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전집을 읽을 때면 작가 연표를 유심히 살피게 됐다. 거장들이 의미 있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쓴 것은 언제일까?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발표한게 53세였다.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을59세에 썼다. 스타인벡이 『불만의 겨울을 쓴 것도 59세였다.
- P281

무기력 상태에 빠져 3주가 넘도록 침대에 누워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쉰 냄새를 풍기며 그렇게 누워 지내다 외출을해야 할 때 겨우 일어나 몸을 씻었다. 내가 연기를 잘해서인지,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 상태를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남들이 나를 멀쩡한 사람 취급하는 게 어색했다. 이제 나는
"내가 소설을 쓸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심윤경 작가의 말을이해했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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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로 동물보호법을 만든 나라는 나치 독일이었고, 히틀러는 평생 개를 아낀 채식주의자였다. 이는 단순히 불쾌한우연이 아니다. 공감이 윤리의 지침이 되기에 얼마나 부적절한가를 웅변하는 강력한 증거다.
- P191

외국에 나갈 때마다 공항 서점에서 소설 코너만큼이나 넓은 논픽션 코너를 보며 혼자 부러워한다. 한국에서는 그 자리를 에세이가 차지하고 있다. 한국처럼 논픽션 소재가 넘쳐 나는 나라도 흔치 않을 텐데.
- P191

원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이성적 분석보다는감성적인 위로를 선호하는 정서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인들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데에도 서툰 것 같다고 말하면 너무 야박한 평가일까. 과거에는 에세이와 르포르타주 사이에체험기, 수기手記 같은 문학적 전통이 있었는데, 그나마도 흐릿해지는 듯하다.
- P192

의미를묻고 따지는 것은 나의 고약한 버릇이고, 읽고 쓰는 세계 거주자들의 운명인 것 같다. 그것은 힘이고 은총이며 고통이자저주다. 나는 이게 어느 정도 죽음이나 소멸과 관련이 있는문제가 아닐까 추측한다. 중력을 버티기 위해 골조를 세우는것처럼 시간을 버티고 싶어 의미를 구하는 것 아닐까.
- P200

말하고 듣는 사람들이 읽고 쓰는 사람들보다 현재를 더 많이 사는 것 같다. 읽고 쓰는 부류만이 수십 년, 수백 년 뒤를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을 놓치게 된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이라고 하던데, 그렇다면 읽고 쓰는 이들은 우울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대신에우리는 외로움을 덜 탄다고 할 수 있을까?
- P201

나도상을받았다.
‘지킬박사와하이드씨상‘.스튜디오에서와 온라인 독서 토론을 할 때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많은이중인격자들에게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 선정 사유
- P206

모차르트는 어마어마한 대히트곡들을 발표했지만 저작권개념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뢰를 받아 곡을 써주고 받는 돈과 공연 수입에 의존했다. 어째 인세가 아니라 기고 원고의 고료와 강연 수입에 기대야 하는 작가의 처지와 비슷하다. 교향곡이나 오페라 같은 대작 대신 모차르트가 수없이 써야 했던 무도회용 춤곡은 흔히 잡글‘ 이라고 낮춰 부르는 칼럼에 비할 수 있을까?

소설가나 음악가 개인뿐 아니라 팟캐스트라는 채널도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다. 사람이든 조직이는 홀로서지 못하면외풍에 시달린다. 그런데 의미 있는 수익을 거두는 채널은 극소수다. - P219

내 생각에는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같은 뉴미디어 기반 비즈니스는 다 상황이 비슷하다. 매체 영향력의 상당 부분은 내용보다는 그것들이 공짜고 접근성이 좋다는 데서 나온다. 진입 장벽이 낮으니까 복권 당첨 같은 성공담이 ‘당신도할 수 있다‘는 식으로 슬쩍 왜곡된다. 배너나 프로그램 앞에붙이는 영상처럼 눈에 띄는 광고로 얻는 수입은 대부분 미미하다. 어중간한 인지도로 돈을 벌려면 협찬이나 후원금 장사,
변형된 홈쇼핑에 기대야 한다.
- P220

나는 한국에서 이들 매체는 기본적으로 저예산 독립 미디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만드는 콘텐츠를 사랑하는 개인이돈에 대한 욕심보다 그저 그 일이 좋아서 꾸준히 시간을 바칠 때 제대로 굴러간다. 매체 소비자들 역시 콘텐츠의 품질에는 관대한 반면 운영자의 진심이나 태도 같은 문제에는 예민하다. 기업 논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환경이다.  - P220

세계문학전집의 작품 목록을 가끔 살핀다. 책 제목들을 보다 보면 작가나 작품이 세상과 사이가 좋지 않아야 거기에들어갈 확률이 높아지는 거 아닌가 자연스럽게 추론하게 된다. 『보바리 부인』과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발표 당시에 판매 금지되었다. 톨스토이도 판매 금지 처분을 받았다. 『동물농장』원고는 출판사 네 곳에서 거부당했다. 당시 영국 지식인 사회가 좌편향이어서 출판사들이 내용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 P227

『롤리타』는 프랑스에서 판매 금지되고 미국에서는출판사를 얻지 못했다. 스타인벡은 미국 여러 도서관에서 금지 대상이었고 쿤데라는 체코슬로바키아 전체에서 그랬다.
솔제니친은 소련에서 쫓겨났고 오르한 파묵은 터키에서 도망쳤다. 헤세는 스위스로 망명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오웰이 사망할 때까지 초판 1쇄가 다 팔리지 않았고 『위대한 개츠비』 는 피츠제럴드가 사망할 때까지 2쇄가 다 팔리지 않았다.
『폭풍의 언덕도』 『모비 딕』도 작가가 죽고 난 다음에 겨우 평가받았다. 이런 얘기는 몇 페이지고 더 쓸 수 있다.
- P227

읽고 쓰는 우리도 소통을 원한다. 그런데 말하고 듣는 세계의 거주자들과 달리 우리의 소통 대상은 현재에 있지만은 않다. 우리는 읽으며 과거와 대화한다. 우리는쓰면서 미래로 메시지를 보낸다. 그때 우리는 현재와 싸울 수밖에 없다. 지금의 상식 대부분을 고작 50년 전 사람들이 듣는다면 격분할 것이다. 같은 원리로 50년 뒤의 독자들에게 존중받으려면 우리 시대의 사람들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어야할 테다.
- P228

가끔은 내가 당대를 굉장히 못마땅해한다는 사실이 위안이 된다. 세상이 너무 좋고 아름답고 옳은 방향으로 제대로굴러간다고 보는 사람은 중요한 글은 못 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친구나 동료의 호감은 분명 더 많이 얻을 테지만, 불화의 근원을 탐구하려는 의지가 나의 연료다.  - P228

고전은 독자에게 얌전하게 교훈을 던져주지 않는다. 그들은 독자들이 피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시비를 건다. 자신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맞혀보라고 묻는다. 그것이 고전의 힘이다. 오이디푸스는 뭘 잘못한걸까? 햄릿은 미친 걸까? 덴비는 "고전은 사람을 기죽게 하는점령군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다시 또 독자와 싸우는, 길들지 않는 야수들의 왕국"이라고 평했다.
- P240

2019년 하반기에 나는 TV의 독서 프로그램에 패널로 출연하면서 카뮈의 『페스트』 도 다시 읽게 됐다. 20대에는 『페스트』를 『이방인』보다 훨씬 더 좋아했는데, 40대에 두 작품을다시 읽으니 이제는 『이방인』이 더 나아 보였다. 아무런 답없이 질문을 제기하는 『이방인』은 여전히 날이 시퍼렇게 서있었다.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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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긴 수사와 젠체하는 단어는 속임수일 가능성이 높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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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는 카메라 앞에 선 내게 "편하게 하시면 돼요"라고 했지만, 그 말은 아무리 들어도 절대 편해지지 않았다.
"지금 너무 거북목이에요. 턱을 좀 당기시고…… 작가님거북목 심하시네. 좋은 병원 소개해드릴까요….. 아, 지금은손이 별로예요…... 펜 그렇게 돌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 그 포즈? 생각 많이 하셨네."
특히 눈을 이미 뜨고 있는데 "자, 이제 눈 뜨세요"라고 말하면 몹시 곤혹스러웠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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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 이게 뭐라고?!>가 아니라 <책보다 여행>의 MC가됐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책, 이게 뭐라고?!〉가싫증났다든가 책보다 여행〉이 부럽다든가 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냥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날 그 술자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 그 교차로를 건넜더라면 뭐가 달라졌을까, 그때 김밥이 아니라 떡볶이를 먹었더라면 그는 내적이 아니라 친구가 됐을까… 그런 것들을, 내가 부둥켜안고 있는 이 삶의 모습이 실은 대부분 의도치 않았던 우연과가볍게 내린 선택에 의해 결정됐을 가능성을.
- P12

"내가 책보다 여행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면 이렇게 구박받으면서 방송할 일도 없었을 텐데."
어느 날 녹음을 마치고 내가 이렇게 말했더니 <책, 이게 뭐라고?!〉 팀원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졌다. "가버려요"와 "우리한테서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요?"
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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