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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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블로그 친구분께서 “교과서진화론 개정 추진위원회”의 압력으로 우리나라의 일부 고등학교 과학교과서에서 시조새 부분이 삭제된다는 뉴스와 함께 이와 같은 소식이 저명한 과학잡지 네이처에까지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한국이 창조주의자의 요구에 굴복하였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어 창피하다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http://blog.yes24.com/document/6490274). 창조론에서 발전한 지적설계론을 교과과정에 넣기 위하여 부단히도 노력해온 미국사회에서도 진화론과 견줄 정도의 위치마저도 아직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지적설계론자들이 입김이 우리사회에서 진화론의 증거가 되는 사진을 교과서에서 삭제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과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창조론의 입지는 축소되기 시작하였는데, 분자유전학적 기술이 발전하면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증거들이 그 부피를 더하면서 대안으로 내세웠던 창조과학마저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게 되자 지적설계론으로 변화를 모색하였지만, 이 역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하여 회의주의자들은 비과학의 영역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이 우리네 삶과 긴밀한 관련을 맺게 되면서 과학으로 포장한 비과학이 세인들의 눈과 귀를 가리지 못하도록 감시하기 위하여 태동한 회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그동안 대표적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의 <과학의 변경지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02415>를 비롯하여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9606250> 등을 읽으면서 회의주의적 사고를 키워야 할 필요에 공감해오던 터였습니다.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이라는 부제를 붙인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는 제목이 주는 묘한 뉘앙스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만, 저자인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가 회의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이한 것은 회의주의자들 가운데는 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은 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왕에 나온 회의주의관련 서적들의 번역에서 사용한 용어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과학, 변경지대의 과학 등의 용어는 사이비과학과 거의 과학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왕에 소개된 회의주의적 관점의 서적들은 비과학 혹은 변경지대의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이론의 논리적 배경을 소개하고 문제점을 비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에서는 비과학 혹은 변경지대의 과학의 사례를 먼저 소개하고 그와 같은 이론들이 우리 사회에서 발을 붙이게 되는 이유를 살피고 있습니다. 특히 미디어의 역할이나, 대중지식인들이 목적을 가지고 이와 같은 이론을 활용하는 사례가 있다는 점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왕의 회의주의관련 서적에서 이미 볼 수 있었던 사례들을 다시 읽게 되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이클 셔머와 같은 경우는 과학, 변경지대의 과학 그리고 비과학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하여 나름대로의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저자의 경우는 자신만의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제가 최근에 읽은 칼 포퍼교수가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제시하였던 반증가능성[자연학과 철학의 경계를 구분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을 담은

<추측과 논박2;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에서 과학과 비과학의 경계에 대한 포퍼의 개념을 읽을 수 있습니다]은 과학의 본질이 복잡다단해진 현실에서 공통적으로 적용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에 학문적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판단기준을 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저자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0611>를 인용하여 비판하면서 역사의 일반이론이 적절한 분석으로 검증될 수 있다는 다이아몬드교수의 주장에 대하여 역사과학을 통한 검증가능한 예측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은 칼 포퍼교수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에서 그 논리적 배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철학을 전공한 저자의 특성일수도 있겠습니다만, 방대한 자료를 인용하여 해설을 하고 있지만, 나름대로의 논리를 충분히 개진하고 있는가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특히 미국 펜실베니아 도버시의 법정에서 맞붙은 진화론과 지적설계론자들 사이의 대회전에 대하여 양측을 대표하는 입장을 각각 소개하고 결국은 정경분리를 규정한 미국수정헌법을 지켜 지적설계론자의 패배를 결정한 존스판사의 결정문을 인용하는 수준에서 글을 마무리한 점이라거나, 많은 회의주의자들이 지구온난화를 우려하는 주장이 과장되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지구온난화를 주장하는 편에 가까운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무리 부분에 적은 특정영역에서 누가 전문가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정 영역에서 누군가를 전문가로 볼 수 있으려면 다음 두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1) 그 사람은 비전문가보다 해당 영역에 관해 옳은 믿음을 더 많이(그리고 틀린 믿음을 더 적게) 지닌다. (2) 그 사람은 해당 영역에서 ‘상당한 양의 진리’를 알고 있다.(436쪽)” 일견해서는 똑 떨어지는 기준같아 보입니다만, 참으로 애매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것이 아닌 앨빈 골드먼이 제안하는 전문가 구분법 다섯 가지 역시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책읽기에 몰입이 어려웠던 점인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산만하다 싶은 서술과 특히 본문 중에 작은 글씨로 적어 넣고 있는 주석이 오히려 책읽는 흐름을 방해한 결정적인 요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문의 주석이 그렇게 중요하였다면 본문에 녹여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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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 밀란 쿤데라 전집 8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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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붙들려 애쓰고 있습니다. <느림>을 받아 들고는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64918 - 네 개의 연작이 나와 있습니다만, 첫 번째 작품에 가장 마음이 끌리는 편입니다.> 혹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을 떠올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것은 제가 너무 평면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는 고백이기도 하면서 쿤데라가 <느림>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은 메신저가 다소 충격적이란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리려 하는 것입니다.

 

쿤데라는 <느림>에서 삶의 엑스터시를 얻는 패턴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려 한다고 느꼈습니다. 쿤데라는 “성에서 하룻저녁 하룻밤을 묵고 싶은 욕구가 우리를 사로잡았다.”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몇해 전에 안동 한옥마을을 찾았을 적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고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그 옛날의 느낌을 오롯이 즐기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성으로 가던 밀란쿠와 아내 베라는 미친 듯이 질주하는 오토바이를 만나고 오토바이 탑승자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토막 현재의 시간에 매달려 엑스터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려움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 것도 겁나는 것이 없기 때문(8쪽)”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작가는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라고 전제하면서 느림의 즐거움이 사라진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한량들은? 민요들 속의 그 게으른 주인공들, 이 방앗간, 저 방안간을 어슬렁거리며 총총한 별 아래 잠자던 그 방랑객들은?” ‘방앗간’하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떠오르면서 상상의 날개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바로 쿤데라의 소설 <느림>이 바로 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파리의 고성에 머물게 된 주인공은 2백년 전 작가 비바 드농의 단편소설이 전하는 연애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스무살이 된 한 귀족이 극장에서 만난 T부인(귀족의 애인인 백작부인의 친구)이 공연이 끝난 뒤 집에 바래다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됩니다. T부인은 정부인 후작대신 젊은 귀족에게 부탁을 한 것인데, 부인의 성으로 향하는 마차 속에서 관능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마차의 흔들림에 미처 깨닫지 못한 접촉이 점차 느린 리듬이 반복되면서 두 사람은 접촉을 알게 되고 이야기가 엮이게 된다는 전개입니다. 얼마나 낭만적입니까? 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T부인의 남편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지만 뚱한 남편은 두 사람만 남기고 자리를 떠나게 됩니다. 남은 두 사람은 정원을 산책하다가 그 곳에서 정사를 나누게 되고 성의 밀실로 자리를 옮겨 사랑을 계속하는데, 이야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트릭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제목은 <내일은 없다>라고 합니다.

 

두 사람이 정사에 이르는 과정을 저는 그저 건조하게 적었습니다만 주인공은 그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상상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본능에 의해, 우리의 발걸음은 느려졌다.(41쪽)”고 적은 것을 보면, 이미 예정된 결과를 향하는 것이겠지만, 형식적으로는 밀고 당기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이처럼 남녀간의 사랑이 엑스터시에 이르는 과정이 지루해보일 정도로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나름 낭만이 있었다고 한다면, 현대의 남녀의 사랑은 빠르지만, 건조한 듯 하다는 비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이 호텔에서는 지식인 베르크와 뱅상, 체코 학자 체호르집스키가 각자 자존심과 명예, 쾌락을 쟁취하기 위한 긴박한 힘겨루기가 벌어지는데, 뱅상과 쥘리, 그리고 베르크와 임마쿨라타 사이에 정사는 서로의 감정이 어우러지기도 하고, 대립되는 가운에 벌어지기도 하는데, 모두가 지켜볼 수 있는 수영장가도 불사합니다. 이 정사를 체호르집스키가 지켜보는 것은 일부 현대인이 좋아하는 관음증의 일면을 시사하는 점이라 보입니다.

 

네 쌍의 남녀의 관계는 직설적이고 퇴폐적이며 단선적이기도 한데, 저자나 번역자 역시 걸쭉한 표현을 마다하지 않은 탓에 차마 옮겨 적기가 민망할 것 같은 것은 제가 구식인 탓일까요?

 

사족일 듯합니다만, 표지그림을 빠트릴 수가 없습니다. 쿤데라 전집의 모든 작품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쓰고 있습니다. <느림>의 표지 이미지는 마그리트의 「피레네 산맥 위의 성」이라고 하는데 매우 친숙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보다는 영화 <아바타;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03028>에서 중력을 무시하고 하늘에 떠 있는 바위와 아주 흡사하다는 생각입니다. 상세한 설명은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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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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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PD를 처음 만났던게 언제던가.... 그동안 거의 편식에 가까운 책읽기를 해온 탓인지 그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인사를 나누고서야 그 분의 정체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일단은 그 분의 방대한 독서량과 글솜씨가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바꾸는 책읽기>는 처음 읽게 되는 그분의 글입니다.

 

마침, 책읽기에 대한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어서인지, 공감의 고갯짓은 물론 때로는 정말 그럴까 하는 고갯짓까지 나름대로의 다양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지나갑니다. 일단 그녀의 다양한 영역의 책읽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장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와 같이 난해할 수 있는 과학, 철학 부문의 책에서부터 고금을 넘나드는 문학서적은 익히 알려져 있는 작품도 있지만 생소해 보이는 작품까지도 망라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글은 읽은 책을 바탕으로 한 사유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직업적 특성(?)을 활용하여 취재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을 마침맞게 엮어 넣어 감칠맛이 날뿐 아니라 인간냄새가 느껴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책읽기에 관하여 주변으로 흔히 받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책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1.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요? 2.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요? 3.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요? 4.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요? 5. 책이 쓸모가 있나요? 6. 책의 진짜 쓸모는 뭐죠? 7.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요? 8.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요? 그리고 보니 저도 역시 비슷한 질문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한 것 같습니다.

 

서평에 관한 저자의 생각에 눈이 번쩍 떠지는 느낌이 있었기에 옮겨봅니다. “서평은 아마추어의 예술입니다. 서평은 자신의 생각을 써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러워 보여도 진실된 마음이 담겨 있으면 됩니다. 서평은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서평이 누군가의 맘과 통한다면 너무나 좋습니다. 나와 그 누군가는 친구가 된 셈이니까요.(167쪽)” 아직 주관이 바로서지 못해서 서평을 쓸 때마다 오락가락하는 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좋은 말씀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읽기’에 대한 저자의 제안은 마침 최근에 제가 경험했던 바가 있어 특별한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바로 대학 신입생때 읽었던 한스 카로사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32807>을 다시 읽으면서 대부분은 전혀 새로운 내용이지만 그래도 기억의 한 구석에 남아있던 부분에 대한 느낌이 다시 강렬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끔은 저자의 이념적 배경이 읽히는 생각들을 굳이 적었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만,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74쪽)”고 한 해고노동자의 절절한 이유가 가슴에 와 닿습니다. 평생 직장으로 믿었던 회사에서 거리로 내쳐진 그처럼 저 역시 큰 그림을 그려나가던 직장에서 쫓겨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계약직 공무원이었던 제게 인사권을 가진 기관장께서 부르시더니 “당신이 일을 참 열심히, 잘 한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당신의 상사가 당신과 같이 일할 수 없다고 하니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그 상사는 임용과정에서 저와 경쟁하던 분이었습니다.

 

정말 마음을 콕콕 지르는 이야기들이 넘쳐나는 글 가운데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책은 이 사회의 논리 안에서 난 정말 잘 나가고 있어, 라도 생각한 사람들이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 사회가 이대로 가면 곤란하다고, 이 세상엔 바꿔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해 보려고 정력을 쏟아 부은 것에 가까웠습니다.(106쪽)” 그리고 보니 제가 세상에 내놓은 책들, <치매, 나도 고칠 수 있다>나 <눈초의 광우병 이야기>는 작가가 생각하는 바로 그런 논리로 쓰기 시작했던 글들이 세상에 빛을 본 셈입니다.

 

끝으로 저자의 말대로 책을 읽다가 새로운 읽을거리를 발견하는 일은 책읽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와는 다른 해석을 읽게 되면 그 이유를 찾아들어가는 것 또한 책읽기의 즐거움이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에서 존재의 가벼움, 무거움만큼이나 중요한 키워드로 삼은 것은 ‘키치’였다고 적었는데, 사실 이 책을 논한 북콘서트에서도 ‘키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두고 상당한 시간이 할애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키치’라는 단어를 생경스럽게 느꼈었다는 고백을 드립니다.

 

쿤데라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399쪽)”라고 기치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등장한 키치라는 개념은 “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키치예요!(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12쪽)”라는 사비나의 말에 더욱 헷갈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테레사나 토마시와는 철학이 사뭇 달라 보이는 그녀의 삶의 궤적을 단적으로 정리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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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 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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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로 된 책의 리뷰를 쓰는 일은 참 난감하다. 전체를 읽고 하나로 적어야 하나 아니면 한편씩 적어야 하나 망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묶어서 때로는 각각 적어보기도 합니다만,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각각 적어보기로 하겠습니다. 특히 기억에 관한 이야기들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쿤데라는 “내 이력서 속 자아로부터 그 어떤 인물도 도출되지 않았다.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라고 말해 자신의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스토리가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창작임을 밝히고 있습니다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장면 혹은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프루스트가 오감을 통해서 느낀 것들을 빠트리지 않고 적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기억을 통해서 그려지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정밀하고 정확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번 이야기에서는 화자가 주인공으로 돌아와있습니다. 주인공이 글쓰는 직업에 관심을 가지고, 가능성을 따져보는 과정이나, 처음에 호의적이지 않던 부모님이 긍정적으로 선회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의 핵심은 지난 이야기의 말미에 맛을 보였던 스완과 오데트의 딸 질베르트에 대한 주인공의 사랑이 부침을 겪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파리 사교계의 일반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사이에 질베르트에 대한 자신의 연모하는 마음을 엮어 넣으면서 스완가의 관심을 받게 된 점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질베르트에게 향하는 연모의 정을 스완가의 사교모임에 초대되면서 자연스럽게 키워나가는 과정, 그리고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질베르트의 의외의 모습으로 야기되는 작은 갈등이 확대되면서 절교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지난 이야기에서 스완씨가 오데트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극심한 질투와 고통을 겪은 끝에 결혼에 이르게 되는 것과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다소 충격적인 것은 오데트의 감춰진 모습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던 스완씨가 새로운 사랑을 만나게 된다는 귀띔이 나오고 있는데, 다음 이야기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집니다. 즉 주인공은 스완씨처럼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아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주인공이 천식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는 까닭에 스스로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성격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저자는 주인공이 질베르트의 관심을 얻게 되는 지난한 과정을 참을성 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내가 그녀의 양친에게 얼마나 탄복하고 있는지 이야기하자, 질베르트는 (…) 무언가 숨기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톡 쏘아붙이고 말았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걸!’하고 나서, 내 곁을 물의 요정처럼 스르르 지나치며 까르르 웃어 댔다.(93쪽)” 이렇게 시작한 관계가 그녀의 집에서 열리는 다과시간에 초대받는 관계로 그리고 오데트와 개인적인 만남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녀의 육체에 끌리는 나 자신을 느껴 그녀에게 말했다. ‘자아, 빼앗지 못하게 해봐, 누가 기운 센지 내기하자구.’ 그녀는 편지를 등쪽으로 감추었다. 나는 그녀의 목 뒤로 손을 돌려...(97쪽)”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킨십이 이루어지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남녀관계는 예상치 않은 복병을 만날 수 있고, 이런 상황을 넘어야 해피엔딩이 되는 것인데, 눈에 콩깍지가 쓰였을 때는 대범하게 넘어가는 상황이 깨름칙한 무엇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되짚어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의 기일에 오페라의 발췌를 들으러 나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주인공은 놀라게 되는데, 평소 주인공의 마음에 드는 것, 양친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상관없다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시침을 뚝 따고 밀어붙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158쪽, 170쪽) 질베르트의 이런 모습에 대하여 저자는 “질베르트는 확실히 외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두 질베르트가 있었다. 그 부모의 두 성질은 단지 그녀의 몸 안에 섞여있는 것만이 아니었다. 두 성질은 서로 다퉈 그녀를 빼앗고 있었다.(200쪽)” 현대 정신의학에서 해리성장애로 정리되는 성격의 단면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 보입니다.

 

이날 사건은 주인공의 마음 한 구석에 작은 구름을 남겨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할아버지 기일에 일어난 사건 이래 나는 늘 마음속으로 물었다. 질베르트의 성격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이 아닐까, 남이 하는 것에 대한 무관심, 그 슬기로움, 그 침착, 끊임없는 그 온순함은 오히려 그녀가 자존심에서 억지로 보이지 않고 있는 매우 격렬한 욕망을 숨기고 있어, 그 욕망은 어쩌다가 방해받았을 때 외에는 돌연한 항거로 드러나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205쪽)” 이런 의혹이 점차 확대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조금씩 생기는 계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든 남녀의 헤어짐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그런 절절한 느낌을 손에 잡힐 듯이 그리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떨림을 느끼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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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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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조금 생뚱맞은 것 아니냐 하시겠습니다만, 추리소설을 소개하려 합니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주옥같은 추리소설을 탐독하신 분들도 많을 것이고, 지금도 추리소설에 매혹되어 있는 매니아 분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특히 이런 분들은 선호하는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읽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추리소설에 홀려있던 시절이 있었지만, 특별하게 챙기는 작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저 두루 섭렵한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특별한 이유없이 추리소설과 거리가 생겨 있었습니다.

 

그런 저의 눈길을 끈 작가가 생겼습니다. 바로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추리소설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2001년에 발표한 처녀작 <13계단>으로 심사위원 모두의 일치된 의견으로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상인 제 47회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13계단>은 보호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사형이 확정된 사카키바라의 원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교정관 난고와 가출옥한 준이치의 활약으로 문제의 해결에 이르는 추리소설로 사형제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8761).

 

<제노사이드>는 저자가 6년여의 공백을 깨고 2011년에 발표한 신작으로 야마다 후타로상과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하고 나오키상과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후보에 올랐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스터리소설부문에서 랭킹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는 소개이고 보면, 분명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 제 입장에서 이 작품이 통상적인 수준의 추리소설이었다면 개인적으로 독후감을 쓰고 말았을 터인데, 굳이 [북소리]에서 소개하는 것은 이 소설을 통하여 같이 생각해볼 점이 분명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선 제목 ‘제노사이드(genocide)의 뜻을 위키백과에서 검색해보았습니다. ‘집단학살(集團虐殺)’이라 번역하고 “그리스어로 민족, 종족, 인종을 뜻하는 geno와 살인을 뜻하는 cide를 합친 말이며, 고의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범죄를 일컫는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집단 학살의 정확한 정의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으나, 법적인 집단 학살의 정의는 1948년 국제 연합 집단 학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CPPCG)에서 나온다. 이 협정 2조를 보면 집단 학살을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한 모든 행위를 일컫는다. 구체적으로 집단의 일원을 살해하거나 심각한 육체적ㆍ정신적 위해를 가하는 것, 고의적으로 육체적 파멸을 의도한 생활 조건을 강제하는 것, 집단 내 출생을 막는 것, 집단의 아동을 다른 집단으로 강제 이주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는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로는 제2차 세계대전기간 동안 나치 독일이 유태인 등을 대상으로 저질렀던 집단학살을 떠올리게 됩니다만, 그밖에도 수많은 집단학살의 사례들이 있다는 사실은 제레드 다이아몬드교수가 <3의 침팬지>에서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확인된 집단학살의 사례들은 15세기 이래 아주 최근인 20세기 말까지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남극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일어났고, 또 일어날 가능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교수는 집단학살의 원인이 되는 동기를 분류하는 일은 그 정의만큼이나 어렵지만 이데올로기적 혹은 심리적 동기가 작용하는 경우와 이데올로기 대립의 유무에도 불구하고 토지와 권력을 둘러싼 현실적인 이해대립이 있는 경우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더 세분해보면, 군사적으로 우세한 세력이 그보다 약한 세력의 토지를 점령하려다 저항을 받았을 때 발생하는 경우, 다민족 사회의 내부에서 장기간 권력투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말살함으로써 최종적인 해결을 꾀하는 경우, 14세기에 확산된 페스트의 속죄양으로 유대인들이 기독교도들에 의하여 희생된 경우처럼 무력한 소수가 살해자의 욕구불만에 의하여 희생이 되는 경우가 있겠고, 끝으로 나치 독일이나 십자군전쟁처럼 인종적, 종교적 박해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교수는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다른 인종과 종교와 민족 집단의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회정의의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대규모의 살인 없이 함께 살아가고 있고, 집단학살을 염려하고 있는 제3자의 반응에 의해 중지, 축소 또는 방지되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한편,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대량학살의 가능성은 대규모 핵전쟁과 환경파괴에 의하여 지구 생물이 대량으로 멸종될 수도 있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다카노 다즈아키가 우려하고 있는 <제노사이드>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그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신인류의 등장에 의한 현생인류의 멸망 가능성입니다. 이야기는 미국의 백악관에서 매일 아침 이루어지는 정례브리핑에서 국가정보장 왓킨스가 대통령 번즈에게 “인류 멸망의 가능성, 아프리카에 신종 생물 출현”이라는 제목의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열대 우림에 신종 생물 출현. 이 생물이 번식하게 될 경우, 미국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전 인류 멸망이라는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사태는 1977년 슈나이더 연구소가 제출한 「하이즈먼 리포트」에서 이미 경고되었다.(11쪽)”

 

저자는 서두에서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바짝 당겨놓습니다. 이어서 미국정부는 콩고에 출현한 신종생물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가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본에서는 이 신종생물을 구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참여하고 있는 사람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진행되게 됩니다. 이야기는 미국 본토에서 시작해서 신종생물제거작전에 투입될 요원들을 이끌 조너선 예거가 선발되어 훈련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과정을 따라서 이라크, 남아프리카를 경유하여 사건의 현장인 콩고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미국 정보국의 감시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예거의 아들이 앓고 있는 폐포 상피세포 경화증이라고 하는 희귀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물을 개발하는 작업이 진행됩니다. 보통 신약은 효능이 있는 물질을 발굴하여 시험관에서 효능시험과 안전성을 조사하고 쥐나 개와 같은 동물을 대상으로 하여 치료용량을 투여하였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확인하는 전임상시험을 진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유효성과 안전성을 확인하게 되면 정상인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사람에서의 안전성을 확인하고 다시 환자를 대상으로 효능을 검정하는 임상시험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은 짧게는 6년에 마칠 수도 있지만 10년 이상 걸리는 것이 보통이고 최장 21년이 걸린 약물도 있다고 합니다. 이토록 복잡한 신약개발과정을 한 달 이내에 마칠 수 있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기에 특별한 트릭을 숨겨 기한 내에 완성이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콩고의 현장에 도착한 예거는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신종생물이 바로 신인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데, 작가가 미리 치밀하게 배치한 장치에 따라서 신종생물 제거의 미션을 받고 투입된 요원들 모두가 신인류를 구출해야 하는 상황으로 반전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왜 신인류에 의한 현생인류의 멸망을 화두로 가지고 왔는가 하는 문제를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최근에 출간된 브라이언 M. 페이건교수의 작품 <크로마뇽>에서는 기후변화가 현생인류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이 멸망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현생인류가 구인류를 집단적으로 공격하여 사라진 것이라는 가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저자가 하이즈만 보고서를 인용하여 예언하고 있는 신인류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현생인류에서 진화한 다음 세대의 인간은 대뇌 신피질이 보다 크고 우리를 훨씬 능가하는 압도적인 지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지적 능력을 올리비에는 이렇게 상상했다. ‘제4차원의 이해, 전체의 복잡한 상황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는 점, 제6감의 획득, 무한히 발달한 도덕의식 보유, 특히 우리의 지적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특질의 소유.’(247쪽)” 작품을 통하여 신인류의 특징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신인류가 우리를 멸망시키려 들 것이라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현생인류와 신인류의 생태적 지위가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현생인류가 있는 한 신인류의 생식장소가 확보되지 않을 뿐 아니라, 신인류가 보는 현생인류는 같은 종끼리 살육의 나날을 보내는데다가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과학기술만을 가지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위험한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북경원인이나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을 걸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작가 역시 침팬지들 사이에서도 다른 침팬지를 살해하여 살을 먹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만, 집단학살은 동물에서는 볼 수 없고 인간에서만 보는 특징이라고 하지만,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3의 침팬지>에서는 역시 유인원에서도 집단학살이 일어나고 있는 사례들을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인원단계에서 이미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형질이라고 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보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도 장치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바로 겐토를 도와 신약을 개발하는 한국젊은이 정훈이 소개하는 한국적인 감성 ()’입니다. 바로 이 ()’이 신인류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는 미지수로 남겨놓기는 했습니다.

 

저자가 신인류가 등장한 장소로 아프리카를 선택한 것은 집단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라는 점도 작용하였을 것이나 현생인류가 처음 등장한 곳이 아프리카로 알려져 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이즈만 보고서에 담은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다음 세대의 인류가 출현할 수 있는 장소는 문명국이 아니라 주변과 교통이 단절되어 있는 미개척지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지역에 사는 소수 집단에서는 개체 수준의 유전자변이가 집단 전체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247쪽)”얼마나 정교한 이론입니까?

 

그런데 신인류를 구출하고 살아갈 곳으로 일본인과 일본을 선정한 것은 상당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 핵폭탄으로 집단학살의 피해를 입은 유일한 곳이라는 점도 있지만, 사실은 역사를 통하여 집단학살의 주도한 국가라는 상징을 떼어낼 수 없는 나라가 일본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저자는 이 작품을 기획하고 가다듬는데 25년의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실제로 작품을 전개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문분야로 우선 떠오르는 것만 해도 무기체계와 인터넷관련 분야, 정보분야, 지구물리학, 북미와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의 역사적 배경, 해양생태학, 무역, 제약 및 의학분야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이런 요소들이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있어 전혀 무리가 없어 녹아들어 걸림이 없으니 정말 대단한 작품을 만났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신인류의 등장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도 된다 생각되어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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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10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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