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 인 부에노스 아이레스 - 탱고를 찾아 떠나는 예술 기행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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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북소리]에서는 철학분야의 책을 많이 소개한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저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면서, 딱딱해지는 리뷰를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동병상련이셨으면 하는 얼토당토 않은 작은 소망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에는 전혀 다른 방향의 책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소개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분야 역시 제가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독자를 위한 리뷰라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신과를 전공하신 박종호선생님께서 발로(?) 쓰신 아르헨티나 탱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탱고’하니 역시 정열의 춤 아르헨티나 탱고가 퍼뜩 생각납니다. 저와 같이 근무하시는 동료위원님께서 읽으시면 분명  ‘땅고’라고 바로 잡아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도 아르헨티나 땅고를 추는 분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탱고라고 하고 있으니 음악이나 사교춤으로서의 탱고는 ‘탱고’로 본고향 아르헨티나 탱고는 ‘땅고’라고 적도록 하겠습니다.

 

탱고하면 일본의 국민배우 아쿠쇼 코지가 주연한 1996년작 <쉘 위 댄스>, 혹은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와 제이미 리 커티스가 장미꽃을 입에 물고 탱고를 추는 장면이 강렬하게 남는 1994년작 <트루 라이즈>가 먼저 생각납니다. 장님퇴역장교로 나오는 알파치노와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가브리엘 던이 CF음악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Por Una Cabeza에 맞춰서 탱고를 추는 장면이 인상적인 1992년작 <여인의 향기>도 꼽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인의 향기>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춤추는 장면을 보면 가브리엘 던의 등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하는 모습에서 땅고는 역시 어려운 춤이구나 싶습니다.

 

사실 오래 전에 사교춤으로 탱고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시던 교수님들께서 해외연수 나가시기 전에 춤을 배워보자 하셨던 모양인데 1년차 전공의였던 저도 따라오라 명을 받은 것입니다. 어느 집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아마도 남산 아래 회현동 어디쯤에 있는 호젓한 집 거실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2주일동안 은밀하게(?) 사사받았습니다. 하지만 임상실습을 제대로, 충분하게 하지 않은 탓에 흐지부지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꾸준히 했더라면 2년 전 유럽학회에서 열린 선상파티에서 솜씨를 제대로 보일 수 있었을텐데 많이 아쉬웠습니다.

 

춤 다음으로 탱고하면 당연히 음악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박종호선생님께서는 ‘라쿰파르시타’를 우리도 잘 아는 탱고곡이라 소개해주셨습니다만, 저는 토종 탱고음악이 먼저 생각납니다. 요즘에도 노래방에 가면 가끔 부르곤 하는 <서울야곡>은 현인선생님 곡도 좋지만, 전영씨 노래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2절 가사 “보신각 골목길을 돌아서 나올 때에 찢어버린 편지에는 한숨이 흘렀다.”라는 노랫말에 나오는 보신각 근처에 다니던 학교가 있었던 것하며, 전하지 못하고 찢어버린 편지에 대한 추억 등이 아직도 노래를 잊지 못하게 하는 모양입니다.

 

사설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박종호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겠습니다. 클래식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선생님께서 탱고음악에 관심을 가지신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던 모양입니다. “탱고의 아련한 멜로디와 독특한 리듬은 들을 때마다 늘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들었다.(15쪽)”라는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기획했던 2008년에 우리나라에 탱고에 관한 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사실은 2007년에 탱고 아카데미의 배수경대표가 쓴 <탱고>라는 책이 나와 있었습니다.)을 알고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러 2주간의 일정으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의 여류소설가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주일간 머물면서 탱고에 대하여 느낀 점을 녹여낸 소설이 일본에서 커다란 반응을 일으키면서 탱고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불러냈다는 이야기에 용기를 냈다고 합니다.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저자는 탱고가 태어나게 된 배경에서부터 발전해 내려온 발자취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면서 잘 알려진 탱고 바와 클럽을 중심으로 탱고공연을 직접 보면서 탱고와 탱고음악을 느끼고 그 느낌을 탱고의 역사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탱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장소에 대한 정보를 생생한 사진과 함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기회가 되면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탱고음악에 비중을 더 주고 있는 것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반면 탱고는 출줄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탱고를 출줄 모른다고 고백하면서도 탱고를 춤출 수 없다고 해서 탱고를 좋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탱고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 갈수록 그것은 춤이 아니고 음악이었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시어(詩語)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굳이 춤이 없다고 하더라도 탱고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음악 장르이며 또한 문학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노래라는 뜻이 된다.(15쪽)”이라고 해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탱고는 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귀로 하는 예술”이라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탱고가 19세기말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아르헨티나에 도착한 피끓는 젊은 남자들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춤추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음악보다 노래보다 춤이 먼저일 것 같고, 아무래도 탱고의 춤사위는 열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탱고의 춤사위는 그들의 몸부림이며, 탱고의 음악은 그들의 절규다. 섹스가 육체를 위로한다면 탱고는 영혼을 위로한다. 그래서 탱고는 슬프다. 섹스가 육체의 위안이라면, 탱고는 영혼의 섹스다.(37쪽)”

 

탱고곡 <외로움>의 가사에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이 방에서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그녀의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지만....”이라고 쓴 것처럼, 탱고곡은 대체적으로 사랑, 특히 실연을 노래한 것이 많은데 그 실패한 사랑을 오히려 풍자적이고 냉소적으로 노래함으로써 실연으로 절망하지 않고 관조하는 입장을 취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탱고곡의 이런 분위기는 우리나라 탱고음악에도 전해진 것 같습니다. 젊어서 즐겨 듣던 전영씨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그렇게 쉽사리 떠날 줄은, 떠날 줄 몰랐는데, 한마디 말없이 말도 없이, 보내긴 싫었는데,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방실이씨의 <서울탱고>에서는 더 완숙한 경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다 모두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같은 것, 그냥 쉬었다 가세요. 술이나 한잔 하면서, 세상살이 온갖 시름 모두다 잊으시구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라고 한 김소월님의 시 <진달래꽃>에서 처럼, 우리나라의 탱고곡의 분위기는 우리네 정서와 잘 어울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춤으로서 탱고에 대한 저자 나름대로의 느낌도 담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탱고바나 탱고클럽에서 직업 무용수들이 공연으로서의 추는 탱고를 감상하고 느낀 점을 적고 있을 뿐, 춤을 추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무도장, 밀롱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는 점을 아쉬워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아르헨티나 땅고를 즐기시는 분들이 그러실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은 이 땅에서 땅고를 배우고 땅고를 가르치는 라우님께서 땅고의 본고장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석달간 머물면서 촌각을 아껴 땅고를 배웠던 경험을 고스란히 풀어놓으신 <길을 잃은 후, 길을 찾다>를 읽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땅고에 관한 책들이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일하는 위원님은 “왜 땅고를 추느냐”는 땅고 선생님의 질문에 “땅고를 시작한 것은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취미로 아니면 그냥 여가선용으로 재미있는 삶을 위하여 시작하였으나, 지금은 배우면 배울수록 땅고는 인생인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땅고를 추기 위하여 상대를 안는 것 “즉 ‘안기’란 남녀가 가슴을 붙이고 안는 자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땅고의 에너지를 교류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안기’가 단순히 육체적 접촉이 아닌 에너지를 느낄 수 있는 더 큰 영감을 파트너에게 줄 수 있는 몸을 만들고 싶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탱고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는 고향을 떠나 먼 이국에서 외로움 속에서 절망하는 이방인의 눈물과 한이 서린 감정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2% 부족할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박종호선생님은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에필로그에서 “탱고 추는 남녀를 유심히 바라보면, 어느 순간에나 여자는 거의 한 발이며 그녀의 몸은 내내 남자에게 기대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 인생과 흡사하지 않은가. 사람은 혼자 살기 힘들다. 사람이 누군가를 만나서 인생의 탱고를 춘다면, 두 사람 둥 한 사람은 다리 하나를 들 수 있다.(428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탱고는 두 개의 심장과 세 개의 다리로 추는 춤”이라고 들어서 일까요? 하지만 저의 동료는 “탱고는 그 음악 속에서 네 개의 다리가 한 개의 심장이 되어 남녀가 서로 가슴을 맞대고 의지하여 추는 춤”이라고 정의하고 “음악 속에서 네 개의 다리가 한 개의 심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서로의 한과 혼과 희노애락이 철저히 가슴과 머리에 합일이 되지 않으면 출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에 따른 차이일까요?

 

배수경대표의 <탱고>에서 탱고의 역사, 탱고가 대중화되고 세계화되는 과정, 탱고의 구성요소 그리고 탱고가 춤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면, 라우님의 <길을 잃은 후, 길을 찾다>에서는 밀롱가를 중심으로 아르헨티나 땅고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길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춤으로서의 땅고에 대한 이해에 더하여 음악으로서의 탱고에 관한 이야기들과 더하여 보는 탱고를 즐기는 길을 안내하는 박종호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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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03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488
 
익스트림 머니 - 전 세계 부를 쥐고 흔드는 위험한 괴물
사트야지트 다스 지음, 이진원 옮김 / 알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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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척간두(百尺竿頭)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 따르면 “백 자나 되는 높은 장대 위에 올라섰다는 뜻으로, 더할 수 없이 어렵고 위태로운 지경을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유럽발 경제위기로 그야말로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라서 주목하고 있습니다만 정작 사태를 만든 당사국들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유럽발 경제위기는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의 지나친 복지정책이 국민들의 눈높이를 끊임없이 끌어올리다 자초한 측면을 꼬집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럽발 금융위기가 있기 전에도 세계는 2007년 시작된 미국발 프라임모기지 부실파동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아 극단적인 처방으로 겨우 회생국면을 맞고 있는 상황이라서 위기감이 더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당시로서는 생소하다 싶었던 서브프라임사업이란 “불행한 개인들에게 제공되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낮은 이자의 모기지 대출을 뜻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길거리로 나안게 만든 은행과 모기지 브로커들의 기만적이고 냉소적인 영업관행의 동의어가 바로 서브 프라임(7쪽)”이라고 세계적인 금융 파생상품과 리스크관리 분야의 전문가 사트야지트 다스는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익스트림 머니>는 바로 2008년 세계를 뒤흔들었던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파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을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골장터에 나가보면 속칭 야바우라고 하는 돈놓고 돈먹는 게임을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사위를 숨긴 종지를 맞추면 건 돈의 몇배를 되받는 게임인데 한눈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은 주사위 종지 맞추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주머니에 든 돈을 모두 털린 다음에서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부동산 투자이건 주식투자이건 간에 형태만 달랐지 위험을 안고 하는 머니게임은 현대판 야바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고 있는 탓에 섯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전설적인 투자자 제시 리버모어의 말을 읽다보니 더욱 새가슴이 되는 것 같습니다. “속이는 방법은 항상 똑같다.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것이다. 투기가 결코 변하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투기가 주는 매력은 똑 같다. 탐욕, 허세 그리고 게으름이 그것이다.(35쪽)” 서브프라임 모기지 때문에 길거리로 나앉은 사람들은 대부분 모기지 브로커의 유혹에 이끌려 평생 소원인 집장만을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꿈을 꾸었고, 다만 운이 나빠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 믿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이 한계를 능력이상으로 부풀리지 않는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책의 제목을 <익스트림 머니>라고 정한 이유를 서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장, 번영, 부 면에서 새로운 인공적 지위를 창조하는, 돈을 수단으로 하는 놀랍고도 위험한 게임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며 일하고 있다. 나는 이런 돈을 ‘익스트림 스포츠’에 빗대어 ‘익스트림 머니’라고 부른다. 과거에 평범한 것들의 가치 평가와 교환을 위해 사용되던 돈이 이제는 돈을 버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39쪽)”.이런 제목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담은 우리말 제목이 있을까 싶습니다.

 

크게 4개로 나뉜 글 가운데 ‘제1부 신뢰’에서는 유통을 매개하는 돈이 생겨난게 된 배경으로부터 돈이 발전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2부 시장근본주의’에서는 시장을 움직이는 이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피고, ‘제3부 연금술’에서는 과거 하찮은 쇠붙이를 이용하여 금을 만들어내려는 연금술에 비유하여 파생상품 등과 같이 돈없이 돈을 만들어내는 금융상품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을 설명하고 이런 금융상품이 결국은 세계경제를 위기로 몰아넣은 과정을 ‘제4부 금융위기’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면서도 필요한 부분만 추려내는 절차탁마가 돋보일 뿐 아니라 영화, 연극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하고 있는 비유로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아직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은 오히려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이 있다고나 할까요?

 

앞서 유럽발 글로벌경제위기를 인용했습니다만, 레이건 미국대통령의 복지국가에 대한 견해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아기와 같다. 한쪽 끝에서는 식욕이 넘쳐나지만 반대쪽 끝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 소화관이다. 복지의 목적은 가능한 한 존재 자체의 필요성을 없애는 것이 되어야 한다.(195쪽)” 짧은 인용문이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서브프라임모기지 사건에서부터 유럽발 경제위기에 이르기까지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수준에 걸맞는 정책운용이 중요하고 필요하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나누어 가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처음 인용했던 백척간두란 말은 百尺竿頭進一步 十方世界現全身(백척간두진일보 시방세현전신; 백척간두에서 걸어나가면 시방세계가 바로 온 몸이다)이란, 중국 선종의 장사경잠(長沙景岑)의 계송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위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지난 일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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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2 -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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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의 추측편을 담은 <추측과 논박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에 이은 논박편을 담은 <추측과 논박2>입니다. 추측은 과학철학의 제문제에 대한 포퍼의 견해를 담은 10편의 글을 담고 있으며, 논박은 다른 사람의 이론에 대한 포퍼의 비판적 견해를 담은 10편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각각의 글들은 독립되어 있지만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좋습니다만, 몇 개의 주제들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읽으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과학과 형이상학과의 관계, 심신과 언어의 관계, 사회과학, 여론, 유토피아, 역사주의 그리고 휴머니즘 등입니다.

 

과학 영역에서 의학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하는 문제로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의술로서의 의학은 과학 영역이라 하기 어렵다는 것이 자연과학자들의 의식에 각인되어 있는 듯 합니다만, 학문으로서의 의학은 방법론 등을 고려하였을 때 충분히 과학의 영역에 속한다고 것이 의학을 전공하는 분들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한 포퍼의 생각은 “의학은 기예(art)이고 기술이지만, 그것을 자연과학의 대표로 간주할 수 있다는 결론은 잘 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의학은 순수과학이라기보다는 응용과학이기 때문이다. 순수화학에 대해서 말하면, - 순수수학과는 다른 것으로서의 - 자연과학은 지식(scientia)이나 참된 앎(epitēmē)이 아니라는 데 나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자연과학이 기술(technē)이기 때문이 아니라, 억축(doxa)의 영역에 속하기-그라시가 제대로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신화오ㅘ 마찬가지로- 때문이다. 저 역시 의학은 순수과학이라기 보다는 응용과학의 범주에 두는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 ‘여론’의 진실성이 화제가 되고 있는 탓인지 ‘여론과 자연주의자의 원칙’이란 제목의 글을 집중하여 읽었습니다. 포퍼는 “민심은 천심(vox populi vox dei)이라는 고전적인 신화가 있다”라고 전제하면서 민주의 소리 신화에는 몇 가지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정된 정보밖에 얻을 수 없으면서도 많은 서민 대중은 자실들의 정부보다도 현명하고,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고매한 뜻에 따른 영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거나 여론은 매우 큰 힘을 가지고 있어 정부를, 심지어는 비민주적인 정부까지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는 어느 정도의 의혹의 마음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익명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여론은 무책임한 힘의 형태이므로 자유주의적인 견지에서는 특히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여론은 <조작>이 가능하기 때문에, 여론은 강력한 자유주의적인 전통에 의해 지나치지 않도록 조절되지 않으면, 자유에 대한 위험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론편의 첫 번째 글은 형이상학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에 친구들끼리 하는 이야기의 주제가 너무 지성적이지 않다 싶으면 화제가 너무 형이하학이니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하자 농담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음사전에서 ‘형이상학’의 뜻을 찾아보았습니다. ‘형이상학’은 “① 사물의 본질이나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思惟)나 직관(直觀)을 통해 연구하는 학문.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의 제목에서 유래한다. ② 초경험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을 형이하 또는 경험적 대상의 학문인 자연 과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③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에서, 비변증법적 사고를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베이컨 이래로 중요한 철학적 화두임에도 분명하게 정리된 개념은 아직 없으나, “과학은 그것의 관찰적 기초나 또는 귀납적인 방법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데 반해, 사이비 과학과 형이상학은 사변적인 방법이나 또는 베이컨이 말했듯이 <마음의 기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것(24쪽)”이라는 일반적 견해에 포퍼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형이상학의 사변적 방법이 과학의 기준으로 정의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같습니다. ‘형이상학’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논의를 포함하여 보다 깊이 따져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정도로 줄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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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1 - 과학적 지식의 성장 현대사상의 모험 6
칼 포퍼 지음, 이한구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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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주의적인 관점에서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옳다는 자신의 신념을 설명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하여 칼 포퍼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고금을 통하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검토하여 플라톤, 헤겔과 마르크스에 이르기까지 열린사회의 대척점에 있다고 보는 닫힌사회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의 주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1934년 발표한 <탐구의 논리>에서는 한 이론의 과학적 성격을 ‘반증가능성’을 기준으로 규정하였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현대 과학철학의 명제로 자리 잡게 된 반증가능성의 이론은 1963년 발간한 <추측과 논박>을 통하여 발전시켜 이 책은 그의 대표적 저서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예스24의 블로거 ‘루루의 책장’님은 이 책의 리뷰를 통하여 국내에 번역소개된 포퍼의 책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그 가운데 <추측과 논박>을 단연 압권으로 보았고, 포퍼의 대표저서로 한권만 꼽으라 한다면 이 책을 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과학적 사실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때 논리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하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한국사회의 경향을 우려하였습니다. 그 예로 황우석교수 사태를 들어, “한국 사람들이 칼 포퍼의 반증 가능성 정신만 잘 이해하고 있었어도, 검증을 하지 않고 병원에 드러눕는 것이나 사이언스지의 권위에 기대어 회피하는 것이 ‘과학’과는 거리가 먼 신앙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하였습니다.

 

저 또한 황우석교수의 줄기세포조작사건이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을 때 그 상황의 흐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적입니다. [북소리]에서 오래 전 소개드렸던 <시민의 과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605547>을 통해서 과학과 관련한 사건이 자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는 말씀과 함께, 이러한 움직임에 배태된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짚어본 바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 역시 ‘루루의 책장’님이 지적한 것처럼 포퍼가 정리한 과학적 시각에서 사태를 냉철하게 지켜보는 훈련이 되어 있다면 감성에 휩쓸려 스스로 혼란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추측과 논박>은 ‘과학적 지식의 성장(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이라는 부제가 의미하듯 역사를 통하여 인간이 과학적 지식을 축적해온 과정을 철학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과학 철학, 고대 철학, 칸트 철학과 자연과학, 변증법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 21편의 주요 논문과 강연문을 묶어 엮은 것입니다. 상권은 ‘추측’이라는 표제로 묶어 과학적 논리를 세우는 과정에 중심을 두었다고 한다면 하권은 ‘논박’이라는 표제로 묶어 과학적 논리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살피고 있다 하겠습니다.

 

먼저 서론에 둔 글은 1960년 1월 영국 학술원의 연례 철학강좌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관하여’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과학이라는 학문의 성과로 축적되는 인간의 지식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어 이 책의 서론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서론에서 포퍼는 고전적 경험주의와 고전적 합리주의로 정리되는 영국과 대륙 철학계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인 지식의 궁극적 근원에 관한 관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영국철학계는 모든 지식의 궁극적인 근원을 관찰에 두고 있는 반면, 대륙학계는 그 근원을 명석 판명한 관념에 대한 지적 직관에 둔다고 있다고 합니다.

 

스스로를 ‘경험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일종의 합리주의자이며, 또한 한 사람의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고 정의하고 있는 포퍼는 이 글을 통하여 고전적 경험주의와 합리주의의 차이점이 그들 간의 유사점에 비해 훨씬 적다는 사실과, 둘 다 모두 틀렸다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적었습니다. 포퍼는 직설적이고 명료한 논증과 광범위한 논의대상으로부터 핵심을 추출하여 문제를 제기하여 비판할 뿐 아니라 자신의 문제제기에 대한 반박에 대하여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다시 반박하는 적극적인 학문의 자세를 보여 주목받아왔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등 그리스 철학자들이 지식의 근원에 대하여 가졌던 생각으로부터 데카르트, 베이컨에 이르기까지 인식론의 전반을 살펴보면서, 저자는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지식의 가장 좋은 근거-가장 믿을 만하고, 실수하지 않게 하고, 의심이 나는 경우에 우리가 호소할 수 있는 최고 법정으로서 의지할 수 있고 의지해야만 하는 최선의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숨이 찰 정도로 긴 질문 대신에 “우리는 어떻게 오류를 검출하고 제거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앞선 질문에서 보는 이상적인 근거는 존재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그 근원이 우리로 하여금 실수를 저지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63쪽)

 

글 제목 ‘지식과 무지의 근원에 대하여’를 해제하면서 지식은 근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나, 무지의 근원이 과연 존재하겠느냐는 지적이 있었다고 글머리에서 밝힌 포퍼는 “우리의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반면 우리의 무지는 필연적으로 무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의 무지의 주된 근원이기 때문이다.(70쪽)”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모든 지식은 인간적이라는 것, 즉 지식 속에는 우리의 오류, 편견, 몽상, 소망 등이 뒤엉켜 있으며, 우리가 비록 진리에 이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진리를 탐구하려는 노력뿐임을 시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도 단정하고 있습니다.

 

<추측과 논박>의 ‘추측’편은 첫 글 ‘과학: 추측과 논박’이라는 제목의 글에 이어 ‘철학적 문제들의 본성과 그 과학적 뿌리’,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문제’가 이어지며, ‘칸트의 비판과 우주론’ 그리고 ‘과학과 형이상학의 지위에 관하여’ 등이 이어지고, 마지막 열 번째 글은 ‘진리, 합리성,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성장’이라는 글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서론에서 지식의 근원을 논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견해’에서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견해는, 본질주의, 구조주의 그리고 추측, 진리 그리고 실재라고 설명하는 불확실성입니다. 갈릴레오 철학을 구성하는 본질주의는 합리적인 의심을 뛰어넘어 사물의 본질적 성질을 발견하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질주의적 사고는 ‘사물의 숨겨진 본질을 발견할 수 없다는 구조주의적 과학철학자들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본질적 실재의 세계 가운데 관찰 가능한 현상의 세계만 우리가 인식할 수 있고 이렇게 인식한 현상의 세계를 기술적 언어 또는 기호적 표현의 세계를 통하여 지식으로 축적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우리가 보는 본질이란 현상을 통하여 우리가 볼 수 있는 본질의 일부에 불과하고 과학은 이러한 현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계산규칙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검증할 수는 없지만 엄격한 비판적 시험에 회부될 수 있는 추측을 세우고, 이를 검증하여 반증하는데 성공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실재를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세 번째 견해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하는데 있어 보다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로 돌아가라’는 제목은 처음에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하겠습니다. 과거의 전통은 가져다 쓸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즈음 세상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싶어서 입입니다. 저 역시 자주 인용하는 내용입니다만, 전통적인 경험주의 인식론이나 전통적인 과학사 서술에서는 ‘모든 과학은 관찰에서 출발해서 서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이론으로 나아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이컨의 철학적 사유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인데, 포퍼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초기 철학자들을 연구하면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연구하다보면 대담하면서도 매혹적인 사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포퍼가 예로 들고 있는 탈레스는 “지구는 배처럼 물 위에 떠 있으며, 지진이란 물의 움직임으로 인해 지구가 흔들리는 것이다.(275쪽)”라고 했는데, 탈레스는 아마도 바다에 열려 있는 그리스가 지구의 본질이라고 보았을 것이며, 역시 지진이라는 현상을 관찰한 결과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논리를 세웠을 것입니다. 따라서 땅이나 바다가 모두 지구라는 천체 안에 있는 현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탈레스의 생각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지구상에 흩어져 있는 대륙이 지진을 동반하면서 이동하는 대륙이동현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로 이해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포퍼는 베이컨 철학에서 말하는 관찰은 “관찰이 우리의 과학적 지식의 <참된 원천>이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과학적 진술이 왜 참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포퍼는 고대 그리스 철학이 찬란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비판적 논의의 전통에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정 학파에서 단순하게 스승의 교설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비판적 토론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전통이 그리스 철학을 발전하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통하여 이론의 창시자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이루어지고 변화와 수정을 통하여 새로운 사상이 세워지게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승의 역할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만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예전에 학교에 몸담고 있었던 것도 이유가 되었겠지만, 최근에 <은교>라는 영화를 보고서 마음 한켠에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그 무엇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은교>를 본 많은 분들은 노시인이 어린 은교를 통하여 새로운 작품세계를 열었다는 점에서 노시인과 은교 그리고 그 사이에 끼어든 젊은 제자의 삼각관계에 시선이 더 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이 작품에서 고민해야 할 부분은 은교가 노시인에게 미친 영향보다는 스승과 제자사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문하에 두고 오랫동안 수발을 들게 한 제자에게 문재(文才)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면 일찍 내보냈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우선 편하다는 이유로 거두었다가 세경이랍시고 통속 소설 한편 써 던져준 스승을 보면서 제자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지 치명적 결말로 달려가면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스승이 스승답지 못해서 잉태된 비극이 결말에 이르는 과정과 그 가운데 고민하고 무너지는 스승의 모습을 조금 더 세밀하게 그렸더라면 통속적인 분위기가 조금은 가시지 않았을까요?

 

글이 곁가지로 흘렀습니다. <추측과 논박>은 과학적 이슈가 대두될 때마다 몸살을 앓는 우리사회가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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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6-30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329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 - 뇌가 당신에게 보내는 메시지
김재현 지음 / 컨텐츠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기억을 공부하기 위하여 <왜 나쁜 기억은 자꾼 생각나는가>를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고를 때 글쓴이가 어떤 분인지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김재현선생님으로 되어 있습니다. -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자의 경력에 관한 정보는 구체적이지 않고 그저 “뇌를 공부하는 의사이자 비전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진료를 보기 위해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뇌와 비전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을 들려주고, 동기 부여를 하는 의사로 유명하다.”라고 되어 있는 탓에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끼리 보통 부르는 직함으로 부르겠습니다. 뇌의 어느 영역을 공부하시는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왜 나쁜 기억은 자꾸 생각나는가>라는 제목이 제 눈길을 끌었는데, 기억의 만들어지고, 저장되고, 다시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나쁜 기억이 특히 오래 가는지 그리고 그런 특별한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뇌과학분야의 연구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면 크게 실망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책에 담긴 내용을 보면 저자가 기억에 관한 뇌과학연구를 직접하고 있다고 보이는 점은 별로 없습니다. 다만 기억에 관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흥미있게 읽을거리를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형식의 책은 특히 일본에서 대중을 위한 읽을거리로 나온 것들과 흡사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오후에 시내출장에 나선 길에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저자의 글솜씨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도 젊어서 부터의 내공 때문일까요? 제가 19살이 되었을 때, 저자처럼 이데올로기를 정의할 수 있었던 것 같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데올로기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석하고 생각으로 풀어가는 정신활동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어요. 할아버지의 세상 걱정도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지요.(18쪽)”

 

저자는 아주 다양한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과학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학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흔히 뇌는 써야만 좋아진다고 말한다. 예컨대 꼭대기에 매달린 나뭇잎을 먹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보니 목이 길어진 기린처럼 용불용설이 뇌 계발의 핵심이라는 주장이다.(31쪽)“ 동물의 진화를 설명하는 용불용설은 근거가 없어 더 이상 진화론의 하나로 인용되지 않는 흘러간 학설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 영화, 의학잡지 등 기억에 관한 일화를 다룬 다양한 자료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는데, “나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관련 책을 구입해서 통독했다.(176쪽)”고 하신 저자의 고백처럼 저 역시 기억을 주제로 하여 책을 써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꾸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에서 좋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책의 구성을 보면 전체가 일정한 흐름을 통하여 연결된다기 보다는 개별 제목의 글들이 독립적으로 읽어도 무관하다고 보입니다. 기억의 형성에 관심 심도있는 내용을 접할 수 있는 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자기개발서의 한 종류로 보는 편이 더 적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놀리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책을 읽으면서 발견한 저자와의 공통점 하나입니다. 힘들고 지치거나, 혹은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위출될 때 저자는 ‘내가 전주 김재현이다’라고 속으로 되뇌면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제 경우는 스케일이 조금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양기화다’라고 주위분들에게 말했으니 말입니다. 그때 제 호언장담을 들었던 분들을 만나면 그때의 호기는 다 어디로 갔느냐는 말씀을 하시면 웃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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