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집을 사시겠습니까? - 1991년 일본발 버블경제의 경고
최경진 지음 / 이담북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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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 먹을 천연자원도 변변히 없는 나라가 해방은 되었다고는 하지만 손에 쥔 것도 없는 상황에서 당한 6.25동란은 그야말로 업친데 덥친 격이었을 것입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더 내려갈 데가 없었기 때문에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리면 무언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내달리던 시절 일본은 까마득하게 먼 곳에 있는 나라로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만해도 일본을 따라잡기는커녕, 일본과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의 격차는 결코 좁혀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미투(me too) 전략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가면 적어도 그 사람 아래까지는 쫓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지요. 물론 그 사람을 뛰어넘으려면 무언가 다른 뛰어난 전략을 써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미투 전략을 적용할 때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앞서 가는 사람이 하는 일 가운데 잘 못된 일을 따라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우리가 일본을 열심히 따라할 때, 일본이 잘 못한다 싶은 일까지도 따라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선배들이 정말 허리띠를 졸라매고 땀을 흘린 덕분에 도저히 좁혀질 것 같지 않던 일본을 따라 잡아 격차가 많이 좁혀졌고, 이제는 우리도 일본을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 일이 가능해진 것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일본 경제의 침체기가 생각보다 길어진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소위 잘나가던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제자리  걸음, 심지어는 마이너스 성장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잘 나가던 일본 경제가 힘이 빠지게 된 배경이 부동산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과정이 있었다는 정도, 그리고 그렇게 고공행진하던 부동산이 어느 날 물거품처럼 꺼졌다는 정도 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까지 천정부지로 솟던 부동산가격이 한풀 꺾이면서 우리 경제도 침체 일로를 걷는 것이 아닌가 싶어 불안한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은 꼭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더라는 앞선 경험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다못해 드라마 성향까지도 닮아가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머리 한 구석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데,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하고 귀국한 최영진대표님이 일본이 겪은 ‘잃어버린 10년’을 원인에서부터 과정 그리고 결과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지표와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면서 분석하고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세밀하게 분석한 결과를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그래도 집을 사시겠습니까?>라는 매우 자극적인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저 역시 젊었을 적에 하루가 다르게 뛰던 집값 때문에 내집을 장만하려 안달복달 하던 기억과 노태우대통령께서 추진했던 주택 100만호 건설정책에 겨우 편승해서 내집을 장만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최대표님은 참 자상한 성격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학술적인 자질도 갖추고 계시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유는요? 책을 구성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버블경제의 정의와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버블경제에 해당하는 시기를 규정하고 그들이 이를 인식했던가 짚었고, 그 배경에 미국의 경제상황이 기여한 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버블이 만들어지게 된 요인과 경제분야에서는 어떤 양상으로 발전했는지, 버블경제가 한창일 때의 일본의 사회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서 버블경제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택한 정책을 소개하고 이 정책이 버블경제를 연착륙시키지 못하고 붕괴되도록 만들게 되는 과정도 설명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된 다음에 벌어진 사회상을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최근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 그리고 사회현상이 놀랍도록 일본에서 버블경제가 부풀었다가 꺼지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만 당시와 지금은 국제정세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과정을 따라갈지 아니면 일본과는 달리 연착륙이 가능할지는 아직 예단할 수는 없지만, 우리 금융당국의 수장께서 “예견된 위기는 위기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니 조금은 위안이 될 것 같기도 하면서도 과거 우리가 일본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뒤따르는 경향이 있어 많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경제의 버블현상은 미국의 무역수지 악화에 일본이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었던 이유로 맺은 프라자협정을 이행하기 위한 일본정부의 경제정책의 기조변환이 발단이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상황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보입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과거 IMF체제라고 하는 경제적 시련기가 어느 정도는 버블형성을 차단하는데 기여한 바가 있었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부동산가격이 고공행진을 하게 된데는 지난 정부가 추진한 지방분권화가 기여한바 적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만, 공식적으로는 검토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무렵을 기점으로 하여 우리나라의 사회분위기도 많이 변하게 된 것 같습니다. 주택마련보다는 삶을 즐기는 분위기가 젊은이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하고 그러다 보니 출산율도 따라 내려가는 등,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던 시절과 매우 흡사한 사회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책임이 정부나 앞선 세대에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점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힘들던 시절에도 손에 쥔 것은 없었어도 자녀교육에는 우선적으로 투자하고 그리고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허리띠를 졸라매던 세대들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체면을 먼저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번듯한 직장이 아니면 부모님께 더 얹혀살더라도 백수로 지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풍조인 것 같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습니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스스로 제 살길을 찾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 살 길이 찾아지지 않겠습니까?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무상급식, 무상보육, 반값 등록금, 무상의료 등의 복지혜택의 요구도 결국은 우리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허리띠를 졸라서 내는 세금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젊은이들의 허리를 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그래도 집을 사시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만, 저라면 집을 사려고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아마 저자가 이 책에 담고 싶었던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작성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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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참 좋아 보이네요!
루이스 월퍼트 지음, 김민영 옮김 / 알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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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명에 관심이 많던 예전과는 달리 평균기대여명이 길어지면서 세인의 관심이 웰 에이징으로 좁혀지는 것 같습니다. 즉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병치레를 하느라 사는 즐거움을 제대로 느낄 수 없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당연히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시각에서 웰 에이징을 생각하는 책들이 소개되고 있어 대책없이 노년을 맞게 되던 예전과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는 점에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즉부터 웰 에이징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관한 경험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알키에서 번역하여 소개하는 <당신 참 좋아 보이네요!>는 런던대학교 생물학과의 루이스 월퍼트 명예교수가 쓴 책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발생생물학을 전공한 과학자가 웰 에이징에 대하여 얼마나 깊이 파고 들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학문의 깊이란 한 분야에 몰입을 한다고 하더라도 관련된 분야를 참고하다 보면 깊이에 넓이를 더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에서 인간이 나이 드는 과정을 7단계로(제가 인용한 국내번역본에서는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의 4단계로 구분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구분하는데, “이 파란만장한 인생 사극을 끝내는 마지막 장면은 제2의 유년기이자 완전히 망령이 난 단계이지. 이도 없고, 보이지 않고, 입맛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네(17쪽)”라는 유명한 대사를 통하여 노년기가 유년기와 닮아간다는 점을 콕 짚어내는 것으로 시작과 끝이 전혀 무관하지 않다는 역설이 성립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은퇴 후에 우울증으로 고생을 한 끝에 같은 고통을 겪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대한 모든 것, 즉 노화와 질병, 인간이 나이를 먹는 과학적 원인과 과정, 고령화 사회의 단면과 대안, 은퇴 이후의 삶과 준비해야 할 것들, 죽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람들 등 노년에 대해 알아야 할 정보를 모든 정보를 담으려 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노년의 삶이란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아기에서 청년기까지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다면, 당신이게는 그 이후의 삶을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기면서 살 권리가 있다.(10쪽)”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역사적 사료에서 찾아낸 노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정적이며, 시대가 변하고 있음에도 많은 노인들이 사회에서 갖가지 차별을 당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노인들은 진부하고 심지어는 무능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넘쳐나고 있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그 젊은이들이 현재에 이르는데 그 노인들이 젊었을 적에 땀흘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게다가 자신들 역시 그들이 백안시하는 노인이 되는 것이 그리 먼 훗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최근에 살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출산을 줄이거나 심지어는 거부하는 젊은 세대는 자신이 나이들었을 때 누구의 보살핌으로 생활하려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저자는 나이듦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다만 보다 세밀한 점까지 챙겨보려는 독자라면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노인에 대한 사회적 시각에 관하여 여러 차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만, 이 점에 관해서는 조르주 미누아의 <노년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57577>를 통하여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얼마나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꾸준히 늘려왔고, 최근의 연구분야가 그 성과를 내게 된다면 획기적으로 늘어난 수명을 즐길 수 있는 날이 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요양병원에 관한 평가사업을 설명하면서 인간의 수명과 건강한 삶에 대한 기대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장수가 걸린 내기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노화학자 스티븐 어스테드교수와 인구학자 스튜어트 올샨스키교수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5억달러짜리 내기인데요. 2000년 시작한 내기는 인간이 150년을 살 수 있는가하는 주제처럼 150년이 지난 21150년에 끝이 난다고 합니다. 두 분의 주장을 담은 책 <인간은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가(올샨스키교수) : http://blog.joinsmsn.com/yang412/5226340>와 <인간은 왜 늙는가(어스태드교수); http://blog.joinsmsn.com/yang412/4065245>에서 힌트를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웰 에이징에 관한 아이디어를 정리하기 위하여 다양하고 많은 책을 읽을 여유가 없는 독자라면 월퍼트교수의 <당신 참 좋아 보이네요!>는 잘 요약된 안내서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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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과학논쟁 - 과학과 사회, 두 문화의 즐거운 만남을 상상하다
강윤재 지음 / 궁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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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사회, 두 문화의 즐거운 만남을 상상하다’라는 함축된 요약을 붙인 강윤재교수님의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은 “ 이 책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과학의 참모습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저자의 글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즉, 저자가 대학에서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주제로 한 수업에서 미리 정한 토론주제를 두고 찬성과 반대의 논리를 정리하여 발표를 하고, 이 과정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른 진영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훈련의 장이 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주관해온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찬성과 반대의 논리를 가지고 토론을 펼치고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논리를 가다듬어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합의에 도달하거나 또는 그렇지 못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자는 찬성과 반대의 주장을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 정리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두었어야 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읽고 느끼기에는 찬성과 반대의 논리가 충분히 소개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저자가 내린 판단이 행간을 완고하게 움켜쥐고 있어 독자의 판단을 자신이 내리고 있는 판단에 따라올 것을 강요하고 있는 셈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이라는 제목보다는 <내가 내리는 과학논쟁의 결론>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요?

 

저자의 말에서 이 책의 얼개를 옮겨보면, 1장과 2장에서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질문을 논하고 있습니다. 3장부터 7장까지는 과거 과학계의 핫이슈들, 예를 들면, 갈릴레오의 종교재판을 통해본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 뉴턴의 천재성의 진실, 플로지스톤 이론과 연소이론의 숙명적 대결, 빛의 이중성 그리고 사회진화론 등입니다. 8장부터 13장까지는 현대사회에서 부각되고 있는 과학기술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유전자변형식품(GMO), 기후변화, 원자력발전, 우주개발과 로켓을 둘러싼 논쟁 등입니다.

 

저자는 섣부른 사회의 개입이 과학을 오염시키고 훼손시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22쪽), 과학기술이 개발되고 나면 사태를 바로 잡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기술영향평가와 시민합의회의 등 다양한 시민이 참여하여 사전에 문제점을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268쪽) 과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과학자들이 생산하는 새로운 이론은 동료평가를 통하여 참(true)이 검토되고, 어제의 참이 새로운 근거에 의하여 무너지고 새로운 참이 등장하는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참이라고 해도 동료평가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긴 세월동안 묻혀지게 되지만 언젠가 빛을 보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과학기술에 관한 논쟁은 과학자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기술영향평가와 시민합의회의는 누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설마 논의 대상이 될 과학기술을 판단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지식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참여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고 과학기술을 판단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지식을 갖추었다고 한다면 그 분들은 이미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들이 논쟁을 통하여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기다리면 될 것 같습니다. 공연히 일반인들이 나서서 감놔라 배놔라 간섭을 하게 되면 우리가 필요한 지극히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결론이 도출되기도 전에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일이 벌어질테니 말입니다.

 

한편 저자는 과학자가 전문지식을 적극 활용하여 사회의 요구에 올바르게 부응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만(40쪽),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개인적 성향에 따른 전문지식의 오용으로 인하여 사회에 위해를 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때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한 역사적인 과학논쟁 부문에서는 이미 입장이 정리된 경우로 보여진 탓인지 특별히 자신의 판단을 노정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과학과 종교문제에 있어서는 지난 해 발표된 스티븐 호킹박사의 <위대한 설계>를 인용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유전자재조합식품, 기후변화, 원자력안전성문제 등은 아직 찬반의 논리가 어느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기에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면, 양측의 주장을 동등하게 인용하는 것이 옳겠습니다만, 저자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사항이니 불안하다는 쪽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으로 읽혀졌습니다. 또한 우주개발경쟁이 강대국들의 정치적 논리에 따라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던 분야로서 그 결과에 대하여 강한 회의를 제기하고, 특히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우주개발사업이 선진국 따라하기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만, 방송위성이나 기상위성을 띄우기 위하여 선진국의 로켓발사 일정에 끌려 다니다가 결국은 그들의 시장에 편입되어 고액의 사용료를 물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언급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국가안보 영역으로 넘어가게 되면 벽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과학과 사회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과 사회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인도하는 좋은 참고서가 많이 필요하다는 점도 공감하고 있습니다만, 이런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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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만 버려도 행복하다 - 아름다운 노년, 품위 있는 죽음을 위하여
이정옥 지음 / 동아일보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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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은 65세 이상 인구가 7%를 넘으면 고령화사회, 14%를 넘으면 고령사회, 21%를 넘으면 초고령사회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00년 7.2%를 기록하여 고령화사회에 진입하면서 노인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어 2010년 11.0%를 차지하였고, 2018년에는 14.3%에 달하여 고령사회에 진입하고 2026년에는 20.8%에 달하여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고령화현상은  다른 선진국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고령사회에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다양한 사회현상 가운데 노인인구의 의료현황은 의료계의 관심사항일 것 같습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10년에 65세 이상 연령층이 사용한 의료비는 13조7847억원으로 전체 의료비 43조6570억원의 31.6%를 차지하였는데, 이는 전년에 비해 14.5% 증가한 수치로 역시 지속적인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노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관련 서비스는 크게 건강보험공단에서 2008년 7월부터 운용하고 있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커버하는 요양시설과 기존의 건강보험이 커버하는 요양병원에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건강보험재정이 커버하는 요양병원 부문의 비중은 2010년에는 2009보다 30.8%늘었는데 2004년과 비교하면 17배가 늘고 있습니다. 이는 요양병원은 8배, 입원환자는 7배가 늘어난 것과 비교하더라도 놀라울 정도라고 보이는 부분으로 의료서비스의 질이 그만큼 좋아지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요양시설이나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노인환자들이 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고 있는지 그밖에도 충분한 배려를 받고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언젠가 내가 신세를 져야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중년고개를 넘은 분들의 관심이 큰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미국의 요양시설과 요양병원에 관한 경험담을 진솔하게 풀어낸 재니스 스프링박사의 <웰 다잉 다이어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86246>에서도 보면, 특히 보호자들은 환자들이 병원 혹은 요양시설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늘 불안해하는 것 같습니다.

인구고령화에 따라 노인환자들을 대하게 되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는 의료인들도 노인들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근 들어 노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만, 주로 보호자들의 경험담이 많아 노인들의 생각이나 입장을 충분히 살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늘 소개하는 이정옥시인의 <반만 버려도 행복하다>는 지금까지 부족하다 싶었던 부분을 채워주는 진솔한 글이라는 생각합니다.

 

이정옥시인께서는 실비노인요양시설과 실비요양원에서 10년여의 세월을 생활하면서 겪은 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사람에서부터,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요양시설이라는 작은 사회를 넘어 우리사회의 노인정책에 이르기까지 넓혀가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참 쉽지 않은 이야기였을 것 같습니다. 시인께서도 누구나 하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에 망설이면서도 터키의 시인 나임 힉메의 <진정한 여행>의 한 구절에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5쪽)” 그래서인지 프롤로그의 제목도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정말 힘든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인이 지낸 실비요양병원시설에는 65세에서 99세 사이의 노인 69명이 살고 있는데 이들과 일상을 함께하면서 느낀 점을 ‘오래된 바이올린 소리가 더 아름답다’는 제목으로 묶었습니다. 시인은 “지금의 장년이 노인이 되었을 때는 교양있고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인생의 말년을 보내게 되리라. 하지만 품위있고 아름다운 노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곳 노인들의 외롭고 쓸쓸한 노후를 바라보며 오늘의 장년에게 전하고 싶었다(6쪽)”고 했습니다.

 

노인들이 모여 사는 요양시설도 사람사는 동네인지라 별별 일이 다 일어나고, 다양한 성격들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그런 상황에서 내가 가져야할 행동거지가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또한 그 분들이 보여주시는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 시인께서 “이제와 무얼 시작할 수 있겠어. 또 시작한들 무슨 소용이겠어. 곧 죽을텐데”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짐하셨다는 말씀, “육신을 한 줌씩 들어내며 죽음을 기다릴 때야말로 영혼을 살찌워야 할 때라 한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영혼을 살찌우는 일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 인생의 마지막 날,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70쪽)”이 마음 한켠에 무겁게 자리 잡습니다. 시인의 이런 생각은 글을 읽어가면서 곳곳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독서편력을 확인하면서 그 무게를 더하게 됩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반만 버려도 행복하다>의 주제는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적에 가졌던 것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시인은 그런 심정을 ‘반만 버려도’라는 시(詩) “나목의 가난으로 겨울을 이긴/과일나무에 꽃이 만발이다. (…) 이룰 수 없는 희망으로 흘러넘치는/내 가슴의 위장된 허욕들/가진 것 반만 버려도/행복이 만발할 것을.(76쪽)”에 담았습니다. 특히 같이 생활하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주제, 존엄사는 ‘존엄한 죽음을 생각할 때다’에 담고 있습니다. 유방암이 재발한 마르시아 할머니는 “질병과의 고통과 싸우는 것이 전부인 삶은 살아 있는 삶이라 할 수 없다.”고 하시며 통증완화제 이외에 어떤 치료도 거부하고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시인은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나 고통이 아니라 죽음이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한 에픽테투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오랫동안 고심했다고 하더라도 막상 죽음을 맞게 되면 쉽게 잊게 될 것 같습니다.

 

시인께서는 장례절차와 수목장 등에 관한 진지한 생각도 풀어놓고 계신데, 특히 존엄한 죽음에 관한 시인의 생각을 의료인이라면 깊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의료계에서는 ‘보라매사건’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연명장치를 가족의 요청에 따라 제거한 담당전문의가 2년6개월의 징역에 집행유예 6개월의 선고를 받은 사건에 대하여  시인은 “우리나라의 현행법은 의사가 연명장치를 제거하면 살인 또는 살인방조죄로 처벌받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법이고 현실이다.(269쪽)”라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혈압을 앓던 아흔살의 나체따 할머니가 뇌출혈로 병원에 실려갔을 때나, 기력이 쇠약해진 헬레나 할머니가 병원으로 옮겨졌을 때, 비위관을 설치하는 등 연명치료에 집착하는 의료진에 대하여 시인이 보이는 비판적인 시각은 재고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의사들이 1퍼센트의 가능성에 집착하는 모습이 동료 의사들의 눈에도 마치 의학적인 기술을 이용하여 생명의 섭리인 죽음을 이기려 시도하는 헛된 노고로 비치는 경우(292쪽)”만 있었을까요?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부분에 대한 의료진의 고심이 있다는 점도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웰 다잉 다이어리>에서는 오히려 품위있는 죽음과 연명장치의 제거에 어려움이 예상되어 비위관 설치에 신중한 의료진에 대한 보호자들이 불만을 터트리는 사례도 소개되고 있어 의료행위를 결정하는데 있어 고심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또한 <웰 다잉 다이어리>에서 소개하고 있는 ‘자연사를 허용하라(Allow Natural Death; AND)’라는 용어를 논의해보자는 말씀을 드립니다.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하지 않도록 환자가 사전에 의사를 표시해두는 ‘회생치료금지(Do Not Resuscitate; DNR)’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용어에는 적극적인 치료를 거절하는 부모의 권리를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태만과 포기를 의미하고 자식이 살인자로 몰릴 수가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DNR을 대체할 용어로 AND가 제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나라의 복지정책의 문제점을 ‘노인복지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제목으로 묶어 비판하고 있습니다. 보건만 있고 복지는 없다는 소제목에는 의료계에서는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예방은 포기하고 수발만 선택했다고 비판하고 있는 노인요양보험의 문제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수발대상 노인들을 수용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왕에 운영되어 오던 실비요양시설을 통폐합하면서 중증환자 이외의 노인들을 퇴소시키는 조처가 취해졌다는 것입니다. 노인요양보험은 일본에서 개호보험이라는 이름으로 2000년부터 시행해오던 것을 참고하였는데 당시 일본정부도 재정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실토하던 정책이 결국 2008년에 보장성을 축소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앞으로 노인요양보험제도가 어떻게 운용되는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만, 현실에서는 불이익과 불편함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었다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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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1-12-19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댓글 이벤트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에 좋은 댓글을 달아주신 한 분께 이 책을 보내드립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2998

비로그인 2011-12-19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품위있게 죽기가 쉽지 않아요..많이 애써야 할 것 같아요. ㅎㅎ 잘 보았어요.

처음처럼 2011-12-30 18:1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사실은 미리 마음을 다진 분도 막상 죽음을 앞에 두고는 마음이 변하더라는 말씀을 자주 듣곤하죠
 
분류의 역사
알렉스 라이트 지음, 김익현.김지연 옮김 / 디지털미디어리서치 / 2010년 1월
평점 :
절판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미국의 유명 매체 여러 곳에 글을 기고하고 있는 작가이자 정보 아키텍처(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정보아키텍처라는 직업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이며, 여러 기관의 정보설계 프로젝트를 주도했다는 알렉스 라이트가 쓴 <분류의 역사>를 읽게 된 것은 최근에 제가 연재하고 있는 글에서 분류에 대한 사항을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공한 병리학은 의학의 기초를 쌓는 분야로서 질병에 따라서 인체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를 구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병리학은 인체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해서 질병을 분류하는데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질병을 분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질병의 원인을 찾아 치료방법을 구하고 환자의 예후를 결정하는데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알렉스 라이트가 찾아낸 다양한 정보분류체계에서 의학이 독립된 영역으로 되어 있는 것은 없어서 놀랐습니다. 의학분야에서 쏟아져나오고 있는 정보의 양은 엄청나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정보의 대분류에 한 항목이 되지 못하는가 봅니다.

 

본격적인 인터넷시대를 맞아 우리는 넘쳐나는 정보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혼란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옛날에는 작은 카드에 꼼꼼하게 적어 정리해서 찾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시절이 있습니다만, 이젠 컴퓨터로도 정리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늠조차 되지 않는 분량의 정보들을 어떻게 분류하여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참 많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새롭고 혁신적인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뿅’하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점에 이르도록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 발전시켜왔던 것들을 종합정리해서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것이며, 그것 또한 비슷한 시기에 여러 사람이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은데 오직 가장 먼저 발표한 사람이거나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사람만이 기억되는 더러운 세상이기도 합니다. 제가 가끔 인용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만, 금속활자는 우리나라에서 100년도 더 이전에 발명되었는데, 아직도 구텐베르크가 최초가 발명했다고 회자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미래지향적인 것 같습니다. 기술이 혹은 과학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갈 것인가 기대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옛말처럼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의학분야 역시 다른 과학분야처럼 과거에 있었던 성과들을 살피는 일을 철저하게 하는 분야입니다. 저도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에 대한 역사적 궤적을 뒤쫓는 일에 열심인 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알렉스 라이트는 <분류의 역사>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광대한 정보의 생태계를 이제 막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과거에 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해왔는지 그 역사를 철저하게 뒤쫓고 있습니다. 진화생물학, 문화인류학, 신화학, 수도원 생활, 인쇄의 역사, 과학적 방법, 18세기 분류학,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도서관 사서직, 초기 컴퓨터 역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영역으로부터 자료를 뽑아, 결국은 인류가 살아남아 현세에 이르게 되기까지 기여했다고 할 수 있는 정보처리에 관한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분류의 역사>에 저자가 담아낸 핵심은 생명체는 기본적으로 정보의 수집, 처리에 관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인간은 여기에 더하여 수집된 정보를 분류하여 종합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유전자에는 정보를 분류하는 속성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러한 능력은 수렵과 채집을 통하여 식량을 얻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가 빙하시대를 맞아 식량을 확보하는데 있어 위기가 닥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하여 집단을 이루게 되면서 축적되는 정보량이 많아지고 상호작용에 의하여 정보활용도 역시 높아진 것이 인간사회가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를 문자로 기록하게 되면서 정보가 후세에 전해질 수 있게 되었고, 이렇게 기록된 정보를 모으는 도서관이 만들어지면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고, 인쇄술의 발전은 정보의 대량유통이 가능하게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인터넷 시대를 맞아서는 정보를 생산하는 주체가 확대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는데, 인터넷이라고 새로운 형식의 정보네트워크를 통하여 확산되는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발전시킨 분류 체계에는 바로 ‘계층 구조’와 ‘네트워크’라는 변하지 않는 항구적인 속성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분류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도 전에 네트워크와 계층구조라는 제목의 제1장을 통하여 이를 설명하고 있는 이유로 보입니다. 그 다음에는 분류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뒤쫓기 위하여 인류가 정보를 어떻게 처리해왔는지 그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 있는 점도 눈에 띄는 점입니다.

 

요즈음 즐겨보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글창제를 둘러싸고 백성이 쉽게 익힐 수 있는 한글에 대하여 사대부들이 위기의식을 느낀다는 설명과 관련하여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의 한 대목을 소개합니다. “발명의 신 테우스가 이집트 타무스 왕에게 백성들이 자신이 발명한 문자를 사용하게 되면 훨씬 현명해질 것이라고 말하자 타무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대의 발명품은 배우는 사람들의 영혼에 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기억을 사용하려고 들지 않을 테니까. 사람들은 외부에 쓰인 문자들을 믿고 스스로 기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가 발명한 것은 기억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것이오.’(15쪽)”

 

그리고 생각하니 휴대전화, 노래방기계와 같은 기계들에 둘러싸여 살다보니 전화번호나 노랫말을 기억할 필요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편리하기는 하지만 기억하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과거에는 기억력을 높이기 위하여 특별한 노력을 했는지에 관한 저자의 인용에 관심이 가기도 합니다.

 

쉽지는 않지만 인류가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여 처리해왔는지에 대하여 잘 정리되어 있어 앞으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를 가늠할 수 있게 안내해주는 좋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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