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사회와 그 적들 2 - 이데아총서 14
칼 R.포퍼 지음 / 민음사 / 198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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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가 히틀러의 제3제국이 유럽사회를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 모습에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분명히하려는 목적으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쓰게 되었다는 말씀을 전편의 리뷰에서 드렸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 http://blog.yes24.com/document/6501974). 제3제국이 저지른 아리안족 우월주의는 대표적인 닫힌 사회라고 할 종족중심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포퍼는 전편에서 플라톤이 이상적인 국가체계라고 주장한 참주정치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고착화하고 사회구성원 간의 불평등이 필연적인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당시의 사료들을 인용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후편은 헤겔철학과 마르크스철학에 담겨진 열린사회에 반하는 요소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포퍼가 과학적 분석을 통한 예측과는 달리 역사의 분석을 통하여 미래를 내다보는 예언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점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의 문제점이라 지적하고 있습니다. 헤겔의 역사주의의 뿌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나 플라톤에 이르고 있다는 것인데, 전통 그리스철학은 페리클레스와 소크라테스 그리도 데모크리토스 등의 위대한 세대를 지나오면서 열린사회를 지향하던 사상적 흐름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닫힌사회로 물꼬가 바뀌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헤겔의 역사주의는 세계의 진행의 추세가 이데아로부터 멀어지는 하강하는 것이라고 한 플라톤과는 달리 낙관적이었다고 포퍼는 보고 있습니다. 변증법의 논리로 보아도 인간의 역사는 스스로를 창조하면서 움직여 나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각 단계는 앞단계를 넘어서 완전에로 점점 접근해가고 있기 때문에 진보의 법칙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모든 민족은 역사무대의 전면에 나서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다른 나라와 투쟁함으로서 자기의 개별성을 증명할 수 있고, 투쟁의 목적은 세계의 제패라 할 것이므로, 전쟁이 모든 것의 아버지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70쪽).

 

헤겔이 프러시아의 후원을 받으면서 독일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철학적 논리를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포퍼의 시각에서 헤겔은 열린사회의 적으로 지목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잠재적 조직의 본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철학은 그로 인해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프랑스 혁명은 철학으로부터 나온 결과라고들 말하며, 철학이 세계의 지혜로 묘사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철학은 그 자신에 있어서, 그리고 독자적으로 진리일 뿐 아니라 세상사에 반영된 진리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철학으로부터 그 첫 동력을 얻었다는 주장에 반대해서는 안된다.(90쪽)” 헤겔은 프랑스혁명의 기저에는 철학적 논리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후편의 상당부분을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철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은 칭찬하고 있지만, 이를 확대하여 사회현상에 적용하는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부분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려는 하나의 과학적 방법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철학적 논리를 세우던 당시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이 일어나 장원이 무너지고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대우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는 주장할 여건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철학은 참된 인도주의적 운동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나라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유럽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르크스철학이 나오면서 자본주의에서 종속적 존재에 머물던 노동계급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는 방향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분명 인정받아야 할 점이 있다는 공적을 포퍼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마르크스철학에 따라서 계급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것은 자본주의가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럽사회가 아니라 러시아였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론에 대한 포퍼의 비판은 혁명을 통하여 주도권을 장악한 계급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점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배계급 내부에서도 이익을 두고 갈등과 대립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역사를 예언하려 했던 마르크스가 실패한 것은 역사주의의 빈곤에 있다고 포퍼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포퍼는 마르크스가 주장한대로 방만한 자본주의제도가 정의롭지 못하고 비인간적임은 인정하고 있으나, ‘자유의 역설’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유가 제한되지 않을 때 자멸한다는 점에서 자유를 자율적으로 제한하는 조처를 도입함으로써 자멸을 피하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급진적 혁명을 통하여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구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본 포퍼가 제안하는 대안은 점진적 사회공학적인 접근방식입니다. 국가에서 적절한 수준에서 간섭하는 것인데 제도적인 측면과 대인적 측면에서 간섭이 가능할 것이라 합니다.

 

역사주의에 대한 포퍼의 비판의 핵심은 다음 구절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의미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인류의 역사>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류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은 <권력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의 역사는 국제적 범죄와 대량학살의 역사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구체적 역사가 있다면 사람들 모두에 관한 역사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란 없다.(357쪽)”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전편의 경우는 이한구교수님이 1998년에 번역소개된 이후 주석을 추가번역하고 보완하여 2006년 개정판이 나왔지만, 후편의 경우 이명현교수님의 번역으로 소개된 이후로 아직 보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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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I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1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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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운동을 주도하고 계신 분들의 책들이 소개되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우선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와 <과학의 변경지대>, 케이스 스타노비치의 <심리학의 오해> 등이 생각납니다. 우리 사회에도 회의주의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회의주의 사조를 주도하고 계신 분들 가운데 한 분이 강력하게 추천하신 과학철학자 칼 포퍼의 책 <열린사회와 그 적들 I>을 소개하려 합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의 하나로 지목되는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칼 포퍼는 빈대학에서 수학, 물리학, 역사, 철학, 음악 등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4년 <탐구의 논리>를 통하여 과학철학 분야에서 ‘반증가능성’의 방법을 제시하여 주목을 받게 되는데, 포퍼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은 먼저 가설의 형태로 제시된다고 합니다. 한 이론의 과학적 성격이란 그 이론이 언제나 경험에 의하여 반증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하는 반증가능성의 이론을 <탐구의 논리>에 담았다고 합니다. 이 는 1963년 <추측과 논박>을 통하여 “한 이론의 과학적 자격의 기준은 그 이론의 반증가능성, 반박가능성, 테스트가능성이다.”라고 정리되는데, 한 이론이 과학적인 것으로 분류되려면, 그 이론에 모순되는 관찰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퍼의 철학적 명제는 당연히 과학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I>을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해방이후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였다고는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 만해도 통제된 사회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오랜 시민운동이 결실을 맺게 되면서 많은 나라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믿고 있는 현재에도 우리사회의 성격이 선명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민주공화국이라고 정의되고 있는 우리나라가 진정 추구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가 모든 국민들이 여망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와는 다른 체계를 추구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대표적 철학자 칼 포퍼가 추구하는 열린사회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I>은 1945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저자의 서문에 따르면 구상은 진즉부터 하고 있었지만, 히틀러와 그 추종세력들이 유럽대륙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 것을 보면서 집필을 서둘렀다고 합니다. 즉, 히틀러가 추구하는 목표가 바로 자유민들의 구속하는 대표적인 전체주의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포퍼는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대 청소년 시절에는 열렬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포퍼는 사회민주당 당원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숨겨진 전체주의적 성격을 발견하고 결별하였다고 합니다.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자유민의 통제를 기본으로 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철학적, 사상사적 배경이 마르크스, 헤겔을 거쳐 플라톤에까지 연결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1902444>로 우리사회가 열병을 앓은 바 있습니다. 샌델교수는 “사회가 정의로운 것인지 묻는 것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이를테면 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 등을 어떻게 분배하는지 묻는 것이다 . 정의로운 사회는 이것들을 올바르게 분배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에게 합당한 몫을 나누어 준다.”고 말하고, 정의를 이해하는데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정의는 무엇인가?>를 읽어보면 독자들의 생각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와 같은 질문에 대하여 자신이 준비한 답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는지 궁금합니다. 독자 가운데는 그를 ‘소크라테스를 흉내내는 공동체주의자’라고 규정한 분도 있습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칸트, 제레미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고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철학의 흐름 속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인 행복의 극대화, 자유, 미덕의 추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이론이 안고 있는 특성과 한계점들을 지적했다고는 하지만, 특히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와 롤즈의 정의론를 비롯하여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ism)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마이클 샌델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사회가 정의로운지를 물었다고 한다면, 칼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원조의 지위를 부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열린사회와 그 적들> 1부에서 플라톤이 주창한 계급의 존재를 전제로 한 참주정치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 등 역사주의적 사상가를 이어받아 역사적 발전의 법칙을 세웠는데, 우주적 힘이 작용하는 역사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변화는 타락이나 부패 또는 퇴보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와는 달리 인간의 도덕적 의지로 이런 역사적 운명의 법칙을 깨트릴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플라톤은 정치가 퇴화하는 과정을 보면 완전한 국가 뒤에 명예와 명성을 추구하는 귀족들이 지배하는 명예정치체계가 오고, 두 번째로 부유한 문벌이 지배하는 과두정치체계가 오며, 다음으로는 방종을 의미하는 자유가 지배하는 민주정치체계가 탄생하고 마지막으로 국가의 종말단계인 참주정치가 나타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선의 국가에서는 세 종류의 계급, 즉 수호자들과, 그들의 무장한 보조원이나 군인, 그리고 노동계급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사회를 유지하는 힘은 공산주의와 수호자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예를 들면 영아살해와 같은 우생학적 정책들이 시행되고, 계급간의 이동은 불가능한 사회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적인 국가에서는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미국 작가 로이스 로이의 소설 <기억전달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1323>를 통해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체계에서 평등주의라는 개념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 ‘법 앞에 평등’과 같은 정의의 개념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다고 포퍼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법률>에서 플라톤은 평등주의에 대하여 플라톤은 “동일하지 않은 자에 대한 평등한 대우는 불공평을 초래한다.(163쪽)”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런 플라톤의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동일한 자에게는 평등을, 동일하지 않은 자에게는 불평등을”이라는 공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자기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덕이 ‘정의’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차별화된 계급 혹은 집단을 전제하는데서 나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플라톤의 정의는 공리주의적이며 전체주의인 것으로 사회 구성원의 모든 것, 심지어는 지배자의 진실을 알 권리, 진리를 말하도록 요구하는 특권까지도 위압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1부를 통하여 플라톤의 탐미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사회의 허구를 낱낱이 파헤치고 비판하면서, 열린사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술적 사회나 부족사회 혹은 집단적 사회는 닫힌사회라 부르며, 개개인이 개인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는 열린사회라 부르고자 한다.(293쪽)”

 

닫힌사회와 열린사회의 특징을 비교해보면, 열린사회에서는 구성원들이 사회적으로 높아지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투쟁을 하는 반면, 닫힌사회에서는 계급투쟁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견해서는 닫힌사회가 더 인간적이고 우월한 것처럼 비칠 수 있으나, 이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닫힌사회에서는 국가가 크든 작든 시민생활의 전체를 규제하려 든다는 특징이 있고, 반면열린사회에서는 이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열린사회에서는 행위의 규범들이 고정불변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고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약속의 체계에 불과하며, 개인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리고 독자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회라는 것입니다.

 

열린사회를 지지하는 아테네의 페리클레스가 기원전 430년경 “비록 소수의 사람만이 정책을 발의할 수 있다 해도, 우리 모두는 그것을 비판할 수 있다.”고 한 반면, 80년 뒤에 아테네의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을 비교해 보면 포퍼가 플라톤을 비판하게 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으끔가는 원칙은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지도자 없이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의 마음도 전적으로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하게끔 습관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열성적으로 하는 것이든 장난삼아 하는 것이든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사람들은 전쟁 때나 한창 평화로운 때에 그의 지도자에게 눈을 돌려 그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사소한 일까지도 지휘를 받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그렇게 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만 잠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움직이거나 씻거나 먹거나 해야 할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은 오랜 습관에 의해 결코 독립적 행동을 꿈꾸지 않고 전혀 그런 짓을 할 수 없게 되도록 자신의 영혼을 길들여야만 한다.”

 

닫힌사회로부터 열린사회로 이행하게 된 것은 기술과 사업의 발달에 기인한다고 포퍼는 보고 있지만, 기술의 발달만으로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된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열린사회를 향한 효과적인 행위는 이성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며 이는 비판과 논증을 통하여 결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즉 합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내게 될 것인 바, “합리주의란 비판적 태도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태도요, 경험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태도이다.(617쪽)라는 점을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1부는 1998년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한 것을 2006년에 특히 원저의 방대한 양의 주석까지 번역하여 보완한 개정판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2부는 아직 보완 개정판이 나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2부에서는 근대철학에서 열린사회를 반대하는 주장을 대표하는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적 논리에 대한 포퍼의 비판을 담고 있습니다. 번역을 하신 이한구교수님은 읽는 사람들이 포퍼의 분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각장의 앞부분에 간략하게 요약한 내용을 붙였고, 포퍼의 철학을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도록 ‘포퍼의 생애와 철학’이라는 해설을 책 뒤에 더하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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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6-11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1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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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한번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막상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신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학생 때 이미 독서리스트에는 올려졌지만, 아직까지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유는요? 그저 막연하게 ‘어려울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새끼가 새끼를 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책읽기도 그런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읽고 추천하는 경우, 혹은 읽은 책에서 느낌이 와서 등의 이유로 읽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오랫동안 새겨두고 있던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게 된 것은 당구로 치면 쓰리 쿠션입니다. 박완서 선생님이 <못가본 길이 아름답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8700>에서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에서 인용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게 되셨다는 말씀에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를 읽게 되고, 그리고 프루스트를 꼭 읽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으니 말입니다.

 

조나 레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외부로부터 유입되는 자극이 기억에 저장되는 기전에 주목하였습니다. 그가 인용한 “머나먼 과거로부터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이 죽고 사물들이 부서지고 흩어진 후에도 맛과 냄새만이, 연약하지만 끈질기게, 실체가 없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충실하게, 오랫동안 남아 떠돈다.(148쪽)”는 부분을 보면 미각과 후각이 인간의 기억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이 텍스트에서는 “옛 과거에서, 인간의 사망후, 사물의 파멸 후,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에도, 홀로 냄새와 맛만은 보다 연약하게, 그만큼 보다 뿌리 깊게, 무형으로 집요하게, 충실하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넋처럼 남아 있어...(69쪽)”로 옮기고 있어 손 끝에 잡히는 느낌이 애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미각에 대한 기억을 논하면서 프루스트가 차와 함께 먹은 마들렌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기억도 있습니다. 큰 아이가 어렸을 적에 집 가까이 있는 제과점에서 만드는 마들렌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자주 사곤했는데, 그 아이가 마들렌을 먹으면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들렌의 한 조각이 부드럽게 되어 가고 있는 차를 한 숟가락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 한 모금의 차가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느 소스라쳤다. 나의 몸 안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깨닫고, (…) 어디서 이 힘찬 기쁨이 나에게 올 수 있었는가? (…) 두 모금째를 떠 마신다. 거기에는 첫 모금 속에 있던 것보다 더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세 모금째는 두 모금째보다 다소 못한 것밖에는 가져다 주지 않는다.(66쪽)” 어떤 생각이 떠오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바로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1. 스완네집쪽으로, 2.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3. 게르망트쪽, 4. 소돔과 고모라, 5. 갇힌 여인, 6. 사라진 알베르틴, 7. 되찾은 시간 등 모두 일곱 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국일미디어에서는 이를 열한권으로 나누어 펴냈는데, 제1권 스완네 집쪽으로(1)에는 특히 작가와 작품에 대하여 번역하신 분이 정리한 글이 더해져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부분을 먼저 읽은 다음에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시는 편이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제1권은 스완네집 쪽으로(1)입니다. 어린 시절 콩브레에 있는 고모님 댁에서의 추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독자의 입장에서도 각오를 해야 할 점은 전체 이야기가 끊어짐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책읽기에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점일 듯합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책읽기를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 싶습니다.

 

프루스트는 화자(話者)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오래 전부터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라고 시작한 글은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때로는 순간 몽롱한 상태로 추억의 영상이 또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상태, 즉 기억에 흔들림이 생기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잃어버린 시간'이라고 비유하고 있는 자신의 의식의 흐름, 즉 기억을 정리해서 글로 남기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억에 관심이 많은 저로서도 주목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든 생각은 하나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끝나면 이어서 다른 상황으로 넘어가는데 대부분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화자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마을에 대하여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데이빗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를 묘사하듯 말입니다. “우리 앞에 한련꽃을 가장자리에 두른 오솔길이 햇볕을 가득히 받으며 성관 쪽으로 가파르게 뻗어 있었다. 이와 반대로, 오른쪽 정원은 편편한 지면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둘레의 높다란 수목들의 그림자에 그늘지어, 스완의 선대가 파놓은 샘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서 가장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도, 역시 자연을 바탕삼아 가공되어 있는 것이다.(195쪽).

 

“내가 독서하는 동안, 안에서 밖으로, 진리의 발견 쪽으로 부단한 운동을 행하고 있는 이 중심적인 신뢰감 다음에, 뒤이어 오는 것은 감동, 내가 참여하고 있는 행동이 내게 주는 여러 감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날의 오후는 일생에 흔히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은 극적 사건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은 내가 읽고 있는 책 안에 갑자기 나타나곤 하였다.(122쪽)”라고 적은 부분에서 독자를 위한 프루스트의 배려를 읽었다는 말씀을 끝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에 첫발을 뗀 느낌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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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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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난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만난 남녀가 사고로 함께 죽는데, 그들이 내린 돌이킬 수 없는 결정 또 우연한 사건 등이 쌓여 생긴 결과라는 것이므로, 우연이면서도 필연적인 만남이었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정체성>에서도 샹탈과 장마르크의 관계 역시 우연(偶然)이 개입하여 상황을 전개시키게 되지만 상황이 발전하게 되는 것은 두 사람이 선택한 결정이 더해진 결과일 뿐이며, 자신이 결정한 내용을 상대방에게 알릴 기회를 놓치면서 결정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저자는 완벽한 해피엔딩 역시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말라는 경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마(魔)가 끼어드는 것은 한 순간이니 경구를 잊고 사랑을 시험하는 연인들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의 첫사랑 역시 이 경구를 깜박한 대가로 끝났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장마르크에 대한 샹탈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작가의 설명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어느 날 장마르크를 잃는다는 상상을 했다. 오직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아무것도 모르는 처지에 빠지는 것. 그녀는 아마 자살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살은 배신일 것이며 기다림의 거부, 인내의 상실일 것이다. 그녀는 숨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9쪽)”

 

살아가면서 매사가 손목시계의 톱니바퀴처럼 한치의 오차없이 째깍째깍 맞물려 돌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미세하게 일치하지 않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당사자들의 여유 속에 녹아들면 커다란 오차로 발전하지 않고 수습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상치 않은 상황에서 우연히 던진 한 마디가 상대의 마음에 새겨지면서 일어나는 반응이 사태를 키워나가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말을 같이 보내기 위해서 노르망디 해변가 작은 도시에 먼저 도착한 샹탈은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묘한 압박감을 받게 됩니다. 장마르크 역시 어렸을 적 친구 F를 문병갔던 장마르크가 전혀 생각지 못한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잊었던 상처가 되살아나게 되는데,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숙소에 도착한 장마르크는 샹탈을 찾아 나서고 서로 엇갈리게 됩니다. 두 사람의 멀지 않은 미래를 예고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만나게 된 연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야?”하고 묻게 되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녀의 답변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추궁하게 되고, 결국 그녀는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더라.(29쪽)”고 답변을 하게 됩니다. 충성스러운 연하남 장마르크는 상처난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하여 시라노가 되기로 작정을 하게 되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미지의 남성이 있는 것처럼 편지를 보내기 시작하게 됩니다. 제목이 의미하는 정체성이란 바로 샹탈처럼 삶의 한 순간에 살펴보는 스스로의 위치를 말함일까요?

 

이번 시즌에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타임슬립과 죽은 자를 빙자한 복수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령>은 자신의 모든 생활과 생각을 누군가 감시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섬찟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샹탈이 편지를 받고서 이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작가는 여기에 상황을 비틀어놓습니다. 그녀는 미지의 남성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장마르크에게도 비밀로 붙이고, 그 편지를 보낸 장마르크도 상탈이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도 그녀에게 운을 떼지 않는 탓에 결국 그녀도 장마르크가 편지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을 조짐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독자도 이해하기 어려운 등장인물, 샹탈의 전시누이의 등장이 읽는 이를 조마조마하게 만들던 긴장이 폭발을 향하여 치닫게 되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런 상황이 실재할까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전남편의 여동생은 아들이 죽어 심리적 공황상태인 샹탈과 오빠에게 새로 아이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아무리 오빠네 일이라고 해도 한 다리 건너인 가정사에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지 않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합니다. 게다가 오빠와 이혼한 올케네 집에 찾아와서 가족모임에 참석하라고 청하는 장면에는 도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세상을 사는지 모를 지경이라 할까요? 아무리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성격입니다.

 

죽어도 헤어지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름대로의 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그 답 역시 독자마다 다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제가 얻은 답은 제 마음 속에 묻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논의하지 않은 장마르크가 그의 친구 F와의 관계에서 토로하는 우정에 대한 정의입니다.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거야.(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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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품절


월탄 박종화작가님의 <금삼의 피>를 흥미롭게 읽었던 것이 중학교 때이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복위를 둘러싼 음모를 중심으로 한 줄거리였습니다. 그리고 보면 왕조시절부터 궁궐의 이야기는 세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범인으로서는 알 수 없는 세계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전통(?)은 지금 세상에까지도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달라진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에는 왕을 중심으로 신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고 한다면 최근에는 궁궐의 주변인물 가운데 권력의 핵심에 가까이 이동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다루어지곤 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되다보니 소재가 고갈된 탓도 있을 것 같고, 또 새로운 화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경향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게다가 최근에는 퓨전사극이라고 해서 시대성이 애매한 작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팩션이라 해서 가상사극까지 등장하는 마당입니다.

 

최근 재미있게 보는 주말드라마에 등장하는 학생이 사극에 등장하는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웃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어쩌면 그런 상황이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부경대학교 사학과 신명호교수님은 바로 그런 상황을 우려한다는 말씀을 신작 <궁녀>의 머리말에 적고 있습니다. “어느 것보다 더한 흥미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궁중여성이라는 소재를 오로지 흥미와 상상력에만 맡길 경우 조선시대 역사 자체까지도 상상의 영역으로 빠지게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그것이다. 때문에 역사소설이나 드라마 또는 영화를 통해 조선시대의 궁중 여성들이 조명되는 것 그 이상으로 조선 시대 궁중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깊어져야 한다고 믿는다.(7쪽)”

 

<궁녀>는 왕과 그 주변인물의 생활을 지원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을 통해서 복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왕과 왕을 둘러싼 신하들의 이야기 혹은 그들의 시각으로 걸러진 백성들의 삶의 기록입니다만, 그 속에서조차 제대로 기록된 바 없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바로 궁녀였다는 점을 지적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역사의 기록에서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궁녀에 대한 기록과 조선조가 끝난 이후 생존해있던 궁녀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된 자료 등을 통하여 과거를 복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궁녀들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까닭은 그녀들이 왕의 사적공간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왕이 아닌 자가 언급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왕의 사생활을 지원하는 궁녀에 대한 언급은 조심한다고 해도 왕의 사적생활을 지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록에 남겨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극비사항이 될 수 있는 왕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는 행위로 발전하여 역모로 해석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신명호교수님은 <궁녀>에서 그녀들의 실체를 뒤쫓고 있습니다. 누가 무슨 사정으로 궁녀가 되었던 것인가? 그녀들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었고, 어떤 일을 맡고 있었던 것인지. 그녀들의 성과 사랑을 포함한 삶은 어땠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기록에 남겨진 궁녀들의 사례들을 재구성하여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궁녀들은 처소에서 독자적으로 선발하여 운영하였기 때문에 그녀들이 모시는 분을 중심으로 끈끈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간혹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때로는 그녀들이 주인을 배신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 이유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녀들의 업무와 보수체계를 드려다 보면 요즘의 전문직 여성에 해당되었다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우 역시 지금의 전문직 여성을 뛰어넘어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조정신료보다 더 한 위치에 있었음을 볼 수도 있습니다. 미혼인 상황에서 당연히 고소득이었는데다가 요즘으로 치면 입주근무라 할 수 있어 먹고, 입고, 일용하는 물품까지도 지원받았기 때문에 보수로 받는 금전을 쓸 시간도 없었지만, 나름대로는 재테크를 하는 궁녀들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리해보면 이제까지 베일에 가려져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왕조의 궁녀들의 실체에 어느 정도 접근하고 있는 학술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딱딱하지 않게 서술하고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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