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 - 악의 시대, 도덕을 말하다
샘 해리스 지음, 강명신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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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진화는, 상상 가능한 이론적 구성물 가운데에는 어떤 경우에서나 다른 구성물에 대해 결정적 우월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구성물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 문제에 대해 천착했던 사람들은 우리의 지각세계가,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어떠한 이론적 체계를 선택해야 할지를 실질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모든 원리로 이끄는 논리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에 대하여 과학의 대표적 분야인 물리학의 한계에 대하여 1918년 막스 프랑크의 회갑에서 아인슈타인이 한 말입니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인용) 가세트는 물리학으로 대표되는 과학의 흥성으로 퇴조되고 있는 철학이 본연의 소명으로 회귀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과학적 진리는 비록 정확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이며 완전한 진리는 아니다.’라고 설파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유와 존재의 상호 동화라고 정의되고 인식의 영역에 속하는 도덕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요?

 

<자유의지는 없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4786>를 통해서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설파한 샘 해리스박사는 <신이 절대로 답할 수 없는 몇 가지>에서 발전된 뇌과학의 증거들은 도덕적 진리를 과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비록 “과학은 사실에 관한 것이지 규범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우리가 누구인지 알려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존재 양태에 대해 무엇이 잘못인지는 알려줄 수 없다. 인간의 조건에 관한 과학은 있을 수 없다.(23쪽)”고 한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제리 포더와 같이 반대하는 과학자들이 여전히 있는데도 말입니다. 선과 악에 대한 연구결과를 공론화하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도덕과 행복에 대한 과학적 연구는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도덕과 행복에 관한 과학적 연구에서 얻어진 것들을 도덕적 진리, 선과 악, 믿음, 종교, 행복의 미래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원저의 제목이기도 한 ‘도덕의 풍경(The moral landscape)’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습니다. 도덕의 풍경은 “가설적 공간이지만 실제적, 잠재적 결과의 공간으로, 봉우리의 높이는 잠재적 행복의 높이에 해당하고, 계곡의 깊이는 잠재적 고통의 크기에 해당한다.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즉 다양한 문화적 관습, 윤리 규정, 정부의 양태 등은 이 풍경에서 지점 사이의 좌표이동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또한 인간 번영의 정도 차이로 나타난다.(17-18쪽)”라고 설명되고 있는데, 다양한 변수를 데이터화하여 객관적으로 평가가 가능한 삼차원공간으로 구현하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살펴보면 다양한 높이의 산들이 펼쳐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도덕적 가치 또한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도덕적 진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 이와 같은 오류를 저지를 가능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의 결과의 좋고 나쁨을 판가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을 ‘스리마일 섬 효과’로 설명기도 합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스리마일섬은 1979년 일어난 원자로 노심 용융사고로 세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원자력의 평화적 사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나쁜 일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각을 바꾸어 보면, 이 사고를 통하여 각국은 핵안전을 보다 강화하는 정책을 수립하여 실행하게 되었고 더 많은 인명을 구할 수도 있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됩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읽으면서 ‘문화를 전달하고 모방하는 복제단위’를 밈(meme)이라고 정의하고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323쪽)”라는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고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생물의 진화는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와 이타적 유전자를 가진 개체가 균형을 이루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진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당 생물집단의 생존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킨스가 주장하는 밈이라고 하는 문화의 복제단위는 생존에 긍정적 요소만이 살아남고 부정적 요소는 소멸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샘 해리스는 밈의 존재를 인정하고 밈이 ‘전달된다’며, 숙주로 삼은 인간의 생식세포를 통해 전달되지는 않는다는 점도 인정하지만, “밈의 생존은 개인이나 집단에 실질적인 이익(번식되느냐 아니냐)을 가져다주느냐 아니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계속해서 사람들의 행복을 저하시키는 개념이나 문화적 산물에 매여 사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37쪽)”고 밈에 대한 개념을 수정하고 있습니다.

 

파푸어 뉴기니 하이랜드 지역에 사는 포레(Fore)족의 생존을 위협했던 쿠루(kuru)병의 확산과 소멸을 샘 해리스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쿠루는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카니발리즘(cannibalism)의 습속이 포레족 마을에 들어온 이후에 새로 생겼다가 쿠루병의 정체가 드러남에 따라 호주 정부가 카니발리즘을 강력하게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면서 소멸되어 갔던 대표적인 프리온질병입니다. 즉 카니발리즘이라고 하는 문화적 요인의 유입과 정착이 종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부정적 방향으로 작용하는 밈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소위 밈이라고 하는 사회문화적 복제단위가 믿음이라고 하는 집단의 사고결과로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것이며, 집단적 행복추구를 위한 문화적 행동양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예로 든 포레족의 사례처럼 어떤 종족이나 사회가 품은 실재에 대한 믿음이 허위일 뿐만 아니라 명백하게 해로울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저자는 진화론이 생물학적 명령으로서 이기심을 수반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부분에서 해석의 오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수준에서의 선택압력은 개인의 생존보다는 혈연관계가 있는 존재들을 위한 희생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의 생존보다 유전자를 공유하는 존재들의 생존이 유전자집단의 소멸을 막을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이론이 진화생물학자 로버트 트리버의 호혜적 이타주의이론입니다. 혈연관계가 없는 친구들이나 심지어 요즈음 개그콘서트에서 보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위한 프로젝트에서 보는 것처럼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협동이 가능한 이유가 설명되는 이론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개인과 집단의 행복의 지침이 되는 도덕이 분석범위에 있다는 가정을 다음처럼 요약하고 있습니다. “1. 뇌의 유전자 변화는 사회적 감정, 도덕적 직관, 언어 등을 발생시켰고, 2. 이로 인해 약속이나 명예 중시 등 점점 복잡한 협동 행동이 가능해졌으며, 3. 이러한 행동은 또 문화적 규범, 법, 사회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이들의 목적은 점점 발전하는 이 협동 체제가 그것을 상쇄시키는 힘에 맞닥뜨렸을 때에도 지속되게 하기 위함이다.(113쪽)” 물론 잘못된 믿음에 의하여 퇴보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유전자의 변화도 가능하다고 한다면, 이 이론은 문화의 복제단위가 밈이라고 하는 가설적 구조가 아니라 유전자라고 하는 실재적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실제로 뇌연구 결과 도덕적 인지와 관련된 뇌영역으로는 전전두엽피질(prefrontal cortex)과 측두엽(temporal lobe)의 많은 부분이 포함된다고 합니다. 전두엽 외측은 극악무도한 범죄자에 대한 분노를, 전두엽 내측은 신뢰 및 상호성과 관련된 보상의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뇌과학자 조르주 몰과 리카르도 데 올리베이라-수자 등의 연구에 따르면 다른 포유동물에서는 볼 수 없고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행위, “다른 사람에게 이로우면서 내게 직접적인 이익(물질적 혹은 명예에 대한 이익)이 없는 행위(진정한 이타주의)를, 특히 의도적으로 하는 경우”에도 뇌의 보상영역이 급격하게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161쪽)

 

내측전전두피질(MPFC)이 믿음을 담당하는 뇌부위로 생각되는 것 같습니다. MPFC는 자기표현과 관련되어 있는데, 남을 생각할 때보다 자신을 생각할 때 MPFC의 활성이 커지는 현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MPFC의 활성을 높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이는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믿는 것은 마치 그 명제를 확장된 자아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파민 수용체 유전자가 종교적 믿음과 관여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활성이 높은 형태의 D4 수용체를 물려받은 사람들은 과학에 대해 회의적이고 기적을 믿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종교의 종류와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 공존할 수 없다며 극한 대결을 불사하는 종교집단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거부할 수 없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신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삶의 의미와 도덕 지침의 원천으로 믿을 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을 믿는 가장 흔한 이유라고 합니다.(17쪽)”

 

이 처럼 과학적 연구를 통하여 종교적 믿음의 본질이 베일을 벗어가고 있지만, 과학자들은 그 사실을 공론화하는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과학자 공동체가 대체적으로 세속적이고 자유주의적인데도 불구하고 종교적 독단에 양보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국립과학원, 국립보건원과 같이 과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기관, 심지어는 네이처와 같은 과학 잡지까지도 종교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스티븐 굴드의 ‘중복되지 않는 권위’ 개념, 즉 ‘과학과 종교는 전문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두 분야가 적절하게 관점을 규정하면 갈등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과학은 물리적 우주의 작동에, 종교는 의미, 가치, 도덕, 선한 삶에 최고의 권위를 지닌다는 뜻이 담겨 있다.(16쪽)”고 양해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도덕문제에서 신앙과 이성 사이에 타협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보는 저자의 경우에도 막상 공적 담론에서 과학의 역할에 대하여 논의할 때는 어떠한 경우라도 종교적 의견이라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혼란과 박해로 어두웠던 수 세기, 즉 종교적 암흑기를 지나 과학이 꽃을 피우게 된 지금에도 종교는 여전히 과학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서구에서 광신도의 손에 고문이나 살해를 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과학자는 거의 없지만, 미국에서는 종교에 공격적 태도를 취했다가는 연구비를 잃을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종종 흘러나온다.(42쪽)”는 인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우주를 선으로 이끄는 위대한 힘이자, 우주를 악으로부터 지키는 진정 유일한 보호자임을 자처하는 가톨릭교회의 본산 로마 교황청이 사제가 되려는 여성을 파면하면서도 어린이를 강간한 남성사제는 파면시키지 않는다거나, 여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낙태를 시행한 의사를 파면시키면서도 인종 학살을 자행한 나치당원은 단 한 명도 파면시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도덕에 대한 교회의 판단기준은 혼란스러운 것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정리를 해보면, 저자는 이 책을 통하여,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 존재의 가장 절박한 문제에 관해 과학을 적용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즉 도덕적 믿음도 과학적 믿음과 같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게 될 것임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도덕적 믿음을 지켜온 종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은 저자의 이런 견해가 옮긴이의 생각으로 걸러져 전달된 점은 없었는가 하는 우려입니다. 옮긴이의 글에 적고 있는 바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이 책은 주로 종교에 대한 반대로 종교가 도덕을 말할 수 없고 말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독단에 가까운’ 강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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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희망을 보다 푸른행성지구 시리즈 1
남성현 지음 / 이담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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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엘리자베스 파렐리의 <행복의 권고;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88622>를 비롯하여 앨 고어의 <우리의 선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1794488> 등과 같은 기후온난화를 예고하고, 제한된 지구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면 지구적 위기를 맞을 것이라는 주장과 이에 맞서 ‘비관주의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주장하는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93963>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 읽은 남성현박사님의 <바다에서 희망을 보다>에서 또 다른 생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자가 “이 책은 우리가 직면한 지구환경의 위기에 대해 단지 경각심만을 유발하고자 쓰인 것이 아니다. 전 지구적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통해 어제를 반성하고, 내일을 새로운 희망으로 열기 위해, 오늘 그 바른 해결방향을 찾아내고자 하는 고민에서부터 출발한다.”라고 프롤로그에 적고 있는 것처럼 단지 위기의 고양보다는 구체적인 대안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게 합니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책에서 저자는 미래의 지구적 위기상황을 예측케 하는 지표로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관한 통계자료를 제시하고 또한 환경오염과 에너지 자원의 고갈을 예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서의 불확실성을 이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지구를 푸른행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지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다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설명하고 우리나라 역시 바다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라는 점을 마지막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지구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쪽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면서도 이와 같은 예상이 가질 수 있는 불확실성에 대하여도 언급하고 있어 나름대로 중립적 위치를 지키려 하는 점이 돋보입니다. 예를 들면 ‘기후변화가 인간활동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변화인지에 대해서조차 논란을 완전히 종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42쪽)’라고 적고, 심지어는 개발도상국을 견제하기 위한 선진국의 음모론에서부터 기후변화의 증거들이 의도적으로 과장되고 있다는 기후게이트 등이 터지면서 지구온난화문제에 대하여 냉소적이거나 회의적인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에 의한 것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데 있어 수많은 불확실성이 개입되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폭염, 폭설, 폭우, 가뭄, 기근과 같은 기상이변이 점차 빈번하고 정도 역시 심해지고 있는 현상을 들고 있습니다.

 

저자는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이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영국의 시인 윌리엄 쿠퍼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바다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바다에 살고 있는 해양생물의 다양성의 한계를 제대로 조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으며, 바다가 품고 있는 자원 역시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당장 현실화할 수 있는 에너지만 해도 조력, 조류, 파력 등 바닷물의 흐름과 관련된 에너지 자원은 말 그대로 청정에너지이면서 한계가 없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해양 쪽으로는 일본에 막혀 있는 한계가 있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협소한 반도에 비하면 다소 여유가 있다고 할 수 있겠고, 바다와 친숙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새 정부에서 해양수산부를 부활하여 바다와 관련된 정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가 책머리에 적은 것처럼, 미래해양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반 독자라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렵지 않은 용어들만을 사용하였고, 사진 등과 같은 상세한 자료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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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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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영국의 신예작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처녀작 <침대>를 읽고서, 정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의 체중은 얼마나 될까 궁금해졌습니다. 인터넷을 조회해보니 미국 댈러스에 살고 있는 버스터 심커스씨가 40세의 나이에 무려 1,376kg이나 된다고 합니다. 사실여부를 떠나서 삶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고, 체중이 그처럼 불어나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제 경우는 체중이 85kg를 넘어가면서 몸이 둔해지고 운동이 조금 많아져도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통에 위기의식이 들면서 체중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노력이라고 해도 그저 조금 빠르게 걷는 운동과 함께 식사량을 줄이는 노력을 같이 했던 것인데, 처음에는 일주일에 20km정도 걷다가 70km 이상으로 늘려 걸으면서 체중감소효과가 뚜렷해지면서, 체중감소노력을 꾸준하게 계속한 끝에 만 1년 만에 69kg까지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체중이 표준을 넘어서는 분들은 체질상 문제가 있거나 하는 것처럼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20년 동안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사이에 체중이 630kg에 이르게 된 주인공의 형 에드 멜컴은 도대체 무슨 까닭이 있었던 것이며,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엮이고 있는 것인지 책을 읽어가면서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벽에 붙은 전자시계가 7483일째를 가르치는 날 주인공과 방을 같이 쓰는 형 멜컴의 모습을 그리면서 시작하지만, 이야기는 수시로 과거로 오르내리기 때문에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시점을 파악하는데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이날은 20년간 침대에 머물러온 멜컴이 방송을 타게 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기로 한 날이라는 사실이 뒤에 밝혀지게 됩니다.

 

멜컴은 어렸을 적부터 보통 아이들과는 달리 튀는 행동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특히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옷을 벗어 나체가 된다거나, 지붕위에 있는 TV안테나에 매달린다거나,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는 중에 비오는 운동장에서 비를 홈빡 맞고 있다거나 하는 등입니다. 멜컴의 이와 같은 튀는 행동은 세상에서 제일 처음 그와 같은 행동을 해보아야 된다는 특별한 생각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에 나오기는 합니다만, 제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한다면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의심해서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하지 않을까 걱정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멜컴의 행동을 막으려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끊임없이 감싸는 모습을 보일 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가운데 운명의 25살 생일날 멜컴은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하게 되고, 침대에서 먹고-자고를 반복하게 됩니다.

 

큰 아들을 끊임없이 감싸고도는 어머니와 갈등을 빚는 아버지는 결국은 다락방으로 거처를 옮기고 어머니는 과체중남편을 돌본 경험이 있는 미국 여인 노마 비가 보내준 트레일러에서 생활하며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화자는 형 멜컴과 같이 지내게 됩니다. 주인공은 부모가 형에게 쏟는 관심을 부러워하면서도 별다른 문제행동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청년이지만, 형을 바라보는 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사랑임을 드러내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순진한 구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형과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가운데 어머니가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간데 충격을 받은 루와 함께 노마 비를 찾아 미국 오하이오로 가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은 루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합니다. 초비만인 형을 둘러싸고 돌아가는 집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은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이 주인공의 한계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은 “엄마는 자신의 지나친 사랑이 우리 모두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13쪽)라는 생각을 하지만, 노마 비는 자신과 멜컴의 어머니, 멜컴을 사랑하는 루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멜컴의 어머니는 멜컴을, 노마 비는 죽은 남편 브라이언을, 그리고 루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하여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사랑, 대단한 이타주의를 말입니다(324쪽) 하지만 자칫 그 사랑이 상대를 망가뜨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노마 비는 브라이언이 죽은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사랑은 긴 선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요. 제아무리 사랑이라도 양쪽 끝이 있지요. 그 중 하나는 좋은 끝이에요. (…)하지만 사랑에는 나쁜 끝도 존재해요. 사랑이 우리를 망가뜨릴 수도 있으니까요.(325쪽)”

 

멜컴이 침대에서 나오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형이 우리 가족을 망가뜨렸어”라고 질책하는 주인공에 대하여 오히려 “아니야 내가 구원한거야(368쪽)”라고 답합니다. 역설적일 수도 있는 그의 답변에 공감할 수 있을까요? 멜컴은 왜 내가 가족을 구원한 것이라고 강변했을까요? 가족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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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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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같이 일하는 부서의 워크숍에서 제가 교양강좌를 맡게 되었습니다. 책읽기를 주제로 하고 “책은 왜 읽는가?”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참석자들의 80% 이상이 여성이고, 가사도 책임져야 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에 책읽기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마음의 혹은 시간적 여유가 없는 형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책읽기가 삶에 도움이 된다는 점과 분량이 많지 않아도 효율적인 책읽기요령, 그리고 시작하는 방법 등에 관하여 저의 경험을 중심으로 40분 정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준비기간이 불과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아 자료를 충분하게 모아 활용할 수 없었던 점이 아쉬웠습니다만, 그동안 읽었던 몇 가지 책들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혜윤님의 <삶을 바꾸는 책읽기;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56103>,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5937>, 안상헌님의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62938>, 등입니다.

 

고전읽기에 관해서는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이탈로 칼비노의 아내 에스테르 칼비노가 붙인 서문에 “독자들은 칼비노가 ‘자신만의’ 고전을 비롯해, 자신이 인생의 각 단계들을 거치며 영향을 받았던 작가나 시인, 과학에 관심을 두었던 작가들에 대해 썼던 평론과 논문들”을 두루 수록했음을 밝히고 특히 20세기 작가들의 경우는 칼비노가 특별하게 존경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뽑았다고 했습니다. 출판사 리뷰에서는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등의 고대 작가에서부터 스탕달, 톨스토이, 플로베르, 발자크를 비롯해 마크 트웨인, 찰스 디킨스, 헨리 제임스, 보르헤스 등의 현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30여 명의 고전 작가들과 그 작품들에 대해 쓴 개인적인 독서기”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옮긴 이소연님은 “거창한 비평 용어 없이 때로는 노골적인 경배와 때로는 치밀한 문체분석이, 또는 역사적 관점에서 주제를 직시하는 혜안이 공존하는 에세이”라고 적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보르헤스의 <픽션들> 정도만 읽은 책일 뿐, 처음 들어보는 작가들도 적지 않은데다가, 이름도 친숙한 스탕달, 발자크, 디킨스, 플로베르, 톨스토이, 마크 트웨인, 헤밍웨이 등의 작품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것들을 다루고 있어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리고 보면 고전이라고 부를만한 작품들에 대한 저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교양강좌에서 인용한 부분은 프롤로그라고 할 수도 있는 “왜 고전을 읽는가”였습니다. 칼비노는 ‘고전이란’ 질문에 대한 모두 열네 가지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모두 공감이 가는 고전의 정의라고 하겠습니다만, 특히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한 첫 번째 정의에서 빵 터지면서 크게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다시’라는 전제를 단 것은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한 위선이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청소년기부터 열심히 책을 읽어도 고전의 반열에 드는 작품들 가운데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 무수히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라는 해석과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책을 읽게 되면 고전에 담긴 더욱 세밀한 부분과 다양한 면모, 또 그 의미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는 해석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는 책,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12쪽)”이라는 정의야 말로 정곡을 찌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가가 인용하고 있는 에밀 시오랑의 글을 굳이 들지 않더라도 “고전은 무언가에 ‘유용하기’ 때문에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는 읽는 것이 낫다.(20쪽)”는 저자의 권고를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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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 - 일의 의미를 찾아서
최명기 지음 / 필로소픽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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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럽게 “나는 왜 일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봅니다. 이미 직장을 여러 번 옮겼을 뿐 아니라, 하는 일마저도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고 있으니 학문적 성취를 위해서라는 답은 물건너 간 것 같고, 돈 때문에?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 정답은 아닌 것 같은데, 막상 손에 잡히는 답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일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부제가 달린 최명기 원장님의 “무엇이 당신을 일하게 만드는가”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최명기 원장님은 이미 <내 몸은 내가 지킨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73430>를 통해서 만나보았는데, 글을 정말 잘 씁니다. 첫째, 영화면 영화, 책이면 책, 다양한 소재에서 글꼭지를 끌어다가 저자의 생각을 엮고 있습니다. 둘째, 사실은 이 점이 중요합니다만, 짧은 글을 잘 씁니다. 글을 쓰다보면 엉킨 생각을 제대로 풀지 못해서 길게 늘어지기 쉽습니다만, 저자는 짧게 끊어 쓰면서도 읽는 호흡이 수월하게 넘어가는 글을 잘 쓴다는 말씀입니다.

 

저자는 사람들마다 다양한 일하는 이유가 모두 소중하다고 전제를 하고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도에 있어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그래도 무한정 이야기를 끌고갈 수 없기 때문이었는지, 돈, 인정욕구와 과시, 불안과 소속감, 성취감, 재미, 성장, 승부욕, 도전, 명령, 이타심 등의 열 가지 항목으로 압축하여 나름대로의 해석을 풀어내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전공인 정신의학분야에서 진료를 하면서 만난 환자 사례도 적당하게 인용하고, 자신의 경험도 진솔하게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아주 재미있게 읽히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술을 매일 마시던 사람이 건강 때문에 술을 끊게 되면 큰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저녁때면 매일 술자리가 있었는데 일단 저녁 시간에 큰 공백이 생기는 것이다. (…) 따라서 술이 없게 되면 텅 빈 삶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담이 되어서 다시 술을 마시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15쪽)” 제가 1년 반 정도 술을 줄이고 있습니다. 아주 끊었다고 할 수 없어 줄이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만, 그래서 저녁시간이 많이 생겼습니다. 이 시간을 이용하여 책읽기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블로깅을 하는 입장에서 공감할 수도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꼭 책을 내서 대가를 지불받지 않더라도 블그의 글에 수많은 사람이 위로를 얻고 댓글도 달아주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52쪽)” 책을 내게 되면 더 좋은 일이 되겠구요.

 

저의 삶의 궤적과 관련이 있는 글도 보입니다. “의대 교수가 되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박봉을 받으며 전임 의사로 일하던 사람 중 의대교수를 포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부모가 모두 의대 교수인 동료에게 밀리는 이도 있고 병원 내 정치에 떠밀려서 교수가 못 되는 이도 있다.(79쪽)” 참고 버틸 것인가 일찍 포기하고 떠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고민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얼마 전에 읽은 <나는 왜 일보다 사람이 힘들까;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84701>를 읽으면서 크게 공감하던 부분입니다만, 일단 일하는 곳의 분위기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직장은 일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근무하는 동안에는 제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좋아야 직장이 즐거워지는 법입니다. 제가 조직을 이끌 때 늘 하던 말이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하는 직장을 만들기 위하여 모두 같이 노력하자.’였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배신의 아픔을 겪었습니다만, 같이 일할 때는 정말 재미있고 즐거운 분위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상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앞서 소개한 다양한 종류의 일하는 이유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균형을 맞출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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