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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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두 아들을 이끌고 낯선 땅 미국에서 생활을 시작할 무렵이니 벌써 20년도 넘어 정말 오래전 일입니다. 병원에서 막 배우기 시작한 일도 벅찼지만 가족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큰 아이 역시 말도 통하지 않는 학교생활이 힘겨운 눈치였습니다. 그나마 작은 아이는 세 살을 넘겨 아직 어린 탓인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작은 아이와 집에 있는 아내였습니다. 작은 아이가 낮잠에라도 들면 멍한 느낌이 들고 창문 밖 하늘에 비행기라도 지나가면 서울 생각 때문에 미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몇 달이 지난 다음에서야 넌지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향수가 지나치면 병이 될 것을 걱정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우리말을 쓰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만들면서 아내의 문제도 사그러들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도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면서부터 주말여행을 떠나면서 뜸해지기는 했습니다만, 결정적인 시기에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은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만, 기억에 든 것이 많은 어른들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낯선 타향에 머물게 되면 고향에 대한 기억이 점점 더 생생해지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쿤데라는 다른 의견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뒤에 남겨둔 시간이 거대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되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목소리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격언은 자명한 이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틀렸다.(…) 향수가 가장 강할 때는 소년기, 즉 지나간 삶의 부피가 대단히 적을 때다.(82쪽)” 밀란 쿤데라의 <향수>는 소련 공산주의에 점령당한 조국 체코에서 구속되는 삶을 견딜 수 없어 망명을 선택한 이레나와 조제프가 붉은 군대가 물러나고 공산당이 몰락한 조국에 돌아가서 느끼는 생경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쫓기듯 떠난 체코 망명객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공산당이 점령하고 있는 체코로 돌아가는 꿈을 꾸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레나는 여기에 더하여 낮만 되면 조국의 풍경의 환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느닷없이 떠올랐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것입니다. 상사와 이야기하고 있는 도중에 들판으로 난 길이 섬광처럼 나타거나 전철에서 떠밀리는 순간 갑자기 프라하의 녹지대에 있는 조그만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이와 같은 짧은 고향의 이미지는 무언가 부족한 듯한 그녀의 정신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지만, 그녀는 해방된 조국에 돌아갈 결심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같이 체코를 탈출한 남편 마르틴이 죽은 다음 어렵게 버틸 때, 스웨덴에서 온 남편의 사업파트너 구스타프와의 만남은 그녀에게는 구원과 같은 것이었고, 구스타프가 체코에 사업을 열게되면서 프라하에 돌아가게 되는 이레나는 돌아온 고향이 생경하고 남아있던 친구들 역시 예전같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간극은 사람들의 생각까지 바꾸는 것일까요? 아니면 같은 공간에서 힘든 시간을 같이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묘한 적의(敵意) 같은 것이었을까요? 하지만 작가는 핏줄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을 경계한 듯 합니다. 고향의 동무들은 그들이 기억하는 것을 그녀도 기억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우리는 같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파리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하여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친구들을 초대한 만찬에서 친구들은 이레나가 준비한 보르도산 포도주를 거부하고 체코 맥주를 선택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변한 이레나의 모습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수 김광남은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로고...“하고 노래불렀는지 모릅니다.

 

한편 프라하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만난 조제프는 돌아온 고향에서 철저한 이방인 취급을 받게 됩니다. 공산당에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조제프는 한때 위험인물로 몰리기도 했지만, 친구 N의 도움으로 혐의를 벗고 결국은 덴마크로 망명하게 되는데, 당원이었던 형의 가족들의 눈에 조제프는 가족을 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쫓아 달아난 탕아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레나나 조제프 두 사람은 병이 될 지경으로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돌아온 고향은 물론 가족까지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 비극적 현실을 작가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서로를 연결하는 고리가 없이 등장하는 것 같은 이레나와 조제프는 젊어서 만났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게 되는데, 이레나는 그때를 기억하고 있지만, 조제프의 기억에 이레나는 존재하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드러나게 됩니다.

 

저자는 떠나온 조국 체코에 대한 두 사람의 감정을 설명하면서 곳곳에서 오디세우스가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여정과 그가 고향에 도착해서 얻은 새로운 감정들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있는 동안에는 오직 자신의 귀환만을 생각했지만 일단 고향에 돌아오자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삶, 그 삶의 본질, 그 중심, 그 정수가 이타카 밖에, 이십년 동안의 방랑 속에 있음을 깨닫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쿤데라의 <향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생각이 주목되는 이유는 우리사회에 이들과 같은 분들이 같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에 있는 고향을 떠나올 때는 각자 사정들이 모두 달랐겠지만, 그 분들이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생각과 생활의 차이는 어쩌면 <향수>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겪는 차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되돌아갈 수 없는 그분들을 우리 사회가 보듬어 안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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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건축의 이해 - 신학으로 건축하다
이정구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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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하면서 유적을 찾다보면 오래된 사찰이나 교회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천년고찰’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절집을 자주 보게 되는데, 물론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전란이나 실화로 소실되고 중건한 경우도 있지만, 조촐하면서도 오래된 건물을 만나게 되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진에서 소개하는 교회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학회때 찾았던 마치시 성당입니다. 마침 수리중이라서 제대로 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교회 전체를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얼마나 멀리까지 걸어야 했는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하남시 구산동에 있는 구산성당은 좁은 마당 끝에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조촐한지 쉽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절집의 경우는 초등학교 수학여행에서부터 만날 수 있고, 또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설명을 듣기 때문에 어떤 점을 주목해서 봐야 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교회당의 경우는 잘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저만 그랬던 것은 아닌 듯,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1755>에서 주인공이 휴양차 노르망디 해변으로 가는 도중에 유명하다는 발베크 성당을 찾았다가 실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발베크 성당에서 꼭 보았어야 할 유물들을 제대로 챙겨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정구교수님은 <교회건축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기 쉬운 교회건물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신학으로 건축하다’라는 부제가 있는 것처럼 교회건물에 담겨 있는 신학적 의미까지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으니, 교회나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도 미처 모르고 계셨다면 교회건물에 담겨있는 신학적 의미를 알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며, 다니지 않는 분들도 혹시 교회나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이런 의미들을 눈여겨 살펴보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저자께서는 이 책이 여행자들을 위한 교회건축물 해설서가 아니며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될 건축신학서로 만들어졌으며, 나아가 건축학도와 신학도들이 교회건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지만, 텍스트를 이용하는 독자 나름대로의 이용법이 있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책은 교회건물의 구조에 따라서 1. 예배공간, 2. 문, 3. 통로, 4. 벽과 창, 5. 천장과 지붕, 6. 공간위계, 7. 죽은자의 공간 등으로 나누어 그 신학적 의미를 살펴가고 있습니다. 당연히 국내외 유명 무명의 교회와 성당의 사진을 적당한 공간에 곁들여 이해를 돕고 있는 점도 돋보입니다. 저 역시 가톨릭계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는 주말에 교회에 출석한 바 있으니 교회가 전혀 생소한 공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저자가 해설하는 신학적 의미와 연결하여 다시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특히 ‘문’의 의미를 새기는 부분입니다. “문은 건물에 들어오는 자들에 대한 친절과 환영의 표지이며, 방향을 알리는 안내표지이다. (…) 선택받은 자만이 이 문을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 이 문을 들어오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원받은 자로 선택받게 된다는 메시지도 전한다.(59쪽)”고 적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는 정교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 적지 않게 배타적인 해석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린 세상을 추구하는 요즈음 닫힌 세계를 향하는 해석이 아닐까 싶습니다. 커다란 문을 활짝 열어 교회에 대하여 잘 모르는 세상 사람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교화하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해석할 수는 없었을까요?

 

얼마 전에 교회를 알리는 십자가 표지의 네온사인을 야간에 켜지 않기로 했다는 뉴스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조금 높은 곳에 올라 한밤의 도시를 내려다보면 눈길을 끄는 모습 가운데 하나가 셀 수 없이 흩어져 있는 십자가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당의 모습을 보면 높은 첨탑에 벽돌로 지어진 바실리크 양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의 고유의 건축 양식과는 다른 모습이라서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편으로는 생경하다는 느낌도 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물에 뜬 기름처럼 여전히 우리 생활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성공회 서울 대성당의 건물은 양식으로 되어있지만, 지붕을 붉은 기와로 올려 절충을 꾀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하겠습니다. 교회와 성당이 우리 문화에 어떻게 녹아내릴 것인가는 기독교계와 가톨릭이 풀어가야 할 숙제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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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눈물을 닦다 - 위로하는 그림 읽기, 치유하는 삶 읽기
조이한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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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마다 열리는 스포츠 제전이 3일 뒤 런던에서 그 화려한 막을 열릴 예정입니다. 스포츠와 눈물을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불운에 눈물을 흘리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승리를 맞는 순간 그 감동에 혹은 그동안 인내해온 고통에 대한 상념이 교차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선수도 그렇지만 그 선수를 지켜보는 관중이나 시청자 역시 저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과학자는 거울세포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경기 내내 선수와 함께 한 긴장이 감동으로 연결되면 절로 눈물이 쏟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소설, 영화, 연극과 같이 스토리가 있는 문학과 예술 부문에서 독자가 혹은 관객이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아주 많습니다. 음악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적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감정이 이입되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감정이 점차 고조되면서 울컥하는 순간에 이르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런데 적어도 제 경우는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미술작품을 감상하면서 눈물을 흘린 사람들과 그 분들의 눈물과 인연이 된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미술사가 제임스 엘킨스교수의 <그림과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35742>을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림을 대하면서 눈물을 쏟았다는 분들이 왜 그렇게나 많은지....

 

그림과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또 하나의 책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에세이라서 아마도 눈물과 인연이 있는 그림에 관한 소회를 담은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미술사를 가르치는 조이한교수님의 <그림, 눈물을 닦다>입니다. 그런데 ‘위로하는 그림읽기 치유하는 삶읽기’라는 부제가 달린 것을 보면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이 미술을 통해서도 치유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고달픔에 상처 난 마음을 감추고 ‘난 괜찮아’하는 최면으로 버티는 것보다는 자기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다는 출판사의 주장이고 보면 그림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눈물을 흘린다거나 하는 등 감정의 풀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눈물을 닦는 것’이 아니라 ‘그림감상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도록 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 역시 엘킨스 교수의 <그림과 눈물>을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에곤 실레의 작품 <해바라기>를 처음 보면서 눈물을 쏟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을 것만 같아서 도망치듯 시작한 독일 유학이니 낭만은커녕 하루 버티기도 힘들어 오기로 버틸 때 만났던 <해바라기> 앞에서 저자는 바로 자신을 만난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여름 내 쏟아져 내린 뙤약볕 아래서 마지막 수분 한 방울마저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해바라기는 서 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이파리. 까맣게 타 버린 씨앗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버티고 선 모습. 해바라기의 자존심. 내가 거기서 본 것은 해바라기가 아니라 내 모습이었다.(204쪽)”

하기야 제가 보기에도 굵은 해바라기 줄기에 축 늘어져 있는 꽃과 말라붙은 이파리는 마치 신산한 삶에 굴복하고 목을 매단 채 늘어져버린 주검 같다는 느낌을 받았으니 힘들고 어려울 때 만난 이 그림이 저자에게 준 의미를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목을 읽으면 마치 눈물에 관한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소설, 시, 영화, 사진, 조각 등 전방위적 예술작품을 이끌어다 눈물, 즉 고단한 삶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것들이라면 어느 것이든지 그녀의 관심이 미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품 뿐 아니라 작가의 생애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이해를 넓힐 수 있는 사실들을 인용하고 있어 저자는 역시 ‘미술’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엔소르의 <가면>을 설명하면서 인용한 사진작가 질리언 웨어링의 사진작품 <나는 절망적이다>의 소개에 이어 ‘감정노동’에 대하여 설명하면 자본주의의 키치적 비유를 끌어온 것처럼 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사실 서비스에 종사하는 분들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직무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주장에 대하여 저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업무를 수행하면서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일을 하지만 누군가는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업무관련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그 일을 그만두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일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놀고 있다면 이는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미술작품을 해설하면서 때로는 설명에 앞서 각자의 견해를 듣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림을 그린 이의 작품설명을 듣게 되는 경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은 각자가 느낀대로 감상하기 마련이므로 정말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미술평론가 역시 일반인보다는 차원이 다를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의적 해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예를 들면,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의 경우, “사진에는 마치 조금 전 사랑을 나누었던 것처럼 두 사람의 무게에 눌린 배게와 흐트러진 시트가 찍혀 있다.(107쪽)”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사진은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 잠을 잔 흔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나 싶습니다.

 

마크 로스코의 <무제>의 경우는 앞서 언급한 엘킨스교수가<그림과 눈물>에서 이 그림을 보면서 우는 사람이 많았다 해서 인용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의 그림에서도 진한 슬픔이나 절망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따지고 보면 슬픔은 형체가 없는 것이므로 추상미술에서 감정을 느끼는 것이 더 자연스럽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물음을 로스코가 들었더라면 분명 화를 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작 로스코는 자신을 사실주의적 화가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필립 라메트의 작품 <사물들의 자살>을 놓고 자살을 논하면서 우리 사회가 자살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자조적인 논리 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전(前) 대통령이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작가의 특정한 의도가 읽혀지는 듯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에 붙인 “내가 죽지 않으려면 너를 죽여야만 하는, 그렇게 누군가 하나 죽을 때까지 서로를 쳐야만 하는 비극, 이 잔인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싸움을 계속 한다.(150쪽)”라는 설명에 작가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편향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최근에 읽은 로저 킴볼의 <평론, 예술을 엿 먹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6017>의 영향을 받은 탓일까요? 제가 보기에도 고야의 그림에 등장하는 두 남자가 들고 휘두르는 막대기의 모양새로 보아 서로에게 치명상을 주기에는 가냘프게 보인다는 느낌이라서 그렇습니다.

 

정리해보면, 고달픈 삶에서 오는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의 미술은 분명 가능한 길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그 길을 안내하는 분들이 제대로 역할을 해주어야 하겠다는 생각도 곁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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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솔루션 -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윈-윈 소통법
아론 라자르 지음, 윤창현 옮김, 김호,정재승 감수 / 지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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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에서는 가급적이면 의료와 관련이 있는 책을 소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읽고 다른 곳에서 리뷰를 공개한 책은 피한다는 소소한 원칙도 있습니다. 사실 이 코너를 통해서 꼭 소개하였으면 하는 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김호교수님과 정재승교수님이 같이 쓰신 <쿨하게 사과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147514>인데, 이미 다른 곳에 리뷰를 소개한 바 있어 아쉽습니다.

 

<쿨하게 사과하라>는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과’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사과는 패자의 변명으로 인식되어 왔지만, 이젠 진정한 사과는 “패자의 변명이 아닌 리더의 가장 쿨하고 현명한 전략”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는 이유였습니다.

 

두 분은 <쿨하게 사과하라>에서 사과에 대해 신경과학에서부터 경영학까지, 의학에서 커뮤니케이션학까지 여러 학자들의 다양한 연구결과를 살피고, 이 이론들을 적용하여 국내외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과 사과사례들을 분석해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개선방향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물론 독자들 가운데 공감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만, 이 책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의료과오로 인한 분쟁이 발생하였을 때 사과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흔히는 의료과오관련 분쟁이 있을 경우 사과를 하게 되면 수세에 몰리게 된다는 생각으로 사건을 은폐하려는 유혹을 받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자들은 “사과는 비용이 많이 드는 비즈니스의 ‘자살골’이다”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달아서 의료과오분쟁을 쉽게 해결하는 방안이 진솔한 사과를 먼저 하는 것이라는 제안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즉 ‘진실말하기와 쏘리웍스’가 의료소송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란 주장입니다. 하지만 저자들의 이런 전망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에서는 아직까지도 사과는 적절하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다음의 사례를 보면 실감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수련과정을 마치고 병원의 신임스태프로 임용이 되신 선생님들을 위하여 마련된 교육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임상에서 환자를 진료하는데 필요하거나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는 자리였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네 명의 강사 가운데 변호사로 일하시는 분이 담당하신 ‘의료사고로부터 배우는 분쟁예방법’이란 제목의 강좌가 특히 저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변호사님은 근무하시는 병원에서 실재로 발생했던 사건을 인용하면서, 사건발생의 원인, 경과 그리고 결과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나쁜 상황에 이르지 않기 위하여 단계별 주의사항 등을 족집게과외 하듯 설명해주셨습니다.

 

특히 초기대응이 중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몇 가지 유념해야 할 사항을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첫 번째는 우선 구두로 그리고 문서로 정리하여 상급자와 관련 부서에 관련 사실을 알려 상황을 공유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료기록부에 대한 보안을 철저하게 유지해야 하는데, 더 중요한 점은 환자 측에서 진료기록을 복사해간 후에는 가필이나 정정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환자측과 대화를 하거나 관계자와 협의를 하는 경우에 단일 창구를 통하여 진행하도록 할 필요가 있으며, 마지막으로는 불필요한 대화를 자제하고 과실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지 않도록 단속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아론 라자르교수의 <사과 솔루션>은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윈-윈 소통법’이라는 부제처럼 사과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종합안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의 의미와 가치, 가해자와 피해자 입장에서 중요한 요소, 성공하는 사과의 조건과 절차, 사과의 동기와 회피 및 지연의 이유, 사과 조건에 대한 협상, 사과와 용서의 관계 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앞서 설명한 의료과오분쟁과 관련된 사과처럼 특별한 요소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사과에 관한 원론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독자는 각자의 사정에 맞게 이해하여 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사과’란 “일방, 즉 가해한 측이 자기 잘 못이나 그가 얻게 된 원성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를 본 상대에게 후회나 양심의 가책을 표현함으로써 양측 당사자들이 조우하는 것”(48쪽)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사과에 사용되는 단어와 상황에 따라서는 동정이나 유감의 뜻으로 변질되거나 오히려 사과의 의미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사과의 과정 역시 사정에 따라 제각각일 수밖에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1) 잘못에 대한 인정, 2) 해명, 3) 후회, 수치심, 겸허함, 진심 등을 포함한 다양한 태도와 행동거지, 그리고 4) 보상으로 구성되는 경향이라고 합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각 부분의 중요성이나 필요성까지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해자의 사과의 뜻이 피해자에게 성공적으로 전달되려면 피해당사자가 요구하는 다음과 같은 심리적욕구들이 전체가 아니더라도 충족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1) 손상된 자존심과 명예 회복, 2) 보편적 가치를 공유한다는 믿음, 3) 피해자는 잘못 없다는 확인, 4) 미래의 안전에 대한 확신, 5) 가해자의 심적 고통을 목격, 6) 손해에 대한 합당한 보상, 7) 상처를 표현할 의미있는 대화 등입니다.

 

진솔한 사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은데, 경우에 따라서는 실망스럽고, 거슬리며, 모욕적이고, 또 때로는 헛웃음에 나오게 만드는 사과에 머물고 마는 것이지요. 1) 애매한 인정, 2) 수동적 표현, 3) 조건부 설정, 4) 피해를 의심, 5) 잘못을 축소, 6) 교만한 태도, 7) 잘못된 대상에게 사과, 8) 엉뚱한 잘못을 인정하는 경우(126쪽)에 이런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사과 솔루션>에서 저자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잘된 사과 혹은 잘못된 사과의 사례를 다양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앞서 말씀드린 잘못된 사과 가운데 조건설정에 해당하는 닉슨대통령의 사임연설에 포함된 사과부분과 고칠 점을 소개합니다. “저는 이 판단을 낳게 한 일련의 사건에 있어서 행해졌을지 모르는 어떠한 피해에 대해서도 깊이 후회합니다. 만일 제 판단이 일부 잘못됐다면, 그리고 일부는 잘못됐지만, 그것은 당시 제가 국익에 최대한 부합한다는 믿음으로써 행한 일이라는 점만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132쪽)” 읽으면서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만, 한마디로 자기변명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대목입니다. 만일 저자라면 “제 잘못된 판단으로 결국 국가에 해를 끼친 점을 깊이 후회합니다. 제 행동이 최대한 국익을 고려한 것이었다고 당시에는 믿었지만,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133쪽)”라고 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비교해보시면 더 간략하면서도 같은 핵심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연결해야 듣는 이의 마음에 진심을 전달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살면서 한번쯤 진솔하게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해보았을 것입니다. 또한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게 되면 대체적으로 피해를 입은 분도 사과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저 역시 어렸을 적 저질렀던 잘못을 당시에는 분위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과에 마음이 제대로 담기지 않았었다는 후회와 함께 언젠가 이를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외할머님께서 중풍으로 몸이 불편하실 때 집안일을 돌보아주던 여성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조금 어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던 차에 식사를 제대로 챙겨주지 않는다는 외할머님의 불평이 나오면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하루는 늦은 오후까지 식사를 하시지 못했다는 외할머님의 말씀에 화가 치밀어 따지다가 그 여성의 뺨을 때리게 되었고, 경찰서까지 불려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할머님께서는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혈관성 치매의 초기증세를 보이셨을 가능성이 있는데 40년 전에는 전혀 모르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졸지에 모욕을 주고 폭력까지 행사하였으니 생사람을 잡은 셈입니다. 치매를 공부하고서야 잘 못을 깨달았으니, 그 분께 늘 죄송하고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시 상황에 몰려 했던 사과를 거절당한 경우도 있어 무언가 목적이 있어도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할 것까지는 없었다고 후회하고 있기도 합니다. 당연히 진급을 했어야 하는 기회에 주임교수님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어 실패하고는 여러 가지 상황이 겹치는 바람에 10년 가까이 전임강사로 지내다가 조교수 승진과 함께 퇴직을 하게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퇴직한다고 하니 그때서야 교실이 벌컥 뒤집어졌는데 어쩌면 놀란 척 하고 말리는 분들도 적지 않았던 것 같은 느낌을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교실을 떠나고서 6년 정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 산하병원에서 같이 일했으면 하는 요청이 있었는데, 교실의 승인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주임교수님을 찾아뵙고 무릎을 꿇고 사과를 드린 다음 선처를 부탁드렸는데 과장님의 의견이 중요하다고 미루었고 결국은 과장님으로부터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답을 듣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그때 사과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제때 진급을 할 수 있도록 챙겨주지 않아 결국은 퇴직에 이르게 된 것을 사과받았어야 옳다는 생각입니다. 한분은 돌아가시고 또 한 분은 퇴임하시고 해서 이제는 책임질 분도 없고, 그 분들도 아마 잊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아직까지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제가 피해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뒷끝이 좀 있는 편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풀지 못하는 사과와 관련된 사건들이 있는 것을 보면 사과에 관한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한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아론 라자르 교수의 <사과 솔루션>은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료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프레임으로서의 사과를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신 분이라고 한다면 더그 워체식 등이 쓴 <쏘리 웍스>를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쏘리 웍스란 용어는 처음 듣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의료를 행함에 있어 예상치 못한 결과가 생겼을 때 진실 말하기, 공감의 표현, 적절한 사과와 보상 등을 함으로써 무의미한 소송으로 인한 의료진과 환자 가족들의 정신적, 경제적 피해를 최소화하는 작업을 쏘리 웍스라고 한답니다.

 

환자가 사망하거나 상태가 나빠지게 되는 경우 흔히 의료진의 잘못 때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는 이유는 환자의 질병에 관련하여 곁들여 일어나는 다른 질병, 즉 합병증이 생기는 경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준비된 행위가 사전에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이르거나 혹은 잘못된 계획의 결과로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의학적 타당성이 결여된 잘못된 치료계획의 결과로 나쁜 상황에 이르게 되는 의료과오와 합병증과는 분명 차별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정이 제대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며, 의료과오에 의하여 나쁜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 쏘리 웍스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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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7-23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6815
 
칼 포퍼 인문 예술 총서 11
브라이언 매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2년 5월
평점 :
품절


지인으로부터 소개 받기 전까지만 해도 칼 포퍼교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쩌면 유독 우리나라에서 많이 알려진 분들의 성명 정도를 익히고 있는 것만도 다행아니냐는 변명으로 가름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늦었더라도 이제부터라도 공부해나갈 요량을 하고 있습니다. 포퍼교수의 철학을 담은 다양한 책들 가운데 겁도 없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6263,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27865>, 그리고 <추측과 논박;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385>을 철학을 전공하신 분들과는 느낌이 다르겠지만, 아는데까지 이해하겠다는 각오로 정말 머리카락을 뽑아가면서 읽었습니다.

 

지난 주에 칼 포퍼를 처음 소개하신 지인을 만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오래된 책을 한 권 건네 받았습니다. 바로 영국의 중견철학자 브라이언 매기가 쓴 <칼 포퍼>입니다.(중견철학자라고 소개되어 있지만 아마도 이 책을 번역 소개할 당시에 그렇다는 이야기이고 30년생이니 원로라고 해야 옳겠습니다) ‘그의 과학철학과 사회철학’이라는 부제가 달린 만큼 이 책은 칼 포퍼의 삶과 철학을 요약하고 있어 포퍼교수에게 헌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소 맞지 않는 점이 있는지 포퍼교수는 크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구미 철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뜨거운 아이콘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에 읽은 <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9333>에서 마시모 피글리우치교수가 포퍼교수의 논리를 비판하는 것을 읽으면서 포퍼교수의 철학적 주장에 대한 평가가 양분되고 있다는 소개에 공감하였습니다. 실제로 포퍼교수님의 책을 읽게 되면 매기교수가 소개하는 포퍼교수에 대한 찬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과학자들 가운데 “과학철학에 대한 포퍼의 저술들을 읽고 명상하여, 그것을 자신의 과학적 탐구의 기초로 채택하시요”라고 한 존 에클즈라던가, “과학의 방법 이외의 것은 과학에 없으며 포퍼가 말한 것 이외의 다른 과학의 방법은 없다.”고 한 허만 본디 경의 예를 보면 과학계와 철학계에서 포퍼교수의 위치를 짐작케 합니다.

 

포퍼교수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이 세웠던 전통대로 비판을 통해서 지식이 진보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각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근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반박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새로운 논문을 통하거나 혹은 자신의 저서를 개정하는 과정에 추가하여 발표함으로써 공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는 없어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태두라 할 플라톤과 근대 철학의 혁명아 칼 마르크스를 대상으로 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에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이론의 경우 그 추종자들에 의하여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다는 확신과 열광을 불러일으켰다고 하는데, 프로이트의 이론은 반증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반하여 마르크스의 이론은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처럼 반증할 수 있는 예측이 도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추종자들이 반증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브라이언 매기교수의 <칼 포퍼>는 그의 삶과 철학을 잘 요약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으로서 ‘반증가능성’의 핵심 내용을 아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흄의 귀납적 접근에 의한 과학적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논리적 의미에서 경험적인 일반화는 비록 검증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반증할 수는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즉, “과학적 법칙은 증명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험될 수는 있다: 과학적 법칙은 그것을 반박하려는 체계적 노력에 의해서 시험될 수 있다(29쪽)”는 것이 포퍼교수의 철학의 묘체라 하겠습니다.

 

과학적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진리에 한걸음씩 다가설 수 있다는 포퍼교수의 생각에 공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소크라체스 이전의 철학자 크세노파네스의 생각을 공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신들도 드러내 보여 주지 않았다 태초부터 모든 것을 우리에게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찾고 또 찾아 사물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우리는 알 수 있다.(35쪽)”

 

사족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닫힌 용기 안에서는 물이 100℃에 끓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30쪽)”이란 매기교수의 설명이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은 번역상의 오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닫혀있는 계에서 물에 가온을 하게 되면 압력이 올라가면서 대기압보다 높아지기 때문에 물은 100℃보다 낮은 온도에서 끓기 시작한다는 것이 옳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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