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합이란 무엇인가 - 융합의 과거에서 미래를 성찰한다 미래 융합 아카데미 1
홍성욱 엮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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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서 조용하게 등장했던 융합이란 용어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의 안철수 원장의 정치적 행보 때문만은 아닌 듯합니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하여 포항공대, 호서대학에서 융합대학원을 설치한데 이어 성균관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가 의학부문에서도 융합대학원을 설치하였다고 합니다.

 

다음 국어사전은 “① 서로 섞이거나 조화되어 하나로 합쳐지다 ② 둘 이상의 사물을 서로 섞거나 조화시켜 하나로 합함.”이라고 융합(融合)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학계의 화두가 되고 있는 융합의 의미를 지식의 융합, 그 중에서도 학문의 융합을 통해서 시너지효과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학문의 융합이란 “다른 종류의 학제에 기반한 학문이 하나로 합하여지거나 그렇게 만듦”이라고 박상욱교수님은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몇 년 전 에드워드 윌슨교수의 화제작 <Consilience: The Unity of Knowledge>를 최재천교수님이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하면서 제시한 ‘통섭(consilience)’이란 조어가 한동안 회자되었던 기억이 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4895225). 인간의 사회적 행동양식도 생물학적, 유전적 진화과정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는 “사회생물학”을 처음 제창한 에드워드 윌슨이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으로 서로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을 <통섭>에 담은 것이었습니다. 윌슨교수님이 제창한 통섭이란 학문적 개념을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본 분들도 있었습니다. 윌슨교수의 하버드대학교 동료인 존 벡위드교수는 사회생물학이 한때 인류공존에 위협이 되었던 우생학의 망령을 되살릴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1205257>를 통하여 설파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박상욱교수님은 통섭이 학문간의 통합을 통하여 방법론을 공유하는 정도의 개념이라 한다면 융합은 서로 다른 두 학문을 녹여 전혀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인의 관심을 끄는 정도에 머물렀던 통섭과는 달리 학문의 영역을 변화시키고 있는 융합에 대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홍성욱교수님을 비롯한 여섯 분이 필진으로 참여하고 있는 <융합이란 무엇인가>에서 화제가 되고있는 ‘융합’이란 개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학문을 하나로 녹여내기 위해서는 각각의 분야에서 상당한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야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따라서 두 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을 모아서 하나의 학제에 묶어두는 물리적 융합으로는 기대했던 성과를 낼 수 없을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당연히 화학적 융합이 일어나야 하겠는데, 우리 옛말에도 있는 ‘팔방미인’이라는 말처럼 깊이는 없으면서 두루 걸쳐놓은 학문적 관심만으로는 해당 학문의 융합을 이룰 임계점을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이 또 다른 한계라 하겠습니다.

 

<융합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융합학문의 이론적 설명을 서두로 하여 학제가 융합이 성공한 분야를 예시하고 있으며, 미래에 융합학문이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될 것인가를 예측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생명과학분야의 독자들이 많으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박형욱교수님이 맡으신 노화와 장수를 주제로 한 글을 읽은 느낌을 정리해보려 합니다.

 

칼로리섭취와 장수와의 관계는 노화학을 전공하시는 분들이 오랫동안 주목해오고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제가 미국 텍사스에 있는 샌안토니오에 갔을 때 마우스를 이용하여 칼로리섭취와 수명을 연구하는 실험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양껏 먹이는 마우스에 비하여 사료의 양을 줄여서 먹이는 마우스가 더 오래 산다는 실험결과에 고무되어 귀국한 다음 소식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는 우리네 속담을 핑계로 내세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박형욱교수님께서 소개하시는 글에서 칼로리와 노화에 관한 선구적 연구에 처음 착안했던 맥케이의 초기 실험에서 칼로리를 제한한 동물들이 비교적 젊고 건강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구조적 기능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지적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칼로리를 제한한 동물이 크기와 몸무게가 떨어졌을 뿐 아니라 뼈에 칼슘이 부족해서 작은 충격에도 골절이 일어나기도 했고, 생식기능도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게 된 우리 아이들이 부모세대보다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아졌다는 점을 금새 깨닫게 됩니다. 칼로리 제한이 장수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분명 장점이 있다고 보지만, 건강 전체를 놓고 본다면 손익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멕케이가 실험모델을 구축하는 과정에서는 실험동물분야의 수준도 지금보다 낮아서 순수혈통이라는 개념이 없을 때이기 때문에 실험성적의 일관성 등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멕케이의 모델동물을 이용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노화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은 영양학과 축산학 등의 결합이 발단이 되어 생명과학 및 의학 영역으로 확대되어 장수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영역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전진권교수님과 장대익교수님께서 함께 쓰신 합성생물학 분야에서 융합의 성공사례는 놀랍기도 하고, 최근에 관심을 두고 읽었던 우주의 생성과 진화에 관한 책에서 얻었던 궁금증을 푸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시계공;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04835>에서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이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DNA라고 하는 화학적 구조에 그 유전정보를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의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7810>에서는 원시지구가 안정적 상태에 이르렀을 때 원소들이 서로 결합하여 DNA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DNA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실험실에서 구현하게 된 것도 유전학과 공학이 겹합한 합성생물학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공적으로 만든 유전체를 가진 최초의 합성 생명체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연구성과가 2010년 5월호 <사이언스>에 실렸다는 놀라운 소식도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공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일이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인류의 안녕을 위협하는 위기상황이 발생하고 이런 상황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우연 혹은 자연의 힘으로 겨우 해결된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읽어온 공상과학소설을 통해서 학습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실험실에서 인공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생명체가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마음 한 구석에 남게 된다는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밖에 일부 필진이 제기하고 있는 사회적 의미가 조금 더 강한 융합의 논점은 논외로 하기로 하고, 학문 혹은 학제의 융합은 의학계 혹은 의료계에서도 많은 관심을 두어야할 것이라는 점을 짚어보려 합니다.

 

의학과 윤리학이 만나는 의료윤리분야만 하더라도 존엄사를 비롯하여 장기이식 등 다양한 이슈를 정리하는데 있어 인문학적 깊이를 갖춘 의학자들이 심도있는 연구를 통하여 그 의미를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를 실행하는데 있어 현행 법질서체계와 충돌하는 부분에 대하여는 법학의 담을 허물어야 할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의학교육에 인문학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의 기초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의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의학대학원제도가 도입되기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물리적 융합만으로는 기획했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정책이 의학대학원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외국에서 이미 운용하고 있는 제도이기도 할 뿐 아니라 도입 당시에 부담이 되고 있었던 대입제도의 해결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예측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도를 도입하여 운용한 결과는 의학과 관련된 자연과학분야의 토대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기초의학 활성화 등 기대했던 효과는 전혀없고 오히려 개업의사만을 양산하는 부작용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의학대학원제도의 도입을 앞두고 의료계가 제기했던 우려가 그대로 현실화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사회는 충격적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의학교육에 관한 제도를 단숨에 바꾸려했던 시도 역시 우리사회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고 하겠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의학계에서 불고 있는 융합의 바람이 새로운 대안으로 자리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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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543
 
마약의 역사
조성권 지음 / 인간사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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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은 마약과 다소 거리가 있는 분야이지만, 마약관리에 관련이 있는 기관에서 일할 기회가 적지 않았던 탓에 마약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였지만, 막상 찾아보면 쉬운 우리말로 되어 있는 책자를 찾아보기 어려워 아쉬움을 느낀 적이 있었습니다. 특히 마약에 관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에 조성권교수님의 역저 <마약의 역사>는 관련 분야의 일을 하는 분들께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쓰거나 강연을 준비할 때 흔히 적용하는 방식이 바로 관련 주제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살펴보는 일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관련자료를 찾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혹은 주어진 여건 때문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지나가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전체를 한 눈에 조망해본다는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다소 딱딱하지만 학문적 접근방식에 충실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체제로 쓴 책들은 대체적으로 딱딱할 수밖에 없어 일반인의 흥미를 끌어당기는 힘이 부족한 경향이 있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주제에서 그 역사적 기원을 뒤쫓다보면 인류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마약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되었다는 근거를 내놓고 있습니다. 바로 메케너의 마약원숭이가설입니다. 인류가 진화되어 나오기도 전 단계인 원숭이 단계에서 실로빈과 같은 환각성 알칼로이드를 함유한 향정신성 식물들이 지닌 특수한 능력을 발견하고 섭취하여 자신의 뇌를 자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화론의 일반적 원리를 적용해보았을 때 지나친 주장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인류가 마약과 함께한 세월들을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마약에 대한 인간사회의 인식이 어떻게 변화해 내려왔는지 추구하고 있습니다. 원시시대에 있어 마약은 종교적 의미 혹은 신성한 의미를 담은 주술적 행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교역할을 하는 샤먼이 영적 존재와 접촉을 유도하기 위한 망아상태에 이르기 위하여 특정한 마약을 이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용되어온 마약을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옮겨온 사람들은 그리스의학자들이었습니다. 그리스 의학이 인류에 기여한 점은 신의 가호에 의지하던 질병의 치료를 의사라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집단의 전문화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 접근으로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을 종교로부터 분리하여, 질병이 신의 분노로 생긴다는 관념을 신체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결과라고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마약 역시 마법이나 종교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치유력을 회복시키는 도구로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로마시대에 까지 마약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긍정적인 경향으로 육체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용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힘의 추가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로 넘어가면서 마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고양시키게 되었는데, 그 이론적 배경은 육체적 혹은 심리적 고통 역시 인간이 신으로부터 받아야 하는 숙명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기 위하여 마약을 사용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근대에 이르러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제국주의 시대에 유럽사회가 신대륙과 구대륙으로 영향력을 확산하는 시기에 아편 등 마약을 노동력을 높이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특정 계층의 향락을 구하거나, 혹은 아편전쟁과 같이 특정국가들 대상으로 한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마약의 사용이 일상화되어 지구적 문제로 부상하게 되는 과정을 밟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은 인류의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마약의 사용을 규제할 필요가 있다는데 공감하게 되었고 국제적으로도 마약류의 공식적 유통을 금하게 되었지만, 이러한 규제조치는 거꾸로 마약의 유통이 비정상적 경로를 통하게 됨에 따라 가격이 폭등하고, 국제적인 테러조직이 개입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읽은 미국 작가 돈 위슬로가 쓴 소설 <개의 힘>에서는 미국사회에 마약을 공급하는 국제조직과 이를 차단하려는 미국정부가 전개하는 엄청난 규모의 전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미국정부가 자국을 위협하는 공산주의세력의 싹을 자르려는 물밑작업의 일환으로 마약의 유통을 허용하는 이중적 행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어 마약의 유통을 통제하는 일이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이와 관련된 정황은 이 책의 7장과 8장에서 다루고 있는 20세기 전후반 마약과 관련한 국제정세에 담겨 있습니다.

 

최근 들어 물질적 풍요를 얻게 된 미국사회에서 정신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논리로 자유로운 마약의 사용을 요구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치료용 목적으로 마약, 특히 마리화나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나라의 일각에서도 말기 암환자의 통증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 등 치료용으로 마리화나의 사용을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도 합니다.

 

분명 마약은 인간이 어떤 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인간에게 좋은 것이 될 수도, 나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약의 역사>는 마약사용에 대한 인식의 눈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쉬웠던 점은 간혹 오자가 눈에 띄는 등 편집과정에서 조금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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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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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는 분들 혹시 계신가요? 그렇다면 나의 과거 가운데 한토막을 잘라낸다면 나의 운명이 바뀔 것이라는 꿈을 꾸어보신 적은 계신가요? 만약에 누군가 당신의 꿈을 이루어준다고 제안하면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런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묵직한 울림을 남길 책이 있습니다. 바로 비프케 로렌츠의 장편소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입니다. 청림출판사의 이벤트를 통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짜고짜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과거보다는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저질렀던 모든 일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살고 싶은데 세월이 무상한지 하나 둘씩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지웠으면 하는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막상 고르려니 콕 집히는게 없네요.”라고 적어서 당첨되었고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과거지우기라면 시간여행에서 흔히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이슈일 것 같습니다. 시간여행자는 기본적으로 방문한 시간대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백 투더 퓨처 3>에서 브라운박사는 “미래는 백지야. 자네가 직접 만드는 것이라네, 멋진 인생을.”이라고 마티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보니 인간의 기억을 끄집어 다른 사람의 기억에 심는 기술을 선보였던 알렉스 프로야스감독의 <다크시티; http://blog.joinsmsn.com/yang412/4495836>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자정이 되면 외계에서 온 생명체는 인간들의 기억을 주사기로 끄집어내 다른 사람에게 심는 실험을 하면서 인간의 기억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에서도 비슷한 장치를 끌어들였습니다. 잘 나가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생들과는 다른 삶의 궤적을 쫓고 있는 주인공 샤를로타는 다니던 대학도 중퇴하고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호프집 서빙이 본업이 되고 언젠가 부터는 스치듯 만난 남자를 집으로 끌어들이고는 다음날 아침 후회하는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잘못된 과거를 들어내면 인생행로가 달라질 것이라는 엘리제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지워버리고 싶은 자신의 과거의 기억을 삭제하게 되는데, 저자는 기억삭제를 의뢰하는 사람의 기억뿐만 아니라 관련된 사람들의 모든 기억까지도 자동적으로 수정되는 아주 업그레이드된 기억, 아니 과거삭제술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처음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역시 지우고 싶은 자신의 과거를 기억의 심연 아래 묻어버렸지만, 자신이 지우고 싶은 과거의 행적으로 인하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잊고 살았던 모든 기억이 수면 위로 올라와 상황을 복잡하게 뒤섞어 버리는 이야기를 다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23266>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등장인물들을 뒤섞어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을 불행에 빠트리고 마는데... (스토리를 더 요약하다가는 스포일링이 될 것 같아 이 정도에서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젊기 때문에 생각이 여물지 못해 저지른 일이 나쁜 상황을 만들어간다는 점이 공통점인 것 같습니다.

 

어떻든 샤를로타는 과거를 지워버린 덕분에 젊어서 좋아했던 첫사랑과 결혼에 골인하게 되지만, 지워버린 과거를 대신해서 살아온 다른 과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저자의 의도적인 불성실함 때문에 일상이 실수연발이 됩니다. 결국은 자신이 지우고 싶었던 과거로 인하여 자신이 미처 모르는 주변사람들에 관한 진실이 튀어나오고, 과거를 지워준 엘리제의 지워낸 과거의 재활용으로 인하여 예상치 못한 꼬임이 발생하게 된다는 설정은 독특하면서도 새로 엮인 매듭을 풀어내는 고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전개는 군더더기 없이 장면이 잘 연결되어 흥미가 에스컬레이션됩니다. 그래서 단숨에 읽어낼 수 있습니다. 특히 옮기신 분의 말씀을 인용해보면, “잘못된 결정이나 실수들을 내 이력에서 깨끗하게 싹 지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행복할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만, 이미 “내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의미가 있다.”고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저자가 샤를로타의 어머니의 말씀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는 점을 콕 짚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충분한 나이야. 네 인생이라고. 너 말고 네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367쪽)” 그렇죠. 제가 살아낸 삶을 지워버린다고 지워지겠습니까? 그러니까 순간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정말 사족입니다. 샤를로타가 일하고 있는 ‘드링크스&모어’라는 이름의 술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모어는 안주에 관한 자유분방함을 강조하는 설명이 있습니다만, 제가 아는 안국동에 있는 민속주점에는 ‘주모마음대로’라는 안주메뉴가 있습니다. 가격은 정해져 있지만 무슨 안주가 나올지는 모르는 그야말로 주모마음대로 제공하는 안주라는 것입니다. 바로 드링크스&모어의 ‘모어’에 해당하는 개념일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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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와 자살 생명문화총서 1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 엮음 / 한국학술정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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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지난 10년 동안 OECD국가 가운데 1,2위를 지키고 있어 “자살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만큼 자살은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자살(自殺)은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음”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라틴어의 'sui(자기 자신)'와 'cædo(죽이다)'의 두 낱말을 합성하여 영어 suicide가 나왔다고 합니다.

 

지난 4월 12일 열린 대한신경정신의학회 2012춘계학술대회 개막 심포지엄의 주제 가운데 하나는 “자살의 생물학적 이해와 치료적 접근”이었습니다. 우리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자살에 대하여 의료계가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음이라 하겠습니다. 4개의 연제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포항공대 박상기교수님이 발표하신 “자살의 동물행동학적 모델”이었습니다. “동물도 자살을 하는가?”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는 발표였습니다.

 

최근 중국에서는 2살 난 페니키아 품종의 개가 주인이 죽자 보름이 넘도록 음식을 거부한 끝에 죽음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624595). 그밖에도 비단털쥐과에 속하는 소형 설치류인 레밍쥐는 3~4년에 한번씩 무리의 개체수가 갑자기 많아지는 폭발현상과 이주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특히 노르웨이레밍쥐(Lemmus lemmus)의 이동은 가장 극적이어서 많은 쥐들이 바다에 빠져서 죽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레밍쥐는 물에 들어가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동경로에서 나타나는 물을 헤엄쳐 건너는 일은 없다고 하기 때문에 이 현상을 적정개체수를 유지하기 위한 집단자살행위라는 해석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이런 현상을 바탕으로 동물에서 자살모델을 구현할 수 있겠다고 착안하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람의 질병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모델동물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것도 현대의학의 극적인 발전에 기여한 요인의 하나일 것입니다. 모델동물을 통하여 질병의 발병기전을 추구하고 개발된 치료방법의 효능을 비교검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서만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 자살이란 독특한 행동양식을 동물에서 구현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를 바뀌게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밖에도 고려대학교 이헌정교수님이 발표하신 ‘자살의 유전학적 연구방법론’, 김용구교수님의 ‘우울증에서의 자살의 생물학적 표지자’ 그리고 가천의과대학 이유진교수님의 ‘자살시도자에 대한 다양한 개입방법과 효과’ 등의 연제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들었습니다. 정신의학 분야에서 자살이라는 주제를 놓고 이처럼 많은 임상연구와 치료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사회적으로는 크게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습니다.

 

신문지상을 통하여 교육현장에서 왕따에 시달리던 청소년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 고통을 피하는 사건들이 이어지는 등 자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많아지고 있어 이번 주에는 자살에 관한 책을 골라보았습니다. ‘왜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버리는가’라는 부제를 단 <현대 사회와 자살>이라는 책입니다. 주제가 무겁고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을 두고 있음인지 서강대학교 생명문화연구소가 주관하여 자살문제를 연구하고 계신 여러 분들이 분야별로 나누어 쓴 글을 모아 묶은 책입니다. 모두 여덟 분이 심리, 철학, 교육, 의학, 연예, 윤리, 사회 등의 시각으로 자살을 논하고 있어 자살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식을 개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분야별로 심도있는 논의가 다소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왜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의 생명을 버리는가’라는 부제는가 해석하기에 따라 유독 한국 사람만 자살을 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겠고,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자살에서는 보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에서만 독특한 원인이 있는 것이라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후자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만...

 

‘한국사회의 자살;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이해와 대처’라는 제목의 글은 자살이라는 행동을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정리한 것인데 자살성(suicidality)의 개념과 원인, 자살자의 마음, 자살의 예방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신의학과 텍스트를 지나치게 축약해놓고 있지 않나 아쉬웠습니다. 차라리 자살위험이 높은 정신질환을 범위를 좁혀서 자살행동을 유발하는 징후와 자살시도를 막기 위한 적극적 개입방법을 소개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심포지엄에서 이유진교수님께서 소개하신 자살시도자에 대한 약물치료와 심리적 지지요법 등의 효과가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자살자의 마음이라는 소제목으로 된 짧은 글을 읽으면서 정말 자살자의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살에 성공한 사람이 남긴 글을 통해서 심리상태를 유추해볼 수는 있겠지만, 자살에 성공한 사람들로부터 당시의 심리상태를 들어볼 수 없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겠나 하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남깁니다.

흔히 유명인의 자살에 따르는 베르테르효과를 이야기합니다. 보름전 경남 봉하마을의 부엉이바위에서 70대의 할머니가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는 단신이 전해졌습니다. 부엉이바위는 노무현 전대통령이 스스로 몸을 던진 곳이기도 합니다. 그의 죽음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썼던 글은 노전대통령을 지지하는 분들을 고려해서 바로 발표하지 못했습니다만, 당시로서는 정말 대단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전대통령의 자살도 그렇지만, 그리 드물지 않게 접하게 되는 유명 연예인의 자살소식에 대한 언론보도성향은 꼭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무명 연예인의 자살소식은 뉴스거리도 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면 구석에 단신으로 처리되고 맙니다만, 사회적 이슈가 되거나 혹은 스포트라이트라도 받고 있는 연예인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순간 연예프로그램은 물론 정규뉴스프로그램까지 나서도 주요뉴스로 다루고 심지어는 생방송에 특집프로그램까지 제작하고 장례식을 중계방송까지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언제 그런 사건이 있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 우리사회가 큰 문제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옳은가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죽은 분들도 자신의 죽음이 화제에 오르는 것을 과연 즐길 수 있을까요?

 

문학평론가 이명원씨는 "스펙터클로서의 연예인의 죽음“제목의 글에서 이들의 죽음이 던지는 의미를 새기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스타는 일종의 영웅으로서의 대중적 토템이 라는 팬덤문화가 형성되고 있는데, 대중이 바라는 역할을 해야 할 스타가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대중토템으로서의 역할과 의무를 방기한 것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상징적 폭력으로 분출하는 현상이라는 해석이 저로서는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연예인의 죽음을 전하는 언론의 행태를 알튀세와 소쉬르 등 구조주의 철학의 개념으로 접근한 해석 역시 구조주의철학에 대한 저의 공부가 부족한 탓에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어 아쉬웠습니다.

 

오래 전 작고하신 연극배우 추송웅씨가 제작, 기획, 장치, 연출 연기까지 1인5역하여 흥행돌풍을 불렀던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기억되는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와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쾌락원리의 저편>을 중심으로 우울증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하신 김봉규교수의 “빨간 피터의 고뇌: 우울증에 대한 철학적 단상> 역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김교수님은 우울증을 ‘명확히 하나의 의학적 질병’으로 규정하여 ‘그 병 자체에 대한 진단 및 치료의 임상적 접근이 의사의 몫이지 철학자의 몫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도(94쪽), 철학자의 입장에서 ‘기본적으로 우울증에 대한 우리의 전제는 그것을 질환이나 문제로 보는 부정적 시각’을 코페르니쿠스식으로 전복시키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철학이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은 이제 겨우 깨닫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교수님께서 앤드류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을 인용하여 시작하고 있는 결론의 모두에 적은 “인간의 삶이 진정 고(아마도 ‘苦’일 듯합니다만)라면 사실 우울증의 치료는 실제 우울증의 치료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울증은 치료될 수 없고 억제될 뿐이다.”는 전제는 의학의 입장에서 보면, 타당한 전제인가 싶고 상당히 위협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철학과 사촌격이라 할 신학과 윤리학적 시각으로 자살에 대하여 논한 글은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살론부터 시작하여 자살에 관한 사유의 발자취를 쫓고 있어 그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고 있으나 현대적인 해석을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만, 역시 제 공부가 부족한 탓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끝으로 이순성교수님의 ‘자살예방책: 그 한계와 대안’과 강이영교수님의 ‘자살위기의 이해와 대처’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사회의 안녕을 해칠 수 있는 위기상황에까지 이른 자살문제에 대한 구체적 접근방식을 논하고 있습니다. 전편을 통하여 정신의학분야의 전문가의 참여가 없어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만, 일차의료현장을 중심으로 자살예방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의료계에 주문하고 있는 최근 사회적 여건(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2061)을 감안해서 정신의학과를 중심으로 하여 자살의 병리현상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마련이 시급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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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4-30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428
 
왜 똑똑한 사람이 멍청한 짓을 할까 - 헛똑똑이의 패러독스 세상 모든 호기심 WHY? 2
로버트 J. 스턴버그 지음, 방영호 외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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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제를 담고 있는 “왜(WHY)?” 시리즈의 네 번째 주제입니다. 제 경우는 똑똑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만 가끔은 발등을 찧고 싶은 생각이 드는 짓을 저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해답을 구할까 싶어서 고른 책입니다.

 

열다섯 분이나 되는 심리학의 대가들의 글을 모은 탓에 집중력과 글흐름이 끊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멍청함의 속성, 지능과의 관계, 학습장애와 멍청한 행동과의 관계 그리고 멍청함에서 벗어나는 방법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서문에 적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들, 예를 들면, 클린턴 대통령의 성추문사건, 명탐정 홈즈의 저자 코난 도일이 심령술에 빠져 살았다거나, 천재물리학자가 창조론을 신봉하는 까닭 등만 기억에 남은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저자들이 인용하고 있는 다양한 심리학 관련 연구결과 들이 쉽게 이해되지 않은 탓일 것 같습니다.

 

‘왜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할까?’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술을 끊지 못하고 끌려 다닌 과거를 뒤돌아봅니다. 사회생활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곤했습니다만, 드디어 금주를 선언하고 6개월 정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마침 읽게 된 이 글에서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를 깨닫고 , 유혹을 이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핵심은 ‘주의집중을 통한 효과적 자기통제’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일대학교 심리학과 로버트 스탠버그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마르틴 뉘멜러목사의 시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면 가히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 독일에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왔을 때,

나는 침묵하고 있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다음 그들이 유태인들에게 왔을 때, (생략)

그다음 그들이 노조에게 왔을 때, (생략)

그다음 그들이 천주교도들에게 왔을 때, (생략)


그다음 그들이 내게 왔을 때,

이젠, 아무도 나를 위해 항의해 줄 이가 남아 있지 않았다.“


최근 읽은 폰더씨 시리즈의 저자 앤디 앤드루스가 지은 <1,100만명을 어떻게 죽일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25273>에서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유태인 학살과정에 침묵했던 독일사람들의 심리상태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생각과 최근 중국당국이 한국 혹은 제3세계로 가기를 원하는 탈북동포들을 북한으로 강제송환하는 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난여론이 들끓고 있는 상황과 연계하여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금 죽음까지 내몰릴 수 있는 그들의 위기상황을 외면한다면 훗날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바윗덩이로 남겨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밖에도 똑똑한 사람들이 헛똑똑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멍청한 짓을 하는 까닭을 다양한 임상실험의 결과를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능과 성격, 멍청함의 관계’와 같은 일부의 주장은 역시 저자 나름대로의 견해로서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의 공감을 얻은 내용인지 의문이 가는 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혈액형에 따라서 급성충수돌기염에 걸리는 확률에 차이가 있는가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모집단의 숫자가 조금씩 늘어나면서 표본크기가 충분하다고 여겨지던 어느 순간 A형에서 급성 충수돌기염 환자가 전체 인구에 따른 혈액형비율보다 높게 나오는 것을 보고 흥분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표본크기를 더 확대하면서 그 차이가 줄어들더니 결국은 연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말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리하면서 번역하신 분들 혹은 편집하신 분의 의도가 개입된 것인지 독자입장에서 확인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글읽는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곳이 눈에 띄고 오탈자가 적지 않아 글읽기에 몰입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독자들이 이 점을 제대로 눈치채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왜 양 17마리와 염소 16마리를 더하면 33세가 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장치인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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