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과 사람의 과학 -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우리 과학 이야기
김연희 지음 / 이음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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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희의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과학]은 우리 전통의 3()인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 , 사람이라는 이슈에 담긴 과학을 분석한 책이다. 서두부터 흥미로운 개념을 만나게 된다. 치윤법(置閏法)이 그것이다. 이는 윤달을 끼워 넣는 것을 말한다. 재이론(災異論)은 재이를 하늘이 집권자에게 보내는 경고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아라가야 고분에 남두육성이 그려져 있다. 남두육성은 천구의 남쪽에 위치할뿐 우리나라에서도 여름에 남쪽 밤하늘에 있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북반구에서 남십자성은 보이지 않는다. 조공(朝貢) 책봉(冊封) 관계에서 조공의 조는 제후국의 국왕 또는 대행자가 중국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는 일을 의미했고 공은 공물을 바치는 일을 뜻했다. 조공책봉 관계란 제후국이 황제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황제국이 제후국의 통치권을 인정해주는 외교체제를 의미한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서 중국과의 교류를 도모했으나 의도하지 않은 변수들이 발생해 추세 유지가 쉽지 않았다. 918년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936년 후삼국을 통합했을 무렵 중국 대륙이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사]는 군주의 통치 기록인 본기(本紀), 신하들의 전기인 열전(列傳), 제도와 문화를 담은 지(), 연표(年表)로 구성된다.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편찬된 책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편찬된 책이다. [고려사]는 조선 태종 대에 편찬이 시작되어 문종 대까지 무려 57년에 걸쳐 완성되었고 이는 조선인에 의해 고려의 역사가 서술되었음을 의미했다. 이는 서술의 관점과 공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정삭(正朔)은 한 해의 시작과 한 달의 첫날인 초하루를 의미하는 말이다. 정삭을 준수하는 것은 조공 책봉 관계를 확인하는 상징적 실천이었다. 관상수시(觀象授時)는 하늘의 별자리와 움직임을 관측하여 백성에게 농사에 필요한 절기와 시간을 알려주던 고대 동아시아의 통치기법을 의미한다. 동아시아에서 황제는 하늘의 움직임 즉 천체의 운동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간 체계를 정한 뒤 역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일을 중요한 책무로 여겼다. 이처럼 관상 수시의 이념은 유교적 통치질서 속에서 더욱 체계화되었다.

 

관상의 주체는 천자인 황제다. 조선은 형식적으로 명나라의 제후 국이었지만 나름대로 왕천하자(王天下者) 즉 천명을 받아 나라를 열었다는 독자적인 왕도 정치사상을 견지했다. 천자국 중국의 제후국이면서도 스스로는 독립적으로 천명을 받은 나라라고 여겼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왕조 특히 세종은 독자적인 관상수시 이념을 전개하며 천문학 활동을 적극 발전시켰다. 중국이 관상수시 이념을 실행하기 위해 흠천감(欽天監)을 운영했다면 조선은 서운관(瑞雲觀)을 두었다. 서운관은 세조 12년인 1446년 관상감(觀象監)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관상감이란 관상수시에서 나온 말이다.

 

일부 유학자들은 황제국이 아닌 제후국 조선이 천문학 활동을 하고 그 결과물인 역서(曆書)를 간행해 배포하는 일을 그릇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조선의 국왕은 명나라의 제후로서 천자나 황제를 자처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스스로 천명을 받았다고 믿었고 더 나아가 이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러한 인식은 세종대에 만들어진 최초의 한글 시가인 [용비어천가]에 뚜렷이 나타난다. 세종은 조선왕조가 왕천하자가 세운 나라임을 강력히 표명하며 그에 걸맞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수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핵심 가운데 하나가 천문학 활동을 바탕으로 한 관상수시였다.

 

조선은 스스로 천명을 받은 왕조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천문학 활동을 수행했고 자체 역서를 꾸준히 가능했다. 그러나 황제국이 아니었던 만큼 이 활동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65 페이지)

 

세종의 관상수시(觀象授時)와 강무(講武)는 유교적 왕도정치의 핵심인 천명(天命)을 완수하기 위한 표리일체(表裏一體)의 행위로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본문에 혼효중성(昏曉中星)이란 말이 나온다. 이는 해가 질 무렵(황혼)과 해가 뜰 무렵(새벽)에 남쪽 하늘의 자오선을 지나는 별자리를 의미한다.

 

혼효중성을 고쳐야 할 만큼 고구려의 구본 천문도와 조선의 실정은 맞지 않았다. 고구려의 천문도는 평양(북위 약 39) 중심이었으나 조선의 실정에 맞춘 천문관측은 한양(북위 약 37.5)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위도가 다르면 남중하는 별자리의 위치와 시간이 달라지므로 수정이 불가피했다.

 

왕조가 바뀔 때 역법을 새로 제정했다. 이에는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형식적인 개정(차이 없음)과 관측 기술과 수학의 발전에 따른 근본적인 계산법의 혁신(차이 큼)이 공존했다. 왕조 시대의 일월식 예측은 단순한 별자리 관측이 아니었다. 그것은 반란을 막고 국가 예산 낭비를 방지하며 외교적 자립을 이루고 농업 경제를 지탱하는 최고의 국가 통치 수단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의 시헌력 도입 노력을 저지하거나 방해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조선 학자들의 유학은 허용했다. 이는 겉보기에는 모순적이지만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체제라는 정치적 문맥에서 보면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통치 전략이었다. 청나라가 조선의 자체적인 달력 제작(시헌력 계산법 독자 개발)은 견제하면서도 북경으로의 천문학 유학을 허용한 실질적인 이유는 독자적인 중심이 되지 말고 청나라가 구축한 중심(천자) 체제 안에서만 움직이라는 철저한 길들이기 방식이었다.

 

책에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1795년 정조가 관상감 최고 책임자에게 새로운 택일서 제작을 지시했는데 책임자란 바로 서유방(徐有防)이란 인물이다. 1795년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해 진행된 을묘년 화성원행시 행렬의 가장 맨 앞에 섰던 경기감사다.

 

고대 및 전통사회의 천체 연구를 점성이나 제의 해석 같은 영역으로만 볼 수는 없다. 그들이 수행한 정밀한 천문 관측과 운행 예측을 위한 수학적 노력은 비록 오늘날과 다른 이론과 체계를 바탕으로 했더라도 자연을 체계적 질서로 이해하고 예측하려 한 지속적인 지적 활동이기 때문이다. 지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분명한 의도를 가진 매체라 할 수 있다. 물론 길을 찾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실용성을 부각시킨 지도도 그려졌다.

 

지도에는 인류 문명의 역사는 물론 인류가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근원적인 궁금증 그리고 장소에 대한 인식론의 변화 과정이 담겨 있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지도를 갖기 전까지 땅에 대한 인류의 상상력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펼쳐졌는지도 나름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양택 풍수는 명당에 사는 사람이 직접 생기를 받는 구조인 반면 음택 풍수는 생기를 받은 유골이 자손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본다.

 

음택 풍수는 현대적 관점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양택 풍수는 지역 공동체의 안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수분합(山水分合) 논리란 산과 물을 대칭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음양의 구조로 이해해 서로 분리하지 않고 인식한 것을 말한다. 인지의(印地儀)는 원근측정기로 세조가 직접 고안했다. 세조는 인지의를 이용해 아버지 세종의 영릉(英陵)에서 측량한 기록을 남겼다. 인지의는 원근측정기, 나침반은 방위측정기, 기리고차는 거리측정기, 규형은 높이측정기다.(98 페이지)

 

조선왕조는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도를 제작했다. 건국 이후 조선은 고려 시대보다 영토를 확장했고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새로 수정해야 했다. 특히 압록강 상류의 사군(四軍), 두만강 하류의 육진(六鎭)은 국방상 요지였기에 이에 대한 정보의 필요성은 더욱 컸다.(111 페이지) 조선이 취한 사대정책(事大政策)은 국가주도로 제작된 16세기의 세계지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일대로 지도 범위가 축소된 것이다.(113 페이지)

 

조선의 지도 제작은 성리학적 이념의 강화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구축이라는 국가사회적 환경에 따라 변화되었다. 국제적으로 화이관(華夷觀)이 강화되었고 주변국에 대한 관심은 건국 초보다 줄어들었다. 반면 국내 지역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반영한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지도의 도입은 곧 땅은 둥글다라는 개념의 도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천원지방의 개념이 확고했던 조선에서 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서양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는 극히 일부였다. 당시 조선에 유입된 서양지리 지식에 대해 대부분은 판단을 유보하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여지전도(輿墬全圖)의 지()는 지()의 옛 글자다. 견딜 감, 수레 여를 쓰는 감여(堪輿)는 만물을 포용하여 싣고 있는 수레라는 뜻으로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 풍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한편 혼천설(渾天說)의 혼()은 둥글다는 의미다. 혼천(渾天)은 둥근 하늘이다. 혼천은 하늘의 운행 방식을, 천원(天圓)은 하늘의 생김새를 나타낸다.

 

두 번의 전란을 겪은 조선은 지도의 개인 소유를 금지했던 전기와 달리 사대부를 중심으로 지도 소유도 허용했다. 정교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국방에 대한 관심이 전례 없이 고조된 17세기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 새로 조성되거나 복구된 성곽이나 산성 등 각종 군사시설을 그려놓은 군사용 지도가 여럿 제작되었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조선 후기 지리지의 백미(白眉). 여지(輿地)는 땅의 정보를 의미한다.

 

고산자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고 백두산을 오르내리며 지도를 제작했다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다고 한다. 전국 답사설은 전통적 지도 제작법과 근대적 측량 기반 제작법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일 수 있다. 실제로 전통 사회에서 국토 전체를 실측해 전국 지도를 완성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더구나 국가의 대대적 지원을 받지 못한 개인이 전국을 홀로 답사하며 [대동여지도] 같은 정밀 지도를 제작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김정호는 이런 한계를 알고 있었기에 당대까지 축적된 조선 지도학의 성과를 종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무렵 조선의 지도 제작 전통은 매우 두터웠고 특히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각종 지리서가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173 페이지) [대동여지도]의 형식상 가장 큰 장점은 탁월한 휴대성이다. 이는 이용자 관점에서 지도를 설계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되었다. 필사본 지도와 달리 대동여지도는 목판 인쇄본으로 제작되어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기획했으며 각층이 이어지도록 구성했다. 나아가 이를 순서대로 맞추면 조선 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었다.

 

[대동여지도]는 산맥 중심의 지형 인식을 강하게 드러낸다. 무엇보다 모든 산맥의 시작점을 백두산에서 이어지게 그린 점이 눈에 띈다. 조선시대 국가 주도 제작 지도 가운데 군사적 목적을 지닌 것이 많았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외적의 침입을 막아 국토를 수호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에 지형 지세를 파악하고 적절한 장소의 군사시설을 설치하기 위한 지도는 필수적이었다. 이런 용도의 지도를 관방 지도라 하며 이는 곧 군사 지도다.(138 페이지)

 

고산자 김정호가 국가 기밀 누설 죄로 흥선대원군에 의해 옥에 갇혀 죽었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이야기는 1925108, 9일 동아일보에 실린 '고산자를 회함'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토대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173 페이지)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죄목으로 고산자를 처벌했다면 군사 지도도 제작하지 않아야 말이 된다. 군사 지도야말로 가장 민감한 내용을 담은 정보이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 사회의 의약 생활을 이해하는 데 독보적인 기록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이다. 퇴계 이황은 주희 이후 주자학의 최고 대가로 평가받는 대학자로 주희의 자연관과 자연 과학 분야에 대해서도 관심이 적지 않았다. 그는 혼천의를 제작해 그 이치를 따졌고 상수학의 깊은 내용도 일일이 공부했다. 성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어려운 공부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천문학과 수학 역시 깊은 수준에서 이해했다.(231 페이지)

 

이황은 건강 유지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활인심방]이라는 양생술 책을 필사해 몸소 실천했다. 의학과 의술, 병에 대한 이황의 태도는 단지 자신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가 조선 최고의 유학자로 인정받고 제자들이 그를 추종하며 학문을 계승했을 뿐 아니라 1599년에 간행된 그의 문집이 널리 읽히게 되면서 [퇴계집]에 남긴 병과 의학에 관한 수많은 언행과 실천이 후대 사대부에게 귀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직접 필적으로 남긴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 즉 활인심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된다.

 

유배당하기 전 정약용은 어떤 병을 앓았을까? 그가 냉혹한 자연조건 즉 절반 이상이 죽는 두 창이나 홍역 같은 역병을 큰 피해 없이 극복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두창은 누구나 앓는다고 해서 조선 초에 백세창이라고도 불렸을 만큼 전염력이 컸다. 정약용 역시 2살 되던 해인 1763년에 두창을 알았다. 다행히 병을 무사히 치러냈으며 얼굴이 얽는 후유증도 남지 않았다. 오른쪽 눈썹 위에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뉜 것처럼 보였고 이에 따라 7세 때인 1768년에 삼미자(三眉子)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다산은 몽수(蒙叟) 이헌길(李獻吉)의 치료 덕분에 홍역에서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몽수전]을 지어 그의 행적을 찬양했으며 그의 마진학(痲疹學)을 확장하여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썼다. 마진(痲疹)은 홍진(紅疹) 또는 홍역이라 불린다. 정약용이 1798년 앓은 여질(沴疾)은 오늘날의 인플루엔자로 추정된다.

 

흑산도에 유배된 형 정약전은 동생이 건강을 돌아보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일에 대한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을 꾸짖으며 당장 연구를 중단하고 수양에 힘쓸 것을 권했다. 특히 온몸을 펴고 뻗치며 구부리고 호흡을 가다듬는 도인술을 권했다. 하지만 정약용은 도인술이 분명 유익하다는 점을 잘 알지만 자신은 게으르고 산만하여 소용이 없다고 답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맑게 하려 하면 세상의 온갖 잡생각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어지럽게 일어나 오히려 무엇 하나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지경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저술할 때 마음이 더 집중되고 안정된다고 했다. 정약용의 몸과 마음을 지탱해준 원천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매일 규칙적으로 행한 연구였다.

 

정약용의 삶에서 정조를 빼놓을 수 없다. 다산이 1797년 완성한 [마과회통(麻科會通)]1790년 한양에서 마진이 유행하자 민간에 처방집에 관한 의견을 물은 정조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다. 1790년은 정조가 경술년 각과를 시행한 해로 다산은 이에 역시 응했다.

 

노년의 정약용을 힘들게 한 것은 조정에서 그를 정치가로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의약으로만 그를 찾고 그의 의술만을 칭송했다. 심지어 10년 후 조정이 그를 두 번째로 부른 것도 그가 그토록 고려하던 승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의학 동참 부호군인 무관으로서였다.의약은 정약용에게 양면적인 존재였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병을 다스려주고 세상의 칭송을 받도록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고질병을 완전히 치료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그에게 원치 않는 명성을 씌어준 것이기도 했다. 결국 의약은 그의 인생에서 신체적으로는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정치적으로는 부담이 되는 이른바 계륵(鷄肋) 같은 존재였다.

 

정약용은 나이가 들면서 의약에 매달리기보다 벗어나려고 했다. 고칠 수 없는 병은 천명에 순응하는 자세로 받아들이려 했고 정치적인 역경 역시 운명이라니 여기며 미련을 두지 않으려 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더 이상 세상의 부름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과 학문 속에서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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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논어 - 철학자 주자와 정치가 다산, 공자의 가르침을 논하다
한형조 지음 / 김영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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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한형조(1958-2024)는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쓴 [주희(朱熹)에서 정약용으로](1996)를 상재(桑梓)한 직후 정약용에서 주희로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정약용에서 마침표를 찍는 것이 아니라 주희에게 다시 거슬러 올라가 조선 유학사 전체의 역동성과 드라마를 완성된 형태로 파악하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타계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나온 유작(遺作)[두 개의 논어]에 단서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철학자 주자(朱子)와 정치가 다산(茶山) 공자의 가르침을 논하다.

 

저자는 얕고 잔잔한 남한강에 익숙했던 다산을 강진의 시퍼런 동해 물결이 압도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강진에 유배된 다산을 서술하는 말이다. 저자는 주자와 다산의 고전 해석을 추적하는 것은 신나는 모험이라고 말한다. 장면 하나하나마다 드라마틱한 대치(對峙)가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고 말한다. 다산은 개인의 도덕성에 근거를 둔 주자의 사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정된 시기에는 주자의 기획이 유효한지 모르나 난세에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데 주희가 살았던 시대 역시 송나라가 금나라에 밀려 강남으로 쫓겨간 난세였다.

 

두 사람의 독법은 왜 그렇게 다른가? 그것은 죽간(竹簡)에 쓴 매체의 한계로 인해 대개 시간이 결여되어 있고 맥락이 불분명하고 질문과 대답이 모두 짧은 논어 자체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두 사상가가 가진 입장 및 현실을 보는 차이에서 비롯된 일이다. 저자는 다산의 절규로부터 타락한 도시를 질타하는 구약의 예언자 이사야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산은 요순(堯舜) 시대의 순 임금이 무위(無爲)했다는 구절을, 그렇게 펼쳐진 이상적인 군주들의 정비된 통치질서를 찬탄한 감탄사일 뿐이라고 말한다. 두 개의 논어는 주자와 다산의 상반되는 논어 해석을 염두에 둔 말이다. 다산은 공자 사상에서 도덕은 有道의 한 날개일뿐 전체일 수 없다고 보며 그의 꿈을 정치적인 것이었다고 보았다.

 

저자는 두 사람의 대립을 명상 vs 활동으로 파악한다. 저자는 논어를 학(), (), (), ()의 네 가지 주제로 대별한다. 저자는 주자의 자연론적 정착은 이(), 다산의 유신론적 전회는 천()이라는 한 글자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한다. 다산은 주자가 불교에 물들고 내적 명상에 골몰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이()란 유교 형이상학이 불교의 공()으로부터 배워 체계화한 것이라는 한 논자의 지적과도 통하는 말이다. 다산은 주자의 통찰과 성취를 존중하고 인정하면서도 논어를 읽는 눈, 그리고 공자가 창도하고자 한 유교의 근본원리와 세부적 설계를 읽는 눈에서 완전히 다른 안목과 비전을 가졌다. 다산은 주자학을 아예 불교라고까지 극언했다.(781 페이지)

 

다산은 덕을 내면화한 주자의 기획은 오랜 불교의 영향이며 유교의 본래 즉 공맹의 원 기획의 심각한 일탈이라고 말했다.(484 페이지) 다산이 의거한 방식이 보이지 않고 가려진 곳에 접근하려는 노력인 경학(經學)이다.(82 페이지) 주자가 불욕(不欲)위정자가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으로 읽었다면 다산은 백성들이 도적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으로 읽었다. 구자지불욕(苟子之不欲) 수상지불절(雖賞之不竊)이란 구절에서 구()는 진실로, ()는 비록을 의미한다.

 

주자는 진정 당신(공자에게 문의한 계강자; 季康子’)이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들(백성들)을 떠민다고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고 다산은 백성들이 도적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정치를 바르게 하라(생산을 보장하고 각자 생업에 힘쓰게 하며 세금을 줄여주라)고 읽은 것이다. 저자는 이를 다산이 도덕(을 가르치는 구절)이 아닌 정치(를 잘하라는 구절)로 읽었다고 설명한다.(102 페이지)

 

저자는 공자의 도는 크게 둘로 갈라진다고 말한다. 소극적 준비와 적극적 기여, 정신의 평정과 사회적 기여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특히 다산은 이 둘의 결합과 연장을 강조한다.(224 페이지) 논어 안연(顏淵)편에 편언(片言)이란 말이 나온다. 주자는 이를 토막말을 의미하는 반언(半言)으로 읽었고 다산은 한쪽 편 말이라 읽었다.

 

주자는 유도(有道)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천하를 유랑한 공자와 그 일행이 한가한 소풍을 즐기고 있다고 보았다. 주자는 이 지점을 자신의 새로운 사유의 주축에 세웠다. 다산은 바로 이 점 때문에 주자학에 비판적 스텐스를 취했다. 유교의 이상이 주자와 만나 사회적 관계에서 자연에의 동참으로 일대 전회(轉回)를 하게 된 것이다. 다산은 소요(逍遙)는 공자의 정치적 열정과 어울리지 않고, 주자가 외치는 완전한 인간 즉 사욕이 없는 인간은 안회(顔回)의 극기복례에서나 있을 수 있는 경지라고 보았다.

 

저자는 주자학은 인간의 이기성과 고착, 자기중심성이 인간성 밖에 있다고 역설한다고 말한다. 즉 그것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도 아니고 자연적 본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도 주자학은 순자(荀子)를 내치고 맹자(孟子)에 틀을 잡았다. 주자학의 낙관주의는 명상과 정치를 연속으로 읽는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 아니냐는 비판이 늘 있어왔다. 조선에서 그 역할을 다산이 맡았다. 그의 비판은 신랄하고 전방위적이다.(262, 263 페이지)

 

공자는 기본적 품성 못지않게 문화적 도야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말한다. 충신(忠信)이 바탕(; )이라면 거기 호학(好學)이 문화(; )로 보완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질빈빈 둘 중 하나도 결여될 수 없다.(301 페이지)

 

오거하류 이산상자(惡居下流而訕上者)란 말이 있다. 양화(陽貨) 편에 나오는 말로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는 자"를 뜻한다. 주자는 하류(下流)를 그냥 신분과 지위를 기준으로 잡아 아랫사람으로 해석했다. 다산은 하류를 덕성과 재능이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이들은 천박한 삶을 누리며 무비판적 삶을 영위한다. 그들은 뛰어난 자, 덕을 갖춘 자들을 헐뜯는다. 그것은 일종의 질투다. 저자는 다산의 해석이 탁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심성을 족집게처럼 짚어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11 페이지)

 

주자학은 우주를 거대한 생명의 유기체로 본다. 그 중심에 인()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주자는 내부를 향해 자연을 찾고 있고, 다산은 타자와 더불어 덕성을 구축한다. 그래서 저자는 주자를 명상, 다산을 정치로 대치시켰다고 한다.(346 페이지)

 

다산은 유교의 정신을 우주론적 자연론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되찾고 싶어 한다. 그것이 비조(鼻祖) 공자를 축으로 내놓은 유교의 유구한 전통 아닌가. 그런데 주자와 송대 유학이 이 기본 원리를 왜곡, 변질시켜버렸다. 그렇게 유교가 무력해졌고 낯설어졌다. 하나의 이치가 인간과 우주를 통관(洞觀)하고 뒤섞음으로써 형이상학의 늪에 빠졌고 인간은 일상에서 무엇을 성취해 나가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365 페이지)

 

주자는 공맹(孔孟) 유학에 함유된 천(), (), 상제(上帝), 귀신(鬼神) 등의 초월적 존재와 그 명령을 모두 이()로 통일하고 자연론적 사유의 틀을 구축했다 다산은 공맹 사유의 원형을 일상의 관계, 덕성의 구축이라는 테제에서 확인하고자 한다.(367 페이지) 다산은 주자가 말하는 자연의 천리(天理)는 아무 지각이 없어 말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다산은 수도사가 아니라 정치가다. 그는 실학자답게 가정의 생계를 걱정하고 정치를 책임진 사람답게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경영에 눈을 뜬 사람이다.

 

주자는 안회가 철학자의 삶을 즐겼다고 말하고 다산은 그가 정치가의 도를 연마하고 있었다고 강조한다. 다산은 [논어] 전체를 정색하고 읽는 것이 큰 병폐임을 지적했다.

 

조지프 니덤은 이런 말을 했다. 주자학이 깨달았던 것은 도덕적인 것이 근본적으로 자연 안에 심겨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생겼는데 일종의 진화 과정에 의해서 그리고 올바른 조건이 존재했다고 우리가 말할 수 있을 때 나타났다. 그렇다면 주자학은 진화론적 유물론과 유기체 철학의 세계관에 아주 가깝게 근접했던 셈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자학은 도가(道家)로부터 더 많은 것을 빌렸던 듯 하다.

 

다산은 주자학을 비판할 수 있었다. 이는 후발의 장점이고 주자는 대답할 수 없다. 그를 대신해 다산의 창견(創見)을 본다면 어떻게 반론할 것인가?(495 페이지) 저자는 고전을 읽는 데 두 가지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신의 선입견과 인상으로 고전을 재단하는 독단, 다른 하나는 고전의 산만함이나 모호함 앞에서 길을 잃는 지리다. 지리는 지리멸렬(支離滅裂)의 지리로 보인다.

 

조선 후기 노론과 정치적으로 대치하던 소론과 남인 계열에서 주자학의 교조(敎條)를 회의(懷疑)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들이 주자의 고전학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주석을 내놓았다. 백호 윤휴의 독창, 서계 박세당의 사색,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이 그것이다. 그리고 다산이 있다. 그는 주자학을 향해 거의 전쟁을 선포하시다시피 했다. 주자학이 터하고 있던 사서(四書)에서 육경(六經) 체제로 복귀할 것을, 그리하여 이를테면 주자의 명상에서 유가의 행동으로 돌아설 것을 촉구했다. 육경이란 시경(詩經), 서경(書經), 악경(樂經), 주역(周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이다.

 

저자는 [논어]의 주인공인 공자를 제외하고 [두 개의 논어]라고 제목을 정한 것은 공자는 두 사람의 해석을 통해 드러날 뿐이기에 그런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작업이 고전이 말해주는 바를 따라가는 것일뿐 자신의 독창은 아니라고 말한다.

 

주자학자들은 공자가 자신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안 사람이 아니라 했음에도 그 분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완전히 행동하시는 분으로 공자의 회고는 인생 길을 힘겹게 살아가야 할 후학들을 위한 가설적 배려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논어]에서 마음에 드는 구절을 고르라면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 나면서부터 아는 것, 스승이나 책을 통해 배워서 아는 것, 고난과 역경에 처해 아는 것이다. 물론 고난이나 역경에 처해서도 배우지 않음을 의미하는 곤이불학(困而不學)도 있다.

 

저자는 주자가 폭탄선언을 한다고 말한다. 공자의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터득한 사람으로 후인들을 위한 단계를 대략 설정해준 것이라는 의미다.(597 페이지)

 

공자는 사()가 아닌 학()에서 출발하라고 가르쳤다. 생각이 아닌 배움에서 출발하라는 말이다. 공자는 스스로 옛것의 전달자를 자처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 그것이다. 개인적으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어 허망해진다는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과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독단에 빠져 위태롭다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란 말을 좋아한다.

 

주자는 덕()을 인간 내부에 장착된 본성이라 보았고 다산은 행동을 통해 쌓이는 공적이라 보았다. 주자는 인의예지가 그 본성이라 설득했고 다산은 이것들은 유덕(有德)한 행동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정말 달라도 너무 다르다고 말한다. 어떻게 같은 책, 같은 글자를 두고 엇갈리다 못해 이렇게 서로 부딪히는 해석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는다. 과연 누가 공자를 더 리얼하게 보여주고 유학 정신에 더 가까이 가 있는가? 아니면 둘 다 기실은 서로 가까우며 병존함에 아무런 해됨이 없는가?라고 말한다.

 

다산의 윤리학은 주자보다 더 험준하다. 나날의 전쟁터 앞에 서 있는 듯할 것이다. 주자는 천도(天道)의 자연성을 회복한다는 점에서 훨씬 평탄하다. 다만 기질과 물욕으로 인한 일탈에 유의하고 자신을 잘 보존해 나가면 될 것이다. 다산은 그렇지 않다. 인간 속에 상반되는 욕구들이 주도권을 갖고 다툰다. 흡사 천사와 악마가 인간 내부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것으로 윤리적 정황을 소묘했다. 주자가 천리(天理)를 말하고 다산이 천명(天命)의 본연을 강조할 때 이 서로 다른 윤리학의 방향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공자의 역정을 궁리의 심화로 읽은 주자보다 다산의 해석이 아무래도 실상에 더 근접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600 페이지)

 

다산은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을 일러 바깥의 마음에 어떤 내적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상태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다산은 주자와 달리 하느님(‘; ‘, ’상제; 上帝‘)을 믿었다고 말한다. 다산이 말하는 하늘은 관찰자이고 감독자다. 이는 인격신을 말한다. 다산은 유교의 몰락은 천()이 이()로 치환되면서 시작되었다고 보았다.(608 페이지) 물론 다산이 본 하늘은 질투하거나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전혀 인격적이지 않다. ()는 본래 옥()의 결이나 무늬를 가리켰다. 주자는 우주를 수축과 응축, 분화와 생명의 쉼 없는 폭죽으로 읽었다.

 

자연은 창조의 과정이고 생명의 약동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수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살아가다 사라진다. 우주는 흡사 대장간의 풀무를 닮았다. 이 특성을 주자는 [주역]에서 빌려온 원형이정(元亨利貞) 즉 생명의 탄생, 성장, 원숙, 저장으로 특화했다. 이는 곡식의 생장과 결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계절에 비견되었다.(631 페이지)

 

사람들은 여전히 미심쩍어할 것이다. 주자의 이야기를 더 따라가 보자. 질문은 두 개다. 1) 만일 인간의 본질이 이토록 선하다면 사람들의 악()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인가? 2) 인간은 무슨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이 둘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악은 어디서 생기는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신체의 구성(’기품; 氣稟‘)에서 온다. 인간의 물질은 서로 다르다. 이 물질은 신체적, 정신적 나아가 영적 특질을 포함한다. 각자의 유전적 구성이 다르기 때문에 본성인 인의예지는 일정한 제약과 왜곡을 피할 수 없다. 즉 그 본성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은 요순 같은 예외적 성인 뿐이다. 이 제약의 지도는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인()에 치우쳐 인정에 눈물이 많고 누구는 의()의 성분이 많아 정의에 단호한 성격일 수도 있다. 이 차이를 주자학은 기의 청탁수박(淸濁粹駁)으로 정식화했다. ()가 맑은 사람들은 지적 센스가 뛰어나고 탁한 사람은 우둔하다. 기가 순수한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고 잡박(雜駁)한 사람에게는 도덕적 센스는 기대할 수 없다. 기의 순수성과 민감성 그리고 견고성이 그려내는 지도는 사람마다 뚜렷한 차이가 있다. 인간의 노력은 이들 편중(偏重)과 그로 인한 일탈(逸脫)을 교정하고 되돌려 본래의 본성을 회복해나가는 일과 다름없다.(634 페이지)

 

저자는 주자학이 말하는 인간 본성의 전체가 선하다는 것은 과도한 주장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 저자는 인간은 타인과 공동체 전체를 희생하더라도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무서운 동물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저자는 신의 죽음과 부활을 둘러싼 오랜 격론은 서양의 것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동양에서도 양상은 달랐지만 똑같은 문제를 안고 격한 쟁론이 벌어졌다. 서양의 근대가 합리주의와 과학이 점차 신의 지위를 탈환해나갔다면 동양의 근대는 이미 12세기 주자에 의해 완성된 형태로 등장했다고 할 수 있다. 그 도저한 합리주의에 대한 신학적 반동이 18세기에 일어났고 그 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것이 서학이라 불리는 서양의 종교였다.(655 페이지)

 

불씨만 있었다면 불은 붙지 않았을 것이다. 풍부한 기름은 동양의 오랜 고전적 전통이 마련했다. 다산은 사서삼경이라는 고전을 정제함으로써 공맹유학이라는 원시 유가를 재발견해나갔다. 그 중심에 그의 유신론적 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는 미안한데 주자의 주석은 혼란스럽다. 다산에 기울어서가 아니라는 말로 다산(茶山)에 대한 경도(傾度)를 고백한다.(678 페이지) 다산은 공자의 평생 학습을 꿰고 있는 중심 원리는 천리(天理)가 아니라 충서(忠恕)라고 말한다. 유교를 한 글자로 집약한다면 그 또한 리()가 아니라 서()여야 한다.(690 페이지)

 

다산은 조선조 후기 정치의 문란과 난맥 그리고 그것을 고쳐 나갈 의지 부족이 무위(無爲)의 정치를 내건 무책임과 무기력에 있다고 극언했다.(822, 823 페이지) 다산이 경세 3부작이라 불리는 [목민심서]의 관료 매뉴얼, [경세유표]의 국가 시스템, [흠흠신서]의 형률 재정비라는 실학적 작업과 더불어 아니 그보다 경학이라 불리는 고전 해석에 더 집중적으로 매달린 이유를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공자는 왜 순임금이 무위로 다스렸다고 말했을까? 다산은 이것이 찬탄의 과장법이라며 이를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申申當付)한다.(826 페이지)

 

요순(堯舜)은 유교 정치의 이상을 상징한다. 그것이 실제였는지 상상이었는지에 대해 분분한 논란이 있지만 다산은 이 기록의 실제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아가 이 정치의 실제 현장을 힘써 파고들었다. 다산은 그 정치가 그야말로 물샐 틈 없는 정치적 행동과 정책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요순의 정치는 그저 사람 좋은 내맡김, 온유한 성품으로 이룩한 한가한 유토피아가 아님을 그토록 알리고 싶어 했다. ? 조선의 정치 풍토를 바꾸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흑산도에 있는 형님에게 요순의 정치를 발견해나가는 기쁨과 감격을 편지에 담아 보냈다.(829, 830 페이지)

 

다산은 고전 학습하고 일상의 몸가짐을 닦는 학자와는 다른 지평의 정치적 자질과 태도를 주문하고 있는 듯하다. 다산은 교육이 정치의 최종적 목표이지만 그 전에 생업과 부()가 우선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다산은 [주역]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악인을 보더라도, 허물이 없다(’견악인; 見惡人‘ ’무구; 无咎‘)"가 그것이다. 다산의 이 인식은 조선조 유학의 정치학적 인식을 일거에 뒤흔드는 뇌관을 끌어안고 있다. 저자는 조선 후기 당파와 지목, 예송과 사람 사이의 은원을 보건대 그리고 엄격한 자의적 군자 소인론을 보건대, 그리하여 실무적 에너지가 명분 속에서 소모되고 소비되어 버린 안타까운 역사에 비추어 보면 다산의 인식은 대서특필할 필요가 있는 것이었고 지금도 참고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888 페이지)

 

결어(結語)에서 저자는 [논어]는 하나가 아니라고 말한다. 불교는 티베트에는 승려 수만큼의 불교가 있다고 하고 [성경]은 아버지의 집에는 수많은 방이 있다(요한복음 142)고 말한다. 유교에도 주석가만큼의 [논어]가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특히 조선의 오랜 해석의 권위는 주지하다시피 주자가 독점해왔다고 말한다. 다산의 [논어]는 주자와의 비교 혹은 대결 없이는 그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897 페이지)

 

이 부분에서 AI에게 질문을 던졌다. ”한형조 교수는 [두 개의 논어]에서 주자와 다산의 논어 해석을 소개한다. 주자와 다산은 논어 해석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이를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이원적 대립(binary opposition)으로 읽어도 좋은가.“ 그러자 AI주자와 다산의 [논어] 해석 차이는 본질적이고 격렬하지만 이를 구조주의의 이원적 대립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구조주의적 이분법은 대상들을 정태적이고 절대적인 모순으로 환원하기 쉽기 때문입니다.“란 말을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을 변증법에서 말하는 비적대적 모순 관계로 읽어도 좋은가.“라고 물으니 AI한형조 교수의 유작 [두 개의 논어]에서 주자와 다산은 각각 내면과 개인의 수양(주자)과 사회적 실천과 관계(다산)를 강조하며 근본적인 대결 구도를 보입니다. 두 거장의 이러한 차이를 변증법적 관점의 비적대적 모순(Non-antagonistic Contradiction)으로 읽는 것은 철학적으로 타당하며 유용한 접근입니다.“란 말을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는 주자와 다산을 명상 vs 활동으로 읽는다. 나는 비슷한 말이지만 관조(觀照) vs 역행(力行)으로 읽는다. 당연히 나는 다산에 기울었다는 저자처럼 다산의 독법과 모색에 공감한다. 이제 이정우 교수의 [인간의 얼굴](1999년 출간)에 들어있는 제3도덕적 주체의 탄생 다산의 인간 존재론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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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수호신, 성층권 오존
시마자키 다쓰오 지음, 한명수 옮김 / 전파과학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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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층 대기 물리학 전공인 시마자키 다쓰오(島岐達夫)의 책이다. 저자는 남극의 오존홀을 보았다, 그 아래를 지나면 피부가 타는 느낌이 든다, 오존홀이 확대되어 지구 전체를 덮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와 같은 잘못된 보도를 접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책에는 흥미 있는 인물이 한 명 나온다. 바로 스위스의 물리학자인 오귀스트 피카르(Auguste Piccard: 1884-1962)이다. 1931년 피카르는 인류 최초로 성층권을 탐험한 선구자다. 피카르는 압력이 아주 낮은 성층권을 탐사하는 데 쓰인 기술을 압력이 극단적으로 높은 심해를 탐사하는데 활용했다. 그가 만든 현대적 심해 잠수정인 배씨스케이프(Bathyscaphe)가 그것이다.

 

성층권의 오존을 모두 모아 상온, 상압 상태로 압축하면 두께가 약 3mm 정도에 불과하다. 대기 전체를 마찬가지로 하면 수 킬로미터가 되므로 오존은 전체 대기의 100만분의 1 이하의 아주 소량이다. 하지만 오존은 320nm보다 짧은 파장의 자외선을 강하게 흡수하기 때문에 태양 자외선 중 이 짧은 파장의 빛이 지상에 전혀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있다.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 전체를 대기라고 한다. 대기의 약 75%는 대류권에, 25%는 성층권에 존재하며 성층권 위쪽에는 겨우 0.02%만이 분포한다.

 

11km까지의 대기에서는 상하 대류 운동으로 인해 고도가 높아짐에 따라 기온이 감소한다. 이 영역을 대류권이라 부른다. 구름의 발생, /저기압의 발달 등 각종 기상 현상은 모두 이 대류권에서 일어난다. 11km에서 50km까지의 영역에서는 오존이 태양 자외선을 흡수하면서 대기가 데워지기 때문에 기온이 다시 상승한다. 이 영역에서는 더운 공기가 찬 공기 위에 얹혀 있기 때문에 대기는 열적으로 안정되며 층을 이루고 있어 성층권이라 부른다. 성층권에서는 기온이 상승하지만 11km를 지나도 잠시 동안은 기온이 상승하지 않고 등온 상태가 계속되는 일이 있다. 이런 이유로 처음에는 성층권을 등온층이라 불렀다.

 

기온이 감소하다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높이는 대류권과 성층권의 경계인 대류권계면이다. 대류권계면은 약 50km의 성층권계면에서 끝나며 그 위에서는 오존이 줄어들기 때문에 가열이 감소해 온도가 다시 하강한다. 이 영역을 열권(熱圈)이라 부른다. 지구는 태양이나 다른 행성과 같은 시기 즉 46억 년 전에 원시태양성운을 이루던 가스와 먼지가 응집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때 생긴 대기 성분은 고온으로 인해 입자의 자유 속도가 커져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거나 강대한 태양풍에 날려 거의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뒤에 지구 대기는 주로 지하에서 분출된 화산가스로 이루어졌다. 주성분은 이산화탄소, 질소 분자, 수소 분자, 수증기였다. 메테인, 암모니아, 황화수소, 일산화탄소, 염화수소 등도 함유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수소가스는 아주 가벼워 우주 공간으로 빠져나갔고 수증기는 온도가 내려감에 따라 액화되어 땅속에서 스며 나온 물과 함께 해양을 형성했다. 그 속에 이산화탄소가 많이 녹아들었다.

 

화산가스 등으로 지구 대기가 형성된 시기와 초신성 폭발로 죽어간 거대 별 내부에서 합성된 후 성간 먼지와 가스 구름에 섞여 있다가 지구가 형성될 때 모여든 철, 니켈 같은 무거운 원소들이 지구 핵 쪽으로 가라앉은 시기는 거의 동시다. 지구 형성 과정에서 중력에 의한 밀도 차이에 따라 층상 구조화가 일어났다. , 니켈 등 무거운 원소들은 지구 중심부로 가라앉았고 산소, 규소, 마그네슘, 알루미늄 등은 지각과 맨틀을 이루었고 수소, 헬륨 등 가벼운 원소들은 지구 대기를 이루었다.

 

산소, 규소, 알루미늄, 마그네슘 등은 별에서 만들어진 후 지각이나 맨틀을 이루다가 화산분출로 대기권, 수권, 암석권을 순환하며 판구조 운동에 의해 맨틀 속으로 가라앉거나 지각 변동을 통해 새로운 암석으로 재탄생하는 기나긴 순환 과정을 거친다. 성층권 오존은 태양 자외선에 의해 생성된다. 그러므로 자외선이 강한 저위도나 여름철에 더 많이 생성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 관측 결과는 정반대다. 특히 겨울철에 고위도 지역에서는 하루 종일 태양광이 비치지 않는데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존량이 관측된다.

 

고위도에서 오존이 많은 원인은 무엇인가? 이는 운동에 의해 오존이 저위도로부터 고위도로 운반되기 때문이다. 공기가 운동하는 모양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공기와 함께 운동하는 물질을 찾아내 그 이동 경로를 추적하면 된다. 이 목적에 사용되는 물질을 추적자(tracer)라고 부른다. 인간 활동으로 공기 중에 방출되는 프레온 가스는 발생 원인이 명확하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 없는 데다가 화학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지면이나 다른 물질에 부착되어 소멸하는 일도 없기에 추적자로서 이상적이다.

 

오존 자체가 하부 성층권이나 대류권에서 추적자 역할을 한다. 수증기도 추적자다. 1883827일 인도네시아의 크라카타우섬에서 일어난 화산 분화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사건으로 분출된 분진은 32km까지 치솟았다. 이후 몇 주 지나 25km 부근까지 내려온 분진은 오랜 기간 동안 그 고도에 머물렀으며 강한 돌풍을 타고 지구를 몇 바퀴 도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남북 방향의 운동도 더해지면서 이 분진 때문에 일몰 때와 같은 붉은 태양이 관측되었다. 몇 년 동안 지구의 평균기온이 0.5°C나 낮아졌다.

 

이산화탄소는 지표면의 열을 가두어 상공으로 열이 올라가는 것을 막는 방패 역할을 한다. 성층권 입장에서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열을 공급받지 못해 부족해지고 결국 온도가 떨어지게 된다. 성층권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온도가 상승한다. 그 이유는 오존 때문이다. 오존이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자외선을 흡수하면서 막대한 열에너지를 방출하기 때문이다. 성층권에서는 이런 이유로 공기가 열적(熱的)으로 안정되어 있어 상하 방향의 공기 혼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대류권에서 올라온 프레온 등의 물질은 대류권계면의 벽에 가로막혀 성층권으로 침투할 수 없다. 그러나 적도 지방에서는 강한 지면 가열로 생기는 상승기류의 일부가 대류권계면을 통과해 상층권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104 페이지) 성층권이 대류하지 않는 것은 오존층 때문이다. 농산물을 더 많이 수확하려면 비료가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질소를 포함한 화학비료를 대량으로 사용하면 증가한 질소산화물이 촉매로 작용해 성층권 오존이 감소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오존층이 형성되(어 유해 자외선이 차단되)고서야 육상 식물이 번성할 수 있었다. 광합성은 바닷속 플랑크톤과 같은 조류에서도 일어나므로 오존층이 형성되지 않아 육상 생물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기에도 해양 조류(藻類)로부터 산소 분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초기 지구의 대기는 지하 깊은 곳에서 분출된 화산가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 오존이 없었다는 점은 명백하다. 오존 생성에 바탕이 되는 산소 분자도 화산가스에는 함유되어 있지 않았다. 산소는 식물의 광합성 과정에서 엽록소가 태양의 가시광선을 흡수해 물과 이산화탄소로부터 탄수화물을 만들 때 부산물로 만들어진다.

 

오존은 산소 원자 세 개로 이루어진 물질이다. 오존층은 주로 성층권에 있다. 오존 생성에 필요한 강한 자외선과 산소의 양 때문이다. 오존 생성에 자외선이 필수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강한 자외선이 산소 분자를 강제로 쪼개 산소 원자 두 개를 만든다. 이렇게 떨어져 나와 불안정해진 산소 원자가 주변의 산소 분자와 결합해 오존이 된다.

 

성층권은 안정된 대기층이라는 의미다. 성층권 에어로졸은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 복사 에너지를 우주로 반사해 온도를 떨어뜨린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해 지표에서 올라오는 열이 대부분 대류권에 갇힘으로써 성층권으로 전달되는 복사 에너지가 감소해 성층권은 온도가 떨어진다.

 

남극의 겨울에는 태양이 전혀 비치지 않기 때문에 오존홀 관측은 주로 달빛을 이용해 이루어진다. 남극 오존홀의 정식 이름은 남극의 봄 기간 동안 성층권 오존의 이상적인 감소이며 오존이 아주 없어져 구멍이 뚫려 있거나 1년 중 오존이 계속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오존홀이란 지구 대기 중 성층권에 있는 오존층의 오존 농도가 급격히 감소하여 마치 구멍이 난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지칭한다.

 

감소한 오존은 긴 시간에 걸쳐서이지만 회복된다. 오존파괴물질 사용을 자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성층권 오존 문제는 자연과학 문제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문제까지 아우르는 복합적 사안이다. 인간이 물질적 욕망 나아가 생활의 풍요로움과 편리함만을 추구하며 지구환경 파괴를 돌아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이제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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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은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 - 현대 물리학의 존재론적 질문들에 대한 도발적인 답변
자비네 호젠펠더 지음, 배지은 옮김 / 해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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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론 물리학자 자비네 호젠펠더의 책이다. 원제는 [실존적인 물리학(Existential Physics)]. 책은 다루는 분야(다중우주, 빅뱅, 만물의 이론 등)로 인해 어러운데다가 저자 자신도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과는 거리가 있는 학자이고 연구자다. 인내하며 읽으면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꽤 있는 책이다. 본문 내용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에필로그를 통해서는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불가지론자이자 비종교인이되 종교적 신념에는 반대하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저자는 자신의 책은 현재 물리학이 제기하는 거대한 물음에 대해 다룬 책이라고 말한다. 가령 지금 이 순간이 과거와 다른지, 각각의 기본 입자에 우주가 깃들어 있는지, 자연 법칙이 우리의 판단을 결정하는지 같은 의문은 다루는 책이라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저자는 자연에 기반한 증거를 바탕으로 수립된 이론만 고수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과학이 발전하면 내용이 바뀔 수도 있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특수상대성 이론에서 상대성이란 절대적인 정지 상태가 없다는 뜻이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포문을 연 저자는 시간의 흐름은 보편적이지 않다고 결론 낸다. 저자는 양자역학이 관련되기 이전에 당시 알려져 있던 자연 법칙은 결정론적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물리학자들은 자기가 쓰는 수학이 실재에 관해 실재보다 더 많은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자주 범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과학의 목적이란 세상을 유용하게 서술할 방법을 찾는 것이라 말한다. 설명은 단순할수록 더 유용하다고 말하는 저자는 과학 이론은 우리가 세상에 관해 하는 이야기를 대폭 단순화한다고 결론 낸다.

 

저자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창조주 가설은 설명력을 정량화할 수 없다. 이 가설로는 아무것도 계산할 수 없다. 그렇다고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비과학적이다라고. 덧붙여 저자는 6000년 전에 이 세상 모든 것이 제 자리에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은 틀릴 것도 없고 쓸모도 없다고 말한다. 이 가설은 정량적으로 대단히 복잡해서 초기 조건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데이터를 집어넣어야 한다.(58, 59 페이지)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데이터를 취하고 거기에서 단순한 설명을 찾는다. 계산할 수 있는 데이터 안에 패턴이 많을수록 설명은 좋아진다. 저자는 초기 우주에 관한 모든 가설은 순수한 추정일 뿐으로 이러한 가설들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쓰인 현대판 창조 설화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증거가 없을뿐더러 그 중 옳은 가설을 가려내려는 논쟁을 잠재울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지 그 자체를 생각해내기도 어렵다고 말한다.(73, 74 페이지)

 

저자는 우주는 오직 제한된, 축복받은 시간 틀 안에서만 생명을 지원해줄 뿐이고 마침 우리는 그 틀 안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주 인상적인 말을 한다. 자연 법칙은 갑자기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휙휙 바뀐다면 애초에 그것을 법칙이라고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저자는 의식이 있는 존재가 만들어지려면 입자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할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전체는 부분들의 합일 뿐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을 대단히 수학적인 사람이라 소개하며 개인적으로 수학을 일상생활의 언어로 번역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추상적 수학의 직관적 언어로 설명할 때 뭐가 문제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바로 양자역학이다.(174 페이지) 저자는 양자역학의 기이함은 대부분 양자역학을 일상의 언어로 억지로 설명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독자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정확한 비유 같은 것은 없다. 그 비유가 정확하다면 더 이상 비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양자역학에서는 모든 것을 파동 함수로 서술한다.(176 페이지) 양자역학에서 결과 측정이 불확실한 것은 초기 조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양자역학 자체가 그냥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혼돈 법칙도 실은 결정론적이다. 다만 초기 조건에 대단히 민감하게 의존하기 때문에 예측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양자 사건은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이며 그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저자는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유의지는 그 자체로 일관성이 없는 아이디어다. 의지가 자유로우려면 다른 무엇도 그 의지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뇌의 신피질에는 자연 법칙을 능가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용액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제한된 정보 안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이 무엇인지 가늠하는 것이 전부다.

 

결정은 우리 진화의 결과이며 자연 법칙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저자는 자유의지가 있든 없든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자유의지가 없어도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에게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하고 가장 통합적인 원리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최소 작용의 원리를 꼽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소작용의 원리란 자연계의 모든 물리적 현상이 항상 가장 효율적이고 작용이 최소화되는 경로를 따른다는 법칙이다. 자연 상수들이 왜 지금의 값인지를 알아내려는 시도는 물론 관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평행우주를 끌어들이는 이론들도 모두 과학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냥 수학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과학으로 변장한 종교라고 말한다.

 

저자는 적어도 과학자라면 자신들이 속한 분야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끔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과학적인 답이 그건 우리도 몰라요밖에 없을 때도 있다고 말하는 저자 다. 저자는 여전히 진행 중인 지식 발견 과정에서 종교와 과학은 앞으로도 한참 더 공존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과학 자체로는 한계가 있고 인간은 과학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방식의 설명을 갈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참으로 인상적인 말을 한다. 우리가 안고 있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 길을 꽤 잘 걸어왔다. 우리는 지구 위에서 진화를 직접 떠안은 최초의 종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환경에 의해 선택되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의 필요에 맞게 환경을 바꾼다. 물론 이것을 잘해 나가고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지구의 기후를 살기 좋은 범위로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걸 보면 우리가 복잡계인 동시에 일부는 혼돈계인 계를 정확히 인지하는 능력이 과연 있는지 심각한 의심이 든다.

 

어쩌면 기후처럼 다면적인 비선형성 계를 이해하기에는 우리 뇌가 역부족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그렇다면 종국에는 과학 지식을 사용해 서식지 통제를 더 월등히 해낼 수 있는 종이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리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저자는 과학만이 유일한 뉴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과학은 직업이기 전에 영감이라 말한다.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고 진정한 새로움을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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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에게 물리학, 지구과학에서 전자와, 전자의 에너지 상태는 중요한가?라고 물으니 두 분야에서 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구과학에서는 광물 동정(同定)과 원소 분석에서 유용하며 오로라 현상 분석, 대기화학 등에서도 그렇다고 한다. 두 학문은 모두 미시세계의 전자 행동을 통해 거시 세계의 현상들을 명쾌하게 풀어내는 학문이라고 한다.

 

볼프강 파울리의 배타원리와 전자 오비탈에 대해 알게 해주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니 1. [스핀](이강영 지음), 2. [양자역학 이야기](팀 제임스 지음), 3. [우리집 강아지에게 양자역학 가르치기](채드 오젤 지음) 등을 추천한다. 사이토 가쓰히로의 [한 권으로 읽는 원자, 소립자, 양자의 세계]는 전자와 전자의 에너지 상태, 오비탈 등에 대해 말하는 책인가?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오비탈은 원자핵 주위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공간으로 나타낸 함수나 모형을 뜻한다. 과거에는 전자가 태양계 행성처럼 정해진 궤도를 돈다고 생각했지만 현대 양자역학에서는 전자가 워낙 빠르고 작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전자가 나타날 수 있는 '확률적인 구름' 모양의 공간을 오비탈이라고 한다.

 

지질학과 전자, 지질학과 오비탈은 관계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한다. 전자는 물리, 화학, 지구과학, 생물 중 어떤 학문과 가장 관계가 큰가?라고 물으니 물리학이 가장 높고 화학은 높고 생물학은 보통이고 지질학은 낮다고 한다.(매우 관계가 깊다고 하면서 가장 낮다는 것이 부조화스러워 보인다.) 인공지능은 전자는 지질학이나 지구과학에서 지구 자기장 형성, 광물 분석 등과 관계되지만 직접적인 연구 대상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그럼에도 전자, 오비탈, 파울리의 배타원리 등에 대해 관심이 많다. 현무암은 왜 검은가?라는 질문에 철이 많아서라고 답할 수 있지만 결국 전자의 에너지 상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현무암은 철이 많아서 검다고 말하는 것은 지질학적 설명이고 현무암 속 철 화합물들이 가시광선 영역의 빛을 거의 흡수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물리학의 설명이라고 인공지능은 답한다. 그런데 숲해설사들은 나뭇잎이 초록색인 것은 광합성에 필요하지 않은 초록빛을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식이라면 지질해설사들도 물리학 차원의 설명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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