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디에 있는가 - 삶과 텍스트 사이에서 생각하기 한길인문학문고 생각하는 사람 12
강영안 지음 / 한길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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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책읽기에 재미를 들이면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인간의 언어, 문학, 예술, 철학, 역사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국어사전적 의미를 굳이 따져본다면 나름대로는 역사와 문학 분야에는 관심을 두고 나름대로의 책읽기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만, ‘철학’하면 일단 어려운 학문이다라는 지레짐작에 엄두를 내지 못해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철학이 인문학의 3대 주류 가운데 하나인데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길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가운데 만난 강영안교수님의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는 철학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는 책이었습니다. ‘삶과 텍스트 사이에서 생각하기’라는 부제가 없었다면, ‘철학은 없다’는 답이 나올 것 같은 제목입니다. 실제로 저자는 “배울 수 있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48쪽)”라고 단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는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젊은이들이 우리사회의 구조적 갈등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하여 사회과학과 철학 등 인문학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지만, 그 이후로 바뀐 학제의 영향을 비롯하여 사회환경의 변화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삶은 철학의 이유’라는 제목으로 한 서문에서 저자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맞추어 철학과 인문학은 변신을 꾀하지만 음식으로 배부르고 몸이 편안한 상황에서 대중들이 귀 기울여줄 것이라 기대하는 일은 처음부터 무리인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자와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가 마치 아테네 시민들을에게  쇠파리처럼 굴었듯이 사람들을 귀찮게 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8쪽)”고 인문학자들의 자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철학공부를 시작하나 싶기도 하고, 철학은 감히 엄두를 내기조차 겁나는 분야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저에게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는 일단 향도 역할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1부 ‘철학의 얼굴’에서는 철학에 대한 생각의 틀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스 철학부터 현대철학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흐름을 볼 수 있게 해주셨고, 2부 ‘타인의 발견’에서는 삶에서 철학의 의미를 새겨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의학교과서가 즐겨 사용하고 있는 틀이기도 합니다. 즉, 총론을 통하여 해당 분야의 전체적인 개념을 정리하고 이어서 각론에 들어가서는 분야별로 상세한 설명을 하는 식인데, 여기서는 각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일상에서 철학하기라는 점에서 본다면 각론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앞서 저자가 “배울 수 있는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한 이유는 철학은 하나의 학설, 하나의 가르침,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며 삶 자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최선인지는 각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깊은 사유를 통하여 끊임없이 스스로를 연마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삶이 철학 자체이고 철학적 물음의 원천이라고 한다면, 저자는 “우리의 사유하는 능력(논증과 반론), 사유 능력을 적용하고 훈련할 수 있는 텍스트, 그리고 삶”, 이 세 가지를 철학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세기 유럽철학의 풍경’이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근대 유럽철학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1900년 후설로부터 시작한 현상학에서부터 1920년 빈을 중심으로 한 논리실증주의, 프랑크푸르트의 비판이론, 러시아의 형식주의에 뿌리를 둔 구조주의 등이 과학적 철학하기와 현실파악이 핵심을 이루었다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철학에 뿌리를 두었던 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그 뿌리인 철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강영안교수님께서 인용하고 계신 철학 텍스트가 얼마나 광범위한지 놀랐습니다.

 

과학에 조금 관심을 가진 탓에 눈에 띈 구절입니다만, “사실로부터 규범을 얻어내고자 하는 시도는 마치 ‘바위에서 물을 얻어내자는 것’(ex pumice aqua)과 마찬가지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109쪽)”는 인용이 적확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바위가 치밀해서 물이 스며들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위를 구성하는 원소에 물성분이 결합해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2부 ‘타인의 발견’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한계로부터 유추되는 타인과의 관계가 논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윤리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윤리는 결국은 철학적 사유의 산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타인과 스스로의 고통을 다룰 것인가 하는 예시를 들고 있습니다. 1부는 철학의 원리를 설명하다 보니 아무래도 조금은 읽는 호흡이 더디다 싶습니다만, 2부의 글은 아무래도 우리네 삶에서 보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히고 이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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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
이종훈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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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가 의료계에 보다 높은 윤리의식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영기 교수님 등이 쓴 <생명윤리와 윤리교육;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0297>을 통하여 생명윤리를 포함한 윤리교육의 필요성을 짚은 적이 있습니다. 윤리의 기본이 될 도덕성을 갖추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도덕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도덕철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를 자주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쾌락과 고통의 선택, 즉 선과 악의 선택에 있어서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은 지식의 결여에서 나온다.(프로타고라스)”, “분명히 악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욕구하지 않으며, 실제로는 악인데도 사람들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욕구하게 된다. 따라서 그것을 모르거나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선을 욕구하는 것이다.(메논)”라고 주장하고 있어 도덕적 선(善)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는 앎을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는 자연철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질서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즉 우리의 삶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을 깨닫기 위하여 부단하게 생각하고, ‘덕은 곧 지식이다.’라는 지행합일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도덕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도덕지(道德知)는 곧 인생의 참목적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무지하기 때문에 덕을 가르칠 수 없고, 다만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워주는 ‘쇠파리’ 역할을 할 따름이라고 겸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길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서 기왕의 세력을 쌓고 있던 소피스트들의 반발을 얻어 시민재판에 회부되고 사형을 언도받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은 민주주의가 꽃을 피웠다는 아테네에서 도덕철학을 내세운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게 된 연유를 설명하고 있는 이종훈교수님의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을 소개하려 합니다. 지난주에 끝난 총선과정에 화제가 되었던 젊은이들의 사회참여에 관한 이슈와 같이 생각해볼 무엇이 있을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텍스트는 눈술과 토론을 위하여 기초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위하여 쉽게 정리되어 있어 저같이 인문학이나 철학적 배경이 두텁지 못한 사람도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철학의 요체는 델포이신전의 대리석벽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 그노티 세아우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했는데,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첫째, 무지(無知)를 자각하는 단계에서는 반어법(Socratic irony), 즉 논박술(elenchos)로서 자신이나 상대방의 무지를 확인함으로써 진리를 스스로 깨닫기 위한 준비단계이고, 둘째, 영혼(靈魂)을 활용하는 단계에서는 산파술(maieutike)로서 이성을 주고받는 대화를 통해 망각된 진리를 스스로 기억해내는, 즉 직관하는 작업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명예를 잘 지켜나가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시행하고 있는 직접 민주제도에서 남들보다 눈에 띄기 위해서는 웅변과 수사학적 재능이 필요하였습니다. 당시 각광받는 소피스트들은 청년들에게 돈을 받고 출세하는 기술을 가르쳤는데, 논리를 전개하는데 있어 정당한 근거가 부족하면 남이 보기에 그럴 듯한 논리를 개발하고 상대방의 의견보다 낫게 보이게 하는 궤변을 동원하는 법까지도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의(正義)란 [논쟁에서 뛰어난]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도 나왔다는 것입니다.(4쪽)

 

소크라테스의 시대 아테네에 있는 델포이 신전에서는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이 나왔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 지혜롭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지혜롭지 못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면 이를 깨닫게 해주려 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방식은 당시 젊은이들에게 많은 화제가 되었지만, 소크라테스로부터 망신을 당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절치부심 복수의 칼을 갈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있으며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을 믿는다는 죄목으로 시민재판에 회부한 것이고,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 앞에서 스스로를 변론하게 됩니다.

 

변론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따르는 젊은이들로부터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받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그들이 자신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들이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법정에서 시비를 가릴 일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법이 자신을 개별적으로 불러 가르쳐주거나 충고해주는 경우, 만약 내가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내가 본의 아니게 하는 짓이라면 당연히 그만둘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49쪽) 또한 국가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죄목은 재판과정에서 국가가 믿는 신들을 모독한다고 바뀌었는데 그 과정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하여 배심원은 280:220으로 유죄평결을 내렸는데, 고소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사형시켜줄 것을 요구한 반면 배심원들은 납득할 수준의 벌금형을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2차 변론을 통하여 누구에게도 고의적으로 해를 끼친 바 없다는 점을 확신하나 배심원들을 납득시키지 못하고 있을 뿐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벌금형을 받는 경우에는 벌금을 낼 재산이 없다는 점, 국외추방형을 받게 되는 경우에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현재 방식의 교육을 멈출 수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2차 변론은 배심원들이 360:140으로 사형을 평결하는 결과를 가지고 왔는데, 소크라테스가 배심원의 선처를 호소하지 않고 젊은이들과의 철학적 대화를 포기할 수 없으며, 부귀와 명예를 쫓는 그리스 사람들에게 영혼을 돌보라고 질타하였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에서는 아테네 시민법정에서 이루어진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소개하고 사형판결이 있은 다음,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소크라테스를 면회 온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하는 장면과 소크라테스가 이를 거절하는 이유, 그리고 아테네 법률의 논고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은 없다고 합니다. 다만 “어떤 사람이 누구와 합의한 것들이 올바른 절차에 의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입장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크리톤은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파멸을 바라는 자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는 것’이므로 탈옥을 권유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저버릴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자신의 탈옥으로 인하여 누군가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 나라와 조국이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행해야만 한다는 사실, 올바름의 본성에 입각해 나라와 조국을 설득해야만 한다는 사실, (…) 나라와 조국에 대해 폭력을 쓰는 것[법률을 위반하는 것]은 훨씬 더 불경한 짓이라는 사실도 모르는가?(135쪽)”라고 크리톤을 설득하는 장면을 보면,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논리가 아니라 그 악법이 만들어진 절차가 올바른 것이었다고 하면 지키되 그 법을 개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치룬 총선과정에서 저는 총선의 승리를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경향이 이제는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에서 강영안교수님은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이 인문학과 철학을 외면하고 있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할 목표나 관심보다는 즉물적인 현상에 매달리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생각이 진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외부의 충동질에 쉽게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젊은이들을 이용하려는 지도자는 많은데, 젊은이들이 참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려는 지도자는 별로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년말에는 차기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도덕경은 “太上, 不知有之, 其次, 親而譽之, 其次, 畏之, 其次, 侮之(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들에게 그 존재 정도만 알려진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지도자, 그 다음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지도자, 가장 좋지 못한 지도자는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는 지도자)”라고 네 종류의 지도자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선량이라고 하는 국회의원도 그렇고 대통령 역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분이면 좋겠는데, 그런 분이 없다면 가까이하고 칭찬하는 분이라도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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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4-1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197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 《아직도 가야 할 길》 스캇 펙 박사의
M. 스캇 펙 지음, 신우인 옮김 / 포이에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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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음 이후의 세계가 궁금하지만, 죽음 이후의 세계가 어떤지 알 수 없는 것은 그곳을 다녀온 사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간혹 사망선고를 받았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임사체험을 통하여 죽음이후의 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는 모양입니다만, 과연 그것이 진실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미국 ‘유체이탈 체험 연구센터’의 마이클 라두가 소장은 “실험자들은 빛의 터널을 통과하거나 사망한 가족을 만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면서 “임사체험은 자각몽으로 판단되며 사후체험의 증거는 아니다.”고고 밝혔습니다. 또한 임사체험에 대한 연구를 해온 영국의 케롤라인 와트 박사는 “사람들이 밝은 빛에 이끌려 다른 세상을 봤다는 증언은 자기 세포의 죽음으로 인한 뇌의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화상으로 변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며 세포가 죽는 것에 의해서 강한 빛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는 것입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은 안락사에 관한 내용을 담은 <영혼의 부정: http://blog.joinsmsn.com/yang412/6647855>을 읽고 친숙해진 스캇 펙 박사가 그려본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임사체험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다니엘 터핀이 죽음을 넘어 경험하는 사후세계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어두운 터털에 빨려들어갔다가 멀리서 다가오는 빛을 향해 이동하는 동안 일생을 돌아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서술은 임사체험자들이 일관되게 전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 그가 도착한 세상은 아무런 장식도 없는 조그만 초록색 방이었고, 이어서 나타난 남녀 영접관으로부터 사후세계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됩니다. 그곳은 독특한 곳이기도 합니다.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현세와는 달리 이곳은 물질이 없고, 공간도, 시간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지옥과 천국을 이야기합니다만, 스캇펙박사의 사후세계에서는 모든 영혼들이 지옥과 천국 그리고 연옥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자유대원칙>과 <불간섭대원칙>을 지켜야 하는데,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대원칙>은 타인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불간섭대원칙>을 범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인류의 삶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가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스캇 펙박사는 독특한 우주시원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3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메리 마르타를 만나게 된 다니엘 터핀이 아내와 함께 도착한 곳은 낮과 밤, 빛과 어둠이 분리되지 않은 곳, 즉 창조 이전의 태초입니다. 신학자로서 창조론을 지지하는 입장인 터핀이 모든 영혼이 창조 이전의 태초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스스로가 신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핀은 사탄의 유혹에 이끌리는 위기를 맞게 되면서 절대자인 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을 보면 모든 영혼을 주재하는 신이 존재함을 시사하기도 합니다. 또한 아내와의 만남을 통하여 사후세계에서 자신이 맡게 될 역할이 영혼창조의 과정을 연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영혼창조를 통하여 인간이 끊임없이 진화하게 된다고 하면서 진화가 우연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 진화는 우연의 산물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이 만드셨지만,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체적으로 진화하기도 해요. 하지만 우리가 조금씩 조금씩 개선해나가는 거예요.(195쪽)” 창조론을 수정보완하는 논리로 보입니다.

 

번역하신 신우인목사님은 스캇 펙박사가 이책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육체가 죽은 후에도 계속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전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현세에서처럼 홀로 힘들게 가는 길이 아니라서 절대자의 무한한 사랑과 끝없는 배려 가운데 이루어지는 자각과 성장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영혼이 그런 길을 가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곳에서도 집착에 매달려 스스로를 좁은 공간에 밀어 넣는 부류의 영혼이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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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이 해주지 않는 이야기
린 맥타가트 지음, 진선미 옮김 / 허원미디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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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린 맥타가트의 <의사들이 해주지 않은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 번 놀라게 됩니다. 동명의 건강전문 잡지 『What Doctors Don't Tell You』의 발행인이며 편집인인 저자는 현대의학의 신념에 과학적 의문을 제기하면서도 제도권 의학이나 대체의학이 올바른 방향을 찾아 나아갈 수 있도록 조타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내용은 제도권 의학의 긍정적인 면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문제점들만 집중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두 6부로 나뉜 내용은 ‘의료 속의 거짓과학’이라는 제목의 제 1부에 “현대의학의 비과학성”이라는 제목으로 현대의학이 허구라는 주장을 펼쳐내기 위한 몸풀기를 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는 전적으로 헛다리를 짚은 것이다. 의과학의 실체는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미국과 영국은 ‘암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있다. 유방조영술과 같은 초정밀 검사장비와 수술기법이 있지만 유방암 사망률은 떨어지지 않는다.(26쪽)”서 서론에서 전제하고서는 제2부에서 제5부에 이르기까지 현대의학의 진단과 치료 등 모든 영역에서 문제점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얼추 짚어보아도, 혈압측정, 콜레스테롤검사, X-선검사, 조직검사, 산전검사, 암선별검사, 예방의학, 예방접종, 호르몬치료, 항생제, 고혈압치료, 치과의 아말감, 수술, 스텐트시술 등입니다.

 

저자가 현대의학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인용하는 논문들은 대부분 의학 학술지에 발표된 논문들입니다. 따라서 일반독자들이 읽게 되면 저자의 주장이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저의 세부전공을 넘어가는 영역에서는 저자가 제시하는 논문들을 검증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이 틀렸다고 단정짓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의사들이 해주지 않은 이야기>는 1996년에 출간된 원전을 2005년에 보완한 개정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참고문헌은 무려 1200여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2005년에 보완하는 개정판을 내면서 2000년 이후에 발표된 문헌은 130여개 정도밖에 보완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의료행위에 문제가 있다는 문헌은 시시콜콜 인용하여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해당 시술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논하는 논문은 거의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20세기 초반을 넘어서면서 의료행위의 유효성과 안전성이 확보된 시술만을 인정하는 제도가 자리잡기 이전에 도입되어 의료계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는 의료행위는 별도의 근거자료를 만들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경과규정을 두었던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의료술기의 개발초창기에 나온 자료를 집중적으로 인용하면서 발전과정에서 나오는 새로운 자료는 외면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를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가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짚고 있는 시술들 가운데는 유효성과 안정성을 입증하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도입되었지만, 사용하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전체적인 효과와 부작용의 경중을 비교하여 부작용의 발생을 감사하면서 사용되는 행위들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행위의 경우 부작용의 발생사례를 수집하여 논문으로 발표하여 다른 의사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하기 마련입니다. 저자는 이런 논문들을 해당 시술이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인용하여 확대해석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의사들이 무능하다거나 또는 성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의사들은 아주 성실하게 일하며 또 그 대부분은 자신들이 배운 것을 매우 유능하게 활용한다(27쪽)”고 추어주면서, 곧바로 “의료는 과학이 아니며 기술도 아니다. 의사들이 금과옥조로 삼는 치료방법들 중에는 효과없는 것들이 많다.(28쪽)”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저자의 주장들 가운데는 의료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성인 정신병동에 입원한 1,000명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통상적인 혈액 및 소변검사로 진단에 도움을 얻은 경우가 1%에도 못 미쳤으며…(67쪽)” 같은 경우입니다. 이런 검사들은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들의 전신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기본검사입니다. 당연히 정신질환 환자들은 이런 검사에서 이상소견을 나타내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빈혈이나 당뇨, 백혈구가 증가하는 소견들은 정신질환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만, 전신질환이 동반되어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검사인 것입니다.

 

예방접종의 유효성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불신하는 논리는 저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래 전에 홍역백신에 대한 불신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지면서 백신접종을 기피하는 부위기가 확산된 다음 홍역에 대한 집단면역수준이 떨어지면서 홍역이 확산되어 큰 피해를 입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한 예방접종과 간질 그리고 자폐증과의 관련도 빠트리지 않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예방접종이 자폐를 부른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71623>에서 이런 주장에 대하여 드렸던 반론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의사들은 이처럼 무분별하게 동조하고 밑도 끝도 없는 낙관론으로 새로운 의학적 기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지만, 그러한 기술을 뒷받침하는 증거에 대해서는 가장 나중에 생각한다.(223쪽),”, “호르몬대체요법이 도입될 때부터 의사들은 통계학적 조작을 시작했다.(228쪽)”, “약품생산업자들은 우수한 약물임을 주장하지만 스테로이드가 이와 같은 비극을 초래할 수 있다는 분명한 사실에 의사들은 무관심하거나 눈을 감고 있다.(275쪽)” 의사들은 질병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어떤 약제를 투여하여 그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면 그 부작용을 치료하기 위해 다른 약제를 처방하는 등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린다.(281쪽)“ 는 등으로 의사들을 파렴치하거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의학에 무식하다는 식으로 매도하고 있는 저자의 단정적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처럼 의학과 의사를 믿지 못하는 저자는 제6부 ‘자기조절을 통한 건강관리’에서 “자가치유의 신비”라는 제목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현대의학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근거가 되는 패러다임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치유력에 맡기면 인간의 모든 질병이 해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저자가 주장하는 자연치유력에 맡기는 의료행위는 주술적 치료가 행해지던 원시의학에서 적용되던 것으로부터 민중의학에 이르기까지 전염병 혹은 각종 암종 등으로 인류의 평균수명이 40내외에 머물던 시절의 그야말로 예전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현대의학이 질병을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만, 분명 과거 인간들이 굴복했던 다양한 질환들에 맞설 수 있는 파워를 갖출 수 있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세대는 평균기대수명이 100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는 시점입니다.

 

질병의 치료에서 발전된 현대의학의 기술이 중요합니다만, 환자가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자의 근거가 부족한 주장들은 환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의료진을 불신하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참으로 황당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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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션의 시대 - 매일 쏟아지는 정보 더미 속에서 꼭 필요한 정보를 얻는 방법
사사키 도시나오 지음, 한석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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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보를 유통시키는 거대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

그 위에 형성되어 가는 무수한 정보의 비오톱.

비오톱에 접속하여 관점을 제공하는 무수히 많은 큐레이터.

그리고 규레이터에 체크인하여 정보를 얻는 팔로워.”


사사키 도시나오가 쓴 <큐레이션의 시대>의 맺음말을 시작하는 글입니다. 여기 적혀있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신다면 당신은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체에서 넘쳐나고 있는 정보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가 아마 맺음말부터 읽었더라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던 생소한 개념이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후쿠오카 신이치를 발견하기 전까지 대부분 실망하는 편이었던 제가 또 한 사람의 좋은 작가를 만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이니치신문 기자를 거쳐 독립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사사키 도시나오는 <플랫혁명>, <전자책의 충격>, <신문, 텔레비전의 소멸> 등의 저서를 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IT분야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큐레이션의 시대>에서 저자는 인터넷을 포함하여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넘쳐나다 못해 폭발적으로 쏟아지는 정보의 흐름에 제대로 올라탈 수 있는가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양한 사건과 사고들을 인용하여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비벼 넣는 솜씨가 아주 일품입니다.

먼저 정보의 유통에서 말하는 큐레이션을 정의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의 친절한 설명을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셜 미디어상에서 넘쳐나는 정보의 진위를 가리는 일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인터넷 서핑을 조금해보았다고 해서 금새 그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도 현실입니다.) 즉, 정보의 진위를 가리는 것은 어렵지만 그 정보를 보내는 사람의 신뢰 정도는 평가가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상에서 ‘사람을 관점으로 하는 정보유통은 압도적으로 유용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을 제공하는 사람을 오늘날 영미권의 웹에서는 ’큐레이터‘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큐레이터가 하는 ’관점의 제공‘이 큐레이션이다.(183쪽)”라고 저자는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큐레이터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학예사’들 가운데 다양한 예술작품의 정보를 모으고, 수집하거나 빌려와 전체에 일관된 의미를 부여하여 일반에 소개하는 기획을 담당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얼리 어댑터는 아닙니다만, 조금은 늦더라도 새로운 추세를 이해하고 동참하는 편입니다. 블로그를 통하여 적지 않은 독자들을 만나왔고, 최근에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카카오스토리까지 시작하여 이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SNS세계를 들여다보면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과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을 팔로워라고 부른다면 저자가 트위터에서 차용한 팔로워에 대한 개념이 재미있습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우하는 행위도, 팔로우한 상대의 관점을 체크인하는 행위하고 볼 수 있다. 트위터에서 유용하고 재미있는 트윗을 하는 사람을 발견하고, (…) 그 사람의 눈으로, 그 사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172쪽)”

 

정보의 바다에서 얻은 정보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면 그 정보로 인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 따라서 좋은 정보의 큐레이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저자의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관점에 체크인하여 소란스러운 정보의 바다에서 적절하게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175쪽)”.

소개하는 사진은 최근 나사에서 유튜브에 공개한 지난 2005년 6월부터 지난 2007년 12월 사이 지구상 해류의 움직임을 분석해 시각화한 영상으로부터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해류를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곳곳에서 소용돌이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잘 알고 있었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정보의 바다는 끝없이 펼쳐지지만, (…) 바다 곳곳에는 중심축이 있어, 그 축을 기준으로 정보가 모여들어 소용돌이를 만든다. 당신은 정보 그 자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어떤 축이 어떤 정보가 머무는 장소인가를 판단하고 그 축의 근처로 가서 축 주위의 물살에 손을 뻗으면 된다. 차갑게 튀어 오르는 물살 속으로 당신의 손을 넣고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면 주위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정보가 당신의 눈에 확실히 보일 것이다.(175쪽)”

 

출판사의 소개글에서 “이 책은 디지털 미디어의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정보의 흐름이 어떻게 바뀌고 있고 그런 맥락에서 큐레이션이란 무엇인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인터넷상의 온라인 서비스의 사례나 전략보다는 다양한 분야의 큐레이션의 사례를 풍부하게 제시한다.”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 사사오 도시나오가 <큐레이터의 시대>를 통하여 정보의 바다에서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는 길을 소개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가 정보를 생산하는 큐레이터가 되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고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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