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는 농업 국가이자 후진 자본주의 국가였다. 러시아 제국은 1890년대에 이르러 세계 자본주의의 제국주의화 추세와 연관하여 큰 변화가 일면서 자본주의적 비약적인 성장을 달성했다. 그러면서 농업 국가 러시아에선 새로운 사회계급이 대두되었는데, 그게 바로 자본가와 노동자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도시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작업환경 속에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러시아의 노동자들은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파업과 투쟁을 이어나갔지만, 차르 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부터 러시아에서는 차르 체제에 맞선 크고 작은 투쟁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1905년 1월 9일 대략 2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차르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어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차르 정부는 총으로 무장한 근위병들과 코사크 기병대를 투입하여 시위대를 진압했고, 그 과정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게 바로 ‘피의 일요일’이다. 1905년 러일전쟁이 러시아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노동자 파업 및 투쟁은 더 격해졌다. 그해 10월과 12월까지 대략 50일에 걸쳐 20만 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노동자 대표 평의회가 러시아 수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모스크바에서는 12월 무장봉기로 경찰국가에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운동은 확실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며 노동자들이 지침에 따라 세력이 약화되자 차르 정권은 이를 진압하여 수많은 노동자를 살해했다. 따라서 1905년에 일어난 노동자 봉기는 실패로 끝이 났다. 하지만 1905년 혁명은 노동자들이 봉기하여 차르 정권을 전복시키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다시 한번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바로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투르크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영국의 동맹국인 일본도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를 도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됐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 제국의 허황된 꿈인 ‘슐리펜 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장기전에 돌입했고, 점차 참호를 중심으로 한 장기전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은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국에 맞서 전쟁을 치렀는데, 독일과의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와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측의 경제난은 지속되는 가운데, 러시아 제국의 지주와 자본가들의 횡포와 부패가 극심해지면서, 러시아에선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17년에 일어난 2월 혁명이다. 1917년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 시위를 시작으로 수많은 민중이 혁명에 동참했다. 물론 차르 정부가 발포를 명령했기에 그 과정에서 대다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시민들을 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 병사들은 노동자들과 거리로 나와 총과 붉은 깃발을 들고 행진했고, 시위 시작 5일째 되던 날 니콜라이 황제는 자진사퇴 하게 되었다. 이로써 차르 체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는 케렌스키와 부르주아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새로운 임시정부는 분명 부르주아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농촌 혁명을 부르짖던 사회혁명당 계열의 일부 인사들과 멘셰비키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민중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러시아 민중이 간절히 원했던 독일과의 전쟁 중단을 실행하지 않았고, 오히려 전선에서 무모한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수많은 러시아 병사들이 전투에서 죽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 1917년 4월 3일 볼셰비키당을 이끌던 레닌이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레닌은 전차 위에서 열 번을 토했고, 다음날인 4월 4일 볼셰비키 집회와 사회민주당 연합집회에서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를 발표했다. 그것이 바로 4월 테제다. 레닌의 ‘4월 테제’에서 “즉각적인 전쟁 중단,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국제혁명조직 창설” 등을 주장했다. 돌아온 레닌은 러시아에서 혁명을 준비하던 중 레닌의 예상보다 빨리 민중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그게 바로 7월 봉기다. 그러나 그해 일어난 7월 봉기는 임시정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당했고, 이 때문에 레닌 또한 러시아를 잠시 떠나야 했다.

당시 핀란드로 도망간 레닌은 <국가와 혁명>을 집필했는데, 그해 8월 러시아에선 반혁명의 시도가 일어났었다. 그게 바로 코르닐로프의 반란이다.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시도가 일어나자,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케렌스키 정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러시아 병사들이 코르닐로프의 반란 진압에 동참하면서 반혁명은 무마되었다.

이런 가운데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와 민중들 사이에 혁명의 기운이 치솟음을 깨닫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다시 내걸며 혁명을 준비했다. 10월 초 레닌은 핀란드 은신처에서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와 무장봉기의 준비를 직접 지휘하게 되었다. 준비를 마친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의 중심 지역에서 전함 오로라호의 발포와 동시에 반혁명파들을 분쇄했고, 10월 26일 겨울 궁전까지 접수하면서 수도에서의 봉기를 완료했다. 10월 26일 레닌은 즉각 ‘평화에 대한 포고’,를 시작으로 ‘토지에 관한 포고’와 그 외의 포고령을 발포했다.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은 단기간 동안 맞은 것들을 성취해냈다. 초창기 볼셰비키 러시아에선 지주의 모든 토지가 몰수되어 무상으로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했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인종차별과 같은 악법은 폐지되었고 혁명 이후로 인종차별이 웬만큼 사라졌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고 심지어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다. 또한, 여성의 보육을 담당해주기 위한 탁아소도 설치되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빠졌다. 이렇듯 레닌과 볼셰비키의 러시아 혁명은 많은 것들을 성취해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통해서 성취해낸 결과물이었고, 따라서 러시아 혁명은 진보적인 가치를 전적으로 실행시킨 위대한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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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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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399월부터 일본이 항복하는 19458월까지 대략 6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대략 5500만에서 7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 사망자였다. 기존의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하면, 주로 영미 연합군이 중심이 된 서부 연합군의 공로만 강조해 왔다.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시절 텔레비전에선 <전투: combat>, <게리슨 유격대>, <지상 최대의 작전>, <패튼 대전차 군단>, <벌지 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배틀 오브 브리튼>, <켈리의 영웅>, <머나먼 다리> 등을 방영했었고, 이후에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진주만: Pearl Harbor>, <퓨리: Fury> 그리고 2년 전 인기를 끌었던 <덩케르크: Dunkirk>처럼 주로 미국이나 영국을 중심으로 한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Band of Brothers><더 퍼시픽: The Pacific>을 보면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나온 미국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영미 연합군이 아니라 19416월부터 19455월까지 아돌프 히틀러의 야만적인 침략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등이 지휘하는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위에 상술한 영화들 때문이라고는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역할이 등한시되어온 측면이 있었다. 서구 중심의 매체와 문서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본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소련군의 역할을 쉽게 무시하게 되고, 중요치 않게 여기게 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관점을 배척하기 위해 이번에 미국의 군사 전문가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쓴 <독소전쟁사: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를 읽게 되었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소련군은 어떤 방식으로 히틀러의 침략을 막아냈던 것일까?

 

1.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1921년까지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내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렸다. 1928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른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초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는데, 고도의 생산력을 달성함과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군의 현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소련군 이론가들은 종심 전투 이론에 대한 전술적 개념을 완성 시켰고, 장갑차와 전차를 위주로 한 육군 전술을 발전시켰다. 1932년 소련은 사상 최초로 2개의 기계화 군단을 편성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최초의 기갑 사단을 창설하기 3년 전에 달성한 성과였다. 어쨌든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를 기반으로 하여 군사력을 발전시켰고, 대숙청이 진행 중이던 193861일 붉은 군대의 평상시 전력은 대략 150만 명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1930년대 스탈린이 진행한 공업화로 인하여 소련 전역에는 수많은 공장이 건설되었고, 그 공장들은 19416월 히틀러의 독일이 침략하자 19417월부터 11월까지 우랄산맥을 거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전하여, 소련군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소총과 기관총 등을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물론 전쟁 초기 독일군의 진격이 워낙 신속하게 전개되었기에, 일부 중요한 생산 지역이 독일군 수중에 넘어가 버리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군수 물자 생산은 스탈린의 공업화가 기반이 됐기에 가능했고,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미국의 랜드리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다면,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 그게 바로 미국의 랜드리스(무기 대여법). 랜드리스 배경에 관해 얘기하자면,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사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도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1941년 히틀러가 유럽의 75%를 장악하고 소련까지 침공했을 때도 유럽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나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하와이에 있는 미군 기지를 공습했기 때문이었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자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했고, 이로부터 4일 뒤인 1211일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을 돕겠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그게 결국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1942~1943년에 미국은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소련에도 물자를 지원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 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제공했다. 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소련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경제는 전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에게 지원한 전차나 항공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특히 소련군들이 미국으로부터 쓰레기 무기를 받고 있다고 의심까지 하게 만들 정도였다. 전차를 예로 들자면 영국군의 주력인 마틸다 전차나 미군의 주력은 M4 셔먼 전차의 경우 독일군의 중전차들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고, 소련의 주력 전차인 T-34보다도 성능이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미국의 랜드리스가 소련군의 무기 체계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3. 쿠르스크 전투

 

많은 사람이 독소전쟁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독소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전투를 생각한다면 아마 19428월부터 19432월까지 볼가강 근처에서 전개됐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일 것이다.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소련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독소전쟁의 전환점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보단 19437월부터 8월까지 전개되었던 쿠르스크 전투라 생각한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전차는 3호와 4호 전차였지만, 독일군이 새로 개발한 티거라 불리는 6호 전차는 소련군의 T-34 전차의 성능을 훨씬 압도했고, 이는 티거 1대가 T-34 10대를 잡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렇듯 최신식 전차로 무장한 독일군에 맞서 소련군은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여 피로스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 통계에 따라선 쿠르스크 전투에서 파괴된 소련군의 탱크가 대략 7000대 이상이라고도 하는데,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고, 독일군이 더 이상 대규모의 공세를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전투이자 소련군의 승리였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를 아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다.

 

4. 정말 이오시프 스탈린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과연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서 공로가 있는지에 대한 의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부정하는 측에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그가 대대적으로 감행했던 대숙청으로 인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기 때문에, 1939년의 겨울 전쟁과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르게 된 흐루쇼프 서기장은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연설을 하며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없었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하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로를 강하게 부정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이 감행했던 대숙청에 관해 얘기하자면, 대숙청 시기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죽거나 굴라그에 보내졌던 것도 사실이고,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 측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도 사실이며, 독소전쟁 초반에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 때문에 후퇴를 거듭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의 소련군을 보면 소련이 보낸 전차대대가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격파되기도 했었다.

 

19416222300대의 전차와 3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300만 대군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소련군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한 당일에 대략 1200대의 주력 항공기를 지상에서 잃었었다. 그 바람에 194111월 말에는 모스크바 외곽까지 밀렸고,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도 독일군에 의해 포위당했었으며, 1942년에는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독일군이 진입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왜 스탈린은 독일군의 침공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독소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스탈린이 내렸던 판단은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던 얘기였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는데, “영국과의 전쟁을 완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두 개의 양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독일 입장에서도 불리한 일이니 영국을 굴복시키지 않는 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런 스탈린의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망상에 빠져있던 히틀러가 스탈린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1941년부터 1942년 혹은 1943년 초까지의 소련군이 처해있던 상황은 굉장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거치면서 스탈린의 소련도 점차 독일군에 맞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스탈린 또한 게오르기 주코프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등의 의견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며, 전략을 세워 독일군에 맞서 싸웠으며, 점차 효율적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독일군을 차례차례 박살 냈다. 1943년과 1944년 그리고 1945년부터는 스탈린의 세운 몇몇 작전들이 보기 좋게 성공하여 독일군이 후퇴하기도 했다.

 

독소전쟁 시기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또 한 가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은 바로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그가 보인 모습이었다. 19411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점차 진격해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수도 모스크바를 탈출하지 않았고,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진행하였으며,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 남아 끝까지 크렘린 궁전을 지켰다. 이는 전쟁 초기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목숨이 독일군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히틀러 파시스트의 침략을 무찌르게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다. 책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그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 50주년 기념일에 미국의 어느 잡지는 표지에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젠하워가 히틀러를 패배시킨 장본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명칭은 사실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그리고 아마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좀 더 일반화하면 1941년에서 1945년 까지 독일에 대항한 소련군과 다민족인 소련 인민들이 전투에서 가장 큰 몫을 해냈다.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에 1931년부터 계속 시달려 온 중국 정도가 소련의 시련과 노력의 정도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자면 중국의 기여는 소련에 비해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군의 거의 절반과 계속 전투를 했었다.”

 

출처: 독소전쟁사 p.355

 

정리하자면 2차대전의 승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기여한 공은 분명히 있으며, 그가 2차대전 승리에 이바지한 공은 미국의 아이젠하워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개석 그리고 영국의 처칠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5. 소련군의 승리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승리로 끝낸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1944년 초 소련군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레닌그라드(러시아 제국 시절과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해방시켰고,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19446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독일군을 몰아냈으며, 1945년 초에는 헝가리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독일 국경지대를 돌파했고, 430일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여 제국의 심장인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세웠다. 베를린 전투는 5월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그해 5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히틀러 군대를 궤멸시키고 승리를 쟁취한 소련은 19457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바로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이던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1938년 하산호와 1939년 노몬한에서 소련군하고 붙어봤던 일본은 1941년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1945년 초 소련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고, 그해 7월부터는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었다. 1945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89일 소련군은 만주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사할린 남부와 만주지역 그리고 북한까지 접수했고, 일본군을 대패시켰다.

 

소련군의 만주 전역 공격은 오히려 1944년과 1945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전개했던 전술보다 더 효과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후 소련군의 군사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6. 결론: 2차 세계대전 연합국 승리를 이끈 나라는 바로 소련이다.

 

지금까지 소련이 어떻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를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련이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다.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16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소련군의 전사자를 당시 미군 전사자에 비교하자면 대략 25배 이상이다. 194112월에서 194211월까지 독일과 소련 양측을 합하여 900만 명의 병력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렀는데, 당시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던 영국은 추축국에 6만 명의 손실을 입혔다.

 

19437, 독일군과 소련군 200만 명이 쿠르스크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500만 명이 스몰렌스크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600km의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서방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해서 6만 명의 독일군을 몰아냈다. 전쟁 시작부터 1945430일까지의 독일군의 전체 손실은 대략 1100만 명이고 그중에 부상자가 600만 명인데, 이들 중 9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19446월 서방 연합군이 제2 전선을 프랑스에 형성할 때까지 소련군은 대략 3년간 동부전선 전역에서 나치독일에 맞서 싸웠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소련의 노력은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컸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소련과 러시아 측 자료와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영미 중심의 관점으로 봐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다만 읽기 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순수히 군사적인 입장에서 소련의 업적을 재조명했기에,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군사적인 지식 없이는 힘들다. 하지만 데이비드 글랜츠의 책은 읽음으로써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을 것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해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명저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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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출신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트로츠키는 1897년 18살의 나이로 러시아의 전제 군주 체제에 반대에 싸우다 투옥당했다.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는 1900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902년 탈출하여 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는 감옥 생활 당시 가명을 사용했는데, 그래서 그의 이름이 트로츠키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 간 트로츠키는 수도 런던에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고, 초기에는 <이스크라 신문>에서 활동하다가, 레닌의 노선에 실망하여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트로츠키는 혁명 운동의 지도부로 떠올랐다. 겨우 스물여섯의 나이에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혁명 과정에서 생겨난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동자 위원회들 가운데 하나―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1905년 혁명이 패배하자 제정 러시아 정부는 다시 트로츠키를 투옥했다. 감옥 생활 당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더 깊이 공부하며 “연속혁명론” 사상을 발전시켰다. 1907년 트로츠키는 다시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이후 프랑스와 미국 스위스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혁명 활동을 펼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터지자 트로츠키는 종군기자로 전선을 취재하다 반전적인 논조 때문에 프랑스 당국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했고, 스페인에서도 추방당했다. 그렇게 해서 트로츠키는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러던 1917년 차르체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왔고, 그해 7월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레닌과 더불어 무장봉기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1918년 3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를 제외시켰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차르 체제 복원을 노리는 백군을 지원하며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적국을 창설하였다. 적군을 창설한 트로츠키는 소규모의 군대를 수백만의 군대로 성장시켰으며, 이를 토대로 적백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1919년 볼셰비키가 창설한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닌의 건강의 악화되던 1923년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경쟁하게 되었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당내투쟁에서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 같은 인물들을 상대로 경쟁했지만,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해나가던 1927년에는 당에서 제명됐고 1929년에는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특히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에 비판적이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오스트리아의 빈을 떠돌며 스탈린의 탄압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반스탈린주의 투쟁을 벌였다. 그 시기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 <러시아 혁명사>, <스탈린주의 날조학>, <배반당한 혁명>,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등을 집필했다.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우상화와 폭력성 그리고 당내의 민주주의와 1인 권력화를 비판했다. 1936년 스탈린의 대대적인 대숙청으로 가족과 대부분의 측근을 잃었고, 1940년에는 멕시코에서 생활하며,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의 집에서 숨어지냈다. 그러나 그해 8월 21일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멕시코 출신의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곡괭이에 머리를 찍혀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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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6-18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트로츠키랑 그람시랑 진짜 너무 닮지 않았나요? ㅋㅋㅋㅋ 트로츠키는 좀 모질게 생긴 그람시같고, 그람시는 좀 낭창하게 생긴 트로츠키 같다는....

NamGiKim 2019-06-18 10:31   좋아요 0 | URL
미하일 칼리닌 얘기하시는 건나요?

NamGiKim 2019-06-18 10:31   좋아요 0 | URL
아니면 혹시 앤트맨의 행크 핌 박사? 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6-18 10:37   좋아요 0 | URL
행크 핌 박사 정말 닮았네? ㅋㅋㅋㅋ

NamGiKim 2019-06-18 11:05   좋아요 0 | URL
지난번 앤트맨 볼 때 마다 행크 핌 박사는 트로츠키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Holy Bible 2019-06-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
 

8월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

1945년 5월 7일 아돌프 히틀러를 이어 2대 총통이 된 카를 되니츠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300만 대군이 소련 전역에서 진격하며 시작된 독소전쟁은 4년간의 전쟁 끝에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난 것이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에 대항하는 세력은 일본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본토가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개되었던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일본군의 거센 저항과 끈질김에 직면해 있던 미군 또한 12,0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올 정도였다.(물론 일본군은 이에 6,7배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극심한 손실을 경험했던 미국은 일본으로 상륙하겠다던 ‘본토 상륙 작전’을 미루고 있었다.

1941년 4월에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던 소련은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4월 6일 일소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독일과의 전쟁이 자신들의 승리로 끝이 나자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7월 극동방면군 사령부 창설과 더불어 1945년 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극동방면군 사령부에는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소련군이 6월과 7월 안에 병력 배치와 사령부 창설을 완료한 이유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켰기 때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극동에 대규모의 군대를 배치하는 사이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선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터졌고, 핵실험까지 완료한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안 스탈린은 만주에 있던 소련군들을 진격시켰고, 극동에 배치되었던 소련군들은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전투를 개시하게 되었다. 8월 폭풍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8월 폭풍 작전은 1945년 8월 9일에 시작되었다. 만주와 소련 국경 전역에서 실행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엔 대략 80개의 소총사단과 4개의 전차군단 그리고 3개의 항공군(대략 항공기 3개 사단 정도)등 총 15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이는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가 투입된 규모였다. 그리고 여기엔 16,000명의 몽골 기병도 포함되었다.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본군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통신이 마비된 일본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고, 소련군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앞세워 삼면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며 일본군을 압박했다. 대부분의 일본군들은 소련군의 기습을 받아 통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저항을 해보지도 못했지만, 하이라얼 요새의 일본군 부대나 북만주 최대의 일본군 방어 요새였던 아이훈의 경우는 조금은 달랐다. 일본군이 견고히 방어하고 있던 후터우 요새도 그러했다. 그러나 만주에 배치되었던 일본 관동군들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소련군의 전략 전술과 화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리고 8월 16일에는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일본군인들 중에는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후터우 요새를 방어하던 일본군이었고,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은 8월 22일 소련군에 의해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저항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 했다. 8월 말까지 만주 전역을 장악한 소련군은 만리장성이 있는 곳에서 멈추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반도까지 진격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15일 까지 대략 4일간 전투를 치렀고, 21일부터 23일 사이에는 원산과 함흥 그리고 개성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양보했던 사할린의 절반을 차지하기 위해 8월 18일 시무슈 섬을 공격했다. 사할린 공격에서 소련군은 대략 9천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사할린 절반을 완전히 접수했다.

1945년 8월 9일부터 20일 까지 대략 11일 간 소련군은 대략 1만 2천 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에 일본군은 대략 2만 명에서 8만 3천 명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하였다. 어쨌든 소련군은 8월 폭풍 작전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일본 관동군 부대를 섬멸하였다. 이는 독소전쟁 당시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군의 쌓은 경험과 그것을 토대로 한 제병 협동 전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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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6-02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몰랐던 역사네요.
감사합니다. ^^

NamGiKim 2019-06-02 18:36   좋아요 1 | URL
독소전쟁사 쓴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이 ‘8월 폭풍 작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유승현 2019-06-05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월의 폭풍』역자로서 말씀드리자면 ˝8월의 폭풍˝은 작전명이 아니라 책 제목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그러한 작전명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글랜츠 본인이 자기 책 제목이 작전명으로 인식되어서 당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보시면 아실 일입니다.

NamGiKim 2019-06-05 11:01   좋아요 0 | URL
역자님께서 댓글 달아주실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현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보스토크 1호가 발사되었다. 보스토크 1호에는 소련 공군출신의 비행 조종사가 타고있었다. 우주비행사는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주 비행사는 1시간 49분간의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을 마친 뒤 지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유리 알렉세이비치 가가린이었다.

유리가가린은 1934년 러시아 스몰렌스크주에서 태어났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그와 그의 가족은 독일군 치하의 소련에서 살았고 독소전쟁시기 가가린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2차대전의 소련의 승리로 끝난 뒤 가가린은 다시 학교를 다녔고 유년시절 비행조종사를 꿈꿨다. 20살이 되던 해 가가린은 비행클럽에 가입했고 이후에 전투기 조종사로 훈련을 받았다. 가가린은 1959년 공군 소속으로 우주비행사에 도전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비행을 불과 며칠 앞두고 우주 조종사로 최종 발탁됐다. 당시 가가린은 27세였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가가린이 탑승한 보스토크 1호가 발사됐다. 가가린은 1시간49분가량의 우주 비행을 마친 뒤 낙하산을 타고 지구로 돌아왔다. 이틀 뒤 그는 모스크바에서 영웅으로 환대를 받았다. 무개차에 올라 시내를 돌 때 수천 명이 시민들이 영웅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된 유리가가린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소련은 우주 영웅을 ‘평화 사절단‘에 포함시켰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같은 지도자들을 만났다. 가가린은 소련의 상징적 인물로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됐다. 당국이 그에게 우주비행사나 전투기 조종사로서 임무를 더 이상 맡기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교에만 시간을 보냈던 가가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국에 비행금지 조치 해제를 요청했고, 1968년 다시 전투기 조종사로서 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가가린을 태운 미그 전투기는 1968년 3월 27일 비행훈련 중 지상으로 추락했다. 가가린과 강사는 즉사했다.

가가린의 죽음을 알게된 소련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다. 가가린의 장례식은 거하게 치뤄졌고 가가린은 사망 후 소련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가가린의 죽음은 소련 우주항공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사망한지 2년 만이었다. 가가린 사후 소련의 우주과학기술은 미국에 뒤쳐지기 시작했고 1969년 미국이 아폴로11호를 달에 보냄으로써 우주경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소련사람들에게 있어서 유리 가가린은 그야말로 성인에 가까운 영웅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수 많은 레닌 동상이 파괴되고 격하되었지만 유리 가가린은 러시아 사람들 가슴속에 영웅으로 남았다.

2016년 러시아 패키지 여행을 갔던 첫째날 모스크바의 어느 호텔에서 숙박했다. 그 호텔에 기념품 파는 곳을 보니 레닌 스탈린과 더불어 유리가가린의 티셔츠와 관광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직도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유리 가가린은 매우 상징적인 존재일 것이다.

유리 가가린은 공산권 인물 치고는 박정희 시대때 나름 긍정적으로 서술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 시기 나온 백과사전 단어 중 첫 시작이 가가린이었고 백과사전에는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만큼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점이 컷을 것이다.

가가린은 성격또한 좋았고 잘 웃는 편이었으며 좋은 성격덕분에 그를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가가린이 죽은지 50년이 넘었다. 그가 죽은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가린은 영웅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전세계사람들의 마음속에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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