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399월부터 일본이 항복하는 19458월까지 대략 6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대략 5500만에서 7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 사망자였다. 기존의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하면, 주로 영미 연합군이 중심이 된 서부 연합군의 공로만 강조해 왔다.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시절 텔레비전에선 <전투: combat>, <게리슨 유격대>, <지상 최대의 작전>, <패튼 대전차 군단>, <벌지 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배틀 오브 브리튼>, <켈리의 영웅>, <머나먼 다리> 등을 방영했었고, 이후에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진주만: Pearl Harbor>, <퓨리: Fury> 그리고 2년 전 인기를 끌었던 <덩케르크: Dunkirk>처럼 주로 미국이나 영국을 중심으로 한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Band of Brothers><더 퍼시픽: The Pacific>을 보면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나온 미국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영미 연합군이 아니라 19416월부터 19455월까지 아돌프 히틀러의 야만적인 침략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등이 지휘하는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위에 상술한 영화들 때문이라고는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역할이 등한시되어온 측면이 있었다. 서구 중심의 매체와 문서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본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소련군의 역할을 쉽게 무시하게 되고, 중요치 않게 여기게 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관점을 배척하기 위해 이번에 미국의 군사 전문가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쓴 <독소전쟁사: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를 읽게 되었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소련군은 어떤 방식으로 히틀러의 침략을 막아냈던 것일까?

 

1.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1921년까지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내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렸다. 1928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른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초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는데, 고도의 생산력을 달성함과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군의 현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소련군 이론가들은 종심 전투 이론에 대한 전술적 개념을 완성 시켰고, 장갑차와 전차를 위주로 한 육군 전술을 발전시켰다. 1932년 소련은 사상 최초로 2개의 기계화 군단을 편성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최초의 기갑 사단을 창설하기 3년 전에 달성한 성과였다. 어쨌든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를 기반으로 하여 군사력을 발전시켰고, 대숙청이 진행 중이던 193861일 붉은 군대의 평상시 전력은 대략 150만 명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1930년대 스탈린이 진행한 공업화로 인하여 소련 전역에는 수많은 공장이 건설되었고, 그 공장들은 19416월 히틀러의 독일이 침략하자 19417월부터 11월까지 우랄산맥을 거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전하여, 소련군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소총과 기관총 등을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물론 전쟁 초기 독일군의 진격이 워낙 신속하게 전개되었기에, 일부 중요한 생산 지역이 독일군 수중에 넘어가 버리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군수 물자 생산은 스탈린의 공업화가 기반이 됐기에 가능했고,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미국의 랜드리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다면,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 그게 바로 미국의 랜드리스(무기 대여법). 랜드리스 배경에 관해 얘기하자면,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사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도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1941년 히틀러가 유럽의 75%를 장악하고 소련까지 침공했을 때도 유럽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나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하와이에 있는 미군 기지를 공습했기 때문이었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자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했고, 이로부터 4일 뒤인 1211일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을 돕겠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그게 결국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1942~1943년에 미국은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소련에도 물자를 지원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 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제공했다. 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소련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경제는 전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에게 지원한 전차나 항공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특히 소련군들이 미국으로부터 쓰레기 무기를 받고 있다고 의심까지 하게 만들 정도였다. 전차를 예로 들자면 영국군의 주력인 마틸다 전차나 미군의 주력은 M4 셔먼 전차의 경우 독일군의 중전차들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고, 소련의 주력 전차인 T-34보다도 성능이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미국의 랜드리스가 소련군의 무기 체계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3. 쿠르스크 전투

 

많은 사람이 독소전쟁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독소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전투를 생각한다면 아마 19428월부터 19432월까지 볼가강 근처에서 전개됐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일 것이다.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소련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독소전쟁의 전환점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보단 19437월부터 8월까지 전개되었던 쿠르스크 전투라 생각한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전차는 3호와 4호 전차였지만, 독일군이 새로 개발한 티거라 불리는 6호 전차는 소련군의 T-34 전차의 성능을 훨씬 압도했고, 이는 티거 1대가 T-34 10대를 잡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렇듯 최신식 전차로 무장한 독일군에 맞서 소련군은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여 피로스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 통계에 따라선 쿠르스크 전투에서 파괴된 소련군의 탱크가 대략 7000대 이상이라고도 하는데,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고, 독일군이 더 이상 대규모의 공세를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전투이자 소련군의 승리였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를 아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다.

 

4. 정말 이오시프 스탈린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과연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서 공로가 있는지에 대한 의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부정하는 측에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그가 대대적으로 감행했던 대숙청으로 인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기 때문에, 1939년의 겨울 전쟁과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르게 된 흐루쇼프 서기장은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연설을 하며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없었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하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로를 강하게 부정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이 감행했던 대숙청에 관해 얘기하자면, 대숙청 시기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죽거나 굴라그에 보내졌던 것도 사실이고,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 측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도 사실이며, 독소전쟁 초반에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 때문에 후퇴를 거듭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의 소련군을 보면 소련이 보낸 전차대대가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격파되기도 했었다.

 

19416222300대의 전차와 3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300만 대군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소련군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한 당일에 대략 1200대의 주력 항공기를 지상에서 잃었었다. 그 바람에 194111월 말에는 모스크바 외곽까지 밀렸고,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도 독일군에 의해 포위당했었으며, 1942년에는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독일군이 진입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왜 스탈린은 독일군의 침공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독소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스탈린이 내렸던 판단은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던 얘기였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는데, “영국과의 전쟁을 완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두 개의 양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독일 입장에서도 불리한 일이니 영국을 굴복시키지 않는 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런 스탈린의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망상에 빠져있던 히틀러가 스탈린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1941년부터 1942년 혹은 1943년 초까지의 소련군이 처해있던 상황은 굉장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거치면서 스탈린의 소련도 점차 독일군에 맞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스탈린 또한 게오르기 주코프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등의 의견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며, 전략을 세워 독일군에 맞서 싸웠으며, 점차 효율적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독일군을 차례차례 박살 냈다. 1943년과 1944년 그리고 1945년부터는 스탈린의 세운 몇몇 작전들이 보기 좋게 성공하여 독일군이 후퇴하기도 했다.

 

독소전쟁 시기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또 한 가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은 바로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그가 보인 모습이었다. 19411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점차 진격해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수도 모스크바를 탈출하지 않았고,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진행하였으며,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 남아 끝까지 크렘린 궁전을 지켰다. 이는 전쟁 초기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목숨이 독일군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히틀러 파시스트의 침략을 무찌르게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다. 책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그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 50주년 기념일에 미국의 어느 잡지는 표지에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젠하워가 히틀러를 패배시킨 장본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명칭은 사실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그리고 아마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좀 더 일반화하면 1941년에서 1945년 까지 독일에 대항한 소련군과 다민족인 소련 인민들이 전투에서 가장 큰 몫을 해냈다.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에 1931년부터 계속 시달려 온 중국 정도가 소련의 시련과 노력의 정도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자면 중국의 기여는 소련에 비해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군의 거의 절반과 계속 전투를 했었다.”

 

출처: 독소전쟁사 p.355

 

정리하자면 2차대전의 승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기여한 공은 분명히 있으며, 그가 2차대전 승리에 이바지한 공은 미국의 아이젠하워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개석 그리고 영국의 처칠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5. 소련군의 승리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승리로 끝낸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1944년 초 소련군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레닌그라드(러시아 제국 시절과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해방시켰고,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19446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독일군을 몰아냈으며, 1945년 초에는 헝가리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독일 국경지대를 돌파했고, 430일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여 제국의 심장인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세웠다. 베를린 전투는 5월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그해 5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히틀러 군대를 궤멸시키고 승리를 쟁취한 소련은 19457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바로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이던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1938년 하산호와 1939년 노몬한에서 소련군하고 붙어봤던 일본은 1941년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1945년 초 소련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고, 그해 7월부터는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었다. 1945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89일 소련군은 만주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사할린 남부와 만주지역 그리고 북한까지 접수했고, 일본군을 대패시켰다.

 

소련군의 만주 전역 공격은 오히려 1944년과 1945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전개했던 전술보다 더 효과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후 소련군의 군사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6. 결론: 2차 세계대전 연합국 승리를 이끈 나라는 바로 소련이다.

 

지금까지 소련이 어떻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를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련이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다.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16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소련군의 전사자를 당시 미군 전사자에 비교하자면 대략 25배 이상이다. 194112월에서 194211월까지 독일과 소련 양측을 합하여 900만 명의 병력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렀는데, 당시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던 영국은 추축국에 6만 명의 손실을 입혔다.

 

19437, 독일군과 소련군 200만 명이 쿠르스크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500만 명이 스몰렌스크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600km의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서방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해서 6만 명의 독일군을 몰아냈다. 전쟁 시작부터 1945430일까지의 독일군의 전체 손실은 대략 1100만 명이고 그중에 부상자가 600만 명인데, 이들 중 9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19446월 서방 연합군이 제2 전선을 프랑스에 형성할 때까지 소련군은 대략 3년간 동부전선 전역에서 나치독일에 맞서 싸웠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소련의 노력은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컸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소련과 러시아 측 자료와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영미 중심의 관점으로 봐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다만 읽기 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순수히 군사적인 입장에서 소련의 업적을 재조명했기에,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군사적인 지식 없이는 힘들다. 하지만 데이비드 글랜츠의 책은 읽음으로써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을 것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해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명저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온 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출신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트로츠키는 1897년 18살의 나이로 러시아의 전제 군주 체제에 반대에 싸우다 투옥당했다.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는 1900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902년 탈출하여 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는 감옥 생활 당시 가명을 사용했는데, 그래서 그의 이름이 트로츠키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 간 트로츠키는 수도 런던에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고, 초기에는 <이스크라 신문>에서 활동하다가, 레닌의 노선에 실망하여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트로츠키는 혁명 운동의 지도부로 떠올랐다. 겨우 스물여섯의 나이에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혁명 과정에서 생겨난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동자 위원회들 가운데 하나―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1905년 혁명이 패배하자 제정 러시아 정부는 다시 트로츠키를 투옥했다. 감옥 생활 당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더 깊이 공부하며 “연속혁명론” 사상을 발전시켰다. 1907년 트로츠키는 다시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이후 프랑스와 미국 스위스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혁명 활동을 펼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터지자 트로츠키는 종군기자로 전선을 취재하다 반전적인 논조 때문에 프랑스 당국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했고, 스페인에서도 추방당했다. 그렇게 해서 트로츠키는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러던 1917년 차르체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왔고, 그해 7월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레닌과 더불어 무장봉기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1918년 3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를 제외시켰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차르 체제 복원을 노리는 백군을 지원하며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적국을 창설하였다. 적군을 창설한 트로츠키는 소규모의 군대를 수백만의 군대로 성장시켰으며, 이를 토대로 적백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1919년 볼셰비키가 창설한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닌의 건강의 악화되던 1923년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경쟁하게 되었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당내투쟁에서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 같은 인물들을 상대로 경쟁했지만,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해나가던 1927년에는 당에서 제명됐고 1929년에는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특히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에 비판적이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오스트리아의 빈을 떠돌며 스탈린의 탄압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반스탈린주의 투쟁을 벌였다. 그 시기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 <러시아 혁명사>, <스탈린주의 날조학>, <배반당한 혁명>,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등을 집필했다.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우상화와 폭력성 그리고 당내의 민주주의와 1인 권력화를 비판했다. 1936년 스탈린의 대대적인 대숙청으로 가족과 대부분의 측근을 잃었고, 1940년에는 멕시코에서 생활하며,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의 집에서 숨어지냈다. 그러나 그해 8월 21일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멕시코 출신의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곡괭이에 머리를 찍혀 암살당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yo 2019-06-18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트로츠키랑 그람시랑 진짜 너무 닮지 않았나요? ㅋㅋㅋㅋ 트로츠키는 좀 모질게 생긴 그람시같고, 그람시는 좀 낭창하게 생긴 트로츠키 같다는....

NamGiKim 2019-06-18 10:31   좋아요 0 | URL
미하일 칼리닌 얘기하시는 건나요?

NamGiKim 2019-06-18 10:31   좋아요 0 | URL
아니면 혹시 앤트맨의 행크 핌 박사? 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6-18 10:37   좋아요 0 | URL
행크 핌 박사 정말 닮았네? ㅋㅋㅋㅋ

NamGiKim 2019-06-18 11:05   좋아요 0 | URL
지난번 앤트맨 볼 때 마다 행크 핌 박사는 트로츠키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Holy Bible 2019-06-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
 

8월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

1945년 5월 7일 아돌프 히틀러를 이어 2대 총통이 된 카를 되니츠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300만 대군이 소련 전역에서 진격하며 시작된 독소전쟁은 4년간의 전쟁 끝에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난 것이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에 대항하는 세력은 일본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본토가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개되었던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일본군의 거센 저항과 끈질김에 직면해 있던 미군 또한 12,0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올 정도였다.(물론 일본군은 이에 6,7배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극심한 손실을 경험했던 미국은 일본으로 상륙하겠다던 ‘본토 상륙 작전’을 미루고 있었다.

1941년 4월에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던 소련은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4월 6일 일소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독일과의 전쟁이 자신들의 승리로 끝이 나자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7월 극동방면군 사령부 창설과 더불어 1945년 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극동방면군 사령부에는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소련군이 6월과 7월 안에 병력 배치와 사령부 창설을 완료한 이유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켰기 때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극동에 대규모의 군대를 배치하는 사이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선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터졌고, 핵실험까지 완료한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안 스탈린은 만주에 있던 소련군들을 진격시켰고, 극동에 배치되었던 소련군들은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전투를 개시하게 되었다. 8월 폭풍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8월 폭풍 작전은 1945년 8월 9일에 시작되었다. 만주와 소련 국경 전역에서 실행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엔 대략 80개의 소총사단과 4개의 전차군단 그리고 3개의 항공군(대략 항공기 3개 사단 정도)등 총 15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이는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가 투입된 규모였다. 그리고 여기엔 16,000명의 몽골 기병도 포함되었다.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본군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통신이 마비된 일본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고, 소련군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앞세워 삼면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며 일본군을 압박했다. 대부분의 일본군들은 소련군의 기습을 받아 통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저항을 해보지도 못했지만, 하이라얼 요새의 일본군 부대나 북만주 최대의 일본군 방어 요새였던 아이훈의 경우는 조금은 달랐다. 일본군이 견고히 방어하고 있던 후터우 요새도 그러했다. 그러나 만주에 배치되었던 일본 관동군들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소련군의 전략 전술과 화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리고 8월 16일에는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일본군인들 중에는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후터우 요새를 방어하던 일본군이었고,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은 8월 22일 소련군에 의해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저항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 했다. 8월 말까지 만주 전역을 장악한 소련군은 만리장성이 있는 곳에서 멈추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반도까지 진격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15일 까지 대략 4일간 전투를 치렀고, 21일부터 23일 사이에는 원산과 함흥 그리고 개성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양보했던 사할린의 절반을 차지하기 위해 8월 18일 시무슈 섬을 공격했다. 사할린 공격에서 소련군은 대략 9천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사할린 절반을 완전히 접수했다.

1945년 8월 9일부터 20일 까지 대략 11일 간 소련군은 대략 1만 2천 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에 일본군은 대략 2만 명에서 8만 3천 명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하였다. 어쨌든 소련군은 8월 폭풍 작전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일본 관동군 부대를 섬멸하였다. 이는 독소전쟁 당시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군의 쌓은 경험과 그것을 토대로 한 제병 협동 전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북다이제스터 2019-06-02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몰랐던 역사네요.
감사합니다. ^^

NamGiKim 2019-06-02 18:36   좋아요 1 | URL
독소전쟁사 쓴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이 ‘8월 폭풍 작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유승현 2019-06-05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월의 폭풍』역자로서 말씀드리자면 ˝8월의 폭풍˝은 작전명이 아니라 책 제목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그러한 작전명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글랜츠 본인이 자기 책 제목이 작전명으로 인식되어서 당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보시면 아실 일입니다.

NamGiKim 2019-06-05 11:01   좋아요 0 | URL
역자님께서 댓글 달아주실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1961년 4월 12일 소련(현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보스토크 1호가 발사되었다. 보스토크 1호에는 소련 공군출신의 비행 조종사가 타고있었다. 우주비행사는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주 비행사는 1시간 49분간의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을 마친 뒤 지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의 이름은 유리 알렉세이비치 가가린이었다.

유리가가린은 1934년 러시아 스몰렌스크주에서 태어났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그와 그의 가족은 독일군 치하의 소련에서 살았고 독소전쟁시기 가가린은 학교를 다니지 않았다. 2차대전의 소련의 승리로 끝난 뒤 가가린은 다시 학교를 다녔고 유년시절 비행조종사를 꿈꿨다. 20살이 되던 해 가가린은 비행클럽에 가입했고 이후에 전투기 조종사로 훈련을 받았다. 가가린은 1959년 공군 소속으로 우주비행사에 도전했다. 그리고 1961년 4월 비행을 불과 며칠 앞두고 우주 조종사로 최종 발탁됐다. 당시 가가린은 27세였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의 바이코누르 기지에서 가가린이 탑승한 보스토크 1호가 발사됐다. 가가린은 1시간49분가량의 우주 비행을 마친 뒤 낙하산을 타고 지구로 돌아왔다. 이틀 뒤 그는 모스크바에서 영웅으로 환대를 받았다. 무개차에 올라 시내를 돌 때 수천 명이 시민들이 영웅을 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가 된 유리가가린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소련은 우주 영웅을 ‘평화 사절단‘에 포함시켰다.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같은 지도자들을 만났다. 가가린은 소련의 상징적 인물로 너무나 소중한 존재가 됐다. 당국이 그에게 우주비행사나 전투기 조종사로서 임무를 더 이상 맡기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교에만 시간을 보냈던 가가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당국에 비행금지 조치 해제를 요청했고, 1968년 다시 전투기 조종사로서 재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가가린을 태운 미그 전투기는 1968년 3월 27일 비행훈련 중 지상으로 추락했다. 가가린과 강사는 즉사했다.

가가린의 죽음을 알게된 소련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다. 가가린의 장례식은 거하게 치뤄졌고 가가린은 사망 후 소련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가가린의 죽음은 소련 우주항공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사망한지 2년 만이었다. 가가린 사후 소련의 우주과학기술은 미국에 뒤쳐지기 시작했고 1969년 미국이 아폴로11호를 달에 보냄으로써 우주경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소련사람들에게 있어서 유리 가가린은 그야말로 성인에 가까운 영웅이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수 많은 레닌 동상이 파괴되고 격하되었지만 유리 가가린은 러시아 사람들 가슴속에 영웅으로 남았다.

2016년 러시아 패키지 여행을 갔던 첫째날 모스크바의 어느 호텔에서 숙박했다. 그 호텔에 기념품 파는 곳을 보니 레닌 스탈린과 더불어 유리가가린의 티셔츠와 관광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직도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유리 가가린은 매우 상징적인 존재일 것이다.

유리 가가린은 공산권 인물 치고는 박정희 시대때 나름 긍정적으로 서술되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박정희 정권 시기 나온 백과사전 단어 중 첫 시작이 가가린이었고 백과사전에는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서술되어 있었다. 그만큼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점이 컷을 것이다.

가가린은 성격또한 좋았고 잘 웃는 편이었으며 좋은 성격덕분에 그를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가가린이 죽은지 50년이 넘었다. 그가 죽은지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가린은 영웅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전세계사람들의 마음속에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로 남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스탈린, 강철 권력 문제적 인간 9
로버트 서비스 지음, 윤길순 옮김 / 교양인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러시아인이 탱크와 비행기 함대로 무장하면 절대 정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나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못하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출처: 스탈린 강철권력 p.480에서 1933년 노동절 행사 때의 스탈린 연설문을 발췌

 

이오시프 스탈린!! 그는 대숙청으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는 대학살자라는 타이틀과 공업화를 성공시켜 소련을 미국과 경쟁하게 했던 위대한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인물이다. 특히나 스탈린 정권에 의해 피해를 적잖게 본 우크라이나나 발트3(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소련군의 공격을 받았던 핀란드의 경우 그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좋지 않다. 현재 북한하고 대립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었고, 지금도 긍정적인 평가보단 부정적인 평가가 훨씬 앞선다. 그러나 한국에서 있던 그에 대한 비판은 북한과의 대립 속에서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비판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필자는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서 관심이 많이 생겼고, 보다 자세히 그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이다.

 

1. 일국사회주의의 빛과 그림자

 

1924121일 소련의 위대한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했다. 1920년대 초부터 건강상의 문제가 생겼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점차 정치에서 멀어졌고, 그로인한 공백은 레온 트로츠키를 비롯하여 니콜라이 부하린이나 카메네프, 지노비예프같은 인물들의 경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 트로츠키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자 레닌은 이것을 일부분 견제하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을 이용했고, 이 과정에서 스탈린의 권력또한 조금씩 막강해졌다.

 

블라디미르 레닌이 사망하자, 소련에서는 정권을 두고 당내 투쟁이 일어났다. 초반에는 연설이 매우 뛰어났던 레온 트로츠키 대 다른 지노비예프와 같은 다른 당내 인물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이는 트로츠키도, 지노비예프도, 부하린도 아닌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1928년 최종 권력에 도달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 이후 레닌과 볼셰비키가 행하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제15개년 계획이라고 하여 경제재건에 나선다.

 

그와 동시에 이오시프 스탈린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온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국제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일국사회주의를 표명하는데, 이는 향후 국제정세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다. 그렇다면 일국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일국사회주의란 국제사회주의와는 달리 세계적인 국제 혁명과는 달리 한 나라 안에서의 역량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1926~27년 스탈린이 주장했다. 즉 이는 국제혁명 없이는 사회주의 건설이 없다고 주장하던 레닌의 주장과는 분명 다르다.

 

일국 사회주의를 표명한 이후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제대로 된 타격을 받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제1차 국공내전에 휩싸였던 중국과 1936년 파시스트 프랑코의 반란으로 시작된 스패인 내전이다. 1920년대 중국의 지도자 손문의 지도아래 전개된 제1차 국공합작에서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게 스스로 장제스의 휘하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 결과 1927년 장제스는 중국의 상하이와 광저우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1936년 진보주의자들이 선거로 정권을 잡자 파시스트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켜 일어나게 된 스페인 내전에서도 이오시프 스탈린은 크나큰 실책을 범한다. 1936년에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나치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프랑코를 도왔고,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은 프랑코에 맞서는 반프랑코 세력을 도왔다. 그리고 해외에 있는 수많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반프랑코 세력을 지원했었고, 이들 중에는 스탈린하고 맞지 않는 사회주의 세력들이 있었다. 초반에는 그들이 협력하여 파시스트 정권에 맞서 싸웠지만, 반스탈린계열 사회주의자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스탈린은 그들에게 무기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고, 오히려 반스탈린 계열 사회주의자들에게 총구를 겨눠 같은 세력들 끼리 전투를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1939년 파시스트 프랑코의 승리였다.

 

즉 그가 표명한 일국사회주의는 이와 같은 비극과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오시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는 무조건 틀렸던 것일까? 이 또한 아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던 1930년 대 초는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파시즘의 등장이라는 배경이 있었다.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경제 대공황으로 인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은 경제적인 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1931년 정권을 잡은 일본 군부들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고,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며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탈린의 소련은 극동에서는 일본을 상대해야 했고, 유럽에서는 나치독일을 상대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중공업 위주의 경제개발과 군사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그 과정에서 내세운 일국사회주의는 참으로 효과적이었고, 이후 나치독일에 맞서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2차세계대전 이후에는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2. 대숙청과 굴라그

 

스탈린 통치시대 가장 큰 인권유린을 논하자면 대숙청이라 할 수 있다. 공업화라는 과정에서 스탈린은 1935년 키로프 암살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대숙청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받았고, 엔카베데(NKVD)는 스탈린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견해를 들어내면 언제든지 체포하고 구금하거나 강제 수용소인 굴라그로 보낼 수 있었다. 마치 박정희 전두환때 반대파들에게 했듯이 말이다.

 

대숙청이라는 기간 동안 NKVD는 공식적으로 75만 명을 살해했고, 그 시기 굴라그로 끌려간 인민들이 수백만이 넘는다. 그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는 1940년 멕시코 코요야칸에서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비극적으로 살해되기 까지 했다. 이는 분명 스탈린 시기 공포정치의 치부다. 물론 치부이기는 하나 그 시기 희생자의 수치를 필요이상으로 늘려 악의적으로 악마화를 하는 것은 분명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면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인 사람이 2천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인데 이는 분명 과거 서방주의자들이 하던 프로파간다를 반복적으로 읊는 것 밖에 안 된다.

 

로버트 서비스의 경우 스탈린이 저지른 인권유린에 대해 비판은 하되 최소한 그런 과장된 수치를 사실인 냥 쓰지는 않았다는 점은 나름 괜찮게 평가할만 하다.

 

3. 스탈린 경제개발과 박정희 경재개발의 차이

 

이오시프 스탈린이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까지 행했던 경제 성장을 예시로 들며 성과물을 얘기하다 보면 꼭 나오는 얘기가 있다. 그게 바로 1960년대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의 경제성장 노선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 또한 스탈린이 했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따라했고, 그 결과는 어마무시한 경제성장으로 나타났다. 박정희 또한 그런 경제 성장을 통해서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보았고, 이는 자신의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이었다.

 

무서운 속도의 경제 성장이라는 측면에 있어서 박정희와 스탈린은 비슷하다. 그러나 박정희의 경제 성장과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은 분명히 다르다. 박정희의 경우 동맹국 미국이라는 크나큰 지원 세력이 있었다. 거기다 1960년대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을 파견함으로써 엄청난 외화를 벌어다 들일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박정희의 경제성장에는 미국이라는 지원세력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을 수 있었지만, 스탈린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스탈린의 경우 오히려 미국과 서방으로부터의 철저한 고립이라는 상황에 놓여있었고, 적백내전 시기 수백만이 굶어 죽는 대기근까지 겪었던 나라였다.

 

박정희와 스탈린 둘다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이었고, 농촌을 희생시키는 전략이었지만, 근본적으로 본질이 달랐다. 박정희의 경우 경제성장에 있어서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 위주의 성장이었지만, 스탈린의 소련은 수십억 혹은 수백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대기업도 없었고, 자본가 계급도 없었다. 즉 스탈린의 소련은 국유화라는 정책을 통해서 사적소유를 철폐한 사회였다는 점에서 박정희 하고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스탈린과 박정희의 경제성장은 국민들 복지라는 점에서도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전태일 평전과 같은 책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박정희 시대의 여공들은 말 그대로 무자비학 착취를 겪었었다. 여공들은 햇빝이 안들어오는 공장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해야 했고, 19세기 마르크스가 지적한 자본가들의 탐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스탈린의 소련도 착취를 기반으로 성장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박정희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여성들의 월경휴가를 예로 들 수 있다. 비록 스탈린의 경제 개발 당시 노동자들의 노동 규율이 강화되긴 했지만, 사회주의적 정책으로 무상 의료, 무상 교육 등이 실행되었으며 5개년 경제 계획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8시간 노동제가 실행되었다. 특히나 무상 교육의 실시로 인하여 스탈린의 소련은 문맹률이 매우 현저하게 낮아졌다. 비록 양질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인민들의 주거와 복지 의료가 상당히 보장되었다. 따라서 대기업과 자본가들 위주로 투자하며 인민들 복지는 생각지 않는 박정희의 성장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기에, 스탈린의 경제 성장과 박정희의 경재 성장을 똑같다고 하거나 박정희 경제성장을 보다 더 대단하다 보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로버트 서비스의 경우 스탈린의 경제 성장이 분명 소련을 방어하는데 있어서 필요하다는 점과, 실제로 성장을 하였다는 점은 인정을 하지만, 정작 스탈린시기 어떤 정책이 실행됐는지에 대해선 문맹률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선 얘기하지 않았다. 그 점은 로버트 서비스 책의 치명적인 한계다.

 

4. 2차세계대전에서의 승리

 

일국사회주의를 논하는 파트에서 상술했듯이 1930년대는 동양과 서양에서 파시즘이 부상하는 시대였다. 그렇게 탄생한 파시스트 국가들은 결국 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고, 1940년과 41년에는 유럽 영토의 75%를 점령했다. 일본의 경우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0년에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으며 1941년에는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스탈린의 경우 초반에 히틀러와 불가침 조약을 맺는 실책을 범하기도 했으나, 그 조약이 히틀러와의 군사적 동맹을 맺는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이를 통해 발트 3국과 핀란드를 차지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다. 결국 그들의 불가침 조약은 1941622일 히틀러의 300만 대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파기됐다. 탱크 3천 대와 항공기 2천대를 동원했던 히틀러의 군대는 2차세계대전 초기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전략을 구사하여 수십만 명의 소련군을 포로로 잡고 소련군 항공기 1800대를 지상에서 격추시키는 등 러시아 영토로 진격해 나갔지만, 동장군의 힘을 빌렸던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과 1942~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전세는 다시 소련군에게로 돌아왔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영국과 중국 뿐만 아니라 소련에게도 랜드리스라하여 수많은 물품들을 지원했고, 이는 소련이 반격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경제성장이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나 러시아 중부에 있는 마그니토고르스크의 공장은 가성비 좋은 소련군의 주력전차인 T-34를 어마무시하게 생산해냈다. 독소전쟁 초반인 1942년만 보더라도 6개월 동안 소련이 생산한 항공기가 15000, 탱크가 13000대였다. 이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의 중공업 위주의 성장은 히틀러에 맞선 반파시즘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432월 독일의 프리드리히 파울르스가 자신이 이끌던 25만 명의 병사와 함께 소련군에게 항복하면서 소련군의 승리로 끝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시작으로 1943년 소련은 지상 최대의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그리고 1945년 베를린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했다. 1941년 스탈린은 대숙청 당시 자신이 범했던 실책을 빨리 인정했고,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이 종심 방어 전술 위주의 전략을 토대로 작전을 세울 수 있게 했으며, 비록 연설을 자주하지느 않았지만, 소련인민들에게 반파시즘 항전의 명분을 명확히 제시했다. 따라서 스탈린 또한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가 있다.

 

5. 한국전쟁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한때는 파시즘세력에 맞서는 동맹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 하는 자신들의 패권 경쟁에 나섰다. 1940년대 중후반에는 유럽이 동과 서로 나뉘었고, 특히 전범 국가였던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경우는 달랐다. 전범 국가였던 일본을 분할해야 했지만,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반도를 분할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분할로 인하여 3년 후인 1948년 한반도에는 두 개의 국가가 등장했고, 1950625일 김일성의 북한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처음 시작은 북한군이 우세하여 한국땅 90%를 차지하였지만,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했고, 그러던 중 중국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국 한국 전쟁은 1953727일 휴전으로 끝나면서, 남북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일각에서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마오쩌둥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적화시킬 야욕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458월 한반도에 소련군이 입성했을 때부터 한국전쟁때 까지 이오시프 스탈린은 한반도 문제에 그리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동유럽에서의 패권 경쟁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이 남침을 허가해달라고 했을 때 여러번 거절했다. 마지막에 허용한 것도 미국이 군사개입을 하기 전 까지 끝낸다는 전제하에 허락한 것이었다. 심지어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에 대신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렇다면 왜 적잖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스탈린까지 얘기하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비록 한국전쟁 자체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스탈린이었지만, 북한에게 탱크와 비행기 야포를 지원했던 것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기 때문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를 근거로 한국전쟁 파트에서 스탈린에게 한국 분단 책임이 있다는 듯이 서술한다. 이는 한국현대사의 기본적인 맥락을 빼놓고 하는 얘기이다.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스탈린보다 미국에게 더 있다. 비록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무기를 지원했다 하더라도 말아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남부로 들어온 미국이 친일파들을 앞세워 분단을 고착시켰고, 여운형과 같은 통일세력들을 탄압했으며 사회주의를 갈망하던 남조선의 노동자 농민을 패죽이며 분단주의자 혹은 미제국주의자인 이승만이 권력을 잡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의 원흉은 스탈린이 아니라 미제국인 것이다.

 

6. 결론

 

10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로서트 서비스의 책인 스탈린 강철권력은 분명 스탈린에 대해 많이 연구한 결과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굉장히 서구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재작년에 읽은 올레크 홀레브뉴크의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이라는 책에 비하면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대체로 서방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점이 많이 느껴졌다. 즉 올레크가 쓴 평전보다는 그나마 낫지만, 기본적으로 편향된 서구적인 시각이 이 책에 담겨있다고 본다.

 

필자는 스탈린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거나 찬양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주의자로서 그가 이룬 업적과 그가 저지른 과오를 균형있게 볼 뿐이다. 따라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재자적인 부분이 있고, 대숙청으로 혁명동지들을 숙청한 폭군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적소유를 철폐함으로써 역사적 전진을 이룩하고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은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을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1-03-0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쓴 다른 스탈린 평전도 있던데, 이 책과 같은 책인가요? 다른 책인가요?

NamGiKim 2021-03-06 01:09   좋아요 0 | URL
같은 책이에요. 솔직이 이 책은 너무 극우적이라 생각합니다. 올레크 흘레브뉵은 이것보다도 못하고요. 흘레브뉵 책은 노경덕 교수가 쓴 글만 훌륭합니다.

Redman 2021-03-06 02:12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