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의 오해
키이쓰 E. 스타노비치 지음, 신현정 옮김 / 혜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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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심리치료에 관한 내용을 담은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지 않는 점이 남던 기억이 있습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68365). 아마도 저자의 추론 가운데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심리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같은 느낌이 반복되면서, 한참동안 몰아치던 심리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적어지는 데는 까닭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험심리학과 인지심리학을 전공한 캐나다 토론토대학의 스타노비치교수가 쓴 <심리학의 오해; How to Think Traight About Psychology-심리학을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법-이란 원제목을 잘 요약한 제목이라 감탄하게 됩니다.>를 읽고서는 드디어 심리학, 특히 심리치료에 관한 책들을 읽으면서 깨름직하게 남던 무엇이 가시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심리학’이라는 딱지를 달고 우리에게 심리학을 소개하던 대부분의 책들은 과학적 근거가 미약하거나 아예 없는 주장을 담고 있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며, 그런 저자들이 때로 거창하게 심리학자라는 직함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점성술, 심령외과수술, 속독법, 바이오리듬, 역치하 자조 테이프, 영혼탐정 등은 사이비과학이라 불러야 할 것이라 단언하고 있기도 합니다.

 

현대심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은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있지만 심리학이 내놓는 행동에 대한 결론들이 과학적 증거로부터 도출된다는 점 그리고 심리학의 현실적 적용 역시 과학적 방법을 통하여 도출되어 왔고 또한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된다는 특성 때문에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35쪽). 이런 점에서 일반인의 뇌리에 대단한 심리학자로 각인되어 있는 프로이트 역시 진정한 심리학자라고 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이 일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프로이트가 사용한 연구방법 자체가 현대심리학에서 하고 있는 방법론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현대과학에서 사용하는 실험방법의 큰 틀은 실험군과 대조군을 엄격하게 통제하여 결과를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학적 방법론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경험주의에 근거한 심리학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 이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고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바로 과학적 증거를 토대로 한 심리학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불충분한 증거 혹은 경험에 바탕한 심리학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해부하여 상식으로서의 심리학이 아니라 과학으로서의 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특히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풀어놓은 설명들을 압축하여 말미에 붙여놓은 ‘요약’만 읽어도 독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심리학은 활동적이고 건강하다’라는 제목을 둔 첫 번째 장은 “심리학은 하나의 공통적 내용으로는 함께 묶을 수 없는 범위의 주제들을 관장하는 엄청나게 다양한 학문분야다. 심리학을 하나로 통합시켜 주는 것은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과학적 방법들에 있다. 과학적 방법들은 규칙들의 엄격한 집합이 아니다. 오히려 몇 가지 지극히 보편적 원리들로 정의된다.(63쪽)”라는 글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특정 이론과 관련된 새로운 증거를 평가하는 방법은 언제나 데이터가 그 이론을 반증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만 하고, 이 원리를 반증가능성 기준이라고 하는데, 칼 포퍼가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요즘 읽고 있는 칼 포퍼의 저서에서 그와 같은 원칙을 느끼고 있어 공감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과학에서의 개념은 일련의 조작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지 단 하나의 행동적 사건이나 과제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98쪽)”라는 요약은 최근에 근거중심의학에 의하여 결정되는 사안들이 많다보니, 증례라고 해야 되는 단 하나의 사례를 마치 근거인양 인용하는 상황도 보게 됩니다. 특히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에서 벌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용된 사례를 경험한 이들이 돌팔이 치료법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을 지지하고 나서는 경우 이를 설득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입니다.

 

흔히는 과학분야에서는 특출한 천재에 의하여 획기적 발전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심리학분야의 경우는 행동문제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평가할 때는 ‘획기적 성공’이 아니라 ‘과학적 합의’로, ‘위대한 도약’이 아니라 ‘점진적 종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고 저자는 충고하고 있습니다. <심리학의 오해>를 통하여 심리학이라는 가면에 숨어있던 사이비 심리학을 가려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얻은 것은 저자의 집필의도에 참 충실한 독자였구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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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여성학적 성찰 내일을 여는 지식 사회 60
이동옥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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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을 쓰기 이전부터 시작된 저의 책읽기 화두 가운데 중심축에는 나이듦과 죽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성학적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제한점은 있습니다만,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화여자대학교의 이동옥교수님이 쓰신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여성학적 성찰>입니다. 서지학적 분류는 전문서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전문서적하면 딱딱할 것이란 선입견이 들기 마련입니다만, 제가 보기엔 다루고 계신 주제가 노화방지의학이라거나 텔레비전 드라마를 중심으로 하여 여성노인의 역할을 분석한 글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노인의 성과 사랑에 관한 사회적 인식 등을 다루고 있어 친숙하고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조루주 미누아가 쓴 <노년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57577>를 보면 역사적으로 노-소간의 갈등이 심각했던 시기가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 여건이 어려워지면서 노-소간의 갈등을 부추겨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세력들이 입지를 넓혀가고 있어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동욱교수님 역시 이런 시각에 대하여 “노인은 젊은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생존하는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점(27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노인들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키워낸 것이 바로 그분들이란 생각을 하면 그런 시각에서 접근하면 안되는 것이겠지요.

 

돌이켜보면 우리사회가 서구화되면서 대가족제도가 해체되어 핵가족화하고 게다가 출산이 줄어들면서 가족의 규모 역시 작아지고 있습니다. 더하여 기대여명이 획기적으로 늘어서 노령화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노인복지제도가 이와 같은 사회현상을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게 되면서 가족에 의하여 보호받던 노인들이 사회적 차원에서 보호되지 못하는 간극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인 노화방지의학에서는 건강한 노년을 위한 다양한 의료서비스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한 미용치료부문에 대한 관심이 일반적인 사회현상을 보면서 이것은 아니다 싶은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제 경우는 젊어서부터 새치가 많은 편이었던 탓에 나이에 비하여 흰머리가 많은 편입니다만, 염색을 한다거나 피부노화를 걱정해서 선크림을 바른다거나 하는 등의 미용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저 나이가 들어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보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주변 분들의 공연한 걱정(?)을 듣곤 합니다.

 

아무래도 여성학적 관점에서 주제를 다루고 있다보니 나이 들어가는 과정에서도 여성노인들이 남성노인들과 비교하여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한다거나 사회참여와 같은 적극적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면서 여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공감되고 있는 까닭이겠습니다.

 

노인의 성문제에 관하여 논의하는 부분에 크게 공감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제게도 곧 닥칠 문제인 탓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꼼꼼하게 읽어보았습니다. 저자가 영화 <시>에서 남자 노인과 여성간병인 사이에서 생기는 성적 관계와 그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거리들은 노인복지차원에서 제대로 조명되어야 할 점들이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문화적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죽음의 결정과 관련한 주제입니다. 나이 들어 만성질환으로 고통을 받다보면 삶의 질이 나빠져서 죽느니만 못한 삶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뉴스는 말기 폐암으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아내를 지켜보던 남편이 엄청난 진료비 압박과 쾌유의 희망이 없다는 이유로 아내의 산소호흡기의 줄을 잘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 역시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치매를 앓던 아내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 부부가 동반자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고통받는 아내가 안쓰러운 것도 이유가 되지만 아내없는 세상을 사는 것이 두려웠다는 점도 중요한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저자가 제기하는 문제점은 삶을 중단하는 중요한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여성노인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아직도 너무나 친근하지 않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방안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변화하고 있는 장례방식, 삶속에서 죽음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그리고 잘 살기 위한 죽음준비 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안락사에 관한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한 스캇펙박사가 죽음 이후의 삶의 모습을 그린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17702>는 죽음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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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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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박완서선생님의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읽었습니다. 글쓰는 분들의 산문을 읽으면 아무래도 내가 쓰고 있는 글이 더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읽다보면 내 글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하고 싶은 내용만 간추려 요약하는 글쓰기 버릇을 바꾸지 못하는 제 입장에서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듯하고 혀끝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글을 읽으면 저도 모르게 ‘나는 언제쯤이나 이런 글을 써보려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당연히 흉내를 내보려 노력은 합니다만, 웬지 맞지않는 옷을 입은 듯 거북스럽고 중언부언이 되는 것 같아 남에게 읽히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선생님이 가시기 전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바를 ‘내 생애의 밑줄’에, 그리고 책을 읽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책들의 오솔길’에 그리고 먼저 가신 분들을 생각하며 애닮은 마음을 담은 ‘그리움을 위하여’에 나누어 담고 있습니다.

 

‘책들의 오솔길’에서는 “아! 책을 읽은 느낌을 이렇게도 나눌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읽은 책에서 얻은 느낌들을 두루 나열하지 않고도 꼭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부분만을 요약하여 내 생각과 함께 전하는 것도 좋은 글쓰기가 되겠다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느낌을 나누고자 했던 책들 가운데 몇권을 리스트에 갈무리해두었습니다. 일간 구해서 읽고 선생님의 느낌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내 생애의 밑줄’에 모은 글 가운데 적지 않은 내용이 남양주에서 마련하신 단독가옥에서 지내시며 얻은 생각으로 보입니다. 첫 번째 글이기도 하고,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아무래도 프로스트의 시 <가보지 않은 길>을 생각하신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이 덜 다닌 길을 갔었고 그래서 내 인생이 온통 달라진 것인데, 남들이 간 길을 갔더라면 더 아름다웠을까?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그리는 것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 종가집처럼 뒤란밖으로는 야트막한 산자락이 내려오고, 사랑채 툇마루에서 내다보면 멀리 저수지가 시원한 바람을 날라주는 그런 곳입니다. 이런 꿈은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가지셨지만, 어머님께서 반대하셔서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이유는 시골집에 사는 것이 꿈꾸는 것만큼 쉽지가 않다는 것이고, 선친께서 도움이 되지 못하시리 란 것을 아셨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별로 다를 바 없어 선뜻 일을 벌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생님께서는 손톱 밑에 끼어든 흙에서 돋은 싹을 자랑하실 수 있다 하신 것을 보면 시골에 집을 장만하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요즈음 문화예술계도 진보와 보수로 갈려 각자의 본연의 일보다도 정치활동에 더 열심인 분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개성이 고향인 선생님은 먼눈으로 보이는 고향에 가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음에도 어느 한편으로 쏠리지 않은 무심함을 보이는 듯 합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온몸으로 겪으신 탓이라고 합니다. “어쩜 그렇게 혹독한 추위 그렇게 무자비한 전쟁이 다 있었을까.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 좌도 싫고 우도 싫다. 진보도 보수도 안 믿는다. 김훈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다만 바퀴없는 자들의 편이다.(68쪽)”

 

그러면서도 은근히 미국에 대하여 불편한 심사를 은근히 내비친 대목도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경기에서 미국과 붙었을 때 꼭 이기기를 바라셨다거나, 미국에서 일어난 잔혹한 살인사건 소식에 한국에서 사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강조하신 대목이 눈길을 끕니다. 그리고 남대문 방화사건이 철거보상금에 불만을 가진 노인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자 유신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경제우선주의의 폐해로 결론지은 것은 예단에 의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반면에 연평해전에서 산화한 젊은이나 북한의 소행으로 지목되고 있는 천안함사건에서 생떼같은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모두의 죽음에 애달파하시는 마음을 감추지 않으신 것을 보면 중도(中道)를 지켜오셨다고 보입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진 나이를 안타까워하신 대목에서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의 가장 처량한 나이다. 만추처럼. 돌아갈 고향이 없는 쓸쓸함, 내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줄 웃어른이 없다는 허전함때문이었을까. 예년에는 한 번 가던 추석 성묘를 올해는 두 번 다녀왔다.(28쪽)” 얼마 전에 공부했던 교실행사에 갔더니 이젠 위로 한분밖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는 앞으로 교실행사에 참석하지 않으리라 작심한 때문입니다.

 

마무리를 하면 평생을 글쓰기와 함께하신 선생님께서 남기신 글에서 아쉬운 점을 느꼈다면 정말 웃기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만, 간혹 눈에 띄는 외래어가 생뚱맞다 느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직업적 특성상 외래어를 많이 사용하는 축에 들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글을 쓸 때만은 외래어 사용을 자제하려 노력하는 탓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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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풍경 - 끈 이론이 밝혀낸 우주와 생명 탄생의 비밀 사이언스 클래식 18
레너드 서스킨드 지음, 김낙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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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과정을 뒤쫓다보니 세상만물의 시원이 되는 우주의 기원에까지 호기심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칼 세이건과 앤 드루얀은 인류의 기원을 뒤쫓은 기록서 <잊혀진 조상의 그림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7810>에서 우주가, 태양이, 그리고 지구가 태어나는 모습을 아주 간략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아득한 과거에 태양도 지구도 없었던 때가 있었다. (…) 기체와 먼지의 거대한 덩어리가 자체 중력으로 급속히 붕괴하면서 점차 빠른 속도로 회전함에 따라, 혼돈과 같이 불규칙하던 구름이 점차 질서정연한 얇은 원반형 구조로 변해간다. (…) 천체 형성의 모태가 되는 회전하는 원시 원반은 은하계 속에 펼쳐져 있는 광대한 성간진공에 잠재하는 희박한 물질들이 모여 형성된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고 적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구절에서 삼라만상의 시원이 될 우주탄생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관념적으로는 가능한 무에서 유가 탄생하는 일이 실재적으로는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하는 궁금증은 여전히 남습니다.

 

우주탄생의 비밀을 추적하는 다양한 과학분야 가운데 입자물리학에서는 우주가 아주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이 역설적으로 충만함을 의미한다는 해석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하겠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통하여 현대중력이론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이미 생성된 우주에 흩어져 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잘 설명하고 있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입자물리학에서 다루는 기본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 양자중력을 설명하기 위하여 중력과 양자역학을 결합한  수학적 이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합니다.

 

양자중력의 비밀을 밝히기 위하여 현대 입자물리학자들 끈 이론과 고리양자중력이론 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하여 신뢰할 수 있는 영역과 신뢰할 수 없는 영역을 나누고 있는 회의주의자인 마이클 셔머는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에서 양자역학이나 대폭발 우주론의 이론이 확실한 근거 위에 세워진 정상과학으로 인정하고 있는 반면, 초끈 이론이나 인플레이션 우주론은 아직 이론의 근거가 부족한 변경지대의 과학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광양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중성미자, 양전자 등과 같은 소립자도 더 잘게 쪼개지는 입자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소립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은 일반중력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소립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우주의 시원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끈이론을 요약하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최소단위가 점같이 생긴 입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매우 가느다란 끈이라는 이론입니다. 1960년대 소립자들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수학적 함수와 관련된 물리학적 모형이 1차원의 끈이라는 것을 래너드 서스킨스와 난부 요이치로에 의하여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입자물리학에 들어선 끈이론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조화시켜 양자중력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우주의 시원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풍경>은 끈이론을 연구하는 과학자 그룹을 이끌고 있는 스탠퍼드 대학교의 레너드 서스킨스 교수가 우주의 시원에 대한 설명을 담은 책입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주를 이루는 기본물질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이들이 초미세하게 조정되어 우주가 시작되는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놀라울 정도의 학문적 성취를 이룩한 과학자들이 창조론을 믿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조신학이라는 분야가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과학적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계를 절감하였기 때문에 택한 신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 반면에 “나는 진정한 과학은 초자연적인 존재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10쪽)”고 말하는 저자와 같은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비정형광우병소가 발견되면서 다시 불거진 광우병위험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를 들으면서, 2008년 광우병과 인간광우병에 관한 과학적 사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바람에 일반 국민들이 혼란에 빠졌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만큼 실험실에서 이루어낸 과학의 성과를 일반에 전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는 자신이 연구하는 입자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적 성과를 정리하여 대중에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주의 풍경>의 제1장을 이끄는 구절을 읽으면 그러한 평판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게 되었을까?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최초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질문들을 던졌던 첫 번째 우주론자의 이름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또는 그녀가 아주 오래전 선사 시대에, 아마도 아프리카에 살았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창조신화와 같은 최초의 우주론은 현재의 과학적 우주론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것도 인간의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은 마찬가지이다.(37쪽)”

 

<우주의 풍경>에서 저자는 현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의 법칙인 표본모형을 설명하고, 우주와 그 법칙들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 그러한 법칙들도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자가 ‘풍경’이라는 용어를 제시하게 된 배경, 즉 풍경은 입자물리학의 이론적 환경의 전체 범위를 기술하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끈이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부터 끈이론이 어떤 것인가 그리고 끈 이론이 과학의 패러다임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가를 살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3개의 공간차원에 시간이 더해진 4차원 세계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끈이론가들은 세계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10차원 혹은 11차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실생활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내비게이션도 발전하여 이제는 3D방식으로 길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장소를 나타내기 위하여 위도와 경도, 표고 3개의 좌표값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간이 더해지는 4차원의 세계에서는 시각이라는 좌표가 더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차원의 세계를 설명해야 하는 수학적 정합성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하나의 이론을 만들고 이 이론에 따라 유일하게 결정되는 물리법칙이 실험과 관측을 통하여 정확하게 들어맞아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이러한 실험적 뒷받침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옮긴이는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회의론자들이 초끈이론을 과학의 변경지대에 세워두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5차원에서 10차원에 이르는 세계에 적용할 좌표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여 단순화하여 적용할 단순한 법칙을 만들기가 쉽지 않아서라고 합니다.

 

지난 주말에 지금 하고 있는 업무의 발전방향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기 위하여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과 워크숍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춘천고속도로 강촌출입구를 빠져나와 구절양장 산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홍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춘천 변두리의 산골이었습니다. 언덕 위에 있는 펜션에서 계곡너머로 펼쳐지는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담고 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이 우주에 얼마나 있을까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자들은 우주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고 있는 행성은 지구 이외에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주가 생성되고 태양계 그리고 지구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 얼마나 많은 우연이라는 상황이 겹쳐진 끝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란 이유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영어의 ‘우주(universe)’라는 단어가 단수형태로 표기되는 것처럼 하나인 것으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끈이론가들은 메가버스(Megaverse)라는 개념을 고안해냈습니다.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와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우주이외의 우주가 실재하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풍경개념과 메가버스의 개념을 이끌어낸 끈이론에 따르면 우주에는 수학적으로 모순이 없고, 우아하고 유일한 이론으로 설명할 수 우주는 10,500개나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구와 같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사는 생명체와 조우할 가능성은 여전히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겠습니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네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을 거야. 그 이유는 아마 네가 세상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고, 그 일을 잘 하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곰곰 생각해보렴”이라고 말해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지구가, 태양이, 그리고 우주가 만들어진 이유가 있을까요? <우주의 풍경>에서 그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초자연적 존재보다는 과학을 믿는다고 한 저자의 신념은 에필로그의 말미에도 담겨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실존적인 질문인 ‘왜 무(無)가 아니라 유(有)인가?’에 대한 답은 끈 이론이 발견되기 전과 지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창조의 순간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대폭발의 초기 역사에서 발생한 폭발적 급팽창의 장막으로 우리의 눈과 망원경으로부터 감춰졌을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무의미해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나는 이제 피에르 시몽 드 라플라스의 말을 인용하며 이 책을 마치려고 한다. ‘저는 그 가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5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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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661

oren 2012-05-15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주의 풍경'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해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책인 것 같군요. 이 책의 저자가 에필로그에서 인용한 '라플라스'는 『천체역학』의 저자로만 대충 기억하는 인물이었는데, 19세기의 어느 철학자도 '천체의 움직임과 물질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면서 '칸트와 라플라스'를 언급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 철학자는 당시에 이미 뉴튼의 물리학이 지닌 한계를 포함하여 '과학이 지닌 근본적인 한계'를 분명하게 꿰뚫어 보면서, 먼 미래에 이르러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을 거듭하더라도 '물질의 근원'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장담했었는데 21세기에 이르러 초끈이론이나 다중우주이론이 발견하는 내용들이 결국 '과학의 한계 너머'를 미리 내다본 그 철학자의 혜안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 * *

이것을 크게 보면, 중심 천체와 유성의 관계에도 나타나고 있다. 유성은 유기체에서 화학적인 힘과 마찬가지로 중심 천체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이에 반항하고 있다. 거기에서 구심력과 원심력의 부단한 긴장이 생기고, 이 긴장이 우주의 운행을 유지시키고 있으며,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지금 고찰하고 있는 의지의 현상에 고유한 보편적인 투쟁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이다. 왜냐하면 어떤 물체도 의지의 현상이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되지만, 의지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노력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구형을 이루게 된 천체의 원상태는 정지가 아니고 휴식도 목표도 없이 앞을 향해 무한한 공간으로 나아가는 운동, 노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에는 관성의 법칙도 인과의 법칙도 대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성의 법칙에 의하면, 물질은 정지나 운동에 대해 무관심하며, 물질의 근원적인 상태는 정지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물질이 지금 운동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그 운동에 선행하여 정지 상태가 있었다고 전제할 권리도 없고, 운동이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권리도 없다. 그와 반대로 그 물질이 정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정지 상태에 선행하는 운동을 전제하거나 운동이 그치고 정지가 시작된 원인을 질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원심력을 일으키는 최초의 충격은 찾아도 얻을 수 없다. 이 원심력은 칸트와 라플라스의 가설에 따르면, 유성의 경우 중심 천체 원래의 회전 잔재며, 여러 유성은 이 중심 천체가 수축할 때 거기에서 분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중심 천체는 그 자체는 본질적으로 운동하고 있다. 즉 중심 천체는 언제나 계속 회전하며 동시에 무한한 공간 속을 날고 있으며,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중심 천체의 주위를 돌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천문학자들의 중심 태양에 대한 억측과 완전히 일치하며, 또 우리의 전 태양계나 우리의 태양이 속해 있는 모든 별들의 이동이 지각되는 것과도 일치한다.

결국 여기에서 중심 태양을 포함한 모든 항성이 이동한다는 추론도 나오지만, 이러한 이동은 무한한 공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절대 공간에서 운동은 정지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바로 그것 때문에 이미 직접적으로 목적 없는 노력이나 비상에 의한 것과 마찬가지로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 없는 표현이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이 허무와 궁극적인 목적의 결여를 이 제2권의 마지막에서 의지와 노력에 의한 결과로 모든 현상 속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또다시 무한한 공간과 무한한 시간이 의지의 모든 현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형식이 아니면 안되며, 모든 현상은 의지의 본질을 표현하기 위해 현존하고 이다.

마지막으로 인과성을 물질로 본다면, 이 단순한 물질 속에서도 이미 이때까지 고찰한 것과 같은 모든 의지 현상 상호간의 투쟁이 행해지고 있는 것을 재인식할 수 있다. 즉 물질 현상의 본질을 칸트는 반발력과 견인력으로 표현하고 있고, 물질이 실재하는 것은 상반된 두 개의 힘이 투쟁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상과 같은 재인식이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물질의 모든 화학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거나 인과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 아직 아무런 화학적인 차별이 없는 것까지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남는 것은 단순한 물질이다. 또 구상(球狀)으로 된 세계로서 생활, 즉 의지의 객관화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견인력과 반발력의 투쟁이다. 견인력은 중력으로 사방으로부터 중심을 향해 모든 사물을 밀어붙이고, 반발력은 강성에 의해서든 타성에 의해서든 불가입성으로서 견인력에 대항하는 것이지만, 끊임없는 박진과 대항은 최저 단계에서 의지의 객관성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또 이미 이 단계에서도 의지의 특질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최저 단계에서는 의지가 어떤 맹목적인 충동, 어떤 어둡고 막연한 활동으로 나타나 있어서 직접 인식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의지의 객관화 가운데 가장 단순하고 미약한 방식이다. 그런데 의지는 이러한 맹목적인 충동이나 인식이 없는 노력으로서는 무기적 자연 전체에도, 모든 근원적인 힘에도 나타나 있다. 이들의 힘들은 백만 가지의 동질적이고 규칙적인 현상에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데, 개별적인 물질은 전혀 나타내지 않고 오직 시간과 공간에 의해, 즉 개별화의 원리에 의해 다양화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상이 유리의 다각면을 통해 다양하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1고찰 中에서


처음처럼 2012-05-16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학의 한계를 철학적 사유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고, 과학에서는 한계를 뛰어넘으로는 노력을 부단하게 하고 있으니 그 결과를 지켜봐야 하겠습니다만, 자연과학 방식의 사고를 하는 저로서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편입니다. 좋으 자료를 더하여 말씀을 정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개의 힘 2 밀리언셀러 클럽 125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뉴욕출신 칼란이 우연히 조직원을 살해하고 쫓기지만 결국은 조직을 장악하게 되고 전문킬러가 되는 과정을 거쳐 바레라 카르텔의 조직을 지키는 역할을 떠맡게 됩니다. 이 과정에 아트와는 다른 정부조직에 속하고 있는 스카키의 조종을 받게 되는데, 스카키는 베트남전쟁에서 아트와 같이 일한 동료였습니다. 또 하나의 주인공 노라는 고급 매춘사업을 하는 헤일리의 눈에 띄어 철저한 교육을 받고 헤일리의 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박경리선생님의 <토지>를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등장인물의 방대함과 그토록 많은 등장인물이 촘촘히 엮여서 관계를 맺고 대단원의 결말에 이르면서 한치의 빈틈이 없어 정교하게 물려가는 점이었는데, 돈 위슬로의 <개의 힘>을 <토지>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적지 않은 등장인물이 잘 배치되어 관계를 맺고, 심지어는 그들의 죽음까지도 정교하게 계산되어 클라이맥스로 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트와 아단, 아단과 노라, 아단과 칼란 그리고 칼란과 노라 이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수인사(?)를 하고 모두들 클라이맥스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더욱 극적인 것은 멕시코의 풀뿌리민중을 사랑하는 후안신부가 주인공 4명 모두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의 죽음, 사실 누가 그를 죽였는지 왜 죽였는지는 이야기가 끝나도록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후안신부가 중남미 마약카르텔과 반공산주의투쟁을 조정해온 미국 정부의 특수팀의 조정에 의하여 살해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라는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관계였던 후안신부를 죽인 사람이 아탄이라고 믿게 되고 그를 몰락시키기 위하여 아트와 협력하게 됩니다. 아트가 자신을 이용해서 기왕의 마약조직을 소탕하고 새로운 구축한 바레라 카르텔에 대한 분노는 어쩌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범죄조직을 도와준 꼴이 되고만 스스로에게 절망하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사가 스스로의 의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깜짝 놀라는 상황이 그리 드물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 경우 상황을 제자리에 돌려놓아야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돌아가는 상황에 그대로 따르십니까? 어쩌면 아트는 결벽주의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젊었을 적 전도유망한 복서를 키워 세계챔피언을 만드는 꿈을 꾸었던 아단이 고향에서 마약농장 단속반에 걸려들어 사선을 헤맨 끝에 아트 덕분에 목숨을 구하면서 티오의 바레라 카르텔에 가담하고 결국은 파트론이 되고 자신의 사업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모두 제거하는 악의 화신이 되고 마는데, 이런 과정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단은 숫자를 믿고, 과학을 믿고, 물리학을 믿었다. 바로 이 순간, 아단은 악의 본성을 깨달았다. 악은 추진력이 있어서 일단 시작되면 멈출 수 없가 없었다. 물리학의 법칙이다.(124쪽)”

 

아단과 게로 멘데스가 조직의 생존을 건 대결을 펼치는 과정에서 중재에 나선 후안신부가 살해되는데, 아단의 측근인 파비안이 그 일을 떠맡았고, 파비안은 누구로부터 명령을 받았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후안신부가 저격을 당해 쓰러진 현장에 있던 칼란은 신부가 남긴 “당신들을 용서하겠고. 하느님은 당신들을 용서할 것이오(228쪽)”라는 마지막 말의 의미를 깨닫고자 조직을 떠나 술에 빠져 숨어살게 됩니다. 아무리 적을 사랑하라 했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까지도 용서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후안신부가 남긴 한 마디는 결국 칼란의 마음을 움직였고, 노라의 마음을 굳게 만들어 이 스토리의 결말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용서가 무엇이었을까 꼼꼼히 따져봐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궁금한 것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개의 힘’은 무엇일까 입니다. “확실히 아트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었다. 개의 힘.(55쪽)” 아단의 내면에도 잠재되어 있는... 개에 대한 이야기는 다르게도 표현됩니다. “케르베로스는 파수꾼이 아니라 안내자였다. 헐떡이고, 이를 드러내고, 혀를 늘어뜨린 채 당신을 악의 세계로 초대하려고 안달을 내고 있는 안내자. 그리고 당신은 결코 저항할 수 없다.(343쪽)”

 

첨단과학을 활용하는 시대에서 치루는 전쟁은 역설적이게도 디지털로 무장한 상대에게는 오히려 아날로그 방식이 더 효과를 보는 경우를 봅니다. 베트남전쟁에서도 디지털로 무장한 미국이 아나로그방식으로 파고든 월맹군에 결국은 손을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소설을 리뷰하면서 시시콜콜 스토리를 요약하면 스포일링이 될 것 같아 제게는 특히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흐름을 소개하지 않고는 심심한 리뷰가 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중요한 포인트는 요약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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