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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 삶이 때로 쓸쓸하더라도
이애경 글.사진 / 허밍버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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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애경작가님의 전작이 <그냥 눈물이 나; http://blog.joins.com/yang412/12506027>였음을 생각해보면 제목이 참 절묘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전작에 이어 쓴 속편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보면 전작에 붙였던 프롤로그도 없이 바로 본문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저의 짐작이 터무니없어 보이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냥 눈물이 나>에 ‘아직 삶의 지향점을 찾아 헤매는 그녀들을 위한 감성에세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것은 어쩌면 방황하는 젊음을 어쩔 수 없어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이는 느낌이 들었다면,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은 이제 삶의 지향점을 정하기 위하여 방황을 멈추기를 조언하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언제 적 이야기였던지 기억도 가물거리지만, 서른 언저리는 아무래도 사랑이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에서 요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연인’이라는 코너에서도 보면 친구처럼 지내는 남녀가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는 순간을 애써 부정하는 장면을 코믹하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미쳐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시나브로 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작가는 ‘어디서부터 사랑일까’고민해볼 것을 주문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상정하고 있는 여러 가지 경우들 가운데, 저는 “너에게 시선도 못 주고 네 옆을 재빨리 지나갈 때부터 사랑(17쪽)”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헤어질 때 마음 아플 것을 생각한다면, 역시 “바래다 주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의 생각들을 읽어가다가 깜짝 놀란 대목이 있습니다. ‘기억의 속도’에 관한 글입니다.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를 끄집어내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너를 만난 순간, 내 대뇌피질에 언제나 네가 붙어 있었던 것처럼 너를 기억해 내는 데 0.1초도 걸리지 않았고, 네가 한 말들과 약속들을 네 앞에 꺼내 놓는 데 단 1분도 지체되지 않았다.(68쪽)” 기억 속의 누군가를 끄집어내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짜야 하는 저로서는 놀랍고도 부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젊어서 일까요? 아니면 타고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동생처럼 지내던 사람이 멀리 떠나던 날 공항까지 배웅을 나갔던 그녀는 그날의 느낌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데 눈물이 났다. 그건 슬픔이 오는 길을 돌아가느라 수고한 내가 흘린 땀방울이었을 것이다.(79쪽)”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애꿎은 땀방울을 핑계 삼는 것 같습니다만, 어쩌면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을 설명하기 위한 준비작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미있게도 그녀는 읽는 이로 하여금 골라보는 재미를 즐겨보라는 듯이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두루 꼽아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더 많은 경우를 생각해냈겠지만 아마도 지면관계상 일부만 소개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든 그녀가 내놓은 눈물을 그치는 타이밍 가운데 “온몸의 수분이 말라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가 마음에 듭니다. 생리적으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ㅋㅋ

 

요즈음 제가 자료를 모으고 있는 여행에 관한 그녀의 재미있는 생각은 완전 생각지도 못하고 덤으로 받은 선물 같습니다. ‘여행을 떠나는 이유’입니다. “전 세계 70억 명의 사람 중에 우리가 한 번이라도 인사를 나누게 되는 사람은 3천 명 정도이고 그중 150명 정도와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 그런 면에서 여행은 내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69억 명의 인생을 관람하거나 그들의 삶에 입장할 수 있는 낯설고도 붙임성 좋은 티켓이다. 중요한 건,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든 관람차를 타든 내가 그 티켓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121쪽)” 저자가 어디에서 들은 이야기인지 밝히고 있지 않아서 근거가 분명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재미있지 않습니까?

 

책을 읽다보면 가끔 작가의 생각에 딴죽을 걸고 싶은 충동이 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클래식에 눈물 흘리다’에서 저의 못된 버릇이 튀어나옵니다. 클래식이나 구성진 판소리에 귀가 꽂히기 시작하면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적었는데, 제 생각에는 이미자씨의 노래가 귀에 착 감기는 나이가 돼야 진정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자씨의 팬이었던 저는 애늙은이였던 모양입니다.

 

재미있고 느낌 나는 사진들에 넉넉한 여백으로 마음에 여유까지 생기는 편집이 눈을 끄는 이애경작가님의 마음까지 끄는 생각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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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기의 시대 - G1으로 향하는 중국몽
김태일 지음 / 이담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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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중국은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를 포함한 동중국해 일대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으로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최근 일본 정부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서 가상적국이 점령한 섬을 탈환하는 작전을 전개한 것과 관련하여, 해당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입니다. 방공식별구역은 군사·안보를 목적으로 통상 영토와 영해의 직접적인 상부 공간에 국한하는 영공의 범위보다 넓게 설정하는데, 이는 속력이 빠른 항공기가 영공을 침범하는 경우를 상정하여 대응할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국 정부가 발표한 방공식별구역 운영규칙에 따르면, 방공식별구역을 지나는 항공기는 사전에 중국 외교부나 민간 항공국에 비행 계획을 통보하고, 방공식별구역 관리기구의 통제에 따라야 하며, 이에 응하지 않으면 무장력을 동원해 ‘방어적 긴급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합니다.(연합뉴스 11월 23일자 기사, “중국, 동중국해 상공에 ‘방공식별구역’ 설치”)

 

동중국해의 해양을 두고 중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의 국가들이 첨예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국제사회에서의 중국의 위치가 격상되어온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위치하여 오랜 세월을 이들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지난 세기에 겪었던 불행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면 중국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중국의 변모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반응까지도 살펴야 하겠습니다. 돌이켜보면 근세 이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 지역에서 힘의 흐름은 중국을 중심으로 밖으로 흘러나가는 구조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힘의 흐름 속에서 중국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힘에 눌려 사라져갔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주권구조의 부침은 있었지만 오랜 세월을 독립국가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중국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세기에 일본의 침략을 받아 주권을 잃었던 것은 이때까지의 힘의 흐름과는 상반되는 역방향으로 흐르게 된 힘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세기 중국과 그 주변 국가들은 겁박하여 한 몫을 챙기려는 열강의 표적으로 관심을 받았지만, 불과 한 세기만에 상황이 역전되어 이제는 눈치를 보아야 하는 상대로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중국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조 베넷의 <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http://blog.yes24.com/document/7446584>는 중국이 어떻게 세계의 공장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베넷은 중국이 무한에 가까운 저렴한 노동력을 무기로 전 세계 경쟁자들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상품을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 오늘날의 중국의 번영이 가능했다고 진단하였습니다. 나아가 “이제 중국은 21세기를 지배할 준비를 완료한 것 같다. 일단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나면,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그 지배는 계속될 것이다. 규모가 워낙 엄청나서 대적할 나라도 없다. 인도라면 그나마 상대가 되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다.(조 베넷 지음, 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10쪽)”라는 전망까지 내놓았습니다. 베넷의 전망이 옳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나친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중국을 제대로 알지 못한 저의 선입견일 수도 있습니다.

 

중국의 최근 모습을 비교적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어 중국알기에 도움이 될 책을 소개합니다. 현재 중국경제정보분석(CEIA) 수석분석가로 재직하고 있는 김태일님의 <굴기의 시대>입니다. 저자는 중국 상해재경대학원에서 중국주식 분야를 연구하고, ‘중국의 세계금융중심 건설 전략’이라는 주제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굴기(崛起)란 ① 산이 불쑥 솟음, ② ‘기울어진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남’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세계만방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젖어왔던 중국으로서 지난 세기는 치욕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런 중국의 모습을 기억하는 국제사회로서는 오늘날의 중국이 새롭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전적 의미대로 오늘의 중국은 분명 굴기의 시대를 맞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굴기의 시대>에서 저자는 중국이 세계만방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다시 세우려하고 있다는 ‘중화굴기’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내, 문화, 경제, 금융, 소비, 산업, 자원, 군사, 해양, 우주분야 등 전방위적으로 달라진 중국의 모습을 살피고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영역을 다루게 된 이유는, “본서의 목적은 중국의 앞날을 예언하고 그에 합당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중국의 미래에 영향을 끼칠 변수를 추상적 모형의 틀 속에 가두고 그 경로를 탐색하는 데 더 큰 의미를 두었다.”라고 적은 머리말의 첫 구절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G1으로 향하는 중국몽(中國夢)’이라는 부제를 달아 언젠가 미래에는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글로벌 선두에 서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면서도 ‘21세기에는 이전 세기처럼 단독으로 한 국가가 다른 강대국들을 압도하는 시대는 오지 않을 것 같다.’라고 예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등 G7국가들이 주도하던 글로벌 아젠다는 최근 들어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국가와 중남미(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유럽(러시아, 터키, 호주, EU)에 아프리카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가 더해져 확대된 G20국가들이 논의하여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유럽과 일본의 제국주의가 주도하던 지난 세기말과는 많이 달라진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물론 자원에 의존하여 부상했다가 몰락한 쓰라린 경험이 있는 남미국가들의 사례에 비추어볼 때 자만이나 방심은 금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굴기의 시대>에 담은 저자의 생각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중화주의(中華主義)를 만천하에 고하노라’는 글로 1부 ‘중화굴기’를 시작합니다. 중화주의는 유일한 문명국인 화하족(華夏族)의 나라를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그리고 북적(北狄) 등 네 이족(夷族)이 중국화된다는 화이사상(華夷思想)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중국은 천하의 질서가 중화와 이적 사이의 조공과 책봉관계로 유지되고 이적이 중화를 거부하며 중국을 침범하는 일은 천하의 질서를 흩트리는 불의한 일로 여겼다. 따라서 중화가 이적 위에서 천하를 조율할 때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고 황제의 권위는 이적들의 분쟁을 진정시키고 천하의 안정을 유지함으로써 보장받는다고 생각했다.(26쪽)”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의 문명이 시작되었다고 믿는 하(夏)나라가 동이족의 나라였다고 하는데서 부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등 이적(夷狄)이 중화를 지배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밀레니엄에 해당하는 서기 1,000년부터 1,900년의 시기의 대부분은 이적(夷狄) 출신의 이들 국가가 중국을 지배했을 뿐, 화하족(華夏族)으로는 오직 명나라(서기 1368~1644)만이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본다면 중화주의에 지나치게 방점을 둘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 글을 여는 “패도(覇道) 없는 왕도(王道)는 분열을 낳고 왕도(王道) 없는 패도(覇道)는 단명한다. 그래서 패도와 왕도를 두 손에 움켜쥔 국가만이 세계를 선도할 수 있다.(37쪽)”라는 말은 주(周)나라가 쇠약해진 춘추시대에 배경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인덕을 근본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는 정치사상인 왕도와 무력이나 권모술수로 천하를 다스리는 패도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저자는 중국이 21세기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근거로 과학, 기술, 산업 등 물질적 영역을 넘어서 정치, 사회, 문화, 도덕의 영역으로 진보가 확대되고 있는데, 정책 일관성, 명확한 지표, 주체적 판단 그리고 개방적 사고라는 4가지 동력이 중국의 진보를 견인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을 마무리하면서 브레진스키가 최근에 쓴 <전략적 비전>에서 미국의 글로벌 파워가 줄어들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8개 지역이 지정학적으로 가장 위험에 처할 것이라는 예견을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안보 공약이 덜 믿을 만할 때는 한국은 혼자 힘으로 군사 또는 정치적 위협에 직면해야 한다.”라는 조언에 대하여 “이대로 반세기만 흐른다면 한반도는 지도에서 사라지고 두 번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도 가끔 떠오른다. 다가올 2050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가 계속 존속하리라 장담하지 마라.”라고 불안한 내심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지나친 걱정은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외면하고 모른 척하는 것도 위험한 생각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면 살길을 찾을 수 있는 법입니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중국의 번속국에 불과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를 살펴보면 중화주의를 앞세웠던 중국이 조선만큼은 소중화로 대접하였던 것은 수와 당의 군사적 침략을 물리친 것으로부터 중국의 통치이념의 바탕이 되었던 학문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문화가 중국과 견줄만하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자가 이 책의 주제로 삼고 있는 굴기하는 국가의 모습은 이미 우리나라가 중국에 한발 앞서 경험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은 우리나라의 굴기의 역사에서 배워야 할 점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문화굴기에 이어지는 경제, 금융, 소비, 산업, 자원, 군사, 해양, 우주분야 등에서 중국이 굴기해온 모습을 저자는 다양한 수치와 표 등을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중국인이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면’이라는 제목을 보면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해지는데, “중국이 소비하면 모든 것이 부족해지고 비싸진다.(272쪽)”라는 답이 곧바로 나옵니다. 덧붙여 “중국 소비는 세계 경기의 풍향계 역할을 하며 그 속에서 투기는 기승을 부린다. 중국은 지금 글로벌 소비 패러다임을 전환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을 더하고 있습니다. 커피와 같은 기호식품이 이럴진대 개인의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에서부터 산업생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원의 확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원자재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국과 경쟁을 벌어야 하는 일은 치열하다는 말로는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최근 심상치 않은 북한의 동향을 보면서 군사 분야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됩니다. 지난 18일 미국 국방부 고위 당국자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관련하여,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헌법 해석 변경을 선택하면 한·미·일이 (동북아에서) 직면한 위협에 대한 강력한 억지력이 될 것”이라며 “이 위협에는 북한의 위협도 포함된다.”고 말했다고 기사는 전했습니다.(조선일보 11월 21일자 기사, “美 "日집단자위권 대상에 한반도 포함”) 한반도에서 전쟁 상황이 발생하면 일본은 자위대를 투입하여 납북 일본인을 구축하는 특별조치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뜬금없는 주장이 연초에 나왔던 것도 면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자 역시 일본의 이러한 전략적 발언에 대하여 “자신의 입지를 좁히는 것을 넘어 이제는 미국의 아시아 회귀전략마저 방해한다.(405쪽)”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군사전략은 한반도의 대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만큼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겠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단지 햄버거 크기가 변할 뿐’이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으로 한반도에 관심을 쏟고 있는 국가들의 이해로 대차대조표를 만들고 그 안에서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햄버거 크기’라는 비유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누구도 한입에 먹을 수 없도록 햄버거의 크기를 키워야 하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안정이 글로벌 국가들의 이익과 직결된다면 이들 모두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역할을 맡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북한의 동향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 한반도에 이해가 걸린 여러 나라들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현실을 진단할 때는 지나친 낙관도 지나친 비관도 금물입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옛말은 세월이 변해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냉정하게 우리의 좌표를 살펴보기 위해서라도 중국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굴기의 시대>는 중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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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 - 문학과 문화학의 교차점
최문규 외 지음 / 책세상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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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제가 뒤쫓고 있는 화두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기억이 만들어지는 기전이 궁금해서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기억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찾아 읽고 있습니다. <기억과 망각>은 ‘문화개념’이라는 색다른 관점에서 기억을 다루고 있어 흥미를 끌었습니다. 저자들에 따르면 문화개념은 결코 투명하지 않고 매우 복잡한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자체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고 다른 주제와 연관시켜 간접적으로나 조명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문화개념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기억과 망각>에서는 다양한 문화적 매체가 기억과 망각을 중심으로 수행하는 문화적 역할을 정리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에 참여하고 있는 일곱 분의 필자들이 모두 독일문학을 전공하신 분들이라는 점입니다.

 

전체 내용을 요약해보면, 1장에서는 문화의 기원, 문화학과 문학의 상관관계를 전반적으로 조명하고, 2장에서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문화적 기억과 문자 문화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3장에서는 문화 전승의 구술성과 기록성의 측면에서 기억에 의지하여 구술로 전승되던 문화가 문자라고 하는 기록문화로 전환되면서 일어나는 변형을 살폈습니다. 4장에서는 역사드라마를 통하여 기억이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살피고 있는데, 역사 드라마를 통해서 과거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변형과 구성으로서의 역사가 사회적 기억으로 상승될 수 있는 한편 부정적인 차원에서 완화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5장에서는 개인의 정신영역에서 나타나는 기억과 망각 현상을 논하면서 서사와의 관련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망각의 의미를 짚고 있습니다. 또한 기억이 핵심 추동력으로 작용하는 문화에서 망각이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어떻게 평가되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문화학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기억과 망각을 주제로 현대문학의 대표적 작가인 카프카의 텍스트와 글쓰기를 고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글자 매체와 기술 매체와 관련하여 기억과 망각의 특징을 조명했습니다.

 

기억과 망각이라는 문화학적 주제를 인문학적 차원에서 파악해보려는 노력이 하필이면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궁금증은 독일문화학자 아스만의 설명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엄청난 저장 능력, 이른바 ‘인공 기억’능력을 갖춘 새로운 전자 매체의 등장, 두 번째는 무엇인가 지나갔다는 의식 때문에 그 기나간 것이 기억의 새로운 대상으로 부각되어야 한다는 점, 세 번째는 유럽의 특수한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의사소통적 기억이 문화적 기억의 장으로 넘어가는 시점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저자들은 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비극으로 꼽고 있는 파시즘적 만행을 겪은 산증인 들이 사라지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에서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직접 경험하고 과거에 대한 의사소통적 회상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점을 고려하며 기억에 의존하는 문화의 전달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마련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기억과 망각에 관하여 저자들의 인용에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지만, 더 생각할 필요가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가 <파이드로스>에서 주장하는 문자 또는 쓰기에 대한 비판입니다. 첫째, 쓰기는 현실적으로 정신에 속한 것을 정신의 밖에 설정하려 한다는 점에서 비인간적이며, 하나의 사물이자 만들어낸 제품에 불과하다. 둘째, 쓰기는 기억을 파괴한다. 쓰기는 내적 수단 대신 외적 수단에 의지하기 때문에 망각되기 쉽다. 셋째, 씌어진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설명에 대한 요구에 대답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리석은 말만 되풀이되는 공간이다. 마지막으로 구술되는 말은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으나 씌어진 말은 그럴 수 없다. 실제의 말과 사고는 본질적으로 실제 인간끼리 주고받는 맥락 안에 존재하는 데 비해 쓰기는 그러한 맥락을 떠나 비현실적․비자연적 세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73쪽) 기억을 문자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기록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변형이 일어날 수도 있겠으나, 기억에 의존하여 구술로 전달되는 것 역시 기억의 퇴화와 전달자의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다는 점이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아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문화의 전달 매체로서의 문자의 역할과 기능에 대하여 꼼꼼하게 논의한 내용을 담고 있어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시각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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止學 멈춤의 지혜
마수추안 지음, 김호림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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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이 많아지면서 가끔씩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날 열정에 넘칠 때는 세상의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것 같아 무리하게 밀어붙이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에 성공하기도 하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럴 때는 잠시 쉬거나, 아니면 돌아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겠다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멈추거나 돌아가는 일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 배울 수 있었더라면 싶기도 합니다.

 

마쉬추안이 엮은 <지학; 멈춤의 지혜>가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편저자 마쉬추안은 “문학과 역사에 일가를 이룬 고적(古籍) 전문가로, 주로 고전에서 소재를 찾아 문학 서적을 집필했고, 역사서 및 옛 경전을 탐구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재조명, 현대적 감각에 맞게 풀어 쓰는 작업에 주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멈춤’의 사상은 노자의 <도덕경>, 장주의 <장자>, 공자의 <논어>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수나라 유학자인 문중자(文中子) 왕통(王通)이 하나의 학문으로 집대성했다고 합니다. 왕통은 멈춤(止)과 멈추지 않음(不止) 사이가 성공과 실패의 분수령이자 큰일을 이루는 자와 용렬한 자의 경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나 옮긴이 모두 <지학; 멈춤의 지혜>의 체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는 모두 열 가지의 화두에 따라 다시 열 가지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100가지의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열 가지의 화두는 지혜, 권세, 이익, 언변, 명예, 감정, 고난, 화해, 마음 그리고 수신입니다. 각각의 삶의 지혜의 말씀은 먼저 경구와 그 해석, 그리고 경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고사를 인용하는 순서로 편제되어 있습니다.

 

멈춤의 지혜에 해당되는 말씀을 고난편에서 찾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고난’편의 다섯 번째 말씀은 躁生百端 困出妄念 非止寞阻害之蔓焉(조생백단 곤출망념 비지막조해지만언; 성급함은 온갖 우환을 낳고 곤경은 사악한 생각을 쉽게 낳으니, 이를 멈출 줄 모르면 해악이 만연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입니다. 이 말씀은 “옛말에 ‘사람이 가난하면 뜻도 짧다’고 했으니, 곤경에 처하면 쉽게 극단으로 치달아서 자기자신을 잃어버린다. 물론 그들 자신도 성급함의 해로움을 전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문제는 이성을 잃은 행위가 정상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조용히 은인자중하지 않고 성급히 행동하는 것은 곤경을 벗어나는 좋은 방책이 아닐뿐더러 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게 된다.(287쪽)“라고 풀고, 북위 태무제 때, 중서박사 고윤이 이 말씀을 따라 목숨을 구한 사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우환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만약 곤경을 즐거운 일로 볼 수만 있다면, 그 곤경은 더 이상 곤경이 아니다.(296쪽)”는 말씀과 같이 새기면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문중자의 경구를 마쉬추안이 해석하고 그에 맞는 고사를 이끌어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해봅니다만,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책의 체제와 관련하여 경구와 해설 그리고 고사 등이 각각 누구의 것인가 하는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어떻든, 춘추오패의 한 분인 진(晉) 문공(文公) 중이(中耳)가 외국을 떠돌아다닐 때 보좌하던 개자추(介子推)는 허벅지살을 베어 중이에게 먹이는 등 헌신을 다하였지만, 중이가 왕위에 오른 뒤에 개자추의 헌신에 적절한 포상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모친과 주변에서 문공을 만나 설명하라고 권유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자추는 “제가 분노를 공로를 스스로 드러낸다면 이 또한 부귀를 추구하는 것이니, 저의 말과도 또한 맞지 않습니다. 제가 분노를 드러내면 결과적으로 주공께서 난처해지실 테니, 그건 결코 제가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더 이상 아무 말씀 마시고 저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시지요.(177쪽)”라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함께 면상산으로 들어가 세상을 등졌다고 합니다. 나아갈 바와 멈출 바를 잘 아는 현인이었던 것입니다. 물러날 때를 아지 못하고 연연하는 것처럼 추하게 보이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가까이 두면 살아가면서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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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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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는 소설에 관한 성찰을 에세이형식으로 발표해왔습니다. 1986년 <소설의 기술>이 그 첫 번째 에세이집이고, 1993년에는 <배신당한 유언들>을, 2005년에는 <커튼> 그리고 2009에는 <만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소설의 기술>은 아직 읽지 않았지만, 출판사에서는 “밀란 쿤데라는 이 작품을 통해 소설이란 “아직도 인간이 삶과 부대낄 수 있게 해 주는 마지막 보루”라고 말하며, 이론가도 철학자도 아닌, 단지 한 소설가로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이라는 장르, 그리고 ‘소설 쓰기’라는 행위에 대한 쿤데라의 생각과 철학을 한 권에 담은 이 책은 그의 작품을 보다 새롭고 근본적으로 이해하게 해 주는 초석이 될 것이다.“라고 요약하였습니다.

 

<배신당한 유언들; http://blog.joins.com/yang412/13108823>에서 쿤데라는 라블레를 시작으로 세르반테스, 발자크, 프루스트, 카프카 그리고 헤밍웨이 등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독특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작가의 사유는 문학의 범위를 넘어 작곡, 음악, 번역, 지휘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서로 연관을 짓고 있는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쿤데라는 카프카와 그의 작품에 대한 내용을 적지 않게 담고 있는데 다음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들을 소설 읽듯이 읽는 것뿐이다. K라는 등장인물에게서 저자의 초상을 찾는다거나 K의 말들에서 암호화된 신비한 메시지를 찾으려 들 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동거지, 그들의 말, 그들의 생각을 주의 깊게 좇으면서 눈앞에서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배신당한 유언들, 311쪽)”

 

저자는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에세이집 <커튼>에서 “객관적인 미적 가치의 가정만이 예술의 역사적 진화에 의미를 부여한다.(14쪽)”라는 구조주의 미학자 양 루카로프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미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의 역사는 그 연대기적 연속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거대한 작품 창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톰 존스>를 쓴 헨리 필딩을 소설의 시학을 생각해낸 최초의 소설가들 중 하나로 지목하여 소설의 미적 가치에 관한 역사적 흐름을 <커튼>의 1부 ‘연속성의 의식’에서 논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세계문학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문학의 커다란 흐름은 문학적 성과가 축적되어 온 커다란 국가들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며, 문학적 성과가 세계문학계에 활발하게 소개되지 못하는 관계로 소외되고 있는 작은 국가들이 세계문학에 기여할 수 있는 바가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쿤데라는 보헤미아라고 부르는 중부유럽의 문화적 전통을 강조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어, 역시 세계문학의 외곽을 떠돌고 있는 우리문학계를 고려한다면 관심이 끌리는 것 같습니다.

 

3부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기’에서 저자는 소설은 모름지기 사물의 핵심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소설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구절입니다. “소설가는 역사가의 하인이 아니다.(97쪽)” 흔히 소설가 역시 역사의 흐름을 기록하는 역할을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저의 생각을 수정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쿤데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소설가를 매혹하는 역사란, 인간 실존 주위를 돌며 빛을 비추는 탐조등, 역사가 움직이지 않는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실현되지 않고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았을 뜻밖의 가능성들에 빛을 던지는 탐조등으로서의 역사다.(97쪽)”

 

4부의 제목은 ‘소설가란 무엇인가?’입니다만, 저자가 생각하는 소설가의 정의를 한 줄로 요약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브로흐, 플로베르, 프루스트, 세르반테스 등을 빌어 소설가를 에둘러 설명하고 있습니다. 5부 ‘미학과 삶’에서는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불꽃 튀는 대결을 보여주는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손에 잡힐 듯해서 시간을 두고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두 주인공은 서로 대립한다. 각각은 부분적이고 상대적이지만 그 자체로만 보면 전적으로 옳은 진리에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지만, 진리의 승리를 위해서는 상대편을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 이처럼 두 주인공 모두 정의로우면서 동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161쪽)”

 

정리를 하면, <배신당한 유언들>에 이어 플로베르, 발자크, 도스토엡스키, 프루스트로 성찰의 폭을 넓혀 유럽 소설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조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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