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의 생명윤리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총서 17
이상목 지음 / 아카넷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얼마 전에 북소리를 통하여 마크 커쥬스키와 로사 린 핀커스의 <병원윤리 딜레마 31;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96461>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이 책을 추천하신 고윤석교수님은 “의료인들은 흔히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고, 환자의 이익을 최선으로 하는 의료행위를 한다면 의료윤리의 원칙과 부딪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때로는 의사가 최선이라고 판단한 환자의 이익이 환자가 원하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고 전합니다.

 

물론 사례들이 미국의 병원과 요양시설 등을 포함한 의료 환경에서 이루어진 것들이라서 문화적 배경이나 의료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어려운 경우도 있다는 있을 것입니다. 특히 연명치료에 관련된 경우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겠는데, 이는 죽음과 관련된 문화적 배경이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삶의 마지막 과정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으므로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은 동양이나 서양에서 모두 공감하는 바일 것입니다. 이옥순 등의 <아시아의 죽음 문화;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714358>에서는 흰두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고 있는 아시아지역의 사람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확고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희망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유학의 전통이 오래 이어져 온 동아시아지역 사람들은 ‘삶은 즐거운 것이요, 죽음은 슬픈 것이라서 현세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면 연명치료에 대한 입장에서도 소생의 희망이 없다면 품위를 지키면서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적극적 안락사까지도 수용하고 있는 서양에 비하면, 부모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자식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기도 하고, 또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고 싶은 면이 여전한 것 같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서양에서 시작된 존엄사 개념의 영향을 받아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기는 합니다.

고윤석교수님의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우리나라의 일선 의료인들은 대체적으로 임상현장에서 만나는 상황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개개인의 의료윤리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현대의 윤리교육의 필요성을 요약하고 있는 배영기교수님 등의 <생명윤리와 윤리교육;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90297>에서도 생명에 관한 역사적, 철학적 그리고 종교적 이해를 논하였을 뿐, 정작 의료현장에서 당면하고 있는 생명윤리문제가 아니라 변화하고 있는 지구환경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방안을 논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습니다. 이만큼 의료현장에서 필요한 생명윤리의 핵심을 정리하는 교육기회는 그리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상목교수님의 <동서양의 생명윤리>는 의료현장과 관련된 생명윤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서구의 문화적 배경에서 출발한 생명윤리의 출현 배경과 그 접근법이 가지고 있는 특성 및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있고, 2부에서는 유교 전통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과 한국에서는 어떠한 접근법으로 생명윤리 문제를 해결할 것이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3부에서는 서구 생명윤리학의 토대가 되었음에도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 온 그리스도교의 접근방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도 생명윤리학이 하나의 학문영역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라는데, 우리나라에는 불과 20여 년 전에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생물학 연구와 그 응용, 특히 의학 연구에 있어 윤리적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라고 정의되는 생명윤리학은 히포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양의료윤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의료윤리는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증진시켜 주기위하여 노력하는 의사를 좋은 의사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1960년대 들어 이러한 의료윤리 환경에서는 환자의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점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의사의 독점적 권위가 도전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60년대 들어 미국사회에서 일어난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당시 월남전 참전반대운동, 유색인종에 대한 권리와 기회보장운동, 그리고 여권운동이 활발해졌는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의료영역에도 영향을 미쳐 의사의 절대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환자의 자율성과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학기술이 빠르게 진보함에 따라서 의료행위는 점차 장비에 의존하게 되면서 의사들의 관심이 환자에서 의료장비로 옮겨지고, 의사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하여 결정하던 치료의 방향이 장비에서 나온 데이터에 더 많이 의존하게 된 것도 또 다른 요인입니다. 뿐만 아니라 1967년 남아프리카의 버나드박사가 최초로 심장이식수술에 성공하면서 생명의 의미, 그리고 죽음(death)과 죽어감(dying)의 차이에 대한 정의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생명윤리학의 출현이 예고된 셈이라 하겠습니다.

 

전통 의료윤리학이 의사들 사이에서 배타적으로 논의되어왔던 것과는 달리 생명윤리학은 출발에서부터 도덕신학과 도덕철학 그리고 의료윤리학과 법학이 상호교류하는 가운데 성립하게 되었기 때문에 서로 상이한 접근방법을 통일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따라서 생명윤리학자들은 구체적인 생명윤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접근법 확립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접근법에는 서구적 문화적 전통이 스며들게 된 것인데, 우리 문화를 녹여 보완하는 노력없이 서구적 생명윤리학의 접근방법을 그대로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의 의료현장에서 만나는 생명윤리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만족한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서양의 생명윤리학이 발전하는 과정에 참여한 분야에는 나름대로의 접근방식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생명윤리학의 접근방법이 정립되는데 기여한 접근법에는 토대윤리, 원칙주의, 결의론, 공동체주의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접근법 등이 있습니다.

 

도덕이란 단 하나의 보편적 토대에 기초하고, 그것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토대윤리의 핵심입니다. 토대윤리에서 원칙의 보편성과 일반성의 강조는 도덕 이론의 윤리적 상대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공정성을 가질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선과 가치가 다양한 다원주의 사회에 적용하기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상식적 도덕에서 생겨난 원칙은 다원적 사회에서의 윤리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동의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원칙에는 자율성존중 원칙, 악행금지 원칙, 선행 원칙, 정의 원칙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원칙주의에는 원칙들 간의 우선성 문제와 원칙의 해석문제가 있어 원칙들을 구체화하고 우선순위를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의론은 사례를 분석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법으로 구체적인 상황과 사례에 관심을 집중함으로써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는 경우 실제적인 도덕적 추론의 정확성과 적합성을 보증하기 어렵고, 새로운 사례들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개인을 의학적 의학결정의 최종 판단자로 생각하는 개인주의적 접근과 달리 공동체적 접근은 좋은 삶에 대한 체계적 전망을 가지는 장점이 있지만, 공동체의 종교, 지역 문화 등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윤리학이 서양에서 발전해온 까닭에 유교적 영향이 뿌리 깊은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온정적 간섭주의(parternalism)를 배제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 근거한 서양의 생명윤리 기준을 적용하는데 있어 한계가 있습니다.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가족 중심주의적인 문화전통에 근거한 도덕 판단이 서양의 그것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교적 도덕전통을 보완한 새로운 생명윤리 접근방법이 도출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 되고 있는 것입니다.

 

유교의 도덕 관점은 인간을 관계적 존재로 이해하고, 인간애를 그러한 인간관계의 중심적인 도덕원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의료현장에서는 의학적 의사결정 과정에 환자 자신의 의사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의사 역시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동양 사회에서의 가족은 서양의 자율적 개인에 비교할 수 있는 자율적인 사회단위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 가족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와 고통을 같이 나누고 있기 때문에 의학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환자와 같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저자는 “의학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주는 환자의 가치관, 의사의 의무와 역할, 환자의 자율성 인정 여부, 의학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의 범위와 참여 정도는 문화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의학적 의사결정 방식은 문화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야 할 것(122쪽)”이라 하고, 한국인의 의학적 의사결정모델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가족 결정 모델’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가족주의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특성과 더불어 가족은 고통 받고 있는 환자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으며 환자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3부에서는 생명윤리에 대한 종교적 관점, 특히 기독교와 가톨릭의 입장을 별도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의료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야기된 도덕문제들 가운데 특히 생명현상에 관한 부분, 예를 들면, 출산과 죽음 그리고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관한 내용들은 신학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종교에 따라서 교리의 근본적 차이 혹은 교리의 해석의 차이에 따라서 시각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공회 신학자 요셉 플레처의 경우,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가 인간에게 해악을 끼칠지라도, 그것이 인류에게 미치는 유익함이 크다고 할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하는데, 예를 들면 임신중절, 인공수정, 피임, 유전자 감별, 인간 복제는 인간의 고통을 축소시키고 인간의 선을 확대시켜주기 때문에 지지한다.(185쪽)”는 행위공리주의적 입장입니다. 반면 감리교 신학자 폴 램지의 경우 개인의 선이 사회의 선에 결코 지배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플레처의 공리주의적 입장에 반대하고, 인체실험의 윤리, 죽음과 말기 환자의 윤리, 장기이식의 윤리에 있어서 개인의 불가침성과 사람들 사이의 신뢰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생명윤리학은 그것의 유일한 토대를 산출된 이익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보았고, 올바른 행위의 기준은 합리적이며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설명동의가 필수조건이 되어야 한다.(187쪽)”고 했습니다. 대표적 가톨릭 도덕신학자인 리차드 맥코믹은 플레처의 자유주의와 램지의 보수주의 사이에서 중간자적인 입장이자만 그의 생명윤리사상은 인간의 자유, 개성 그리고 사회성과 같은 인간생명의 가치를 보호하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통적 자연법 윤리에 근거한 새로운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관련된 가치들이 서로 상충될 경우 항상 최상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도덕적 선택은 획득하게 되는 가치와 상실하게 되는 가치를 적절하게 계산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인 것입니다.

 

<동서양의 생명윤리>는 의료현장에서 의학적 결정을 하는데 있어 윤리적 판단이 필요한 경우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극의 탄생/ 즐거운 지식 동서문화사 월드북 1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곽복록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해가 저물어갈 무렵, 니체의 삶과 정신을 재구성한 고명섭 기자님의 <니체극장;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70004>을 읽었습니다. 김선희교수님의 <철학자가 눈물을 흘릴 때; http://blog.joinsmsn.com/yang412/12474996>를 읽으면서 니체에 대하여 조금 더 공부할 생각을 하던 차라서 그의 삶고 생각의 틀을 가늠하는 기회가 되었고, 그의 저작들 가운데 어떤 것을 먼저 읽을 것을 결정하는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비극의 탄생>을 제일 먼저 읽게 된 것도 <니체극장>에서 찜해두었던 것에 더하여 최근에 읽은 <그리스 미학기행;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18098>에서 저자께서 그리스에 눈길을 두게 된 이유가 바로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리스 미학기행>을 라포르시안에서 소개하기 위해서라도 <비극의 탄생>을 읽어야 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양이 많지 않은 탓에 니체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소개되는 경향입니다. 여러 판본을 저울질하다가 곽복록교수님이 번역하신 동서문화사의 것으로 골랐습니다. <비극의 탄생>과 같이 묶어진 <즐거운 지식>과 <반그리스도교>는 덤으로 읽게 된 셈입니다.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첫 번째 저작이며 그가 전공한 고전문헌학의 틀을 벗어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곽복록교수님은 작품해제를 통하여 “그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전자는 중용, 제약, 조화를, 후자는 거침없는 정열을 표현함)의 결합에서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낙관주의가 그리스 비극을 죽였다.(538쪽)”고 주장했습니다.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본문을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바치는 서문’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쓸 무렵 니체는 바그너에게 심하게 경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비극을 극적 요소와 음악적 요소로 구분하여 각각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데, 특히 비극을 노래하는 합창 부분에 무게를 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전승은 우리에게 비극은 비극 합창단에서 발생했으며, 비극은 근원적으로 합창에 지나지 않으며, 합창단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단호히 말한다.(46쪽)” 더하여 민중으로 이루어지는 합창단에는 민주적 아테네 시민의 영원한 도덕률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22쪽)”라고 시작하는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본문에는 “결국 우리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과 본질은 서로 얽혀 있는 두 개의 예술 충동, 즉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는 이중성 자체에 있다는 것을 발견(74쪽)”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폴론적 예술로서의 조형예술과 디오니소시적 예술로서의 음악이 대립하고 있다는 해석에서 음악의 정신에서만 비극이 탄생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르네상스를 통하여 그리스 비극은 오페라의 형식으로 유럽 예술로 계승되었는데, 특히 바흐에서 베토벤을 거쳐 바그너에 이르기까지 독일음악에 그리스 음악이 전승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을 통하여 바그너를 찬미한 <비극의 탄생>은 학계의 거센 비난을 받는 결과를 낳았다고 합니다.

 

‘농담, 음모 그리고 복수’라는 제목으로 된 독일식 압운의 서곡과 모두 5부로 구성된 <즐거운 지식>은 아주 독특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짧은 경구의 형식을, 어떤 것들은 엽편소설(葉篇小說)처럼 짧은 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짧은 분량으로 된 칼럼이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옮긴이는 “이 책은 20세기의 정신을 날카롭게 예측하는, 니힐리즘의 끝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지적 용기를 북돋워 주는 교훈으로 가득 차 있다.(543쪽)”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반그리스도교>는 ‘모든 가치의 재평가’라는 제목으로 구상했던 글이라고 합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는 초인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교는 니체의 그와 같은 관점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너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약자와 실패자는 몰락해야 한다. 이렇게 말한다면 모두들 놀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인간을 사랑한다면 그들의 몰락을 도와야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말 훌륭하게 발전하려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인류애다. 그러므로 약자와 실패자를 동정하는 것은 매우 안 좋다. 그리스도교는 그런 걸 모르고 그들을 한없이 동정한다.(459쪽)” 니체는 유대인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성서를 사제들이 왜곡하여 서술하여 신도들을 구속하려 들었다고 통박하기도 합니다. 성서에 대한 앎이 많지 않은 탓에 니체의 견해에 대하여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아는 범위에서는 공감이 가는 점이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지의 제왕 4 (보급판) - 두 개의 탑 2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2편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로미르의 순간적인 탐욕으로 반지원정대가 흩어지게 되고 프로도와 샘만이 모르도르로 향하게 됩니다. 3편에서는 두 그룹으로 쪼개진 반지원정대에서 오르크에게 납치된 피핀과 메리를 구출하기 위한 아라고른, 레골라스, 그리고 김리의 활약을 뒤쫓아 드디어 오르크에게 호빗을 납치에 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사루만의 본거지를 제압하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반지의 제왕 4편은 쪼개진 반지원정대, 절대반지를 지니고 있는 프로도와 샘을 뒤쫓고 있는 것이니 단촐해진 반지원정대의 행로를 뒤쫓게 되는 셈입니다. 2편의 마지막 무렵 숨어서 일행을 뒤쫓던 골룸이 4편에서 드디어 프로도와 샘과 조우하게 됩니다. 제가 둔한 탓인지 영화에서는 분명하게 갈라내지 못했던 골룸의 이중인격이 책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교활한 캐릭터인 골룸과 착하고 충직한 스메아골이 상황에 따라 등장하는 묘한 캐릭터입니다. 아직 초반인 탓인지 골룸의 캐릭터는 숨겨지고 주로 스메아골의 캐릭터가 두드러지고 있어 프로도와 샘에 의하여 제압된 스메아골은 풀어주는 대신 프로도를 주인으로 섬기게 됩니다.

 

골룸이라는 등장인물은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 일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황량한 습지에 빠진 두 사람은 이 지형을 잘 알고 있는 골룸에게 모르도르의 입구까지 안내할 것을 요청하게 됩니다. 암흑의 군주 사우론이 지배하는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 키리스 고르고르(악령고개)에는 모르도르의 이빨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높은 탑이 있습니다. 이곳은 사우론의 군사가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인데, 골룸이 숨겨진 통로를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즉통이라 했던가요? 프로도가 골룸과 동행해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 것 같습니다.

 

프로도와 샘이 헤맸던 습지는 곤도르왕이 지배하는 땅이고, 3편에서 죽었던 보로미르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이곳에서 프로도 일행은 보로미르의 동생 파라미르의 군대와 만나게 되는데, 파라미르는 보로미르와는 달리 치밀하면서도 심지가 굳은 것 같습니다. 프로도와 샘을 추궁하여 반지원정대에서 맡은 미션이 무엇인지를 캐려들지만 약속한대로 그들을 보호하게 되니 말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반지원정대에 참여한 종족들 같았으면 정말 살기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인간에게는 보고 도망쳐야 할 위험한 것들이 있다는 걸 알 만큼은 현명한 사람이오.(181쪽)”라는 파라미르의 말을 새길 필요가 있겠습니다.

 

4편에서는 절대반지를 모르도르까지 가지고 가서 파괴하는 임무를 프로도가 맡게 된 이유가 조금씩 드러나게 됩니다. 강인하면서도 좌절하지 않는 성격에 더하여 치밀함까지 겸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반지를) 스메아골에게 돌려달라는 요구에 대하여, “다시는 그런 소리를 하지마! 그런 생각이 네 마음에 자라게 해서는 낭돼! 넌 그걸 결코 다시 가질 수 없다. 그것에 대한 욕망 때문에 넌 비참한 종말을 맞을 수도 있어.(93쪽)”라고 단호하게 경고하여 골룸의 야심을 꺾어놓는 장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골룸의 속셈이 곧 들어나게 됩니다. “난 그가 얼빠진 머릿속에 또 하나의 명료한 계략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253쪽)”라고 프로도는 착각한 것인데, 다른 사람을 쉽게 믿는 호빗족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얼토당치 않은 믿음 때문에 공연한 고생을 하게 됩니다만... 모르도르로 향하는 숨겨진 통로에는 거대한 거미 괴물 쉴로브가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쉴로부는 오로지 생명체를 붙잡아 피를 마시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어 절대반지를 다시 손에 넣으려는 골룸으로는 프로도와 샘을 쉴로브의 굴로 밀어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프로도를 주인으로 모시기로 한 스메아골의 약속이 번거로웠던 골룸은 프로도를 쉴로브에게 넘기고 자신은 샘을 붙들려 들지만 샘의 거친 반격에 실패하게 됩니다. 골룸의 함정을 벗어난 샘은 거미줄에 묶인 프로도에게 덤벼드는 쉴로브를 격퇴하지만 프로도가 절명한 것으로 오해하고서는 프로도가 맡은 미션을 대신해서 수행하려 나서게 됩니다. 호빗족이 반지를 운반하는 역할을 맡게 된 이유가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순수하고 충직한 종족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프로도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샘은 오르크에게 붙잡힌 프로도를 되찾기 위하여 뒤따르게 되는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 -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산문.시편 작품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주영숙 엮음 / 북치는마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암 박지원(1737-1805)하면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등의 단편소설을 통하여 몰락해가는 조선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한 것 뿐 아니라 1780년 북경을 거쳐 건륭제가 피서차 가있던 열하까지 다녀오면서 보고들은 내용을 담은 <열하일기>로 유명합니다. 열하일기는 청나라의 정치·경제·병사·천문·지리·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새로운 사조, 즉 실학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연암의 산문과 시편으로 뽑아 만들었다는 <눈물은 배우는 게 아니다>는 눈물에 관한 연암의 색다른 시각을 볼 수 있을까 하여 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매양 모르겠네, 소리란 똑같이 입에서 나오는데, 즐거우면 어째서 웃음이 되고, 슬프면 어째서 울음이 되는지.(220쪽)”라고 의문을 표하면서도 어‘쩌면 웃고 우는 이 두 가지는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감정이 극에 달해야만 우러나는게 아닐지’ 추정하고 있습니다. 전송열교수님의 <옛 사람들의 눈물;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54105>에서 조선시대 남성들도 마냥 눈물을 감추고 살았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암이 심노숭(1762-1837)과 교류가 있었더라면 “눈물은 마음으로부터 나오고 또 눈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눈물이란 무엇인가, 52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0442)”는 점을 알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죽은 누이를 그리는 마음을 그린 시 ‘누님을 배웅하며’에 “보내는 이의 옷깃을 눈물로 적시네(224쪽)”라고 적거나 ‘맏누님 증 정부인박씨묘지명’에 “누님이 빗을 떨어뜨렸던 때를 떠올리니 눈물이 솟구친다.(117쪽)”고 적은 것을 보면 연암은 감정이 풍부한 남정네였던 것 같습니다.

 

국문학을 전공하신 편저자께서 책끄트머리에서 연암의 산문이 사설시조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리고 연암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 할 서양과학에 눈뜨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산문편의 마지막에 모아두신 ‘매력적인 글쓰기란?’에 눈길이 갑니다. 아무래도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탓이겠습니다. 니체는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발도 항상 함께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확고하고 자유로우며 용감하게 혹은 들판을, 혹은 종이 위를 달린다.(비극의 탄생)”라고 적었습니다만, 연암의 <열하일기>는 딱 니체의 말대로 발과 손으로 쓴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글쓰기에 대한 연암의 생각은 참으로 재미있고, 깊이가 있습니다. ‘글이란 뜻을 그려내는 것이므로, 거창할 필요가 없으며, ‘도’는 털끝만한 차이로도 나뉘는 법이니, 글로써 도를 표현할 수 있다면 부서진 기와나 조약돌인들 어찌 글 소재가 아니라며 버리겠는가(184쪽)‘라고 하였습니다. 무심코 지나칠 소재라도 생각을 가다듬어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정제해내면 좋은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생각을 가다듬어 정리가 되었다고 한다면 문장을 어떻게 지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옛글을 본받아 법고(法古)해야 한다는 주장과 창신(創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어, 각각 옛것을 따라하고 본뜨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거나 괴벽하고 허황되게 문장을 지으면서도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법고’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여서 병통이고, ‘창신’한다는 사람은 보통의 법칙에서 벗어나게 되어 걱정거리를 만드는 문제가 있으니, “진실로 ‘법고’하면서도 변통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충분히 틀에 맞아 아담하다면, 지금의 글이 바로 옛글과 같이 품위가 있을 터라는 것이 연암의 생각입니다.

 

“단 한 토막의 말일지라도 정곡 찌르기를 눈 오는 밤 채주에 쳐들어가듯이 할 수 있어야 한다.(198쪽)”는 연암의 촌철살인과 같은 글쓰기요령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적절하게 인용할 자료가 풍족해야 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글을 잘 짓는 자를 병법에 통하고 있음이라는 비유도 놀랄 법합니다. “비유컨대, 글자는 군사요 글 뜻은 장수요 제목은 적국이다. 옛적부터 내려온 정례와 규칙을 주장하여 인용함은 싸움터의 진지를 구축함이요, 글자를 묶어 구절 만들기, 구절 모아 문장 이루기는 부대의 대오행진과 같다.…(195쪽)” 글쓰기를 위하여 병법도 익혀야 할 모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스 미학 기행 - 지중해의 태양에 시간을 맞추다
김진영 글.사진 / 이담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철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재를 전공하신 김진영님의 <그리스 미학기행>을 손에 넣고서도 선뜻 읽기 시작하지 못한 것은 책갈피에 적힌 “시작은 니체의 책 한 권 이었다”는 저자의 집필의도 때문이었습니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이 바로 그 책이었는데, 서구 예술의 뿌리가 바로 ‘그리스 비극’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자신있게 설파한 니체의 해석은 청춘의 열망을 들끓게 만들어 “그리로 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한 작가의 그리스 여행은 여러 차례 이어졌고, 그는 그곳에서 미노아, 미케네, 고전 시기, 비잔틴의 미술과 신화, 철학, 문학, 종교 등에서 예술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지 않고서는 저자를 따라나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고명섭기자님의 <니체극장;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70004>을 읽으면서 <비극의 탄생>을 먼저 읽어야 할 작품으로 점찍어두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고명섭기자가 인용한 박찬국님의 <니체극장> 해제를 다시 인용해보면,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의 기원과 몰락에 대한 고전문헌학적 탐구를 넘어서, 음악과 비극이란 무엇이고,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예술철학적 탐구이고, 세계의 궁극적 근거는 무엇인지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이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탐구이고, 논리적인 지성에 입각한 학문을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로 내세우면서 비극적인 음악과 신화를 비하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래의 서양 형이상학과 이러한 형이상학에 입각한 서양 역사와의 대결이기도 하다.(니체극장, 121쪽)”

 

<비극의 탄생>을 일독하면서 떠오른 느낌은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본질을 해부하고 그리스 비극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역할을 정리하고, 이어서 독일 음악과의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음악정신으로부터 나온 비극의 탄생’이라는 작은 제목의 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 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관련이 있다.(곽복록 옮김, 비극의 탄생 22쪽)” 그리스 예술의 하드웨어적인 면이 아폴론적이라고 하면 소프트웨어적인 면은 디오니소스적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스 비극에서 대사로 구성되는 부분을 아폴론적인 장치라고 한다면 디오니소스적인 장치는 바로 합창단을 통해서 구현되는 음악이라는 것입니다. 니체가 “그리스 비극의 아폴론적 대화부분에서 표현되는 것은 모두 단순하고 투명하며 아름답게 보인다.(곽복록 옮김, 비극의 탄생 58쪽)”라고 적은 것을 보면 그리스 비극이 비극다운 것은 바로 합창단의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고 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사실 대학시절 활동했던 연극동아리에서 소포클레스 원작을 장 아누이가 각색한 <안티고네> 공연에 스태프로 참여했습니다. 장 아누이의 희곡에서는 합창단을 대신하여 ‘코러스’라는 등장인물이 무대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데, 니체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배제하였다는 점에서 본다면 소포클레스가 담아내려했던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비극의 탄생>을 읽고 난 다음에야 제대로 저자와 함께 <그리스 미학기행>에 나섰습니다. 여행이라 하면 ‘관광’ 혹은 ‘유람’이라고 번역하는 ‘sightseeing’에 머물지 않고, 그 장소에 얽혀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여행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그곳에 가서 꼭 보아야 할 것들을 빠트리지 않도록 준비를 많이 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행지에서의 느낌보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큰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김진영님과 함께 하는 <그리tm 미학기행>은 좋은 여행의 참고서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자와 함께 하는 그리스 여행길은 아름다웠던 그리스 고전미술, 영웅의 땅 펠로폰네소스, 그리스 종교, 니코스 카잔차키스로 대표되는 그리스 문학을 주제로 한 4부로 되어 있습니다. 작가가 직접 찍은 엄청난 양의 사진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구석구석까지 읽어낼 수 있어 좋습니다. 우리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는 현재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코트라 현지 주재원은 그리스는 비효율적인 정부운용, 심각한 관료주의, 부정부패 등 내부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 때문에 주변 채권국들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는 가운데, 채권국의 요구에 따라 공공부문 인력감축과 연금 등 복지지출 삭감을 진행하고 있지만, 사회불안이 심화되어 대규모 파업 등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코트라 지음, 2013 세계, 기회와 도전, 175~176쪽;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12239) 당장 그리스로 떠나기가 부답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과 부딪히게 됩니다. 따라서 그곳 사람들을 이해하면 도움이 많이 됩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저자는 그리스 남자들의 특징을 소개하는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다. 그리스 남자들은 능글맞으면서도 퉁명스러운데 호메로스의 서사사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영악한 오디세우스(Willy Odysseus)야 말로 그리스 남자를 설명하는데 가장 명쾌한 답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속임수를 써서라도 고난을 벗어나려는 영악함을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행지에서 묘지를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웰링턴 국립묘지를 찾은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과 죽은 자를 경배하고 수호하는 근엄한 위병의 모습을 보면서 미국 사람들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는 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 듯했습니다. 갑자기 묘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저자가 아테네에서 관광객이 별로 찾지 않은 케라메이코스로 독자를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죽은 자의 부활을 기원하는 종교행렬이 바로 케라메이코스에 있는 ‘히에라’문에서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죽은 자의 땅 케라메이코스는 역설적으로 삶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59쪽)”고 적었습니다. 우리를 케라메이코스로 안내한 이유를 알듯 말듯 사뭇 철학적이기도 합니다.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고집스럽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거나 걷게 됩니다. 지난해 보스턴에 갔을 적에 저도 시내에 흩어져 있는 볼거리를 걸어서 돌아보느라 무리한 탓인지 무릎에 부상을 입고 몇 개월째 고생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굳이 걷기를 선택하는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생각하는 방법이다. 몸으로 생각하는 경험은 훨씬 직관적이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 몸으로 생각하는 경험은 걸으면 닿는 길의 감촉, 목덜미를 감싸게 하는 바람, 등을 데우는 태양까지도 기억한다.(150쪽)” 역시 철학하시는 분은 다르다 싶습니다.

 

앞서 인용한 그리스사람들의 성품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더 해야 하겠습니다. 저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고, 혹시 그리스를 찾게 되는 경우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억해야 할 것 같아서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15분 전에 떠난 버스를 타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 뒤늦게 버스를 타려는 사람을 위하여 15분 이상 기다리는 차에 앉아 있었던 적은요? 메이데이날 올림피아로 가는 길에 막차를 놓친 작가에게 터미널의 티켓창구의 남자가 베풀어준 친절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떠난 버스의 운전사와 통화를 해서 기다리도록 한 다음에 택시를 타고서 버스를 따라가 탈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올라탔을 때 외국 여행자들은 수군거리는 듯했지만, 정작 그리스사람들은 그저 무심할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약간은 비아냥대는 투로 ‘적당히 무질서’한 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저자는 오히려 ‘모호하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우리는 흔히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중적 생각을 가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의 이러한 모호함은 남이 해도 그럴 수 있고 그러니 내가 해도 남들이 납득할 것이라 생각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식 절충주의가 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내면의 목소리 즉, ‘다이몬(daimōn)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어에서 다이몬(δαμων)은 영혼이나 작은 정령으로 ‘초자연적 존재’를 의미하는데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수호령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불가사의한 운명적 사건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든 나쁜 결과를 가져오든 모두 다이몬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저자는 메테오라에 있는 그리스정교의 수도원으로 독자들을 안내합니다. 이들 수도원은 그리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는 동안 그리스의 문화와 정신을 지켜온 보물창고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수도원들은 아슬아슬하게 솟은 바위 위에 올라앉아 있어 가느다란 밧줄에 의지하여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인 곳입니다.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만, 달밤에 행글라이더로 바위 위에 있는 수도원으로 잠입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장소에서는 고독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오를 것 같습니다. 저자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바로 “수도자들의 수행과 그 공간이 여전히 우리를 들뜨게 하는 것은 바로 고난과 고독 속에서 빛나는 정갈한 감동(288쪽)”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와 함께 하는 그리스 미학여행은 어느 덧 마지막 기착지 크레타섬으로 가는 여객선이 떠나는 피레우스의 선착장에 이르게 됩니다. “항구도시 피레우스에서 조르바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때 항구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http://blog.joinsmsn.com/yang412/12775771>에 나오는 바로 그곳입니다. 저자를 따라서 들어간 크레타 섬에서는 크노소스 궁전과 베네치아 사람들의 흔적을 볼 수 있는 이클라리온의 부르치는 물론 묘소를 비롯한 카잔차키스의 흔적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토리니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테라섬에서는 카잔차키스가 “언덕 위로 올라 사위를 내려다보았다. 화강암과 단단한 석회암의 풍경이 펼쳐졌다. 짙은 콩나무, 올리브나무, 무화과와 포도넝쿨도 시야에 들어왔다. 어두운 계곡으로는 오렌지나무 숲, 레몬나무와 모과나무가 보였으며, 해변 가까이로는 채소밭도 보였다. 바다가 펼쳐지는 남쪽으로는 아프리카에서 달려온 듯 한 파도가 크레타 섬의 해안을 물어뜯고 있었다. 가까이 있는 모래섬들은 막 솟아오르는 아침 햇살에 장밋빛으로 반짝거렸다.(그리스인 조르바, 49쪽)”고 묘사한 크레타섬의 풍광을 그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저자의 여행을 따라가는 책읽기를 통하여 저자의 마음에 남은 울림을 얼마나 전해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에필로그에 그리스 여행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남기고 있습니다. 앞서 ‘케라메이코스의 오래된 묘비가 주는 삶과 죽음에 관한 근원적 묵상’만을 인용하였습니다만, 저자는 여행지마다 느낀 점을 한 줄로 요약하면서 다음과 같이 종합하고 있습니다. “니체가 예술 탄생의 배경으로 지목한 그리스인의 이중성은 마치 기쁨과 슬픔 같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의 일상에서 날것처럼 살아 있다는 점이 달랐다.(382쪽)”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통하여 갈라놓은 것처럼 그리스인들은 아폴론적인 면과 디오니소스적인 면을 같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둘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모호함이 있는데, 이런 모호함은 예측할 수 없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표정인 야누스가 서로 반대쪽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것에 비유하여 이러한 이중성의 파괴력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식물의 줄기나 잎이 태양을 향하는 향일성(向日性)을 보이는 것처럼 그리스인들의 이중성은 그 경계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이상으로 연결되어 있어 빛나는 예술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