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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당시 전세를 뒤집었던 대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로 인하여 세계대전의 정세는 추축국에서 연합국에게 유리해졌고, 나치 독일은 점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패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승승장구한 진격을 단번에 역전시킨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과 과다카날 전투(Battle of Guadalcanal)가 있었다면, 유럽전선에선 독일군과 소련군이 맞붙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가 있다.

 

1. 배경  

1941622일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통해 소련 영토로 깊숙이 진격해가던 독일군은 194112월 모스크바 외각까지 진격한다. 100년 전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했듯이 히틀러의 독일군도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다. 모스크바 전투 이후인 1942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거침없는 진격을 이어갔다. 19426월 청색작전을 실행한 독일군은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A군은 코카서스 지대로 향하게 했고, B군은 볼가강을 끼고 있는 스탈린그라드로 향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19428월 독일군은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했다.

 

2. 독일의 스탈린그라드 진입 

19428월 스탈린그라드 외각에 도달한 독일군은 도시 진입에 앞서 독일 공군인(Luftwaffe)를 투입하여 도시를 폭격한다. 탱크 사냥꾼이자 급강하 폭격기인 슈튜카와 융커스 폭격기로 이루어진 2천여대의 독일 항공기가 투입되어 스탈린그라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남쪽에 있던 제4기갑군과 합류하여 차츰차츰 소련군을 격파해 나갔다.

 

그러나 도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도시는 스탈린의 도시였고, 스탈린과 소련의 고위 간부들은 이 도시를 무조건 지키고자 했다. 그에 따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소련군 병사들은 폭격기의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잔해 속에서 독일군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한 독일의 기갑군단은 파괴된 잔해 속에서 진격이 늦춰졌고,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련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후 스탈린그라드의 지휘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예비대까지 투입했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

 

결국 히틀러는 코카서스로 가던 A군의 일부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하고, 소련군도 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이 전투는 양측 150만 이상의 병력이 투입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194210월 독일군은 소련군과의 교전에서 점점지쳐갔지만, 도시를 점차 점령해갔고, 10월 말 독일군은 도시의 90%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3. 소련군의 반격

 

194211월 독일군이 볼가강 교두보로 내몰린 소련군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고 있던 사이, 150만 이상의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고 있던, 독일군 사이로 집결한다.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과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장군은 루마니아군이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의 측면을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남북에서 독일군을 포위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대규모의 소련군이 남쪽과 북쪽에서 루마니아군을 향해 덮쳐왔고, 194211월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수십만의 독일군을 포위한다. 포위된 독일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전화하여 탈출할 것을 보고했지만, 히틀러로부터 온 답변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명령이었다.

 

194212월 소련군에게 포위당한 수십만의 독일군을 지원하기 위해, 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기갑부대가 출동했지만, 파울루스는 총통의 지시를 따랐다. 결국 만슈타인이 보낸 부대는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철수했고, 파울루스의 군대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된다.  

19431월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군을 향해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된다. 파울루스는 결국 히틀러에게 항복을 허가를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히틀러는 130일 파울루스를 진급시켰으나, 194322일 극심한 추위와 식량 고갈 그리고 소련군의 포위로부터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결국 자신이 지휘하던 25만 명 이상의 군대와 함께, 소련군에게 항복한다. 이로써 6개월간 지속되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4. 의의

1943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2차세계대전의 전세는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고 난 뒤, 소련군은 이에 힘입어 독일군을 향해 모든 전선에서 진격하게 된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고 역사를 새로 쓴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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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0 2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슈타인과 파파 호트의 구원군이 스탈린그라드
부근까지 접근했지만, 총통의 멍청한 사수 명령
으로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독일군 최정예 6군
의 괴멸을 가져온 것이 전쟁 국면의 대전환점
이었죠.

파울루스를 원수로 진급시킨 건, 명예롭게
자결하라는 의미였다고도 하더군요. 독일 국
방군 원수 중에 적에게 항복한 장군은 없었
다라는 이유로 말이죠.

NamGiKim 2019-02-20 22:08   좋아요 0 | URL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죠.
 

 

 

 

 

 

 

 

 

 

 

 

 

 

 

 

 

 

 

 

 

 

 

 

필자가 레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건 3년 전 이맘 때 쯤이었다. 지금으로 부터 4년 전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고 감동했었던 필자는 러시아 혁명을 성공 시킨 레닌을 알고 싶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사회주의나 혁명사에 대해 지식이 전무했던 필자는 레닌 하면 뭔가 찬양을 하고 사상을 따르기에는 알 수 없는 이상한 거부감 같은 것이 존재했던 것 같다. 현 민중당 계열에 가까운 어떤 단체에서 활동 하면서, 개인적으로 여러권의 책을 읽었던 2016년 필자는 레닌을 알기 위해 처음에는 현 노동자 연대 대표가 쓴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러나 그 책은 레닌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 정도였기에, 이쪽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전기를 읽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이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간한 레닌 평전이다.

 

이 책은 영국 트로츠키주의 계열 사회주의자인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이다. 토니 클리프에 대해 조금 소개하자면 그는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자본주의'라는 이론을 창시해낸 인물이다. 국가 자본주의란 무슨 뜻이냐면 레닌 사후 등장한 소련의 스탈린 체제가 사회주의를 져버리고, 국가라는 시스템이 주도적으로 자본주의를 컨트롤 한다는 얘기다. 즉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소련, 중국, 북한과 같은 국가들은 당과 관료계급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이 하는 역할을 대신 하기에, 구공산권 국가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비운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가 창설한 제4인터내셔널이 주장하던 "소련은 타락한 노동자 국가"라는 이론과는 다른 해석이다. 박노자가 쓴 '러시아 혁명사 강의'에 따르면 토니 클리프가 이끌던 사회주의 단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다른 사회주의 단체들이 이를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에서 지지했던 것과 달리 그 어떠한 지지도 표명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즉 그 당시 토니클리프 계열의 단체들은 한국 전쟁을 "미국과 소련 간의 제국주의적 전쟁"으로 봤고, 따라서 국가 자본주의 대 미제자본주의의 전쟁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1991년 소련 해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를 사회주의의 실패로 생각했을 때, 이들은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으로 봤고,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안토니오 그람시를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를 내세웠다. 즉 현재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국내의 노동자 연대라는 단체가 이쪽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한 셈이다.

 

따라서 토니클리프가 쓴 이 4부작 짜리 레닌 평전은 당연히, 레닌 사후 건설된 소련 체제와 정권을 잡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이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였다고 보는 시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부터 1924년 레닌이 사망하기 이전까지이다. 즉 그 이후는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기에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 자본주의로 갔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스탈린에 대한 그들의 비판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다만 비판을 하는 방법과 전술에 있어선, 분명한 오류가 있다. 스탈린의 권위주의적 독재체제나 대숙청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스탈린이 건설한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이는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였다. 당시 소련엔 자본가 계급이 없었고, 스탈린 체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단계인 제1차 과제인 국유화를 마침으로서, 사적소유 철폐에 기반한 공업화를 이루어 냈다. 그 이면엔 일부 관료들의 부패가 존재하였으나, 현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재벌들 처럼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는 자본가는 없었다. 비록 양질은 아니더라도, 사회주의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복지, 의료, 주거, 교육이라는 것이 적어도 자본주의였던 박정희 정권보다 우선시 되었고, 이는 대기업 위주의 박정희식 경제성장과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토니 클리프가 주장하는 국가 자본주의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고, 책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은 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과거 소련 시절 스탈린 체제가 만들어낸 필요이상의 우상화 된 레닌의 이미지를 조리있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그저 절대적이고 사실상 전지전능적인 인물로 묘사되던 레닌도 실수도 하고, 프롤레타리아적 대의를 위해 헌신도 하는 인간이자 혁명가였던 레닌을 잘 재조명 했다. 그리고 적백내전 당시 백군 파시스트들과 제국주의의 침략과 테러에 맞서 볼셰비키들이 왜 체카를 창설하여 맞서 싸운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또 혁명의 비극인 크론슈타트를 왜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잘 설명했다. 그 외의 독일 혁명 당시 독일 사민당의 배신이나 코민테른의 변질화 또한 잘 조명했다.

 

즉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5~6개월전 필자가 읽었던 영국 우익 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 평전하고는 확실히 다르고, 보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레닌의 생애를 잘 조명해냈다. 과거 우리는 반공주의라는 전근대적인 사고에 빠져 레닌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비록 토니 클리프의 레닌 평전은 일부 오류가 있긴 하지만, 혁명가 레닌을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주의 체제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건 단순히 소련 해체라는 표면적인 현상만 가지고 판단한 생각일 뿐이다. 사회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성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부패와 제국주의의 악랄함을 고발하는 역할일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사회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혁명가 레닌의 생애는 사회주의를 원하는 이들에게 분명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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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 포스터)

“스탈린의 진정한 핵심적 업적은 나무 쟁기를 가지고 일하던 러시아를 원자로를 완비한 나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아이작 도이처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한 쪽에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한쪽에선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오늘은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보겠다.

1. 초기 생애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현 그루지야(조지아) 동부에 있는 고리에서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시빌리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서도 무차별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폭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이유 없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스탈린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888년 9살이 되던 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어머니의 항의와 노력으로 스탈린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1894년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했다.

(종교학교를 졸업할 시기의 스탈린 사진)


1894년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라는 책에는 당시 그의 성적표가 나와 있다. 이 성적표는 5점 만점 기준이다. 그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성경 5

러시아 문학 5

역사 5

수학 5

그루지야어 5

라틴어 (모름)

그리스어 4

교회 슬라브어 5

그루지야-이메레티 노래 5


그 뿐만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을 정도로 시를 매우 잘 썼다 한다. 그가 칼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1899년이었다. 그 서적을 접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2. 은행 강도와 혁명가

(젊은 혁명가 시절 스탈린)

 

스탈린이 혁명가로서 활동했던 것은 1900년이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었다.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었다. 혁명가로써 활동했던 스탈린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경찰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3년 스탈린은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1900년대 찍은 머그샷)


1907년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스탈린의 강도 행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 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탈취했었다.

(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2월 혁명 당시 러시아 시위대.)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스탈린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3년 스탈린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운 좋게도 왼쪽 팔이 불구였던 바람에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다. 2월 혁명 이후인 1917년 3월 25일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왔고, 거기서 프라우다 편집진을 다시 한 번 맡게 되었다.

(4월 테제 이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2월 혁명으로 들어섰던 임시정부는 결국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끈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적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아래 구 황제를 복원하고자 하는 백군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적백내전이었다. 적백내전 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더불어 레닌이 선출한 볼셰비키당 정치국의 위원이 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차리첸(현 볼고그라드)에서 적군을 지휘했었다.

(적백내전 당시 트로츠키, 그는 수천 밖에 안 되던 군대를 수백만으로 늘렸고 덕분에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내전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자주 경쟁 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경쟁은 격해졌다. 당시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지만, 트로츠키는 수도 바르샤바를 공격하려 했었다. 둘 다 서로를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 폴란드 전쟁은 1921년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1921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지만, 혁명 러시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난은 러시아인 수백만을 기아와 굶주림에 빠뜨렸고, 결국 레닌은 기존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NEP(신경제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의 악화되어가던 레닌은 1924년 사망했다. 레닌 사망으로 인하여 소련은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 권력을 획득하다

(스탈린 사진)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소련은 당내 투쟁에 휩싸였다. 레닌 사후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은 트로츠키였다. 당시 까지만 해도 소련 공산당에서의 스탈린의 인기는 그리 높지 못했다. 트로츠키와 그 외의 당내 투쟁이 치열할 때 트로츠키 반대세력은 스탈린하고 협력하고자 했지만, 나중에는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스탈린에 맞서야할 처지가 되었다. 즉 레닌 사후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28년 당내투쟁의 혼란속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사람은 결국 스탈린이 되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당했고,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1940년까지 국외에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다가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4. 경제 개발과 대숙청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과 더불어 우상화된 스탈린)


1928년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기존에 펼쳤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경제개발은 국가주도의 경제 개발이었다. 즉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식 경제개발이라 불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엄청난 착취와 인권유린이 있었지만, 그 나름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였다. 1931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노동자 스타하노프는 자신의 할당량에 7배 이상의 광물을 채굴했다.)


스탈린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자유를 억압하고 1936년부터 1938년 까지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포정치를 실행하였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인 NKVD를 이용하여 인민들을 감시하였다. 대숙청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200만이 넘고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한 사람이 수백만이 넘었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공과 1933년 히틀러의 등장으로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했다.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됨에 따라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대숙청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살았었다.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가 되었다.

 

5. 대조국전쟁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1930년대는 파시즘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3년 나치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뒤 유럽정복의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던 1939년 히틀러는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폴란드를 침공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스탈린은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었다. 이후 스탈린은 핀란드를 침공했지만 핀란드군에 10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심지어 스탈린의 심복인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네 놈이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였잖아”라고 말했고, 결국 스탈린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게 되었다. 히틀러와의 협정은 매우 불안정한 협정이었다. 영국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한 히틀러는 서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동부로 돌렸고, 1941년 6월 히틀러는 결국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반 소련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독일군에게 밀렸다.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고, 1941년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었다.(그리고 실패했다.) 1942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했었다.

(194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혁명 퍼레이드)

(1943년 쿠르스크 전투)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은 단결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찍어냈고,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3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쿠르스크에서 대 반격을 시도했지만, T-34전차의 물량에 밀려 이마저도 실패했다.

(1945년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소련 깃발을 휘두르고 있는 소련군)

(1945년 승전 기념 퍼레이드 당시 백마타고 개선식을 하는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1943년부터 소련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한 이후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1945년 4월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26일에는 라인강에서 미군과 만났으며,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함에 따라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500만 명(이중 1000만명 이상은 소련군인이다.)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은 승리했다.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소련군)


그해 7월 스탈린은 유럽에 있던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하여 만주로 옮긴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난 이후인 1945년 8월 9일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에서 부터 밀고 내려와 일본을 압박했다. 이때 한반도 북부가 소련 군정하에 들어갔고, 러일전쟁 당시 빼았겼던 사할린을 되찾았다.

(종전 이후 스탈린)


6. 냉전의 시작과 스탈린의 사망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


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과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 맞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 편에 서게 되었고,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편에 서게 되었다. 1948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던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9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동과 서로 분단된 독일)

(한국전쟁)


1949년에는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되며 냉전을 알렸다. 스탈린의 소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군사비용을 굉장히 많이 투자했다. 그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도 경쟁했다. 1949년에는 미국의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개입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의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위 서방세계는 공산주의의 공포를 조성시킬 때 마다 스탈린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미국의 겨우 스탈린에 대한 공포심을 부각시킴에 따라 자신들의 반공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소련 경제는 194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회복됐고, 1950년대 초의 소련은 초강대국이 됐다.

(미라가 된 스탈린)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2년 스탈린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됐다.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거기서 여유롭게 살다가 195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있었고, 그는 방부처리 되어 레닌과 더불어 레닌 묘에 전시됐다. 그러던 3년 후 소련의 후르쇼프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전세계 공산권 국가들을 놀라게할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한다. 이후 소련에서는 스탈린을 격하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굴라그 수감자 90% 이상이 석방됨에 따라, 스탈린은 격하운동은 격렬해졌다. 그리고 레닌과 같이 합장되었던 스탈린의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묘 옆에 묻어졌다.


7.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애 대한 평가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시각이 앞선 것 같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후르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했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 사회가 스탈린에 대한 업적을 아주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1960년대 흐루쇼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스탈린을 격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 고르바쵸프가 스탈린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이후 빈곤에 직면한 러시아에선 스탈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 또한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러시아의 제2정당인 러시아 공산당은 지금도 스탈린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시각을 초월해서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다. 앞으로의 러시아 사람들이 내릴 스탈린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궁금하다.


8. 스탈린을 알기 위해 더 읽을거리


국내에도 스탈린 관련한 책이 몇권 출판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3가지 책을 추천한다.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 로버트 서비스 지음)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올레크 흘레브뉴크 지음)

(젊은 스탈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은 영국 보수쪽 학자가 쓴 것 치고는 스탈린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인 서술을 나름 균형있게 했다. 올레크의 스탈린 평전은 스탈린에 대한 가장 최신의 정보를 담았다는 점에서 분명 명저이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다는 비판이 있다. 사이먼의 젊은 스탈린은 아직 끝까지 안 읽어 봤지만 젊은 시절 스탈린을 잘 다룬 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3권 다 이 쪽 분야 연구자가 쓴 책이다. 따라서 스탈린을 알기 위해선 읽어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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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문제적 인간 12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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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025(러시아 구력은 현재 달력보다 13일 느림) 2월 혁명으로 탄생했던 케렌스키의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들이 일으킨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이로써 반민중적이던 케렌스키 정권은 무너지고 볼셰비키들이 권력을 잡았다. 10월 혁명 성공이 선언된 다음날인 1026일 레닌은 군중들이 모인 여성귀족학교인 스몰리학교 건물에서 연설을 했다.

 

볼셰비키가 그 필요성에 대해서 항상 얘기해왔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이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 체제 건설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024, 25일의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동운동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이름아래 승리할 것이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MBC, 러시아 혁명 1, 2006)

 

이어서 레닌은 평화에 대한 포고령토지에 대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레닌의 연설 이후 군중들 사이에 서있던 어느 병사가 인터내셔널가(The Internationale)를 부르자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불렀다. 콜론타이도 백발의 늙은 노인도 거기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당시 러시아는 1차 세계대전이라는 대 전쟁으로 지쳐있었다. 그로 인한 경제 사정도 좋지 않았지만, 스몰리학교에 모인 군중들과 볼셰비키 지도부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10월 혁명 성공의 성취를 만끽했다. 거기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던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사회주의가 실현됐으리라는 생각에 빠졌다.

 

19183월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왔다. 이로써 러시아는 4년간 지속했던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러시아는 또 다른 전쟁에 휩싸인다. 적백내전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적백내전은 혁명 러시아 경제를 피폐화시켰고, 결국 1921년 내전 시기 레닌이 고집했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신경제정책(NEP)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신경제정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24121일 레닌은 사망했다.

 

이 책은 러시아 혁명사와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대표적으로 연구한 영국인 학자 로버트 서비스가 쓴 레닌 평전이다. 8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이 책은 주로 레닌의 전반 생애와 레닌의 사적인 이야기에 매우 초점을 두었다. 특히 91년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를 토대로 썼다는 점은 주목받을 만하다.

 

분명 이 책은 1870년 레닌이 태어났던 시점부터 191710월 혁명을 성공시키는 과정까지의 일대기와 당시 혁명가적인 레닌의 생애는 잘 조명했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스토리도 서술했다는 점에선 나름 칭찬받을 만 하다. 그러나 책에 나온 10월 혁명 이후의 레닌의 일대기는 지나치게 우익적이고 서비스의 편향된 관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 부분에서 레닌에 대한 필요이상의 비판을 보는 것 같았다.

 

1. 적백내전의 책임은 레닌에게 있을까?

 

191710월 혁명이 성공하기가 무섭게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혁명 러시아를 분쇄하기 위해서 백군을 도와 적백내전을 일으켰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백군은 구 황제체제를 복원하고자 했다. 혁명 직후 볼셰비키가 이끄는 러시아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이런 상황은 트로츠키가 군대를 지휘하게 됨에 따라 군대의 규모와 군사력이 차츰 막강해졌고, 1920년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204월에서 5월쯤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사실상 승리했지만,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쳤다. 바로 극심한 대기근과 인플레이션이었다. 러시아의 경제는 원래부터 열악했다. 1914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가 참전하게 됨에 따라 가뜩이나 열악했던 경제는 더더욱 열악해졌다. 그 결과 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기가 무섭게 적백내전이 일어났다. 쉽게 말해 러시아 경제는 전쟁으로 인한 직격타를 2번이나 맞았던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의 경제는 상당히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기후가 안 좋아 농사짓기 힘들고 식량생산 자체가 매우 힘든 러시아는 결국 기근이 닥쳤다. 그 결과 수백만이 굶어 죽거나 굶주림에 허덕였다.

 

책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이러한 책임을 전적으로 레닌에게 묻는다. 서비스의 이러한 관점은 분명 올바른 관점이라 할 수 없다. 적백내전을 일으킨 건 황제체제 복원을 원했던 백군 세력과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따라서 적백내전과 대기근의 책임은 전적으로 백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있다. 1991년 걸프전쟁 이후 미국과 서방의 고립으로 100만 명이 아사했던 이라크 사태를 이라크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듯이, 전쟁과 굶주림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켰던 레닌과 볼셰비키들에게 전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2. 레닌과 볼셰비키의 폭력은 무자비 했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적백내전 시기 적군과 볼셰비키들이 보였던 폭력성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한다. 그것에 대한 비판은 일부분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 로버트 서비스는 단순히 레닌과 볼셰비키들에 대한 폭력만 강조한다. 그렇다면 적백내전 시기 볼셰비키가 가장 폭력적이었을까?

 

폭력은 그 자체로 정당화 될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 적백내전 시기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체카라는 정치경찰 조직을 만들었다. 체카의 임무는 반혁명세력과 테러예방 그리고 적백내전에서의 승리기여였다. 적백내전 시기 체카는 적잖은 무자비함을 보여줬고, 체카가 공식적으로 처형한 인원은 5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1918년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족을 몰살시킨 것도 체카였다. 그렇다면 왜 체카는 적잖은 무자비함과 잔인함을 보였던 걸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는 전시였고, 백군을 비롯한 반동세력들의 백색테러가 끊임없었다. 적백내전 승리에 기여했던 트로츠키는 타려던 마차가 폭발해 죽을 뻔한 적이 있었고, 레닌 또한 백색테러를 숱하게 당했다. 백색테러의 잔인함은 정말 엄청났다. 백군이 저지른 테러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얘기로 돌려 니콜라이 2세의 일가족 몰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첨언하자면, 니콜라이 2세는 죗값을 물어 루이16세처럼 당연히 죽었어야할 암군이었다. 물론 백군 옹호파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겠지만, 니콜라이 2세가 황제로 있으면서 그가 인민과 사회주의자들에게 행한 반혁명 반동적인 그의 행적을 생각해봤을 때 그의 죽음은 당연한 결과였다.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체카 창설은 백색테러에 맞서기 위한 안티테제로서의 역할이었다. 볼셰비키의 적색테러는 분명 잔인했고, 그들이 만든 체카라는 경찰조직 또한 테러를 일삼았으며, 레닌 또한 그러한 행위를 옹호했다. 그러나 테러와 학살 그리고 무자비함에 있어서 적백내전을 일으킨 백군이 적군보다 훨씬 심했고, 방법 또한 적군보다 더 잔인했다. 백군 쪽에 있던 운 게른 슈테른베르크만 보더라도 백군의 광기와 잔인함은 적군의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된다. 백군의 잔인함과 테러는 전혀 얘기치 않으면서 적군의 무자비함만 강조하는 로버트 서비스의 서술은 우익적이고 편향된 관점이다.

 

3. 3인터내셔녈에 대하여

 

3인터내셔널의 창설은 혁명 러시아 시기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업적중 하나다. 19141차 세계대전 당시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은 레닌에게 매우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10월 혁명에 성공시킨 레닌과 볼셰비키는 1919년 제3 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1919년 창설된 제3 인터내셔널은 국제혁명을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특히 1918년 독일 11월 혁명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독일사민당의 배신과 독일의 자유군단 같은 우익 반동 군대에 의해 봉기는 진압되고 위대한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망함에 따라 실패로 끝났다. 헝가리에서는 벨라 쿤이 이끄는 소비에트 혁명이 성공했다가 6개월 만에 체제전복 되는 일도 있었다.

 

유럽에서의 국제 사회주의 혁명은 참담했지만, 레닌은 포기하지 않고 국제혁명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 레닌과 볼셰비키의 영향은 아시아에도 끼쳤다. 당시 아시아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아래 있으면서 착취당했다. 중국, 조선, 베트남, 인도 그 외의 아시아 국가들이 그러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식민 지배를 당하는 나라들을 돕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 사상을 전파했다. 비록 레닌 사후 스탈린이 소련이 지배자가 되며 일국사회주의로 변질되었지만, 당시 지배받던 여러 아시아 국가들에게 혁명에 대한 희망과 사상을 전파했다.

 

비록 레닌 생전에 다른 나라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건설되는 일은 없었지만, 수많은 나라들이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부패한 자본주의 체제에 맞섰고, 불합리한 식민지 체제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이게 바로 제3인터내셔널의 최대 업적일 것이다.

 

4. 결론

 

이 책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생각했던 것 보다 다소 실망스러웠다. 특히 10월 혁명 이후 레닌에 대한 서술이 그렇다.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은 레닌의 개인사적인 얘기를 주로 초점을 두다보니 제3인터내셔널에 대한 서술이 매우 적었다. 로버트 서비스의 레닌 평전은 독일혁명에 대한 언급도 매우 짧게 했고, 3인터내셔널에 대해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 점이 가장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며 적잖은 분노를 느꼈던 파트는 레닌과 볼셰비키의 폭력성에 대한 서술이다. 그보다 더 잔인하고 민중의 지지도 받지 못한 백군 반동분자들의 만행은 전혀 언급치 않고, 오직 레닌과 볼셰비키의 잔인성만을 강조하는 서비스의 서술이 불편했다.

 

이러한 서술은 전형적인 우익들의 문제점이자 한계다. 그래도 이 책은 맹목적으로 레닌을 비판만 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10월 혁명 이전 레닌의 전반 생애를 잘 조명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선 이준구라는 이상한 수꼴이 쓴 레닌을 이겨야 나라가 산다나 네오콘 이론 창시자인 루돌프 럼멜의 레닌에 대한 서술에 비해선 보다 레닌에 대해 긍정적이고, 그나름 바람직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이 책을 무조건 불쏘시개라고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겐 이 책보단 다른 책들을 추천해주고 싶다. 인물전기로는 책갈피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 평전이나 박종철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을 회상하며를 추천하고, 같이 읽을 책으로선 레닌이 쓴 국가와 혁명과 아고라 출판사에서 출판한 레닌 전집시리즈를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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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리처드 오버리 지음, 류한수 옮김 / 지식의풍경 / 2003년 3월
평점 :
절판


 

 

지금으로 부터 73년전인 5월 9일 소련은 나치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련이 치른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약 4년간의 전쟁동안 2500만명의 소련사람이 전쟁에서 죽었다. 거기다 독소전쟁시기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사자 비율을 보면 소련군 희생자가 독일군 희생자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런 희생을 바탕으로 치른 전쟁이었기에 소련 사람들은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그 어떤국가들 보다 자신들이 승리한 날을 기념한다.

2차세계대전 종전 73주년을 맞아 오늘은 영국학자 리처드 오버리가 쓴 책인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 대해 리뷰를 남겨볼까 한다.

 

2차세계대전은 지금까지 일어났던 전쟁중에 가장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 그리고 수많은 국가들이 참전한 전쟁이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고 가장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던 곳이 동부전선이었다. 독소전쟁은1941년 6월22일 독일의 침공으로 시작되었다. 개전 초반기 독일군은 러시아 전역에서 진격했고 그해 12월 독일군은 모스크바 외각까지 진입했다. 모스크바를 점령 할 수 있었음에도 독일군은 점령하지 않았고 1942년에는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수많은 독일군과 소련군이 죽었지만 독일군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지 못했고 보급마저 끊기는 바람에 1943년 2월 파울루스 장군이 항복하면서 소련군의 승리로 끝이났다. 1943년 7월 독일군은 쿠르스크에서 대규모 전차를 동원해 반격했지만 소련군의 물량을 막지는 목했다.  1944년 1월에는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고 그해 6월부터 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서 8월말까지 소련군은 수많은 동유럽국가로 진군해나갔다. 1945년 4월 소련군은 드디어 독일국경을 넘었고 4월 30일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음으로서 파시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르고 가장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여 독일군을 몰아내는데 있어서 1등공신 역할을 했던 나라가 소련이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의 경우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 때문이라 얘기하지만 기본적으로 소련군이 매우 잘싸웠던 점도 있다. 1944년 6월 서방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8월 말 프랑스 파리를 해방했을때 소련군은 그 두달동안 엄청난 동유럽 전역에서 진격했고 수많은 동유럽국가를 해방시켰다. 이점만 보더라도 소련군이 서방 연합군 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리처드 오버리의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은 국내에 출판된 책중에 독소전쟁을 주제로 하는 몇 안되는 서적이다. 그렇기에 전승기념일인 오늘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고 싶다.

 

오늘따라 2년전 모스크바에 가서 참배했던 무명용사의 묘와 3일전 참가햇던 신도림역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행사가 유난히 더 생각이 난다. 오늘만큼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소련 병사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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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5-09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접 찍으신 사진이세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기념 행사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NamGiKim 2018-05-09 22:05   좋아요 1 | URL
네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처음 두장은 모스크바 크렘린 근처에 있는 무명용사의 묘에서 찍은거고 나머지는 올해 5월6일 한국에 사는 러시아 사람들이 신도림역에서 했던 기념행사입니다.^-^

북다이제스터 2018-05-09 22:09   좋아요 1 | URL
그들에게 그날이 얼마나 특별한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저도 <레닌그라드 전투> 란 책 읽고 몸서리치던 생각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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