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산책 - 소크라테스에서 소쉬르까지
창홍 지음, 정유희 옮김 / 시그마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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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악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분야를 많이 알지 못한다는 말씀을 자주 드립니다만, 그래도 해외여행이라도 하게 되면 그 곳에 있는 미술관은 열심히 찾아다니는 편입니다. 아마도 유명하다는 작품을 나도 보았다고 내세우기 위한 문화적 허영심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녀본 미술관 가운데 세계3대 미술관에 든다는 시카고 미술관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이 잘 분류되어 있어 시대별로 변하는 미술사조를 쉽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술작품을 대표로 들었습니다만, 어느 분야든 세월이 흐르면서 주류 표현방식이 변하는 것은 기왕의 사조에 대한 반발을 비롯한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창홍교수가 쓴 <미학산책>은 미술을 포함한 예술의 사조변화가 당대의 미에 대한 관점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미학은 미, 미적 체험, 미의 창조, 그리고 교육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심미활동의 기원, 미적 경험의 심리, 미학 활동의 구조와 형태 등을 학습하고 탐구하는 것을 통해 철학적 시야와 이론적 소양을 넓히고 미학적 관점으로 세계를 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미학을 이해하게 되면 인류의 가치추구와 예술 창조에 대한 미학적 수양과 예술적 감상능력을 높일 수 있고,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미적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미학과 관련된 학과의 체계가 매우 방대하고 구조가 복잡하며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난해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매우 어렵다 했으니 아무래도 저와 같은 범인으로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울 듯합니다. 간혹 주변에서 미학을 전공하였다는 분들이 본디 배운 일은 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면 미학이 정말 어려운 모양이다 싶기도 합니다.

 

다행히 <미학산책>은 미학의 입문서로 안성맞춤이 아닐까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에서 소쉬르에 이르기까지 미학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들 가운데 명성이 높고 영향력이 컸던 대표적 인물 34명의 중요한 미학적 이론과 성과를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들을 통하여 서양 고전 이성주의 미학, 중세 미학, 계몽주의 미학, 그리고 현실주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주요 유파의 미학적 주장과 사상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박스형태의 독립된 공간으로 만들어 둔 ‘미학사전’에 중요한 용어를 압축하여 설명하고 있어 개념정리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이 그리스 철학에 근원을 두고 있듯이 미학 역시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다보면 그리스 철학에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에서 미(美)는 하나의 단어로 옮기기 어렵지만 형태학적인 아름다움과 내재한 덕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상태, 즉 미(美)와 선(善)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임을 의미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를 서양 고전 이성주의 미학의 시조(始祖)로 꼽고 있습니다. ‘미덕이 곧 지식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제시한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사용하는 사물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을 아름답다,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모두 사물이 지닌 적합성이라는 동일한 관점에서 비롯된다.(19쪽)”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물이 목적에 적합하게 쓰이는 것을 미(美)라고 할 것이므로 그에게 있어 미(美)란 상대적인 개념이며 절대불변의 미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한걸음 더 나아가 미의 본질이 자연사물에 있지 않고 이데아에 있으므로 다양한 등급으로 나눌 수 있는데, 최고의 이데아가 지극히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이 구현하는 미는 절대적이라고 하였습니다. “절대미는 영원하며, 시작과 끝이 없고, 생기지도 사라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시간, 장소, 대사에 따라 아름다웠다가 추해지는 것이 아니다.(34쪽)”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그리스 미학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미에 대한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은 하나의 살아있는 사물 혹은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사물일 수 있다. 이 사물의 각 부분은 일정한 배열을 가지고 있으며 일정한 크기를 지닌다. 즉 미란 크기와 질서가 잡힌 배열에 근거한다.(43쪽)” 그는 미의 기준을 질서, 균형, 명료성 등 사물의 완전성으로 보았는데, 여기에서 완전하다는 의미는 사물의 모든 부분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사물의 조화는 느낌으로 알 수 있는데, 미술을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참 아름답다고 느끼는 작품은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미학에 대한 많은 이론들이 나왔지만 조화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사물의 완전성’이란 근원적인 설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말기 철학자 롱기누스는 <숭고론>를 통하여 문예를 인간의 정신과 심미활동의 결과로 보는 견해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데,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숭고하다고 여기는 것은 가장 적합한 성분을 선택해서 그것으로 유기적인 통일체를 이루었기 때문이다.(70쪽)”이라고 말해 역시 ‘조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구체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중세 기독교 미학의 창시자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은 아름답고 선하시며, 신의 미와 선은 피조물을 까마득히 초월한다. 아름답고 선한 신이 아름답고 선한 세상을 창조했다.(78쪽)”라고 말한 것처럼 기독교 미학에서는 신을 미의 본원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시대의 문예에 나타난 형식미는 중세에 이르러 더욱 강조되는 경향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중세미학을 집대성한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대전>에 적은 미에 대한 개념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완결성 혹은 완전성이다. 완전하기 못한 것은 결과적으로 추하다. 둘째, 적합한 비례 혹은 조화이다. 셋째는 명료성이다. 선명한 색을 띠는 것은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된다.(91쪽)”

 

앞서 말씀드린 시카고 미술관에서 여러 점의 중세미술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이 작품들을 보면 아퀴나스의 ‘명료성’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퀴나스가 말하는 선명한 색으로 면들을 나누고 있어 선이 분명하여 천편일률적이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는 개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으니,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저의 탓이겠지만, 아름다움을 보는 일반인의 시각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절대미는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씀대로라고나 할까요?

 

미학 역시 르네상스시대에 접어들면서 등장한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누군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과학이 예술과 결혼했고 철학이 이 완벽한 결합 위에 입맞춤했다.(105쪽)”고 평했다고 합니다. 다빈치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라고 했던 그리스 예술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데, 그는 예술작품에서 자연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하여 회화기법에 투시학, 색체학, 해부학, 비례학, 구도학 등의 자연과학을 응용하였습니다. 특히 그가 30여구의 시체를 직접 해부하여 인체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미감은 각 부분이 신성한 비례를 이루고 각각의 특징이 동시에 기능해야만 보는 사람이 조화로운 비례를 느낄 수 있다.(108쪽)”고 말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자 역시 이런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인지 다빈치의 미학을 설명하면서 그의 작품 <모나리자>를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기법을 처음 적용한 것 아닐까하는 억측도 해봅니다.

 

17세기 들어 미학은 한층 발전한 자연과학의 성과를 토대로 하고, 이성주의 경험주의 등 철학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미학 가운데, 인간에게는 천성적으로 선악과 미추를 구별하는 능력이 있으며 선악을 구별하는 도덕감과 미추를 구별하는 미감이 서로 일치한다는 영국의 철학자 섀프츠베리의 미학에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에게는 미를 인식하는 외재적 감각능력에 해당하는 오감(五感) 이외에 식스 센스, 즉 심미안이 있다는 심미내재적감관설이 저의 부족한 예술감상력을 변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심미안이란 일종의 심리적, 이성적 능력인데 동물적인 외재적 감각능력만으로는 미를 제대로 인식하거나 감상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과 이성이라고 하는 고상한 내재적 능력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섀프츠베리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이 미를 정확하게 감상하지 못하는 가장 큰 뚜렷한 원인은 상상력이 충분히 민감하지 않아서이다. 정교한 느낌이 전달되려면 이 민감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심오하고 난해한 철학의 도움을 청할 필요는 없다.(148쪽)”고 한 데이비드 흄의 미학적 설명과 일맥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단순무식한 제 입장에서 말한다면 ‘그림을 보았더니 참 좋더라’는 느낌이 들면 충분한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18세기 계몽주의는 다양한 분야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미학분야 역시 그 영향을 받아 전례없는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는 미학의 사조가 빠르게 변화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장자크 루소는 체계적인 미학 사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감상적 자연주의 사조에 영향을 주었으며, 드니 디드로의 현실주의 미학이 주목할 만하다고 합니다. 한편 독일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은 미학 학과를 정식으로 창립한 최초의 인물로서 ‘미학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로서 미학의 서양의 근대 인문과학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그는 “미학의 대상은 감성적 인식의 그 자체적 완전성이며, 이것이 곧 미이다. 이와 반대로 감성 인식의 불완성이 곧 추이다.(203쪽)”이라고 정의하였는데, 감성인식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유의 조화, 질서의 조화, 기호의 조화라는 세 가지 필수적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19세기 들어 페히너의 실험미학이 등장하는데, 이는 심리학의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미학과 미적경험을 연구하는 사조로 미학과 자연과학을 결합함으로써 연구대상을 객체에서 주체로 전환시키고 미의 본질을 탐구하는데서 주체의 심리적 경험을 연구하게 된 점이 특이하다 하겠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예술의 사조도 다양해진 것처럼 크로체의 표현주의 미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미학, 후설의 현상학 미학, 카시러의 상징주의 미학,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미학,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비판 미학, 아도르노의 부정의 미학, 소쉬르의 구조주의 미학에 이르기까지 미학 이론 역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론이 새로운 예술사조를 이끌어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직관만으로 예술작품을 이해할 수 있었던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 같습니다. 작가의 작품제작 배경을 알지 못하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평론가들의 해설에 의지하여 작품을 이해하려는 경향마저도 등장하게 되는데, “능수능란한 글 솜씨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무장한 일부 평론가들의-특히 높은 인기와 영향력을 누리고 있는 일부 평론가들의-지나친 정치의식 또는 정치적 의도가 예술 행위 자체를 중심에서 밀어내버리고 마치 자기네들이 주체인 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날선 추천사가 실감났던 책 <평론, 예술을 엿먹이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66017>에 크게 공감했던 것도 이런 경향에 대한 반발같은 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난해한 작품을 이해하는 척하려는 것은 저의 문화적 허영심으로 포장하는 것도 쉽지 않은 듯해서 입니다.

 

<미학산책>은 처음 접하게 되는 중국 철학자의 책입니다. 저자가 미학에 관한 중국철학계의 많은 연구성과를 인용하고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과 저자가 고른 34명의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철학자라는 점이 특이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인용한 인물들의 미학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 이외에도 그들의 삶 가운데 특이한 사항도 요약하여 그들의 미학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였으며, 200여점이 넘는 미술, 조각, 채색도기 작품 등을 인용하여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다만 일부 사진자료들 가운데는 제작자와 작품명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더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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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9-24 0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신문 <라포르시안>에서 SNS를 통한 댓글 이벤트를 통하여 도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음 주소의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rapportian.com/n_news/news/view.html?no=7876
 
펑키 동남아 - 사랑과 행복의 상징 두리안을 찾아 떠나는 힐링 로드
김이재 지음 / 시공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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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고 세계가 이웃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외국을 두루 여행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를 담은 책에 관심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해외여행은 대부분 일 때문에 다녀온 것이라서 미국, 일본 그리고 유럽 이외의 지역에는 아직 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여행을 위한 여행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김이재교수님의 <펑키 동남아>는 충분히 흥미를 끄는 이야기입니다. 주변에 동남아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로부터 들은 천편일률적인 동남아 이야기와는 달리 그곳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며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저자가 돌아본 곳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의 페낭, 태국읜 짜탄부리, 필리핀의 다바오,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 등 동남아의 대표적 과일 두리안의 산지인데, 동남아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곳에서 비껴있는 곳이면서도 자연환경과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축제가 이어지고 있어 볼거리도 많다고 합니다.

 

행복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행복 밀집 지역’이라고 추천하고 있는데 모계사회 전통이 강해 씩씩하고 멋진 여성들이 많고 어린이가 행복한 곳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페미니스트인 저자에게 우리나라는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나라로 규정되고 있는 듯합니다. “가부장적 질서가 공고한 한국에서 여자로 살아온 지난 인생을 돌아보면 영광과 기쁨보다는 패배와 눈물이 가득하다.(22쪽) (…) 한국의 가부장적 억압과 남성 중심적 문화에 순응하며 ‘남성이 바람을 피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돈만 많이 벌어 오면 좋겠다’라는 농담을 자연스럽게 하는 아줌마들이 꽤 있다.(365쪽)”라고 우리나라 여성들의 신세는 비참 그 자체인 것처럼 생각하고 계신 반면 “싱가포르 여자들은 전생에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기에 이런 나라에 태어났을까... 눈물나게 부러웠다.(31쪽)고 적고 있어 책을 읽는 여성 독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은 아닌가 은근히 걱정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리안을 먹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만, 저는 아직 먹어보지 못했으니 마치 천상의 과일인 듯 추켜세우고 있는 저자의 말씀과는 달리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가 방문한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평범한 삶에 대한 기록이나 혹은 그 나라의 여권과 관련한 특이한 사실들이 잘 요약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일반 독자들이 해당 국가들을 여행할 때 빠트리면 아쉬울 문화적인 장소에 대한 안내가 충분하지 않은 아쉬움은 있습니다.

 

저자께서 본인을 ‘펑키 지리학자’라고 소개한 것도 있었고, <펑키 동남아>라는 책이름도 그래서 ‘펑키’라는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았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 나오는 ‘펑키(funky)'란 “① 재즈 용어의 하나. ② 흑인 특유의 냄새라는 뜻의 은어로부터 나온 말로 재즈, 블루스, 디스코 같은 음악에서 흑인적인 감각과 선율적 특색 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이른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국어사전과 다른 의미로 사용한 듯해보여서 궁금합니다.

 

저자는 동남아 국가들을 방문했을 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많은 사진과 상세한 설명을 통하여 동행하면서 들여다보듯이 실감할 수 있도록 책을 꾸몄는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는 이주노동자들이나 결혼 이주여성들을 통하여 만들어진 동남아국가들에 대한 왜곡된 우리의 시각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자가 돌아본 나라들은 동남아국가들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배울이 많은, 저자의 표현을 빌면, 두리안과 같은 속살을 가진 나라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남아에서는 어린이, 청소년뿐 아니라 여성, 특히 어머니들이 참 행복해 보인다. 동남아 문화에서는 임산부를 축복하는 다양한 의식이 발달했고, 동남아 어머니들은 빈부, 종교,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존중받는다.(432쪽)”라고 저자가 아우트로에서 적은 글에서 ‘사랑과 행복의 상징 두리안을 찾아 떠나는 힐링 로드’라는 부제를 달아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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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에 꼭 타인의 희생이 필요할까 -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는 기술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지음, 한윤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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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각박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닐 듯합니다만, 최근 들어 뉴스를 장식하는 국내외 각종 사건사고들을 보면 세상이 각박함이 더 심해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변화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 즉 이기주의자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데,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통하여 이기주의적인 성향이 생물체들의 유전자에 녹아있다고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매트 리들리처럼 사회성과 협동성, 신뢰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이타성을 주장하는 견해가 맞서고 있기도 합니다.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인간의 이기성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 인류사회는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우선 숫자도 빠르게 늘고 있을 뿐 아니라 과학 등 인류의 지적자산 역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어 사회자체가 복잡해지고 그 사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관계도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 비하여 경쟁이 심화되었고, 성장이 화두가 되면서 남들과 비교하여 더 나은 삶에 도달하기 위하여 타인의 희생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어 다른 이와 함께 하는 삶도 자신의 이익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게 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내 행복에 꼭 타인의 희생이 필요할까>라는 강한 의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기주의자가 되지 않는 기술’이라는 부제에는 퇴색해서 찾아보기 힘든 ‘협력과 동반’이라는 과거의 아름다운 가치를 회복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자는 ‘도덕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라고 하는 철학이 오래도록 추구해온 화두에 대한 새로운 관점에서의 답을 구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유의 결과를 이 책에 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으로 여러분에게 경제, 사회, 정치를 개선할 수 있는 자극을 주고 싶다.  (…) 남을 위해 두 팔을 걷어 올리고 사회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다.(16쪽)” 모두 38개 꼭지의 글을 크게 3 그룹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 책의 1부에서는 인간의 도덕덕 행동의 본질과 근본 원칙을 다뤘고, 2부에서는 개개인의 욕구를 대변하는 심리와 실제 일상의 행동심리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를 중심으로 다뤘으며, 3부에서는 앞으로 우리가 공존하려면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저자는 요약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 대한 다양한 사례 혹은 연구성과들을 인용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말미에는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이어서 논한 내용에서 새로운 문제를 추출하여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 장에서 풀어내는 독특한 방식으로 책을 구성하였습니다. 하지만 워낙 다양한 사례 혹은 연구성과들을 인용하고 있어 때로는 그 연결이 모호한 구석도 없지 않아 개념이 정리되지 않은 채 진도를 나가는 경우도 있어 아쉬웠습니다.

 

“(인간은) 어쩌면 행복이라는 감정이 지속되지 않는 동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생각하며 폭정을 일삼는 대단한 두뇌를 소유한 동물이자 동시에 죄책감으로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동물이다.(85쪽)”이라는 구절을 담은 ‘눈물을 흘리는 동물’ 편에서는 감정이 실린 눈물에 관한 내용을 기대했지만, 오히려 심리의 본질을 다루고 있어 작은 실망(?)을 느꼈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한 저출산 문제와 관련하여 문제해결이 가능하거나 오히려 동떨어진 주장이 될 수도 있는 구절에서 한참을 새겨 읽었습니다. “영리하게 자시 잇속을 모두 계산하는 이기주의자는 생물학자처럼 자식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아이가 많다면 그는 성공한 것이다. 만약 아이가 없거나 적다면 그는 사회라는 체스를 제대로 두지 못한 것이다. (…) 또 존재의 투쟁에서 수백만년 뒤에도 대를 이을 수 있을 만한 상황을 선택한다.(145쪽)”

 

워낙이 다양한 사례들을 인용하여 해설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에서 만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골드만삭스 독일 지점장 알렉산더 디벨리우스가 한 “특히 시세가 공시되는 민영은행과 금융기관은 공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말은 “특시 시세가 공시되는 민영은행과 금융기관은 공익을 추구해야 할 의무를 느끼지 못합니다.(394쪽)”라고 해야 올바른 답이었을 것이란 저자의 수정을 읽으면서 의료의 공공성을 강조하는 시민단체의 주장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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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다른 사람들 - 인간의 차이를 만드는 정서 유형의 6가지 차원
리처드 J. 데이비드슨 & 샤론 베글리 지음, 곽윤정 옮김 / 알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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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책을 읽었습니다. “왜 너는 울고, 나는 웃었을까?”라는 알쏭달쏭한 광고카피에 무슨 의미를 담았을까? 결론을 미리 공개하면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뇌의 기능적 구조적 차이 때문에 다른 정서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뇌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시츄에이션에서 누군가는 대성통곡을 하는 반면 누군가는 가가대소를 터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는 우리말 제목을 달았지만 원저의 제목은 <The Emotional Life of Your Brain>입니다. 직역을 하면 ‘당신 뇌의 정서적 삶’이 되겠지만, ‘당신의 정서적 유형은 뇌에 달려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이 서문의 모두에 “이 책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특정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각각 어떠한 정서반응을 보이는지, 또 그렇게 다양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전문적이고 개인적인 기록이다.(5쪽)”라고 적은 것처럼 뇌과학에 근거하여 정서유형을 연구해온 발자취를 정리하고 있는 개인적인 기록이면서도 또한 정서반응에 대한 근거가 되는 어려운 뇌과학적 설명을 나름대로 쉽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인간의 정서유형을 여섯 가지 차원으로 구성하고 각각을 두 유형으로 나누어 모두 열두 가지 정서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회복탄력성에 따라서 빠른 회복자형과 느린 회복자형, 관점에 따라서 긍정적 관점형과 부정적 관점형, 사회적 진관에 따라서 사회적 민감형과 사회적 혼돈형, 자기 인식에 따라서 명확한 자기인식형과 불명확한 자기인식형, 맥락 민감성에 따라서 맥락 눈치백단형과 맥락 불협화음형, 주의 집중에 따라서 주의 집중형과 주의 산만형입니다. 저자는 여섯 가지 차원 마다 모두 10개의 질문을 바탕으로 자신의 유형을 알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서유형이 꼭 여섯 가지 차원여야만 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차원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게 되는지 애매하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혈액형에 따라 성격에서 차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나는 혈액형이 나빠서 성격이 나쁜가 보다 하는 자격지심 같은 것을 느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점을 우려한 듯 저자들은 “이상적인 정서유형이란 없다. 또 여섯 가지 정서유형의 스펙트럼 중 최상의 위치라는 것도 없다.(36쪽)”라고 단속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서적 유형은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뿐 아니라 유전적 요인이 20~60퍼센트 정도의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를 깔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유전적 특성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도 얹어두고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변할 수 있는 유형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정서적 유형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별도의 프로그램을 통하여 바꿀 수 있다는 제안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정서가 신체를 지배한다’라는 작은 제목의 글에서는 심신의학의 연구사례들을 인용하여 정서반응이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실험도 있습니다. ‘보톡스가 감정을 방해한다.’는 제목의 글입니다(207쪽) 잘 아시는 것처럼 보톡스는 근육을 마비시키는 독작용을 이용하여 얼굴 주름을 펴는 미용효과를 얻게 되는데, 근육이 마비되기 때문에 외부자극에 대한 감정이 얼굴에 나타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외부 자극에 대응한 뇌부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능성 자기공명장치가 개발된 것이 이런 종류의 연구에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입니다. 저자들은 자신이 분류한 유형의 사람들의 뇌부위가 어떻게 활성되는지 조사하여 그들의 정서유형분류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책의 후반부를 구성하고 있는 명상에 대한 설명은 언젠가 읽었던 구글의 ‘마음챙김(mindfulness)에 기초한 감성지능 교육과정’이 생각나게 합니다. (너의 내면을 검색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07728) 앞서 정서유형의 최상의 위치란 없다고 적었으면서도 정서유형이 일상적인 기능이 불가능할 정도로 극단을 넘어 병적 상태로 접어들게 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병적 정서상태는 ‘마음챙김’이라는 명상을 통하여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명상이 심리적 안정을 가져온다는 사실은 라마승려를 대상으로 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으로 입증하였다고 합니다(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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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고고학 현대사상의 모험 3
미셸 푸코 지음, 이정우 옮김 / 민음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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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철학적 사유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소개되는 책입니다. 출판사에서는 “푸코 개인의 사상은 물론 프랑스 철학의 이론과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과학적 기초'와 '사회적 실천'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중시하는 프랑스 철학의 특징이 잘 녹아있는 책이다.”라고 소개 말에 적었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다른 책들과 비교해서 <지식의 고고학>이 특히 어려웠다는 독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저 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어려울 한문식 철학용어로 옮겼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에서 얻은 느낌을 적기 전에 책을 쓴 푸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광기의 역사; http://blog.joinsmsn.com/yang412/9772557>를 통하여 푸코를 처음 만났습니다. 오생근 교수님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 혹은 침묵의 고고학’이라는 제목으로 해제를 하셨는데, “푸코가 광기를 이성의 대척점에 서는 비이성으로 보고 시대에 따라서 광기를 보는 사회적인 시각의 변화를 살펴보았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광인에 대한 서구사회의 인식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정리한 것인데, 그때는 ‘고고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광기의 역사>를 읽은 경험은 지금 근무하고 있는 기관에서 맡고 있는 정신요양기관의 평가업무와 관련하여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업무와 관련이 있는 분들에게는 일독을 권하곤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신요양기관의 평가에 대한 발표자료에 <광기의 역사>를 인용한 것을 보고 푸코를 읽었다고 하면 진보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분이 계셨습니다. <광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전혀 진보적 색체를 느끼지 못했는데 무슨 말씀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궁금증은 푸코의 30년 지기인 폴 벤느교수의 <푸코, 사유와 인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0902>을 읽으면서 풀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흔히 좌파주의 성향의 철학자로 알려진 푸코는 미지의 것에 대한 열린 정신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저항에 호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전투적 행동주의자’였기 때문에, 우파에서 싫어하는 그를 반동적으로 좌파가 그들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푸코는 마르크스도 프로이드도 믿지 않았고, 혁명도 마오도 믿지 않았으며, 사적으로는 선량한 진보주의적 정서에 냉소를 보냈다.(푸코, 사유와 인간, 187쪽)”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푸코의 철학적 사유의 핵심은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참인 지식과, 권력에 더하여 인간의 주체였다고 합니다. 특히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성하여 확립해가는 인간의 주체를 신뢰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식의 고고학>을 옮기신 이정우교수님이 역자 서문을 통해서 푸코와 프랑스 철학에 대한 우리사회의 오해를 지적하는 대목에 주목합니다. “프랑스 철학자들은 언제나 양면성을 지닌다. 그 하나는 그들의 철학이 순수사변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과학적인 일차적 연구를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 프랑스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철학자이기 이전에 우선 과학자인 것이다.(6쪽)”

 

이정우교수님은 푸코철학을 이해하려면 세 가지의 지적배경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인식론이 바로 ‘과학사의 철학적 이해’에 있는 것처럼 과학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조주의라고 부르는 20세기 프랑스의 ‘인간과학’ 즉 인문사회과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전반적인 문학과 예술에 대한 소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과학과 인문이 같이 녹아서 섞여야 그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식의 고고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지식의 고고학>은 매우 깊이 있는 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사상적이고 정교한 인식론적 논의로 일관되어 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한마디로 말해서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죽하면 읽다말고 책장으로 모셨다는 독자도 있었는데, 그래도 옮긴이는 “모든 파토스가 배제된 무색, 무미, 무취의 세계를 터득한 사람이라면 갖가지 질(質)들로 어우러져 있는 세계에서는 결코 느끼지 못할 깊은 감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고학(考古學)하면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선조의 생활과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고고학의 연구대상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구약 성서와 신약 성서의 기술과 사실과의 관련을 연구하는 고고학의 한 분야”로 성서고고학(聖書考古學)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앎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구하는 학문의 영역으로 ‘지식고고학’이라는 독특한 영역이 성립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우리에게 남겨진 유물에서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의 삶이나 생각을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고고학의 중요한 임무가 될 것입니다.

 

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을 통하여 특정한 분야의 지식이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흘러내려왔는지 비교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다양한 분야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을 기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자료가 당시의 상황을 유추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며, 같은 의미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표시하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동일한 의미로 변환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푸코는 이를 “문서의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25쪽)”이라고 짧게 요약하였습니다. 푸코는 “한 과정의 극한들, 한 곡선의 변곡점, 한 조절운동의 전복, 한 진동의 경계들, 한 기능작용의 문턱, 한 순환적인 인과의 변조의 순간(29쪽)”일 것이라는 현학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만,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은 기록을 남긴 사람의 주관에 개입하여 진실이 왜곡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변곡 혹은 왜곡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론을 구조주의적 사유를 통하여 정리한 푸코의 생각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유와 언어가 결코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사유가 언어화될 때 또는 언어가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게 할 때 가시적인 언어와 말하는 주체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언설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하는 푸코의 언어철학의 핵심을 알게 되면, 최근 소개한 우리나라의 한의학자들의 존재를 뒤쫓은 <한의학에 미친 조선의 지식인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00759>을 읽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남았던 앙금의 정체를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중요한 키워드로 보이는 언설(言說)와 언표(言表)에 대한 개념을 쉽게 정리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국어사전에 언설(言說)은 “① 말로 설명함 ② 말로 설명하다.”라고 하였고, 언표(言表)는 “① 말로 나타낸 바 ② 말에 나타난 뜻의 밖, 말로 드러낸 뜻의 이면(裏面).”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식의 고고학이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푸코는 “언설적 형성과 그의 변환에 대한 분석‘이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언설적 형성을 대상의 형성, 언표행위적 양태의 형성, 개념의 형성, 전략의 형성으로 나눈다면 각 부분에 대한 세부적 내용이 고고학적 범주론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언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언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입니다.

 

푸코에게 있어 언표란 “고유하게 기호에 속하는, 그리고 그로부터 출발해 우리가, 분석에 의해 또는 직관에 의해, 그들이 ‘의미를 가지는가’의 여부를, 어떤 규칙들에 따라 그들이 계기하고 병치되는지를, 그들이 무엇에 대한 기호인지를, 어떤 종류의 행위가 그들의 언어표현에 의해 실행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의 기능인 것(129쪽)”입니다.

 

언표란 기본적으로 ‘말로 나타낸바’이므로 문법적 의미의 문장이나 논리적 의미의 명제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언표는 감춰지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으며, 그렇게나 가시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자기 한계와 특성의 명시적인 담지자로서 스스로를 자각에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을 인식하고 그 자체로 고찰할 있으려면, 시선과 태도의 전환이 필요하다.(푸코, 사유와 인간. 33쪽)”고 한 것처럼 푸코는 단절된 기록의 연속으로 되어 있는 일반적 역사와는 달리, 단절을 감지하고 언표가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들을 긴밀하게 서로 연결함으로써 내재하고 있는 의미를 상호연관시켜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언설적 형성과정을 설명하면서 푸코가 인용하고 있는 광인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의학이 발전하면서 개별 질환에 대한 정의가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 형태에 있어 상이하고, 시간 속에서 분산되어 있는 언표들은, 그들이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상을 가질 때, 하나의 단위를 형성한다.(59쪽)”는 가설을 비롯하여 역사의 흐름에서 등장하는 언표들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고 이들을 다시 분류하며 그 아래 나타나는 통일된 형태를 도출하기 위한 가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푸코의 철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역사인식은 역사가의 그것과는 분명 차별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푸코식의 역사 그림 안에는 무언의 형이상학적 감수성이 있다.”고 폴 벤느교수는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조금 쉽게 설명한다면, 제가 하고 있는 의료영역에서의 질에 대한 평가만 하더라도, 해가 거듭되면서 나타나는 의료환경의 변화를 반영하여 평가지표를 수정보완하며 심지어는 더하거나 빼기도 합니다. 따라서 평가가 진행되면서 지표가 변화하는 단절 혹은 변곡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런 변곡점의 차이를 가진 동일한 이름의 평가결과라해서 같은 해석값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 의미의 비교는 가능하겠지만 절대적 의미의 비교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자이며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푸코의 개인사는 논외로 하고 푸코의 철학적 사유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가 철학을 공부한 다음 정신의학의 이론과 임상을 연구하여 <정신병과 심리학(1954)>, <광기의 역사(1961)>와 <임상의학의 탄생(1963)> 등 의학계에서 관심을 가질 책을 저술한 때문일 것입니다. <임상의학의 탄생>을 보면 동양의학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던 서양의학이 현재에 이르게 된 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서양의학이 발전하게 된 동력은 부검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환자가 사망 전에 보인 임상증상과 사망한 다음 얻은 부검결과를 연결하여 해석하는 관점에서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부검을 통하여 나타나는 기호(즉 부검소견)를 질병이라는 기의의 기표들로 간주하게 되는 일관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인데, 레넥은 간병변의 임상과 병리소견 사이의 일관성을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알코올성 간경변을 레넥 간경화라고 이름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리를 해보면,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은 언설의 형성을 통하여 다양한 영역에서의 텍스트들의 통일성을 특성화하는데 이로서 고고학적 탐구를 통하여 얻어진 비교대상들을 ‘같은 수준’ 또는 ‘같은 거리’에 위치함으로써, ‘같은 개념의 장’을 전개시킴으로써, ‘같은 전장’위에서 대립함으로써 ‘같은 것’을 말했는가 드러낼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지식의 고고학>을 읽으면서 그 난해함에 더하여 독자가 겪을 수 있는 혼돈을 폴 벤느교수의 친절한 경고를 인용하여 귀띔하고자 합니다. 푸코가 제시하고 있는 과학사적 담론의 형성과 변환에 대한 새로운 개념장치를 이해하는데 있어, 담론은 이데올로기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 뿐 아니라 거짓을 말하는 이데올로기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을 확실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담론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의미에서 하부구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록 푸코가 담론을 물질적 층위로 간주함으로써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비견되는 마르크스적인 하부구조와 헷갈릴 수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극단적으로 공격적이고 극좌파로 보일 정도로 단호했던 푸코의 회의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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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2012-09-17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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