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원의 책은 이번에 구입한 현상과 언어로 두 권이 되었다. 첫 책은 존재와 현상이다. 전자는 오규원 분석서이고 후자는 김춘수 분석서다. ‘현상과 언어는 안용성 목사의 현상학과 서사공간을 읽고 서평을 쓴 것이 고무적이라고 느껴서 구입한 책인데 아직 별 단서를 얻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은유적 시 쓰기와 환유적 시 쓰기의 구별을 통해 의미 있는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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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다를 뜻하는 세 한자인 도(), (), ()은 모두 나루의 의미도 갖는다법도모양도구 외에 건너다도 뜻하는 도()는 나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율곡수목원에서 구도장원(九度壯元)길을 따라 도열(堵列)해 있는 황금 회화나무들을 보았다이 길은 율곡 이이 선생이 이룬 아홉 번의 장원에서 이름을 가져온 길이고회화나무는 학자(學者)/ 고위 관직을 상징하는 나무다.


율곡 선생이 아홉 번 과거에 장원을 했다고 실패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이는 퇴계가 율곡에게 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다편지글에서 퇴계는 그대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그대를 크게 성취시키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아무쪼록 힘을 쓰시게나."라 썼다. 실패의 사연보다 궁금한 것은 선생이 왜 그렇게 여러 번 과거를 치렀는가이다


과거에 한두 번 응시한 뒤 곧 포기한 남명 조식원종 추숭 관계로 당한 정거(停擧처분이 풀린 뒤에도 과거에 도전하지 않은 미수 허목과거에 실패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전념한 연암 박지원 등이 생각난다율곡이 이룬 아홉 번 장원의 성과를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시험을 거치지 않은 학예사 출신의 공무원이 국가 차원을 넘는 성과를 내는 것을 보며 조선 시대의 과거가 아닌 천거(薦擧같은 제도를 생각한다


아홉 번 장원했다고 해서 한 번 장원을 한 사람보다 국가에 아홉 배 더 많은 기여나 공헌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물론 천거(薦擧)는 취지와 다르게 과거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그러니 어떻게 보면 공무원 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 채용되는 별정직 공무원 제도가 있는 요즘이야말로 진정한 천거제도가 시행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종 전문가 박현모 교수는 점수를 따기 위해 하는 공부가 가장 낮은 단계의 공부라는 말을 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했다.(2025년 6월 25일 연천 강의 역사에서 배우는 리더십‘) 공부한 것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하는 공부가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면 공부한 것이 자기에게 체득되기를 바라고 하는 공부가 위기지학이다


다만 공무원 시험 공부가 위인지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시험에서 점수를 따기 위해 하는 공부도 필요하다. 그러나 큰 성과를 낸 특별 채용 공무원까지 시험(점수)의 논리로 보는 것은 문제다. (정확한 과목을 모르지만공무원들이 시험에서 치르는 국어수학영어 같은 것들이 군정(郡政또는 시정(市政)에 직접 필요한 것도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두뇌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나마 창의성이나 논리성 등과 관련된 두뇌도 아니다두뇌라면 학교에서 석박사 등을 딴 사람도 이미 입증되지 않는가오히려 고고학지질학기타 학문 등에서 학위를 딴 사람이 시험을 치르지 않고 일정 과정을 거쳐 공무원이 되어 하는 업무가 학교에서 배운 과목과 바로 연결되고 관련이 있다공무원 시험 공부 (준비)는 실습이란 것이 없고 오직 외우는 것으로 채워진다그러나 특별 채용된 공무원들은 이론 공부뿐 아니라 답사나 실습도 겪는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피난좌천(左遷), 유람연마(練磨등의 이유로 이곳저곳을 유전(流傳)하다가 연천에서 삶의 대미를 장식해 연천 인물로 불렸던 미수 허목은 과거와 무관하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다아홉 번 장원을 한 율곡은 판서(이조병조)에까지 올랐을뿐이다.(율곡과 미수는 59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율곡; 1536년생미수; 1595년생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건너다를 뜻하는 세 한자인 도(), (), ()은 모두 나루의 의미도 갖는다법도모양도구 외에 건너다도 뜻하는 도()는 나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율곡수목원에서 구도장원(九度壯元)길을 따라 도열(堵列)해 있는 황금 회화나무들을 보았다이 길은 율곡 이이 선생이 이룬 아홉 번의 장원에서 이름을 가져온 길이고회화나무는 학자(學者)/ 고위 관직을 상징하는 나무다.


율곡 선생이 아홉 번 과거에 장원을 했다고 실패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이는 퇴계가 율곡에게 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바다편지글에서 퇴계는 그대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그대를 크게 성취시키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아무쪼록 힘을 쓰시게나."라 썼다. 실패의 사연보다 궁금한 것은 선생이 왜 그렇게 여러 번 과거를 치렀는가이다


과거에 한두 번 응시한 뒤 곧 포기한 남명 조식원종 추숭 관계로 당한 정거(停擧처분이 풀린 뒤에도 과거에 도전하지 않은 미수 허목과거에 실패한 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과 저술에 전념한 연암 박지원 등이 생각난다율곡이 이룬 아홉 번 장원의 성과를 가볍게 여기고 싶지는 않다시험을 거치지 않은 학예사 출신의 공무원이 국가 차원을 넘는 성과를 내는 것을 보며 조선 시대의 과거가 아닌 천거(薦擧같은 제도를 생각한다


아홉 번 장원했다고 해서 한 번 장원을 한 사람보다 국가에 아홉 배 더 많은 기여나 공헌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물론 천거(薦擧)는 취지와 다르게 과거를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그러니 어떻게 보면 공무원 시험을 거치지 않고 특별 채용되는 별정직 공무원 제도가 있는 요즘이야말로 진정한 천거제도가 시행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종 전문가 박현모 교수는 점수를 따기 위해 하는 공부가 가장 낮은 단계의 공부라는 말을 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했다.(2025년 6월 25일 연천 강의 역사에서 배우는 리더십‘) 공부한 것이 남에게 알려지기를 바라고 하는 공부가 위인지학(爲人之學)이라면 공부한 것이 자기에게 체득되기를 바라고 하는 공부가 위기지학이다


다만 공무원 시험 공부가 위인지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시험에서 점수를 따기 위해 하는 공부도 필요하다. 그러나 큰 성과를 낸 특별 채용 공무원까지 시험(점수)의 논리로 보는 것은 문제다. (정확한 과목을 모르지만공무원들이 시험에서 치르는 국어수학영어 같은 것들이 군정(郡政또는 시정(市政)에 직접 필요한 것도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두뇌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그나마 창의성이나 논리성 등과 관련된 두뇌도 아니다두뇌라면 학교에서 석박사 등을 딴 사람도 이미 입증되지 않는가오히려 고고학지질학기타 학문 등에서 학위를 딴 사람이 시험을 치르지 않고 일정 과정을 거쳐 공무원이 되어 하는 업무가 학교에서 배운 과목과 바로 연결되고 관련이 있다공무원 시험 공부 (준비)는 실습이란 것이 없고 오직 외우는 것으로 채워진다그러나 특별 채용된 공무원들은 이론 공부뿐 아니라 답사나 실습도 겪는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피난좌천(左遷), 유람연마(練磨등의 이유로 이곳저곳을 유전(流傳)하다가 연천에서 삶의 대미를 장식해 연천 인물로 불렸던 미수 허목은 과거와 무관하게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까지 지냈다아홉 번 장원을 한 율곡은 판서(이조병조)에까지 올랐을뿐이다.(율곡과 미수는 59년의 나이 차이가 난다율곡; 1536년생미수; 1595년생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배승호의 어쩐지 나만 알 것 같은 역사에 흥미로운 글이 있다. ’서인이 짓고 남인이 쓴 취선암이란 글이다. “허목이 오대산 소금강(小金剛)에 간 적이 있다그리고 율곡 이이가 취선암(醉仙巖)이란 글을 써새겼다서인 종주인 이이가 이름을 짓고 남인 영수였던 허목이 글씨를 썼다둘의 세대가 달라서 만난 적은 없지만 남인과 서인은 앙숙이었는데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아무도 모르는 화해(?)의 장면이 남아 있는 것이다....이이가 짓고 허목이 쓴 바위 글씨를 감상하고 바로 되돌아 1미터 앞철제 펜스를 넘어가면 넓적한 바위에 글씨가 또 있다후학지기대(後學知己臺), 후학이 자신을 알게 될 곳이라는 뜻이다이 또한 허목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위기지학의 기()와 후학지기의 기()가 같다는 점이 눈에 띈다


* 앞서 말한 구도장원길과 어울리는 회화나무가 생각나게 한 것이 있다관청에는 장수와 정승이 도열해 있고 대궐 길가에는 삼정승을 의미하는 삼공(三公)과 여러 판서 등을 의미하는 구경(九卿)이 늘어서 있다는 의미의 천자문 중 두 구절인 부라장상 노협괴경(府羅將相 路挾槐卿)’이란 말이다.(‘는 회화나무를 의미하고나아가 삼공 벼슬을 의미한다.)


*서울 중구 정동의 캐나다 대사관을 지은 건축회사 사이트에서 대사관 앞의 회화나무를 가리켜 scholar tree(hakjasu)라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위기지학의 기()와 후학지기의 기()가 같다는 점이 눈에 띈다


앞서 말한 구도장원길과 어울리는 회화나무가 생각나게 한 것이 있다관청에는 장수와 정승이 도열해 있고 대궐 길가에는 삼정승을 의미하는 삼공(三公)과 여러 판서 등을 의미하는 구경(九卿)이 늘어서 있다는 의미의 천자문 중 두 구절인 부라장상 노협괴경(府羅將相 路挾槐卿)’이란 말이다.(‘는 회화나무를 의미하고나아가 삼공 벼슬을 의미한다.)


*서울 중구 정동의 캐나다 대사관을 지은 건축회사 사이트에서 대사관 앞의 회화나무를 가리켜 scholar tree(hakjasu)라 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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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서사 공간 - 성서의 이야기 공간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 기독교 인문 시리즈 8
안용성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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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과 서사공간’은 강남구 개포로의 그루터기 교회 안용성 목사님의 책이다. 제목이 말하는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적 또는 사회적 관계를 통해 구성 또는 생산되는 공간이다. 저자는 지도 교수인 매리 앤 톨버트 교수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제목에도 나오는 현상학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공간의 경험적, 관계적 성격을 철학적 사유의 주제로 삼아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하는 학문이다. 저자는 현상학의 관점을 빌어 서사 공간을 해석하는 시도를 “모험”이라 말한다. 책의 목표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서사(敍事) 이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 등 난해한 책들을 원서까지 비교하는 수고를 거쳤고 일반 책들에 비해 수십 배의 시간을 들여 여러 차례 정독했다. 


저자는 지리학의 공간 이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의 배경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고 말한다. 저자는 국내에 바슐라르, 노베르그-슐츠, 투안, 렐프, 르페브르 같은 학자들을 소개하는 글들이 현상학에 관한 충분한 이해를 종종 갖추고 있지 못해 현상학적인 내용들을 가리거나 잘못 소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한다. 현상학에서 중시하는 생활세계란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눈앞에 주어져 있어서 직관적으로 경험되는 세계를 말한다. 이는 객관적인 사유의 이면에 숨어 있는 근원적이면서 아직 이성적 언어로 서술되지 않은 삶의 영역을 의미한다. 저자는 후설의 모든 것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데거와 메를로 퐁티의 공간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초보적 정보를 제공한다고 말한다. 


후설은 세계 자체를 설명하기 전에 의식을 해명한 후 세계가 의식에 어떻게 주어지는지를 탐구했다. 의식을 다루는 것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이고, 세계를 다루는 것이 생활세계 현상학이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외적 대상들에 대한 체험은 충전적(온전히 주어짐, 전면적으로 파악됨)이지도 않고 필증적(의심의 여지 없음)이지도 않다. 후설은 일부만이 지각되는 것을 가리켜 대상이 음영(陰影)을 통해 주어진다고 말한다. 후설은 어떤 대상이 우리 이성의 반성 작업에 의해 가공되기 이전의 상태 즉 충전적이고 필증적인 상태에서 그 대상을 우리에게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직관이 참된 인식의 궁극적 권리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후설에 의하면 의식 자체로 돌아가는 과정을 안내하는 절차가 환원이다. 환원을 방해하는 선입견이 가동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판단중지다. 현상학에 의하면 인간의 의식은 백지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전에 어떤 대상에 대해 갖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적합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판단중지는 파괴가 아니라 유보(留保)다. 후설이 정한 판단중지의 일차적 대상은 그 시대 개별과학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자연주의 또는 과학주의적 태도였다. 그것은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소박한 믿음이다. 직관은 추리나 반성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계적 사고의 과정을 통한 파악이 아니라 대상을 단번에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직관은 개별적 직관과 본질 직관으로 나뉜다. 개별적 대상에 대한 경험이 개별적 직관이고, 보편자로서의 본질에 대한 경험이 본질 직관이다. 판단중지와 환원, 본질직관이라는 현상학적 절차를 통해 해명되는 의식의 본질 구조는 지향성이다. 대상이 없는 의식은 없으며 의식 작용이 없는 대상도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대상은 인식된 대상이다. 우리의 지각은 사물 자체를 향해 있는 것이지 우리와 대상 사이에 놓여 있는 표상을 매개로 하여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구성이란 노에시스(파악작용)가 질료에 혼을 불어넣어(의미를 부여하여) 노에마(파악된 대상)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현상학이 말하는 현상이란 노에시스를 가리킬 수도 있고 노에마를 가리킬 수도 있다. 


현상학에서 말하는 초월과 내재는 신학에서 말하는 초월과 내재와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 신학에서 내재란 인간의 한계 내에 있는 것이다. 초월이란 인간의 한계를 넘어 신의 차원에 들어서는 것이다. 현상학에서 내재는 우리의 의식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초월은 순수 의식이 자신을 넘어서서 대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순수의식이 지향작용을 통해 노에시스로부터 노에마로 넘어서는 것이 초월이다. 현상학은 이 의식의 초월론적 기능을 해명하는 학문이다. 초월, 직관, 구성 등 후설 현상학의 중심 용어들은 칸트로부터 연원했다. 현상학이라는 용어도 칸트가 먼저 사용했다. 


칸트에게서 무형의 감각재료들을 하나의 통일된 대상으로 구성해내는 것이 시간과 공간과 같은 감성의 형식들, 그리고 12가지 범주와 같은 오성(悟性)의 형식들이다. 후설은 칸트와 달리 우리의 인식 대상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된 대상으로 주어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의식작용은 감각 작용에 의해 주어진 무형의 질료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하나의 통일체로 구성해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통일체로 주어지는 대상을 직관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마주 대할 때 감각을 통해 주어지는 것은 물(物) 자체(自體)가 아니라 무형의 질료(質料)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칸트의 구성(構成)은 감성에 주어진 것들을 오성의 선험적 사유 형식인 범주를 통해 구성하는 것인데 비해 후설에게서는 인식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까지도 선험적이다. 


후설의 구성은 대상성에 의미를 부여하여 명료하게 밝히는 것 또는 대상을 표상하게 만드는 작용일 뿐이다. 칸트의 직관이 감성적 대상에 대한 감성적 직관이라면, 후설의 직관은 범주적 대상에 대한 범주적 직관이다. 후설에게서 구성이란 실제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이 사념(思念)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구성이란 지각의 지향성이 과거에 이미 주어진 의미와 현재 주어진 의미를 종합하면서 더 높은 단계의 새로운 의미를 지향하며 대상을 파악하는 작용이다. 후설은 의식을 먼저 해명한 후 이 의식에 어떻게 세계가 주어지는가, 하는 관점에서 세계에 접근했다. 즉 그는 세계가 하나의 지향적 대상으로 초월론적 주관성에 주어지고 양자가 서로 연관을 맺는 방식에 주목했다. 


발생적 현상학은 정적(靜的) 현상학과 대별되는 개념이다. 정적 현상학은 의식의 형식적이고 보편적인 구조만을 고려하고 시간성과 역사성을 배제했다. 발생적 현상학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이란 체험의 흐름으로서 그 흐름 속에 있는 다양한 체험들은 시간 의식에 의해 하나로 종합되고 통일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대상 지식은 최초의 앎의 시점이 있고 이로부터 지속적으로 내 안에 침전되어 나의 지속적인 획득물이 된다. 후설은 에피스테메에 밀려 천시되고 억견(臆見)으로 간주되던 독사(doxa)를 근원적인 영역이자 철학의 우선적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지평이란 어느 지점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가시권을 의미한다. 


인식론적으로 지평이란 한 대상이 주체에게 드러날 수 있는 가능한 의미의 한계다. 우리의 의식이 대상을 지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만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암묵적으로 그 대상의 가능한 의미의 지평을 이해하고 있다. 꽃을 예로 들면 색(色)만이 아니라 모양, 질감, 향(香) 등 여러 지평이 있고 이것들을 포괄하는 한 차원 높은 의미 연관의 총체 즉 보편적 지평이 존재한다. 후설은 이를 생활세계라 규정했다. 외부 세계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신체는 대상을 정확히 감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후설에 의하면 목표를 인식하기 위한 감각기관들의 활동, 지각 대상을 가능한 한 전면적으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운동들이 키네스테제다. 


후설에 의하면 감각은 지각되지 않고 체험된다. 후설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세계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계가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경험될 수 있음을 잘 알려준다.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일은 인간 존재를 인식하는 일과 분리될 수 없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한편으로는 후설 초기의 정적(靜的) 현상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해석학적 현상학으로 발전시켰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곧 거주하는 것이고 세계와 친숙한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세계 곁에 있는 것이라 말한다. 인간 실존은 공간과 분리될 수 없다. 데카르트가 그리는 것처럼 인간이 있고 그 밖에 공간이 있어 인간이 공간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는 인간 실존의 일부가 된다. 서사학은 서사(narrative)를 이야기(story)와 담론(discourse)로 나눈다. 이야기는 내용, 담론은 내용을 공유하는 방식이다. 화자(話者)는 narrataor라 한다. 수화자(受話者)는 narratee라 한다. 화자와 수화자의 공간은 등장 인물의 이야기 세계와 다른 층위를 이룬다. 채트먼은 담론과 이야기의 구별에 따라 서사 공간을 담론 공간과 이야기 공간으로 나눈다. 이야기 공간은 등장인물과 사건 그리고 배경으로 구성되는 이야기 속 공간이다. 담론 공간은 화자가 수화자에게 이야기를 서술하는 담론 과정에서 형성되는 이야기 밖 공간이다. 등장인물은 이야기 세계 내에 있는 것들만을 인지할 수 있고 그의 시점 역시 이야기 공간 안에 제한되어 있다. 화자는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묘사를 통해 이야기 공간의 한계를 임의로 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의 창조자인 화자는 이야기의 어디에든 동사에 존재할 수 있다. 


언어 서사물에서 영화(映畫)의 카메라 역할을 하는 것은 화자의 위치다. 화자가 어느 위치에서 누구의 시각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느냐가 담론 공간의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은 공간이라는 주제를 본격적으로 철학의 핵심 주제로 끌어올린 책이다. 수학적 공간의 특징이 등방성이라면 체험된 공간의 특징은 비등방성이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체험된 공간은 정위(定位)된 공간(oriented space)이다. 체험된 공간은 비균질적이다. 순수하게 기하학적으로 보면 왼쪽과 오른쪽은 위와 아래, 앞과 뒤처럼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우월하다 할 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두 방향에 서로 다른 가치를 둔다. 우리말이나 영어에서 오른쪽이 바른(right)쪽인 것처럼 독일어에서 오른쪽을 의미하는 recht는 구불거리는 곡선과 다른 똑바름을 의미하고 richtig(참된, 정당한)는 gerecht(공평한, 정의로운)과 통한다.(160 페이지) 


체험된 공간에는 중심이 있다. 볼노프는 이 체험된 공간의 기점은 두 눈 사이 비근이 위치한 곳이라고 말한다. 내가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볼 때 내 시선은 극좌표계의 벡터이고 사물을 바라보는 나 자신이 좌표의 기점이 된다. 이것이 현상학자들의 공간 개념이다. 우리는 공간의 중심에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팽이가 제 집을 지고 다니듯 공간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우리가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공간이 고정되어 있고 우리가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겨간다는 의미다. 그러나 공간은 그저 나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렇게 공간은 양면적이다. 나를 중심으로 공간이 형성되지만 나는 동시에 공동체의 중심에 의해 정위된 공간 속에서 움직인다. 중심은 상황에 따라 더 많아질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중심들은 복합적인 위계질서를 갖는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기존의 전기적 비평과 정신분석적 비평이 인과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시적 이미지를 작가의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가 이러한 실증주의적 관점과 다르게 문학 작품에 담긴 시적 이미지들에 감동을 느낀 독서 체험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그것이 작가의 생애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졌음을 알게 된다. 즉 우리는 작가의 생애를 전혀 모르고도 문학 작품에서 감동을 받는다. 우리가 시인이 제공하는 말의 행복, 시인의 생애의 드라마마저 뛰어넘는 그 말의 행복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괴로움들을 살아 보아야 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이미지는 과거의 어떤 원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미지의 번쩍임에 의해 먼 과거가 메아리들로 울리는 것이며 그 새로움과 악몽 속에서 시적 이미지는 그 자체의 존재와 그 자체의 힘을 가지는 것, 그래서 하나의 직접적인 존재론이라 부를 수 있다. 


따라서 상상력은 기억의 재현이 아니라 이미지를 산출해내는 능력이다. 회화로 말하자면 그것은 외부 세계의 빛의 반영이 아니라 내적인 빛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이미지와 메타포를 구별한다. 메타포란 표현하기 어려운 인상에 구체적인 형태를 주기 위해 있는 것인데 그 인상은 다른 정신적 존재에 관련된 것이다. 그와 반대로 절대적 상상력의 소산인 이미지는 그의 전 존재를 상상력으로 얻는다. 바슐라르는 메타포는 단지 조작된 이미지, 깊고 참되고 실제적인 뿌리가 없는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며 그것은 한 번 사용되고 버려질 순간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바슐라르는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영혼의 현상학이라 말한다. 일반적으로 몽상이라 하면 흔히 꿈과 혼동되는 정신적 차원을 말한다. 그러나 시적인 몽상, 스스로를 즐길 뿐 아니라 다른 영혼들에게도 시적인 즐거움을 마련해주는 그런 몽상이란 단지 꿈꾸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꿈을 꾸며 휴식할 수 있지만 시적인 몽상 속에서의 영혼은 긴장 없이 휴식한 채로 맑게 깨어 활동한다. 바슐라르는 하이데거를 이렇게 비판한다. “인간은 성급한 형이상학자들이 가르치듯 세계에 내던져지기에 앞서 집이라는 요람에 놓인다. 그리고 우리의 몽상 가운데서 집은 언제나 커다란 요람이다. 삶은 잘 시작된다. 삶은 집의 품속에 포근하게 숨겨지고 보호되어 시작된다.” 인문지리학자들은 장소(place)를 공간(space)과 구별하여 특화한다. 장소란 한 마디로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관계를 맺는 공간이다. 


누가(복음)-(사도)행전 서사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며 그 가운데서도 성전이 중심점 역할을 한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자행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다른 복음서들에서 갈릴리는 예수께 우호적인 장소, 예루살렘은 예수께 적대적인 장소로 성격화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예루살렘이 중심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을까? 누가복음의 모든 이야기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끝난다. 물론 누가복음에서도 예루살렘은 예수께 적대적인 장소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예루살렘은 많은 긍정적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라는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지만 부활과 부활 현현, 그리고 승천이 이루어진 영과의 장소이기도 하다. 


누가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만난다. 마태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난다. 사도행전에서도 예루살렘은 유대교의 중심지로서 제자들을 박해하는 장소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한 교회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지리적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예루살렘이 지리상의 한 객관적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그 정체성이 결정되는 장소 또는 사회적 공간임을 의미한다.(324 페이지) 누가-행전의 예루실렘은 이미 정립된 중심이 아니라 이제 바야흐로 중심으로 세워져 가는 과정 중의 공간이다. 예수의 공생애 첫 선포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고 예수는 종종 하나님 나라가 이미 사람들 가운데 와 있음을 강조하신다. 


누가복음이 예루살렘 공간의 재전유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사도행전은 그 중심으로부터 로마 제국의 공간을 재전유하며 세계를 다시 건설해가는 과정으로 성격화할 수 있다. 서로 적대적인 두 그룹이 동일한 장소를 동일시의 대상으로 삼을 때 거기에 대립과 갈등이 불가피하다. 그 대립과 갈등은 예루살렘 공간에 대한 예수의 재전유로 나타난다. 가장 두드러진 예는 예수의 성전 개혁이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마치 미리 계획하고 작정하신 듯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며 성전의 질서를 바로잡으신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다.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다. 


땅끝은 어디인가? 1) 스페인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선교 목표지를 스페인으로 제시했으며 바울이 로마에 가는 이유는 스페인으로 가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바울은 스페인이 땅끝이라 말하지 않으며 스페인이 최종 목적지라 말하지도 않는다. 2) 로마다. 사도행전의 이야기가 로마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은 미완성으로 끝났고 독자들에게 남은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요청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가 이야기의 끝이라 보기 어렵다. 3) 땅끝은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인종적 개념이다.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은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땅끝이 가지는 지리적 함의를 무시하기 어렵다. 우리는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대상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단순하게 땅끝을 은유로 해석하는 입장을 따를 수 없다. 4) 땅끝이란 지구상의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복음이 전 세계의 모든 곳으로 확장될 것을 보여주는 표현이며 이것은 지리적이고 인종적인 범주를 포괄한다. 


이것이 가장 설득력 있다. 이 입장은 현상학적 입장으로 뒷받침된다. 현상학적 공간에서 세계는 중심에 있는 세계축으로부터 경계선까지 이어진다. 땅끝이란 지도상의 어느 한 지점이 아니라 경계선을 가리킨다. 고대인들은 전 세계가 하나의 땅 덩어리로 되어 있고 그 세계 밖에는 바다가 있으며 바다 밖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세계관에서 땅끝이란 땅과 바다가 만나는 경계선 즉 땅의 경계들이다. 이러한 구도에 비추어 볼 때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말은 곧 온 땅에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증인이 되라는 말이다. 땅끝으로 가는 것이 단지 중심으로부터 경계들을 향해 이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중심 자체가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수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누가 - 행전은 중심을 다시 세우고 공간을 재전유하는 일뿐 아니라 이러한 중심 이동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재전유하여 중심으로 세우지만 예루살렘은 결코 절대적이거나 고정된 중심이 아니다. 이 문제가 정면으로 부각된 사건이 스데반의 순교다. 스데반은 보수적인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고발을 당하는데 그 죄목은 그가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스데반은 이동하는 중심을 성전의 본질로 제시하면서 예루살렘에 본거지를 두고 자신들을 중심으로 절대화하려 하는 유대교 권력의 근거를 해체한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를 대신해 성령이 일한다. 사도행전의 중심은 예루살렘이지만 그 중심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제자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중심이 세워진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과정에서 머무른 도시들을 하나씩 세밀히 연구해 볼 수 있고 사도 바울이 개개의 도시들에 대해 가지는 장소감을 비교해 볼 수 있다. 각 도시들이 이야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저울질해 볼 수도 있다. 이동하는 중심은 유목민의 생활 패턴에 가깝다. 유목민들에게 장소보다 영역이 더 중요하다. 길에 의해 구성되는 공간을 호돌로지라 한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장면도 로마를 배경으로 묘사된다. 이 로마 제국의 영역은 누가복음에서는 주로 배경에 머물다가 사도행전에서는 점점 더 전경으로 부각되어 나타난다. 이 점에 주목하며 그 과정을 분석해볼 수 있다. 그 영역이 하나님 나라로 변해가는 과정을 살펴볼 수도 있다. 


의도하지 않은 길의 배후에는 사도행전의 핵심 주제 중 하나인 성령의 이끄심이 있다. 성령행전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사도행전은 모든 중요한 사건의 길목마다 성령이 등장하여 친히 그 사건들을 주도한다. 흩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주제를 잘 드러내준다. 장소보다 통로와 방향이 중요한 부분이 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시작되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 사마리아에서 활동하던 빌립에게 주의 천사가 나타나 “일어나서 남쪽으로 나아가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광야 길이다.”라고 말한다. 


장소는 정해지지 않은 채 방향만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통로의 목표점은 특정 장소가 아니라 또 다른 통로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현상학적 방법론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호돌로지라는 말을 안 것이 다행이다. 도시 골목이 단순한 보행 경로가 아니라 정동적·서사적 공간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호돌로지 이론과 체화된 서사 개념을 적용하여, 보행자의 이동 경로와 감각적 경험이 공간적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을 분석한 글이 있다. 읽을 글이 많아졌다. 토폴로지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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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지과학자가 들려주는 눈덩어리 지구 이야기 - 적도까지 얼음으로 덮인 적이 있다고? 그림으로 보는 극지과학 10
    유규철.이용일 지음 / 지식노마드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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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레이크 해협은 Drake Passage라 한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르는 해협이고 남미대륙과 남극대륙 사이의 바닷길이다. 지브롤터 해협은 Strait of Gibraltar라 한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가르는 해협이다. homo sapiens는 20만년전 등장한 인류이고 homo sapiens sapiens는 5만년전에 등장한 현생인류다. 해협 이야기를 하다가 호모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천신만고 끝에 남극에 갔다 해도 전혀 쓸모 없는 땅이라는 사실에 절망했을 것이란 말을 하기 위해서다. 


    빙하기란 용어는 19세기 식물학자 카를 쉼퍼가 처음 제안했다. 일반적으로 과거 260만년전인 플라이스토세부터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시기를 빙하기라 하고 상대적으로 높았던 시기를 간빙기라 한다.(1만 2천년전부터 현재까지는 홀로세이다.) 큰 기후 변화 주기 내에 작은 기후 변화들이 요동치는 것이 순리다. 빙하기와 간빙기는 전 지구적인 평균 기온 변화와 지속 시간을 기준으로 정해진다. 지속 시간은 수백~수천년이다. 최초의 빙하기는 선캄브리아기인 24억년전으로 추정한다. 지구 탄생 후 21억년이 지나서였다. 최초로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뜻이지 역사상 최초라는 의미는 아니다. 


    기후 지시자는 물리적으로, 화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인자들이다. 빙하 시료의 얼음 기포 내에 갇힌 온실가스가 한 예이다.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 보유자에서 동일한 시기에 나타나는 비슷한 전 지구적 기후변화가 감지된다면 우리는 그 시기를 지구 역사에 나타난 빙하기나 간빙기로 지정할 수 있다. 


    지구 궤도 변화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인은 이심률, 자전축의 기울어짐, 세차운동이다. 이런 지구 궤도의 주기적 변화는 약 23000년(세차운동), 40000만년(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10만년(이심률) 주기로 지구 기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외에 장기적 관점에서 현재와 다른 과거의 기후 변화 요인은 지각 운동과 관련이 있다. 기후는 위도에 따른 태양 복사량의 차이와 대기의 해양순환에 따라 달라진다. 


    1만 2천년전부터 현재까지 홀로세 지질시대에서 소빙하기는 1350년부터 1850년 사이에 나타났다. 이때를 제외하고 나머지 시기는 따뜻했다. 소빙하기 내내 추웠던 것은 아니다. 태양에 흑점이 많으면 태양의 대류가 활발해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 복사에너지가 많아진다. 


    눈덩어리 지구 가설을 보자. 지구의 해양과 대륙 모두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고 가정하는 이론이다. 탄생 이후 초기 지구가 마그마 바다로 덮여 데워진 상태에서 서서히 식어갔다고 추측하는 상황에서 눈덩어리 지구 가설은 논란을 낳았다. 암석은 지구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기록자이다. 지질학자들이 눈덩어리 지구를 가정할 수 있었던 것은 다이아믹타이트 때문이다. 각진 암석 덩어리와 자갈부터 점토까지 불규칙하게 혼합된 퇴적상을 보여주는 사암(砂巖)이다. 오직 극지역의 빙하 주변 육상과 해양 퇴적물에서 찾을 수 있다. 


    육상의 지질 기록은 침식 등으로 연속적이지 않지만 해양 퇴적층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지구의 지표 환경 기록을 연속적으로 가지고 있어 암석 퇴적상을 현생 퇴적상과 서로 대조해 볼 수 있다. 유빙운반역(流氷運搬礰)도 과거 빙하기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과학적 증거다. 높은 지대에 두껍게 쌓인 빙하는 무게에 따른 중력에 의해 낮은 지대로 흐른다. 이렇게 빙하기 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육상의 암석 덩어리와 조각들은 빙하 바닥에 붙어 운반된다. 빙하 바닥의 암석은 갈려 거친 돌이 만들어진다. 


    빙하가 해안가에 이르면 지반이 더 이상 빙하를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 바다로 흘러들어 유빙이 생성된다. 다량의 유빙이 바다로 운반되어 녹을 때 유빙에 붙어 있는 암석 파편이 바다 밑으로 떨어진다. 이때 떨어진 역들이 퇴적물에 드문드문 섞여 빙하 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퇴적상을 만든다. 이 역들의 표면에 운반 도중 빙하가 긁고 지나간 흔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극지환경에서만 볼 수 있는 해양지질학의 퇴적물로 생각했지만 적도 지역을 포함해 저위도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되었다. 이를 근거로 과학자들은 오래전 지구에 전지구적인 얼음 세상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세웠다.


    다이아믹타이트, 호상 점토 퇴적물, 빙하가 녹은 물에서 생성된 하천 퇴적물, 암석 표면의 빙하 흔적에서 눈덩어리 지구의 강력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지구과학계의 혁명과도 같은 판구조론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눈덩어리 지구 가설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판이 움직인다는 살아 있는 증거는 해저 지각에 남아 있는 잔류자기의 방향이다. 지구 자기장은 계속 변해왔다. 잔류자기는 암석이나 퇴적물에 남아 있는 과거의 지자기다. 퇴적물이 쌓이면서 잔류자기 배열이 고정된다. 지각판이 이동하면 그 암석의 지자기 방향은 점차 시간적인 자기장과 달라질 것이다. 


    두꺼운 얼음으로 덮인 바다는 산소 농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호상 철광층이 생성된 적이 있다. 세 번(24억년전, 7억 2천만년전, 6억 5천만년전)의 눈덩어리 빙하기는 발생 시기가 서로 크게 달라 각기 원인이 다를 수밖에 없다. 45억년전에서 25억년전까지 적어도 20억년 동안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 원시 생명체는 풍부한 대기 성분을 토대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지구가 물바다 행성으로 바뀌면서 생명체는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생명체가 대기에서 수소를 만들기보다 너무도 풍부해진 물에서 수소를 추출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시아노박테리아의 출현이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수소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광합성을 하는 과정에서 산소라는 부산물을 만든 것이다. 갑자기 급격하게 늘어난 대기 산소가 따뜻한 기후를 유지하도록 이어주는 온실가스의 급격한 산화(온실가스 제거, 메탄 제거)로 이어져 빙하기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80 페이지) 극지방부터 얼기 시작한 지구는 얼음이 많아지면서 태양빛을 더 많이 반사해 결빙이 급격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알베도(빛 반사) 지수는 물이 0.1, 육지는 0.3, 얼음은 0.45-0.65, 신선한 눈이 약 0.9다. 지구 전체가 얼어있었다면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빛은 거의 우주로 반사되기에 지구는 영원히 얼음 세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 눈덩어리 지구 사건이 영원히 지속되지 못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지구를 덮고 있던 얼음을 녹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은 지구 내부의 뜨거운 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메탄 같은 온실가스가 영구동토층과 해양 퇴적층을 뚫고 대기로 올라와 영구적일 것 같았던 눈덩어리 지구를 사라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화산 활동으로 빙하기가 올 수 있는 주된 요소는 이산화황을 포함하고 있는 에어로졸(화산재)이다. 대기로 넓게 퍼진 분출 물질은 태양빛이 지표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해 지구 기온을 떨어뜨린다. 기온의 하락으로 고위도 빙하의 면적이 넓어지면서 알베도가 커지고 눈덩어리 빙하기가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완벽한 얼음 세상이라던 당시에 물이 순환하거나 얼음이 녹았던 활동의 증거가 일부 나타났다. 그래서 완전한 눈덩어리가 아닌 진창눈덩어리 지구(slushball earth), 눈덩어리에 가까운 지구(near snowball earth)를 제안했다. 


    저자는 빙하기 시대를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남극대륙이라 말한다. 남극 대륙은 지구 기후 조절 요인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기에 환경적으로 보호되어야 할 곳이다. 눈덩어리 지구 이론은 가설이다. 첫 부분부터 흥미롭게 읽었지만 중반부 이후 가설 자체에 대한 논란, 해명되지 않은 부분 등이 이어져 긴장감이 덜했다. 그림으로 보는 극지과학 시리즈의 한 책으로 150 페이지 ~200 페이지 정도로 분량이 정해져 있어 아쉬운 점도 있다. 더 상세하게 조명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저자가 추천한 ‘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산다’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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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천역 광장에 설치된 주목(朱木) 화분을 보며 붉은 색을 의미하는 한자들 가운데 짙게 붉을 강이란 글자가 들어 있는 능마강소(凌摩絳霄)를 생각했다. 장자(莊子)가 말한 북해의 물고기 곤(鯤)이 봉(鳳)이 되어 날아오르는 것과 관련한 의미라고 들었다. 유곤독운(有鯤獨運) 능마강소(凌摩絳霄)가 한 세트이다. 도남(圖南)을 생각하게 하고 미수(眉叟) 선생님을 생각하게 한다. 주역(周易)의 비룡재천(飛龍在天)과 연관지어 생각해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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