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배반 - 뒤집어보고, 의심하고, 결별하라
던컨 와츠 지음, 정지인 옮김, 황상민 해제 / 생각연구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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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뒤집어보고/의심하고/결별하라/는 부제를 단 <상식의 배반>을 쓴 던컨 와츠박사는 그의 독특한 이력만으로도 눈길을 끄는 것 같습니다. 흔히 우리가 이과뇌와 문과뇌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즉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뇌영역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각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호주출신인 와츠박사는 해군사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코넬대학원에서는 이론 및 응용역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세계적인 사회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백과사전에 따르면 상식(常識)이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 일반적 견문과 함께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따위가 포함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와츠박사가 서문에서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요약해보면, 상식이란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복잡성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적응된 것이므로 그런 상황에 관한한 상식은 아주 유용하지만 기업과 문화, 시장, 국가, 세계적인 기관이 관련된 상황은 일상의 상황과는 다른 복잡성을 안고 있기 때문에 일상적인 상식을 적용했다가는 여러 가지 오류를 낳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상식의 배반>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식’이라는 제목의 제1부에서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알고 있는 일의 진실이 무엇인지, 상식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는 점 등을 짚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일상의 영역을 넘어서는 문제까지도 상식에 의존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접근을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세 가지의 오류의 유형이 있다고 합니다(48쪽). 첫 번째는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우리가 필연적으로 늘 의식하는 유도나 동기, 믿음 같은 요소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 두 번째는 개인행동의 모형을 집단행동에 적용할 때 그 결함이 더 심각해진다는 것, 마지막으로 우리가 실제로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생각보다 적다는 것 등입니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별로 없다고 단정하고 있어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의 논리는 “X라는 일이 일어난 까닭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X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들이 원하던 것이 X임을 아는 것은 X라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90쪽)”라고 요약하는데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우리가 공부한 역사를 통하여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진리를 알고 있고, 시대적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조건에서도 같은 결과를 볼 수 없겠지만,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을 돌아보면서 현재 시점에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적용하여 최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1부의 마지막부분은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예측을 해보고 그 예측에 맞추어 준비하는 삶을 살아보려고 노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예측수단은 아주 다양해서 기왕에 축적되어 있는 데이터를 활용하기도 하고 전문가의 지식을 바탕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이도저도 아니면 점쟁이의 직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저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일에 대한 신뢰가 그리 크지 않아 보입니다. 그 이유는 “어떤 행위가 낳는 의미를 단번에 평가할 수 있는 시점을 ‘결과’라고 할 때, 대부분의 인생사에서 명확하게 정의된 ‘결과’라는 것 자체가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일 뿐이다.(168쪽)”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구나 예측을 하는데 적용하는 법칙이 기왕의 데이터와 상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틀린 예측을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강조하고 결국은 비상식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게 된 것 같습니다. “비상식”이라는 제목의 제2장에서는 예측과 계획, 사회정의, 심지어는 사회과학에까지 의미를 갖는 비상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통계자료를 토대로 하여 미래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저자는 스포츠 이외의 분야에서는 그런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거의 동일한 조건에서 수차례 치러지는 스포츠에서는 결과가 반복적으로 나타나지만, 다른 분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단계에서는 그나마 수학과 통계학의 도움없이는 그런대로 정확한 미래예측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미래예측 분야에서 수학모형의 역할에 대한 생각은 데이비드 오렐박사의 <거의 모든 것의 미래;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50597>에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해제한 황상민교수님의 “상식을 버리는 일”이라는 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 같다. 물리학에서 법칙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에서도 법칙을 찾을 수 있다. 사회과학자들은 자연과학자들과 다른 연구방법을 사용한다.(325쪽)”에 동의한다면 ‘사회과학에 아무런 상식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황교수님은 단정짓고 있습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저도 그 메시지의 일정부분에는 동의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아마도 제가 사회과학에 아무런 상식이 없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만, 저자의 또 다른 주장 즉, 비상식적 접근으로 사회과학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는 되어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이 책이 사회과학의 흥미로운 주제를 심도있게 표현한 재미있는 책임에도 독자는 핵심내용이 무엇인지 당황스러워 할 수 있다는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핵심을 붙들지 못해 당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논지의 흐름을 정리하는데 있어 다소 힘이 부친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제목 이야기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식의 배반>이라고 되어있는 이 책의 원제는 <Everything is obvious>입니다. 책장 안쪽에 적힌 저자의 한 마디, “Everything is obvious once you know the answer”에서 따온 것 같습니다. 단순하게 “당신이 답을 알고 있을 때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는 정도의 번역으로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번역하신 분이 “당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거의 모든 믿음에 숨겨진 비밀”이라고 번역한 것은 책 내용을 함축해 담으려는 생각과 ‘(상식을) 뒤집어보고/의심하고/결별하라’는 부제와 연관을 지으려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자칫하면 일상생활에서 지켜야 할 상식선(常識線)마저도 버리라는 의미로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만, 황교수님이 해제에서 명쾌하게 정리한 것처럼 상식은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나름대로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많은 문제, 즉 정치적 갈등, 의료보험, 공공정책, 공교육문제, 마케팅처럼 복잡한 사회현상에까지 상식의 잣대를 들이대는 무모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329쪽). 세상사가 모두 마찬가지이겠습니다만, 상식은 절대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된 것으로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예측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다른 책들을 통해서 보완할 필요가 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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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로빈스의 100세 혁명
존 로빈스 지음, 박산호 옮김 / 시공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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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스킨라빈스31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다양한 아이스크림 메뉴를 만날 수 있어 저도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입니다. 결혼 전에 아내의 집을 찾아갈 때 사들고 간 적도 있습니다. 베스킨라빈스31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것이 생뚱맞다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존 로빈스의 100세 혁명>을 쓴 존 로빈스가 바로 배스킨라빈스31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이스크림을 비롯한 각종 유제품과 축산물에 대한 감춰졌던 진실을 폭로하여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환경운동가로서의 삶을 추구해오고 있습니다.

그가 “나는 가끔 우리가 삶을 연장한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을 연장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수명을 늘리긴 했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시간을 늘린 건 아니다.(13쪽)”라고 서문에 쓴 내용에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100살까지 사는 시대에서 어떻게 하면 건강한 여생을 즐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화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장수마을을 찾아서 실마리를 찾아보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1803431). 존 로빈스는 그 가운데 네 곳, 즉 에콰도르의 빌카밤바 계곡, 파키스탄의 훈자 지역, 그루지아의 코카서스 지역에 있는 압하지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일본의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그들의 삶을 면밀하게 조사하여 장수의 비결을 찾는 이야기를 1부에서 풀어놓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그가 이 고장에 발견한 장수의 비결은 음식, 운동, 그리고 관계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를 제외하고는 세 곳은 문명세계와 거의 단절되어 있는 오지인 까닭에 아무래도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나는 음식을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거친 상태로 먹고 있으며, 육류보다는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요즘 건강식이라고 부르는 음식들입니다. 두 번째로는 오지인 까닭에 이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몸을 움직여 먹을 것을 직접 구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가파른 산등성이를 평지처럼 걸어 다닐 수 있는 것은 이들이 거친 음식으로 단련되어 심혈관계가 깨끗한 탓도 있겠지만, 젊어서부터 단련된 탓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관계입니다. 이들 고장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은 나이든 사람을 존경하는 전통이 잘 지켜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인공경에 대한 압하지하의 이야기를 인용해봅니다. “노인에 대한 압하지야인의 존경은 그들이 쓰는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들의 언어에는 심지어 ‘노인’이라는 뜻의 말도 없다. 그 대신 100세가 넘은 사람들은 ‘오래 사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압하지야 마을은 노인에 경의를 표하여 ‘오래 사는 사람들의 날’이라고 하는 축제일을 지낸다. 매년 이날이 되면 노인들은 공을 들여 만든 의상을 입고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모인 마을 사람들 앞에서 행진을 한다.(36-37쪽)”

이런 전통은 나이듦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을 불러오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100세가 넘었다고 주장하는 노인들을 흔히 만날 수 있지만 공식문서로 확인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도 나이 드신 분을 ‘어르신’이라 부르며 공경하는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왔습니다만,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나이드신 분들을 천덕구러기처럼 여기는 이상한 풍조가 자리 잡게 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멀지 않은 미래에 그분들처럼 된다는 것을 젊은이들이 깨닫지 못하게 방치한 것은 우리사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서 시급하게 복원해야 할 전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채롭고 다양한 장수촌 원주민의 식단의 공통점은 흰 밀가루, 설탕, 통조림 식품, 저온 살균한 우유나 탈지유나 정제된 경화유같이 정제되거나 생명이 빠져나간 음식을 식단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문명사회의 식단보다 모두 칼로리가 낮은 경향이 있며, 동물성 식품은 소량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165쪽) 

이 책에서는 정신건강에 대한 이야기도 다루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이 이와 같은 끔찍한 질환을 극복하는데 상당한 진전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치매로 대표되는 노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질병은 무엇보다도 예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답은 바로 세계의 장수촌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장수촌에 사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죽음에 이를 때까지 총기를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비법은 바로 운동입니다. 규칙적인 운동이 알츠하이머병을 예방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비밀은 음식에 있습니다. 채소, 전곡, 신선한 과일, 콩류와 같은 식재료에 많이 들어 있는 항산화제를 섭취하는 일입니다. 육류는 알츠하이머를 부르는 음식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계가 가지는 치유력입니다. 가족들, 이웃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나, 반려동물도 정신건강에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얼마 전 개는 개일 뿐이라는 견해를 담은 책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만(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9783), 개에게 끌려 다니게 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장수촌의 가족구성을 살펴보면 한 지붕 3세대는 흔하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같이 생활하게 되면 개별 가족구성원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맡기 마련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자세대가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사회화되도록 이끌어주게 되며, 손자들의 활기는 노인들의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대가족이 해체되어 핵가족화되고 말았습니다만, 대가족이 가지는 다양한 장점을 널리 알리는 캠페인을 벌여야 하겠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가는 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서 보톡스를 맞거나 주름제거수술을 받는 등 발버둥을 치는 세태입니다. 하지만 어르신을 존경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잡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될 것 같습니다.  

상당한 분량을 통하여 장수하는 비결을 잘 정리하고 있는 책입니다. 저자가 장수촌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도 맛깔스럽게 전하고 있어 읽으면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지 비결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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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노년을 말하다
김윤식.김미현 엮음 / 황금가지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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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OECD가입을 기점으로 하여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나라는 경제수준 뿐 아니라 의료수준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국민들의 기대여명 또한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그 효과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초고령사회로 이행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건너오면서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만, 직장에서 조기퇴직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노후생활이 불안정해지는 부작용 또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2004년에 출간된 <소설, 노년을 말하다>는 당시 고령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사회구조의 변화를 반영하여 문학, 특히 소설이 노인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에 주목한 기획으로 보여집니다. 문학평론가 김미현교수와 서울대학교 김윤식교수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단편소설집 <소설, 노년을 말하다>에는 하성란, 한승원, 이순원, 이명랑, 이청해, 홍상화, 한정희, 한수영 등 30대에서 60대까지 전 세대를 아우르는 한국의 대표작가 여덟 분의 신작 단편 소설들을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들 단편소설들은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노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또한 김윤식교수의 글 ‘노인성문학의 개념 정리를 위한 시론’이라는 부제를 단 ‘한국문학 속의 노인성문학’을 같이 실었고, 김미현교수는 ‘웬 아임 올드’라는 제목으로 여덟 개의 단편소설에서의 노인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김미현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선생님에 관한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갑니다만, 제가 미국으로 연수를 받으러 갔을 때 모셨던 선생님은 당시 60대이셨지만, 맡으신 일은 손수 하시면서 제자교육에도 소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때 환자사례를 가지고 교육을 하곤 했는데, 그 사례집은 대체적으로 "A 75-years-
old caucasian male patient had been suffered from...(75세된 백인 남성이 ...로 고통을 받아왔습니다)로 시작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꼭 "A 75-years-young caucasian male..."이라고 읽으시곤 하셨습니다. 선생님 생각에는 75세도 젊다는 생각을 내비치면서 좌중을 웃기는 유머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김윤식, 김미현교수님이 제시하신 ‘노인성 문학’이란 개념은, “생물학적인 나이를 기준으로 노인들이 지닌 문제 자체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양상으로서의 노인성, 문학의 소재가 아닌 본질로서의 약자(弱者)나 타자(他者) 문제를 다루는 문학(282쪽)”이라고 이해되었습니다.

수록된 순서대로 요약을 해보면, 한승원작가의 ‘태양의 집’은 할아버지로부터 각별한 관심을 받고 성장한 작가의 눈에 비친 조손(祖孫)관계를 통하여 사회로부터 이탈된 손자가 제대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할아버지의 내리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홍상화작가의 ‘동백꽃’은 어쩌면 우리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관계설정의 미숙함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재혼한 남성이 암으로 먼저 세상을 뜨면서 남겨진 아내와 전처 소생의 자식들 간에 일어나는 재산문제의 갈등은 아직 우리사회가 준비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을 날카롭게 후벼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순원작가의 ‘거미의 집’은 나이 드신 어머니를 누가 모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려장의 고사까지 끌어오고 있지만, 곧 자신이 당면할 문제임을 애써 외면하려는 큰며느리의 잔재주가 밉살스럽기도 하지만 자녀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노후를 자녀에게 의지하려는 전통적인 노후대책방식이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시사한다고 보입니다. 한정희작가의 ‘산수유 열매’에서는 나이듦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초로의 여인이 주름제거시술을 받는 과정에서 시술자와의 인생경로를 교차시키면서 변하고 있는 남녀관계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청해작가의 ‘웬 아임 식스티포’는 치매에 걸려 요양시설에 계신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손녀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래도 치매는 여전히 두려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하성란작가의 ‘712호 환자’는 “어느 날 일어나보니 남자는 벌레가 아니라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는 문장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는데 맹장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의료과오가 발생하여 21년을 식물인간으로 지내던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나게 되는데, 청년인줄 알았더니 갑자기 초로길에 접어들게 되었다는 다소 황망한 상황입니다. 21년간을 식물인간으로 지내기도 어렵겠습니다만, 식물인간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은 의학적으로 불가해한 해외토픽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명랑작가의 ‘엄마의 무릎’과 한수영작가의 ‘벽’은 각기 어떻게 보면 우리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보아온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삶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현장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에 대한 적극성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마지막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은퇴를 기점으로 하여 삶의 적극성을 거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나머지를 가치있게 보내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확신(65쪽)”이 들었다는 동백꽃의 이숙진 여사의 삶에 대한 철학은 남편이 죽기 전에 보여주었던 전실자식들의 가식이 남편의 유언장을 공개하는 순간 벗겨져 폭력으로 드러났을 때도 얄팍한 유산을 내버릴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특히 나이든 부모를 홀대하거나 나이든 부모에게 여전히 의지하려는 자녀들의 모습을 그려낸 작품들을 읽으면서 초고령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는 작품들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단편소설이다 보니 전개된 이야기들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끌고가 설명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도 있습니다만, 단편소설 특유의 압축된 상황묘사도 즐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수영 작가의 ‘벽’에서 “붉은 빛이 나는 툇마루는 아름다웠다. 바람 부는 날이면 마른 댓잎들이 송장메뚜기 떼처럼 날아와 마루를 덮었다.(236쪽)”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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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몇 살까지 살까? - 1,500명의 인생을 80년간 추적한 사상초유의 수명연구 프로젝트
하워드 S. 프리드먼, 레슬리 R. 마틴 외 지음, 최수진 옮김 / 쌤앤파커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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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수명이 극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이제 백세까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특별하지 않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나이가 얼마나 될지에 더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만, “나는 몇 살까지 살까?”는 누구나 가질 법한 궁금증일 것 같습니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를 고민한 것은 어제 오늘 이야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답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도 쉽지 않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놓은 것은 놀랍게도 스탠포드대학의 심리학교수 루이스 터먼박사였습니다. 그것도 1921년에 말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때 당장 해답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단초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설명해보면 당시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모델을 구성하고 장기간 그들의 삶을 추적조사하는 방식을 시작한 것인데, 조사대상으로는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얼마나 건강했으며, 결국엔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인생 전체(가정환경, 교육수준, 직업, 결혼과 이혼, 인생관, 사회적 관계, 종교생활, 사망한 나이와 원인 등)를 총체적으로 추적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방식의 연구를 전향적 연구라고 하는데, 최종적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도출해내려면 연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려면 기획이 완벽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험대상이 된 어린이들은 1910년 전후에 태어난 소년소녀 1500명이었는데, 총명한 어린이를 선발하여 그들의 인생을 추적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터먼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입니다. 사실 총명한 어린이를 선발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실험의 중립적이고 일반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획당시부터 실험대상인 사람이 모두 사망하는 시점까지 조사하기로 되어 있었던 터먼 프로젝트가 지금까지 중단되지 않고 이어온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연구에 투입된 연구비가 중단되지 않고 확보된 것도 대단할 뿐 만 아니라 연구를 기획하고 추진해던 터먼박사가 1956년 사망한 다음에도 중단되지 않고 그녀의 제자들에 의하여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워드 프리드먼 교수와 레슬리 마틴 교수가 쓴 <나는 몇 살까지 살까?>는 근본적으로 터먼프로젝트를 통하여 얻은 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해석하여 나온 결과물입니다. 앞서 언급한 편향성문제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1500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의 삶을 토대로 얻어낸 결론이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 책에서는 터먼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을 인용하면서 장수와 관련된 결정적 요인이 무엇인지 접근하고 있습니다. 연구결과는 놀랍게도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장수와 관련된 말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즉 상식과 통념을 산산조각 내는 연구결과인 것입니다. 저자들은 “건강과 장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인 상식과 통념들은, 수많은 편향된 자료들에서 나왔다. 때문에 이 자료들은 편향된 자기보고보다 훨씬 왜곡이 심하다. 특정 기업이나 연구자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편향된 연구 뿐 아니라, 고의가 아닌 왜곡이나 실수가 포함된 자료가 많다.(16쪽)”고 일갈하고 있습니다. 즉 장수와 관련한 과학적 사실을 대할 때, 이면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살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자들이 이 연구를 통해서 발견한 사실은 “더 건강한 사람이 더 행복한 경향이 있고, 더 행복한 사람이 더 건강한 경향이 있다.(20쪽)”는 것입니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 보이는 성격 특성들 가운데 장수와 관련이 있는 것이 있는데, “신중하고 믿음직한 성격을 가진 아이들이 가장 오래 살았다는 것(47쪽)”입니다. 그 이유는 성실한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더 많이 하고, 위험한 활동에는 가급적 관여하지 않으며, 성실한 사람들은 이미 건강상의 이점을 가지고 있고, 마지막으로 성실한 사람들은 더 행복한 결혼생활, 더 좋은 친구관계, 더 건강한 근무환경 등 오래 살 수 있는 인생경로를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것(53-55쪽)입니다. “직장동료와 잘 지내는 사람이 오래 살고, 여성은 지위가 올라갈수록 스트레스 때문에 수명이 단축된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332414)는 건강관련 기사가 눈여겨지는 대목입니다. 사실 예전에 같이 일하던 여과장님이 부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되지 않아 지병이 재발하는 바람에 세상을 뜨고 말았던 일이 다시 생각나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놀라운 사실은 ‘항상 웃고, 활기차게 살면 장수한다’는 통념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즉 활달한 성격인 사람은 위험한 취미를 가지는 경향과, 건강문제에 태평한 경향이 있어 꼼꼼하게 건강을 챙기지 못하기 때문에 장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직업, 조기입학, 부모의 이혼과 죽음, 사별 등이 수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힌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삶의 양식과 수명과의 관계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만든 구절은 “남편이 행복해야 집안이 행복하다.(205쪽)”였습니다. 그 이유도 미루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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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가 주는 위안
피에르 슐츠 지음, 허봉금 옮김 / 초록나무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약학과 심리학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 <피에르 슐츠>의 책 <개가 주는 위안>은 ‘반려견과 소통하는 행복심리학’이라는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개라는 동물에 대한 저자의 각별한 관심과 애정이 엿보이는 책입니다. 그리고 강아지 세 마리가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책상위에서 잠든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을 읽을 수 있게 합니다. 저자는 글머리에서 이 책을 쓴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가 얼마나 좋은 동물인지 그저 칭송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연유에서 도시인들이 반려견과 함께 살고 있는지 그 연유를 분석하자는 것이다.(4쪽)”

저자는 개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자료들을 발굴하여 해석하고 있습니다. 개의 계통발생과 유전에 관한 자료, 야생동물인 개를 가축으로 길들이는 과정과 개의 행동에 관한 자료, 등등입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읽었던 스티븐 부디안스키의 <개에 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5418>를 인용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바로 저자가 객관적 시각에서 개에 대하여 논의하고 있는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부디안스키가 자료를 인용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개에 대한 편견”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만, 슐츠 역시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시각에서 개라는 동물의 행동양식과 생각까지도 이해하려하는 일반인들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 첫 번째는 개의 기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야생동물인 개를 수백년 동안 길들인 결과 가축으로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해서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개와 사람이 협력하게 되었다.(11쪽)”고 하여 인간의 필요성에 의하여 개를 가축화하는데 성공했다는 종래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부디안스키의 설명에 따르면 야생개가 먹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주위를 맴돌던 끝에 인간의 삶에 파고들게 되었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저자는 개와 인간이 먼 옛날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공생관계의 기본인 주고-받음이 균형을 이루는 점이 전제가 된다고 함에 있어, 인간사회에 들어와 먹이를 해결한 개가 인간에게 준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개가 인간에게 기생하게 된 것이라 볼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보면 개도 사람에게 ‘젖소’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공생관계를 기정사실화하려는 의도를 내비치고 있습니다. 

“고통받고 있는 주인의 병을 개가 떠맡아서 주인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들 한다.(55쪽)”고 적었습니다. 이런 주장 역시 철저하게 사람의 시각에서 생각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집안에 이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위암으로 수술받고 투병중인 매형 집에서 오래 같이 살던 개가 어느 날 죽게 되었습니다. 누이가 오랫동안 아끼던 녀석이라서 몹시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마 매형의 병을 대신해서 죽었나보다고 위안을 삼는 경우를 보았는데, 매형을 간병하느라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기 때문에 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에서 오는 변명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자나 호랑이를 만나게 되면 내 개는 나를 위하여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싸우려 달려들 것이다.(56쪽)”라는 콘라도 로렌즈의 말을 인용한 것도 대부분의 실제상황이라면 꼬리를 말고 먼저 달아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기에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강아지”라는 속담이 내려오는지도 모릅니다.  

개의 지각작용에 관한 글에서도 주인이 집에 도착하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다는 이야기(59쪽)에 관해서도 부디안스키는 이미 개의 일반적인 행동양식을 통해서 개가 특별한 지각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한 바 있지만, 저자는 이와 관련된 자료는 외면하여 개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슐츠는 개의 신분상승이 눈부시다는 점을 당연하다는 듯이 적고 있습니다. “인간은 개나 다른 반려동물에 대해 때로는 괴상스러울 만큼 지나친 행동을 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과 가까워져서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리고 있는 여러 종류의 동물 중에서도 개는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139쪽)”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집에 불이나면, 나는 아이들보다 먼저 개를 구할 것이다.(183쪽)”는 발언을 한 사람이 있었다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랫동안 인간과 생활을 같이해온 개라는 동물이 탐색견, 양치기개, 사냥개, 등과 같이 다양한 목적에 맞도록 품종이 개량되어 인간의 삶에 도움을 주어온 점은 분명 치하를 받을만한 일입니다. 또한 최근들어 그 활동영역을 넓혀 사람의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는 치료견 뿐 아니라 외로운 사람 곁을 지키는 반려동물의 차원으로까지 활용되고 있는 점도 인정할 수 있지만, 개와의 눈치싸움에서 밀려 주도권을 넘겨주고 개에 매달려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일입니다. “개는 개일 뿐” 아니겠습니다. 

저자는 반려견의 위로와 치유에 관한 연구를 통해 현대인의 외로움과 인간관계를 재조명해오고 있다고 합니다만, 현대인의 외로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반려견에서 위로를 찾는다는 발상은 마치 마약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현실 회피적이라는 느낌이 들뿐 아니라 인간관계를 회복시키기보다는 현대인의 고립을 악화시키는 쪽으로 움직이게 하지 않을까 우려되기도 합니다. 

프랑스어 번역서인 탓인지 책읽는 흐름이 조금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의 개인사에 관한 문제로 우리에게 친숙한 르윈스키를 레빈스키로 번역한 것(176쪽)이나 헨리왕 군대에 대한 곳에서 ‘도그(116쪽)’라고 적은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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