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에게 책읽기는 자신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되는 길이다. 이를테면 행동이 앞서는 사람, 세기의 연인, 위대한 전사. 그에게 독서는 일종의 범신론, 스피노자가 관심을 가졌던 고대의 그 철학적 사상체계다. - P80
보르헤스가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한다. "범신론자들은 단 한 존재, 즉 신만이 거하는 세계를 상상했고, 신은 우리를 포함해서 세계의 모든 피조물을 꿈꾸는거야. 이 철학에서 우리는 신의 꿈인데, 우리는 그걸 몰라." 그런 다음 덧붙인다. 하지만 신은 자신의 작은 조각들이 지금 이 칼레 플로리다 거리를 따라 인파 속을 걸어가고 있다는 걸 알까?" - P80
"나는 아르헨티나 가톨릭과 정반대야." 그가 내게 말했다. "그들은 믿지만 관심은 없지. 그런데 나는 관심은 있는데 믿지는 않거든." - P84
그는 성 오거스틴이 기독교의 상징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한 걸 높이 평가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금욕주의자들의 원형 미로에서우리를 구해주었지." 그는 즐거운 목소리로 성 오거스틴을 인용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원형 미로가 더 좋아." - P84
종교나 철학 관련 책을 읽을 때조차 그의 관심은 문학적인 목소리였는데, 보르헤스에겐 그게 언제나 개인의 목소리여야 했고, 결코 국가나 단체, 또는 어떤 사상의 학파가아니었다. 그러면서 날짜도 이름도 국적도 없는 문학, 모든 글이 성령이라는 같은 영혼의 창작처럼 보이는 그런 문학을 갈망했던 발레리를 떠올렸다. "우리는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지 않아." 그는 불만을 토했다. "거기서 배우는 건 문학사야." - P84
1952년에 초판이 나온 유명한 텍스트에서 그는 "모든 작가는 자신만의 선구자를 창조한다"고 썼다. 이런 선언과 함께 그는 플라톤, 노발리스, 카프카, 쇼펜하우어, 레미 드 구르몽, 체스터턴으로이어지는 긴 계보의 작가들을 받아들였고, 이제 그들은 보르헤스의 아방 라 레트르 (avant la lettre), 즉 그보다 시대를 앞선 보르헤스 파(派)로 비춰진다.
심지어 모든 개인적 주장을 초월한 것처럼 보이는 작가들, 고전 중의 고전들도 피에르 메나르 이후의 세르반테스처럼 이제는 보르헤스의책읽기에 속한다. 보르헤스의 독자들에겐 셰익스피어와 단테마저도 가끔은 묘하게 보르헤스 같은 울림을 갖는다.
‘법에는 법으로 Measure for Measure 에 나오는 "죽음에 무심하고, 필사적으로 치명적인 존재에 대한 구절, 부온콘테가 "평원을 피로 적시며 맨발로 달아났다 (fugendo a pede esanguinando il piano)"고 설명하는 연옥 제5곡의 운문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보르헤스적이다. - P85
보르헤스 이후, 즉 실제로 문학작품에 제목을 붙이고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 독자라는 게 밝혀진 이후로는 문학이라는 것을 단순히 작가의 창작물로 여기는 게 불가능해졌다.
보르헤스에게 이런 작가의 죽음은 비극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그는 전복(顚覆)을 즐겼다.
"한번 상상해봐. 돈키호테를 추리소설처럼 읽는 거야. 나로서는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라만차라는 곳에..... 작가가 마을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어. 왜 그럴까? 대체 무슨 단서를 숨기고 있는 걸까? 추리소설의 독자라면 뭔가를 의심해야만 해. 안 그래?" 그러고 나서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 P87
『자연의 구분에 관한 고찰』을 쓴 이 작가는 어떤 글을읽는 방법은 그 글을 읽는 사람의 수만큼 많다고 했다. 독서의 이 무수함을 에리우게나는 공작의 꼬리 색에 비유했다. 보르헤스는 여러 글에서 이 공작 꼬리 분포의 법칙을탐구하고 개진했다. - P89
1926년부터 보르헤스의 비평가들은 온갖 이유를 들어 그를 비난했다. 아르헨티나 사람 같지 않다면서(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건 종교 행위"라고 빈정거렸다), 오스카 와일드처럼 예술의 무용론을 주장했다고, 설교나 교훈의 목적으로 문학을 활용하지 않았다고, 형이상학과 환상문학을지나치게 좋아한다고, 진실보다 흥미로운 가설을 선호한다고, 철학이나 종교적 사상들을 미적인 가치로 따진다고, 정치에 참여하지 않거나(페론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강경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정의롭지 않은 세력을 묵인한다고[비델라, 피노체트 등과 악수를 했을 때 이런 비난이 들끓었는데, 후에 그는 자신의 행동을사과했고 데스파레시도스(desaparecidos), 즉 군부독제 치하에서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을 위한 탄원서에 서명했다. 이유도 참 다양했다.
그는 이런 비난들을 자신의 견해("작가의 가장 사소한 측면)와정치("인간의 가장 비천한 행위")에 대한 공격이라며 무시해버렸다. 그는 히틀러나 페론을 옹호했다는 이유로는 아무도 자신을 비난할 수 없다고 말했다. - P90
보르헤스에 의하면, 페론이 권력을 잡은 1946년 이후 공무원이 되려면 누구든 페론파 정당에 가입해야 했다고 한다. 보르헤스는 그걸 거부했고, 자그마한 시립 도서관의 보조사서에서 동네 시장의 가금류 검사관으로 발령이 났다. 다른 사람들 말을 듣자니 타격은 덜하지만 어처구니없기로는 마찬가지였던 시립 양봉학교로의 전출도 있었다. - P91
아무튼 보르헤스는 사표를 던졌다. 1938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보르헤스 모자의 생계는 전적으로 그의 사서 월급에 의존했고, 이제 직장을 그만뒀으니 생활비를 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수줍음을 무릅쓰고 강연을 시작했고, 지금까지 활용하는 강연용 목소리와 스타일을 개발했다. - P91
오스틴,괴테,라블레, 플로베르(『부바르와 페퀴셰 Bonuard et Pecruchet, 첫 장은 제외), 칼데론, 스탕달, 츠바이크, 모파상, 보카치오, 프루스트, 졸라, 발자크, 갈도스, 러브크라프트, 에디스 와튼, 네루다. 알레호 카르펜티에르, 토마스 만, 가르시아 마르케스, 아마도, 톨스토이, 로페 드 베가, 로르카, 피란델로…보르헤스가 거부한 작가만으로도 문학사의 한 흐름을 구성할수 있을 정도다.
(오스틴,츠바이크,프루스트,톨스토이!!!헐) - P93
그는 젊어서 실험을 한 후로는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작가가 무례하게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문학에서 그는 경이로우면서도 자명한 결론을 추구했다. 신기한 것들에 지친 율리시즈가 푸르른 고향 이타카가 시야에 들어오자 사랑을 그리며울었던 걸 떠올리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예술은 바로 그 이타카 같은 것이어야 해. 신기한 게 아니라 푸르른 영원함을 지닌 곳." - P93
"불멸을 열망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지 않아, 응?" 보르헤스의 경우에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은 그의 작품과원고, 자신의 우주를 만들어낸 그것들이고, 그렇기 때문에존재의 영속을 갈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주제와 낱말과 글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어. 그러니까아무것도 결코 사라지지 않아. 만약에 어떤 책이 없어진다면 누군가 언젠가는 그것에 대해 글을 쓸 거야. 그 정도면누구라도 충분하다고 여길 만한 불멸이잖아." - P97
세계를 한 권의 책에 담아내려는 작가들이 있다. 그런가하면 그보다 드물기는 하지만 세계가 한 권의 책이어서 본인과 다른 이들을 위해 그 책을 읽으려는 작가들도 있다.
보르헤스가 바로 그런 작가였다. 그는 희박한 가능성에도불구하고 우리의 도덕적 의무는 행복이라고 믿었고, 비록어째서 그런지 설명하지는 못했어도 그 행복을 책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책이 우리에게 행복의 가능성을안겨준다고 믿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그 소박한 기적에 진심으로 감사해." - P97
<보르헤스 어록>
갖는다는 것: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지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분명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가령, 어금니 통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과 병에걸리는 것은 어금니 통증의 또 다른 형태이다. - P143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반공주의자가 되는 것이 파시스트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가톨릭인이 아니면 모르몬교도라고 말하는 것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다. - P142
교리: 예술이 특정 교리를 선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런 교리와 반대되는 교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 P143
나: 내 모든 작품은 자전적이다. 나는 디킨스처럼 작중 인물을 고안하지 않는다. 유일한 작중 인물은 바로 나이다. - P144
데카르트 학파(합리주의): 나는 데카르트의 정확성이 분명하면서도 허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논리적인 생각에서 출발하지만, 결국은 가톨릭의 믿음처럼 이상한 것에 도달하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엄격한 논리에서출발하여 바티칸에 이르고 있다.
도서관: 도서관을 정리하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비평을 하는행위다. - P145
루소: 『에밀은 참을 수 없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 처음부터끝까지 어린아이의 교육에 바탕을 두고 있다. 도대체 누가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 P147
무용(無用): 나는 기린의 목이 너무 길다고 불평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기린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다. - P148
무인도: 사람들에게 무인도로 가져갈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돈키호테』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20일간의휴가를 갖게 되면, 그들은 아무 책도 가져가지 않는다. - P148
민주주의: 매우 널리 유포된 미신, 통계의 남용. - P149
베스트셀러: 내가 글을 쓰던 당시에는 베스트셀러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타락할 수가 없었다. 또한 우리의 타락(몸 파는 행위)을 돈을 주고 살 사람도 없었다. - P150
보르헤스: 사람들은 나를 위대한 작가라고 말한다. 이런흥미로운 의견에 나는 고마움을 표하고 싶지만 동조하지는 않는다. 내일 어떤 유능한 사람들은 그런 의견을 거부할 것이고, 나를 사기꾼이나 엉터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난 명성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덧없는 것이기때문이다. - P150
복수: 복수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며, 잔인하고 황당한것이다. 진정한 복수는 망각과 용서이다. - P151
부모: 자식들이 부모에게 지켜야 할 의무는 행복하게 사는것이다. 부모의 말을 듣거나 부모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P151
사건: 과일로 나무를 평가해서도 안 되고, 작품으로 인간을평가해서도 안 된다. 이미 스티븐슨은 어떤 사람이 살인을했어도 살인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사건은 우리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다. - P152
선택된 백성: 난 이스라엘을 두 번 여행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이 거의 히틀러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일한 차이는 그들이 독일 종족이 아닌 유대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독일 나치의 ‘선택된 백성‘ 이나 히브리인들의 선택된 백성‘은 다른 것이 아니다. 히틀러는독일 나치 사상을 바로 성경에서 차용했던 것이다.
(헐2.....) - P153
어머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모든 자식들은 달이나 태양이나 계절을 받아들이듯이 어머니를 받아들였음을 알게되고, 어머니를 마구 대했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하지만그 전에는 아무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 P155
예술: 각자가 자신의 사원을 건설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런데 왜 자기의 것이 아닌 고대의 예술 작품을 이해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 P156
유산(流産): 유산은 셰익스피어가 될 가능성을 파괴한다. 그것은 맥베스가 될 가능성도 파괴한다. - P157
조합: 군인이 군인에게 심판 받는다는 사실은 불합리하다. 가령 도둑이 도둑을 심판하고, 치과의사가 치과의사를 심판한다고 생각해보라. - P160
존경: 범죄는 존경할 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죄를 실행에 옮기는 용기는 존경할 만하다. 어쨌든 비겁은 절대로존경받을 수 없는 것이며,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 P160
천사:
기자들이 나를 찾아와 흔히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나는 아무런 메시지도 갖고있지 않다고 대답한다. 그리스어로 천사는 메신저‘ 라는뜻이다. 그러므로 메시지는 천사들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천사가 아니다. - P161
확장: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소우주는 눈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인 것이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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