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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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0년대 하반기에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커다란 울림을 주었던 동화로, 독일작가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있습니다. 가수 김만준씨는 이 동화에서 얻은 느낌으로 <모모>라는 노래를 만들어 젊은층의 애창가요가 되기도 했습니다. 김만준씨는 환상가 모모 앞에 있는 생이 행복한 이유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수 없단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 노래하였습니다. <모모>는 인간으로부터 빼앗은 시간으로 피워내는 꽃잎으로 만든 시가를 피워 생명을 유지하는 회색인간의 음모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행복을 지켜내는 행복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작품활동을 한 미국 작가 로이스 로리가 1993년에 발표한 <The Giver>는 2007년에 <기억전달자>라는 제목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습니다. <모모>보다 30년 정도 늦게 발표되었습니다만, <모모>에서는 실패했던 완벽하게 통제된 세계, 심지어는 색깔마저도 무채색으로 통일되어 있는 세계가 된다면 그 곳에 사는 사람의 삶을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기억전달자>가 사는 세계는 모든 것이 통제되는 사회입니다. 출생까지도 산모역을 담당한 여성들이 계획된 숫자만큼 출산하여 결혼한 남녀의 가정에 배정하여 키우도록 하며, 아이들은 열두살이 되는 해 생일에 평생 맡아야 할 직업을 배정받아 수행하다가 역할을 다하면 ‘임무해제’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끝에 가서야 드러나는 ‘임무해제’란 약물을 주입하여 생을 마감하는 절차입니다. 따라서 이 마을에서 거주하는 사람의 숫자는 항상 일정한 숫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구를 통제하는 이유는 기후마저도 통제하여 필요한 식량마저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인구의 증가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은 이야기의 뒷부분에 가서야 독자들만 알게 되는 이 마을의 비밀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통제된 이 마을에 매우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기억보유자’입니다. 기억보유자는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시원(始原)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열두살이 되는 생일에 원로들의 오랜 관찰 끝에 선정되어 선대 기억보유자로부토 기억을 전달받은 다음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관찰하여 기억으로 갈무리하였다가 다음 기억보유자에게 전달하는 ‘거억전달자’의 역할을 마치면 임무가 해제되는 것입니다.

 

사실 기억보유자와 기억전달자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이미 볼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문자가 없던 과거에는 기억이 특별한 사람들이 마을의 역사를 기억하여 후대에 전하였습니다. 최근의 뇌과학은 기억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기억보유자의 기억을 신뢰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기억보유자의 기억은 완전한 것이라 믿고 있는 이 마을에서는 기억전달자가 새로 선정된 기억보유자에게 신체적 접촉을 통하여 기억을 전하게 되면 자신의 기억이 희미해진다는 설정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마을에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 기억보유자의 집에 축적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억보유자 넘겨받은 기억에 더하여 책읽기와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자신의 기억으로 모아들여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이렇게 쌓인 기억들을 바탕으로 마을운영에 자문이 필요한 경우 원로들에게 자문을 하는 역할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계도 없고 그저 온실처럼 통제된 ‘늘 같은 상태’에서 사는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개인의 특성없이 - 열 두 살이 될 때까지의 성장과정을 관찰하여 파악되는 특성에 따라서 직업이 결정되는 것을 개성이라고 보아준다면 모르겠지만 - 마치 기계의 한 부품처럼 사는 삶을 과연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마을에서도 간혹 독특한 개성을 가진 개체가 태어나고 성장하지만, 이 마을의 특성에 맞출 수 없게 되면 임무해제되어 사라지는 운명을 따르게 된다는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마을에 새로이 기억보유자의 임무를 맡게 된 조너스는 어떤 기억보유자로 역할을 하게 되었을까요? 새로운 기억보유자는 “친구들이 아무 활력도 없는 생활에 아주 만족한다는 사실에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친구들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자신에게 무척이나 화가 났다.”고 느꼈으니 그가 할 일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기본적 가족구조는 부모와 아이들 2대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알고 있는 조너스가 기억전달자로부터 건네받은 기억 가운데 3대가 같이 하는 시간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기억전달자는 가장 아끼는 기억이라고 하고, 이 시간의 느낌이 바로 ‘사랑’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줍니다. 즉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느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억을 전해받던 조너스가 집에서 위탁받아 키워온 가브리엘이라는 아이가 결국 임무해제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기억보유자로서의 역할에서 일탈하기로 결심하게 되는데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 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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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 - 곽세라 힐링노블
곽세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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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힐링’이란 외래어가 우리 생활 속에 스며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의 치료와 관련해서 ‘큐어’와 ‘케어’의 차이를 가끔씩 설명하곤 합니다. 큐어는 질병을 치료하여 환치시키는 행위를 이르나 케어는 완치시킬 수 없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돌보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힐링(healing)이라는 개념은 다음 영영사전에 “tending to cure or restore to health”이라 되어 있어 몸이나 마음을 치유한다는 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나 제가 느끼기에는 마음을 치유한다는 쪽이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듯 SBS에서는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예능프로그램을 통하여 출연자가 패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심리적 갈등 혹은 부담 등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이미 폐지되었습니다만, MBC의 <황금어장>의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무르팍도사>가 유사한 프로그램이라 하겠습니다.

 

이렇듯 ‘힐링’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분야가 확대되고 있는 분위기는 문학계에까지 이르러 ‘힐링노블’이라는 새로운 영역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언젠가 책읽기를 환자의 질병치료에 활용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암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독서치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49788>를 읽었습니다만, 힐링노블은 어떤 치료효과를 가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곽세라작가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힐링 라이터로 지목된다고 해서 그녀의 첫 번째 소설집인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에 관심이 가게 됩니다. 이 소설집에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과 ‘천사의 가루’를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신기루 같은 주인공들이 펼치는 기억과 그리움, 사랑과 집착, 욕망과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세련된 구성과 감각적인 언어들이 기억과 환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판타지적 요소를 차용하고 있지만, 곽세라 작가만의 독특한 사유는 삶의 본질을 부드럽게 꿰뚫고, 심오한 생의 물음들에 관한 품격 있는 관조를 보여준다.”고 적은 출판사의 리뷰에서처럼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어 베일에 싸인 분위기이며 감각적인 글흐름은 젊은이들에게 강한 끌림을 줄 것 같습니다.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의 여주인공 유정은 어머니가 하는 미장원 단골인 미나선생의 권유에 따라서 그녀의 극단 츠키(‘달’이란 뜻의 일본어)에서 연습생으로 시작하는데, 허드렛일도 하면서 연극연습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극단 츠키는 동경과 서울에 연습실을 가지고 있으며 공연도 하기 때문에 단원들도 서울과 동경을 오가며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극단 츠키에는 뮤토라고 부르는 특별한 연기자가 미나선생이 주선하는 공연을 하고 있다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뮤토’는 ‘변화하는 자’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뮤토가 하는 플레이는 공연을 의뢰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역할극이지만 미나선생이 극본을 통하여 지시하는 내용의 범위 안에서 연기해야 한다는 금기가 있습니다.

 

유정이 뮤토로 연기하면서 극본의 범위를 벗어났던 사례에서 의뢰자가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뮤토의 역할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습니다. 의뢰인은 대부분 심리적 결핍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인데, 뮤토는 그들이 갈망하는 결핍을 채워주면 의외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완전한 사람은 플레이를 원하지 않아.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도 없지, 심장 끝을 태우는 갈망, 가질 수 없는 마지막 조각이 이 게임을 계속하게 하는 거야. 몸부림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결국 마지막 장면까지 살아있게 하는 거라구.(163쪽)”라고 정리하는 미나선생의 설명이 알 듯 모를 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뢰인이 요구하는 플레이는 철저하게 자신을 제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마치 영혼이 소진되는 느낌이 남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나선생이 뮤토에게 플레이가 있다는 사인을 줄때 “영혼을 팔기에 좋은 날이지?”

 

이 이야기는 간이역이 있는 일본의 어느 한적한 바닷가 오오가케무라에 숨어든 유정이 뮤토로 활동한 자신의 짧은 인생의 흔적을 되돌아보면서 뮤토의 역할에 대한 회의를 정리하는 과정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의 상상력을 뒤따라가는 것이 숨차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오카게무라 마을에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길고양이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또 다른 쌍의 삶과 엮어 들면서 더욱 조심스럽게 줄거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두 번째 소설 ‘천사의 가루’는 비행기로 도착하는 연인을 만나기 위하여 공항으로 나가던 남자가 자동차사고로 숨지면서 남아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스케치입니다. 특히 만나야 하는 사람이 사라진 빈 자리에 남은 상실감과 그 여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남자의 애닯은 사랑을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언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 공항에 나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여자에게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가 전한 것은 작은 자기함에 담긴 ‘천사의 가루’였습니다. 이 가루를 불어내면 죽은 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환상에 빠져들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인데, 결국은 마법의 가루가 담긴 자기함이 비어가면서 남자의 죽음은 현실이 되는 것일까요?

 

곽세라작가가 펼치는 독특한 삶의 세계는 아마도 전 세계를 내 집처럼 드나들며 인연 닿는 대로 만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얻은 영감을 녹여 창조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뮤토가 펼치는 플레이에서 힐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엿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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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차드 멩 탄 지음, 권오열 옮김, 이시형 감수 / 알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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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생들이 ‘가고싶은 회사’ 1위로 뽑은 곳은 구글이라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마운틴뷰에 위치한 구굴 본사에는 4천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데, "능력 있고 똑똑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채용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창업주의 독특한 철학이 반영되어 직장분위기도 엄청 자유롭다고 하는데,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것은 물론이고, 근무 시간의 20%는 업무와 전혀 상관이 없는 개인 시간에 쓸 수도 있다고 합니다. 혹자는 진정한 자유로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구글의 직업문화라고도 합니다만, 구글의 사업특성상 직원들의 창의성을 제대로 살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구글에서 마음챙김(mindfulness)에 기초한 감성지능 교육과정을 개발하였다고 합니다. (마음챙김은 mindfulness를 우리말로 옮긴 것인데 처음 듣는 단어라서인지 아주 생경한 느낌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조심하는, 주의하는, 염두에 둔, 마음에 새겨 잊지 않는 등의 mindful의 명사형인데 남과 더불어 사는 긍정적 삶의 방향을 전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담긴 단어라고 한다면 명심 혹은 마음새김 등을 고려해봄직도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저자인 차드 멍 탄이 기획하여 감성지능의 창시자인 대니얼 골만, 스탠퍼드대학의 과학자, CEO 그리고 선승 등이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명상’이 프로그램의 핵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가지고 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 하겠는데,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직장내 분위기가 그토록 자유로운 구글에서도 감정이 부딪히는 경우가 적지 않는 모양이다 싶기도 합니다. 명상이라 하면 스스로의 생각을 비우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내용 역시 명상으로부터 시작하여 단계적으로 발전시키는 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Search inside yourself)'는 제목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검색엔진을 주무기로 하고 있는 구글의 사업적 특장을 내세우려한 것은 아닐까요?

 

명상을 배우는 초보자들은 무작위로 떠오르는 잡생각을 뒤쫓다보면 오히려 하지않음만 못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각을 발칼 뒤집어 검색을 하다보면 생각들이 엉켜서 스스로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지 않게 될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구글의 교육프로그램은 7주, 20시간에 걸쳐 진행되는데 1단계에서는 주의력훈련을 통하여 청명하고 평온한 마음상태를 만들어 감성지능의 쌓아올릴 토대를 만들게 된다고 합니다. 2단계에서는 훈련된 주의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흐름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며, 3단계에서는 예를 들면 ‘이 사람이 행목하길 바라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정신습관이 몸에 배이도록 훈련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1장에서부터 7장에 이르기까지 구글의 3단계 교육프로그램의 핵심을 일상에서 만나기 쉬운 사례는 물론 신경과학 등의 연구 성과를 인용하여 설명하고, 8장에서는 이를 리더십과 사회성기술을 함양시키는 데까지 이끌고 있습니다.

 

마음챙김 대화와 같은 일부 프로그램은 일상에서 시도하면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경청하고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였음을 확인하기 위하여 말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틀린 점을 확인한다는 것이 핵심내용입니다. 당연히 직장에서 의사전달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일이 꼬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은 듭니다만, 일상에서 이를 적용하면 의사전달에 두 배의 시간이 든다는 문제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참 다양하고도 적절한 이야기 거리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우리가 황희정승께서 하신 말씀으로 기억하는 것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백미는 “이 마음은 전통적으로 깃대 위에서 펼럭이는 깃발에 비유된다. 깃발은 마음을 상징한다. 강렬한 감정 앞에서 마음은 세찬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처럼 요동친다. 깃대는 마음챙김을 상징한다. 그것은 온갖 감정적 동요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안정을 유지하고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게 한다.(134쪽)”라고 적은 부분입니다. 저자의 비유는 아주 적절하다 싶습니다만,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이라 표현하신 유치환님의 ‘깃발’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리해보면 명상을 통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타인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텍스트라고 하겠습니다. 다만 마음다스림을 통하여 세계평화를 이루는 데까지 생각을 넓히고 있는 저자가 생뚱맞기도 하면서 참 대단한 인물이다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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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 내일을 여는 지식 어문 24
김경순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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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제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이 분야의 책을 논하기에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에 조예가 깊으신 분들이 보시기에 부족조차 논할 가치가 없다 하시겠습니다만, 형편이 저와 비슷하신 분들께서는 앞으로 저와 같이 인문학공부를 같이 하는 기회라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년에 구조주의철학을 개괄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67086>를 읽고 구조주의가 무엇인지 눈을 조금 뜰 수 있었습니다. 마침 그들 가운데 라캉의 철학을 정리한 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 소개하려 합니다. 김경순박사의 <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입니다.

 

먼저 자크 라캉(1901~1981)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언어를 통하여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세웠는데, 인간의 욕망,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내용이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라캉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재해석하여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은 프로이트주의를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가 새롭게 정립한 방법론을 많은 정신분석가들이 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프로이트가 일반대중에 남긴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지만 현대심리학에 기여한 바는 크지 않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프로이트는 현대심리학에서 상용되고 있는 통제된 실험방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정이론과 관련된 새로운 증거를 평가하는 방법은 언제나 데이터가 그 이론을 반증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는 ‘반증가능성 기준’은 과학발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은 20세기 초반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에 의하여 강조되어 왔습니다.

 

키이쓰 스타노비치는 <심리학의 오해;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1385>에서 프로이트가 현대심리학에 악영향를 미쳤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용한 하워드 가드너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참고하면 프로이트를 재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연구자들이 프로이트의 직관에 매혹되기는 하였지만, 어느 과학 분야도 임상적 면담과 회고적으로 구성된 개인사에 근거하여 구축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이 연구자들은 반증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허위적 주장에 상당히 분개하였다.”

 

<라캉의 질서론과 실재의 텍스트적 재현>에서 우리는 라캉이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범주에서 실재계를 중점적으로 성찰했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김경순박사는 실재(real; 實在)란 존재하는 것과는 달리 재현할 수 없는 것, 죽음, 성의 문제를 나타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저자는 상징질서와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비재현적 재현을 의미하는 실재계에서 ‘오브제 a’의 역할 그리고 정신분석의 윤리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브제 a’는 실재계적 응시․목소리인데 주체가 경험하는 기괴한 주체의 타자성으로, 그러한 응시는 상징계적 구조의 한계를 꿰뚫어보는 동시에 독자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주인담론, 히스테리담론, 대학담론 그리고 분석가 담론이라는 라캉의 네 가지 담론을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착각을 제공하는 대표적 지배기표와, 지식을 포함하는 기표고리 혹은 의미화 고리를 지칭하는 나머지 기표, 그리고 분열된 주체와 오브제 a 등의 네 가지 요소들의 관계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 개의 요소들은 관계항을 형성하여 자리를 바꾸어 가면서 네 가지의 담론을 형성하게 됩니다.

 

주인담론은 상징계를 건설하는 제1담론으로 네 개의 관계항과 네 개의 위치가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나에게 나는 나 자신의 주인이라는 사고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히스테리담론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의 만족되지 못한 욕망과 동일시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는 최초의 상실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대타자에 대한 요구방식을 통해서 표현해야 합니다. 대학담론은 지식이 대리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로서 사회적 유대가 지식을 통해 오브제 a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에 형성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사람이 지식에 대한 보증인, 즉 지배 기표를 가지고 있다면 효과가 있다는 것이 숨은 진실입니다. 분석가담론은 주인담론의 역에 해당하는데, 정신분석학은 본질적으로 주인이 되려고 하는 지배에 대한 모든 시도를 전복시키려는 전복적 실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라캉은 아버지의 역할과 어머니의 여성성과의 관계를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왕의 서사와 토템과 타부의 아버지 역할을 인용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은 거세(去勢)에 대한 불안이 리비도의 변형으로 위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였는데 반하여, 라캉은 대상을 금지하는 법 의하여 존재하기 시작하는 오브제 a에 따라서 포기가 이루어지면서 불안으로 남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오이디푸스신화로부터 파생된 안티고네의 사례에 대한 저의 짧은 생각을 몇 차례 내보인 적이 있습니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부친을 살해하고 모친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나라를 떠나게 되자,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가 왕위를 두고 겨루다가 결국은 폴리네이케스가 패하고 아르고스로 도망가게 됩니다.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의 왕 아드라스토스의 도움을 받아 테베를 공격하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전사하게 됩니다. 왕위에 오른 삼촌 클레온은 에테오클레스는 성대한 장사를 치러주지만 폴리네이케스는 반역자라는 이유로 매장을 허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체에 손을 대는 자 역시 사형에 처할 것이라 선언합니다. 안티고네는 오빠 폴리네이케스를 매장하고 클레온과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안티고네는 죽고, 안티고네와 약혼한 클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왕비도 뒤따라 목숨을 끊는 비극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안티고네의 욕망의 원인이 되는 오브제 a는 주체로서의 안티고네에게 가족이라는 명분에 따라 최소한의 예우를 표하기 위하여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매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를 금하고 있는 크레온은 대타자로서의 상징계를 대표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안티고네는 사라진 존재의 공백을 메꾸는 히스테리적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안티고네의 윤리적 행동은 크레온으로 대표되는 상징계 속에 내재하는 실재계적 공백으로서의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이디푸스와 그 가족들의 비극은 이미 신에 의하여 결정되어 있던 일이라고 신화는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할 수 없는 피동적인 존재임을 전제로 한 해석이라는 점에서 필자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재해석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본다면 가족이라는 명분이 국가라는 보다 커다란 명분에 앞설 수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즉, 폴리네이케스는 개인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외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국을 침공하고 동족을 살상하는 일에 앞장선 것이니 가족이라는 명분보다는 국가라는 명분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크레온의 결정이 틀렸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서사적 텍스트에서 재현된 실재를 변증하는 사례로 토머스 하디의 소설<무명의 주드>에서 성 담론과 여성성을 논하고 있고, 히치콕감독의 영화 <사이코>에서는 상징화과정의 잉여 혹은 잔여로서의 실재계인 오브제 a의 예로서 응시 및 목소리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프로야스감독의 영화 <암흑의 도시>에서는 정신분석의 정치성을 논하고 있는데, <암흑의 도시; http://blog.joinsmsn.com/yang412/4495836>를 보았던 기억을 바탕으로 저자의 분석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저는 이 영화의 모티프가 되는 기억에 주로 관심을 기울였던 것 같습니다. 지구를 찾아온 외계인이 지구로부터 납치한 인간들을 거대한 우주도시에 감금하고 인간영혼의 본성을 분석하기 위한 실험을 하게 됩니다. 매일 밤 자정무렵 개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이를 뒤섞어 다시 주입하는 실험을 반복하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일탈한 주인공 머독이 진실을 뒤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김경순박사는 인간영혼의 발견이란 상징적 정체성을 초월하는 것으로,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성의 ‘오브제 a', 즉 실재계적인 존재의 차원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인들은 인간의 상징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변화시킴으로써 인간 주체 속에 상징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기표로도 환원될 수 없는 것, 즉 인간영혼을 발견하고자 한다고 보았습니다.

 

프로야스감독은 영화를 통하여 진정한 정신분석적 의미의 정치적 행동을 방해하는 장벽은 상징적 권위에 의해 확립된 이데올로기적 지배임을 강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데올로기란 하나의 사회적 현실인데 그 현실의 존재는 관계된 사람들이 그것의 본질을 모른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암흑의 도시에 사는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어떠한 실험도 완벽하게 진행될 수 없는 것처럼, 우주인들의 실험과정 중에서 발생한 미세한 오차의 틈새로 주체가 오브제 a를 깨닫게 되는 순간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거와 현재를 통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적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으므로,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인들이 알고자 했던 인간의 영혼, 즉 인간 주체 안에 내재되어 있는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인 ‘오브제 a'를 풀어낼 열쇠가 바로 머독에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인데, 그것은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적 지배가 아니라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실재계적인 능력이라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아는 만큼 즐긴다고들 합니다. 제가 전공과 관련된 부분에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는 것처럼 저자가 구조주의철학의 방식으로 한 해석을 읽으면서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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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2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5788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조나 레러 지음, 최애리.안시열 옮김 / 지호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읽고 있는 책에서 인용하고 있는 책에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신경과학자 조나 레너박사가 쓴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가 바로 그랬습니다. 지난 주말에 읽은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에서 발견한 다음 구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신경과학이라는 학문이 생겨나기도 전에 이미 뛰어난 작가, 화가, 작곡가, 요리사, 등 일급의 예술가들이 알아낸 진실들을, 신경과학을 전공한 저자가 그게 과학적으로 옳았다고 재확인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할 뿐 아니라 빛나고 멋있어 보였다.(227쪽)”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저자가 인용한 부분이 너무도 황홀했다고 한 선생님의 소감에 이끌려서 바로 주문했고 읽어냈습니다. 박완서선생님은 선물받고 석달이 넘도록 다 읽지 못했다고 고백하셨는데 아마도 이 책의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신경과학분야의 연구성과들이 이해하기에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행히도 저의 전공이 신경과학의 한 분야인 까닭에 조금은 읽기에 편한 점은 있었습니다.

 

먼저 이 책의 얼개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저자는 모두 여덟 명의 예술가 - 요리사도 예술가라 한다면 -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들에서 신경과학의 영역과 관련이 있는 것들을 추출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연구논문과 과학자들의 관련 자료들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윌슨이 <통섭; http://blog.joinsmsn.com/yang412/4895225>을 통하여 제시한 학문간의 경계를 뛰어넘으면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라는 주장을 한 것처럼, 인문학과 과학이 어떻게 상호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단적인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레너박사가 인용하고 있는 여덟 사람은 시인 월트 휘트먼, 소설가 조지 엘리엇과 마르셀 프루스트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 시인이자 소설가 거트루드 스타인, 요리사 에스코피에, 화가 폴 세잔,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입니다. 레너박사가 이들의 예술적 성과에서 추출한 키워드를 다시 정리해보면, 휘트먼은 ‘감정’을, 엘리엇은 ‘삶의 복잡성’을, 에스코피에는 ‘미각과 후각’을, 마르셀 프루스트는 ‘기억’을, 폴 세잔은 ‘시각’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청각’을 거트루드 스타인은 ‘언어의 의미’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자아’를 설명하기 위하여 인용하고 있습니다.

 

미각과 후각 그리고 청각과 시각 등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을 우리의 뇌가 수용하여 인식하고 기억하는 과정에 관한 신경과학적 연구성과와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어의 경우는 인식의 결과를 종합하여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하여 공유하고 있는 소통의 방식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 어떻게 보면 척추동물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대뇌의 기본적 활동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감정이나 자아라는 주제는 인간에 고유한 정신활동에 관한 내용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직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덟 사람의 예술적 성과 가운데 저자가 프루스트를 제목으로 정한 것은 아마도 저자의 전공과 관련된 개인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분야에서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바로 <기억을 찾아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0991633>를 통해서 소개한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델교수의 실험실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과정에서 프리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사이박사와 함께 연구를 했다는 인연이 작용한 것 아닐까하는 억측도 해봅니다.

 

저자는 앞서 소개드린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을 제3의 문화운동으로 규정하면서도, 제3의 문화운동이 유용한 대화를 구축하는 대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과학을 그저 또 다른 텍스트 정도로 무시해버리며, 많은 과학자들은 인문학을 가망 없는 오류로 치부하고 있는 서글픈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결방안으로 저자는 영국의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토요일>이 새로운 움직임, 즉 제4의 문화운동의 시발이 될 수 있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제4문학은 인문학과 과학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려는 문화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읽었던 책 <융합이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0758>를 통하여 소개드렸던 융합의 개념과도 잘 통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4문화는 “임의적인 지적 경계선을 무시하고, 구분하는 선들을 흐려놓으려 할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자유로이 지식을 이식하며, 환원적 사실들을 우리의 실제 경험과 연관시키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334쪽)”라고 저자는 예고하였습니다. 저자는 결론을 통하여 “이 책이 예술과 과학이 어떻게 통합되어 비판적 이성의 범위를 확장해갈 수 있는지 독자에게 보여주려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박완서 선생님께서 ‘거듭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책’이라 하신 이유를 알 듯합니다. 저 역시 박완서 선생님처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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