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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退溪)가 병세가 위중한 가운데 제자들에게 평생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종일토록 가르친 것에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를 퇴계 자신 정통(正統)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아끼는 차원에서 스스로 부족하다고 말한 것이라 설명하며 그것이 진정한 학문의 시작이 아닐까 결론짓는 글을 읽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평생 가르친 스승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제자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혼란스럽지 않았을까?


퇴계는 그릇된 견해를 가르쳤다고 했지 부족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부족하다는 말은 글쓴이의 해석이다. 퇴계의 저 말은 겸손 차원의 말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퇴계의 저런 어법은 바람직하지 않다. 글쓴이가 든 다른 예 즉 자신만이 정통이며 다른 사람의 주장이나 학문은 거짓되고 삿된 것이라 말하는 사람과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 두 경우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회퇴변척(晦退辨斥)이란 말이 있다. 회는 회재(晦齋) 이언적, 퇴는 퇴계(退溪) 이황을 말한다. 이언적, 이황 등이 문묘에 신주가 모셔진 것(종사從祀)을 조식의 제자 정인홍이 비판한 사건을 말한다. 조식은 종사(從祀)되지 않았다. 광해군 때 5현(賢: 이황,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이 전제 정권에 저항한 조선의 대표 지식인으로 선정되어 문묘(文廟)에 종사된 이래 지식인들은 지식권력의 결집을 용납하지 않는 왕권과 맞서며 지식인 권력 시대를 만들어 갔다.(최연식 지음 ‘조선의 지식 계보학’ 23 페이지)


하지만 조선 성리학은 의료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문제적이었다. 어의(御醫)들이 진맥(診脈) 외의 방법으로는 임금의 몸을 직접 접할 수 없었던 것이나 의사가 아닌 성리학자들이 임금의 몸과 관련된 책임자를 자처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조선은 대신들도 어의들과 함께 왕의 건강 관리와 질병 치료에 참여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어의를 비롯한 의관들이 맡지만 진료와 치료의 논리적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은 유학자 출신의 삼제조(三提調)가 맡았다. 삼제조란 정1품(도都제조), 정2품(제조), 정3품(부副제조)을 말한다. 문제는 삼제조가 감시하는 경직된 분위기는 오진을 낳은 주원인이 되었다는 점이다.(이상곤 한의사 지음 ‘왕의 한의학’ 참고) 오진이 목숨을 좌우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회재란 주희의 호인 회암(晦庵)의 앞 글자인 회에 집을 뜻하는 재(齋)를 조합해 만든 말로 주희의 집이란 뜻의 말이다. 살아 있는 제 나라의 임금보다 죽고 없는 주희를 더 받들었다는 조선의 성리학 실상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퇴계는 남명(南冥) 조식과 의미있는 논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철저히 주자학 내부의 논쟁으로 남명 조식의 문묘 종사 좌절, 북인정권의 붕괴, 남명학파의 몰락은 조선의 주자학적 도학화를 재촉했다.(김용헌 지음 조선 성리학, 지식권력의 탄생 211, 212페이지)


조식은 제자 정인홍이 "혼주(昏主)"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에 가담한 역적으로 지목되면서 오명을 썼다. 조식은 실천을 강조했다. 특기할 만하지만 그는 정주(程朱: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래 보탤 것은 하나도 없다며 저술도 하지 않았다. 율곡과 퇴계의 이론 논쟁이 철저한 주자학 내부의 논쟁이듯 실천을 강조한 조식도 퇴계와 차별점을 보이지 않는다.


조식은 “칼을 찬 유학자”로 유명한 분으로 “순임금이 사흉(四凶)을 제거하던 것과 같이, 공자가 소정묘(少正卯)를 베던 것과 같이 하시면 능히 지극히 악을 미워하는 법을 다할 수 있을 것이고, 백성들이 마음 속으로 크게 두려워 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란 권고를 임금에게 했다.(한형조 지음 ‘조선유학의 거장들’ 148, 149 페이지) 그런데 그런 그가 앞에서 언급한 성리학자 지식인들의 완고(頑固)와 독선(獨善), 전횡(專橫)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 궁금하다.(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무지(無知)하다’는 의미이다.)


정주 이래 보탤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조식은 철저한 주자학 내부의 인물이었다. 사문난적(詐文亂賊; 주자의 유교를 다르게 해석한 사람을 정죄하는 말)이란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조선의 숨막히는 성리학 중심주의 아래에서 개인적 겸양(이라 해도)은 큰 의미가 없다.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지만 이런 폐쇄성(도그마성)을 보면 유교는 종교라 할 수 있다.


가지 노부유키(加地伸行)는 종교를 죽음과 죽음 후에 대해 설명하는 체계로 보며 유교는 그런 점에서 종교라 말한다.('유교란 무엇인가' 참고) 공자는 자하(子夏)라는 청년에게 소인유(小人儒)가 되지 말고 군자유(君子儒)가 되라는 말을 했다. 공자 자신 스스로를 유자(儒者)라 불렀다. 유자란 무축(巫祝: 무당, 박수 따위의 주술사)을 말한다. 주술적 의례(儀禮)나 상례(喪禮) 등의 일에 종사하던 하층민들이다. 군자유는 사유(師儒: 도道를 가르치는 선비)를 말한다.


가지 노부유키는 샤머니즘에서 정치이론, 우주론, 형이상학을 두루 포괄하는 것은 전세계에서 유교 뿐일 것이라 말한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이 점서와 철학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기만 해도 노부유키의 말에 설득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를 죽음과 죽음 후에 대해 설명하는 체계로 보는 노부유키의 말은 베르그손의 정의를 생각하게 한다. 베르그손은 종교는 지능에 의한 죽음의 불가피성의 표상에 대한 자연의 방어적 반작용이라는 말을 했다.(‘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


베르그손은 종교를 부정적인 정태(靜態)종교와 긍정적인 동태(動態) 종교로 나누었다. 베르그손은 정태 종교를 사회 질서의 보존이라는 사회성 차원에서 보았다. 또한 죽음의 확실성으로 인한 공포와 사후생명의 연장이라는 허구가 결합된 것으로 보았다. 베르그손에 의하면 정태 종교는 주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베르그손은 주술(呪術)이 끝나고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되고 주술과 과학이 언제나 함께 공존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동태종교는 생명에 대한 애착에서 생명으로부터의 초탈과 사회생활에서의 충성에서 사회생활을 초월하는 정신의 보다 자유로운 부름을 겨냥한다. 베르그손은 정태종교와 동태종교는 전혀 별개이지만 동태종교는 정태종교를 필요로 한다고 보았다.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상반되는 듯 보이지만 비극(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삶의 고통과 무의미를 견디게 하는 예술)이 탄생하려면 둘이 만나야 한다고 본 니체와 비교하게 하는 부분이다.


베르그손은 ‘형이상학 입문‘에서는 신(神)을 존재이면서 생성이라 정의했고, ’창조적 진화‘에서는 용솟음치는 용광로처럼 생명이 넘쳐흐르는 우주의 근원으로 보았고, ’도덕과 종교의 두 가지 원천‘에서는 생명의 근원이자 사랑 그 자체이며 사랑을 통해 인류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존재라 생각했다. 존재이자 생성, 생명력 넘치는 우주의 근원, 사랑 그 자체를 두루 포괄하는 이런 멋진 생각은 정와 동태종교를 상호 무관한 것으로 보지 않는 것과 뿌리가 같다.


베르그손의 생각에 무언가를 덧붙이자면 동태종교가 정태종교를 필요로 한다면 정태종교는 동태종교를 모델로 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 가능하다. 나는 베르그손의 종교 및 신관(神觀)으로 유교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당연히 가지 노부유키가 한 말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유교는 샤머니즘에서 정치이론, 우주론, 형이상학을 두루 포괄하는 유일한 종교라는 말이 그것이다. 개인적인 토로이지만 ‘성부(聖父) 베르그손, 성자 스피노자, 성령 니체‘(토드 메이의 표현)에서 매력적이지만 아직도 버성기는 니체를 베르그손과 함께 읽으면 조금 나아질지? 이것이 이 가을의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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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가디언이 스웨덴 아카데미측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된 밥 딜런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밥 딜런의 수상 거부를 염두에 두고 'Nobel panel gives up knockin’ on Dylan’s door'란 글을 실었네요.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란 곡으로부터 영감을 얻은 참 신선한 제목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나저나 저는 knocking on haven's door라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heaven과 haven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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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어제 저와 인연이 있는 출판사(서초구 강남대로)에 다녀왔습니다. 이 출판사 저 출판에서 소개해주기를 바라고 가져온 100권은 넘을 책들 가운데 마음대로 골라갈 수 있는 상황에서 저는 17권을 들고 왔습니다. 택배로라면 30권은 더 넘게 골랐을 텐데 무게감을 느끼고 싶어 들고 왔습니다. “내 청춘은 내 집 하나 넓히지 못하고 전투도 못 하고 몇 수레의 책들과 함께 지나갔다”는 강규 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전철 안에서 70세 정도로 보이시는 분이 제가 들고 있는 니체 책을 보시더니 언제 나온 책이냐 물어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산에 다녀오시는 길이라는 그 분은 몇 년 전 등산 중 실족해 머리를 다쳐 혼수 상태로 며칠을 지내신 끝에 겨우 회복되어 지금은 약간의 후유증만이 있을 뿐 생활에 큰 무리는 없다고 하시더군요.

 

b) 제가 들고 있는 책이 50년 전 실존주의 철학과 니체, 하이데거 등을 읽느라 치른 그 분의 고투(苦鬪)와 환희(歡喜)를 추억하게 한 것 같습니다. 대화는 그분의 아직은 완전하지 않은(어쩌면 쇠퇴해가는 것이라 해야 옳을지도 모를) 기억 때문에 몇 군데 빈 곳이 있는 철학 개념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말을 그 분이 던지고 제가 그것을 수리(修理)하듯 마무리하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분은 양재 시민의 숲 역에서 출발해 양재에서 환승한 저와 종로 3가까지 동행하며 대화를 나누다 정이 드셨는지 헤어지는 순간 성(姓)이라도 알고 싶다고 하시며 악수를 청하셨습니다. 답으로 건강하세요란 말씀을 드린 저는 그 분이 저에게 멋있다고 하시기에 제가 그런 면을 가지고 있어서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c) 하지만 그보다는 제가 대화 상대를 해드림으로써 그 연배로서는 드물게 철학 이야기를 하실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분 스스로 자긍심을 느끼셔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란 생각을 했습니다. 실존주의에 카뮈를 포함시켜도 될까요? 란 제 말에 그 분은 그렇다고 답하셨습니다. “유명한 가난과 질병에의 위험”, “우아한 태도와 진지함, 자기의 속사정을 겉에 나타내지 않는 특징적인 수줍음과 어느 그룹에서나 어느새 자타가 공인하는 지도자로 군림하는 ‘대장기질'의 설득력”이란 김화영 교수의 카뮈론(論)을 기억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 글을 다시 들추어 보며 어느 부분은 저와 비슷하고 어느 부분은 거리가 있고, 어느 부분은 닮고 싶고 어느 부분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게는 특별한 시간인 2016년 10월 15일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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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비탄, 환희, 고통을 알려면 니체를 읽을 필요가 있다. 그를 모르면 감동과 비탄, 환희, 고통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단정적인 만큼 오만하기에 그렇게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런데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 번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It's better to burn out than to fade away.")는 유서를 쓰고 자살(1994년)했다는 사실 앞에서는 니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니체에 꽂힌 사람들은 아마도 그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에서부터 눈을 뗄 수 없을(can't take my eyes off you)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긴장과 상호 도움이라는 묘한 만남으로 비극(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삶의 고통과 허무를 이기게 하는)이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비극이 몰락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는 몰락을 이끈 주범(主犯)으로 “마신(魔神)” 소크라테스를 든다. 니체는 소크라테스의 각본에 따라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가 사람들이 부르는 합창을 대체해 소크라테스의 변론술을 상연한 이래 다른 장르들과는 달리 비극은 단번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죽었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서 커트 코베인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니체를 읽었다. 허무주의에 빠져.


물론 니체의 허무주의와 커트 코베인의 허무주의는 맥락이 다르다. 어떻든 커트 코베인의 유서(“천천히 사라지는 것보다 한 번에 불타 없어지는 것이 낫다.”)에서 니체가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비극의 죽음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커트 코베인이 ‘비극의 탄생‘을 통해 니체가 폭로한 ’단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비극‘ 부분을 읽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읽었으리라고 본다. 니체 매니아라면 니체의 첫 저서이고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 읽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커트 코베인은 정말 비극처럼 단번에 사라진 것을 실천한 셈이 되는 것일까?(답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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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지 않지만 내 서울 나들이의 역사도 몇 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90년대 중반 저가이면서 양질의 레퍼토리를 자랑하는 Naxos 레이블의 클래식 음반을 사기 위해 한동안 압구정의 신나라 레코드를 드나들었다. 당시는 프로그레시브 록도 함께 좋아하던 때여서 홍대 앞의 Mythos에도 자주 갔었다. 그 이후 2001년 논현동의 기수련 센터와 2002년 양재동의 초기 불교 명상 센터를 드나들던 시기를 거쳤다. 창덕궁 인근에 화실을 가지고 있던 도반(道伴) 덕에 궁궐문화와 불교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내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들 중 하나가 서점 순례이다. 어느 해에는 200번도 더 넘게 서울의 서점들을 드나들기도 했다. 2002년 폐업한 종로서적이 한창 영업중이던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내 서점 순례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어느덧 3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올해 들어서는 문화, 역사, 글쓰기, 편집 등의 강의를 듣기 위해 종로(정독도서관, 궁궐문화원), 마포, 구로, 양재 등을 자주(또는 가끔) 방문했으니 특별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해도 좋을 만하다.

 


역사와 문화, 미술 등에 대한 관심의 일환으로 궁궐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자주 찾은 것도 올해 자랑할 만한 개인사이다. 어제는 고궁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어둑해진 안국동 거리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정독 도서관에서 강의를 듣고 집에 오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서울에 가면 걸으면서 책을 읽게 된다. 그 자유가 참 좋다. 이제 서울을 찾게 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것이 골목길 순방이다.

 

 

한양 도성이나 정동길 순례도 있고 경리단길, 가로수길 등도 좋지만 무엇보다 골목길이 마음을 끄는 것은 왜일까? 앞으로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궁궐과 박물관, 미술관 등을 찾아야 할 것이고,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음악회에 많이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부암아트홀 같은 소극장을 자주 찾고 싶다. “정오가 되면 성공회쪽 담을 넘어 종소리가 들린다”처럼 김용범 시인의 서정적인 시를 음미하며 조용히 걸어야 할 곳들이 이렇게나 많아 행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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