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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지질(地質) 해설사로부터 지질은 주관적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증거 없는 학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내가 들은 말은 지질은 카더라 학문이라는 말이다. 주관적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증거 없는 학문이라는 말은 내가 순화해 전달하는 말이다. 카더라는 ~ 한다고 하더라의 사투리 발음이다. 정확한 근거가 부족한 소문을 추측해 사실처럼 전달하는 학문이라는 말이다.

 

참 충격이다. 그 이유는 그 분의 발언이 너무도 뜬금 없기 때문이고 내가 그 분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이런 글이나마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어떻든 나는 그 분에게 어설프게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라는 물음을 던지지 못했다. 그리고 "근거 없이 말해지는 지질 사례를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는지요?"란 말도 하지 못했다.

 

지질해설을 하는 분이 지질은 카더라 학문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런 말을 하는 분은 타자(他者)라 불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말함으로써 나 같은 학인(學人)으로 하여금 부족함을 돌아보게 하고 공부의 기회를 갖게 하는 이방인 즉 경계의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자리하는 분이라는 의미다. 오래 전 즐겨 읽던 책을 찾아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띈다.

 

“대중은 말 자체가 함축하듯이 특수하게 개념화된 언표들을 사용하는 집단이 아니다. 대중은 특수한 개념들이 분화하기 이전의 차원, 인간됨의 가장 원초적이고 보편적인 차원 속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존재이다. 즉 대중은 감성적 언표의 수준에서 삶을 영위한다. 감성적 언표는 비반성적 수준의 언표”(이정우 지음 ‘가로지르기’ 108 페이지)라는 말이다.

 

과학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과학이란 말을 많이 써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 습성을 감안하면 그 의미는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이상하다. 당연히 반성할 일이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증거와 논리를 기반으로 해 자연세계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방식이 과학이다. 유명한 과학 철학자 칼 포퍼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 즉 반증(反證) 가능성이 있는 것을 과학이라 설명했다.

 

반증 가능성이 있다의 반대는 당연히 반증 가능성이 없다란 말이다. 이 말은 검증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령 영혼이 있다는 말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과학이 진지하게 연구 대상으로 삼을 사안은 아니라는 말이다. 김범준 교수는 과학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과학은 아스라이 윤곽만 보이는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긴 항해라는 것이다.

 

물리학자 출신의 과학 저술가인 일본의 다케우치 가오루는 “백만 번 실험을 해서 이론에 맞는 데이터가 나왔다 해도 바로 다음 번에 이론에 맞지 않는 데이터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실험만 할 수도 없다.”는 말로 과학과 수학의 차이를 설명했다. 수학은 모든 것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어서 한 번 증명하면 끝이지만 과학은 정밀한 실험에 의해 반증(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과학은 if’ 108 페이지)

 

다윈 진화론을 열렬히 변호해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토마스 헉슬리는 이런 말을 했다. "객관적 사실 앞에 아이처럼 낮춰 앉아라. 모든 선입관을 버리겠다는 각오를 다져라. 어디로 간들, 어떤 나락에 다다른들 겸손한 마음으로 대자연을 따르라.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과학 저술가 스티븐 버트먼은 초기 그리스인들이 지질학의 역사를 신화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던 것과 달리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은 신화의 안개에 이성의 햇살을 비추는 동시에 지구의 창조를 사실주의적으로 새롭게 설명했다고 말한다. 과학은 애초에 자연철학이었다. 본가인 철학에서 분가해 나온 학문이 과학이다. 과학은 분과학문(分科學問)의 줄임말이다.

 

기원전 6세기 후반의 사상가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리토스 등은 언덕 꼭대기에서 화석으로 변한 조개 껍데기를 발견하고 지구 표면이 항상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 가정하며 지중해가 땅으로 덮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 유추했다.(‘세상의 과학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중 지리학과 지질학 부분; 194 페이지)

 

이것이 바로 과학이다. 지질학의 창시자는 니콜라우스 스테노(스웨덴 이름으로는 닐스 스텐센; 1638 - 1686)다. '프로드로무스’란 저서를 통해 그는 네 가지 지질학 원리들을 정립했다. 1) 누증의 법칙, 2) 퇴적암 법칙, 3) 고유 수평성의 원리, 4) 측면 연속성의 원리 등이다.(캐서린 쿨렌 지음 ‘천재들의 과학 노트’ 참고) 카더라를 말한 것이 아니라 원리를 쳬계화한 것이다. 나는 물론 니콜라우스 스테노의 관점과 현재 지질학의 원칙인 동일과정의 법칙, 지층누증의 법칙, 천이(遷移)의 법칙, 부정합의 법칙, 관입의 법칙 등의 관계를 알지 못한다.

 

앞서 말한 지질해설사는 과학을 무엇이라 생각하는 것일까? 백의리층을 영어로 Baekeuiri layer라고 설명하는 전문가가 있고, Baekeuiri formation이라고 설명하는 전문가도 있다. Baekeuiri formation이라고 하는 전문가는 layer는 형태에 초점을 맞춘 용어이고 formation은 축적된 시간 즉 연대에 따른 결과에 초점을 맞춘 용어라는 말을 한다. 나는 설명판에 기록된 대로 백의리 포메이션이라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인폭포가 평강 오리산 등지에서 흘러온 용암에 세 번 노출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고 두 번 노출된 뒤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전문가가 있다. 지질에서의 이런 어긋남 또는 이해되지 않는 점은, 내가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과학이란 것이 오류와 착오와 함께 다루어지는 학문이어서인지 그런지 꽤 많다. 앞에서 언급한 지질해설사는 혹시 이런 어긋남(상위; 相違)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것인가?

 

그 분은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접했을 때 생각을 거듭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전문가에게 문의하거나 책을 찾아 보는 수고로운 과정을 치렀을까? 나는 그 분이 지질의 모든 내용이 ”카더라”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그런 잘못된 내용은 해설사들뿐 아니라 전문가들도 받고 전하는 것은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그 분은 수긍하며 다만 전문가들은 잘못된 내용을 더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설명하는 방식에 능한 사람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 분은 곧 있을 수업(授業)을 지질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그 분은 근거가 불분명한 말을 해설사들보다 더 교묘하게 치장하고 꾸미는 기술에 능한 전문가들로부터 교육을 받겠다는 것인가? 어쩌면 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말하는 분의 대응 가치도 없는 주장에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 투척한 넌센스도 내게는 해명해야 할, 그래서 공부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데이터(문제로서 주어진 것)가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적 발언일수록 더욱 근본 차원의 쟁점을 생각하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그 분은 마음에 들지 않는 해설사들이 던진 두서 없고 ”틀렸다고 할 수조차 없는“ 엉터리 말을 듣고 만부당한 말을 하는 해설사들이 있다고 하는 대신 지질은 카더라 식의 학문이라는 말을 한 것일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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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에 지쳐서인지 한 권을 진득하게 읽지 못하고 이것 조금, 저것 조금 하는 식으로 책을 읽고 있다. 분야도 지질, 역사, 물리, 사회과학, 생태 등으로 하나가 아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생각을 다시 정리하는 중에 만들고 있는 분탕(焚蕩; 아주 야단스럽고 부산하게 소동을 일으키는 짓)의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비효율의 낭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런 과정들을 통해 새로운 생각 거리들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내일은 지난 15일 근무한 백의리층에 다시 가게 되었다. 지난 근무 때에는 고고학 전공자와 나눈 대화로 얻은 바가 있었고 주위의 나무도 눈여겨 보았다.

 

눈에 띄는 책들을 순서에 개의치 않고 보고 있고 주위의 나무와 꽃들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것이 요즘 내 일과라 할 수 있다. 내 행보가 “빛이 들지 않는 지평의 바깥, 그 어둠 속에 있는 것“(이진경 교수 지음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104 페이지)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굳이 말할 수는 없다.

 

‘예술, 존재에 휘말리다’는 지난 봄 2/ 3 정도 읽다가 덮어 두었던 책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가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한 말을 음미한다. 우리가 역사의 사소한 이야기거리에 빠져드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존재의 원천이기 때문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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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자리‘라는 책을 계기로 존 버든 샌더스 홀데인, 스티븐 제이 굴드 등의 이름을 다시 확인한다. 홀데인은 신은 딱정벌레와 별에 대해 과도한 애정을 가진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유명한 생물학자다. 이 에피소드를 근거로 하면 홀데인을 재기 넘치는 과학자로만 보는 것도 무리가 없겠다. 하지만 과학적 유토피아를 그린 ’다이달로스. 과학과 미래‘라는 책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공동체 지향의식이 강한 과학자였다.

 

김우재 교수는 '과학의 자리‘에서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귀기울일만한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인문학 진영에서 자연과학을 소홀히 하는 문제는 많이 거론한 반면 자연과학 진영에서 인문학을 소홀히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덜 언급한 점은 아쉽다.

 

책에서 거론된 ’과학이 만드는 민주주의‘의 저자 해리 콜린스와 로버트 에번스는 목을 180도 돌릴 수 있는 부엉이처럼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과학자들을 진정한 과학지식인으로 정의했다. 인문학적 메시지를 반영해 해설하려는 지질해설사를 보고 펄쩍 뛰었다는 한 지질학 박사가 생각난다. 그 분에게 “과학과 인문학이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의 자리‘의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다.

 

'과학의 자리'와 관련해 인상적인 점은 책이 어렵다는 기자의 푸념에 “그건 내가 독자를 존중하기 때문이다...편향적인 인문주의 전통에 매몰된 학자들은 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저자의 대응이다. 나 역시 주위 사람들을 존중해 어려운 이야기도 꺼리지 않고 전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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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 임진강 주상절리, 좌상바위 가는 버스를 확인했다. 당포성과 임진강 주상절리는 81번 버스, 좌상바위와 베개용암은 포천 가는 56번 버스, 백의리층은 고문리 가는 56번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지질공원은 아니지만 호로고루와 경순왕릉, 고랑포구 역사공원에 가려면 83번 버스를 타면 된다. 당포성에 별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로고루도 생각했다.

 

고구려 시대에 두 성이 천문대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은 내 막연한 생각이다. 김일권 교수의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를 참고할 만하다.(당포성, 호로고루 두 성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 천문의 일반적 이야기를 참고해야겠다는 의미다.)

 

천문 이야기를 했지만 지난 해 영월에 갔을 때 본 별마루 천문대가 내가 간 첫 천문대다. 그간 실제로 별을 보는 것보다 천문 이론(그렇다고 많이 아는 것은 결코 아니다.)을 익히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한계 안에서 관심 두는 별 이야기에 집중할 것이다. 가끔 하늘을 보는 것으로 별 관측을 대신할 것이다.

 

조 던클리의 ‘우리 우주’를 마저 읽어야겠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앞으로 몇 년 동안 우리는 분명히 충돌하는 블랙홀이나 중성자별에서 오는 신호를 더 많이 관측하여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만간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 입자가 정말로 무엇인지 알아내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이내에 우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은하들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발견들은 훌륭한 새 망원경들과 계속 발전하고 있는 컴퓨터 성능 덕분에 가능해지고 있다. 다음 10년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망원경들은 모든 파장의 빛뿐만 아니라 중력파까지 관측할 것이고 넓은 하늘 전체뿐만 아니라 특정한 천체들을 높은 정밀도로 관측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그 날에 망원경으로 새로운 관측을 한 사람의 글을, 때로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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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이 용이하지 않을 경우 한편으로는 난해한 학문이라는 딱지를 붙이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습자의 준비 부족 혹은 열성 부족(수십 번이고 되씹어 생각해야 할 것)을 탓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적 자질을 의심하게 된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게 된다.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따라가는 사람에게는 별 문제가 없지만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에게는 절망이다. 나는 만년에 이르면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에 나오는 내용이다. 조금 길지만 양자역학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참고할 만한 글이어서 인용했다. 물론 양자역학만이 아니라 학문 일반을 대하는 자세에 적용해도 좋을 이야기다. 장회익 교수는 공부하는 사람을 달을 가리키는 손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으로 나누어 비유한 뒤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는 성향의 학생이 일차적인 좌절을 겪고 굳이 달을 보겠다는 사람은 절망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장회익 교수는 자칭 만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달을 보겠다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분이다. 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질공원에 대해 공부(또는 해설)하는 데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과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의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이 적용된다. 장회익 교수는 별로 큰 능력도 없으면서 철저한 이해를 원하기에 좌절을 겪는 학생 단계는 오래 전 넘어선 분이다. '만년에 이르러서도 굳이 달을 보기를 소망하는' 분이다.

 

장회익 교수의 분류에서 달을 보려는 이유 때문에 좌절을 겪거나 절망을 느끼는 사람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상징폭력을 겪는 사람이다. 상징폭력이란 선학(先學)들이 이루어놓은 지식의 장(場)에 진입해 그들의 의견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들이 이루어놓은 성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기에 감수할 수 밖에 없는 후학들이 겪는 고통이고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공간에 진입해 그 장(場)에서 중요하다고 설정된 내기물이 연구할 만하다고 믿는(오인하는) 사람들이 감수하는 고통이다.

 

부르디외의 말과 장회익 교수의 말을 종합하면 달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달은 아무런 흥미도 유발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장회익 교수의 말은 오컴의 면도날을 조금 변형해 생각하게 한다. 경제성의 원리라 불리는 오컴의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원리다. 이를 변형하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려는 사람은 쉬운 내용만 다루고 조금 더 깊이 있는 내용은 고려하지 않는 태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의문 자체를 갖지 않는 사람이라 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의문이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의문을 갖지 않은 채 편하고 쉬운 내용만 전하려는 사람이 분명 있다. 해설계에 특히 지질해설계에서도 그런 일은 빚어진다.

 

브레너의 빗자루란 개념을 생각하기로 하자. 분자생물학자 시드니 브레너에 의해 고안된 이 개념은 탁월한 아이디어나 명쾌한 통찰을 지녔다고 믿는 사람은 일단 용감하게 발표하고 나서 해결되지 않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브레너의 빗자루를 이용해 양탄자 아래로 쓸어넣으면 된다는 것이다.(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슈뢰딩거의 고양이' 참고) 이 역시 변형하면 해설하는 사람은 끊임 없이 의문을 가지고 기존의 개념이라도 색다르게 설명할 아이디어를 갖게 될 경우 기존 지식과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새롭게 가다듬어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

 

최근 某 지질해설사와 대화를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그는 자신은 과학(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지질(해설)에 굳이 새로운 과학 내용이 필요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관건은 조금 더 나은 기법을 찾아내는 것이고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것이다. 지질 책은 물론이고 여타 과학 책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생각하고 기법과 내용으로 삼을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조금 관념적일 수 있지만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의 '보이는 세상은 실재가 아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를 읽으며 내가 이해한 이야기를 먼저 하도록 하겠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사물은 느린 사건이다. 빠름과 느림은 상대적이란 의미다. 이를 재인폭포에 적용하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각자 재인폭포가 관심을 끄는 이유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구상하는 설명(카를로 로벨리의 책을 쉽게 풀어 하는 설명)은 언급하지 않겠다.

 

어떻든 이제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로 다시 돌아가자. 먼저 말할 것은 부르디외가 말하는 상징폭력은 선학(先學)들의 지식(知識)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 까닭에 그 개념에 익숙해져야 하므로 빚어지는 어려움이다. 이는 뉴턴이 말한 거인의 어깨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즉 자신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섰기에 성과를 낼 수 있었다는 뉴턴의 말과 관계 있다는 뜻이다. 장회익 교수는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를 대비했다.

 

‘스피노자의 뇌’(원어는 Looking for Spinoza’)의 저자 안토니오 다마지오는 스피노자의 서재를 방문해서 본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에 대해 그가 필요로 했던 책은 미니멀리즘이 무색할 정도라는 말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스피노자의 서재 방명록에 아인슈타인이란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이 스피노자의 서재를 다녀간 것은 1920년이다.

 

스피노자의 많지 않은 책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데카르트의 책이다. 스피노자는 뉴턴과 함께 데카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두 지적 거인이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다르게(창조적 배반?) 계승했다. 뉴턴 역시 데카르트에 빠져 있었지만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데카르트에게서 적당히 떨어져 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뉴턴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데카르트의 동시대 학자들의 이론을 폭넓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런 동시대 학자들 중 한 사람이 가상디다. 물질의 본질을 외연(外延)으로 본 데카르트에게 공간과 물질은 구분이 불가능하고 전체 우주는 물질로 가득찬 플레넘(물질로 충만한 공간)이었다면 가상디에게 우주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라는 입자'가 진공 속을 날아다니는 공간이었다.(박민아 지음 ‘뉴턴 & 데카르트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거인’ 참고) 곁가지이지만 세상 만물이 그렇듯 우리 몸 역시 거의 대부분(99. 999%) 텅 빈 원자로 구성되었기에 우리는 그 빈 공간을 뚫을 수 있으리라 생각할 법하지만 원자의 외곽을 구성하는 전자 사이의 전기적 반발력 때문에 빈 공간과 다름 없는 우리가 역시 빈 공간이나 다름 없는 벽을 뚫지 못한다는 말을 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몸과 마음을 별개의 것으로 본 데카르트와 달리 몸과 마음의 일원론을 제시했다. 장회익 교수는 스피노자에 의거해 “양자역학 이전에는 위치공간과 운동량공간을 서로 독립적인 두 공간으로 보았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면서 이것이 한 공간의 두 측면임이 밝혀진 것”이란 말을 한다. 스티븐 내들러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인간 내에 있는 정신과 신체 상태간의 상관관계는 독립된 두 계열간의 외적 관계가 아니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계열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신체가 ‘베임‘ 하고 울리면 정신은 ’아픔‘ 하고 울리고 정신이 ’팔을 움직임‘ 하고 울리면 신체는 ’팔이 움직임‘ 하고 울린다는 흥미로운 말을 덧붙인다.(’에티카를 읽는다‘ 246 페이지) 신승철은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이야기한다. 스피노자의 평행론을 잘 살펴보면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이 감정이라면 움직일 때의 마음은 정동(情動)이라는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꼼짝 안 할 때의 마음인 감정은 망상과 같아 일시적이고 돌발적으로 찾아와 머릿속에서 공회전한다.(’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147 페이지)

 

요즘 오랜만에 양자역학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장회익의 자연철학 강의’는 내가 지난 3월 중순 문을 연 경기도 연천 전곡의 달달(달리는 달팽이) 서점에서 가장 먼저 구입한 책이다. 이 서점은 내게 사랑방 같은 의미 공간이다. 책을 주문하고 오기를 기다렸다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오면 가서 받아 대화를 하는 의식(儀式; Officium) 같은 일이 펼쳐지는 곳이다. 작은 서점이 아니라면, 그리고 운영자가 함께 지질해설을 하는 분이 아니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든 그랬지만 처음으로 산 그 책을 꽂아두고만 있다가 양자역학에 대한 관심 재점화 덕에 집어든 것은 여름이 다 저물어 가는 8월 15일 이후의 일이다. 장회익 교수의 책은 근대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스승으로 삼아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시킨 이들과 그들의 학문을 ‘심학십도(尋學十圖)’의 형식으로 정리해 지성사의 흐름을 조망한 책이다. 심학십도란 이율곡의 성학십도(聖學十圖)와 불가의 심우도(尋牛圖)를 조합한 말이다.

 

2007년 나온 최종덕 교수와의 대화집인 ‘이분법을 넘어서’에서 장회익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알고 가르치느냐 하는 점을 지속적으로 반추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모른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지식을 새로 짜나가야 해요....학문을 다시 짜야 해요. 우회로를 버리고 직선으로 뚫어야 해요. 핵심만 명명백백하게 드러내는 방법을 강구해야지요.”(41, 42 페이지) 앞 부분에서 말한 굳이 달을 보려는 사람, 그 과정에서 절망도 느끼는 사람이 감내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길은 내가 말한 조금 더 나은 기법과 과학 지식을 추가해 설명에 반영하는 길과도 통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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