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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부득(要領不得)이란 사물의 주요한 부분을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말이나 글의 요령(要領)을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물색(物色)없다는 말과 통한다. 말이나 행동이 형편이나 조리에 맞는 데가 없다는 의미를 가진 말과 통한다는 의미다. 두 단어를 무람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무람이란 부끄러워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데가 있는 것 또는 그런 태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기에 무람없다는 말은 삼가고 조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무엇에 대해? 바로 글이다.

 

비약인지 모르지만 사람에 대해 조심하지 않는 사람은 글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최근 그런 글을 연이어 읽었다. 문법 오류뿐 아니라 사실 오류들까지 범한 데다가 기존 정보들을 자기의 문제틀에 넣어 재가공하지도 않은 글이다. 뜻밖인 점은 문장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 길게 쓴다는 점이다. 고치는 노력 없이 길게 쓰기에 잘못 쓴다고 해도 되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글을 잘 이해하는데 나는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나는 문장이 조금만 이상하거나 산만하면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바로 포기하며 비문(非文)이라고 규정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기야 문장을 쉽고 간결하고 새롭게 쓰면 좋겠지만 누구에게나 그럴 필요는 없고 그렇게 하기도 어렵지 않은가. 나는 물정(物情) 모르고 사는 빡빡한 사람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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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의 경로당 수가 107개라고 한다. 관계자께 들은 이야기다. 오래전 연천읍 통현리에서 일로당(逸老堂)이라는 현판을 본 기억이 나 ”요즘은 경로당이라 하지 않고 일로당이라 하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렇지 않아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검색해보니 연천읍 통현리 일로당(逸老堂)이란 글이 떴다.

 

문제는 한 군데서 본 일로당이란 명칭을 근거로 그런 질문을 했다는 점이다. 더 찾아보니 장자(莊子)가 하늘이 삶을 주어 나를 수고롭게 하고 늙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 나를 쉬게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일로란 편안한 노인이란 의미다.

 

전북 고창군에 일로당(逸老堂)이라는 정자가 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일로당(逸老堂)이라는 호를 쓴 사람이 있었다는 점이다. 돈녕부사를 지낸 양관(梁灌; 1437~1507)이란 사람이다. 궁금한 것은 이름에 물댈 관이란 글자를 쓴 이유다.

 

요즘 읽고 있는 베로니카 스트랭의 ‘물의 인문학’에 관개(灌漑) 이야기가 나온다. ”관개 기술이 급성장하면서 인간 사회의 지도자들은 점차 신격화되었다. 고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는 왕의 선정을 관개 사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왕은 사막을 비옥하게 만드는 물 공급자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물의 창조적 힘이 현실에 나타난 화신으로 여겨졌다.“(113 페이지)

 

특이하게도 관(灌)이 내림굿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나는 '벚꽃과 그리스도'란 책에 실린 ‘엔도 슈사쿠와 물의 성사(聖事)‘를 읽다가 장마비를 의미하는 매우梅雨와 안개비를 의미하는 무우霧雨를 알았다.(매화 매와 비 우를 쓰는 글자가 장마비라니..아닌 게 아니라 매; 梅에 장마라는 의미가 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엔도의 작품에서 인간은 물을 통해 생과 죽음의 영역을 왕래한다. 또 물을 통해 인간은 다른 종교와도 만나게 된다. 물은 신의 은총이 인간에게 부어지는 통로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45 페이지) 아, 관불식(灌佛式)이 있지. 이제 이런 관념적 상상은 그만 접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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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철학자 ’노자(老子)‘의 말이 소환되는 경우는 아주 제한적이다. 세상에서 물은 가장 상위의 선(善)의 표본이란 의미의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할 때 정도다. 일정 정도 의미가 있지만 상선약수만을 이야기한다면 클리세를 반복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지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상선약수를 언급하는 데 그친다면 너무도 상투적이다.

 

의문이라도 드러내 함께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두보(杜甫)의 ’강한(江漢)‘이란 시가 있다. 강한이란 장강(長江)의 강과 한수(漢水)의 한을 합친 말이다. 우리의 한강과 아무 관련이 없지만 왜 한강이 아니라 강한인가, 란 궁금증에 해결책으로 시를 읽을 수도 있으리라.

 

이 시에 “양자강과 한수, 향수에 젖은 나그네, 하늘과 땅, 한 쓸모없는 선비”라는 구절이 있다. 싯다르타가 쉼 없이 흘러가는 물을 보며 깨닫는 과정을 그린 헷세의 소설 ’싯다르타‘를 연상하게 한다. 두보는 회한 또는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을, 물을 바라보는 것을 통해 그린 것이 아닐지?

 

주로 재인폭포를 드나들고 가끔 베개용암과 백의리층에 들러 물을 바라볼뿐인 나 역시 새 정서를 느낀다. 하지만 그것을 잡아 리얼하게 표현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폭포 인근에 댐이 생겨 마을 입구까지만 운행하는 버스에서 내려 폭포까지 20여분 걷다 보면 많은 생각을 만난다. 내가 하는 생각, 떠오르는 생각 등...

 

하지만 폭포를 바라보며 갖는 생각이나 느낌에 비하면 볼품 없다. 이태호 교수의 ’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 같은 책을 비롯 조선의 학인들이 감행한 여행을 다룬 책을 보려고 한다. 이태호 교수의 책에는 박연포도(박연폭포 그림)를 겸재 정선의 실경(實景) 표현 방식으로 정의한 글이 있다. 이런 책을 읽는 것은 재인폭포 이해를 위해 치르는 의식 같은 것이다.

 

5월에 세 차례(13, 20, 22일) ’연강임술첩 - 그 속에서 연천 풍경을 노닐다’ 공부가 예정되어 있다. 겸재가, 용암 분출로 만들어진 재인폭포에 대해 다루지는 않았지만 좋은 기회다. 연천은 어떻든 용암이 만든 검은 돌의 고장이다.

 

’제주 과학 탐험‘이란 책에 “용암이 식는 이유는 공기와 접촉했기 때문이다. 만약 용암이 물과 만났다면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베개용암을 만들었을 것“(218 페이지)이란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은 주상절리와 베개용암의 차이를 간명하게 보여주는 글이다.

 

연천 재인폭포 근처에 비가 와야 물이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비와야 또는 비온 뒤 폭포가 있다. 이 부분에서 제주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은 연천이 내륙의 제주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제주에 비가 오고 나면 만날 수 있는 엉또 폭포가 있다. 엉은 절벽이나 벼랑을 의미하고 또는 입구를 의미한다고 한다.

 

엉은 엉알 해안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엉알의 알은 아래라는 의미다. 마이클 브라이트는 ’손 안의 지구과학‘에서 폭포를 침식에 잘 견디는 암벽에서 물이 갑자기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라 정의했다.(105 페이지) 이런 정의를 눈사람 만들 듯 크게 해 의미 있는 생각으로 이어가야 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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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만 틸든은 ‘숲 자연 문화유산 해설’에서 "해설의 기본 목표는 상세한 부분이 아무리 흥미 있다 하더라도 부분보다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총체가 아니라 전체에 주목할 것이다.“(81 페이지)란 말을 했다. 저자는 총체는 무한대로 솟아오르는 것이라 말한다.

 

전체(全體)와 총체(總體)는 어떻게 다를까? 가뭄으로 마을 전체가 황폐화되었다고 하면 괜찮지만 마을 총체가 황폐화되었다고 하면 이상하다. 마찬가지로 작품은 작가의 신념과 가치관의 총체라고 하면 괜찮지만 전체라고 하면 이상하다.

 

전체적이라 함은 대부분이라는 의미다. 총체적이라 함은 전면적이고 전 분야를 아우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령 꽃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그 꽃에 대해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다. 꽃의 역사, 지질, 생태, 인문적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시간 제약 때문이다.

 

나로서는 대략 이 정도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람이 허튼 데가 없이 찬찬하며 실한 것을 의미하는 말이 착실(着實)이다. 철학적으로 이는 실지(實地)에 발을 붙이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착실의 반대어는 무엇일까? 나는 보허(步虛)가 아닌가 싶다. 허공을 걷는다는 의미다.

 

나는 착실한 해설을 하는가? 아니 착실이 원래의 의미(‘실지; 實地‘에 발을 붙이고 있는 상태)를 잃고 허튼 데가 없이 찬찬하다는 말로만 쓰이는 현실을 고려해 ”나는 성실한 해설을 하는가?“라 고치면 어떨까? 아니 이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실답(實踏)의 해설을 하는가?“라 고쳐야겠다. 부분보다 전체를 말하는 해설인가란 의미다. 그런데 가령 오규원 시인의 시 '바위에 별이 스며들어 꽃이 되었다.'란 구절을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암석(지질), 별(천문), 꽃(생태)을 두루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는가?

 

’순자‘에 이런 말이 있다. 만물이 비록 많으나 어느 때는 이들을 한꺼번에 거론하고자 할 때가 있고 이를 일러 물(物)이라 한다. 물이라는 것은 가장 큰 공명(共名; 공통 개념)이다....어느 때에는 개별적으로 거론하고자 할 때가 있으니 예를 들어 조수(鳥獸)와 같은 것이다...조수라는 것은 가장 큰 별명(別名; '종; 種' 개념)이다..”

 

순자는 말을 좋아하고 말을 잘 하는 것을 군자의 본질로 여겼다. 순자는 말의 내용이나 실속 만큼 드러내는 방식, 표현 과정도 중요하게 여겼다.(김선희 지음 ’실(實), 세계를 만들다‘ 참고)

 

인간은 악의 성향을 타고 태어났다는 주장(성악설)을 폈지만 교육에 의해 얼마든지 선해질 수 있다고 가르친 순자(김백철 지음 ’왕정의 조건‘ 참고)의 말이니 믿음이 간다.

 

본지(本旨)에서 조금 벗어났지만 말하자면 ”순자의 성악설이 맹자의 성선설과 모순되는 이론이었던 것은 아니다. 두 사상가는 인간 본성 가운데 상이한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서로 다른 입장에 섰으나 인간에 관한 근본적인 생각은 많은 곳에서 일치하는 유학자였다.“(김교빈, 전호근, 김시천, 김경희 등 지음 ’동양철학 산책’ 참고)

 

공명(共名)과 별명(別名)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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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몽암(禁夢庵)은 영월읍에 자리한 암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유배 중이던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고 창건하였으므로 금몽암이라 하고 원당(願堂)으로 삼았다.”고 썼다. 금중이 무엇일까? 한자 사전에는 궁궐 안, 궁중이라 나와 있다. ‘금중에’라는 말은 이상하다. 사전대로 궁궐 안 즉 장소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금중에서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금중 시절에라고 하든지. 하지만 단종은 유배 중이었으니 당연히 궁궐에 있지 않았다. '금중에서'라는 말도, '금중 시절에'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금중에 대한 꿈을 꾸고라 해야 맞다.

 

탁효정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에 의하면 ’조선불교통사‘에 단종이 왕이었을 때 이름 모를 절에 있는 꿈을 꾼 뒤 영월에 내려와 꿈에서 본 절과 똑같은 절이 있어 매우 놀랐다는 내용이 있다. 지덕암이란 이름의 암자였는데 단종은 그 이름을 궁궐(’금중; 禁中’)에 있을 때 꿈꾼 절이라는 의미에서 금봉사라 고쳤다.

 

*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화해 시정을 요구했더니 바로 고쳤다. “유배 중이던 단종이 금중(禁中)에 꿈을 꾸고 창건..”이란 말을 “단종이 금중(禁中)에서 꿈을 꾸고 창건..”이라 고친 것이다. 그러나 단종이 왕이었을 때 이름 모를 절에 있는 꿈을 꾼 뒤 영월에 내려와 꿈에서 본 절과 똑같은 절이 있어 매우 놀랐다고 고치면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그나저나 고치기 전의 글을 캡쳐해 두지 않았는데 그렇게 빨리 고칠 줄 몰랐다. 의문의 1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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