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환상문학전집 14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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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선일보에서는 101명의 명사들이 추천한 고전문학을 소개하는 [101 파워 클래식]을 주간으로 연재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지면으로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독자들을 초대하여 교감하는 북콘서트를 열기도 합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님과 문학평론가 강유정님께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9723>을 소개하는 북콘서트에 초대를 받아 참석하면서 고전문학 읽기에 눈을 뜨게 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7499).

 

이번 주에는 [101 파워 클래식]에서 열한 번째로 소개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소개하려 합니다. 젊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예견한 듯 한 오스카 와일드의 선견지명과 그가 그려낸 동안세계의 슬픈 결말은 어쩌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새겨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입니다.

 

21세기로 넘어올 무렵 무심히 지나쳤던 ‘세기말(世紀末)’이라는 이야기를 실감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라 하겠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서 ‘세기말(世紀末)’의 의미를 찾아보면, ① 한 세기의 끝, ② 유럽, 특히 프랑스에 절망적, 퇴폐적 분위기가 지배하던 19세기 말기의 사조, 그리고 ③ 사상이나 도덕, 질서 등 모든 면에서 사회가 부패하고 어지러워져 몰락하여 가는 때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요즈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세계적인 분위기는 바로 세기말적 분위기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발표된 1890년 영국은 빅토리아여왕의 재임 후기(1870년~1901년)로 대영제국이 지구상 육지의 4분의 1을 지배하던 전성기였습니다. 런던에는 풍요가 넘쳐나고 있었지만, 산업시대의 발전과 함께 전통적 미의식이 쇠퇴하고 속물적이 되어가는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문학 예술계에는 유미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미주의에는 데카당스와 댄디즘이 긴밀한 사조로 자리잡게 되는데, 데카당스는 “19세기 말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문예 현상. 병적인 감수성, 탐미적 경향, 전통의 부정 및 비도덕성 등이 특징이다.”, 댄디즘은 “겉치레나 허세 따위로 멋을 부리려는 경향.”이라고 다음 국어사전은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요즈음 우리사회의 현상도 세기말적 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때문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데자뷰 현상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가 겪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는 연대기(年代記)입니다만 그 사건이 시작하고 발전하는 과정과 긴밀한 관련이 있는 두 사람의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화가 바질 홀워드와 그의 친구 헨리 워튼 경입니다. 화가 바질 홀워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청년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자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됩니다. 바질은 도리언의 모습을 초상화에 담게 되는데 초상화가 완성되는 날, 바질의 화실을 방문했다가 도리언과 상면하게 되는 헨리 역시 도리언의 매력에 빠지게 되면서 친분을 맺게 됩니다. 순수청년 도리언은 풍자와 역설을 즐기는 헨리와 가까지 하지 말라고 하는 바질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헨리의 현란한 언변에 빠져들면서 비극은 싹트게 됩니다. 문학평론가 남진우교수는 도리언과 바질 그리고 헨리에게 각각 모델-화가-비평가의 위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헨리는 바질이 그린 도리언의 초상화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로스베너 화랑의 전시회에 출품할 것을 권하지만 바질은 이 작품에 자신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로 세상에 내놓지 않겠다고 거절합니다. 화가는 작품을 통하여 평가받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을 것 같습니다만, 혼을 다하여 그렸다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겠다는 바질의 말에서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다는 예감을 느끼게 됩니다. 조금 더 읽으면, “빼어난 용모나 탁월한 지성엔 어두운 숙명이 깃들여 있어. (…) 해리, 자네에겐 지위와 재산이 있고 나에겐 두뇌가, (자네가 지성이라고 부른 것을 내가 갖고 있다면 말일세.) 그리고 예술이 있어. 예술의 가치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네. 그리고 도리언 그레이에게는 빼어난 용모가 있지.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신들이 우리에게 준 것 때문에 고통을 치를 걸세. 그것도 혹독하게.(19쪽)”라는 바질의 예언과 같은 말에서 그 느낌이 구체화됩니다.

 

바질에게 도리언은 그의 본성을, 영혼을 예술 전체를 빨아들이는 존재였고, 그와의 교감을 통해서 그린 작품에는 자신의 영혼의 비밀이 담겨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도리언으로 부터 어떤 영향력이 흘러나와 바질에게 전해졌고, 그로 인해서 평범한 숲의 풍경이 품은 경이로움을, 언제나 찾고자 했지만 늘 놓치기만 했던 그 경이로움을 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술을 마치 일종의 자서전처럼 대하는 당시 사회적 분위기에서 사람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추상적인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불행은 피하고 싶은 날 찾아온다고 했던가요? 어떤 친구에게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 친구인 헨리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바질의 조언은 도리언에게는 오히려 관심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바질이 초상화를 마무리하는 동안 헨리는 “유혹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이다.” “관능을 수단으로 영혼을 치유하고 영혼을 수단으로 관능을 치유하는 것이 인생의 위대한 비밀 중 하나”라는 등의 역설을 현란한 말솜씨로 설명하면서 도리언을 사로잡게 됩니다. 비극이 잉태되는 순간이죠.

 

완성된 초상화를 보게 된 도리언은 순간적으로 그림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자각이 계시처럼 다가왔다. 전에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마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홀린 나르시스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 도리언은 헨리경이 들려준 청춘에 대한 기이한 찬사와 청춘의 급속한 소멸에 대한 무시무시한 경고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의 얼굴이 주름살에 덮여 쪼그라드는 날이 올 터이고, 눈은 빛을 잃고 우아한 몸이 망가지고 일그러지는 날이 올 터이고, 진홍빛 입술은 영원하지 않을 것이고 금실 같던 머리칼은 하얗게 바랠 것이다. 그의 영혼을 풍요케 할 삶이 그의 육체를 일그러뜨릴 것이다. 그는 끔찍하고 추악하고 지저분하게 변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날카로운 통각이 비수처럼 그를 찔렀고 그의 존재를 형성하는 섬세한 섬유들이 바르르 떨리게 했다.(53쪽)”

 

이런 두려움이 도리언으로 하여금 “영원히 젊은 쪽이 나고 늙어 가는 쪽이 이 그림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겠어요! 그래요.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주지 못할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내 영혼이라도 기꺼이 주겠어요!(54쪽)”라고 중얼거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나이어린 탓에다가 헨리경의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은 직후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가 부와 권력을 얻는 대신 자신의 영혼을 팔아넘긴 파우스트보다는 순진한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다보면 세월의 흔적이 녹아들어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희망을 품게 된 것일 터입니다. (사실 저는 흰머리가 많은 편이라서 머리염색을 하면 훨씬 젊어 보일 것이라는 조언을 주변에서 많이 듣고 있습니다만, 흰머리 또한 저의 본 모습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도리언은 바질에게서 자신의 초상화를 받아서 집으로 가져가게 됩니다.

 

자신의 초상화에 저주가 쓰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우연히 들른 극장에서 만나게 된 여배우의 죽음이 계기가 됩니다. 젊고 아름다운 그녀의 연기에 매혹된 도리언은 매일 그녀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가고 결국은 그녀에게 청혼을 하게 되는데, 도리언이 바질과 헨리에게 그녀를 소개하는 날 줄리엣을 연기한 그녀는 줄리엣의 아름다운 대사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 뱉습니다. 그녀의 끔찍한 연기에 놀란 도리언에게 그녀는 자신의 연기인생이 스스로를 속여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대답합니다. “당신은 나의 영혼을 감옥에서 풀어 주었어요. 당신은 내게 현실이 진정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오늘 밤, 내 삶에서 처음으로, 내가 언제나 해 온 연기가 공허하다는 것을, 가짜라는 것을,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어요. (…)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을 연기하는 건 내게 신성모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될 것(152쪽)”이라고 자신의 연기가 변한 까닭을 설명한 시빌 베인에게 도리언은 “당신은 나의 사랑을 죽였어.”라고 중얼거리며 절교를 선언합니다. 시빌 베인 역시 어린 탓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 즉 연기의 진정한 매력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도리언은 자신의 초상화에서 입가에 잔인한 조소 같은 것이 희미하게 드리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날 베인에게 주었던 절교선언이 지나쳤음을 후회한 도리언이 절교를 되돌리려 생각하고 있을 때 찾아온 헨리는 시빌 베인이 자신의 분장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도리언은 그와 그림 사이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교류가 멈추도록 기도할 것을 고민하기도 하지만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기회를 선뜻 버리지 못합니다. 유혹에 약한 인간의 심성이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바질은 시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난 순수청년 도리언에게서 따뜻한 마음도 연민도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워집니다. 이 모든 것이 해리의 영향 때문이며 언젠가 이로 인한 벌을 받게 될 것을 예감하는 것입니다. 시빌의 죽음에 대한 도리언의 생각을 보면 도리언이 헨리를 닮아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녀가 연기한 마지막 날 밤, 그녀는 사랑의 실제적인 위력을 깨달았기 때문에 엉망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 사랑의 비현실성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죽은 겁니다. 마치 줄리엣이 죽어야 했던 것처럼 그녀는 그렇게 다시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간 것이지요.(189쪽)”

 

시빌 베인의 자살사건 이후 헨리가 보내준 한권의 책은 도리언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파리에 살고 있는 한 청년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주인공의 낭만적 기질과 과학적 기질을 그리고 심리적 변화를 그리고 있어 도리언 그레이의 자서전이라 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젊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도리언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자신의 외모를 두고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감추고 일탈을 꾀하기도 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진즉 깨달았어야 한다는 교훈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언은 어긋난 인생행로를 바로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휘둘리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는데 자신의 왜곡된 삶이 시작된 것은 바질이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이라는 충동적 생각 때문에 그를 살해하기에 이르고 자신의 살인행각마저도 친구를 동원하여 흔적을 지우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 쌓여가는 삶의 무게는 늙고 추악해져 가는 초상화를 칼로 찢어버리기에 이르게 된 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동안신화에 매몰되어 있는 분위기입니다.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젊어 보이려는 욕망에 보톡스시술 등 좋다는 시술에 목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기는 시술은 아직 없다는 것과 언제까지 젊어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신체의 젊음도 중요하지만 마음을 젊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과 젊어 보이는 모습보다 세월의 흔적이 아름답게 녹아든 모습이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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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8-1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7126
 
알레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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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 아카데미의 보르헤스 강좌에서 다룬 두 번째 텍스트는 <알레프>였습니다. 1949년에 발표된 <알레프>는 <픽션들>과 더불어 보르헤스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초판 <알레프>에는 모두 열세편의 단편을 수록했는데, 1952년 네편을 더해서 모두 열입곱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알레프>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 ‘엠마 순스’와 ‘전사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모두 환상문학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번역하신 송병선교수님은 “그는 환상문학을 목적이 아니라, 절대적 진리나 믿음을 파괴하려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면서, 이 장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224쪽)”고 적고 있습니다.

 

픽션들에서 차용했던 미로(迷路)는 <알레프>에 실린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와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픽션들>에서 심플하면서도 심오한 동양적 미로였다면 ‘자기 미로에서 죽은 이븐 하캄 알 보크하리’에서 차용한 미로는 크레타섬에 있었다는 미궁의 구조를 연상케합니다. 하지만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에서는 아무런 장치가 없는 열린 공간, 즉 사막 한 가운데를 미로로 차용하여 사람을 가두고 있습니다.

 

<픽션들>과 닮은 점이 미로라고 한다면 다른 점은 바로 죽음과 남미적 분위기가 물씬한 가우초가 등장하는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 ‘죽은 사람’, ‘또 다른 죽음’ 등은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리고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진시황이 들었더라면 분명 사람을 보냈을 영생을 얻게 되는 강물을 마시게 된 주인공이 오랜 세월을 살면서 다양한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앞서 <픽션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8043>에서도 잠깐 말씀드렸던 팔림세스트기법인데 저는 이 단편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되었던 영국드라마 <닥터 후>가 생각난 이유는 아마도 영생을 얻은 시간여행자가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역사적인 사건의 현장을 증언하고 심지어는 개입까지 한다는 설정이 바로 이 이 작품의 분위기와 닮았다 싶어서입니다.

 

단편 ‘알레프’에서 다중우주의 개념을 읽을 수 있었다는 말씀은 <픽션들>에서 드렸던 바 있습니다만, 민음아카데미에서 송병선교수님은 단편 알레프에 네루다에 대한 보르헤스의 비웃음이 담겨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알레프’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스와 카를로스 아르헨티노는 그가 사랑했던 여인 노라 란지와 네루다가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카를로스 아르헨티노의 시처럼 호화로우면서도 천하기 짝이 없는 시를 쓰는 우리 친구의 풍자입니다.”라는 말에서도 보르헤스의 심중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우초문학에 대한 보르헤스의 관심은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알레프>의  ‘타데오 이시도로 크루스의 전기’와 <픽션들>에 실린 단편 ‘끝’에서는 아르헨티나 시인, 호세 에르난데스(José Hernández)가 1827년 발표한 가우초문학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장시(長詩) 『마르틴 피에로』에 나오는 마르틴 피에로를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마르틴 피에로는 순수한 가우초이지만, 규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일탈하게 되지만 독립적이고 영웅적이며 희생적인 인물로 그려지는데, <알레프>에 실린 또 다른 단편 ‘또 다른 죽음’에 등장하는 페드로 다미안의 죽음과 함께,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가 강제로 가우초들을 징집해 국경으로 보내 원주민들과 전쟁을 하도록 만든 정책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 합니다.

 

얼마 전에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가 아랍어로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독일어 번역본을 국내에 소개한 <아베로에스의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0768>을 읽은 탓인지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를 아랍어로 번역하던 무렵의 아베로에스의 생활을 가상한 단편 ‘아베로에스의 탐색’은 꽤나 흥미로웠습니다. “모든 철학의 원천인 이 그리스인(아리스토텔레스)은 사람들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도록 점지된 사람이었다. 아베로에스가 자신에게 부여한 목표는 마치 회교 율법학자들이 『코란』을 해석하는 것과 같이 그의 책들을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 아랍인 의사는 자기 자신과 14세기나 떨어져 있는 사람의 사상에 전념했다. 그런 그의 헌신보다 더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역사상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117쪽)”

 

고전의 해석 혹은 번역의 어려움을 시사하는 구절도 있습니다. “그는 『시학』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확실치 않은 두 단어 때문에 멈춰야 했다. (…) 그런데 이슬람권에서는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117쪽)” 해석 혹은 번역의 대상이 되는 글을 쓴 사람이 살던 시대, 혹은 사회에 대한 다양한 정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으면 엉뚱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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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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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소리]에 소개할 책을 만나는 것도 인연이라고 할 무엇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읽고 북소리에서 소개한 박종호선생님의 <탱고 인 부에노스아이레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7325>에서는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가로, 아르헨티나출신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와 시인으로는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기억에 관한 어떤 책에서 바로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에 수록된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인용하고 있어서 꼭 읽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기도 했습니다. 보르헤스와의 인연은 마침 민음사에서 주관하는 민음아카데미가 7월에 네 차례에 걸쳐서 보르헤스와 그의 작품을 해설하는 강좌로 까지 이어졌습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1596). 바로 보르헤스의 작품 <픽션들>과 <알레프>를 번역하신 울산대학교의 송병선교수님께서 강좌를 주관하셨으니 보르헤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번역하신 송병선교수님께서 작품해설을 통해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픽션들>은 열여덟편의 단편소설들을 수록한 얇은 책이지만 20세기 후반의 문학뿐만 아니라 정치, 문화, 사회, 과학, 철학 등 세계 지성사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북소리]에서 <픽션들>을 소개하게 된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보르헤스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얻는 느낌은 ‘어렵다’는 한마디로 정리되었는데 민음아카데미에 참여하면서 이해의 범위를 넓힐 수 있었습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세계를 환상문학에 속한다고 합니다만, 그의 작품세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젊었을 적에 실패한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보르헤스는 1920년대 노르웨이 이민가정의 노라 란지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관한 서사시 혹은 소설을 쓰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막상 그녀가 1926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계획을 접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픽션들>에 실린 열여덟 개의 단편을 읽고서 우선은 단편들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다양함에 놀라게 됩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중동아시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이미 알려진 텍스트를 활용하여 허구의 인물이나 사실을 얹혀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런 기법은 팔림세스트의 이미지처럼 표현하는 것인데, 팔림세스트는 동일한 양피지 위에 새로운 텍스트가 이전의 텍스트를 숨기지 않은 채 보이게 하는 그런 양피지를 말한다고 합니다. 즉, 보르헤스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순수한 의미의 창작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문학을 생산 혹은 재생산 과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토리 전개과정에 다양한 형식의 미로(迷路)를 차입하고 있는데,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을 읽으면서는 주인공이 중국출신인 까닭인지 젊었을 적에 빠져들었던 중국무협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미로의 진법 혹은 미로기관을 떠올렸습니다. 단순하게 막대기 하나는 던져놓은 미로의 진에 갇힌 사람은 미로의 진을 탈출할 수 있는 보법을 모르면 아무리 헤매도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서양에서도 미로의 역사가 참 오래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노스왕이 반은 소이고 반은 사람인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가두어두었던 미궁(Labyrinth)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서양에서도 미로에 대한 개념이 일찍부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에 등장하는 미로는 공간적인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시간적 이미지의 미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유춘은 작가인 조부의 작품세계를 완벽하게 해석하게 된 중국학자 앨버트를 살해하여 뉴스화함으로써 독일에게 공격목표를 알리는 스파이활동을 하기로 합니다. 한편 앨버트는 유춘이 자신을 살해하러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킬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맞아들여 조부에 관하여 설명하고 결국 유춘이 쏘는 총을 맞게 됩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행동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미로는 공간적 개념보다는 시간적 개념이 적용된 것으로 요즈음 방영되는 드라마 <닥터 진>에서 차용하고 있는 타임슬립을 통한 시간여행의 개념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또한 워쇼스키형제가 감독한 1999년작품 <매트릭스>에서 시간과 공간이 복합적으로 얽혀드는 보르헤스의 미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저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과 나침반’에서도 미로의 개념을 차입하고 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미로는 단순하면서도 상황을 복잡하게 이끌고 있습니다. 뢴로트탐정과 범죄자 샤를라트의 지적 힘겨루기가 벌어지는 추리소설 양식의 ‘죽음의 나침반’에서는 자신과 동생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뢴로트에게 복수를 하려는 샤를라트가 살인사건이라는 함정을 만들어가면서 뢴로트를 마지막 범행장소로 이끌어 들이는데 성공하는데, 그 과정을 미로찾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미로에 있는 세 개의 선은 너무 많아. 나는 단 하나의 직선으로 된 그리스의 어느 미로에 대해 알고 있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 직선 속에서 길을 잃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보잘것없는 탐정도 충분히 길을 잃을 수 있을거야.(183쪽)”

샤를라트는 삼각형을 이루는 장소에서 일어난 세 건의 사건을 통해서 뢴로트를 최종 범행장소로 쉽게 이끌어 들이는데, 그 네 번째 장소가 마름모꼴을 완성하는 삼각형 꼭지점의 대칭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단 하나의 직선으로 된 미로의 의미는 바로 삼각형의 밑변을 이루는 직선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놀라운 것은 보르헤스의 다음과 같은 발언을 보면 뢴로트와 샤를라트가 동일인일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내 단편 「죽음과 나침반」을 영화로 제작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이상하게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름까지 혼동된다. 한 사람은 ‘로트’이고 다른 사람은 샤를라흐, 즉 붉은색과 주홍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감독에게 알려주어 한 배우가 두 배역을 맡도록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살인만 있는 게 아니라 자살도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강좌에서 저도 제기를 했습니다만, 이런 이유로 이 작품을 미러 이미지로 설명하기도 한답니다.

 

저자가 차용하고 있는 미로의 다양성은 장치조차도 없는 미로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바로 <알레프>에 실려 있는 ‘두 명의 왕과 두 개의 미로’에 등장하는데, 그곳에는 올라갈 계단도 없으며 힘들게 열어야 하는 문들도 없고, 돌아다녀야 할 진저리나는 복도들도 없으며 당신의 길을 막을 벽들도 없는 곳입니다. 어디일까요? 바로 사막 한가운데였습니다.

 

보르헤스의 작품에서 또 주목할 개념은 도서관입니다. 1955년 페론정권을 무너뜨린 새 정부가 보르헤스를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한 이래 보르헤스는 18년 동안 도서관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책 한권을 뒤적거리다가 책으로 가득한 모든 책장들을 쓸모없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없지 않겠지만 보르헤스에게 도서관은 바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공간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언어구조와 스물다섯개의 철자 기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변형체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절대적으로 허튼소리는 하나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상상 속에서 도서관은 우주로까지 영역을 넓혀갑니다.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97쪽)”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우주의 모든 비밀이 담겨져 있다고 보면서도 ‘바벨’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바벨탑이 무너진 이후로 나타난 언어의 다양성으로 혼돈에 빠진 인류가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통하여 정보와 개념의 통일을 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하느님이 계신 곳으로 이해를 확대하는 듯한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클레멘티눔 도서관이 소장한 사십만 권 중의 한 책에 있는 한 페이지의 글자들 중 하나에 있어요. 내 부모들과 내 부부들의 부모들은 그 글자를 찾았지요. 나도 그것을 찾느라 눈이 멀어버렸소.(191쪽)” 보르헤스는 스스로를 문학을 통하여 하느님의 존재를 찾는 구도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보르헤스는 도서관을 통하여 우주로까지 사유의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만, 우주로 확대시킨 미로의 개념이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는 미로이면서도 정돈된 우주의 성격을 묘사하고 있어 지구의 또 다른 세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중우주의 개념은 <알레프>에 담긴 단편 ‘알레프’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알레프란 모든 지점들을 포함하는 공간 속의 한 지점이면서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들이 뒤섞이지 않고 있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모든 별들과 모든 등불들, 모든 빛의 원천들도 담겨있다는 현대물리학의 초끈이론에서 설명하고 있는 다중우주가 바로 알레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초끈이론에 관하여는 [북소리]에서 소개한 <우주의 풍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97504>을 통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픽션들>을 읽게 된 계기가 된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보르헤스가 그리고 있는 기억의 천재 이레네오 푸네스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하면서 의식을 잃었는데, 의식을 회복하고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사소한 기억까지도 명확하게 되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기억에 관한한 놀라울 능력을 가진 푸네스지만, 그에게는 일반적인 사고, 즉 플라톤적 사고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즉 얻은 정보를 통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동일한 개체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보면 별도의 정보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즉, 푸네스의 놀라운 능력은 그저 단순한 정보수집체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푸네스의 기억능력은 <기억전달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11323>의 조너스가 엄청난 기억력뿐 아니라 기억을 종합하여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될 수 있습니다. 통합사고능력이 결여된 기억은 오히려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보면, ‘왜 우리는 보르헤스를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은 송병선교수님은 보르헤스의 작품들이 현대의 고전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보르헤스의 소설이 다원성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역사의 측면을 여러 상이한 관점 아래서 파헤칠 수 있으며, 이런 역사의 다원성을 통해 획일화를 추구하는 종래의 정치관과 공식 역사관의 허구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를 읽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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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7가지 언어 - SERI CEO 인기 스피치 강좌
김은성.김재원 지음 / 알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구슬 하나하나도 보기에 참 좋지만 이것들을 꿰어 놓으면 그 아름다움이 더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끔 아이들을 데리고 앉아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아내로부터 받곤합니다. 아마도 제가 아이들하고 대화가 없다는 지적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렸을 적에 꼭 밥상머리에서 야단을 맞거나 하던 때 속으로 불편하였던 기억 때문에 만들어진 버릇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를 말로서 전달하지 않으면 그 효과가 제대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말을 제대로 사용하고 계신 두 분께서 말하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조직의 리더의 위치에 있는 분들이라면 더우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습니다. 바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CEO를 대상으로 하는 인기 스피치 강좌를 이끌고 있는 김은성 아나운서님이 동료 김재원 아나운서와 함께 만든 <리더의 7가지 언어>입니다.

 

누군가의 앞에서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부담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요청을 받게 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리뷰를 쓰기 위해서 기억을 정리하다 보니 2004년엔가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의 연구소를 방문하였을 적에 열렸던 만찬회에서 갑작스럽게 만찬사를 요청받았던 때가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공식행사에서는 미리 준비한 A4용지 한 장분량의 축사를 6시간 정도 연습한 끝에 일본어로 읽어 내려갈 수 있었지만, 갑작스러운 만찬사를 영어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대표하고 있던 기관과 방문기관 사이에 이어져온 긴밀한 관계가 앞으로 발전하기를 희망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방문과정에서 보여준 환대에 감사한다는 내용으로 진심을 담아 말씀드렸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구름위에 떠있는 기분으로 정신없이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는데, 동행하셨던 황우석교수께서도 좋은 만찬사였다고 칭찬해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미리 준비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요?

 

세상을 살아가는데 누구나 공통적으로 당면하는 일이지만 특히 리더라면 세상과 소통이 중요하고, 소통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크고 효과이면서도 위험요소가 많은 방법이 바로 언어, 즉 말입니다. 저자들은 동서고금을 살펴 성공한 리더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정리하여 리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콕 짚어주고 있습니다. 마치 족집게과외 하듯이 말입니다. 다양한 사례가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처럼 인용되고 있고 그 사례를 다시 쉽게 설명하고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정말 부러워하는 스타일입니다. 말도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쓰는...

 

저자는 리더들의 언어에서 나타나는 특성을 일곱 가지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자기철학의 언어, 2. 비전의 언어, 3. 명확성의 언어, 4. 공감의 언어, 5. 반응의 언어, 6. 균형의 언어, 7. 언행일치의 언어 등입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덕목이 없습니다만, 역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저자가 제일 앞에 둔 자기철학의 언어가 될 것 같습니다.

 

자기철학의 언어라함은 스스로의 경험으로부터 깨달은 것을 담은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연예 프로그램을 시청하다보면 출연자가 마치 자신이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작가가 써준 것이라는 티가 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작가로부터 건네받은 대본을 충분히 읽어 자신의 경험으로 소화하지 못하였거나 자신의 이야기처럼 꾸며내는 능력이 부족한 경우일 것입니다. 듣는 사람이 느끼기에 남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처럼 포장하는 사람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저자는 자기철학의 언어를 설명하면서 중견기업의 대표로부터 윈스턴 처칠, 버락 오바마의 사례를 들어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듣는 이에게 어떠한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의 출발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자기 경험과 추억은 말을 하기 위한 최고의 재료이며 콘텐츠이다.(21쪽)”

 

그밖에도 저자들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는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에 모두 요약한다는 것은 제가 좋아하는 리뷰스타일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어떻든 제가 맡고 있는 리더로서의 역할에 도움이 될 믾은 것들을 이 책을 통하여 얻을 수 있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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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로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3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숙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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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의 리뷰를 쓰기 전에 박인희씨의 <목마와 숙녀>를 찾아 듣습니다. 젊었을 적 가을이 되면 음악다방에서 참 많이 듣던 곡입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등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가을에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이야기가 안타까워서 였던가? 아니 어쩌면 바람에 쓰러진 술병에 별이 떨어지고 가을바람소리가 쓰러진 술병속에서 목메여 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박인희씨의 노래로 익숙한 버지나아 울프의 <등대로>를 읽게 된 것은 조나 레러의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2521>에서 자아의 인식과 의식의 흐름을 화두로 삼아 신경학적 논의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결국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아플 때 사람이 어떻게 여러 다른 인물로 쪼개지는가는 신기한 일이다.(조나 레러, 프루스트는 신경과학자였다, 298쪽)”라고 술회할 정도로 자신의 병 덕분에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이렇게 인식한 사람 마음의 변덕스러움과 다중성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의식의 흐름의 기법’이라는 문학적 기법으로 표현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3부로 이루어진 <등대로>에서 작가는 19세기 말 근대사회가 현대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영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런던에 사는 램지가 사람들이 스코틀랜드 서쪽에 있는 헤브리스제도의 한 섬에 있는 별장에서 초대한 손님들과 머무는 동안, 등장인물들이 하는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부는 램지씨의 별장에서 건너다보이는 등대를 방문할 계획에 들뜬 자녀들에게 날씨가 악화될 것이므로 갈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램지씨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램지부인의 비중이 가장 많은데 2부에서는 특별한 설명이 없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는 1차 세계대전 이후에 10년 동안 사회적 변화와 램지가에 일어난 사건 그리고 별장이 변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다시 3부에서는 남아 있는 가족들 가운데 별장에 모인 램지씨와 제임스 그리고 캔이 등대를 찾아가고 1부에서 등장했던 화가 릴리가 다시 손님으로 찾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쓰고 있는 철학백과사전의 Q항목에 묶여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램지씨와 그런 남편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과 평소 엄격한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는 남편에 대한 증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보이는 램지부인의 복잡한 성품이 드러나는 그녀의 생각들이, 마치 등대에서 오는 빛이 집안을 훑고 지나가듯 교차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1부에서 램지부인이 아이들과 함께 등대로 가려는 계획을 들은 램지씨가 날씨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장면과 3부에서 드디어 램지씨와 등대로 가는 배 안에서도 막내아들 제임스가 아버지 램지씨에 대한 살해욕구를 가지고 있음을 그리고 있습니다. 별도 설명은 없었습니다만, 버지이나 울프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시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시사한다 생각합니다만, 결국은 램지씨가 제임스가 등대로 가는 배를 잘 조종하였음을 칭찬하면서 갈등이 해소되고 있는 것을 보면 램지씨의 엄격한 자녀훈육관의 면모로 자녀들이 아버지로부터 인정(認定)받기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얼마 전에 읽은 <에고 트릭;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3764>에서 줄리언 바지니는 자아의 본질을 정리하면서, 자아는 항상 변화하며, 여러 요소들의 묶음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만, 버지니아 울프는 당시에 벌써 우리의 자아가 영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한순간 지속될 뿐이며 ‘파도 위의 구름처럼’ 지나가는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작가에게 ‘등대는 무슨 의미였을까?’를 붙들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읽어갔습니다만, 정작 등대에 갈 계획을 세웠던 램지부인은 가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고 램지씨와 제임스 그리고 캔이 3부에서 등대에 이르게 되고 이들의 의식 속에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남아있던 의식의 숙제가 풀리게 됩니다. 한편 이들이 등대로 향하는 동안 역시 자신의 그림에 대하여, “인간이란 기계는 그림을 그리거나 감정을 느끼기엔 정말 비참할 정도로 비효율적인 기계(279쪽)”라고 생각할 정도로 고민을 하던 릴리 역시 마지막 순간에 그림을 완성하면서 이야기가 끝이 납니다. “그녀는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흐릿해 보였다. 마치 두 번째로 그것을 분명히 본 듯 그녀는 거기 중앙에, 갑자기 온 힘을 다해 선을 하나 그었다. 그림이 완성되었다.(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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