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철학의 개념과 이해
헨릭 월프 지음, 이종찬 옮김 / 아르케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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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포르시안에 [북소리]를 통하여 인문학 특히 의학윤리와 의학철학에 대한 이해를 높여보겠다는 거창한 뜻을 세웠습니다만,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보면 의도한 만큼 와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소리] 2년차를 여는 책은 덴마크 의학철학계에서 나온 의학철학의 입문서라고 할 <의철학의 개념과 이해>입니다. 초판 서문에서 “의학에 대해서는 좀 알지만 철학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한 단순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24쪽)”라고, 저자들이 밝히고 있어 보다 일찍 이 책을 소개해드렸어야 한다는 자책감도 가지게 됩니다.

 

의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주술적 성격이 강한 원시종교에 그 뿌리가 닿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질병을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 존재에게 기대기 위하여 주술적 방법을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늘어가면서 철학적 사유를 통하여 질병의 원리를 이해하려 노력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리스 시대에 이르면서 의학이 철학적 사유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싹텄고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18세기에 이르러 자연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치유의 기술로서의 ‘의술’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과정을 거쳐 과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지만 한편으로 의학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철학과의 인연을 완전하게 끊어낼 수는 없다는 인식 역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의술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생명윤리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체계화되고 있는 생명윤리학에서는 “의학기술이 계속 발전하면서 생명윤리학의 주제가 철학과 의학, 법학, 사회학, 공공정책, 교육 및 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갈수록 현실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AC 그레일링 지음, ‘새 인문학 사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67909).

 

뿐만 아니라 철학의 영역에서도 의학과 다시 만나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북소리]를 통해서 소개해드렸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74996>를 통하여 강원대학교 철학과 김정희교수님은 인간의 삶에 대하여 사유하는 철학이 인간의 심리적 고통에 대한 답을 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쇼펜하우어 사상의 중심개념이라 할 동고(同苦; Mitleid)에 대한 사유를 통하여 ‘치료의 해석학’으로 정리해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덴마크의 의학철학자, 철학자 그리고 정신의학자가 같이 쓴 의학철학의 개념서라고 할 이 책의 원제는 입니다. 제목을 ‘의학철학’이 아니라 ‘의철학’으로 옮긴 것에서 이 책을 번역하신 이종찬교수님의 독특한 해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종찬교수님은 의(醫)가 의학(medicine), 의술(healing), 의료(medical care)의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다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의학은 의(醫)의 지식체계를, 의술은 진료행위를, 의료는 의(醫)의 사회적 실천을 각각 의미하는 것인데, 세 가지 요소가 상호 연관을 맺어 유기적으로 작용할 때 그 사회는 바람직한 의(醫)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이종찬 지음, 한국에서 醫를 논한다;http://blog.joinsmsn.com/yang412/4979553) 이 책의 저자들 역시 ‘의학은 과학인 동시에 테크놀로지이고 예술’이라고 보고 있어 옮긴이의 견해와 일치한다 하겠습니다.

 

저자들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5326>를 인용하여 ‘의학의 패러다임’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의학적 사고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때문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현대의학은 19세기에 비로소 탄생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의학이론은 단순한 사색에 근거하고 있어 동양의학이나 서양의학은 크게 차이나는 점이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서양의학자들은 19세기 들어서 건강할 때와 병에 걸렸을 때의 인간 유기체의 구조와 기능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세기는 바로 서양의학의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진 변곡점이며 현대의학이 전통의학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서양의학에서의 기계론적 질병모델은 정상과의 차이를 어디에서 나눌 것인가 하는 역치문제 등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발전해왔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기능적 결손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합리적 기준으로 일상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건강과 질병 사이의 정밀한 선은 대개 학문적으로 정해집니다.(101쪽)”라고 부어스가 말한 것처럼 기계론적 질병모델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임상적 근거를 토대로 하여 기준이 정해진다고는 하지만 그 정밀하다는 선에도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는 한계는 피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일부에서 “가치중립적인 과학적 개념으로서의 건강과 질병에 관한 생각은 환상”이라는 반박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있어 역학과 산업의학, 특히 사회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환경요인과 사회적 요인 역시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질병관에 대한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성해야 하는 변곡점에 접근해가고 있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의학과 사회학 간의 경계영역에서는 중요한 철학적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기계론적 질병관이 발전을 거듭하여 경험적으로 증명된 치료방법이 임상에서 적용되는 와중에서도 실재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한 치료방법을 선택하는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임상의사들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오랜 경험에서 비롯하는 느낌이 새로운 방법론이 탄생하는 토대가 된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임상현장에서는 경험론과 실재론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철학적, 의학적 논리로 설명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가운데 정신의학에 대한 논의의 비중이 의외로 큰 것 같습니다. 정신의학이 과학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하는 점부터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신질환을 정의하는데 있어 기계론적 질병관을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반정신의학자인 샤츠는 “정신의학은 정신 질환을 연구, 진단 치료하는 의학의 전문 분야로 정의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의미가 없으며 잘 못 내려진 정의이며,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질환과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관심이 없다. 실제로는 개인적, 사회적 그리고 윤리적인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이다.(165쪽)”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은 정신과 영역에서 다루고 있는 질환에 대하여 인간의 본질에 대한 논의로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안’이 단지 정신적 증상이 아닌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마음의 근원적인 상태라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인간에 대한 구성적 속성과 우연적 속성을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사들은 완벽하게 건강한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다면 어느 누구도 마음속의 동요, 알력, 부조화 내지는 불안을 갖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188쪽)”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에서 공감되는 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해석학자들은 인간이 생물학적 유기체라는 점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연주의적 틀 속에서는 한 인격체로서 인간이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서의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 즉 불안, 자유, 의지, 이해 등은 인간의 본질을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충분하게 분석될 수 없다.(199쪽)”는 견해를 내놓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이트에 의하여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제창된 정신분석학의 위치를 논함에 있어 저자들은 나름대로 중립을 지키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분석학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칼 포퍼는 정신분석학자들은 <임상실험>에 의하여 그들의 이론이 항상 검증되었다고 역설한다고 지적하면서 “(정신분석에서의) 매번의 경험은 그때마다 <이전의 경험>에 의하여 해석되었으며, 동시에 추가적인 입증 사례로 간주되었다. 나는 관찰이 무엇을 입증해주는가 자문해 보았다. 결론은 하나의 사례가 그 이론에 의해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이었다.(추측과 논박 1, 79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45276)”라고 통박하였습니다.

 

사실 다음과 같이 프로이트 자체가 검증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분석학을 과학적이지 못하다고 반대하는 그룹에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나는 정신분석학적 주장의 검증을 위한 당신의 실험적 연구를 관심있게 검토해 보았지만, 이러한 검증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관찰이 많다는 것은 그것을 실험에 의한 검증이 불필요하다는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234쪽)”

 

저자들은 정신분석학자들이 몇 개의 증례 정도만 발표하여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려는 경향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방법이 주목할 만한 유용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경험적 증거가 필요하다는 점을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의학윤리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의학적 결정이 내려져야 할 것이므로 철학으로서의 의학윤리에 대하여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저자들은 덴마크의 한 종합병원에서 경험한 의학적 윤리문제의 심각성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술적 가치판단을 내포하지 않은 의학적 문제는 윤리적 문제라는 점을 전제로 하여 분류하여 보았을 때 입원한 환자의 4분의 1에서 치료과정에서 내리는 결정이 윤리적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후가 좋지 못할 만성 환자에게 진단과 치료를 줄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입니다.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판단을 내리겠습니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종교적 이유로 수혈을 거부할 때, 또는 운전하기에 부적합하다고 생각된 환자가 자신의 차를 운전하기를 원하는 경우, 스스로를 돌볼 능력이 전혀 없는 환자가 요양시설에서 치료받기를 거부할 때, 그리고 동료의사에게 잘못 치료받은 환자가 자신의 치료에 대한 다른 의사의 견해를 알고 싶어 할 때(247쪽)”, 당신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 의사는 환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와 환자를 위해 어떤 행동이 최선인가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이 경우 의사에게는 적어도 세 가지 의무가 따르는데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 사회의 이해관계를 고려할 의무 그리고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하여 나름대로의 고민의 결과를 가지고 있어야 막상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의학윤리에 대하여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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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의 나라에서 온 편지
월터 웽거린 주니어 지음, 이명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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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환자의 투병과 관련된 책에 관심을 두었던 적도 있었기는 합니다만, 최근 이 분야의 책에 다시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집안에 암환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달포전 건강검진에서 위암이 의심된다고 해서 내시경검사를 받으셨습니다. 검사결과 위암이 확실해졌는데 수술을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검사결과를 알려드려야 하는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요즈음 위암은 새로운 치료방법들이 많이 개발되어 5년 생존율이 좋아졌기 때문에 위암 가능성을 담아서 수술을 받으셔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친구에게 수술을 부탁하고 날자를 받았습니다. 문제는 수술전 검사에서 폐에도 종양이 있고, 엉치뼈와 부신에 전이가 된 병소가 발견된 것입니다. 당연히 날자까지 받아둔 수술을 취소하고 폐종양의 조직검사를 했는데, 검사결과가 폐암으로 나온 것입니다. 상황이 심각해진 것입니다. 일단은 폐암에 대하여 약물치료를 우선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건강하신 편이라서 약물치료에 대한 심각한 부작용은 아직 없습니다. 여섯 차례로 예정된 항암치료를 어려움 없이 받으시고 위암에 대한 수술여부는 다시 결정하기로 하고 있습니다.

 

일단은 암치료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환자의 삶이 끝난 것처럼 비관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일단은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시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하버드대학의 혈액종양내과 제롬 그루프먼교수의 <희망의 힘; http://blog.joinsmsn.com/yang412/4861986>에서 읽었던 병리학의 조지 그리핀박사의 투병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는 점을 기억합니다. 아주 치료가 어려운 타입의 위암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조지박사는 “치료를 받아야 불필요한 고통만 더할 뿐이다. 나는 물론이고 식구들한테도 거기다가 뻔히 죽을 사람한테 왜 사회의 돈을 낭비하느냐”고 볼 수도 있는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랄 만큼 강력한 항암치료를 받고 살아남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치료에 임하는 환자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암의 나라에서 온 편지>는 집안 어르신처럼 폐암으로 진단받고 투병 중에 있어 더욱 관심이 가는데다가 목사라는 신앙인으로서 다른 암환자에게 암투병의 마음가짐을 예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암의 나라에서 온 편지>는언젠가는 자신이 암으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이야기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이유로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저자가 쓴 스물 두 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얼마 안 있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평온한 일이라는 것, 병으로 인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과정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지게 됩니다. “이 병이 두 번째 삶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게 하소서, 내 몸에서 자라기 싲가한 것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새로워지게 하소서.(37쪽)”라고 기도하면서 몸에 생긴 암덩어리를 싸워서 이길 대상이 아니라 같이 살아갈 운명체로서 이해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환자인 저자가 자신을 치료하고 있는 의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또한 마음을 울리게 합니다. “이 편지는 친구들에게만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네. 암이라는 모험에 뛰어든 환자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의사들에게도 보내는 것일세. 자네가 의사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겠나? 자네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내게도 알려 줄 텐가? 자유와 지혜와 선택만큼이나 중요한 것들을 내게 숨기려나? 의사들이여,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오. 자네들이 현명한 처신이라 여기고 지키는 침묵이 나의 위엄을 해치고 나의 지혜를 제한한다오. 내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지혜와 선택을 제한한다오. 자네들이 내게서 빼앗는 것은 절대로 작은 것들이 아니라오. 그건 마치 꼭 필요한 장기를 자네들 마음대로 잘라내는 것과 같다오.(123쪽)”

 

‘익숙해져라’ 환자의 선친께서 이른 대로 그리고 환자의 주치의가 이른 대로 암과 익숙해지시는 법을 깨닫게 도와드릴 계획입니다. 그리고 치료의 진행사항과 예후 등에 관하여 최대한 사실대로 전할 생각입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일을 계획하신대로 처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단은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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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 사라진 알베르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창석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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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에서 이벤트 문화버킷리스트를 시작하면서 과연 죽기 전에 보거나 듣고 싶은 책이나, 영화, 음악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절절한 문화상품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몇일을 두고 생각을 해보니 영화부문에서는 딱히나 집히는 것이 없었지만, 음악은 하나 있습니다. 학창시절 동아리에서 무대에 올렸던 손톤 와일드의 연극 <우리읍내>에 삽입곡으로 주인공의 장례식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모두 같이 불렀던 죽음에 관한 무거운 노래입니다. 가사도 거의 잊었습니다만, “오너라 오려무나, 죽음이여~~~” 이런 가사가 들었던 것 같습니다. 공연을 같이 했던 배우들을 만나면 들을 수 있겠지만, 극중에서 들어야 그 느낌이 그대로 살 듯 하여 아무래도 후배들이 이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려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읍내>를 떠올린 것은 어쩌면 읽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0: 사라진 알베르틴>편에서 다루고 있는 알베르틴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에 대한 저자의 두려움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루스트가 젊어서부터 천식을 앓았는데, 천식의 증상인 기침은 발작이 일어나면 숨이 넘어갈 듯한 공포가 엄습하기 마련이었기 때문입니다. 5편에 이를 때까지 할머니의 죽음이나 가깝게 지내던 스완씨의 죽음 등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간략하게 지나친 것은 주인공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놓치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은 저자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 점이라 하겠는데, 곰곰 생각해보면 두려움의 대상이라고 할 ‘죽음’에 대한 언급을 회피함으로써 죽음에 대한 공포를 줄여 보려는 간절함 같은 것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라진 알베르틴’편은 알베르틴과의 관계를 그리고 있는 전편인 ‘갇힌 여인’에 이어지는 에피소드입니다. 뿐만 아니라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성향을 고쳐보려는 주인공의 노력을 담고 있어서인지 ‘갇힌 여인’에는 ‘소돔과 고모라 III①’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사라진 알베르틴’에는 ‘소돔과 고모라 III②’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두고 있습니다.

 

갇힌 여인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점인데, 사라진 알베르틴에 이르러서는 알베르틴에 대한 주인공의 변덕이 더 심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알베르틴을 파리의 집으로 데려와 동거를 시작한 것은 사랑해서가 아니고 그녀의 동성애적 성향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는 점을 강조하다가도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는 식으로 엮어가던 ‘갇힌 여인’보다 더 극적이었던 것은 알베르틴이 집을 나가고, 그녀를 다시 데려오려는 주인공은 친구 생 루를 특사로 파견하는 한편, 알베르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녀를 밀어내려는 척하면서 상황을 꼬이게 만들어 이를 곡해한 알베르틴도 버티는 소위 밀당이 진행되다가 느닷없이 그녀의 죽음이라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요즈음 우리네 막장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해집니다.

 

또한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주인공은 당장 달려가 그녀의 죽음을 확인하고 슬픔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발베크의 호텔 급사 에메를 보내 그녀의 행적을 조사하는 치졸함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비탄에 빠진 주인공이 알베르틴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주절주절 늘어놓은 이야기만 해도 얼마나 되는지 인내심을 다시 시험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그리고서 알베르틴의 동성애 상대였던 앙드레를 끌어들여 관계를 맺거나 새로운 여성에 눈길을 돌리는 모습은 주인공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하는가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벗기고 벗겨도 새로 드러나는 양파껍질처럼 알베르틴의 동성애 취향에 연루된 사람들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것도 요즈음 우리나라의 드라마적 요소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샤를뤼스씨의 동성애 상대가 알베르틴의 동성애적 행적에 등장한다거나 생 루의 결혼생활을 파경으로 몰고가려 나선다거나 하는 등의 상황전개 때문인 것 같습니다.

 

책의 말미에 덧붙여 둔 ‘드레퓌스 사건’은 조지 D 페인터의 <마르셀 프루스트 전기>중의 제13장 ‘드레퓌스사건’을 옮겨둔 것이라고 하는데, 원전에 있는 내용이라기보다는 번역과정에서 결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글은 프루스트의 전기에서 옮겨온 탓에 사건의 전말을 가감없이 요약한 것이라기보다는 드레퓌스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프루스트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행적을 뒤쫓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다보니 작가의 지병의 영향도 있는 듯 긴장감이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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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 - 사람과 개가 함께 나눈 시간들
이강원.송홍근.김선영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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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분들이 책을 내셨습니다. 워낙이 개를 비롯해서 애완동물을 좋아하시는 분들인데 특히 개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보고 싶으시다는 말씀을 오랫동안 해 오시다가 드디어 일을 내셨습니다. 아내가 개를 특히 무서워하기 때문에 저도 특별한 관심을 두는 편은 아닙니다만 책을 읽고서 다음과 같은 추천의 말씀을 적어 드렸습니다. “인간과 개의 관계사(史)를 다뤘다. 거꾸로 읽으면 개를 통해 본 인간 문명사다. 저자들은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오가면서 우리가 가장 오랫동안 사귄 벗을 들여다 봤다.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저자들이 이 책을 준비할 무렵 유난스럽게도 개에 대한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스티븐 부디안스키의 <개에 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5418>입니다. 지금은 대표적인 반려동물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습니다만, 개가 인간의 삶에 끼어들게 된 배경으로부터 지금의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과정을 치밀하게 뒤쫓고 있는 책입니다.

 

‘사람과 개가 함께 나눈 시간들’이라는 부제를 단 <Dog>는 특히 개 품종에 따라서 얽혀 있는 역사적 사실과 함께 품종이 탄생한 배경 등이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독자분 가운데 키우는 개의 역사를 확인해보실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또한 많은 컬러 사진자료를 같이 넣어서 개품종과 모습을 연결해볼 수 있기 때문에 공부자료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개가 주인공이 되거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책들이 적지 않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크게 기여한 개의 이야기가 나오는 엠마 타운센트의 <다윈의 개;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17614>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콜로라도 야영지에서 만난 떠돌이 개와 함께 한 생활을 담담하게 그려간 테드 케라소티의 <떠돌이 개와 함께 한 행복한 나의 인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80779> 역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책이 등장하는 개들의 품종과 성품 등을 인용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조금은 남습니다. 그리고 부디안스키의 <개에 대하여>에서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만, 개가 사람들의 삶에 편입되는 과정을 서론이나 총론으로 정리해서 모두에 두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혹시 이 부분이 궁금하신 분들은 부디안스키의 <개에 대하여>를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를 식용으로 하는 문화를 비난하는 서구인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할 사건들도 이 책에서 처음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잘잘못을 따지겠다거나 변명을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최초로 남극 탐험에 성공한 아문젠 탐험대가 주요 운송수단으로 썰매개를 활용하면서도 필요하면 썰매개를 죽여 동료들의 사료로 주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대원들이 먹기도 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개를 식재료로 쓰고 있는 나라가 지금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도 납니다. 타국의 문화를 자신의 문화와 비교하여 비난하는 시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최근 독도 영유권문제, 2차 세계대전 기간중 군위안부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이 전쟁기간 중에 군수물자로 사용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토종견을 말살하기에 이르러 삽살개나 댕견과 같은 세계가 주목할만한 개품종이 사라질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들은 이 책의 원고가 빛을 보기 전에 <캉스독스; http://blog.donga.com/kangsdogs>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통하여 개를 비롯한 다양한 동물들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소개해왔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많은 내용이 블로그를 통하여 블로그독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만, 이 책에 소개되지 않은 내용 역시 꾸준하게 블로그를 통하여 소개하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한 번 찾아보기기 바랍니다.

 

앞서도 아내가 개를 무서워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애견인들 가운데는 남들의 입장은 몰라라 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 대하여 저자들은 “개를 사랑하는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지만 개만 보면 기겁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만큼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슬기롭게 대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99쪽)”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애견인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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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 - 세계인의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전하는 희망의 초대장 청소년 롤모델 시리즈 (명진출판사) 14
류태형 지음 / 명진출판사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명진출판이 기획해서 내놓고 있는 롤모델시리즈로,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님의 오늘이 있기까지를 뒤쫓은 <한국인의 열정으로 세계를 지휘하라>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명진출판의 롤모델시리즈의 기획의도 가운데 울림이 있는 구절을 옮겨 봅니다. “어른들은 모두 할 일이 있습니다. 자라나는 다음 세대의 꿈을 보살피고 키워주는 일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세계인과 나란히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그 꿈을 크고 넓은 비전의 토양으로 바꿔줘야 합니다.”

 

롤모델시리즈에서 다룬 세계인의 면면을 보면, 미국대통령 오바마를 비롯하여 스티브 잡스, 워렌 버핏, 힐러리 클린튼, 오프라 윈프리, 후진타오 등 동서양을 망라해서 청소년들에게 삶의 등대가 될만한 분들을 다루어왔고, 한국인으로는 고 김수환추기경님과 반기문 UN사무총장님 등의 이야기를 내놓고 있습니다.

 

음악전문지 <객석>의 편집장을 지낸 바 있는 류태형님이 집필을 맡은 정명훈 지휘자의 이야기에서 진한 여운으로 남는 무엇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으로 이루어진 정트리오는 음악을 잘 모르는 저도 잘 알고 있을 정도이며 이들의 형제들 역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였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이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 알아챈 어머니의 헌신적 뒷바라지를 통하여 이들의 재능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재정적 지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음악에 있어 정신적 지주였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열 네 살 때 시애틀에서 열린 첫 독주회에서 실수를 한 명훈에게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명훈아, 난 네가 단지 정확한 연주를 했다는 평을 받기보다는 실수를 하더라도 청중에게 감동과 설렘을 주는 연주를 했으면 좋겠다.(91쪽)” 이런 일화를 비롯하여 이 책에서는 특히 세계적 지휘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정명훈님이 걸어온 발자취는 물론 음악과 우리나라에 대한 그의 생각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연전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를 통해서 막연하던 지휘자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구체화된 바 있습니다만, 프롤로그를 통하여 지휘자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지휘는 우리가 말하는 리더십을 가장 잘 보여주는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휘는 정치와도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나라를 다스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공자가 설파했던 ‘수신제가 치국평천하’가 적용되는 일입니다. 지휘자가 자기 소신을 수양하고 확고한 철학으로 음악을 해석해야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거대한 화음으로 열매를 맺게 되지요.(8쪽)”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를 것이 없겠습니다만, 음악분야에서 세계적 인물로 자리매김하려면,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과 개인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욕심을 내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때를 만나지 못해 화사한 꽃을 피우지 못하고 봉오리 상태로 져가는 인재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바로 정명훈님이 시애틀에서 첫 번째 멘토 제이콥슨여사와의 만남이 그런 경우가 될 것 같습니다. 정명훈님의 어려운 집안형편을 고려하여 레슨비도 받지 않으면서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한 제이콥슨 여사는 “네가 단지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한다면, 나는 너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너 역시 굳이 내게 배울 필요가 없단다. 연주 기술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아주 많으니까. 그러나 네가 피아니스트를 넘어 음악가가 되고자 한다면 내 제자가 되렴.(68쪽)” 역시 좋은 선생님은 좋은 제자의 재능을 제대로 평가하는 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정명훈 마에스트로의 성공비결로 음악가로서의 한결같은 직업의식과 유연한 리더십을 꼽고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그의 명성을 알리게 된 데는 그의 인내심과 단원들과의 소통을 첫 번째로 삼은 그의 열린 리더십이 큰 몫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실력있는 단원을 뽑기 위하여 단호한 선택을 했다는 점도 역시 주목할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파리의 바스티유 오케스트라, 로마 산타 체실리아 오케스트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의 음악감독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외국생활을 해오면서도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만큼은 잊은 적이 없다는 점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KBS교향악단의 음악감독직을 잠시 맡게 되는 과정이나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음악감독직을 맡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음악도 애국이 될 수 있다.(335쪽)’고 하신 독립운동가 외할아버지의 정신이 오롯이 그의 핏속에 살아있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나라 혹은 단체보다 개인을 앞세우는 요즈음 젊은이들이 꼭 배웠으면 싶은 정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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