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행 도중에 국내에서 스탈린 관련 신작이 나왔다 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찾아봤다. 알고보니 내가 3년 전 어떤 페친이 알려준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인물이었다. 그 기사는 "비록 스탈린이 독재자지만, 유능한 군사 지도자"임을 역설하는 기사였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이번에 제프리 로버츠의 책을 김남섭 교수가 번역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내심 기뻤다. 귀국하자마자 바로 인터넷 구매를 했으며 읽는 중이다. 비록 내가 보기에 서구 학계의 한계라 할 수 있는 관점들도 있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국내에 출판된 스탈린 관련 책들 중에 가장 훌륭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어떻게 해서 유능한 군사 지도자인지,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켰는지 아주 훌륭하게 입증했다. 그리고 세간에서 히틀러스탈린의 동맹으로 모함하는 독소불가침 조약이나 폴란드 분할 그리고 겨울전쟁에 대해서도 기존 서구 부르주아 학계와는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이 책에 따르면 소련과 독일의 폴란드 분할은 독소불가침 조약에 따른 것이고, 소련에 편입된 영토들 대다수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자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편입된 영토들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계 주민들의 환영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겨울전쟁에 대해서도 흥미롭다. 우선 소련이 침공한 것은 무작정 침공한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핀란드에게 영토적으로 양보하는 입장을 협상과정에서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거부한 측은 핀란드였고 핀란드는 자국 내에 공산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거기다 당시 핀란드 정부는 극우 정부였으며, 1918년 적백내전기 좌파들을 학살하며 탄생한 우익정부였다. 아니나 다를까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서구 제국주의 세력은 소련을 막는다는 핑계로 극우 핀란드를 지원했고, 심지어 핀란드는 나치 독일의 대대적인 지원도 받았다. 오죽하면 1940년 말 소련이 독일과의 국가적 협상에서 핀란드 내에 있는 나치 독일군 철군을 요구했겠는가?

 

즉 이런 점에서 이번에 김남섭 교수가 번역한 제프리 로버츠의 <스탈린의 전쟁>은 제법 읽어볼만한 책이다. 비록 스탈린에 대한 여전히 악의적인 비방이 책에 있기는 해도, 이 책의 일독을 당연히 나 같은 좌파들에게 추천할만한 책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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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아마 소련과 중국일 것이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치른 희생은 어마어마했다. 냉전 말기인 1989년 존 키건이 쓴 <2차 세계대전사>에서는 대략 1,300~1,500만 명의 소련인이 전쟁으로 죽었다고 추산했는데, 이 책을 번역한 류한수 교수는 최근의 연구는 2,600만에서 2,700만 명 이상의 소련 사람이 죽은 것으로 최근 학계가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중 1,000만 명은 군인이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보다 3배 정도 많은 소련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셈이다. 거기다 학살당한 유대인 대다수는 소련 쪽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인명피해에 못지않게 소련은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간 셈이다. 대략 98,000개의 협동조합과 5,000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 농업기계 창고가 나치에게 약탈당했다. 수만 개의 병원과 학교, 예술학교, 고등 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됐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의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6천억 루블이나 됐다.

 

루도 마르텐스에 따르면, 독일군은 후퇴하는 동안에도 고의로 소련에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2,000곳의 도시, 7만 곳의 마을,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들이 전부 혹은 일부분 파괴됐다. 독일군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됐으며, 몇몇 사람들은 소련이 나치에 의해 받은 상처를 모두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하기까지 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처칠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년 트루먼 톡트린(Truman Doctrine)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됐는데, 한때 파시즘에 맞서 같이 싸웠던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전후 재건을 돕지 않았으며 오히려 늦추려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전후 재건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보기 좋게 서방에게 한 방 먹였다. 스탈린 집권 말기에 시작된 전후 재건으로 소련은 발 빠르게 전후복구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이후 냉전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선 국가들의 모범적 모델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소련의 전후 재건 발전상은 당시 소련을 방문한 문학가 이태준이나 역사학자나 북한의 정치인인 백남운이 쓴 책에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태준은 1946년에 소련을 방문한 이후 3년 뒤 다시 소련을 방문했는데, 수도 모스크바를 둘러보며 “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 차는 어쩌다가 한 대씩 볼 수 있는 정도,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들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라며 극찬했다.

 

1950년 기준으로 소련은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나치 독일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되었지만, 1948년 전후 재건의 성과로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넘어섰으며,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매년 12%의 공업 성장률을 보였을 정도였다. 자본재의 경우 5년 동안 80%의 성장을 보였으며,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최소 2배 이상이나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6년 당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했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상품의 원가를 줄이고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소비재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 향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비록 스탈린 시기 소련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이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후복구 과정에서의 소비재 생산도 많이 발전했다. 1947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에서 이른바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제를 시행했던 영국보다 6년이나 빠른 속도였고, 미군정하의 일본보다도 2년이나 앞섰다. 전후복구 과정 초기 성과로 소비재 생산은 23% 증가했다. 심지어 반북성향을 가진 국민대학교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또한 스탈린 시기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소련 사람들이 육류를 섭취했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1970년대 중후반 박정희 시절이나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대 초 한국 사회가 과연 육류 소비를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소련의 소비재 현황이 그렇게 나빴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소비재 생산과 의식주 문제 해결이 된 1960년대 초 소련 사회의 기본적인 토대는 스탈린의 전후재건이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 또한 194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에서 밥을 굶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련 사회는 밥을 굶는 사회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받은 상처를 놀라운 수준의 속도를 보이며 회복했다. 전후재건으로 소련은 자본주의 최강대국인 미국과 겨루는 나라로 거듭났고,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충돌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후재건을 통해 소련을 미국과는 다른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재평가를 받을만한 점이 있다. 스탈린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점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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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 사회에서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비방과 비난 그리고 거짓말들은 차고 넘친다. 특히 레닌 사후 소련의 지도자가 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온갖 비방과 악선전들은 조금 과장하여 밤하늘의 별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대숙청, 굴라그 수용소, 독-소 불가침 조약, 핀란드 침공, 발트 삼국 합병, 트로츠키 죽음, 카틴 대학살, 소련군의 인명 경시 전략 전술, 소련군의 약탈과 아녀자 강간, 동유럽의 위성국화, 한국전쟁 책임자 등등등, 말 그대로 서방이 스탈린에게 하는 악선전은 끝이 없는 수준이다. 그 중에서 이 글에선 스탈린 시절 굴라그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소련의 굴라그 수용소의 존재가 서방에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아마 극우 망명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에 의해서일 것이다. 국내에서도 <수용소 군도> 시리즈로 유명한 솔제니친은 자신의 소설에서 말 그래도 소련에 대한 거짓된 소설들을 끊임없이 양산해냈다. 솔제니친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이고 친서방적이며 친식민지주의적인에 대해 서방 사회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의 승리로 끝나자, 전적으로 미국을 옹호하던 인물이었다. 또한 포르투갈에 맞서 앙골라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자, 포르투갈의 식민지 지배를 옹호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솔제니친의 반동적이고 악의적인 이데올로기 따위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솔제니친은 소련 시기 굴라그에 수감된 인원이 도합 5,000만 명이라는 희대의 거짓말을 진실로 포장했다. 영미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런 새빨간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우겨댔다. 솔제니친과 더불어 소련에 대한 온갖 악의적인 거짓말을 퍼뜨린 인물이 있다면 아마도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단행한 대숙청 시기 수백만 명의 소련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거짓말을 했다.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7년에서 1938년 콘퀘스트는 700만에서 900만 명이 체포되었고, 1934년 당시 500만 명이 굴라그에 억류되었으며, 대략 합쳐서 1,200만 명의 희생자가 나왔고, 이 중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이 통계를 바탕으로 콘퀘스트는 1939년부터 1953년까지 1,260만 명이 굴라그에서 죽었다고 말했으며, 이러한 거짓말들을 총합해서 콘퀘스트는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2~3천만 명을 학살했다는 거짓말까지 했다. 


이런 거짓말들을 바탕으로 극우 네오콘 정치학자인 루돌프 럼멜은 한술 더 떠서 스탈린이 집권기간 동안 4,500만에서 6,200만 명을 학살했다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사실인 양 통계화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통계는 루돌프 럼멜의 자의적인 덧셈 뺄셈이지만 말이다. 럼멜의 주장은 워낙 말이 안되는 소리라 언급할 가치마저 못 느낄 정도이다. 심지어 1990년대 문서고 혁명으로 거짓말이 다 들어난 이후 콘퀘스트가 200만 명이 대숙청으로 희생되었다고 했을 때, 비슷한 시기 럼멜은 430만 명이 희생됐다고 뻥쳤다. 그러니까 스탈린이 4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6천만 명을 죽였다느니 하는 소리의 원출처가 극우 네오콘인 루돌프 럼멜의 헛소리인 셈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1939년부터 1953년까지 연평균 사망률이 대략 10%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1934년 당시 정치범이 500만 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무서를 보면 실제 정치범의 숫자는 12만 7,000명에서 17만 명 사이였다. 그리고 강제노동수용소에 억류된 모든 이들의 정확한 수치는 대략 51만 307명이었다. 이 중 정치범의 비율은 25~35%였다. 즉 콘퀘스트는 15만 명의 억류자라는 현실적인 수치에 485만 명이라는 엄청난 부풀림을 한 것이다. 독소전쟁이 진행중이던 1941년에서 1942년 굴라그 수감자의 숫자는 50만 명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무튼 콘퀘스트나 솔제니친 그리고 럼멜 등은 실제 숫자보다 수십 배는 부풀려 소련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이다.


콘퀘스트에 따르면 대숙청 시기 2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희생된 사람은 벨기에 노동당 당수이자 역사학자인 루도 마르텐스(Ludo Martens)에 따르면, 11만 5,922명이라고 한다. 즉 마르텐스에 따르면 실제 죽음 11만 6,000명에 콘퀘스트는 188만 4,000명을 추가하는 악의적인 반공 시체놀이를 한 셈이다. 거기다 굴라그 수감자도 가장 많던 1951년만 보더라도 실질적으로 195만 명에서 250만 명 내외였다. 이 중에서 정치범은 57만 명 정도다. 또한 이 정치범 57만 명 중 33만 명은 주로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이러한 맥락과 사실따위는 콘퀘스트나 럼멜 같은 이들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외면당했다.


전쟁 당시 굴라그 수용소의 석방자가 늘어났다가, 전쟁 이후 수감자가 증가한 것은 나치 협력자들 및 여러 잡범들을 수용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굴라그의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무슨 철조망 처진 곳이 아니었다. 대다수의 수용소의 인원들은 인근 마을과 수용소를 이동할 수 있었으며, 숙식이 제공됐다. 물론 강도 높은 노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당시 소련은 8시간 노동제를 고수했다. 굴라그 최대 수용 인원은 200~250만 명 정도인데, 사실 1990년대 미국의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 300만 명이나 적은 수치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대숙청만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측면이 존재했으며, 숙청 또한 지극히 과장됐다. 서방세계에서 수정주의 학자로 유명한 아치게티(Arch Getty)가 <대숙청의 기원(Origins of the Great Purges)>에서 쓴 글을 보자.


“이런 증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숙청의 시기로 인식하는 예조프 시기가 다시 정의되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것은 경직된 관료주의가 반대파를 짓밟고, 고참 급진 혁명주의자들을 절멸시킨 결과가 아니었다. 사실, 그것은 완전히 정반대였을 것이다. 예조프 시기는 관료제에 대항하는 다소 과격하고, 심지어 히스테릭한 대응이었다는 주장은 증거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변화할 줄 모르는 관료들은 주의주의와 혁명적인 청교도주의로 요동치는 혼란스언 정국 속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파괴되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수감자 숫자를 얘기하겠다. 스웨덴의 사회주의 활동가인 마리오 소사(Mario Sausa)는 <진실이 밝혀지다>에서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1997년 AP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스탈린의 소련과 미국을 비교했다. 이 숫자는 당사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미국의 수감자 인권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숫자일 것이다. 2005년 ‘시사저널’에 실렸던 정문호의 “미국 교도소에서는 엉덩이 지키기 어렵다” 기사의 일부 내용을 보자.


“지난 2000년 미국의 교도 행정 전문 잡지인 <프리슨전 저널>이 4개 주 7개 교도소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재소자 중 21%가 최소 한 번 이상 강간 위협을 당했으며 그중 7%는 실제 강간을 당했다. 이 같은 수치를 근거로 따져보면 매년 최소 14만 명이 미국 내 교도소에서 강간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의 감옥인권 문제는 굴라그 그 이상으로 심각한 것을 알 수 있다. 근데 왜 우리는 미국의 이런 인권유린은 보지 못하며,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난하기 바쁜 것일까. 마찬가지로 실체조차 불분명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얘기는 거짓말하는 태영호류 탈북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미국의 감옥 인권은 전혀 보지 않을까?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서방 스스로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반공세뇌 시스템이라고 본다. 그러한 세뇌 시스템에 서방의 대다수 민중들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반북주의로 무장한 한국의 대다수 일반인들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솔제니친, 콘퀘스트, 럼멜이 한 거짓선전을 믿지 않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때, 그런 세뇌된 반공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여론조작과 언론검열의 추악한 민낯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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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요약한 글입니다.)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서방 사회에서 가장 많은 비판 내지는 비난을 받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서방의 주류학계를 포함하여 스탈린에 대한 대부분의 시각은 잔혹한 독재자 혹은 학살자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당장 유튜브에 가서 스탈린만 검색하더라도 숙청’, ‘학살과 같은 수식어가 항상 붙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스탈린에 대해 심층적으로 이해한 것이라기보다는 서방의 전통주의적인 시각이 투영된 느낌이 강하다. 스탈린이라는 인물은 단순히 그런 것으로만은 해석하기에는 복잡한 인물이며, 단순히 악인으로만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방이나 국내에서 내리는 평가와는 달리, 스탈린이 통치했던 러시아나 과거 구소련 연방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것 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이 제법 적지 않다. 물론 1932년에서 1933년에 대기근을 겪었던 우크라이나나 1940년 소련 영토로 편입되었던 발트3국의 경우는 다르지만, 대체로 그가 부정할 수 없는 공로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은 무엇일까? 나는 스탈린의 업적으로 크게 3가지를 보고 있다.

 

1. 공업화의 성공

 

러시아 현대사를 보면, 러시아는 19세기부터 산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구 유럽국가들에 비해 많이 낙후된 국가였다. 1905년 러일전쟁과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러시아 제국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흔들렸는데, 이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1차 세계대전으로 경제상황이 열악했던 레닌의 혁명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을 받았고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혁명 러시아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 즉 소련을 탄생시켰지만, 경제적으로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이에 따라 1921년부터는 네프(NEP)라 하는 신경제정책을 실행하여 경제상황을 일정부분 회복했으나.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아있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볼셰비키에게는 공업화라는 과제가 남았고 이 과제를 실행한 사람이 바로 이오시프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9년부터 제1차 경제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빠른 속도로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무상의료와 무상복지와 같은 노동자 위주의 정책도 실행되었으며, 이는 서구 사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스탈린의 소련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 속에서도 생산력이 상승하고 경제가 발전했으며, 일부 미국인들이 소련에 와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공업화 시기 소련의 경제지표는 자신들 기준으로 연 20%이상의 성장률을 보였는데, 서방의 통계로도 연 14~15%의 성장률이었다. 그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일부지역에서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사실 이것은 의도적인 학살이 아닌 자연재해에 가까운 참사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공업화 도중에 단행된 집산화는 이후 소련 경제의 높은 식량생산률과 농업생산률의 근간이 됐다. 확실한 건, 이 공업화를 통해 소련은 1930년대 당시 경제 규모로만 세계 2위였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무상의료 무상복지, 사적소유 철폐와 같은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2.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

 

공업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스탈린은 군의 현대화도 추진했다. 이를 통해 소련은 탱크와 장갑차 중심의 기계화된 대규모 병력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소련이 미국과 군사적으로 경쟁할 수 있던 토대가 되었다. 물론 1936년 스페인 내전이나 1938년 노몬한 전투에서는 큰 효력을 못 보았고, 1939년 이른바 겨울전쟁에서도 붉은 군대는 열악한 측면이 있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에도 소련군은 초기에 후퇴를 거듭했고, 수십만의 병사가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히는 신세이기도 했다.

 

초기 전화에서 소련군이 밀렸지만, 스탈린은 1941년 모스크바 전투와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1943년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는데 큰 공로를 세웠다. 무엇보다 그의 연설과 노력을 통해 수많은 소련민중이 조국을 방위하겠다는 일념으로 파시즘에 맞서 싸웠고, 그는 주코프나 바실렙스키 등과 같은 인물들과 잘 타협하여 이들이 군사적 지휘를 잘 할 수 있도록 지도력을 보였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은 2,700만이라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지만, 이 참혹한 전쟁을 끝내고 소련을 승리로 이끌었던 지도자는 바로 스탈린이었다. 물론 수많은 인민의 희생이 있었지만, 영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로버츠(Geoffrey Roberts) 교수의 주장처럼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유능했던 전시 지도자였다. 스탈린의 군대는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바그라티온 작전과 동유럽 해방 그리고 베를린 전투까지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고, 이것은 19458월 만주진격 작전에서 불과 1주일 만에 만주와 중국 일부, 사할린, 한반도 북부를 해방시키는 혁혁한 군사적 성과를 만들어 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3. 냉전시기 국제적인 사회주의 세력의 상징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은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스탈린은 당시 사회주의권에서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일각에서는 소련이 당시 혁명을 지원하지 않았던 것처럼 얘기하지만, 지원을 아예 안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만 하더라도 지원이 많지는 않았지만, 소련은 불가리아 국경을 통해서 물자를 지원했고, 중국 국공내전에서도 마오쩌둥의 홍군에게 지원했다.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의 경우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적잖은 무기와 물자를 지원받았다.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고 있던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의 경우 크게 지원을 받지는 못했으나, 1950년에 들어서 소련으로부터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받았고, 그 시점부터 중국을 통해서 소련의 물자지원도 크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었다. 당시 적잖은 사회주의 세력들이 소련에서 혁명과 공업화가 성공한 것을 보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맞서는 투쟁을 전개했다.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의 좌파세력들이 그러했다. 1970년 국민투표로 정권을 잡은 칠레의 아옌데만 하더라도, 1953년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 “스탈린은 인류의 진보와 휴머니즘을 위해 투쟁한 상징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였다.

 

일각에서는 냉전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위성국화 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 할지라도, 동유럽 국가의 사회주의 체제 건설은 단순히 소련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소련이 그 국가들에 군대를 주둔시켰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의 투쟁에서 얻은 전유물이라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동유럽에 있던 좌파세력들이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자체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고, 이들이 행동한 이유에는 스탈린이 건설한 소련 사회의 진보적 가치의 영향력도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속에서 소련은 빠르게 전후재건에 나서서 1947년에는 배급제를 영국보다 7년이나 앞서서 폐지했고,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지금까지 스탈린의 업적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보았다. 나는 이러한 점이 스탈린의 가장 큰 업적 세 가지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스탈린이 분명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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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레닌(Lenin)과 볼셰비키(Bolshevik)는 이른바 10월 혁명(October Revolution)을 단행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과의 전투에서 패전을 거듭하며 경제가 악화되던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니콜라이 황제를 타도하기 위해 시민들이 봉기한 2월 혁명이 발생했었다. 러시아 구력은 현재 우리가 쓰는 율리우스력이 아닌 그레고리력으로 13일이 느린데, 2월 혁명이 일어난 날이 바로 현재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2월 혁명으로 차르 정부가 타도되고, 케렌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내각이 들어섰다.

 

그러나 케렌스키의 임시정부 내각은 시작부터 위태로웠고, 민중들이 원했던 독일과의 전쟁 중단을 이루지 않았다. 오히려 19176월과 7월에는 갈리시아 공세를 감행했다가 20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은 중립국인 스위스에 있었는데,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에 귀국하여 혁명을 주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레닌은 독일을 건너 러시아로 향했으며, 4월에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크세신스카야 저택으로 가서 4월 테제를 발표했다. 4월 테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았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All Power to the Soviet)!”

 

갈리시아 공세 이후 민중들은 이른바 7월 봉기를 일으켰고, 이 봉기는 볼셰비키의 지도를 받았으나, 진압됐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들은 다시 조직이 흩어졌고, 레닌 또한 잠시나마 핀란드로 망명했었다. 핀란드 망명 시기 그가 쓴 저서가 바로 그 유명한 <국가와 혁명(The States and Revolution)>이었다. 그로부터 1달 후에 백군에 충성했던 반동적인 장군인 코르닐로프가 이른바 반혁명을 주도했으나 진압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볼셰비키들은 다시 러시아에서 세력을 모아 혁명을 주도했으며, 그레고리력으로 10월에 오로라호의 함포 사격을 시작으로 10월 혁명을 게시했다. 10월 혁명은 성공적이었다.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왔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1024,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이후 레닌은 집권 초기에 혁명 정권을 위한 진보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나갔다.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진보적이었으며, 전 세계의 위대한 모범이 됐다. 또한 레닌은 19183월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에서 발을 뺐다. 그러나 이는 제국주의 국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은 곧바로 적백내전으로 이어졌다.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수년간 제국주의의 침략과 구황제파들의 반동적 움직임에 맞서 싸워야 했다. 이와 동시에 1919년 레닌은 또 다른 것을 실행했는데, 그것이 바로 제3 인터내셔널(The Third International) 즉 코민테른(Comintern)의 창설이었다.

 

레닌이 코민테른을 창설한 이유는 분명했다.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도 혁명의 물결이 있었다. 독일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주도한 독일 혁명이 있었고, 헝가리에서도 사회주의 혁명이 있었으며, 수많은 유럽 국가들에서도 좌파들의 움직임이 있었고, 미국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이 커짐에 따라 이른바 적색공포라는 반동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가 주도했던 독일 혁명은 실패로 끝났고, 헝가리에서의 사회주의 정부 수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동적인 세력에 의해 전복 당했다. 여기서 레닌이 파트너로써 주의깊게 생각했던 존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등의 식민지 민족들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사를 공부해본 이라면 잘 알겠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미국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에 희망을 가지고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3.1운동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진압이 되면서, 결국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을 위한 위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는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베트남의 호치민 또한 마찬가지로 이런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의 제3인터내셔널 창설은 수많은 식민지 지배 국가들에게 큰 희망과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으며, 당연하게도 수많은 식민지 국가의 젊은이들이 레닌에게 매료됐다. 이에 따라 코민테른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당연하게도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레닌의 제3 인터내셔널은 중국의 마오쩌둥과 베트남의 호치민 그 외의 여러 식민지 민족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로 이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크나큰 영향을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레닌의 코민테른 창설은 역사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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