기도 하고 버스 시간을 몰라서(집에 와서 검색하고 알았음) 그냥 81번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주상절리에서 당포성까지 걸어가는 중에 폐교된 학교(왕산초등학교 마전분교)와 유엔군 화장장 등을 지나쳤다. 임진강 주상절리는 내가 80(%) - 90(°) - 100(점)이란 숫자로 표현한 곳이다. 절리(節理)를 성리학과 연결지었던 나는 절리의 리가 대리암(大理巖)의 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등을 퀴즈로 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요즘은 제주도 말로 주상절리를 모가 난 수직절벽이란 의미에서 모시기정이라 부른다는 사실에 관심이 많이 간다. 벼랑과 절벽을 뜻하는 엉과 아래쪽을 의미하는 알이 결합되어 절벽 아래쪽의 산책로를 의미하는 엉알이란 말도 제주도 말이다.

 

임진강 주상절리는 미산면 동이리에서 보는 군남면 남계리 지역이다. 베개용암이 연천 전곡 신답리에서 보는 포천 창수면 지역이듯. 임진강 주상절리에는 두 가지 정도의 논란이 있다. 개경 팔경의 하나인 장단석벽으로 불렸다는 것, 옛 한탄강 지역을 흐르던 용암이 임진강 쪽으로 역류했다는 말 등이다. 나는 연천 지역이 개경 지역이 아니지만 임진강 주상절리를 장단석벽(이라고 한다면) 즉 개경 팔경의 하나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역류했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한다.(역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계속 지리 또는 지질 이야기를 하자면 석회암이 오랜 세월 용식(溶蝕) 작용을 받으면 생기는 붉은 흙이 테라 로사(terra rossa)다. 나는 테라 로사란 철자를 보고 내 전화 번호를 떠올린다. 내 전화 번호 앞 자리에는 55가, 뒷자리에는 11이란 수가 있다. 앞쪽에는 rr이, 뒷쪽에는 ss가 있는 terra rossa란 단어를 닮은 것이다. 견강부회인가? 유쾌했던 나들이를 생각하며 할 수 있는 유쾌한 말 정도라 생각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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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哲學)이란 용어를 만든 니시 아마네(にし あまね; 1829 - 1897)를 한자로 쓰면 서 주(西 周)가 된다. 이로부터 주(周)나라 생각을 하게 된다. 주나라는 서주(西周)와, 서주 이후의 춘추전국시대 즉 동주(東周) 시대로 구분된다. 공자가 이상시한 시대가 서주시대고 동주시대는 무도(無道)와 패권 다툼의 혼란기였다.

 

각설(却說)하고 니시 아마네는 주자학의 핵심 개념인 리(理)를 물리(物理)와 심리(心理)로 나눈 사람이다. 리(理) 개념의 추상화는 나의 오래된 관심사이거니와 지금 내가 리(理)를 논하는 것은 물리(物理)에 대한 관심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 차원의 다짐을 하기 위해서다. 내가 지질(地質)에 약한 것은 물리적 맥락 또는 이치에 둔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아인슈타인과 피카소가 만나 영화관에 가다’란 책의 한 챕터인 ‘심리학자이자 물리철학자’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실 본다는 것은 문화적 행위다. 왜냐하면 우리가 본 것 내지 분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본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개념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121 페이지)

 

핵심은 본 것 내지 분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로 배워야 한다는 점, 본 것을 표현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개념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 등이다. 이 부분에서 두 가지를 논할 수 있디. 하나는 “우리에게 인식만 있고 표현이 주는 즐거움이 없다면 영원히 우울할 것”이란 말(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에 나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폴 리쾨르의 데카르트 비판이다.

 

리쾨르는 데카르트가 했다는 직접적 자기인식은 자신을 느낀 것이지 인식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느낌도 앎의 일종이지만 적어도 ‘나’(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말에 나오는 나)는 직관적 앎의 대상이 아니다.”(양명수 지음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 읽기’ 95 페이지)

 

이렇게 나란 존재도 직관적 앎이 아닌 명백한 인식의 대상이거늘 물리나 지질 등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리쾨르의 말을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김영민 지음 ‘공부론’ 36 페이지)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의미의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이란 공언(孔言; 공자의 말)도 생각해볼 만하다. 위태로운 것보다 얻는 것이 없는 것이 나을 것이다.

 

물리학자 프리먼 다이슨은 색을 감지하는 망막의 원추체가 없고 간상체만 남아 있어 색을 전혀 구별할 수 없는 심한 색맹, 어셔증후군(농아로 태어나 어른이 되면 점차 시력을 잃는), 윌리엄 증후군(다섯 가지 감각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감각한 것을 양적인 체계 속으로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자폐증(듣고 보고 느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상적 능력을 상실한 채 태어나는) 등의 네 가지 신경장애를 가진 사람들 즉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겸손이라는 말을 했다.(‘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242 페이지)

 

겸손은 공부에도 적용된다. 앞서 인용한 철학자 김영민은 ”무릇 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우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라는 말을 했다.(같은 책 40 페이지) 겸손이란 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겸손의 가르침을 몸에 익히게 하는 가장 적절한 말로 들 수 있는 것이 김화영(최근 김리아로 개명) 교수의 말이다. ”혼돈은 때로 생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영혼은 반드시 혼돈의 용암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건전한 영성은 두 성역, 즉 혼란과 질서를 동시에 존중한다...혼란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주고 질서는 우리를 통합시킨다.“(‘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172 페이지)

 

김영민 교수의 말대로 자신의 생각이 자연스럽지 않음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정(補正; 모자람을 보태고 잘못을 바로잡음)의 노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최근 나는 ’데카르트가 인간이 모든 것을 의심해도 사유(의심)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유 주체인 인간이 자신을 자동적으로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해설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해설사가 해설 내용을 느낌이 아닌 인식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그리고 해설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음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이 허언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누구보다 나부터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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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깊이를 음미하는 시간입니다. 도시 이야기하다가 난데 없이 새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새는 도시 구조물의 모델이라 생각합니다. 새 날개 형태를 모방한 밀워키 미술관과 새 둥지처럼 철골이 서로 엮여 공간과 구조를 만드는 베이징 내셔널 스타디움을 보며 새가 스승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밀워키 미술관은 창공(蒼空)을 배경으로 해 흰색의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고 베이징 내셔널 스타디움은 가을 낙엽을 닮은 색이어서인지 답답해 보입니다. 우리는 새를 사랑하지 새가 사는 둥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많이 걸었습니다. 다리와 어깨가 비정상입니다. 이상(李箱)은 건강하지 못한 자신의 폐를 폐가 칠칠치 못하다고 표현했지요. 그럼 저는 다리와 어깨가 칠칠치 못하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새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날아가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필요하겠는지요. 저는 붉은 사암(砂癌)으로 되어 붉은 성(城)이라는 아라비아 이름을 가진 알함브라 궁전이 마음에 듭니다. 이탈리아 프로그레시브 록 필드에서도 독특한 음악을 구사한 메쯔키타(mezquita)의 recuerdos de mi tierra(‘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과 철자가 많이 비슷한 음악)을 듣습니다. 너무 피곤해 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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