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새내에 가서 모셔온 여성학 연구자 김미선 님의 2012년 출간 책 명동 아가씨’. 일부를 읽었는데 벌써 이 분의 후속작이 있는지 검색을 한다. 아직 없다. 아쉽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함께했다 할지라도 누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해석되고 쓰이느냐에 따라 그 공간의 역사는 달라진다는 말을 하는 책.

 

어머니께 딸이, 딸에게 엄마가란 조주연 교수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만큼 신선함을 느꼈다. 차이가 있다면 김미선 님의 글은 책 전체와 관련이 있는, 공간에 관한 공적 담론이고 조주연 교수의 글은 책 전체와 특별히 관계가 있지는 않은, 사적인 글이라는 점이다. 김미선 님은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인 신여성들의 삶과 행보에 매혹되었으며,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그들의 비극적인 죽음에 안타까워했다는 말을 한다.

 

신여성, 하면 나혜석, 김명순, 김일엽 정도를 아는 나에게는 이름 없는 신여성들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온 셈이다. ‘명동 아가씨책 날개에 이런 글이 있다. 2012년 가을부터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역사학과 박사 과정에 진학하여 한국 여성사와 동아시아사를 공부할 예정이라는. 그의 신간 출간 소식이 들려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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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연천 지질해설사 이 선생님으로부터 어떤 임금을 좋아하느냐, 효종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등의 질문을 받았다. 나는 중종과 광해군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답했고 효종은 사도세자처럼 무인(武人) 기질의 왕이었다는 말 정도를 했다.

 

조선은 마제석기(벼락도끼)를 기()가 굳어 생긴 것으로 인식했다. 최근 알게 된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이익의 성호사설등은 중국의 것을 그대로 받아적은 것이어서 과학적 측면에서 오류가 많다. 벼락도끼를 기가 굳어 생긴 것으로 본 것은 주자(朱子) 등의 송나라 학자들로부터 비롯된 생각이다.

 

오늘 지구과학 공부를 하다가 지구인도 모르는 지구란 책을 알게 되었다. 이 책 가운데 명종대왕을 반성케 한 지진이란 챕터는 꼭 읽어보고 싶게 하는 글이다. 명종의 아버지 중종의 경우 지진 공포에도 한밤중까지 회의를 진행했다. 16세기 전반에 최다 지진 발생 기록이 남았다. 1년에 8.7건이었다고 한다.

 

중종 재위 기간은 1506 1544, 인종 재위 기간은 1544 1545, 명종 재위 기간은 1545 1567년이다. 광해군(재위; 1608 - 1623)의 경우 궁궐 신축 공사 중 벼락을 맞고 사람이 죽었는데도 그 장소에서 드러난 벼락도끼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어떻든 어제 이야기한 중종과 광해군과 관련된 지구과학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있어 다행이다.

 

고고학자 이선복 교수는 우리는 예부터 인쇄술이나 측우기 등등의 높은 기술적 발전이 있었음에도 그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과학 발달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말을 했다. 조셉 니덤의 견해가 생각난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제기된 바에 따르면 중국이 근대 산업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과학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이유는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적 관료제에 있다.

 

사물이 아닌 관계를 다루며 함수로 표현할 수 있는 양적 관계를 다루는 과학적 사고의 미비를 들 수 있겠다. 내가 공부한 것이 과학이라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지식을 기계적으로 암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된다. 물론 이해에 바탕한 암기도 많이 지향했다. 그럼에도 비판적이고 객관적인 사고는 부족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반성 거리들은 이렇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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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주의의 세례를 넘치도록 받은 지식인들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 지성들과 비교하기 부끄럽지만 나는 인문주의의 물 몇 방울에 노출된 물 부족인(不足人)이다. 더구나 체계적이지 않은 독서로 양으로 상징되는 중요한 일상을 잃어버린 독서망양(讀書亡羊)이란 말이 맞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내가 책을 충분히 읽은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겉도는 이야기를 경계하고 단편적 이야기를 지양(止揚)하고 자연과학으로부터 소스를 얻어 인문적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렇게 애쓰는 것 이상으로 인간적 품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계속 공부와 인성이 함께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단정하고 예의 바른 표현이 바람직한 인성을 확증하지 않지만 거친 표현을 하는 사람이 바람직한 인성을 지니기는 어렵다. 단정과 예의는 신중함으로부터 싹트고 배려의 형태로 표출된다. 어제 인사로부터 논쟁을 걸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논쟁을 하려한 것이 아니라 과학 이야기를 한 그 인사에게 그가 한 이야기와 관련 있는 사실을 그가 아는가 물었을 뿐이다. 그것을 과시욕에 기반한 논쟁심의 표출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평소에 내가 어제처럼 그로 하여금 논쟁 운운하는 말을 할 여지를 주었는지 돌아보고 있다.

 

어제 그는 그가 전한 메시지와 무관한 과학 이야기를 퀴즈 형태로 꽤 여러 개 제시했고 내가 "제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란 말을 했음에도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인지 듣지 않고 논쟁하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다.

 

어제 그는 내가 지구 지름을12, 800km라 하자 12, 760km라 정정했다. 물론 그가 제시한 수치가 정확하겠지만 그런 정확함은 엄밀한 논문 작성이 필요한 상황에서나 필요할 뿐이다. 내가 말하려 한 것은 태양 지름은 지구 지름의 대략 100(1,280,000km)로 태양 중심에서 헬륨 원자핵과 함께 생성된 빛 입자 즉 광자(光子)가 표면까지의 거리인 640,000km를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진공 상태가 아니기에 2초 정도가 아닌 무려 100만년이라는 사실이다.

 

태양 내부에서 광자가 1cm를 움직일 때마다 원자 또는 전자와 부딪히기에 100만년이라는 놀라운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 또는 객관적 수치 이상으로 그런 것들에 기반한 사실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위상을 차지하는지를 스토리텔링 형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엄밀한 수치를 논해야 할 때도 있지만 어제 이야기에서는 엄밀함이 필요 없었다. 100만년 이야기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원자나 전자의 방해를 받는 태양 내부의 광자처럼 진공이 아닌 지구라는 무대에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얽히고 설킨 관계가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의 지질(地質) 이야기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삶이란 퀴즈처럼 단편적 사실을 전하거나 맞히는 무대가 아님을 그가 인식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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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 - 수원화성 걸어본다 17
김남일 지음 / 난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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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수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60이 넘어서야 마침내 온전한 화성(華城) 일주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김남일 작가의 책이다. 난다 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 17번째 책이다.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배수아의 알타이, 한은형의 베를린 등이 관심을 끄는 가운데 김남일 작가의 책을 고른 것은 수원 화성(華城)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책은 김남일 작가의 문학적 표현과 수원 화성과 정조(正租)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졌다. 화성은 원래 수원성으로 불리던 곳이다. 화성에는 치()가 있다. 꿩처럼 몸을 숨긴 채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성곽 바깥에 철(: 볼록할 철)자 형태로 약간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을 가리킨다.

 

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로 바꾸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어떻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의문의 일패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정감이 생겨야 알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느낀 만큼 알려 하고 그런 만큼 보인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곽의 낮은 담을 여장(女墻) 또는 타(), 우리 말로는 성가퀴라 한다. 성가퀴에 세 개의 총 구멍이 있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 양 옆 구멍은 원총안이다. 포루(砲樓)는 포를 쏘는 누각이다. 저자는 만일 카프카가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다른 작품은 몰라도 결코 ()’ 만큼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땅 어디에도 저 멀리 고딕체 글씨처럼 우뚝 솟은 성을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조선의 성은 높이가 아니라 둘레와 길이로 권위를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의 성은 우뚝 솟은 성채가 아니라 상실을 또 다른 기의로 갖는다며 인조(仁祖) 이야기를 한다. 곤룡포 대신 하급관리의 남색 옷을 걸치고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선 인조는 그들이 정한 법에 따라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만은 면할 수 있었다.”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이란 함벽여츤(銜璧如櫬)을 말한다. 손을 뒤로 묶이고 입에 구슬을 물고 관을 뒤집어 쓰는 치욕이다.

 

젊은 저자에게 성을 오르는 일은 폐허를 밟는 일이었다. 암문(暗門)은 벽돌로 쌓은 점이 특징이다. 포루(鋪樓)는 성가퀴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지붕을 덮은 부분이다. 치성(雉城)에 있는 군사를 보호할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포루(砲壘)와 동음이의어다. 1795년 정조는 야간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야간 훈련시에는 매화(埋火) 즉 땅에 묻은 화약이 밤하늘에 치솟았다가 마치 매화꽃이 일시에 떨어지듯 떨어졌다.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 북문은 장안문, 동문은 창용문, 서문은 화서문이다. 화홍문은 북쪽 수문이다. 화령전(華寧殿)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연무대는 병사들의 훈련장이다.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를 서장대로 부르고 연무대를 동장대라 부른다. 정조가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만든 국영 농장인 둔전을 대유평 또는 대유둔이라 한다.

 

수원 사람들은 팔달산을 팔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29 페이지) 그런 감각으로 저자는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 서문이라 말한다. 공심돈은 안이 비어 있는 돈()이다. 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다. 화성에는 공심돈이 셋이지만 서북공심돈을 대표로 꼽아 그저 공심돈이라는 대명사로 고유명사를 대신한다. 1797년 정월 정조는 공심돈 앞에서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건물이라. 마음껏 구경하라.”는 말을 했다.

 

동북각루로 지어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예전 수원에서는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졌다고 말했다.(89 페이지) 정조는 북문인 장안문을 설계도와 다르게 200미터나 옮겨 쌓도록 했다. 화산(華山)에 있다가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할 때 이주해온 200여명의 백성들의 집을 피해 짓도록 한 것인데 이로 인해 화성은 성곽이 반듯하게 원호를 그리지 않고 군데군데 삐뚤빼뚤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반사(頒賜)는 임금이 물건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흰떡, 수육, 부채, 척서단(滌暑丹), 솜옷, 털모자 등을 나누어 주었다.(: 씻을 척) 당시에 귀마개, 털옷 등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정조는 즉위년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왕의 침전이자 서재인 존현각(尊賢閣)에 난입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겪었다. 노론 영수 홍상범(洪相範)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홍상범에게 매수된 호위군관, 도성 무사들, 심지어 액정서(掖庭署) 소속들까지 가담했다.

 

후일 정조가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이런 배경에 따른 것이다. 홍상범은 책형(磔刑)으로 죽었다. 동북 공심돈은 서북공심돈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지만 나선형 계단으로 인해 소라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자는 사회 과목 성적도 제법 좋은 편이었지만 행궁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몰랐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화성행궁을 둘러보는 일은 기억과 기록 사이를 걷는 줄타기와 같다. 이때 기댈 수 있는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되었고, 고종(1899)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함에 따라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을묘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은 해이다. 사도(思悼)는 영조가 내린 시호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것은 1789년의 일이다. 정조는 현륭원 앞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애통해했다.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할 정도였다.

 

나혜석의 출생지는 화령전 인근 어디쯤이다. 저자는 나혜석의 단편 소설인 경희를 읽고 시대와 맞섰던 그녀의 당당한 불화에 감탄했다.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독특한 책이다. 작가 개인의 기억과 문학적 표현들과 화성과 정조에 대한 사실(史實)들이 어우러진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 내서 책에 언급된 이탈로 칼비노, 나혜석, 발터 벤야민 등에 대한 책을 읽으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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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공부할 시간 - 인문학이 제안하는 일곱 가지 삶의 길
김선희 지음 / 풀빛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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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의 나를 공부할 시간은 사마천과 괴테, 디드로와 이규경, 브루노와 최제우,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와 정약용,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 페트라르카와 주희를 각기 다른 주제로 묶어 설명한 책이다. 사마천과 괴테는 여행하는 삶, 스피노자와 정약용은 유배당한 삶,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는 공감하는 삶 등이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프레너미 시리즈가 있다.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학문을 발달시켜온 둘 이상의 사상가를 비교, 대조하여 이해를 극대화시키는 시리즈라고 한다. 니체 vs 바그너, 하이데거 vs 레비나스, 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루터 vs 칼뱅 등의 책이 나와 있다. 궁금한 것은 정약용 vs 듀이란 책이다. 시대적으로 겹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묶였기 때문이다. 공명하는 부분과 대조적인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나를 공부할 시간을 사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동양철학 스케치 2‘를 통해 저자의 역량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를 공부할 시간에서 큰 관심을 부르는 사람들은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 주희(朱熹) 등이다. 특히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당한 스피노자와 오랜 유배 생활을 한 정약용이 한데 묶여 설명된 것은 흥미마저 부른다.

 

물론 정약용과 주희를 한데 묶을 수도 있고 괴테와 성호 이익을 한데 묶을 수도 있다. 정약용과 주희는 신유학에 대한 입장 차이를 주제로, 괴테와 성호 이익은 박물지적 관심으로. 그러면 전자는 대립적인 면이, 후자는 공통점이 요점일 것이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 여행으로 큰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관측과 의례(儀禮)를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이었다. 그러나 국가 제사인 봉선제에서 배제된 뒤 화병을 얻어 통한 속에서 아들에게 역사서 집필의 과제를 안기고 눈을 감았다.

 

사마천이 행한 여행이 사마천의 사기 집필에 큰 역할을 했다. 아예 저자는 사마천이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사기를 쓸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의 말을 한다. 사마천에게 여행을 권한 사람은 아버지 사마담이었다. ‘사기가운데 백이, 숙제 이야기도 있다. 그들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것은 제후국인 주나라가 천자국인 은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사기의 특징은 인물과 사건 중심의 서술을 했다는 데 있다. 편년체가 아닌 기전체다. 편년체는 연도 중심의 서술 즉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란 위상을 갖는다. 괴테는 평생 수많은 곳을 여행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등산을 멈추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괴테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든다. 괴테는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했다.

 

괴테의 여행이 남긴 가장 본질적인 흔적은 아마도 그의 주저 파우스트에 담겨 있을 것이다.”(39 페이지) 앎을 좇는 삶의 디드로와 이규경 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나 가치 체계에 대한 재평가와 재배치란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비판 및 저항으로 연결된다.

 

이규경은 간서치(看書癡) 이덕무의 손자다. 이규경의 호는 오주(五洲). 그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백과전서다. 오주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과 그 지식을 길어올릴 수 있는 여행에 대한 동경을 담은 말이다. 연문(衍文)은 군더더기 문장이란 의미다. 장전(長箋)은 길게 쓴 주석이란 의미다. 산고(散稿)는 정리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글이라는 의미다.

 

브루노와 최제우(1824 1864)는 꿈에 이끌린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두 사람 다 비범한 꿈을 꾸고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이다. 최제우가 산 시대는 순조(재위: 1800 1834), 헌종(재위: 1834 1849), 철종(재위: 1849 1863)의 시대였다.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의 수렴청정,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 순원왕후의 부친 김조순 등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린 시대였다.

 

백성을 가혹하게 쥐어짠 세도정치로 파탄난 민생이 란()을 초래한 시대였다.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변혁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혁명가란 이름은 실천의 결과에 관계 없이 부여되는 이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 1919)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혁명가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초 독일에서 혁명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지만 거의 모든 국면에서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소수자였다. 마르크스 이후의 최고의 이론가, 탁월한 연설가, 진정한 혁명가 로자는 독일 민병대원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다. 유대인이었고 차별받는 여성이었고 어려서 앓은 좌골 관절염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던 장애인이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일종의 종교적 중립지에 가까웠다. 유럽 곳곳에서 박해받던 종교 분파들이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보장한 신생 독립(스페인으로부터)국가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스피노자는 예수회 출신의 반 덴 엔덴을 만나 장래 희망을 랍비에서 철학자로 바꾸었다. 가업을 잇거나 랍비가 되는 것 외에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던 스물네 살의 스피노자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신이 성장한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뒤 그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렌즈 깎는 일을 하며 독립적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스피노자가 렌즈만 연마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꾸준히 교제했다. 헨리 올덴부르크 같은 친구와 계속한 서신 교환은 학술적 토론장의 역할을 대신했다.

 

당시 스피노자를 충분히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스피노자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과 전통 신관을 전면 부장한 그의 행보 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이 세계가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원화된 것이 아니라 일원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 자연은 목적이나 의도 없이 무한히 생성 변화하는 이 세계 자체다. 현실 세계 외에 초월적 세계가 없다는 의미다. 이 세계는 신이라는 실체(다른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존재와 그 특성이 그것 자체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것)가 변용된 모습으로 이를 양태라 한다. 그에게 세계 자체가 신이다. 스피노자는 인격적이며 오로지 사유로만 존재하는 신 관념을 버리고 자연의 물질성까지 신의 속성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신의 양태며 따라서 모든 것이 신 안에 들어 있다. 신은 자연의 원인이지만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다. 신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말을 원인과 결과가 함께 하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로 비유해 설명할 수 있다. 바다가 파도의 원인이지만 바다는 파도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연 역시 결과로 존재하지만 원인인 신 안에 존재한다.

 

이 자연 세계는 인격적 신의 초월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법칙으로 질서잡힌 합리적인 세계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다. 그런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자기를 지키려 하며 자기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의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코나투스가 정신에 관계될 때 의지라 하고 정신과 육체 모두에 관계될 때는 충동이라 한다.

 

충동을 의식하면 욕망이 된다. 충동과 욕망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이는 결국 자연의 필요성에 따른 행위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해서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 판단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유배되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정약용을 스피노자와 유사한 사람으로 본다. 그가 산 시대는 정조, 순조, 헌종 시대였다. 정조와의 좋은 시절이 끝나고 순조, 헌종 시대에 그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서른 아홉에 유배되기 직전까지 그의 최대 후원자였다. 정약용을 이해하려면 정조만큼이나 광암 이벽(정약용 형수의 남동생)을 알아야 한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제자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는가 여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그에게 서학은 현대적 개념의 종교였다기보다 새로운 학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배 기간 내내 정약용은 가난과 병을 짊어져야 했다. 몸이 갇힌 만큼 정약용은 강렬한 의지로 자신의 학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그토록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유배 기간이 길어서만은 아니다.

 

강진에는 어머니 종친인 해남 윤씨들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죄인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외면했지만 결국 그를 후원했고 정약용은 해남 윤씨 가문의 장서들을 연구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남 윤씨 자제들이 제자로 들어와 정약용의 저술을 돕기도 했다. 정약용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은 제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다. 정약용은 제자들이 필사하고 분류하고 정리해 놓은 전거들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저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그 후 1836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정약용은 언젠가 자신의 학문이 세상에 쓰일 날을 기대하며 저술을 정리했다. 이 당시 그가 선호했던 호는 후대를 기약한다는 의미의 사암(俟菴)이었다.(: 기다릴 사)

 

그의 사상 전체가 시대와 불화했다거나 시대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약용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의 지배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다. 그가 젊어서 접한 천주교는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끊었지만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세계관은 정약용에게 유학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

 

]성호 이익에게 가난은 일상적인 삶의 조건이었다. 레비나스와 이익은 공감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와 주희(朱熹)는 읽고 쓰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는 거의 중독에 가까울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썼다. 주희(朱熹)도 페트라르카처럼 평생 읽고 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학자 중 하나다.

 

주희가 태어났을 때 송나라는 금나라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53세의 주희는 태주의 지사였던 당중우라는 인물을 집요하게 탄핵하다 직위도 잃고 사상적으로도 탄압받았다. 주희는 말년에 학문적 활동을 금지당하는 위학(僞學)의 금()을 겪기도 했다. 이런 불운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주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읽고 쓰는 삶에 헌신했다. 주희는 성리학의 집대성자다. 주희가 당한 위학지금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주희가 받은 모든 탄압과 불명예는 주희 사후에 대부분 풀렸다.

 

모든 삶의 가능성을 한쪽으로 기울여,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읽고 쓰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하고 반복적인, 그토록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성취를 보장할 수 없는, 노력에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무엇보다 평생토록 끝나지 않을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하는 것일까... 읽고 쓰는 삶을 택한 이들은 상당한 이상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어쩌면 현시의 자기보다 더 큰 자기를 상상하는 몽상가들일지도 모른다”(246, 247 페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은 부박하고 과시적인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고, 당장 생활을 바꿀 현실적인 힘과 영향력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페트라르카도 주희도 묵묵하게 긴 호흡으로, 담담하게 먼 시각으로 자기와 세계에 대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얻을 효과가 보다 일찍,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엄밀히 말해 읽고 쓰는 삶이 아니라 성공하는 삶을 택한 것에 가깝다.(24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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