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엽기적인 친구가 고액 알바비를 챙길 수 있다며 시체닦기를 하자고 한 적이 있었다. 물론 하지 않았는데 어린 마음에 상당히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그 친구는 보통 소주를 마시고 '그 일'을 한다고도 했다. '그 일을 하기 위해 소주를 마신다면 아주 꽐라가 될 정도로 마셔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시체 옆에서 잠들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을까' 뭐 이정도 의문을 가지고 안될 일로 덮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더 쉽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최근에 영화 '제인도'를 보고 이 일이 또 떠올랐다. 어쩌면 고액 알바비만 가지고 오는게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다른 것도 따라 올수 ...ㅠ)그냥 알 던 사람이 죽어도 보통은 마음이 복잡해진다. 죽음이란 그렇듯 삶에서 예외적이고 '의미심장한' 일에 속한다. *제인도(Jane Doe):신원미상의 여자. 영화에서는 신원미상의 시체.
p.24 나는 법의학자로서 월요일마다 검시를 한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에는 일주일에 두 번 그리고 일요일에도 부검을 했으나 힘이 부치기 시작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 검시를 하게 되었다.
한동안 즐겨보던 '그것이 알고 싶다'나 '궁금한 이야기 Y'같은 탐사 보도 에서 그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소주를 마시고 해야한다는 낭설이 있을 정도로(낭설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을 단순히 시신을 닦는 것도 아니고 ㅡ타살과 의문사의 경우에 시체를 ㅡ 부검하기도 하는 법의학자들. 그들은 여러 사정으로 인해 죽음의 이유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자들의 미스테리를 파헤친다.
최근 갈 수록 뉴스에서 눈에 띄는 영아 살인이나 학대로 인한 아동사망 사건, 한 때 내가 경악했던 초등생을 향한 염산테러사건, 만삭 임산부 아내를 살해한 의사 등 법적 공방에 놓인 각종 의문사에는 아무래도 법의학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경찰수사나 검찰수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증거를 얻어 상황을 뒤집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언론을 떠들석하게 했던 다양한 사례들도 담겨 있어 좀 더 자세한 당시 의혹과 진행상황을 알 수 있었다.
P.83 만삭의 임신부가 자신의 집 욕조에서 쓰러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남편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다.(중략)그러다 레지던트 4년차 마지막에 전문의 시험을 위해 환자를 보지 않는 암묵적인 휴가 기간에 들어서자 그는 컴퓨터 게임에 빠져들었다.
특히 이 사건은 일명 '그알'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보고 상당히 놀랐고 무서웠던 기억이 있다. 뒤늦게 '성범죄수사대'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안타깝게도 여성이 살해당할 경우 보통 남편이나 남자친구가 범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이 사람은 자기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살해하고도 방송 당시만해도 그 사실을 부인했었다. 이 책에 따르면 법적 공방이 이어지자 이 남편은 캐나다 법의학자 마이클 스벤폴라넨을 재판에 참여시킨다. 1996년 비슷한 사건으로 스위스 법의학자가 국내 법의학자를 패퇴시킨 일도 있었던 것이다.
P.50 1년에 두 번씩 개최하는 학회에 참석할 때도 법의학자들은 절대 함께 움직이지않는다. 혹시 같은 고속버스를 타고 가다가 만약 사고라도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혹시 사고가 발생해 한꺼번에 죽는 일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우리나라 법의학자가 전멸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 포함된 진담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되도록 함께 이동하지 않고 개인적으로흩어져서 각자의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모인다.
이렇게 누군가의 억울한 죽음을 알아내는 중요한 일임에도 우리나라에 법의학자는 40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병원과 약국은 상당히 많은 편인데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의사 수,인기분야에 편중된 의사들을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법의학자들은 학회 참석때도 함께 움직이지 않는 등 이런 웃지못할 상황에 놓인 것이다.
이 책은 그밖에도 법의학에 관련된 기초 상식들, 각 사망 사건들과의 사회적 관계,자살과 연명의료,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에 대한 문화적 변화와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그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부분은 각종 통계자료였는데 자살률1위를 기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의외로 청소년 자살률은 핀란드보다도 낮은 편이고 상당수가 노인(특히 남자)과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또한 미국의 경우 뉴욕 같은 대도시 보다는 외진 지역에서 자살률이 훨씬 높고 국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서울의 자살률이 가장 낮다고 한다. 그리고 자살시도를 했던 사람들 중 생존한 60프로 이상이 자살 시도를 후회한다고 한다니 각자가 주변에 좀 더 관심을 갖는다면 자살은 막을 수 있는 사회적 문제인듯 하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 물론 과학이 좀 더 발전한 미래에는 '죽음'이란 것도 극복 가능한 문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 모두에게 있을 '끝'에 관해 좀 더 열린 마음으로 고민하고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삶은 죽음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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