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선감의록 우리고전 다시읽기 3
구인환 엮음 / 신원문화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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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의 난쏘공 활동기간 중에 많은 인문학 서적들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평소 읽어온 책들과는 다른 분야였던 탓에 정독을 하다보면 리뷰를 작성해야 하는 1달이 훌쩍 가곤했습니다. 특히 부피가 있는 책을 읽을 때는 리뷰로 요약하는 일조차 힘겹다는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책 가운데 간호윤교수님의 <아름다운 우리 고소설;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88212>이 있었습니다. 현대적 문체로 풀어 소개한 책들은 대부분 읽어 알고 있지만, 알지 못하던 우리 고소설이 그렇게나 많이 있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가끔은 아이들 책장을 살펴보는데, 그 이유는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2년에 나온 책이니 오래된 책입니다만, <창선감의록>도 작은 아이의 책장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아내에게 듣기로는 어느 해 수능시험에 <창선감의록>이 인용되었다 해서 입시준비용으로 읽은 책이라는 것입니다. 참 대단한 대한민국입니다.

 

<창선감의록>은 해제한 분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만, 간호윤교수님에 따르면 이본이 무려 351편이라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꿈의 시청률 50%를 넘어 고공비행한 인기소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읽은 구인환교수님이 엮은 책이나 가장 최근에 나온 이지영교수님이 엮은 책에서도 작가 미상이라 표기하고 있습니다만, 간호윤교수님은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조선 19대 숙종때 유학자 조성기를 작가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 윤리였던 충효사상과 권선징악을 핵심으로 하고 있고, 작가가 명문 사대부였으며, 집필동기가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이 대중적 인기몰이를 한 까닭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우리나라의 관직 등이 등장하여 조금 헷갈리기는 합니다만, 중국의 명나라입니다. 지금도 가보지 못한 이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같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가보지 못하였지만 구전으로 듣는 중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같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대를 중국으로 하는 경향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당대의 권력자 엄숭이 조자룡 헌칼 쓰듯 마구 휘두르는 권력으로 무너지는 나라기강을 바로 잡기에 한계를 느낀 도어사 화욱이 낙향하여 세 부인과의 사이에서 얻은 자녀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화욱의 아들 정진이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고 다시 향리로 물러나있는 중에 셋째부인 심씨와 그 소생 화춘, 그리고 그의 후처 조녀의 등장으로 맞은 멸문의 위기를 화진의 지고한 윤리적 성정이 빛을 발해서 만사가 해결된다는 해피엔딩에 이르는 소설입니다. 딱 요즘 말로 바꿔 말하면 영어로는 soap drama의 범주에 넣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장르라고 할 막장드라마라고 하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읽는 이의 눈물로 범벅이 되고 주인공이 위기에 몰리면 악역을 한 심씨와 조녀, 화춘이 독자의 지탄을 받고, 핍박받는 남녀 주인공에게 애절한 마음이 쏠렸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요즈음의 시청자들이 막장드라마라고 비난을 하면서도 채널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가 막장에 대한 성향이 유전자에 녹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창선감의록>을 엮은 구인환교수님에 따르면 조정에서 일어나는 권력싸움이나 변경에서 일어나는 전쟁도 등장하지만 화욱의 가솔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을 다루고 있고 결국은 선한 이가 승리한다는 도덕소설로 보고 있습니다. ‘인생은 남녀와 귀천을 막론하고 충효로서 근본을 삼고 여타의 다른 덕행은 모두 이에서 나온다’고 작가가 모두에 밝히고 있는 점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간호윤교수님의 경우는 이 작품이 나올 무렵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치열하던 당쟁에서 밀린 서인(조성기는 서인이었다고 합니다)을 윤리적으로 우위에 두려는 의도가 녹아 있지 않겠나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는 불교와 도가적 사상까지도 등장하여 읽기에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측면도 없지 않습니다만, 그저 읽는데 흥미를 더한다 생각하면 별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다만, 계모 심씨와 그 아들 춘의 계략에 말려 그들을 살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은 주인공 화진이 변명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형을 받기로 한 배경이 요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즉 자기가 변명하여 진실이 밝혀지게 되면 모함을 한 계모 심씨와 형인 화춘이 화를 당하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누명을 쓰는 쪽을 택한 주인공을 저 역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독자의 이런 걱정을 배려하여 주인공의 이런 선택이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결국든 자신을 모함한 계모와 형님이 개과천선하는 계기로 이끌고 있으니 독자들의 환호성을 받게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문으로 옮겼습니다만 고어체가 많이 남아있어 읽는 호흡을 맞추기가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 선조들의 생각의 단편을 읽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학생시절에 <홍루몽>을 읽고 그런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판타지를 가졌던 기억도 되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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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KBS 사이언스 대기획 인간탐구
김윤환.기억 제작팀 지음 / 예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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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아무래도 기억력이 조금씩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적에는 스치듯 본 것까지도 잘 기억해내서 할머님께서 기특하다는 말씀을 하시곤 했던 것 같습니다. 기억력이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억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기억은 어떻게 갈무리되는지 관심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억의 형성에 관한, 기억력을 높이는 방법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해왔고, 어느 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만, 아직도 해야 할 연구가 많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기억>은 KBS 사이언스 대기획 <인간탐구>에서 3부작으로 다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광범위하게 조사된 자료를 토대로 프로그램을 주관한 김윤환PD님이 요약하여 보고 듣는 프로그램을 읽고 생각하는 책으로 만든 것입니다. 역시 TV프로그램을 제작하시는 분답게 오밀조밀한 구성에 다양한 화면구성으로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풍성하게 담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께서 기억에 관심을 가지게 동기가 보통사람들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길상사 덕현스님이 설법 중에 주신 ‘나는 누구일까요? 우린 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곳에 있을까요? 그리고 왜 고민이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평생을 살다가 떠날까요?’라는 사람의 근원적 존재이유에 대한 물음을 듣고서, ‘왜 나는 남과 다르지? 부모님께 받은 유전자? 개성? 인격?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것은 뭐지? 그리고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뭘까?’하는 의문이 화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 가운데 하나가 ‘기억’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기억을 뒤쫓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억에 관한 자료는 너무 방대해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입니다. 저자는 관련 자료를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기억이란 무엇인지, 기억이 왜 만들어지는지, 기억이 어떻게 만들어져 어떻게 저장되는지를 한 묶음으로 하여 ‘1부 오래된 미래, 기억’에 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고민대상인 기억력감퇴에 관한 이야기, 건망증에서부터 치매로 인한 기억력 상실에 이르는 심각한 병적 상태,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실험을 통하여 증명하려는 노력을 ‘2부 봄날은 온다’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기억이 사라지는 망각(妄覺)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기억을 잊거나 나쁜 기억을 오히려 좋은 기억으로 바꾸는 방법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TV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환자 사례들을 볼 수 있어 기억과 관련된 질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과 관련된 연구를 하는 국내외 석학들을 두루 만나 그들의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기억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요약하여 박스형태로 혹은 본문에서 충실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진자료들은 뇌과학의 연구산물에서부터 환자와 관련된 영상자료, 병리학 자료들이 전문가들이 참고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입니다. 그리하다 보니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를 뛰어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뇌의학의 한 분야를 공부한 저도 생소하다 싶을 정도의 자료도 있습니다.) 실물사진을 바탕으로 그래픽처리를 한 그림들도 많았습니다만, 영상자료를 옮기다 보니 사진설명으로 충분할까 싶은 부분도 있는 듯합니다.

 

관련 분야의 전문가로부터 충분한 자문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워낙이 방대한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걸러내지 못했겠다 싶은 부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57쪽에서 인용하고 있는 뇌사진은 형태로 보아 정상 성인의 것은 아닌 듯하다 싶습니다. 128쪽에서 인용하고 있는 뇌사진 역시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뇌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개념도 눈에 띄었습니다. 용어선택에 있어서도 플라크, 탱글과 같이 의학용어집을 바탕으로 번역되지 않고 원음으로 표기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런 단어들은 이미 판, 섬유농축체라는 우리말이 일반에게 많이 소개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129쪽의 알츠하이머성 치매, 파킨슨성 치래, 알코올성 치매 등도 정확하지 않은 표현입니다. 기억과 관련된 다양한 실험이 소개되어 있어 흥미로웠는데, 일반인과 택시기사의 해마용적을 비교하는 실험을 설계자체가 잘못되었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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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혁명 - 힘과 위력, 인간 행동의 숨은 결정자 데이비드 호킨스 시리즈
데이비드 호킨스 지음, 백영미 옮김 / 판미동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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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이유는 아마도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다는 귀띔때문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특이하게 느껴진 모두의 편집자의 말에서 저자인 호킨스박사가 진실과 거짓에 대한 신체운동학적 반응을 연구하여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데, “기만으로 알려진 진술이 담긴 테이프를 듣는 피험자들은 비록 화자가 진실을 말하는 것 같고 그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더라도 테스트에서 약한 반응을 보였다.(13쪽)”고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서문에는 “인간 삶의 큰 비극은 항상 심령이 너무도 쉽게 속아 넘어간다는 데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불화와 반목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인류의 무능함의 불가피한 귀결이었지요.(29쪽)”라고 적고 있어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와 같은 혼란은 많은 의사들을 만났음에도 치료되지 않는 긴장증을 앓는 여성 환자를 진료하면서, 저자가 “신이여, 이 여성이 어떤 일을 겪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물었음에도 이어서 “나는 온갖 고통과 괴로움은 신이 아니라 오직 에고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26-27쪽)”라고 적고 있는 것으로 가중되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 이은 서론에서 자신이 전하는 핵심적인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전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겠다고 하였습니다. “개별적 인간 마음은 어떤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연결된 컴퓨터단말기와도 같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는 인간 의식 자체이고 그것에 대해 우리 자신의 지식은 개별적 표현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 개별적 표현들은 전 인류의 공통의식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는 천재의 영역입니다. 인간이란 그 데이터베이스에 참여한다는 것이므로, 만인은 자신의 탄생 덕분에 천재에 접속되어 있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에 들어 있는 무한한 정보는 누구든,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건, 몇 초 만에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금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발견인데, 그 속에는 개인과 집단이 아직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정도로 삶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들어 있습니다.(46쪽)”

 

인용하기에는 조금 긴 문장입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읽고나서도 저자가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핵심메시지가 무엇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또한 책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 다시 읽어보니 더욱 헷갈리고 있습니다. 저자가 책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너무 동떨어진 요약이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한편으로는 특정종교의 의식을 주제하는 분이 전하는 말씀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데, 어떤 신도 믿지 않고 있는 저로서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책을 읽다보니 저자는 특정종교에 속한다기 보다는 영적존재를 믿는 영성주의자라고 보입니다. 영성주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현상들 가운데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초자연적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영성주의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시작하여 유럽으로 확산되었는데, 역사적으로 과학을 전공하는 과학자들 가운데 의외로 영성주의자가 적지 않은 것은 초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여도 답을 구하지 못하는 개인적 한계에 부딪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호킨스박사 역시 영적진실은 설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시되어왔는데, 바로 그렇게 무시당해 온 영적 진실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몸이 해로운 자극에 노출되면 근육이 즉각 약해지는 현상에 주목하여 개발한 ‘근육테스트법’으로 우리 몸이 생명을 지지하는 것에는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그렇지 않은 것에는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것입니다. 1부터 1000까지의 척도로 인간의 의식수준을 수치화하는데 성공하여 과거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의식수준을 수치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이 과연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검증과정이 신뢰할 수 있는가 입니다. 영성주의는 회의주의자들의 주요 논쟁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마이클 셔머교수는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를 통하여 과학, 의사과학, 비과학의 범주를 나누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사물을 과학이라는 잣대로 단순하게 나눌 수 없는 스펙트럼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퍼지이론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셔머교수는 다윈과 더불어 진화론을 완성한 월리스박사가 과학적 방법으로 영성을 추구한 사실을 뒤쫓으면서도 영성주의가 과학으로 입증되었다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셔머교수의 방법론으로 호킨스박사의 의식수준 수치화방식을 검토해보면 과학의 이름만 빌었다 뿐이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 더 꼭 짚어야 할 점은, 호킨스박사의 생각이 지극히 서구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세상의 상태를 살펴보면 우리는 여러 아대륙(亞大陸)의 인구가 근근이 연명하는 수준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금세 상기하게 될 것이다.l 그런 곳에서는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자원결핍을 자주 동반하는 기근과 질병이 흔하다. 그런 국민 다수가 무감정 수준으로 측정되는 희망없음의 상태에서 비참한 가난을 체념한 채 살아간다.(113쪽)” 과연 그가 그런 지역을 방문하여 직접 의식수준을 평가해보았을까요?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인해보았을까요? 그리고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교훈을 얻었고 집단적으로 진화상의 큰 도약을 이룬 반면, 미국의 의식수준은 베트남 전쟁 결과 하락했다고(260쪽) 단정한 것 역시 그의 편향적 시각을 드러낸 것이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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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
맥스웰 그렉 블록 지음, 박재영 옮김 / 청년의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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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의 맥스웰 그렉 블록교수의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를 읽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신화(The hippocratic myth)”라는 원제목을 ‘히포크라테스는 모른다’고 소개한 것은 블록교수가 이 책을 통해서 주장하는 내용들이 히포크라테스는 예상하지 못했을 의료환경의 변화에 따른 의학의 위치 재설정과 관련된 것들이며, 우리나라 의료계도 당면하고 있는 과제일 수 있다 싶습니다.


이 책을 번역하신 박재영 선생님은 역자서문에서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라는 말만 들어도 뭔지 모를 부담을 느끼고, 많은 시민들은 인술을 베푸는 의사를 찾아보기 어렵다고 개탄한다. 의사들은 의료제도가 잘못됐다며 불만을 터트리고, 시민들은 의사들의 냉정함과 탐욕을 비난한다. 그 와중에 의료비 급등은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면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의료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의 일부를 확대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또는 그 책임이 꼭 의사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블록교수는 사회가 복잡해지고 의학의 능력이 커지게 됨에 따라 의사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요구가 확장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학을 치료 이외의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옳지 못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어 현대의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담론자체를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의학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트기 위하여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충돌하고 있는 의료현장의 문제들을 골랐다고 합니다.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건강보험이 적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의사의 진료범위에 관한 내용과 고문, 사형집행 등과 같이 비의료의 영역에 의사들이 참여하는 행위에 대한 의료윤리적 타당성 등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블록교수가 제기하고 있는 화두가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하버드대학의 아툴 가완디교수 역시 2007년에 발간한 “Better: A Surgeon's Note on Performance”(우리나라에는 2008년 ‘닥터, 좋은 의사를 말한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소개되었습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0272224)에서 건강보험제도 아래서 의료가 가지는 한계, 즉 박재영선생님 말씀대로 의사들이 진료현장에서 무엇에 휘둘리는지, 그리고 사형제도에 참여하고 있는 의료인들의 입장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세한 데이터를 인용하여 문제를 제기한 바 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말기암으로 호스피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혈소판제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상황에서 보건의료정책결정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치료하는 의사들이 비용절감을 위한 노력에 동참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프고 두려울 때, 의사들이 우리 편이 되어 우리 곁에 있어 주기를 원한다. 우리는, 결과가 어찌되건, 우리의 의사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잘 지켜주기를 원한다.(7쪽)”고 속내를 털어놓고 있습니다.


저자가 의사들이 보험회사의 입장을 대신하여 비용을 절감하기 위하여 유익한 치료를 자제하는 것 아닌가 의혹의 눈길을 보내면서도 환자들의 신뢰에 커다란 흠집을 내지 않으면서 의료비를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고 있는 것과 모순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궁내막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례에서는 적극적인 수술로 병소를 제거하는 시술을 보험에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도 합니다. 환자는 시술을 통하여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를 얻었지만, 이 방법은 보험회사에서 규정한 진료행위로 인정되지 않아 일단 자비로 시술을 받고 보험회사가 관련 비용을 지불하도록 법원에 판단을 구하는 모험을 한 결과 승리를 쟁취했다는 것입니다.


그밖에도 충수돌기염의 진단에 필요한 초음파검사를 인정하지 않는 규정 때문에 천공이 발생하여 위급상황을 맞은 사례, 임신으로 오인된 융모암의 사례, 비용-효과성을 고려하여 적절한 검사를 시행하지 않았던 뇌종양 사례 등을 인용하면서 의학이 한정된 자원을 지키기 위하여 환자의 생명을 구할 기회를 은밀하게 침해하는 것은 아니냐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특히 말기암환자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건강보험의 재정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저로서도 답변이 쉽지 않은 사례들이라 생각됩니다. 최근 많이 인용되고 있는 근거중심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사례들에 적용된 시술이 근거를 입증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성공사례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급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런 개별 사례를 인용하여 현대의학이 당면하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입장, 즉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정신을 위배하여 충분한 진료를 제공하지 않는 점을 지적하는 한편, 제한된 의료자원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점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특히 저자는 지난해 12월 3일 서울에서 열린 2011 KHC (Korea Healthcare Congress)에서 ‘히포크라테스의 고민: 의료서비스가 배급의 대상인가’를 주제로 한 기조연설을 통해 “의료비용 증가의 주요인으로 고가장비를 통한 신의료기술 사용을 꼽으면서 이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442275). 정말 의료비가 빠르게 상승하는 책임이 의료계에만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아툴 가완디교수가 “보험은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도덕적 해이’의 온상이기도 하다. 돈은 딴 사람이 내고 우리는 아이를 살리는 데 얼마가 들었는지 얼마가 청구되었는지 전혀 개의치 않았던 것이다.”라고 한 말을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의료서비스를 제공받는 환자입장에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선의 진료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볼멘소리도 있습니다. 공공부조와 민영의료가 공존하는 미국의 보건정책담당자들은 캐나다, 우리나라에서 운용하고 있는 단일보험자체계가 관리운영비를 절감하는 등 효율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원의 한계성을 고려한다면 환자가 원하는 다양한 수준의 의료서비스 제공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점도 고려되어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의사들이 보험재정의 덫 때문에 필요한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분배자로서 악역을 담당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환자를 돕되 해를 주지 마라’는 구절이 현대의 생명의료윤리의 네 원칙 가운데 ‘선행의 원칙’으로 정리되어 금과옥조처럼 존중되고 있으나, 사실은 ‘악행금지의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히포크라테스 시대에도 ‘질병이 위중하여 의학이 도움을 주지 못하는 환자에 대하여 치료를 거부하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주장이 논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 주제입니다. 이라크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이락크군 포로를 학대한 사건이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이 동원되었던 것이 뒤에 밝혀져 논란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한국전쟁 때 포로로 잡힌 미군들이 적국의 심리전에 말려 미군의 전쟁참여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선언을 했던 사건이 교훈이 되었다고 합니다.


포로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수준을 넘나드는 심문과정에서 의료자문을 하거나 심리적 기법을 자문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과연 ‘환자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전문가로서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임에 틀림이 없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서의 의무를 지킬 이유는 없다는 해석을 내리기도 하지만 선서에서는 “나는 어떤 요청을 받아도 치명적인 약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해 조언도 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어, ‘약’을 의사로서 배워 익힌 ‘의학적 지식’으로 해석하는데 크게 무리가 없다 하겠습니다.


또한 의학의 의료이외의 영역에 적용하기는 의학자의 전문적 자문이 필요한 사법적 판단영역이 있습니다. 의학적 판단의 대상이 자문결과에 따라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형집행에 의료인의 참여범위가 점차 확대되고 있는 점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사형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총살로부터 교수형, 가스실, 전기의자 등을 거쳐 지금의 독극물을 주사하는 사형방법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사형방법이 이처럼 변하게 된 배경은 형을 받는 사람의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윤리적 고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독극물주사의 경우 사망을 확인하기 위하여 배석했던 의료인이 집행과정에 개입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의사윤리의 저촉여부가 쟁점이 된 것입니다.


건강보험체제 안에서의 진료의 범위를 비롯하여, 군사, 사법 등, 전통적 의료영역 이외의 분야에서 요구되는 의학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자리매김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하게 되었고, 앞으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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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1-09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 http://www.rapportian.com>에 올리고 있는 북리뷰관련 이벤트 안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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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눈물이 나 - 아직 삶의 지향점을 찾아 헤매는 그녀들을 위한 감성 에세이
이애경 지음 / 시공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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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고른 책은 아닙니다. 제가 요즘 눈물에 필이 꽂혀있는 탓인지 ‘눈물’이 들어간 제목을 보고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그냥 눈물이 나본 기억이 없는 저로서는 이 책의 저자께서 얼마나 감성적이실까 궁금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아직 삶의 지향점을 찾아 헤매는 그녀들을 위한 감성에세이’라는 부제를 단 것처럼 딱히 그녀들을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저자 자신을 위한 글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제 생각이 맞았던지, “생각보다 훌쩍 들어차버린 나이와 조금만 더 아이로 머물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자신에게 보내는 비망록이다.”라는 글귀를 출판사 리뷰에서 발견하고는 공연히 흐믓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제 그러는데?”라고 묻고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그저 ‘그냥’이라는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런 감정의 기복은 유독 삼십 대들에게 자주 일어난다. 100세까지 줄기차게 산다는데 왜 우린 ‘서른’, ‘삼십’이라는 단어에 이토록 예민해지는 걸까? 아마도 이 단어가 연상시키는 막연한 동경과 함께 이젠 개념 찬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감을 동시에 몰고 오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매년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지만 유독 서른의 방황은 이후의 삶을 뒤흔들 만큼 강렬한 잔상을 남긴다.”는 구절이 잇달이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그럴까? 십대에는 마른 나뭇잎이 구르는 것만 보아도 꺄르륵 웃는다고들 했는데...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가을과 겨울 사이의 어떤 날처럼 느껴지는 그런지한 봄날, (…) 두 볼을 두드리는 찬 바람이 싫지 않아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던 순간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런데 왜 그랬는지 답을 적지 않았습니다. 혹시 “결국 난 한 가지 믿음, 서로에게 숨겨진 보물을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인가 있을 거라는 믿음만 붙잡고 있다.(176쪽)”고 고백한 부분이 이유가 될까요? 아니면 버금딸림음 ‘파’와 같은 신세 ‘서른 넷’이라서 그럴까요? 그도 아니면 죽을 만큼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죽을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았나보다. (…) 죽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고, 죽을 정도로 아픈 이별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180쪽)“고 슬그머니 변명한 부분에 답이 숨겨져 있을까요?

 

그냥 눈물이 나는 이유는 다른데 있었던 모양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그런 느낌”, “회사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날 메뉴는 국밥이었다. 이상하게 나에게만 유독 고기가 가득 담겨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그릇을 보니 콩나물과 약간의 고기가 고명처럼 얹어져 있을 뿐.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났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그런 느낌. 그저, 그냥 모든 게 고마웠던 어느 날 오후.(227쪽)”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외롭다는 생각이 고통스럽게 온몸을 옥조일 때, 무심하다싶게 일상적인 행동일수도 있지만 다른 이보다 나를 배려해주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을 때도 눈물이 쏟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 신기합니다. 역시 이애경기자님의 감성지수는 남다르다 싶습니다.

 

조용필, 윤하, 유리상자 등이 발표한 곡들의 노랫말을 지었다는 이작가님의 글은 짧으면서도 부드럽게 읽힙니다. 너무 짧은 것이 아쉽다고나 할까요? 여행을 즐기는 탓인지 해외여행지에서 느낀 생각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다시 한 번 머릿속에서 씹어보게 하는 것은 여행일정의 무게가 달라서였는지 제가 느껴보지 못한 점들이라 그럴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글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사진, 사진들... 아마 여행길에 만난 소중한 인연이었을 것 같은데, 다른 이들은 그냥 지나쳤을 것들을 꼼꼼히 카메라에 담아 들인 사려깊음이 빛을 보게 된 것 아닐까 싶습니다.

 

‘눈물’ 때문에 골라든 책에서 눈물에 관한 내용보다도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 더... 저자가 추천하는 아주 간단한 술끊는 방법을 꼭 해보려 합니다. “술을 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술을 마시고 싶을 때 안마시면 된다. 술을 마셔야 할 때 안마시면 된다.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때 집에 가면 된다.(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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