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리하르트 조르게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1895년 러시아 남부 캅카스 지역의 바쿠에서 유전 기술자인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친구사이였다.

최고의 보수를 받던 아버지는 유전 회사와의 고용 계약 해지로 직장을 잃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독일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조르게는 학도자원병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서부전선에 파견되어 크게 부상당했는데, 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상병으로 승진해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이러한 부상 때문에 제대를 했다. 그는 부상 회복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전쟁기간 중에 베를린, 킬, 함부르크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업과 포병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사로 일하면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 때문에 직업을 잃고,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의 요원이 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열망과 혁명운동에 이바지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남달랐던 조르게는 이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주목을 받았고, 코민테른의 추천으로 그는 모스크바의 공산당 고위교육과정에 입교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조르게는 두각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했다. 독일어와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1924년 조르게는 소련 공산당원이 됐으며, 이듬해에는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1927년 조르게에게 부여된 첫 임무는 미국 영화산업계(할리우드)에 침투해 공산주의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1929년 귀국한 조르게는 이내 소련군 총참모부 산하 제4국(정보국, GRU)을 만든 얀 베르친 장군의 눈에 띄어 GRU 소속 정보원으로 발탁됐다. 베르친은 조르게를 1년 동안 치밀하게 훈육했다. 조르게는 잠시 영국에 파견돼 정보 수집 활동을 한 뒤, 다시 독일로 옮겨 히틀러가 이끄는 신생 나치당에 가입했다.

1930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나서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 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 기자인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행세하여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장제스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32년에 그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싸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였고, 이 해 12월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조직 인선을 끝낸 조르게는 독일로 돌아가 열렬한 나치주의자로 변신했다. 뛰어난 친화력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조르게는 무엇보다 나치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제프 괴벨스 선전부장관과 친분을 맺었다. 이어 그는 베르리너 뵈르세 차이퉁 등 두 언론사의 일본 특파원으로 자리를 얻었다. 혹시나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걱정에 조르게는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괴벨스는 조르게의 환송 파티에 참석할 정도로 조르게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누가 보더라도 조르게는 골수 나치당원이었다. 베르니너 뵈르세 차이퉁 신문의 편집국장은 전도유망한 한 독일군 고위장교에게 조르게를 잘 부탁한다는 소개 편지까지 써주었다. 고위장교는 바로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의 무관인 오이겐 오트 대령이었다.

완벽한 신분세탁을 거친 후 그는 1933년 9월 일본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골수 나치당원에다 특파원 신분을 가진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을 수시로 출입하면서 오이겐 오트 대령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그의 부인과는 내연 관계까지 맺었다. 5년 뒤 일본 주재 대사로 영전한 오트 대령은 오자키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 됐다.

1936년 일본에서 2.2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조르게는 나치 당원 신분으로 중요한 정보를 빼내어 소련에 정보를 타전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까지 전달하기도 했다. 비록 스탈린이 이를 간과하여 초반에 독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일본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스탈린에게 극동에 있던 붉은 군대를 개전 초기 빠르게 이송시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게 기여했다.

일본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1941년10월 14일 먼저 체포되었고 조르게는 10월 18일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일본은 소련에서 잡힌 일본 간첩과 조르게를 교환하려 했지만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1961년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ê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1964년 니키다 흐루쇼프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조르게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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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완 2020-02-15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본드 실제 버전이라고 할 만큼 전설의 스파이였죠

NamGiKim 2020-02-15 13:46   좋아요 0 | URL
이때 시베리아에서 동부전선으로 군대를 뺄 수 있었던건 조르게의 활약 덕분이죠.
 

대한민국과 서방세계에 지극히 악마화 되서 알려진 인물이 있다.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다. 일단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이오시프 스탈린 하면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먼져 나온다. '히틀러 보다 더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마', '2000만 명이나 학살한 학살자',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김일성의 남침을 도운 빨갱이', '전 세계를 공산주의로 적화시키려는 인물'과 같은 단어들이 그러하다. 한 때 필자도 이오시프 스탈린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다른 책들과 정보들을 접한 이후로 생각이 많이 바꼈다. 물론 스탈린이 대숙청을 통해 많은 정적들을 숙청했던건 사실이다. 그러나 무슨 히틀러 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다느니 2000만 명을 학살했다느니 하는 소리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작된 희대의 거짓말이었다. 비록 대숙청 시기 적잖은 사람들이 숙청되고 감옥으로 간 것은 사실이었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대숙청 시기 처형되어 죽은 사람은 68~70만 정도였다. 굴라그 수감자의 경우 무슨 900만이니 1200만이니 하는데 알고보면 최대 수치(굴라그와 일반감옥 포함)는 250만 안팎이다. 그리고 1990년대 미국의 교도소에 수감된 인원이 그 숫자보다 300만이나 더 많다. 우익반동들과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스탈린 동지가 마치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능함만 보인것 처럼 얘기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물론 1941~1942년까지 독일군에게 밀리고 그 과정에서의 무능함과 후퇴의 책임에서 스탈린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특히나 1943년 쿠르스크 전투에서 정보전에서의 승리와 독일군의 전략 예측을 완벽히 해내며 이를 주코프와 같은 참모들과 더불어 승리로 이끈 지도자가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 동지였다. 몇몇 사람들은 마치 스탈린 동지가 홀로도모르를 계획한것 처럼 얘기하는데, 자연재해때문에 일어난 비극을 마치 한사람이 일부러 계획해서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 그렇다면 서방 제국주의자들과 반공주의자들 말대로 스탈린은 그저 악마고 인민들을 짐승처럼 여기는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는 1930년대 공업화를 하면서 많은 부분에서의 성과물들을 만들어 냈고, 일국사회주의를 통해 10월 혁명의 성과물을 만들어냈다. 이는 그의 정적이었던 레온 트로츠키도 인정할 정도였다. 특히 1920~30년대 문맹률, 실업률이 많이 낮아졌고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바뀌었고 집단농장도 만들어졌고 나치에 맞서 싸워 승리한 성과도 있다. 또한 사적소유 철폐라는 역사적 전진을 이룩했고, 무상의료, 주거보장, 노동자 연금 제도, 8시간 노동제 등을 실행했다. 따라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룩한 사회주의적 그리고 진보적 업적도 많다. 프랑스 혁명 이후 자코뱅 독재를 펼쳤던 로베스 피에르가 이상만 남긴채 숙청에서만 멈췄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런 이상을 유럽과 아시아의 제국주의 파시즘의 부활속에서 현실에 맞게 실현했다. 또 어떤 먹물은 전태일 1명 죽은건 슬퍼하면서 스탈린이 수백만을 공업화로 죽였다는 소리를 하겠지만, 착취를 했다면 자본주의가 더 착취했지, 스탈린이 더 착취한거라 볼 수는 없다. 1950년대 초 소련의 노동 정책과 현실을 보면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전태일은 박정희 시대 자본가들의 착취를 보여주는 한 예시일 뿐이지 그 시대 자본주의적 착취가 없고 죽어나가는 사람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도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사람들 많았고, 19세기 미국에서 자본가들에 의해 건설 현장에서 죽은 노동자들도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지금도 노동현장에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그런 희생을 마치 스탈린이 한 것 처럼 말하는 것은 무식함을 티내는 행위일 뿐이다. 아무튼 이오시프 스탈린은 비록 과오도 있지만 진보주의적 관점에서 많은 업적을 만들어냈고, 역사적 전진을 이룩한 위대한 인물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를 20세기가 만든 걸출한 지도자중 한명이라 생각하고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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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해체된게 단순히 소련 공산당의 관료와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의 문제로만 보며,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더 우월한냥 주장하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아니 미국과 소련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소련은 제1차세계대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쳤고, 얼마 안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으로 시작된 내전을 겪으며 주요 산업시설들이 초토화 되었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으로 일정부분 경기 회복하고 스탈린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으로 생산력을 올렸지만, 1941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다시한번 초토화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다시 경제를 회복시켜야 했다. 거기다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남부를 제외하면 농업을 할 땅이 거의 없다. 아니 그냥 나머지 지역은 북극이다. 괜히 그들이 부동항을 탐낸게 아니다.

반면 미국은 어떤가? 제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초강대국으로 오른 뒤, 1920년대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듯이 과잉과 풍요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과잉생산이 1929년 경제대공황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과잉생산 체제가 문제였기에 제2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 1941년 진주만 공습 외에는 영토가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토의 공업시설과 농업 시설이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지형은 어떤가? 동부에 번창한 공업지대와 남부의 농업지대, 서부의 광산과 석유생산 그리고 알래스카와 부동항들까지, 지정학적으로 소련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따라서 냉전시기 미국이 소련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우월한 자본주의 때문이라기 보단 그냥 지정학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소련보다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이 소련조건이었으면, 툰드라에서 등신짓하다 지들끼리 폭주하여 박살났겠지!! ㅋㅋㅋㅋㅋ 아무튼 이런 넘사벽인 미국과 싸워 대등한 위치에 올랐던 소련이 참 능력있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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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해체된게 단순히 소련 공산당의 관료와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의 문제로만 보며,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더 우월한냥 주장하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아니 미국과 소련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소련은 제1차세계대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쳤고, 얼마 안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으로 시작된 내전을 겪으며 주요 산업시설들이 초토화 되었었다. 신경제정책으로 일정부분 경기 회복하고 스탈린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으로 생산력을 올렸지만, 1941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다시한번 초토화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다시 경제를 회복시켜야 했다. 거기다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남부를 제외하면 농업을 할 땅이 거의 없다. 아니 그냥 나머지 지역은 북극이다. 괜히 그들이 부동항을 탐낸게 아니다.

반면 미국은 어떤가? 제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초강대국으로 오른 뒤, 1920년대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듯이 과잉과 풍요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과잉생산이 1929년 경제대공황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과잉생산 체제가 문제였기에 제2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 1941년 진주만 공습 외에는 영토가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토의 공업시설과 농업 시설이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지형은 어떤가? 동부에 번창한 공업지대와 남부의 농업지대, 서부의 광산과 석유생산 그리고 알래스카와 부동항들까지, 지정학적으로 소련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따라서 냉전시기 미국이 소련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우월한 자본주의 때문이라기 보단 그냥 지정학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소련보다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이 소련조건이었으면, 툰드라에서 등신짓하다 지들끼리 폭주하여 박살났겠지!! ㅋㅋㅋㅋㅋ 아무튼 이런 넘사벽인 미국과 싸워 대등한 위치에 올랐던 소련이 참 능력있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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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본격적으로 일으킨 일본 제국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소련과의 무력 충돌이었다. 만약 국공합작에 성공한 중국이 소련과 손을 잡고 만주를 공격한다면 이는 일본에게 매우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주와 중국에서 화려한 승리에 심취해 있던 일본 관동군은 소련을 과소평가하며 무모한 도발을 거듭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군과 소련군과의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하산호 전투(Battle of Lake Khasan).

  

하산호 전투는 1938729일부터 911일까지 대략 2주에 걸쳐 벌어졌던 전투였다. 당시 소련의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가 지휘하는 소련 극동군의 규모는 20개 저격사단, 5개 기병사단 전차 1500, 항공기 1560대 그리고 37만 명에 달하는 대군이었다. 반면 일본 관동군의 전력은 조선군과 만주국 괴뢰군까지 합쳐도 그 절반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의 참모본부 작전과장이던 이나다 마사즈미 대좌는 상부에서 내린 결정안과는 상관없이 하산 호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이나다는 일본군이 소련군보다 훨씬 정예군이기 때문에 소련군의 화력과 숫자와는 상관없이 극복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있었다.

  

715일 하산 호 동남쪽에서 순찰 중이던 일본군 헌병대가 소련군의 총격을 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군이 소련 영내 30m까지 들어오면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일어나면서 소련군과 일본군간의 긴장상태가 높아졌고, 720일에는 다시한번 소련군과 대치하는 상황이 놓였으며, 729일 오전 9시 일본군 순찰대는 소련군 1개 소대가 진지를 구축하는 모습을 포착했다. 결국 일본은 729일 오후 1시 소련군의 진지를 공격하며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전차까지 투입하자 일본군은 열세에 몰렸다. 다음날인 730일 밤 1030350명 규모의 일본군 1개 대대가 서남쪽에 있는 하산 호에 진격했고, 다음날인 731일 새벽 2시쯤해서 소련군과 다시한번 교전을 벌인다. 이번에는 소련군이 후퇴했다. 81일 소련군은 전차 부대와 3천 명의 병력을 앞세워 하산 호를 공격했고, 항공기 130대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자신들이 목표했던 것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이렇게 하산 호 전투가 확대되자 양측은 84일부터 정전 교섭을 시작했고, 일본은 소련의 요구를 받아들여 811일 모스크바에서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분쟁은 1905년 러일전쟁 이래 일본이 처음으로 강대국과 싸운 대규모 전투였다. 일본군은 대략 526명이 전사하고, 914명이 부상당했던 반면 소련군은 236명이 전사하고 611명이 부상당했다고 알려졌지만, 일본 측 통계에 따르면 소련군 전사자가 일본군 전사자 보다 200명 더 많은 것으로 나온다.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나, 확실한건 소련군의 전사자도 절대로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이 소련군을 완벽히 꺾은 것은 아니었다. 일본 관동군은 여전히 소련군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하산호 전투 이후에도 버리지 않았다. 그 결과 1939년 노몬한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게 참패를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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