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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번역가로부터 국내 저서는 번역서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공감한다. 독자의 수준이나 문제의식이 높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자의 역량 부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많은 우리 저서가 상당 수준의 역량을 보이지만 외국 저서가 보이는 치밀함과 시의적절함과 끈질김에 기반한 깊이 등을 따라가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까 싶다.

 

내가 눈여겨 보는 것은 일본 저서들의 약진이다. 최근 박문호 박사께서 추천한 두 권의 지구과학 책 가운데 한 권이 가와하타 호다까의 ‘지구 표층 환경의 진화’다.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고 한다. 히메노 켄지, 니시자와 타츠오, 세키 노부코 공저의 ‘재미 있는 흙 이야기’는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책이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챕터들은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 등의 지질연대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달에는 정말 흙이 없을까’, ‘지형학, 지질학, 토양학, 지반공학 등 비슷한 분야가 있는데 차이점은 무엇인가’ 등이다. 지구와 달리 달에 산, 구릉, 평야, 해저 등이 없는 이유를 물과 공기로 인상 깊게 설명한 모쿠다이 구니야스의 ‘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도 주목할 만한 책이다.(설명 자체보다 쉽게 생각하기 어려운 작은 것에 ‘착안; 着眼‘한 안목이 돋보인다 하겠다.)

 

물 즉 수(水)란 말이 나왔으니 이 단어와 짝으로 쓰이는 유(流)란 말도 생각하게 된다. 유(流)는 음미하기 좋은 글자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유수지위물야; 流水之爲物也 불영과불행; 不盈科不行)는 맹자(孟子)의 말이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이 구절에 나오는 과(科)란 말은 과학(科學), 과거(科擧) 등에 쓰이는 말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루, 웅덩이 등 잘 알려지지 않은 뜻도 가지고 있다. 유수지위물야 불영과불행이란 말은 흐르는 물은 앞다투려고 하지 않는다는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이라는 노자(老子)의 말보다 훨씬 자연스럽다.

 

유수부쟁선은 물은 흐르더라도 앞다투려 하지 않는다고 번역해야 한다. 호수처럼 잔잔하게 멈춰 있는 물은 당연히 부동(不動)의 평형 상태 즉 선두를 다투는 경쟁심을 보이지 않지만 흐르는 물도 그렇다는 말이다.(유수부쟁선은 식견이 좁은 말이다. 곧 설명하겠다.)

 

여담이지만 부동의 평형상태라고 하니 양자역학에서 무(無)를, 공간은 존재하지만 질량이 없는 빈 공간으로 정의하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들은 그래서 진공에서도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한 기독교인 물리천문학자는 ”그렇다면 공간은 어디에서 기원했는가?“라고 물었다. 어떻든 유수부쟁선이란 말을 거론하는 사람들은 막히면 돌아가는 것까지 물의 미덕으로 거론한다.

 

하지만 나는 이 말에 ‘홍수를 본 적이 있는가?’란 물음을 던지고 싶다. 엄청나게 모여 흐르는 물은 무섭게 서로 앞서려고 경쟁하고 그런 물은 돌아가지 않고 모든 것을 넘어 간다. 물은 때로 엄청난 도약(파도)을 한다. 거품이라 하지만 물은 물이다.

 

이곳 한탄강 지질공원에서는 한탄강을 메우며 흐르던 용암이 임진강으로 역류했다는 말을 한다.(가스통 바슐라르가 술을 불의 물이라고 한 것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용암은 초고도의 불의 물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역류라는 말은 쉽게 접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옳은 말도 아니다. 조건이 되면 물은 어디로든 간다.

 

노자가 간과한 것은 앞 다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물 역시 조건이 되지 않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으로 역류라는 말을 쓰려면 사람이 의도적으로 역방향의 조작을 가했을 때라야 할 것이다. 역류시켰다고.

 

유(流)는 한번 흘러간 물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유배를 뜻한다. 2천 5백리 강진 귀양형에 처해진 정약용은 18년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3천리 흑산도 귀항형에 처해진 정약전은 그러지 못했다.(강효백 교수 페이스북) 상투적이지 않은 말로 흐름의 비유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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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금씩 기독교와 가까워지고 있다. 아현성결교회, 약현성당, 서소문 공원 및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 감리교 신학대학 등이 주요 코스인 서소문 역사 탐방 때문인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물리천문학자 우종학 교수의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을 읽었고 지금은 지질학 박사 이진용 교수의 ‘지질학에서 하나님을 만나다’와 박남희, 이부현 등의 ‘처음 읽는 중세철학’을 읽고 있다.

 

이진용 교수의 책은 ‘과학 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의 문제의식을 잇는 책이라 생각한다. '처음 읽는 중세철학’에서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서양 중세기에 녹여낸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을 정초한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존 둔스 스코투스 등 기독교와 불가분의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다. 서소문 준비 과정에서는 조선시대 네 차례 가톨릭 박해(신유, 기해, 병오, 병인) 사건을 정리할 수 있었다.

 

김선희 교수의 ‘서학, 조선 유학이 만난 낯선 거울’을 통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얻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반드시 개혁적이거나 반성리학적 혹은 탈주자학적인 것은 아니다‘, ’조선 유학자들 가운데 가장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비판한 사람으로 알려진 정약용도 성리학의 토대인 이기론의 이론적 함의와 그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한 것이지 주희의 학문 전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성리학의 핵심 주제들과 완전히 다른 이론을 전개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천주교를 종교적으로 수용한 사람들의 경우에도 유학을 완전히 떠났다고 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다.

 

전희준의 ’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도 좋았다. 이 책을 통해서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차이, 미국 북감리교회와 남감리교회의 차이 등에 대해 알았고 베드로와 반석(磐石)에 얽힌 사연(페트로스와 페트라, 헬라어와 아람어의 차이)을 만났다. 다음달 코스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이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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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 화백의 ‘명례방(明禮坊)’이란 그림에 들어 있는 이벽, 이승훈, 최창현, 홍익만, 최인길, 김종교, 윤지충, 지황(池璜), 이존창, 김범우, 정약용, 정약종, 정약전, 권철신, 권일신 등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에 걸린 ‘그림의 인물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해설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인쇄해 보았더니 이름을 구별할 수 없어 다시 작은 부분들로 나누어 몇 장을 찍어 보니 구별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서소문의 의미를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무서운 현장을 별 생각 없이 다닌 것이다. 코스를 둘러보다가 남대문도 가 보았다.(약현성당에서 서소문 성지역사박물관 가는 길) 염천교 방향을 알리는 표지판을 보고 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조금씩 영역을 넓히고 있다고 해야 할까? 많이 걸었더니 피곤하다. 기분 좋은 피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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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들춰보는 자료 가운데 '사이코의 섬'이란 책이 있다. 독일 통일 이전인 1943년 동독에서 태어난 신경정신과 의사 한스 요하임 마즈의 책이다. 번역 출간된 지 27년이 지났으나 이렇게 아주 가끔이지만 늘 새롭게 들춰보는 것은 내게는 이례적인 일이다.

 

본문에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보다 베드로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다."란 말이 나온다. 이 말은 '내가 걸어온 직업의 길은 나 자신의 치유 시도"라는 저자의 말을 통해 더욱 현실성 있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베드로와 바울일까? 그들은 갈등 당사자들이었다. 별것 아니지만 베드로와 바울이 헷갈렸었다.

 

가령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식의 문장이 머리를 수놓기도 했었다. 누가 누구에 대해 말했는지는 중요하다. 저자의 의도대로 따라야 하리라. 베드로는 베토벤으로, 바울은 바흐로 치환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바흐 사후 태어난 베토벤이 바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도 바흐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태어나지도 않은 베토벤에 대해 말할 수는 없다.

 

실제로 베토벤은 바흐란 시내가 아니라 바다라는 말을 했다.(독일어 '바흐; Bach'는 시내라는 말이다.) 음악학자 폴 뒤부세가 바흐란 말은 동유럽 방언으로 떠돌이 음악가라는 말을 했으니 베토벤의 말은 은유에 근거한 개인적 헌사 이상이 될 수는 없으나 그 자체로 빛난다.

 

'사이코의 섬'의 저자는 예수를 건강한 사람 그 자체로 보며 그가 솔직했고 개방적이었고 진실했기에 중상(中傷)과 박해(迫害)를 받았다고 썼다. 저자는 세 체제의 공통점도 언급했다. 실재하는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낙원을, 실재하는 시장경제는 더욱더 많고 새롭고 나은 상품을 통한 만족을, 실재하는 기독교는 요구에 상응하는 순종을 할 때 더 나은 저 세상 삶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저자가 왜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자본주의란 말 대신 부드럽고 온건하게 보이는 시장경제란 말을 썼는지 의문이다. 우리에게 마음의 고고학이 필요하다. 이제 '베토벤이 바흐에 대해'란 말을 생각하며 '베드로가 바울에 대해'라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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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의(土宜)란 땅에서 나는 작물을 의미한다. 의(宜)가 마땅하다는 뜻이니 토의란 작물을 키워 먹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땅의 순리란 뜻에서 도출된 단어이겠다. 사실 땅이라기보다 흙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나는 흙에 대해 얼마나 알까? 화강암이 풍화되면 모래흙이 되고 현무암이 풍화되면 점토질 흙이 된다.(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흙' 31 페이지) 이 정도는 단순한가? 자연을 이야기할 때 하나만을 볼 수는 없다.

 

모쿠다니 구니야스는 지구에는 산과 구릉, 평야와 해저 등 다양한 지형이 있지만 달에는 그런 지형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며 지구와 달리 달에는 물질을 운반하는 바람과 공기가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했다.('그림으로 배우는 지층의 과학' 36 페이지)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강수량이 많을수록 땅위를 흐르는 빗물이 많아지고 따라서 침식이 더 많이 일어나지만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여 흙이 침식되는 걸 막아 준다고 말하며 이런 기본적인 균형은 강수량만으로 흙의 침식 속도가 결정되지 않음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흙' 34 페이지)

 

전자의 두 가지(물과 공기)와 후자의 두 요인(비가 하는 두 가지 일)은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협동 관계고 후자는 길항(拮抗) 관계다. 아니면 상반(相反) 관계든지. '세종실록지리지'는 흥미롭게도 토지의 비옥도를 평하며 비척상반(肥瘠相半)이란 표현을 썼다.

 

비옥함과 척박함이 반반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당시는 토양 구조나 점성(粘性), 토양 색 등보다 비옥도를 더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으니 흥미롭다는 표현은 맞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먹고 살아야 했기에 생긴 현실적인 기준이었다. 물론 상반이란 표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토양의 점성이나 색에 대해 상반(相半)이란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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