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 2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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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편에서 뤼야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전남편의 소재에서 찾던 갈립은 사촌형 제랄 역시 종적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갈립은 제랄의 칼럼 속에서 두 사람이 어디에 숨었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제랄의 집에 숨어들어 지내면서 그의 칼럼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작가는 홀수장에서 갈립의 행적을 뒤쫓는 한편, 짝수장에 배치한 제랄의 칼럼에는 집필 당시의 터키의 국내 상황은 물론 과거에 이스탄블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과 신화, 전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소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칼럼에서 다루고 있는 과거의 자료들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연관을 만들어서 과거 사건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 8장에서는 터키의 ‘민주화의 길’이라는 암흑기를 지배하던 독재자가 자녀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소개하는 부분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가운데 독재자가 촌부의 옷을 입고 경호원도 없이 민정시찰에 나서는 부분은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고 하는데, 근래에 우리 지도자가 남몰래 민정시찰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16장에서 왕위계승서열 상위에 있는 왕자가 자신의 어깨에 짊어질 책임의 무한함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한 끝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지 혹은 될 수 없는지’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문제에 답을 얻기 위하여 온전히 독서에 몰두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수많은 책을 읽은 왕자는 자기 자신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그 책을 쓴 사람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그동안 읽은 책을 찢거나 불태워버리고 맙니다. 책읽기를 통하여 자신을 찾고자 한 왕자의 집념은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의 마음 속의 고요를 기다리는 것으로 평생을 보냈다.(283쪽)”고 적고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2부가 시작하면서 제랄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갈립에게 제랄을 찾는 전화가 이어집니다. 군부쿠데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겠으니 칼럼에서 다뤄달라는 요구인데 갈립은 제랄인척 대응하면서도 만나주기를 거절합니다. 결국 이 남자는 2부 막바지에서 무렵 제랄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게 되는데, 제랄의 소재를 모르는 갈립으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랄이 종적을 감추기 전에 신문사에 남겨둔 여분의 칼럼이 줄어들어가면서 제랄의 칼럼의 경향을 정리하게 된 갈립은 제랄을 대신하여 칼럼을 작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는 자신을 제랄에 일치시키고자 하는 갈립의 무의식 희망사항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검은책>이 전하는 비극적 결말은 갈립이 뒤쫓던 제랄이 알라딘 가게 앞의 작은 광장에서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진 채 발견되고, 이어서 알라딘의 가게 안에서 역시 총에 맞아 숨진 뤼야가 발견되는 것으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작가가 자신의 목소리로 처음 등장하고 있습니다. “독자여, 아, 독자여, 나는 이 책을 쓰는 내내, 화자와 주인공을, 칼럼과 사건이 설명되는 부분을 구분하려고 노력했는데, 언제나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아마 눈치를 챘을 것이다. (…) 어떤 책에는 우리 마음속 깊이 와 닿아 영원히 새겨지는 페이지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가 특출한 솜씨를 발휘해서가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 써 내려가기’ 때문이다. 마치 ‘그 스스로’의 흐름 때문에 너무나 우리의 마음속 깊이 와 닿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경우 말이다. (…) 내 이야기의 이 페이지들에 여러분과 여러분의 기억을 남겨 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쇄공에게 이 페이지를 검은 잉크로 칠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일 것이다.(292쪽)” 검은 페이지에 대한 갈립의 이야기가 한번 더 나옵니다. “이제는 뤼야에게서 내게 남은 것들은 오로지 이 글이다. 이 검고, 새까만 어두운 페이지들.(313쪽)”

 

기억은 <검은책>에 숨겨진 모티브 가운데 하나이기도 합니다. 곳곳에서 기억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등장하는데 제랄은 치료약이 없는 기억감퇴증에 걸렸고, 자신의 병을 숨기기 위하여 갈립과 뤼야에게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전이 숨겨져 있음에도 갈립은 내색하지 않고 제랄과 뤼야의 행적을 뒤쫓았다는 점이 아직도 이해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가 <검은책>의 형식에 대하여 옮긴이와 인터뷰한 내용이 옮긴이의 말에 나오는데, “소설은 사실주의 소설처럼 사건이 전개되는 동시에 사이사이에 칼럼이 등장하는데, 이 둘은 고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검은책>은 나의 정신 상태를 설명하는 내 영혼의 혼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320쪽)”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 경우는 옮긴이가 적은 대로 “줄거리를 따라가는 독서법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이야기가 중간중간에 끊기며, 칼럼이 삽입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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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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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르한 파묵의 네 번째 소설 <검은책>은 전작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고 당혹감을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는 홀수장은 제3자의 눈으로 갈립의 행동을 뒤쫓고 있으며, 짝수의 장은 갈립의 사촌형 제랄이 1인칭으로 서술하는 글(혹은 칼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도 한참을 읽어나간 다음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립의 아내 뤼야는 백부의 딸이니 사촌간인 셈입니다.

 

홀수장의 주인공 갈립이 출근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가지 집에 있던 뤼야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종적이 묘연하고, 사촌형 제랄 역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됩니다. 이어서 갈립은 사라진 아내와 제랄의 행방을 찾는 과정을 제3자적 위치에서 뒤쫓아 가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구조를 두고 갈립은 누군가가 자신을 뒤쫓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고 적고 있기도 합니다. 독자는 갈릭의 뒤를 따라 이스탄블 시내 곳곳을 방문하게 됩니다. 만약 이스탄블에서 잠시라도 살아보았더라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났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하지 못하니 짙은 안개 속을 걷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손끝이 겨우 보이는 안개 속에서 앞선 사람을 놓칠까 바짝 붙어가다 보면 좌우로 무엇이 지나가는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는 것이지요.

 

또 다른 이유는 갈립의 행적을 뒤쫓는 제3자가 가끔씩 갈립을 놓치는 모양으로 설명이 생략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3장의 말미에 뤼야가 남겼다는 작별편지를 발견했다는 서술을 건너뛰고 있는 장면이라던가 열아홉 단어로 되어있다는 편지도 ‘가족들에게 잘 말해’, ‘네게 곧 연락할게’라고 조각내어 독자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문은 뤼야의 종적을 찾기 위하여 찾은 친구 사임의 집에서 갈립의 행동이 헷갈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 갈립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뤼야에게 전화를 했다. 어쩌면 밤늦은 시간까지 사임의 집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으니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고 다정하게 말했다.(113쪽)” 분위기가 미스터리한 쪽으로 흘러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임은 다양한 출판물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는 친구입니다. 갈립은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통하여 뤼야의 전남편의 소재를 파악하려고 한다는데 과연 가능할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행적을 뒤쫓는 남자가 심야에 길거리에서 만난 삐끼에 이끌려 퇴역배우를 흉내내는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제랄의 컬럼은 다양한 소재를 통하여 터키의 역사를 비롯해 사회상을 들여다보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랄이 작가가 자신을 투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글쓰기에 관한 저자의 생각을 이미 고인이 되었다는 칼럼니스트들을 통하여 소개하기도 합니다. 도덕보다는 재미를 위해서 글을 쓴다는 제랄에게 전하는 이들의 충고는 글쓰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독자라면 따로 메모를 해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일부를 인용해보면, “즐겨 쓰는 속담, 관용구, 격언, 일화, 농담, 시행, 금언을 모아두라.”, “주제를 택한 다음 글에 왕관을 씌울 적당한 금언을 찾지 말고, 금언을 택한 다음에 이 왕관에 걸맞는 적당한 주제를 찾으라.”, “첫 문장을 어떻게 쓸지 결정하기 전에는 책상에 앉지 말라.(130쪽)” 등등입니다.

 

자신의 작품들에 대하여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고 파묵이 말한 것처럼, <검은책> 역시 <하얀성>과의 연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겨울날, 아내가 이렇다 할 이유나 핑계도 대지 않고 떠나 버리자, 작가에게는 힘든 시기가 시작되었다. (…) 아내가 떠나기 전에 그는 서로의 삶을 바꾼, 서로 닮은 두 사람에 관한 책(독자들이 ‘역사적’이라고 했던)을 썼다고 한다.(236쪽)” 여기에서 말하는 여기에서 ‘서로 닮은 두 사람에 관한 책’은 파묵의 전작 <하얀성>을 암시한다고 하는데, 아내가 떠난 작가에서 갈립의 모습이 떠오르고 있어 제랄과 갈립이 하나의 모습으로 통합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정리를 해보면, <검은책> 1권에서는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홀수장과 짝수장이 교체되면서 터키의 역사로부터 현대의 사회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엮어 넣고 있어 이야기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미스터리한 상황입니다. 이렇듯 풀어놓은 이야기가 2권에서는 어떻게 모아져 정리될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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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 닮은 듯 다른 한옥에서 발견하는 즐거움
이상현 지음 / 시공아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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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 워크숍을 다녀오는 길에 남양주시에 있는 다산유적에 들렀습니다. 이곳에는 다산선생의 묘소가 있고, 생가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여유당’이라는 이름의 사랑채와 안채로 된 단촐한 한옥을 보면서 어렸을 적 살았던 한옥이 그리워집니다. 그때만 해도 생활공간이었던 한옥이 어느새 추억 속의 공간으로 밀려나 있음을 발견합니다. 안채 마루에 앉아서 혹은 토방에 서서 안내하시는 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건너편 사랑채 기와 위에 소복이 앉은 눈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사랑채의 창을 건너 안채의 건넌방이 엿보면서 왜 이런 구조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마침 시공아트에서 새로 나온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을 읽게 되면서 저자이신 이상현님께서는 명쾌한 답을 주실까 생각도 해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은 이제는 시골마을에서도 귀한 존재가 되고 있는 전통 한옥에서 발견하는 독특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저자가 참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먼저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전남 나주시 도래마을에 있는 홍기웅가옥을 설명하는 글을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옥에는 음악처럼 높낮이가 있어 끊임없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지붕 선이 리듬을 타고 추녀 끝에 걸리면, 벽면을 채운 재료들이 질감의 변화를 이끌며 흥을 돋운다. 한옥에서 시작한 율동감은 자연스럽게 마을로 이어진다. 가을이 봄처럼 화사한 도래마을이라면 율동감이 당연 도드라진다.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강한 율동감이 몸을 자극해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흥겹다.(245쪽)” 하나 더, 경남 안동시에 있는 남흥재사에서의 느낌도 예사롭지 않게 설명합니다. “누마루에 앉자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마음을 태운 시선이 누마루에서 쪽마루를 지나 대청으로, 대청에서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파도를 탄다. 동선을 거꾸로 흐르는 눈길이 리듬을 타 신바람 난다.(351쪽)”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한옥을 구경거리 삼아 찾아보지만 그 집이 그 집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한옥에서 살았던 경험이 다른 한옥에서 특별한 의미를 구하려는 시선을 가로막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한옥을 제대로 감상하는 방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겉모습을 중시하는 다른 나라 건물과 달리 한옥은 사는 사람을 중시한다. 때문에 한옥을 제대로 보려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 집에 사는 사람처럼 대청에 올라 먼산바라기도 하고, 방에 앉아 머름(문턱보다 높은 창턱)에 팔을 얹고 마당도 내다봐야 한다.(211쪽)” 하지만 한옥에 대하여 정통했다고 할 저자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한옥도 있는 모양입니다. 짐 구석구석을 돌아보아도 물음표가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궁금증을 풀어낼 단서가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역시 한옥을 제대로 감상하는 눈은 의문을 가지고 이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열리게 되는 모양입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여행>에서는 모두 24곳의 전통한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7곳의 살림집 한옥 이외에도 성당, 절집, 서원, 향교, 재사 등 전통 건축방식으로 지어진 7곳의 한옥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정감이 넘치는 설명을 뒷받침할 많은 사진을 더하고 있어 마치 현장에서 설명을 들으면서 전통한옥을 감상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어렸을 적에 한옥을 짓는 과정을 보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건축하시는 분들이 설계도면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기억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기억이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되살려주는 대목도 있습니다. “한옥의 아름다움 중에서 첫 번째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지붕선을 꼽는다. 그런데 한옥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지붕선을 만드는 방법이 아주 독특하다. 그냥 대충 만든다. 정말 대충만든다.(291쪽)” 두 번씩이나 강조한 대충 만드는 놀라운 과정은 책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책에서 소개하는 전통가옥들은 개인의 재산임에도 세상에 내놓은 것들로서 관심이 있는 분들이 둘러볼 수 있는 곳들이라고 합니다. 근처를 여행할 기회가 있다면 들러서 전통한옥에 담겨 있는 특별한 의미를 이상현님의 정감 넘치는 설명과 함께 감상해보는 것도 우리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높이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도 다산 생가의 모습을 담은 사진 두 점으로 전통한옥의 멋을 소개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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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마뇽 - 빙하기에서 살아남은 현생인류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브라이언 페이건 지음, 김수민 옮김 / 더숲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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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일본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의 추리소설 <제노사이드;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3780>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내란으로 어수선한 콩고에 출현한 신인류를 제거하려는 미국정부의 음모를 뛰어난 정보처리능력을 가진 신인류가 일본의 민간기구를 움직여 저지하고 생존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줄거리입니다. 미국 정부의 이와 같은 음모는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의 열대 우림에 신종 생물 출현. 이 생물이 번식하게 될 경우, 미국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위협이 될 뿐만 아니라 전 인류 멸망이라는 위험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제노사이드, 11쪽)”는 내용을 담은 정보보고를 토대로 현생인류의 멸망을 우려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사실 현생인류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신인류가 출현하게 되면 지구라는 제한된 틀 안에서 모든 자원을 공유해야 할 것이므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경쟁에서 밀려난 현생인류가 시나브로 멸망의 길로 들어서거나, 더 나쁜 상황을 상정한다면 신인류의 공격을 받아 더 빠르게 멸망하는 수순을 밟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미래상황을 예견한 미국 정부의 고위층은 신인류를 제거한다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신인류는 어떻게 등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관심거리가 될 것 같습니다. ‘아프리카 이브’가 인류의 조상으로 지목되는 것처럼 가즈아키는 아프리카에 사는 현생인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신인류가 출현할 것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백의 소설 <어느 섬의 가능성; http://blog.joinsmsn.com/yang412/10862735>에서는 전쟁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현생인류는 순식간에 멸망의 길에 들어서고, 살아남은 소수의 현생인류는 그때까지 쌓은 문명도 같이 사라지면서 동물처럼 살아가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엘벡은 이처럼 황폐해진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신인류가 체세포복제기술을 통하여 인공적으로 만들어질 것으로 예견하였습니다. 현생인류의 시선으로 인공으로 조성된 환경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신인류의 삶을 과연 우리가 바라는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인류가 과연 현생인류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등장했던 구인류를 현생인류가 대체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초기 현생인류는 물론 고인류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면확하게 재구성하는 것 자체가 공상과학소설을 쓰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고고학, 문화인류학, 고기상학, 지질학 등등 다양한 학문영역의 발전에 힘입어 퍼즐놀이를 짜 맞추는 작업에 조금씩 진척이 있는 것 같습니다.

 

브라이언 페이건 교수의 <크로마뇽>은 바로 네안데르탈인이라고 하는 고인류와 크로마뇽이라고 하는 현생인류가 공존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저자는 서문에서 네안데르탈인은 “강력한 힘과 용기를 가졌으며 가장 단순한 옷차림에 무기를 소지한 원시적인 인류로, 그들은 말로 정확하게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이 부족하고 지적능력에 한계가 있었다.”고 추측하였습니다. 반면 크로마뇽인은 “최초의 해부학적 현대 유럽인으로, 그들은 잘 발달된 뇌와 언어능력, 혁신적인 성향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가진 모든 놀라운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었다.(5쪽)”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관계를 아프리카에서 서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제한된 영역 안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고인류와 관련된 고고학적 흔적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은 탓으로 보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시조라고 할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는 6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처음 출현하여 40만~50만년 전에 서아시아 루트를 타고 유럽으로 이주하였는데, 아마도 기후변화로 인하여 생존에 필요한 자원이 부족하게 된 것이 이유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20만년 전경에는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이 번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17만년전 무렵에는 첫 현생인류가 역시 아프리카에서 출현하였고, 이들은 12~13만년 전의 간빙기 동안에 번성하게 되는데, 7만3천5백년 전에 일어난 토바산의 화산폭발로 많은 인류가 사망하였다는 것입니다. 5만5천년전을 기점으로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4만5천년 전무렵에 서유럽에 크로마뇽인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네안데르탈인은 3만년에 걸쳐 이어진 맹추위가 끝난 15만년 전부터 숫자가 늘어나 영국의 남부와 대서양에서부터 벨기에와 프랑스까지,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중앙유럽을 거쳐 흑해의 먼 동쪽에서부터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또는 그 너머 중앙아시아 깊숙한 곳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른 방대한 지역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3만 9천년 전에는 이탈리아의 캄파니아 화산이 폭발하여 역시 많은 생명체가 사라지게 되었는데, 3만년전 무렵부터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이 공존한 시기는 4만5천년 전부터 약 1만 5천년 이상이 되는데 그들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저자는 여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크로마뇽인들은 네안데르탈인들을 바로 공격하여 학살했거나 그들의 사냥터를 빼앗고 외각으로 내쫓아 서서히 멸망으로 내몰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저자가 상상하는 것처럼 두 집단이 서로 거래를 하고 사냥법을 비롯한 기술, 생각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결혼까지 했을까요?

 

저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에서 식인풍습을 증거하는 흔적을 볼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도 크로마뇽유적에서는 식인풍습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크로마뇽인들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도구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고 있는 반면에 네안데르탈인은 그들이 생존했던 오랜 세월을 두고 기술의 발전을 시사하는 증거가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또한 그들 간에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발전된 언어가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인류는 영장류로부터 한 단계 발전하여 도구와 불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만, 현생인류처럼 이런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인지능력은 갖추어지지 못한 존재였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조용한 사람들인 네안데르탈인들은 일상에서 놀랍도록 인간다운 삶을 살았지만 여전히 인류가 수십만 년 전 유럽에서 사냥하던 때부터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원시적인 방식을 따랐다. 그들은 짐승을 사냥했고, 그들의 사냥감과 동일한 환경적 영향을 받았으며, 때때로 포식자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그들이 목가적인 평화로운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131쪽)”

 

저자는 현생인류가 고인류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공격적이었을 가능성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원활용에 있어 경쟁관계에 있었다는 점과 현생인류가 고인류에 비하여 유리한 입장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대인류와 현생인류는 대부분 비슷한 사냥감을 사냥했는데 현생인류가 사용하는 무기가 더 가볍고 관통력도 더 좋았다. (…) 이 두 인류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다. 오리냐크기 사람들에게는 완전한 표현이 가능한 언어능력이 있었고 호모 사피엔스가 가지는 모든 인지능력이 있었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몸이 구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의사소통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현생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상상력과 자아인식능력이 부족했다.(206쪽)”

 

저자는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에 따르는 환경재앙으로 식량이 급감하여 생존환경이 급변하였을 뿐 아니라 이어서 닥친 극심한 한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복제작기술의 차이가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의 생존가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고인류학의 연구성과를 깊이 이해하지는 못합니다만, 고인류가 갑자기 닥친 환경변화를 고스란히 앉아서 당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생존에 관한 생물체의 반응은 본능적인 것이라 할 수 있어, 사냥감이 부족하면 사냥감을 따라, 추위가 닥치면 따듯한 남쪽으로 이주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단순한 생각 말입니다. 저자는 지나치게 유럽이라는 제한된 장소에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을 집어넣고 생존에 관한 문제를 풀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출현했던 아프리카에 남아있던 네안데르탈인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유럽 이외에 서남아시아를 경유해서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네안데르탈인, 크로마뇽인은 없었겠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현생인류가 급속하게 많아지면서 생활영역이 확대됨에 따라서 지구상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멸종되는 과정에 내몰리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인류의 쇠망 역시 이런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수적으로 우세하던 구인류가 현생인류에게 밀리게 되는 과정에는 두 인류의 능력의 차이에 더하여 기후변화도 기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생인류에 의한 제노사이드가 커다란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노사이드는 다양한 이유로 지구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념, 종교 문제로도 제노사이드가 벌어지고 있는데, 생존에 관련된 자원을 두고 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치열하게 대립하였을 것 같습니다. 태즈메니아 원주민이 멸망하는 과정을 통하여 현생인류의 제노사이드 성향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제러드 다이아몬드교수의 <제3의 침팬지>에서 인간에 숨어 있는 제노사이드 본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이아몬드교수는 “인간의 모든 본성 중에서도 동물의 선조에게서 가장 직접적으로 물려받은 것이 제노사이드 본성이다.”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크로마뇽인의 유적에서 네안데르탈인을 먹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크로마뇽인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집단학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포리스터 카터의 <내 영혼이 따듯했던 날들; http://blog.joinsmsn.com/yang412/10284691>에서는 자원을 지속가능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일찍이 터득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현명한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자연의 이치란 말이지...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만큼만 가져야 한다. 사슴을 잡을 때도 제일 좋은 놈을 잡으려 하면 안돼. 작고 느린 놈을 골라야 남은 사슴들이 더 강해지고, 그렇게 해야 우리도 두고두고 사슴고기를 먹을 수 있는 거야.” 이런 지혜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동물세계의 포식자들이 허기를 느낄 때만 필요한 만큼 사냥에 나서는 것을 보고 배웠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크로마뇽인들은 필요한 만큼만 사냥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사냥감이 무리를 지어 움직이기 때문에 사냥과정에서 수확을 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냥과정에서 부상을 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이상의 동물을 죽이기 위하여 사냥을 계속하는 것이 과연 비용효과적이었겠는가 싶습니다. “매년 사냥꾼들은 짧은 마구잡이식 살육기간 동안 그들에게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동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냥했다. (…) 많은 들에서 마치 사냥꾼들이 즉석에서 바로 먹거나 말릴 수 있는 부위만 취한 다음에 수십 마리의 죽은 말들을 그냥 석게 버려둔 것처럼, 돌칼을 사용한 흔적이 없었다.(336쪽)”

 

브라이언 페이건교수의 <크로마뇽>에서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인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성과를 가늠할 수 있고 도판으로 소개하고 있는 현생인류의 초기 예술작품을 덤으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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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자 - 2012 제36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최민석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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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최민석 작가의 장편소설입니다. 그리 두껍지 않지만 묵직하게 남는 것이 많았습니다. 전통과 권위 있는 문예지에서 신인상을 받고 등단하였지만 당장 생계가 막막하여 선배의 꼬임에 넘어가 야설을 쓰는 삼류 작가인 주인공 ‘남루한’이 한때는 세계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매미로부터 얻었다는 초능력 스티커를 파는 전직 복서 ‘공평수’의 자서전을 대필하게 되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는 줄거리입니다.

 

앙금으로 남는 첫 번째, 신인상을 받고 등단한 촉망받는 신인작가라도 소설집이라도 낼라치면 빨라서 2년 늦으면 4년이나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국문학계의 관례라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 복싱 프로모터를 하는 남루한의 아버지 남강호가 양정팔이라고 하는 유망주를 한눈에 알아보고 복싱을 시작하도록 권유하면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능력은 바로 탐욕일세(149쪽)”라고 말하는 장면.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간혹 목표 지향적 인간 중에 눈앞의 푯대를 향해 돌진하는 유형이 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 푯대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하기도 한다.(156쪽)”라는 비유와 연결되어 요즈음을 사는 일부의 행태와 비교되는 것 같습니다.

 

그 세 번째. “그러니까, 우리는 평가에 목을 매고 평가에 울고 웃는 이상, 줄기차게 평가만 쫓아가게 돼. 그건 너무나 아슬아슬한 인생이라고. 나를 봐. 챔피언이지만, 한 번 진 걸로 영원한 패배자야. 게다가, 링 안에선 이겨 봤다고 쳐. 링 밖에선? 나는 완벽한 패배자야. 그건 모두 사람들이 오로지 승부에 집착하고, 결과만 기억하고, 땀 흘리는 과정을 소중히 여기지 않기 때문이야.(188쪽)” 이 부분은 공평수의 재기전을 두고 코치인 헤드의 자의적 해석이라는 토를 달고 있습니다만, 제가 바로 요양기관의 평가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어 느낌이 별다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평가가 진행될수록 기관에서는 평가에 목을 매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공평수는 양정팔과 가진 재기전에서 마지막 12라운드까지 다운을 주고받는 치열한 대결을 펼쳐 관중의 찬사를 받게 됩니다만 그는 그 찬사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덤에서 고요히 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뇌종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공평수가 50줄에 재기전에 나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다운이 거듭되는 치열한 대결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라운드까지 버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차피 언젠가는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이야. 어떻게 지느냐? 그래, 중요해. 사람들은 어쩌면 그걸 내 마지막 모습으로 기억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모습이 근사하지 않더라도, 초라하더라도, 보잘것없더라도, 상관없어. 헐렁한 트렁크스, 조명, 땀 냄새, 훈련, 실패로 터득한 내 스텝, 그걸 기다리는 링. 그것만으로 충분해. 이 위에 있을 때, 나는 필요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지거든.(217쪽)” 링에서 장열하게 스스로를 산화시켜 사람들이 자신을 복싱인이었음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공평수의 애절한 희망이 느껴집니다.

 

작가 스스로 이런 절박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내 정신적 자위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런 점에서 그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쓴 소설이 출판되어 당신의 시간과 금전을 쓰게 했다는 점에 깊이 사과드린다.(222쪽)”고 적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이런 변명(?)을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고, 그런 그들에게 이 소설은 작은 희망의 촛불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가로서의 재기전인 소설을 마무리하여 공모전에 나선 남루한은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됩니다. 하지만 남루한은 공모전 탈락이 중요치 않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공평수가 그랬듯 승부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220쪽)” 승부에서 졌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정한 수준에 도달했다면 이긴 삶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대선 결과를 두고 뒷이야기가 무성한 것 같습니다. 후보가 인정한 결과를 두고 세상이 들끓을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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