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이용한 국토종단 도보여행 코리아카미노 여행시리즈 1
고태규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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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을 이용해서 서울에 있는 트레킹코스를 아내와 함께 즐기는 저로서는 2%부족하다는 생각을 가끔씩 하게 됩니다. 매주 한 코스씩 걸어서 1년을 즐길 수 있는 분량을 담은 <주말이 기다려지는 행복한 걷기여행 수도권 편;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47933>을 따라가고 있습니다만, 서울 안에서 코스를 구성하다보니 일부 구간이 중복되기도 하고, 걷는 맛이 조금 떨어지는 코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년 정도를 따라가면서 절반을 넘기고 있어 내년 상반기에는 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체 코스를 마치면 수도권을 떠나 지방에 있는 좋은 코스를 걸어보려는 생각을 늘 하고 있기 때문에 고규태교수님의 도보여행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담은 <주말을 이용한 국토종단 도보여행>을 반갑게 받았는지도 모릅니다.

놀라운 점은 일 년이라는 시한을 정하고 토말에서 동해안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길을 끊어짐없이 이어 걸어보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과, 그의 도전은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을 직접 경험하고 전하는 것을 뛰어넘어 서울에서 로마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걸어 가보기 위한 예행연습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그의 도보여행의 원칙도 눈길을 끌어당깁니다. 첫째, 차량이 다니지 않는 비포장길을 걸을 것, 둘째, 부득이 도로로 걸을 때는 차량이 적게 다니는 길을 선택할 것, 셋째,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명 관광지는 피하고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길을 선택할 것, 넷째, 발자국 외에는 여행의 흔적을 남기기 말것, 다섯째, 현지 주민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는 공정/책임여행을 실천하기 위해 소모품은 가능하면 현지에서 구입할 것, 마지막으로 도보여행의 초보자도 걸을 수 있는 걷기에 쉬운 코스를 개발할 것 등입니다. 고태규교수는 전체코스를 완주한 경험을 살려 국토를 걸어서 종단하는 운동을 전개하려는 포부도 밝히고 있습니다.

읽고서 마음에 남는 점을 몇 가지 정리해보겠습니다. 비포장도로가 우선적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차로는 가볼 수 없는 우리네 시골마을을 지나가게 된다는 점이 마음을 끌게 된 것 같습니다. 길을 걷다가 목이 마르면 물 한잔을 얻어 마시고 시장기가 드는 순간 건네주는 과일이나 고구마 한 알에 담긴 우리네 시골의 소박한 인심이 절로 느껴집니다.

저자 역시 코스를 따라가면서 오감을 통해서 느끼는 우리산하의 아름다움을 과장되지 않은 글로 담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시골길에서 만나는 누군가의 도움을 감사하게 받게 된 경위와 도움을 주신 분들의 이름까지도 일일이 기록하여 전하고 있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절경으로부터 소소해 보이는 장면까지고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 글로 전할 수 없는 감동을 독자와 나눌 수 있기에 충분한 사진도 수록하고 있습니다.

아쉬운 점은 사진에서 보시는 것처럼 전체 코스를 구간별로 나누어 놓은 지도 한 장만을 앞부분에 수록한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모두 열아홉번으로 나누어 걸은 코스의 세부구간을 몇 줄로 기록한데 그친 것을 보완해서 코스별로 중요한 지점이나 자신이 이용한 식당, 민박, 모텔 등의 위치를 표시했더라면 고교수가 걸은 길을 뒤따라보려는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길 때 한번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점입니다. 요즘의 젊은 세대들이 거침없는 말투, 심지어는 한글 맞춤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글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세태입니다. 하지만 강단에서 누군가를 가르치시는 입장이시라면 다양한 계층의 독자들이 읽게 될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들이 조금 정제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데 그 모습들이 수많은 군중들이 워라고 으악대면서 길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것처럼 보였다.(123쪽)”, “아나, 떡이다.(354쪽)”라고 적으신 부분을 읽을 때 잘 나가던 차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여행에세이에서 이념의 색깔을 느끼는 것도 적절치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의 생각을 담는 에세이에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사회적 통념과는 다른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하려는 의도가 읽히는 것 같아 국토종단에 대한 감동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리산자락을 지나면서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의 흔적을 연상하면서 안재성의 <이현상평전>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이현상을 미화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가장 고독하고 외로운 영웅이자, 자신의 삶을 불태운 비운의 혁명가였다.(298쪽)”

아무래도 남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코스를 따라가다 보니 길을 안내하는 표지 등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았을 개연성이 높았을 텐데, 지방자치단체의 해당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표현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적절한 수준에서 신경을 써줄 것을 요청하는 수준으로 적었더라도 <주말을 이용한 국토종단 도보여행>이 걷기를 좋아하는 분들의 주목을 받게 되면, 저자의 의도가 반영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

백두대간을 따라 국토를 종단하는 보도여행이다 보니 제가 가보았던 지역도 적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어라연, 월악산, 정령치, 강진 등등 이런 곳에 대한 이야기는 읽기도 전에 반갑다는 마음이 먼저 드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뒤따라가기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언젠가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게 될 것 같습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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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역사 -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서양 역사에 나타난 노년
조르주 미누아 지음, 박규현.김소라 옮김 / 아모르문디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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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씨는 11월 16일 충북 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있은 문학강연을 통하여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등 최근의 ‘현실정치’에 대한 소회를 “이번 선거에서 젊은이들이 꼰대들을 쫓아내기 시작했다”고 요약하면서도 “(선거 결과가) 세대 갈등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인류의 모습이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 모습이 요즘 너무 극대화된 것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고 18일자 중앙일보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울시 교육청이 지난 11일 배포한 저출산 고령화 사회에 대한 연수교육 자료에는 “노인한테 자리를 양보하기 싫고 노인이 TV 뉴스만 보기 때문에 고령 사회가 싫다는 식”의 노래 가사가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어느새 어르신들이 우리사회의 공적으로 몰리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현실정치는 뒷전이고 기성세대를 몰아내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거대한 폭풍으로 뭉쳐지는 듯한 불안한 전조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충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사실은 청년일자리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직은 더 일할 수 있는 나이든 젊은이(?)들에게 명예퇴직이라는 감투를 씌워 일터에서 내쫓은 것이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3D업종으로 분류되는 일자리는 돌아보는 젊은이가 없어 외국인 근로자를 수입해서 채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보면 분명 우리나라의 사회교육제도에 커다란 결함이 진즉부터 생겨있었던 것이라 생각됩니다. 노동의 현장은 장년층이 틀어쥐고 아직은 일자리가 필요한 나이든 젊은이들을 내쫓고 새로운 일자리에 진입해야 할 새파란 젊은이들을 막고 있으면서 책임은 엉뚱한 곳에 지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기업과 정부가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줘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기업하기 어려운 사회환경을 조성하는데 매진해온 것 아닌가 뒤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든 고령화사회에 이미 진입했고, 초고령화사회로의 진입도 머지않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될 정도로 고령화속도가 빠른 것이 현실입니다. 보건의료분야의 빠른 성장으로 기대여명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반면, 육아에 대한 부담을 회피하려는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미루는 바람에 출산율이 가장 낮은 상황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현상의 최종적인 부담은 앞으로 장년이 될 젊은이들의 몫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의 심각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노인들의 사회적 위치나 노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오늘의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미누아가 고대로부터 르네상스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한 노년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망라하여 정리한 <노년의 역사>에서 어느 정도의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 프랑스 역사학자인 장 들뤼모는 추천사를 통하여 노년에 관한 방대한 양의 사료를 샅샅이 검토하고 적절하게 선택된 사례들과 매우 빼어난 표현으로 가득 찬 간결한 문체로 정리한 조르주 미누아의 업적에 경의를 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문학과 예술은 물론이고 고대의 의학 서적, 묘비명, 중세의 각종 기록들, 교황과 왕에 대한 자료들을 토대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에서 시작해서 ‘근대의 입구’인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사에서 노인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조명하여 서론에 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고대에서 르네상스까지 서구의 역사는 노인들의 사회적, 정치적 역할의 변동을 보여준다. 우리는 계속되는 후퇴보다는 불규칙한 변화를 목도하게 된다. 하지만 대체적 경향은 쇠퇴를 향하고 있다. (…) 각 사회에는 그에 상응하는 노인들이 있고, 고대와 중세의 역사는 이를 광범위하게 보여준다. 각각의 사회․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조직 형태는 노인들의 역할과 이미지에 대한 책임을 맡는다. 각 사회는 이상적 인간의 형태를 전파하며, 노년의 이미지와 노년에 대한 폄하 혹은 부각은 그러한 형태가 어떤 것이냐에 달려있다.(43~44쪽)”

선사시대에는 아무래도 집단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이 풍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후변화에 따라 식량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식량확보에 기여할 수 없는 노인들은 유기되거나 죽음을 맞게 되는 경향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당시의 사회의 기대여명이 그리 길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연령을 노년으로 분류했을지는 미지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시대에도 아름다움과 힘, 젊음을 추구하던 시절이었던 만큼 노인들이 그리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학자, 정치가들이 연로할 때까지 활약한 것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미누아의 역작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역사적으로 노인들이 가장 강력한 힘을 보유했던 시절은 두 번 정도였다고 합니다.

원로들이 사회적으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로마시절과 유럽이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초토화된 직후인 14~15세기였다고 합니다. 로마법에는 가장에 대한 특별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는데 한 집안의 가장은 대부분 노인들이 맡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흑사병은 전염병의 특성상 어린이와 젊은이 층에서 피해가 컸는데, 그것은 후천적으로 얻는 면역은 아무래도 나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흑사병의 유행에서 살아남은 노인들은 마침 유럽에 일어난 상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부를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막강한 권한을 쥘 수 있었던 것인데, 그러한 역학관계가 오히려 독이 되어 젊은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세대갈등을 촉발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요즈음의 사회분위기와 흡사한 점이 있지 않습니까?

기대여명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대에서 노인들이 사회악으로 내몰리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겠습니다. 오랜 삶에서 얻은 지혜가 젊은이들이 사회화되는 과정에 보탬이 되고 세대간의 갈등이 조장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적 조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라 생각합니다. 노년의 역사를 통하여 과거에 일었던 세대간의 갈등원인을 찾아내고 대안을 마련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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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놀이터 - 엄마, 아빠와 함께 떠난 보름간의 유럽여행기
박지원.정보금 지음, 박성현 사진 / 이담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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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3 아들과 함께 유럽을 42일씩 돌아볼 생각을 했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여행을 준비하면서, 여행 중에 그리고 여행을 마치고서 아들과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시시콜콜 적어 제게 큰 충격을 주었던 <아빠의 자격;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7788>을 읽은 감동에서 미처 깨어나기도 전에 이담북스에서 받은 <세상의 놀이터>는 제가 구식 아버지의 전형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결정타가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2년여 동안 초등학교 저학년인 큰아이와 네 살 터울의 작은 아이에게 미국을 보여줄 기회가 언제 오겠느냐는 생각에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습니다. 옐로우 스톤, 그랜드 캐년, 나이아가라폭포, 요세미티공원, 디즈니월드, 뉴욕-워싱턴-LA, 주로 미국의 국립공원을 중심으로 여행지를 연결하다보니 남들이 잘 가지 않는 아리조나의 화이트 샌드, 사우스 다코타주의 침니락 등등.. 한번 떠나면 열흘씩은 걸리는 코스 말고도 주말이면 2박3일로 살고 있는 미네소타 주변까지.. 드라마 <초원의 집>, 영화 <파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배경, 등등 이제는 기억에서 가물거릴 정도입니다.

<아빠의 자격>을 읽고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미국에서 어디어디에 갔던 기억이 나니?” 그렇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이럴줄 알고 증명사진은 왕창 찍어두었다네”라고 들이밀었습니다. 조금은 섭섭하기도 하면서 고형욱님처럼 확실한 증거를 준비했어야 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박성현 정보금님은 한술 더 뜨고 있어 고영욱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쓰라리게까지 만들고 말았습니다. 박성현 정보금님은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외동아들과 함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3국을 15일간 돌아보면서 아이가 돌아본 것을 기억에 남길 수 있도록 <세상의 놀이터>라는 제목으로 책을 꾸몄답니다.

아빠는 취미로 즐기는 사진솜씨를 발휘하고 디자이너로 일하는 엄마는 맛깔나는 글솜씨를 부렸네요. 아들 성현이는 초등학생다운 글솜씨로 양념을 더했습니다. 아무래도 아빠의 시선은 유명관광지의 경치보다는 사랑스런 아내와 아들에게 더 많이 갔던 모양입니다. 다른 문화 속에서도 늠름한 아들의 모습과 이런 아들이 예뻐서 죽는 엄마의 모습이 참 자연스럽게 사진에 담겨있습니다.

제가 클 때만 해도 보기 어려웠지만, 요즘은 박물관이나 전시장 등에서 쉽게 눈에 띄는 광경입니다만, 조그만 공책을 들고 감상한 혹은 관찰한 내용을 꼼꼼히 적어 넣는 아이들의 모습 말입니다. 교과과정이 바뀌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보고 적는 습관이 몸에 배어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종기 시인님께서도 추천의 글을 통해서 “스테인드 글라스의 빛이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태양의 힘을 뿜어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구절이나 “두오모라고 불리는 성당이 있는 광장에 들어서니 그간 골목 깊숙이까지 내리지 못했던 햇살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는 듯 갑자기 눈부시게 환했다”는 표현이 정말 보석같이 빛나는 것은 가족들의 사랑이 하나가 되는 여행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이 오롯이 살아나고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영박물관이 좋은 이유는 영국이 다른 나라에서 유물들을 안 가져왔으면 우린 유물들을 못 봤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쁜 점은 다른 나라의 유물들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많고 큰 것을 말이다. 그것 좀 화가 난다.(65쪽)”고 적은 지원의 거칠 것없는 느낌의 표현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거침없음을 잘 가꾸어 미래의 우리나라를 잘 가꾸어가는 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다만 영국이 유물을 지금까지 잘 보관했다는 논리는 그들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 유물들을 원래 빼앗아온 곳이 제대로 관리할 수 있다면 되돌려주는 일에도 앞장서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주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행을 나서면 군소리없이 따라나서지만 이동하는 동안 티격태격 싸우는 바람에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던 제 두 아들과는 달리 속깊은 지원이를 보여주는 대목에서는 부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연이은 박물관 미술관 관람에 엄청나게 피곤할 텐데도 오르세 미술관을 보지 못한 엄마를 배려해서 오르세미술관에 가봐야 한다고 재촉하는 지원의 모습이나, 카타콤베의 칠흑같이 어둡고 차가운 미로 속에서 고통을 받았을 사람들을 생각하며 현기증을 느꼈다는 정보금님이 걱정스러웠던지 “엄마, 근데 왜 울어?”라고 묻는 지원의 마음이 정말 예쁘지 않습니까?

그런 지원을 지켜보면서 “잊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잊게 되는 것. ‘너만의 속도’로 걸어갈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하는데, 네 손을 잡고 재촉하게 될 때가 많구나(257쪽)”라고 자책하는 정보금씨의 애틋한 마음을 읽으면서 저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배려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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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이타주의자 - 21세기 트렌드를 바꾸는 새로운 소비자
앨런 패닝턴 지음, 김선아 옮김 / 사람의무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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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이타주의’라니 헷갈립니다.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있어서일까요? 출판사의 홍보글 대로 사전적 의미를 따져봅니다. 자신의 필요나 욕구를 타인의 필요나 욕구보다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와 의도적으로 타인의 복지나 이해 또는 공공의 이해를 추구하는 이타주의를 하나로 버무릴 수 있을까요?

세계적인 광고대행사에서 일했다는 앨런 패닝턴의 <이기적 이타주의자>는 제목에서부터 혼란을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광고일을 하면서 소비자들의 동향과 태도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민감한 저자의 선견지명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지난 세기 ‘과시적 소비’를 추구하던 경향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소비자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소비자들은 자신을 위해 치선의 것을 원하겠지만, 그것은 꼭 타인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기적 이타주의 시대를 예고한다. 이것은 또 새로운 세계적 윤리관이며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지금도 진행 중이다.(13쪽)”라고 서문에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스스로 명명한 “이기적 이타주의자”“나를 위해 물건을 사고 싶은 욕망, 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하는 것,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 하지만 그것이 환경과 생태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을 돕고자 하는 욕구가 결합된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발견한 소비자들의 변화한 소비행태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전망을 설명하기 위하여 저자는 19세기 산업혁명으로부터 20세기에 명멸했던 제품들의 흥망과정을 제품주기라는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외연기관으로부터 내연기관으로의 변화를 비롯하여 인류가 사용해온 에너지형태의 변화를 제시하고 화석연료의 전망에 곁들여 환경오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서들이 소비행태의 변화에 기여하였을 것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나치게 다양한 요인들을 인용하다보니 수박겉핥기 식의 기술에 그치고 있어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할 적확한 데이터가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논리를 전개도 매끄럽지 못하여 앞서 내세운 주장을 다음 문단에서 부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는 이유가 무엇이든 제품 생명주기의 벨 커브가 하향곡선을 그리지 않은, 그리고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가 상승세를 회복한 시대나 제품을 알지 못한다.(23쪽)”고 적었는데, 곧바로 매출이 위축되어가던 맥도날드가 맥카페를 신설해서 매출을 회복했다는 사례나 고형비누시장에서 브랜드파워를 자랑하던 아이보리가 새로 등장한 액상비누로 하향세에 들어섰다가 제품군을 다양화하는 전략을 도입하면서 회복했다는 사례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제품생명주기에 국한하였다고 저자가 해명한다면, 1960년대 임신부의 구역질을 개선하는 목적으로 개발되었던 탈리도마이드라는 약물은 신생아에서 사지단지증(phocomelia)라는 치명적 부작용이 나타나는 바람에 시장에서 퇴출되었습니다. 하지만 탈리도마이든 최근 부활하여 한센병과 다발성골수종의 치료에 사용되기 시작하게 된 사례도 있습니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이 국제적으로 도덕적 리더역할을 했고, 당시 기독교사회가 무지한 원주민에게 개종이라는 기쁨을 선사하고 복음을 전파하고자 선교사를 파견한 바 있는데 이는 순수하게 이타적이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복음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선교행위는 우선 기독교 우월주의와 기독교적 시각에서 타문화를 바라보는 몰이해적인 접근이 대부분이었다는 것과 제국주의의 원료제공처와 제품소비처로의 식민지확보를 위한 첨병으로 운용된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면 제국주의의 지극히 이기적인 행보였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대우그룹이 관련된 2008년 마다가스카르의 경작지 임대계약이 쿠데타로 연결되었다는 사건은 처음 듣는 내용인데다가 간단하게 자료를 찾아본 바에 의하면 특정세력이 제공한 왜곡된 정보일 가능성이 있어보이는 점에서 저자는 자료인용에 신중치 못한 듯 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162쪽). 또한 중국의 파룬궁 수련자들을 사이비종교단체로 분류하고 있는 것도 파룬궁을 탄압하고 있는 중국정부의 주장만을 인용하고 파룬궁 측의 주장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도된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252쪽). 역시 GMO식품에 대한 견해도 단순하게 소비자의 불신이 있다는 정도의 언급에 그치고 있어 핵심문제는 무엇이고 전망은 어떤지에 대한 구체적 자료를 내놓지 못한 것처럼 다양한 팩트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면서도 핵심은 놓치고 있다고 보입니다. 10장부터 12장까지 21세기에 등장하는 변화를 새로운 도덕률, 새로운 소비자사회, 이기적 이기주의자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형태의 소비트랜드를 설명하고 있지만, 이 역시 견강부회라고 보이는 면이 엿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매슬로가 나눈 5단계의 인간의 욕구는 어쩌면 낙관적인 추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를 소비행태와 연결한 것은 저자의 욕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과시적 소비패턴에서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소비자들은 이 물건이 나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가격만큼 값어치가 있는지 환경이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지 고려하게 될 것이므로 제조회사에서도 이런 소비패턴을 반영하여 제품을 생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눈에 띄는 대목은 영국의 외무장관 데이비드 밀리밴드가 한 말을 인용한 부분입니다 “… 잘못된 대응이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보호주의에 영합하고 환경변화에 대한 대처를 미루고, 내수 중심 정책으로 전환하여 보호주의에 굴복하는 것이다.(140쪽)”는 말입니다. 제가 잘못 이해를 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유럽공동체의 발족을 시발점으로 하여 세계는 이미 하나의 공동체로 수렴되는 추세에 있습니다. 개별국가 간에 체결되는 FTA는 각국이 하나의 공동체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국제적인 대세라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TA의 체결로 인하여 불이익을 당하게 되는 일부 집단이 반발을 마치 국민 전체의 뜻이 그렇다는 식으로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 세기 전 조선이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단초를 제공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망령이 지금 되살아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당시에는 권력의 최정상에 있던 대원군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이 백성을 나락의 길로 인도했다면, 지금은 일부 집단의 작은 이익을 지키겠다는 현대판 쇄국정책이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민국을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족이 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장에 “의무적인 건강검진과 모니터링은 미래에 무상의료보험에 가입하는 조건이 될 것이다.(358쪽)”라고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는 무상의료에 관한 언급 역시 의료에 관하여 잘못된 개념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것 아닐까 걱정됩니다. 의료가 무상으로 제공된다는 것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의료소비자가 돈을 내지 않는다면 의료에 투입되는 재정은 세금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고, 무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의 경우 사용량이 무한대로 늘어나게 되는 모럴 해저드를 자주 경험해왔다는 점을 우려의 근거로 삼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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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 식민지 조선을 파고든 근대적 감정의 탄생
소래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식민지 조선을 파고든 근대적 감정의 탄생’이라는 부제를 단 <볼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는 우리 사회에 슬그머니 스며든 ‘명랑(明朗)’이란 감정의 정체를 뒤쫓은 울산대학교 소래섭교수의 문화사적 탐정놀이라고 읽었습니다.

프롤로그를 통하여 저자가 <명랑운동회>라는 TV오락프로그램을 인용하고 있어 꽤나 친근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제가 명랑운동회를 즐겨보던 시절의 나이와 비교해보면 조숙했을지도 모를 나이에 즐겨보았던 모양입니다. 어떻거나 저 역시 ‘명랑’하면 <명랑운동회>가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후배의 학위논문의 초고를 읽다가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명랑’의 정체를 뒤쫓기 시작했다는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근래 들어 ‘명랑’이란 화두를 들어본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제1장에서는 ‘명랑’이 우리의 뇌리에 기억되기까지의 역사를 뒤쫓고 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명랑’은 백성의 눈을 가려 현혹하려는 통치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래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제5공화국이었고, 그 앞에 자주 인용되었던 것이 제3공화국, 그리고 거슬러 결국은 일제 강점기에 식민통치의 문화적 접근방안으로 강요된 것이 처음이라는 근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국은 억압된 사회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명랑’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경주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사회에 특정정서가 자리를 잡는데 힘으로만 눌러서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제강점기를 되돌아보면 민족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더 나아가 경제적 측면에서도 조선의 백성들은 우울한 분위기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일제가 던져준 ‘명랑’이란 화두가 그런대로 먹혀들어갔었던 모양입니다.

우리 사회에 명랑이란 말이 자리 잡게 되는 과정에 세 가지 요인이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저자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요인은 처음 시발점이 되었던 조선총독부의 ‘감성정치’, 두 번째 요인인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자본주의적 근대화과정의 요소로서의 ‘감정관리’ 그리고 세 번째 요인은 김기림이 간파한 ‘배후의 감정’이라는 것입니다.

각각의 요소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을 해보면, 조선총독부가 통치수단으로서 명랑을 강요한 것은 식민지화에 대한 조선백성들의 열패감, 경제적 수탈 및 부를 창출한 수단을 빼앗긴 절망감 등으로 바닥까지 가라앉은 조선백성들의 감정곡선을 끌어올려 일제가 예정하고 있는 전쟁수행의 장애요인을 사전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농업을 비롯한 일차 산업중심 경제구조를 가진 조선사회가 유통에 중점을 둔 상업중심의 자본주의적 경제구조로 전환되면서 감정서비스의 필요성이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김기림을 인용한 ‘배후의 감정’이란 ‘명랑’이란 가면 뒤에 숨어 있는 본디의 의도를 깨부수기 위한 배후의 감정으로서 ‘명랑’을 추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식인들이 간파해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래섭교수를 따라서 ‘명랑’에 숨어 있는 이러한 의미들을 뒤쫓다보니 상당기간이 일제 강점기간에 조선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사회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화두가 되는 위생문제에 관해서도 정말 경성거리가 인분이 나뒹구는 끔찍한 상황이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광경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시골에서 밭농사를 짓는데 인분이 정말 귀하게 쓰였기 때문에 뒷간에서 일을 보아야 했고, 화장실을 정기적으로 치우기 위해서 똥장군에 퍼 담아 소달구지에 얹은 똥통으로 져 나르던 인부들을 흔히 보고 자란 세대이기도 합니다. 당시 젊은이들의 일상, 대중문화, 돈벌이, 연애와 스포츠 등등 다양한 화제를 중심으로 하여 식민지 조선사회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명랑을 뒤쫓는 소래섭교수의 탐정놀이의 결말은 ‘만들어진 명랑’이란 제목으로 제3부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조선사회가 피동적으로 수용하게 된 ‘명랑’이란 화두를 능동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입니다. 앞서 소래섭교수가 세 번째 요인으로 김기림을 인용하여 설명한 배후의 감정으로서 명랑은 그야말로 주체적으로 명랑을 추구하게 되는 과정인데, 이는 오히려 웃음보다는 눈물에 가까운 역설적인 접근방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고통이 크고 슬픔이 깊을수록 웃음에 대한 욕망이 더 세차게 끓어오른다. 이주일과 배삼룡이 아직도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이 암울했던 시대를 대표하는 코미디언이기 때문이다.(219쪽)”는 소래섭교수님의 말은 그의 속마음에 어디에 있는지 엿볼 수 있는 단초라 생각합니다.

소래섭교수님은 ‘명랑’이란 화두를 쫓아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당시의 조선사회는 일하고자 하나 일자리가 없는 절망한 젊은 청춘들이 넘쳐나는 시기였고, 그들의 관심을 ‘명랑’이란 밝은 이미지의 단어로 포장해서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니게 만들다가 결국은 총 한자루 쥐어서 전선으로 내몰려는 일제의 간악한 흉계가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찾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소래섭교수님의 탐정놀이의 마지막 반전은 바로 ‘88만원 세대’라고 자조하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내려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제는 듣기조차 어려운 ‘명랑’이란 단어이지만, 사실은 ‘행복’전도사, ‘쿨’하다, 등 다른 이름으로 가면으로 바꿔쓰고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소래섭교수님은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공허한 행복론 따위에 매달리거나 허벅지를 바늘로 찔러가며 쿨한 척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손바닥만 한 거울과 그 거울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만 있으면 명랑해질 준비는 다 마친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명랑은 언제나 감정의 노예가 아니라 감정의 주인이 되려는 자에게만 찾아온다.(281쪽)”는 결론으로 일제강점기의 조선 지식인들이 감지했던 ‘배후의 감정’을 다시 깨달아야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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