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기억력의 비밀 - 기네스북에 오른 기억력 천재 에란 카츠
에란 카츠 지음, 박미영 옮김 / 민음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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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소싯적에는 기억을 잘 한다고 칭찬도 받고 그랬습니다만, 나이 들어가면서 아무래도 예전같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누구나 그럴거라고 자위하고는 있습니다만, 은근히 불안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억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공부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기억이 만들어지고 저장되는 과정에 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기억에 관한 자료를 챙기다 눈에 띈 책이 기네스북에 오른 기억력의 천재 에란 카츠의 <슈퍼 기억력의 비밀>을 읽게 되었습니다.

 

미당께서는 흩어지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서 아침마다 산이름을 외우는 습관을 들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나이가 들어서도 기억력훈련이 가능할까하는 의문도 가지고 있습니다. 젊었을 적과 같은 기억력은 아니더라도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리는 불상사는 막아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런 점에서 <슈퍼 기억력의 비밀>은 제 고민을 풀어준 측면도 있는 반면 저자가 제안하고 있는 기억력훈련법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시도하는 것을 망설이게 된다는 점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젊은이, 특히 학생들이라면 기억력을 강화하는 훈련으로 시도해보면 좋겠다 싶습니다.

 

기억력에 관하여 우리가 잘 못 알고 있는 사실들을 먼저 정리하고 있습니다. 기억력이란 좋다 나쁘다로 가를 수 없다는 것, 기억을 잘 못해서 문제라고 하지만 제대로 기억하는 것들을 따져보면 사소한 문제라는 것, 나이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 등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기억력을 믿고 자신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어서 동기부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강한 동기는 기억의 집중력을 높이는 효과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뇌가 보고 들은 것을 기억에 남기는 과정을 보면, 주위로부터 정보를 입수하는 과정을 1단계라고 한다면, 이렇게 입수한 정보를 정리해서 저장하는데  지가 2단계, 그리고 필요한 상황에서 정보를 꺼내는 과정이 3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3가지 단계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기억활용에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저자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물과 연관시켜 기억으로 연결하는 연상작용에서  터 기억해야 할 목록을 줄여서 외우는 법, 조선 국왕이름을 외우는데 이용하는, “태정태세문단세.....”하는 방식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내와 외출할 때마다 당하는 ‘문잠그기 강박증’에서 놓여나는 좋은 방법으로 외출할 때마다 문을 잠그고 나서 문을 쳐다보며 자신에게 “문을 잠갔어. 나는 문 잠근 것을 알고 있어. 걱정할 것 없어.”라고 말하는 습관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꼭 몸에 익혀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하겠습니다.

 

122쪽에 나오는 엄청난 자리수의 숫자를 외우는 방으로는 자를 단어로 바꾸어 외운다고 하는데, 영문 알파벳으로 변환시켜 외운다고 하는 저자의 방식을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오히려 어렵다는 인상을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142쪽부터 설명하고 있는 ‘시험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저자의 특강(?)은 각급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당연히 관심이 큰 부분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소위 문제학생이었던 저자가 어떻게 기억력의 천재가 될 수 있었는지 경험을 소개하고 있어 실감을 더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어느 분은 누구나 알고 있는 내용뿐이고 획기적인 방법이라고는 눈씻고 찾아도 없더라는 후기를 남기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 부분에 대하여 저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는 어떤 동기에서 저자가 제안하는 방법들을 직접 해보고 그 효과를 확인하게 된다면 분명 기억력을 높이는 훈련을 지속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 경우는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방법으로 ‘남앞에서 말을 하는 방법’을 정리해놓은 대목입니다. 사실 준비한 내용을 빼먹으면 안되는 중요한 발표자리 일수록 강박감이 심해져서 큰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래서 저 역시 해야 할 말을 모두 발표자료에 담아서 보고 읽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모양새가 많이 빠지게 되죠. 역시 원고없이 즉흥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이고 설득력있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담이 크지 않은 경우에는 큰 틀에서 말해야 할 내용을 요약해서 기억한 다음 발표할 때는 적당히 살을 붙여 말을 하게 되는데요. 이런 경우에는 시간을 조절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역시 어느 정도는 연습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부피도 그리 두껍지 않고 이해하기 쉬운 내용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소를 불문하고 읽어서 몸에 익힐 수 있을 것이라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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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삶 - 과학과 철학의 소통
이정일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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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영역에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약하여 문사철(文史哲)로 대변되는 인문학의 어느 영역이 중요하지 않은 바 없겠으나, 모든 학문의 뿌리라고 할 철학은 그저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탓인지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입니다. [북소리]에서도 철학분야의 책을 간혹 소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수박 겉핥기에 머무르고 있는 듯하여 공연히 마음만 조급해지고 있습니다. 조급하다 하여 바늘을 허리 매어 쓰지 못한다 하였으니 꾸준히 읽고 써나가는 끈기를 유지해보려 합니다.

 

요즘 특히 남성들 사이에 <건축학개론>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풋풋한 젊은 시절에 만나 친해지고 사랑이 싹트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기도 전에 생긴 오해 때문에 마음 귀퉁이에 묻고 만 남자가 15년이 지나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 그녀로부터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요? (적어놓고 보니 저의 과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젊었을 적 강의실에서 처음 만나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사랑이라는 건축물의 개론과정에 해당되었다고 한다면 15년 만에 다시 만나서 새롭게 쌓여가는 감정들은 건축물의 각론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무래도 당장 영화를 보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책을 소개하는 글머리에 영화이야기를 끌어들이는 엉뚱함은 개론의 중요성을 설명해보려는 생각 때문입니다. 물론 대학에서 전공을 공부할 때는 일단 총론을 떼고 나서 각론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시작한 책읽기까지 체계적으로 하는 것은 마치 의무교육을 연장하는 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레 포기하게 될까싶어 총론과 각론을 자유분방하게 넘나드는 여유를 가져볼까 합니다. 물론 깊이가 없다는 지적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소개하려는 이정일교수님의 <교양인의 삶 : 과학과 철학의 소통>이야말로 철학분야의 개론서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교수님께서 모두에서 자연과학부와 공과대학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교양강좌의 자료들을 정리한 글이라고 밝히셨으니 라포르시안 독자 여러분의 관심영역이라 할 보건의료와 꼭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그래도 방법론적인 면에서는 의학 역시 크게는 과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면 공감하는 점이 많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들어가는 말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읽었습니다. “한 공대생이 나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철학을 해야 하고 배워야 되는 것인가?” 역시 공대생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혹시 의학을 공부하는 우리도 같은 의문을 가져온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저자께서는 똑떨어지는 답을 제시하지 않았으나 ‘인간이 인간에 대해 근본적으로 탐구하기를 원한다면 이 물음은 언제나 철학 고유의 물음으로 남을 것’이라는 선문답의 느낌이 담긴 말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과학은 근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는 하이데거의 반과학적 사고는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과학 역시 사물의 근원을 캐는 학문으로 그 뿌리를 철학에 두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는 저도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간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반면에 철학교수님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는 공대생들의 항의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학문들이 미분화를 거듭하다 보니 처음 떨어져 나왔을 때는 멀지 않아 보이던 방계 학문마저도 이제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보이지 않더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벨탑이 무너진 다음에 같은 말을 쓰던 사람들을 세상에 흩어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된 세상에 비유를 하면 지나치다 할까요?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넓혀진 간극을 좁히기 위하여 과학자와 철학자 모두가 각자의 영역에서 노력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철학자의 시각에서 과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철학을 돌아보고 있는 저자의 학문적 열정이 돋보입니다.

 

저자는 <교양인의 삶 : 과학과 철학의 소통>의 얼개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제1부에서는 학문일반과 우리의 일상생활 모두가 근거를 제시하는 능력과 연관 아래 다루어지고 있다. 제2부에서는 학문일반과 과학의 관계가 포괄적으로 설명되었다. 제3부에서는 근대 학문의 근본 위상이 검토되고 있다. 제4부에서는 인간의 실천적 삶이 어떻게 의미있는 공동체를 형성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끝 부분에서는 완결되지 못한 잡다한 단상들이 열거되었다.”

 

철학을 전공하신 저자께서는 무작정 철학을 옹호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진리라 믿고 있는 참을 검증하는 작업이 철학은 물론 과학 또한 추구하는 공통적인 목표라고 인식하고 계시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과학의 탐구진행과 가설설정의 전제가 되는 선이해, 즉 독사(δοξα; 어떤 것을 너무 당연하게 자명한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것에 대해 의식적인 검증을 하지 않고 있는 세계)마저도 의식적으로 검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는 진리추구의 과정은 편견과 그릇된 선이해와 싸우는 것으로 계몽으로 가는 길이며, 이는 철학을 지배하는 근본적 담론이라 보았습니다. 이러한 믿음에서 저자는 무거운 물체가 가벼운 물체보다 더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론이 갈릴레이의 자유낙하이론을 통해 ‘모든 물체는 중력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아래로 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수정된 이후 잘못된 믿음으로 분류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대에 이르면서 유럽인들이 그들의 테두리인 유럽 밖의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가졌던 문명과 야만이라는 줄긋기는 유럽중심의 철학적, 과학적 사고의 오류이며 그 뿌리가 로마를 거쳐 그리스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파헤친 저자의 비판은 날카롭고 적확하다는 표현이 부족하다 싶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의 문화 밖의 것에 대한 몰이해 때문에 야만이라는 그릇된 편견을 만들어 냈다. 페르시아인들은 그리스 신들이 음모와 치정 그리고 납치와 살인하는 것을 보고서 적지 않게 당황했다. 페르시아인들이 믿는 유일신은 존엄하고 위엄이 있고 인간들이 하는 것을 뛰어넘어 있다. 페르시아인들이 보았을 때 그리스 문화는 한 마디로 타락하고 부패한 문화로 보였을 것이다.(29쪽)” 요즈음 제가 그리스신화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이 과거와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위안을 받는 대목입니다.

 

수학은 문제풀이이기 때문에 정해진 답이 있어 오답, 즉 오류가 발견의 계기가 되지 못하지만, 과학은 가설을 검증하는 것이므로 가설이 오류로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 또한 새로운 발견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오류도 진리로 가는 과정의 일부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있는 사람이 말했다는 이유로 검증의 수고를 생략하려는 자들을 저자는 “우상화를 통해 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부류”라고 통박하고 있습니다. 자신과 견해가 다른 자들과 기꺼이 대화함으로써 서로의 입장이 갖는 한계를 알아가는 것이 학문의 지평확장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막힌 속이 뚫리는 시원함을 느낍니다.

 

2부에서 설명하고 있는 논리적 사고를 위한 다양한 방법론들, 예를 들면, 모순과 배중률, 개념과 판단의 차이, 동일화와 술어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연역추론과 귀납추정 등에 대한 개념을 쉽게 설명하여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시야가 닿는 유한한 자연의 지평을 넘어 무한히 초월하는 곳으로 읽는 이를 이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인간의 이성이 이론이성을 넘어 실천이성으로 넘어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칸트의 철학을 끌어들여 전문화된 학습 중심의 학교개념이 폐쇄적이고 고정되어 있는 한계를 뛰어 넘어 우리의 경험을 더 확장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경험은 철학할 수 있는 자양분이자 토대다. 경험은 부단히 초월된다. 경험은 고정된 기억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밑거름이다.(78쪽)” 특히 보건의료영역처럼 전문화된 영역에서 남이 쌓아놓은 업적을 단순히 배우는 것은 일종의 전문적 훈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하여 창조적일 발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저자는 다양한 분야에서의 근대화과정에 대한 단상을 정리하고 있는데, 특히 과학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이 교감하는 장소가 아니라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된 것에 대하여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계량화하여 통제하는 방법을 도출하려 끊임없이 시도해왔고, 그 결과 자연의 유기체적 통합은 사라지고 그저 관찰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근대과학은 자연에 관한 모든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자 하나 유한한 것으로 보이던 자연의 한계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려들기보다는 자연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패러다임을 바꿈으로 해서 자연을 보다 잘 관리하는 방안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앎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가능한 삶을 위하여 필요하며, 앎은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라 합니다.

 

저자께서는 그리스철학으로부터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의 논리를 인용하고 있고, 과학의 방법론을 비롯하여 과학이 추구하는 바를 설명하는 한편 철학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철학을 공부하는 눈을 뜨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의 이런 자세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검증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직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것만이 고전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 강요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면서 우리에게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고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선지자의 성과라 하여 배우고 이를 답습하는 피동적인 생각을 바꾸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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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6-04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005
 
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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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와 함께하는 글쓰기교실에서 김용택시인님을 처음 만나 시인님의 글쓰기에 관한 삶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4013). 시인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시를 시작하셨다는 임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남원에서 만 4년을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남원을 가려면 임실을 지나기 마련인데 가끔은 이곳 어딘가에 김시인께서 사신다더라는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딱히나 그런 인연 때문만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글쓰기교실에서 시인께서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풀어놓으시는 이야기들이나 <김용택의 어머니>에 담으신 이야기들은 마치 제가 적어놓은 저의 어릴 적 이야기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 군산으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는 옥구군 대야벌판 가운데 있는 광산마을에서 살았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농번기나 겨울방학이 되면 할머니댁이나 외갓댁에 맡겨져야만 했습니다. 추수할 때 새참을 내가시는 할머니를 따라나서 이삭을 줍거나 우렁이를 잡아 바가지에 담아오면 할머니께서 된장국에 넣어 구수하게 끓여주시곤 했습니다. 초여름에는 매뚜기를 잡으러 벌판을 쏘다니고 벼이삭이 팰 무렵에는 벼멸구 애벌레를 잡아서 벼이삭을 훑어낸 끝에 묶어서 송사리를 낚는 재미를 즐기기도 하고 벌판은 그대로 자연을 배우는 교과서였습니다.

 

선친께서 교편을 잡고 계실 때에는 시인께서 말씀하신대로 홍루몽, 열국지, 헤밍웨이 등 전집류를 사들이시곤 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부터 그런 책들을 읽고, 중학교 2학년 무렵 일기쓰기를 시작해서 대학다닐 무렵까지 꽤나 오랫동안 이었는데도 시가 되지 않더라는 제 경험을 비춰보면 역시 글쓰기는 타고나는 비중이 꽤나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께서는 <김용택의 어머니>를 쓰시게 된 것이 임실에 자주 놀러오시던 사진작가 황헌만선생이 어느날 오랫동안 자당님을 앵글에 담아 보았다며 내놓은 사진들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언듯 보면 우리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애로운 시골어머니 모습입니다만, 사진들을 조금만 자세히 뜯어보아도 포스가 예사롭지 않다는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자당께서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찍은 스냅사진도 있지만, 앵글을 의식하시고 포즈를 취하신 듯한 사진들도 적지 않습니다. 역시 전문가가 사진에 담은 분위기에 꼭 맞추어 풀어낸 김작가님의 글솜씨가 어우러져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사계절을 따라 사진을 찍었기 때문인지 글도 계절 따라 달라지는 시골풍경을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시인께서도 자당께서 하시는 말씀을 고대로 받아 적으면 시가 되고 글이 되더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만, 책을 읽다보면 ‘그래 그때는 꼭 그랬어!’하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자당께서는 밥을 잘하는 도사였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밥이 많아 물의 양을 잘 조절해야 할뿐더러 불을 어떻게 때느냐에 따라 그날의 밥이 잘될지 못될지 판가름 난다. 그러니 불을 때는 데 혼신의 힘과 기술이 필요했던 것이다.(131쪽)”고 적었습니다. 김시인님께 숙제로 제출했다가 뽑혀서 격려와 보완할 점을 챙겨주셨던 글(당신의 기억이 쇠하셨나 걱정입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5886)에서는 귀띰만 했습니다만,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어머님께서 아침을 지으시면서 깨우면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솔가지, 볏짚, 장작, 나락껍질 등등 다양한 연료를 사용해서 가마솥밥을 짓곤 했습니다. 저의 오랜 경험에 비추어보면 밥물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력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하는 것하고 언제 불때기를 중단할 것인가 그리고 솥을 찬물수건으로 닦아주면서 뜸을 들이고 나서 다시 은근하게 불을 지펴 마무리를 하는 것이 밥을 고슬고슬하게 짓는 비결이었던 것 같습니다. 밥을 태워본 적은 없었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감나무가 잘 부러진다는 것은 알았습니다만, 감을 딸 때 가지가 부러지면 다음해 감이 많이 열게 된다는 것은 처음 알았습니다. 남원에서 어르신들의 치매치료를 잠시 맡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게 오셨던 할아버지께서 제게 주시려고 감을 따라 감나무에 오르셨다가 떨어지셨다는 말씀을 듣고 크게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감나무가 단단하지만 탄력이 없어 잘 부러지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완벽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나무가 단단한 장점도 잘 부러지는 단점에 가려지니 말입니다.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면서 김작가께서 무생채 이야기를 여러 번 풀어놓으셨는데, 막 무친 무생채를 좋아하신 듯 한 김작가님과는 달리 저는 무생채가 잘 익어 양념이 무에 완전히 배어들면 뜨거운 쌀밥에 익은 무생채를 듬뿍 올리고 쓱쓱 비비면 다른 반찬 없이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웠던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학교에서 도시락검사를 할 정도로 잡곡혼식이 강제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어머님께서는 밥에 잡곡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일제치하를 거치고 한국동란을 건너오면서 모질게 고생하셨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아 싫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책 어디를 펼치고 읽어도 책을 읽는 독자가 제 연배 근처라면 누구라도 낯익은 풍경이다 싶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장면에 대한 추억을 풀어내도 바로 리뷰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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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문 이후 밀리언셀러 클럽 12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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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작품은 소설보다는 <미저리>, <쇼생크 탈출>, <그린 마일> 등의 영화로 먼저 만나본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면서도 오싹한 느낌, 혹은 분명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혹시 주위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저도 모르게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게 되는 느낌같은 것을 느낀 경험이 있습니다.

 

<해가 저문 이후>는 그의 소설로는 처음 읽게 되었습니다. ‘윌라’로부터 ‘아주 비좁은 곳’까지 모두 열 세편의 소설을 묶은 단편집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단편집의 말미에 붙여 놓은 ‘선셋노트’입니다. 부록이라는 이름의 후기로 붙인 이 글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의뭉스럽기까지 하다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고백까지 친절(?)하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책을 열세편의 단편을 모두 읽고 나서야 발견했으니 저자의 뜻대로 그야말로 후기를 읽은 셈이 되었습니다만, 작품들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작품해설 혹은 요약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열 세편의 작품들 특히, 첫 작품 ‘윌라’로부터 ‘헬스자전거’, ‘그들이 남겨놓은 것’, ‘N', '지옥에서 온 고양이’, ‘<뉴욕타임스> 특별 구독 이벤트’, ‘아야나’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개괄해보면 초현실적이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환상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죽은 사람들이 거리를 어슬렁거린다는 이야기는 비라도 내릴 듯 구름이 낮게 깔린 저녁 무렵이면 공연히 소름이 돋을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진저브래드 걸’과 ‘아주 비좁은 곳’은 읽으면서도 스멀스멀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불쾌한 느낌 때문에 보던 책을 덮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얼마 전에 참가했던 김용택시인님의 글쓰기 교실에서도 글쓰기는 과연 타고나는 부분과 훈련에 의한 부분의 비중에 관한 질문을 드렸습니다. 시인께서는 1%의 재능과 99%의 훈련이 잘 어울어져야 좋은 작품을 낼 수 있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만, 스티븐 킹의 경우를 보면 소년 시절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십대 초반에 쓴 소설이 잡지에 실렸다는 것을 보면, 역시 재능이 중요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끌었던 작품은 ‘N’이었습니다. 정신과 의사인 오빠가 자살로 결론이 난 죽음 이후에 그의 유품에서 나온 N이라고 하는 회계사이자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강박증에 관한 진료기록을 발견한 여동생이 역시 정신과의사인 오빠의 친구에게 검토해줄 것을 부탁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오빠는 고향이 같은 환자의 강박증을 치료하면서 환자가 오빠도 잘 아는 고향의 벌판에서 발견한 묘한 현상 - 아마도 강박증 때문에 인식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에 이끌려 몇 차례나 그곳을 방문한 끝에 그곳에서 죽은 채 발견되고, 오빠 역시 그 장소를 찾았다가 자살을 하게 될 뿐 만 아니라 오빠 친구에게 진료기록의 검토를 부탁했던 여동생마저도 같은 장소부근에서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는 미묘한 분위기의 이야기입니다. 사실 큰 아이가 정신과에 관심이 있다는 이야기를 할 때 내심 걱정했던 점이 바로 치료하고 있는 환자의 증상에 이끌려 들어가는 정신과의사가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지옥에서 온 고양이’에서는 적어도 세 사람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고양이를 살처분해줄 것을 의뢰받은 사람이 고양이와 함께 죽음의 현장으로 향하던 중에 고양이의 공격을 받아 죽음을 맞게 된다는 선뜻한 전개가 저의 고양이 공포증을 부채질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래도 저는 호러물에 대한 역치가 낮은 탓인지 쉽게 빠져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소품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경향도 눈에 뜨이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벙어리’에 나오는 성 크리스토퍼의 목걸이와 같은 것 말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나름대로의 일정한 패턴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만나기 쉽지 않은 주제나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특히 제목 <해가 저문 이후>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해가 저물고 밤이 시작되려는 시간은 공연히 스산한 느낌이 절로 드는 시간대라로 할 수 있는데, 시간적 배경을 해진 이후로 설정한 작품을 읽을 때는 소름이 미리 돋는 듯한 느낌도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나약한 면 때문에 생기는 심리적 갈등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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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레베카 스클루트 지음, 김정한.김정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원칙을 만들어 두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북소리]에서 같이 생각해보았으면 하는 책을 고르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신문을 포함한 다양한 자료에서 일차로 고른 책들을 구해서 읽어본 다음 나름대로의 느낌을 바탕으로 [북소리]에 올릴 리뷰를 별도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레베카 스클루트의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은 [북소리]코너의 독자 한분께서 추천해주신 조금 특별한 경우입니다. 책을 구해서 읽으면서도 개인적인 리뷰로 끝낼 것인가 [북소리]에서 같이 고민해볼 것인가를 놓고 몇 차례 고민을 했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과학분야의 연구에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 헬라(HeLa)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특히 그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일대기라는 점이 [북소리]의 핵심 이슈와 부합되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헬라세포의 원주인 헨리에타 랙스와 그녀의 자궁경부에 생긴 종양으로부터 분리해낸 세포가 영원히 증식하도록 불멸의 존재로 만든 과학자와의 관계에서 논의되었어야 할 의학윤리 및 연구윤리 혹은 보상 등에 관한 내용은 최근 의학계의 첨예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기에 같이 생각해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는 1920년 8월 1일 태어난 헨리에타 랙스라는 이름의 한 흑인여성과 그녀의 종양세포로부터 유래한 헬라세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뒤에 가족들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가 중심축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51년 1월 29일 헨리에타 랙스가 질출혈과 통증 때문에 볼티모어의 존스홉킨스병원의 산부인과 외래를 찾은 것을 계기로, 진단과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잘라낸 종양으로부터 종양세포를 분리하여 실험실의 인공적 환경에서 끊임없이 분열할 수 있는 불멸의 세포로 만들어낸 의사와 생명과학자들이 헬라세포를 두고 보인 행적을 뒤쫓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전자의 비중이 더 크지 않나 싶습니다. 헬라세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종양을 제공한 환자, 즉 헨리에타 랙스의 신원이 밝혀진 것을 계기로 헨리에타가 남겨놓은 세포가 불멸의 존재가 되어 의학연구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헬라세포를 만들어낸 존스홉킨스를 비롯한 정부 어디에서도 가족들을 배려했다는 흔적은 없고, 오히려 이들을 이용하려는 세력들까지 등장하면서 시달림을 당하게 된 가족들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진실에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저자가 특히 그녀의 딸 데버러를 중심으로 한 헨리에타의 가족들의 입장에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의학, 혹은 생명과학분야를 전공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가족사의 비중보다는 헬라세포를 추출해서 배양에 성공하게 된 과정에서 빠트리지 말았어야 할 사항들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헨리에타 랙스에게 종양세포를 배양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세포배양에 성공하게 되면 어떻게 활용할 수 있다던가 하는 등입니다. 뒷날 헬라세포의 활성이 지나치게 왕성한 탓에 다른 배양세포들을 오염시키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를 규명하기 위하여 가족들로부터 혈액을 채취하게 됩니다. 이때도 역시 가족들에게 충분한 설명없이 넘어간 점 등을 ‘옛날에는 다 그랬어~’라고 정리하기에 찜찜한 무엇이 남는 느낌입니다.

 

저는 병리학과 진단검사의학을 전공하고, 병원의 병리진단업무 또는 법의부검에 종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제게 넘어오는 환자의 표본들로부터 검사에 필요한 부분을 얻어 진단을 정하고 학생교육 등의 재료 혹은 희귀한 질환 등이라는 이유로 특별하게 보관이 필요한 검체는 남기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검체는 소각하여 처리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별도로 환자의 동의를 얻은 기억은 없습니다. 아마도검체가 이를 제공한 환자의 소유라고 인식하지 못한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분자병리학 등 다양한 분야가 발전하게 되면서 환자로부터 얻은 검체를 조작하여 진단시약 혹은 연구재로를 만들어 상품화할 수 있게 되면서 이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포함한 소유권의 소재가 논란이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북소리]에서는 한스 요나스교수님의 <기술 의학 윤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20243>를 읽으면서 바로 이 문제를 공유했던 적이 있습니다. 요나스 교수님은 현대 기술이 윤리학의 대상이 되는 이유를 결과의 모호성, 적용의 강제성, 시공간적 광역성, 인간중심주의의 파괴 그리고 형이상학적 물음이 제기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헨리에타 랙스의 사례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조지 가이의 실험실에서 헬라세포배양에 성공하기 이전에는 배양하는 종양세포마다 죽어버리고 말았던 것처럼 실험의 최종결과는 예상할 수 없는 모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헨리에타의 종양세포를 배양하여 불멸화하는 작업이 성공하게 된 이유는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밝혀지게 됩니다. 이처럼 현대기술이 개발된 시점과 이 기술이 광범위하게 확산되는데는 시간적 공간적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헬라세포가 불멸화된 다음, 조지 가이는 이를 이용하여 의학연구를 하려는 연구자에게 대가를 받지 않고 이를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951년 미국에서 소아마비가 창궐하면서 미국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백신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이렇게 개발된 소아마비백신을 검정하기 위하여 헬라세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세포의 손상없이 배송할 수 있는 방법들이 개발되었습니다. 이런 수요를 맞추기 위하여 헬라세포를 적기에 공급하기 위한 대단위 생산시설을 설립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공급이 가능하게 된 것이 헬라세포가 생명공학연구의 중심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요나스교수가 제기한 현대기술이 인간중심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지적 역시 헬라세포와 관련해서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요나스교수는 전통윤리학이 언제나 인간적 선을 장려하고, 타인의 권리 내지 타인에 대한 관심의 존중, 그들에게 일어나는 불의의 개선, 그들이 느끼는 고통의 완화를 강조해왔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헬라세포을 사용한 실험을 했던 시험실은 물론 헬라세포를 개발한 존스홉킨스를 비롯하여 소아마비의 예방을 최우선의 보건정책으로 이끌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 어디에서도 헨리에타 랙스가 의학과 공공보건의 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고 기리는 일에 관심을 보인 적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헨리에타 랙스의 가족들로부터 혈액을 채취하여 헬라세포의 진위를 검증하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았던 일은 연구윤리에 저촉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환자의 개인정보에 관한 사실을 비밀로 하지 못한 연구진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지 가이가 헨리에타 랙스의 종양조직으로부터 배양해낸 헬라세포는 앞으로 암정복을 위한 연구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이유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결국 이 세포가 누구로부터 얻은 것인가 하는 것을 밝히기 위한 언론의 열띤 취재경쟁이 헬렌 레인, 헬렌 라슨 등의 이름으로 추측되어왔던 헬라세포의 제공자가 헬리에타 랙스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녀의 가족들이 언론과 개인적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던 것을 보면 환자의 비밀유지규정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역시 [북소리]에서 첫 번째로 다루었던 반덕진교수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03334>에 적혀있는 것처럼, “내가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또는 진료 과정 외에 그들의 삶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비밀로 지키고 누설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한 환자 보호의무에 관한 조항을 위반한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물론 반덕진교수님께서도 환자의 비밀을 어느 선까지 보호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즉 환자의 비밀이 보호되는 것보다 공개되는 것이 사회적 편익이 큰 경우 비밀준수규정의 적용에서 예외로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헨리에타 랙스의 경우 헬라세포와의 관계는 결국 그녀의 병력이 공개되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 그녀의 병력이 사회적 편익을 침해하는 바가 없다 할 것이므로 그녀의 실명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분명 의학윤리규정을 위반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검체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사례 둘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중반 털세포백혈병에 걸린 존 무어로부터 채취한 검체를 가지고 만든 Mo세포주와 단백질에 대한 특허를 획득한 UCLA의 암학자 데이비드 골드가 이를 생명공학회사에 매도하기로 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무어가 골드를 상대로 자신을 기만하고 동의 없이 자신의 몸을 연구에 사용했다며 소송을 제기하여 자신의 조직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지만, 대법원은 무어의 주장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단 조직이 환자의 신체를 떠나는 순간 환자의 소유권도 사라지는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무어와는 다른 행보를 보인 환자도 있습니다. 1970년대 초반에 혈우병을 앓고 있던 테드 슬래빈이란 환자는 잦은 수혈로 B형간염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치의는 이 사실을 슬래빈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슬래빈은 B형간염백신을 개발하려는 제약사에 자신의 혈청을 판매하여 수입을 올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슬래빈은 B형간염을 퇴치할 방법을 개발할 수 있는 바이러스학자 바루크 블럼버그를 찾아가 자신의 혈액과 조직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제안하여 결국은 B형간염백신의 개발에 성공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쾌거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같이 생각해볼 점은 요나스교수님이 제기한 환자의 기본적 특권에 관한 점입니다. 그는 치료과정에서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할 의사는 오직 자신이 치료하고 있는 환자에 국한된 의무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의사들에게 사회 혹은 의학의 대리인이 될 것을 주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의사는 환자의 가족이나 동일한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현재의 다른 환자 혹은 고통받게 될 미래의 환자를 위한 대리인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의사에게는 현재 그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환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단 전염병 환자의 경우는 예외로 해야 할 것입니다.)

 

저자가 헨리에타 랙스 가족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까닭은 마무리부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금전적 보상을 원한 가족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헨리에타 랙스가 자궁암치료를 받는 동안 태중(胎中)에 있던 딸, 데버러 랙스는 바로 어머니와 언니의 삶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헬라세포가 의학연구에 기여한 바를 고려하여 헨리에타 랙스를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환자진료를 통하여 얻게 되는 자료를 바탕으로 의학계가 얻는 부수적인 이익에 대하여 윤리적 시각에서 논의가 가능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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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5-29 0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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